성유리는 돌아와서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고 예외 없이 악몽을 꾸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베개가 상당 부분 젖어 있었고 날은 이미 밝아진 뒤였다.성유리는 한참을 침대에 앉아 있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메시지와 전화가 폭주하듯 쏟아질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었다.인터넷 뉴스는 물론이고 주변 지인들의 연락도 전혀 없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원유진이 이 일을 알았다면 분명 당장 달려와서 실컷 조롱하고 막말을 해댔을 텐데 그녀조차도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뉴스가 막혔다는 뜻이다.그리고 이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단번에 떠올랐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그 생각을 차단해 버렸다.어차피... 그럴 리가 없으니까.하지만 성유리는 그 말고는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그 후에도 한동안 성유리는 비슷한 뉴스에 계속 관심을 기울였지만 자신에 대한 가십 대신 진무열이 성유정과 약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이 소식을 접한 성유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미 성씨 집안을 나왔으니 그쪽에서 정략결혼을 계속 원한다면 남은 건 성유정뿐이었다.진씨 집안에서도 정략결혼에 대한 소식을 내비친 적이 있었기에 그 둘의 결합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접한 소식이라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효주가 인쇄소에서 이미 책을 인쇄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성유리의 지난번 작품은 잘렸지만 앞선 두 작품의 출간 계획은 계속 진행 중이었고 책을 보낸 후에도 사인을 해야 했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배달 음식을 주문하려는데 진무열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의 이름이 뜨자 성유리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지난번 단호하게 그의 고백을 거절했던 이후로 둘은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사실 성유리는 가능하다면 여전히 그와 친구로 지내고 싶었지만 진무열은 그러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성유리가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전화는 알아서 끊겼고 성유리는 괜스
진무열은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덧붙였다.“들었어? 나 너희 집이랑 약혼해.”성유리는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려다가 그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포크를 다시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성유정이랑.”성유리는 대답했다.“알아.”“넌 이제 성씨 집안과 인연 끊었다며?”진무열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사실 그게 아니었다면 내 정략결혼 상대가 너였을 수도 있어.”지금 진무열이 짓는 미소는 진짜였다.다만 아무리 애를 써도 눈마저 속일 수 없었던 미소는 그저 씁쓸하게 입가에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원하지 않으면 가서 얘기해도 돼...”진무열은 고개를 저었다.“어떻게든 날 이용해 먹으려고 데려온 사람들이야. 그거 알아? 스무날 넘게 내가 만난 사람만 열댓 명이야.”“이용?” 성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네가 정말 정략결혼에 성공하면 그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진무열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너 아직 모르지?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로 진무혁은 불구가 됐어. 이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그러니 내가 말한 이용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성유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룸 안의 분위기도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아마 오늘이 우리 둘만 식사하는 마지막이 될 것 같아.”진무열이 다시 잔을 들었다.“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얘기할게. 축하해, 드디어 그곳에서 벗어나서 그 사람들과 엮이지 않게 됐잖아.”성유리도 별다른 말 없이 잔을 들어 그와 술잔을 부딪쳤다.“고마워.”...한편 성유정 역시 레스토랑에 있었고 휴대폰의 시간은 이미 8시 30분이 지났지만 맞은편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웨이터가 음식을 데워주러 세 번째 들어왔을 때 성유정은 마침내 당황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하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이미 룸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을 본 성유정의 눈이 반짝거렸다.“한빈 오빠!”짧게 대꾸한 박한빈은 자기 손을 잡으려는
박한빈이 직설적으로 묻자 성유정은 오히려 머뭇거렸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치마 끝을 만지작거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학교 다닐 때는... 언니랑 아주 친한 사이였어.”박한빈은 말이 없었고 성유정은 그가 오해할까 봐 두려운 듯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근데 진무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 가면서 언니랑 아마... 아무 사이는 아니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이랑 약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오빠,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나쁜 걸까? 분명 우리 집에 내가 필요한 건 알지만 난...”말을 이어가던 성유정의 눈시울이 갑자기 다시 붉어졌다.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무슨 생각인지 시선만 바닥으로 보내고 있었다.성유정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한빈 오빠, 저번에... 우리 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 나... 난 지금 결혼하고 싶지 않은데 나 좀 도와줄 수 있어?”그 말과 함께 성유정이 손을 내밀어 박한빈의 소매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타이밍을 아주 잘 잡은 그녀는 벨 소리가 울리자 놀란 듯 재빨리 손을 거두더니 허둥지둥 전화를 받았다.“뭐라고?”성유정이 언성을 높이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홱 돌아보았다.“내... 내가 지금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성유정의 시선이 다시 박한빈에게 향했다.“미안해 한빈 오빠, 나... 나 먼저 갈게.”“무슨 일이야?” 박한빈이 느긋한 목소리로 묻자 성유정은 이를 꽉 깨물고 속으로 한참을 망설이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유진이가 진무열을 봤다는데... 여자랑 호텔로 갔대. 나 가봐야겠어.”“그래, 누구랑?”박한빈이 계속해서 물었고 무심한 듯 들리는 말투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묻어났다.“그게...” 성유정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듯 눈을 내리깔고 이를 꽉 깨물었다.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유진이 말로는... 우리 언니 같대.”...“유정아, 여기야!”성유정이 막 호텔에 들어왔을 때 원유진이 그녀를 끌고
