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만족해.”박한빈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그럼 이제 가도 되죠?”그 말과 함께 성유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곧바로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 너 약에 취했다고 해서 어젯밤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한 채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단 몇 초 만에 성유리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그녀에게 어떤 대가를 원하는 걸까, 이걸 빌미로 협박하려는 걸까?아니면 단순히...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는 변명일까?마지막 생각이 떠올랐을 때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잠재우려 했지만 그 전에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양어머니 병원에 계시지?”“뭐 하려고요?”성유리의 표정이 확 바뀌며 분노와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슬쩍 볼 뿐이었다.“내가 더 좋은 병원에 모실 수도 있어. 병원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책임질게.”“당신... 그게 무슨 뜻이에요?”“무슨 뜻일 것 같은데?”“제 생각엔... 박 대표님처럼 고귀하신 분한텐 제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말하는 성유리의 목소리가 씁쓸했고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가볍게 두 번 돌린 뒤 다시 말했다.“그래도 우리가 잘 맞는 부분은 있잖아.”그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했고 그가 말하는 잘 맞는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한참이 걸렸다.순간 그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박 대표님은 지화그룹 대표이고 금성에서 알아주는 귀한 분이니 마음만 먹으면 알아서 달려오는 여자가 수두룩한데 왜 하필... 저와 엮이려는 거죠?”“알고 있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잠시 멈칫했다.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네 눈에는 나랑 그 절름발이 조경우, 바깥에서 데려온 잡종 진무열이 별반 다를 게 없는 줄 알았지.”성유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어떠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를 꽉 깨문 성유리의 목소리가 극도로 갈라져 있었다.성유리는 그동안 이미 그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스스로 과대평가를 한 것이었다.이제 성씨 집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만이 몇 마디 말만 해도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그녀의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것 같았다.박한빈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응시하다가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억울해? 그럼 이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다른 남자랑 맞선 보는 건 얼마나 고고한 행위지?”성유리가 말하지 않자 박한빈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그리고, 어젯밤에 내 침대에 먼저 기어오른 건 너야. 그땐 왜 천박하다는 생각 안 했어?”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조롱하는 듯한 표정이 꼭 성유리의 뺨을 손으로 때린 것 같았다.성유리는 이를 악물었지만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은 점점 느슨해졌다.박한빈은 그녀와 빙빙 말을 주고받을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성유리, 사실 너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이 말을 남기고 그가 걸음을 옮겨 앞으로 가려는 순간 뒤에서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기간은요?”박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그가 고개를 돌리자 성유리도 마침 고개를 들었다.이미 눈꼬리는 빨개져 있었고 입술은 깨물어 피가 나는데도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 자신을 바라보던 촉촉한 눈동자가 떠올라 목울대가 꿈틀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2년으로 하자.”성유리는 더욱 이를 꽉 물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박한빈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어디 가는 거야?”“제집으로 가야죠.”대답을 마친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오늘은 내가 필요 없죠? 필요할 때 올게요.”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그녀의 마음은 한결 진정된 상태였고 사무적인 어투는 둘 사이의 일을 완전히 거래 취급하고 있었다.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성유
미화로 37번지, 여기가 성유리의 현재 지내는 곳이었고 박한빈은 처음 와 본다.아무리 오늘날 지화그룹이 부동산 업계에서 굴지의 대기업이라고 해도 성유리가 앞장서지 않았다면 금성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성유리는 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앞에 있던 기사에게 감사하다는 말만 남긴 채 뒤돌아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뜻밖에도 박한빈이 그녀의 뒤를 따라 함께 내렸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해요?”“올라가서 보려고.”성유리는 대체 그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는지 알 턱이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불편해요.”“왜 불편해?”박한빈은 옆 벽에 붙어 있는 여러 광고들을 흘끗 훑어보다가 다시 물었다.“집에 다른 사람 있어?”“당연히 없죠!”“그럼 뭐가 그렇게 불편한데?”성유리는 목소리를 높였다.“굳이 거기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잖아요.”“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게 다야.”박한빈은 천천히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그동안 우리 관계는 깨끗하게 유지했으면 좋겠어.”“날 못 믿으면서 왜 날 찾는 건데요?”“어젯밤 일을 내가 몇 번이나 상기시켜 줘야 하지?”성유리는 더 대꾸하지 못했다.그제야 어젯밤의 일로 자신과 박한빈 관계에서 자신이 완전히 을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심지어 수치스러운 모욕까지 당해야 했다.그녀가 먼저 시작했으니 결국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성유리는 더 그와 말을 섞지 않고 곧바로 뒤돌아 걸음을 옮겼고 박한빈이 그 뒤를 따랐다.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그의 미간은 점점 더 찡그려졌다.비좁은 계단, 축축하고 눅눅한 벽, 구석진 곳에는 온갖 쓰레기가 방치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악취가 진동했다.박한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곳이 성유리가 말한 ‘집’이 될 수가 있는 거지?더 어이없는 것은 그녀가 이런 곳에 살면서도 자신이 주는 건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성유리의 발걸음은 3층에서 멈췄고 곧 고개를 숙인 채 문을 열었다.안의 상태를 확인한 박한빈의 표정