“손님, 일단 진정하시고 다른 곳으로 가서 제대로...”직원이 필사적으로 원유진을 막는 순간 갑자기 눈앞의 문이 열렸고 정말 안에는 성유리가 있었다.머리는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약간 홍조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그래, 역시 여기 있었네! 바람난 남자는 어디 있어? 진무열도 안에 있지? 내가 들어가서...”성유리는 원유진을 무시한 채 성큼성큼 성유정에게 다가갔고 재빠른 그녀의 움직임에 성유정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손에 든 휴대폰을 빼앗겼다.“언니...”성유정이 입을 열자마자 성유리는 방금 녹화한 영상을 삭제한 뒤 휴대폰을 바닥에 내리쳤다!“뭐 하는 거야?”들어가서 진무열을 찾으려 했던 원유진은 이 상황을 보고 성유정을 보호하려고 바로 달려들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들에게 조금도 기회를 주지 않았고 손을 들어 성유정의 뺨을 내리쳤다.“유정아!”원유진은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성유리 이 나쁜 년! 미친년! 어떻게 감히 사람을 때릴 수 있어? 네가...”“당신 바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남이 총알받이로 쓰는 것도 모르고 나서서 방패를 자처해?”“뭐라고?”원유진은 순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춰 섰고 성유리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뒤돌아섰다.“거기 서! 성유리, 똑바로 말해!”원유진이 쫓아가려는데 뒤에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제지했다.“아가씨, 진정하세요...”성유리는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이미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조금 전 칼로 자기 팔을 세게 긋지 않았다면 성유정 일행을 상대할 수도 없었을 거다.하지만 고통으로 정신을 차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고 무언가가 뼈를 갉아 먹는 것 같았으며 다리가 떨리기 시작해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조금씩 앞으로 굽혔다.“아가씨, 도움 필요해요?”로비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말했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다 문 앞에 주차된 낯익은
성유리가 몸을 일으킨 뒤 고개를 들어 남자의 입술에 키스하려는데 박한빈이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입술을 피했다.성유리의 몸이 약간 경직되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혀끝을 내밀어 박한빈의 목울대를 핥았다.박한빈의 몸이 움찔하더니 곧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성유리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머리카락이 흩어진 채 나른한 모습을 보니 비 오는 밤에 버려진 힘없는 새끼 고양이 같았다.박한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벨트를 풀었다.그녀를 말리려는데 성유리의 휴대폰이 빠르게 울렸고 슬쩍 시선을 돌리자 액정 위에 뜨는 이름이 단번에 시야에 들어왔다.진무열.익숙한 소리에 조금 정신을 차린 성유리의 몸이 살짝 흔들리더니 턱을 그러쥐고 있는 그의 손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휴대폰에 손을 뻗으려 했다.그런데 박한빈의 손이 곧바로 거칠게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며 단번에 그녀의 입술로 파고들었다.몸의 열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녀의 입술은 박한빈의 키스로 고통에서 해방된 듯했고 성유리는 조금 전 통화도 잊은 채 그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싸며 화답했다.차 안 칸막이가 올라가면서 공간이 한층 더 비좁아졌고 온도는 금세 위로 치솟았다.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은 채 귓가엔 두 사람이 주고받는 거친 호흡 소리와 자신의 격렬한 심장 박동 소리만 들릴 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지속되는 약효에 성유리는 곧 키스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박한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가져오더니 다소 차가운 그의 손끝으로 열기를 식히려 했다.박한빈은 손을 빼지 않았다.2년 동안 부부로 지냈기 때문에 성유리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성유리의 숨결이 점점 더 거칠어지며 손끝이 그의 목과 팔을 거듭 맴돌았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을 녹이진 못했다.“박한빈 씨...”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을 터뜨렸다.그 나른한 모습이 마치 과거로
나중에 성유리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도착했는지 알지 못했다.그녀의 세계에 오직 박한빈이라는 존재만 남은 듯 떨어질 수도 없다는 듯이 그에게 매달려 그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취하도록 내버려두었다.이성을 버리고 본능에만 몸을 맡긴 대가로 다음날 그녀는 깨어났을 때 거대한 차에 짓눌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목구멍은 타들어 가듯 갈증이 일었고 살짝 몸을 움직이기 바쁘게 다리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어쩔 수 없이 끙끙대며 침대에 누워 한참을 쉬다가 겨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곳은 낯설었다.그녀가 지내는 작은 월셋집도, 도연제도 아니었다.박한빈이 금성에 수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 또한 놀랍지도 않았다.성유리는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허리를 굽혀 옷을 주운 다음 최대한 천천히 입었다.그녀가 방에서 나왔을 때 휴대폰도 켜졌고 거기에는 수많은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성유리가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일어났어?”성유리의 발걸음이 멈췄다!그 순간 성유리는 서서히 온몸의 피가 얼어붙으며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이 다른 방문 앞에 선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직... 안 갔어요?”성유리는 입을 열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쉬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순간 어젯밤 화면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얘기 좀 해.”말하며 박한빈이 그녀를 지나쳐 거실 쪽으로 향했고 성유리는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어젯밤 실수로 마시면 안 되는 술을 마셨을 뿐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건 아니었기에 자신과 박한빈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그랬기에 지금 더더욱 어떻게 그의 얼굴을 봐야 할지 막막해서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의 맞은편 좌석에 앉은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어젯밤에 진무열이
“응, 만족해.”박한빈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그럼 이제 가도 되죠?”그 말과 함께 성유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곧바로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 너 약에 취했다고 해서 어젯밤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한 채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단 몇 초 만에 성유리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그녀에게 어떤 대가를 원하는 걸까, 이걸 빌미로 협박하려는 걸까?아니면 단순히...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는 변명일까?마지막 생각이 떠올랐을 때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잠재우려 했지만 그 전에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양어머니 병원에 계시지?”“뭐 하려고요?”성유리의 표정이 확 바뀌며 분노와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슬쩍 볼 뿐이었다.“내가 더 좋은 병원에 모실 수도 있어. 병원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책임질게.”“당신... 그게 무슨 뜻이에요?”“무슨 뜻일 것 같은데?”“제 생각엔... 박 대표님처럼 고귀하신 분한텐 제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말하는 성유리의 목소리가 씁쓸했고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가볍게 두 번 돌린 뒤 다시 말했다.“그래도 우리가 잘 맞는 부분은 있잖아.”그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했고 그가 말하는 잘 맞는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한참이 걸렸다.순간 그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박 대표님은 지화그룹 대표이고 금성에서 알아주는 귀한 분이니 마음만 먹으면 알아서 달려오는 여자가 수두룩한데 왜 하필... 저와 엮이려는 거죠?”“알고 있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잠시 멈칫했다.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네 눈에는 나랑 그 절름발이 조경우, 바깥에서 데려온 잡종 진무열이 별반 다를 게 없는 줄 알았지.”성유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어떠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를 꽉 깨문 성유리의 목소리가 극도로 갈라져 있었다.성유리는 그동안 이미 그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스스로 과대평가를 한 것이었다.이제 성씨 집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만이 몇 마디 말만 해도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그녀의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것 같았다.박한빈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응시하다가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억울해? 그럼 이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다른 남자랑 맞선 보는 건 얼마나 고고한 행위지?”성유리가 말하지 않자 박한빈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그리고, 어젯밤에 내 침대에 먼저 기어오른 건 너야. 그땐 왜 천박하다는 생각 안 했어?”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조롱하는 듯한 표정이 꼭 성유리의 뺨을 손으로 때린 것 같았다.성유리는 이를 악물었지만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은 점점 느슨해졌다.박한빈은 그녀와 빙빙 말을 주고받을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성유리, 사실 너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이 말을 남기고 그가 걸음을 옮겨 앞으로 가려는 순간 뒤에서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기간은요?”박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그가 고개를 돌리자 성유리도 마침 고개를 들었다.이미 눈꼬리는 빨개져 있었고 입술은 깨물어 피가 나는데도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 자신을 바라보던 촉촉한 눈동자가 떠올라 목울대가 꿈틀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2년으로 하자.”성유리는 더욱 이를 꽉 물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박한빈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어디 가는 거야?”“제집으로 가야죠.”대답을 마친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오늘은 내가 필요 없죠? 필요할 때 올게요.”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그녀의 마음은 한결 진정된 상태였고 사무적인 어투는 둘 사이의 일을 완전히 거래 취급하고 있었다.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성유
잠시 망설이던 하늘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연정우는 성유리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연정우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기에 다소 서툴렀지만 하늘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고 머리를 말리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성유리는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이 장면이 너무나 따뜻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정우가 바로 자신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그래서 연정우를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휴대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조명이 비추는 아래에서 연정우는 다정하게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고 하늘이는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사진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처럼 보였다.성유리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가 내일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반죽은 이미 미리 만들어 두었기에 이제 고기소를 넣고 찜기에서 찌기만 하면 되었다.성유리가 이렇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이유는 하늘이가 달걀노른자에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외부에서 파는 만두에는 대부분 달걀물이 들어가 있어서 하늘이를 위해 성유리는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원래 성유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평소에 잠자리에 들 때 늘 엄마를 찾곤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방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도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성유리가 하늘이 방으로 향하려 하는 순간, 연정우가 아이의 방에서 나왔다.“하늘이 잠들었어.”연정우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자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뭐라고?”“방금 잠들었다고.”연정우는 웃으며 말했다.“책을 조금 읽어줬더니 졸린다고 하더니 바로 잠들었어.”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이 믿기지 않아 방을 열어 직접 확인해 보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이는 정말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아까 너무 많이 놀아
연정우는 할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반면 성유리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긴장한 듯 주먹을 더 꽉 쥐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손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성유리는 놀란 듯 연정우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그 순간, 연정우는 그것만으로도 성유리에게 다가갈 더 큰 용기를 얻은 듯했다.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한 연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그녀에게 조금씩 가까이 대기 시작할 무렵.“엄마!”집안을 울리는 하늘이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고 그 소리는 마치 번개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았다,성유리는 깜짝 놀라 연정우를 급히 밀쳐버렸고 너무 갑작스러운 힘에 연정우는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 있던 찬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쾅!맑은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고 성유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바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 미안해. 정말 괜찮아?”“응.”연정우는 걱정하는 성유리에게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 별로 안 아팠어.”그의 말에도 성유리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었다.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늘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 둘이 지금 뭐 하고 있었어?”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의 존재를 떠올리고 아이를 향해 돌아서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늘이는 무슨 일 있었어?”“아저씨가 준 인형 어떻게 말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어.”하늘이는 말하면서 손을 뻗어 연정우의 손을 잡아끌었고 연정우는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아이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향했다.혼자 주방에 남은 성유리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연정우의 여행 가방은 여전히 현관에 놓여 있었다.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아저씨, 오늘 밤 여기서 주무실 거예요?”연정우는 아이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행동에 연정우는 제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왜? 나 많이 보고 싶었어?”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웠지만 어딘가 우울한 듯한 느낌이 숨겨지지 않았다.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잠시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연정우는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망설이던 성유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먼저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 많이 힘들어?”“그냥 좀 바빴어.”“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니고?”성유리는 지금 연정우에게 질문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확신에 찬 뉘앙스가 그득히 섞여 있었다.연정우는 성유리의 물음에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 듯했으나 금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걱정 마. 별일 아니야. 다 해결됐어.”그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하늘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넌? 요즘 잘 지냈어?”하늘이는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잘 지냈어요.”“그럼 됐어. 내가 하늘이 줄 선물 사 왔는데 뭔지 보고 싶어?”선물이라는 말에 하늘이는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연정우가 선물을 줄 때는 다소 어색해하던 하늘이도 이후 연정우가 선물을 고르는 순간이 더 즐겁다고 말한 뒤로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이번에도 하늘이는 연정우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성유리는 얼른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연정우는 여행 가방을 현관에 두 따로 준비한 가방을 열어 하늘이에게 준비한 선물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약 30cm 크기의 인형이 들어 있었다.성유리는 한눈에 그 인형이 유명 영화의 협업 한정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티나게 팔린 인형은 이곳 경운시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제품이었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연정우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하늘이는 이런 거 잘 몰라. 굳이 비싼 거 살 필요 없어. 그냥 간단한 걸로도 괜찮아.”“이
그날 밤 연정우는 끝내 식사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 날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에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이를 본 사하나는 화가 난 듯 연정우를 나무라며 몇 마디 욕설까지 퍼부었다.“괜찮아. 아마... 무슨 중요한 일이 있겠지.”“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언니랑 하늘이를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나중에 꼭 연정우 씨한테 한마디 해야겠어요.”사하나는 말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화가 나 있는 사하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무슨 문제요?”사하나가 되물었다.“글쎄 지금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사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듣지도 못했는데요? 언니 혹시 무슨 얘기 들으신 거 있으세요?”“아니. 그냥... 걱정돼서.”“뭐가 걱정되는데요?”긴장 탓에 경직돼 있던 사하나는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연정우 대표님 회사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잖아요. 대기업이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꽤 단단해진 상태예요. 그러니까 별일은 없을 거고요.”“저도 아무 얘기 못 들었으니까 괜히 걱정하지 마세요.”사하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겨우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사하나는 원래 화를 빨리 내고 빨리 풀리는 다혈질이었다.성유리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연정우를 욕하겠다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하늘이와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차 안은 다시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왔다.요즘 사하나는 집안 회사 일을 물려받느라 바빴기 때문에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 터미널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떠나버렸다.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짐을 부치고 안전 점검까지 마친 후,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는 연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하나 씨가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줬어. 지금 대기 중이야.]하지만 연정우는 평소와 다르게 바로 답장
사실 오늘 성유리는 연정우와 함께 김난희의 빈소를 찾을 예정이 아니었다.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성유리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그의 전처의 신분으로 장례식을 찾는 것만으로 이미 민망한 상황인데 연정우까지 함께 간다면 박씨 가문에게 수치를 안겨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우는 누구한테서 성유리의 일정을 전해 들은 건지 몰래 따라왔고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렸다.연정우는 자신 또한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으니 성유리는 그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연정우도 아예 성유리를 만날 것을 예상치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차 안에서 연정우는 이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를 꺼냈고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연정우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사실 나도 꼭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어. 그냥... 너 혼자 오면 위험할까 봐. 그리고 혹시 어색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오려고 한 거였어.”연정우의 핑계는 누가 들어도 거짓이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그를 들춰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래서 아까 박한빈 씨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건데?”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물었다.“별거 아니야. 그냥 흔한 말들이었어.”성유리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고 연정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려던 말들을 꾹 삼키기로 했다.‘이런 상태로 말하면 안 돼.’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게 있어 과거로 남은 사람이었으니 연정우는 그녀 앞에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혹시나 박한빈을 잊고 살던 성유리가 자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까 봐 말이다.하지만 연정우는 쉽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일을 겪은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성유리는 전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는
사실 박한빈도 안다.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이미 성유리의 입에서 직접 답을 들은 상황이니 더더욱 물을 필요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그래도 묻고 싶었다.박한빈은 지금 마치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어른의 다리를 부여잡고 몇 번이나 답을 알려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한번, 또 한 번 자신이 사랑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증명받고 싶었고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랐다.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멈칫하더니 비웃듯 웃으며 물었다.“그래서 이게 바로 형님이 저한테 연락한 이유인가요?”박한빈은 침묵했지만 박세빈은 그 침묵 속에서 정답을 알아차렸다. 정신이 나간 듯 깔깔 웃던 박세빈은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했고 이내 말을 이어갔다.“형님은 뭐인 것 같습니까? 설마 그때 성유리 씨가 형님이랑 이혼한 게 제가 협박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나요?”“박한빈 씨, 제대로 된 답을 알려드리죠. 사실 그때 저희는 아주 간단한 대화만 나눴습니다.”박세빈은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하늘이 맞죠? 제가 아이 이름을 한 번 말하니까 바로 제 의도를 알아차리더군요. 그러더니 당장 떠나겠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솔직히 말하면 다른 일도 이용해 협박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습니다.”“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형님은 성유리 씨에게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박한빈 씨, 형님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형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다 형님의 돈과 권력을 보고 접근한 것 아닌가요? 그 누구도 진심으로...”박세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전화를 끊어버렸다.답. 그토록 듣고 싶었던 정답은 박한빈이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를 점이 없었다.우스운 건 박한빈이 스스로 성유리의 선택에 대한 이유도 다 지어내고 확신했지만 그녀가 말한 것과 똑같다는 점이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를 속일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박한빈에게 물었다.아무 대답 없는 박한빈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성유리는 그의 침묵이 곧 수긍이라고 생각해 뒤돌아 떠나버렸다.박한빈은 전혀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떠나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던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세빈 쪽에 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박 대표님, 깨어났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박한빈은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네.”몇 초 뒤, 박한빈은 수화기 너머에서 박세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어머나, 이게 누구십니까? 한빈 형님 아니신가요?”박세빈은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나약했고 힘없어 보였다.“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형님이 아직 저 같은 동생을 기억하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박한빈은 자신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가득한 박세빈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며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셨다.”그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는 약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박세빈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어쩐지 전에 쓰러졌을 때 꿈에서 할머니가 나타난다 했는데...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찾아오셨나 보군요.”박한빈은 옛날 박세빈이 박씨 저택에 들어왔을 때, 김난희에게 아부하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비록 당시에도 박한빈은 박세빈이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김난희의 부고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박한빈은 굳이 이런 문제로 박세빈에게 따지고 싶지 않아 낮은 소리로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다. 아쉽게도 볼 기회가 없었지만. 3일 뒤에 장례식이 끝날 예정인데 오고 싶으면 와도 돼.”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꾹 닫아버렸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세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형, 지금 제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계십니까?”“최근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박세빈이 전에 너한테 찾아간 적 있지? 걔가 무슨 말을 했었어?”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물었다.조급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와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 성유리는 잠시 굳었다 미간을 찌푸리고는 되묻기 시작했다.“무슨 뜻이에요?”“내가 지금 묻잖아. 그때 내가 구치소에 있을 때 말이야. 박세빈이 너 찾아간 적 있지?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데? 협박이라도 한 거야?”“걔가 너한테 한 말 때문에 나랑 이혼하려고 했어? 혹시 나한테 영향을 끼칠까 봐? 맞아?”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성유리만 뚫어져라 보는 박한빈은 며칠 밤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마치 이 결론이어야만 당시 성유리의 선택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박한빈은 어쩌면 박세빈이 정말 성유리를 협박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 정말 성유리가 재물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여자였다면 떠날 때 박한빈이 준 모든 물건을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늘 모순적이던 성유리의 행동이 그제야 퍼즐 조각처럼 맞아가는 것 같았기에 박한빈은 꽉 막혀있는 속이 풀리는 기분마저 들었다.마음 같아서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성유리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주지 않은 건지, 왜 홀로 그런 감정을 떠안고 살았는지.분명히 남편이던 자신에게 알릴 수 있었지만 왜 숨겼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답을 안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 박세빈의 협박 때문에 자신을 떠난 것이 맞다면 말이다.“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침묵하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짧디짧은 한마디에 박한빈의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이 일제히 사라져 버렸고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성유리를 쳐다보았다.“박세빈 씨가 저한테 찾아왔던 건 맞아요.”성유리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근데 저를 협박하거나 위협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성유리와 박한빈에 관한 소문들이 업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연정우는 갑자기 떠오르는 샛별처럼 업계에 등장한 사람이고 성유리는 엄연한 박한빈의 전 아내였다.이런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퍼졌고 자연스레 그들이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연정우와 성유리 둘 다 겸손하고 관심받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인지라 업계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다.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들리는 소문이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기기 일쑤였다.하지만 지금 판은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오늘은 박한빈의 할머니, 즉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한 날이었는데 연정우와 성유리가 함께 나타난 것이다.그저 그런 형식들이 오가며 차가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던 추모회는 두 사람의 등장으로 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것 같았다.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일제히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렸고 다들 그의 사소한 표정 변화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사람들은 마음 같아선 앞으로 달려가 박한빈의 시선을 가로막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 같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를 선택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향을 피우고 애도하고는 연정우와 함께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비통하시겠습니다. 진심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성유리의 행동들은 마치 기계로 찍어낸 것 같았다.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고 목소리에도 전혀 파동이 없었다.박한빈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의 말을 다 들어줬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성유리는 개의치 않았고 연정우와 함께 떠나려고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박한빈이 굳게 닫았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할 말이 있어.”박한빈은 잘 안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던 사람들이 다 귀를 기울일 것이고 무슨 행동을 하던 다 지켜볼 것이라는 사실을.그리고 한 말과 행동들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라 사람들의 “심판”을 받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