그렇게 기를 쓰고 떠나서 지내는 곳이 고작 손바닥만 한 이 집이라고 조롱하는 거겠지.성유리가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데 짧게 대꾸한 박한빈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뒤돌아 가버렸다.문 앞에 다다르자 그는 갑자기 멈춰 서서 말했다.“열쇠는 바꾸는 게 좋겠어. 여기 이상한 사람 많은데 안전 생각해야지.”말을 마친 후 그는 성유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알아서 걸어 나갔다.언제나처럼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이었다.성유리는 잠금장치를 힐끗 쳐다보고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쾅!단호한 소리에 계단을 내려오던 박한빈이 살짝 멈칫했지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갔다.운전기사가 도로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초호화 모델과 차량 번호판은 순식간에 많은 구경꾼을 끌어모았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를 굽혀 차에 올랐다.운전기사는 그에게 문을 닫아주고는 앞쪽 운전석으로 돌아갔다.시동을 걸고 한참을 운전하던 중 갑자기 앞에 스쿠터 한 대가 나타나며 부딪힐 뻔했고 겁에 질린 스쿠터 주인은 얼른 차에서 내려 연신 사과를 했다.“별일 없으면 그냥 가.”박한빈이 상대와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스럽게 말하는데 이윽고 기사가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저 사람 성유리 씨 아니에요? 어디 가는 걸까요?”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성유리는 이미 심플한 티셔츠와 반바지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채 그들을 등지고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그녀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근처 약국으로 걸어 들어갔다.박한빈은 손을 말아쥐며 입꼬리가 경직되었다.“대표님, 성유리 씨 어디 아픈 거 아닐까요? 가서...”“운전해.”박한빈이 극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성유리는 약을 사자마자 바로 삼켰다.하얀 알약은 맛조차 성유리에겐 이미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아무리 익숙해도 쓴맛은 여전히 그녀의 입속을 맴돌며 사라지지 않았다.그녀가 뒤돌아
“그래.”성유리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성유리, 그럼 네가 뭔데 날 비난해? 너도 박한빈이랑 만나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잖아?”그의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고 뭐라고 대꾸하려던 찰나 진무열이 멋대로 말을 이어갔다.“네가 아직 그 사람 포기 못 한 게 아니면 왜 하필 그 사람 차를 탔어? 왜 병원으로 안 갔어? 그러고도 이게... 네가 꾸민 짓이 아니야? 성유리,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내가 잘못했어. 이런 내 마음은 감당 못 한다면서 본질적으로 너랑 내가 다를 게 뭔데? 어젯밤에 그 사람이 널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그 사람 차에 탄 거지?”대낮에 강한 햇살이 두 사람에게 내리쬐자 피부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온몸에 서늘함만 감돌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 불끈 쥐고 있던 주먹도 힘이 풀렸다.진무열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허를 찔렀다고 생각하곤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동안 그의 눈동자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박한빈도 알아?”그가 말하자 성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진무열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통화 중이었다.“네가 작정하고 자길 이용한 거?”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은 뒤 성유리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저 입술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고 성유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 다 했지?”진무열은 대답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조금 전 그의 말을 묵인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가려는데 진무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 이제 너한테도 기회 없어. 사랑할 사람과 함께할 기회.”그의 말에 성유리의 발걸음이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 걸음을 옮겼다.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에 있던 사람이 소리쳤다.“이봐요!”성유리는 이곳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인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대방이 자신을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
그녀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어젯밤 제대로 자지 못한 성유리는 지금 탈진할 정도로 몸이 지쳐있었지만 이 시간에도 그녀는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결국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창밖 풍경은 보이지 않았고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빽빽한 집들과 바깥 발코니에 걸려 있는 다양한 색깔의 옷들뿐이었다.성유리는 몸을 뒤척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이제 겨우 잠이 올까 싶었는데 옆에 있던 휴대폰이 두 번 진동했다.성유리가 무시하려는데 상대가 끈질기게 연달아 메시지를 계속 보내며 진동이 끊기지 않았다.성유리가 막 확인하려던 찰나 성유정의 전화가 걸려 왔고 끊기 바쁘게 상대는 전화를 다시 걸었다.결국 성유리가 아예 번호를 차단해 버리자 성유정은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더 이상 그녀와 놀아줄 흥미가 없었던 성유리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성유리, 이 나쁜 년!”반대편에 있던 성유정이 곧바로 욕설을 퍼부었다.“어젯밤에 한빈 오빠랑 같이 있었지? 어떻게 뻔뻔하게 오빠를 찾아가? 차라리 죽지 그래? 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한빈 오빠 꼬드겨서 아빠랑 협상하라고 한 게 아니었으면 이번에 결혼식장에 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너 나랑 한빈 오빠 만나는 거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지? 악독한 년. 한빈 오빠랑 결혼할 사람은 나였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빈 오빠 곁에 있었는데 네가 뺏어갔잖아! 다 너 때문이야! 넌 왜 안 죽고 살아있는 거야?”성유정의 욕설이 쉬지 않고 들려오고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정신력이 제대로 무너진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조금 전 말의 요지를 단번에 파악했다.“박한빈이 회장님과 협상했다고? 뭘?”“성유리, 모르는 척하지 마! 네가 꼬드긴 게 아니면 한빈 오빠가 왜 프로젝트를 넘기면서까지 아빠한테 너랑 다른 사람 정략결혼을 취소하라고 해? 네가 다 망쳤어. 한빈 오빠를 2년 동안 해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성유리는
성유리에겐 익숙한 글자였다.도연제에 있을 때도 박한빈은 필요할 때마다 그녀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지금 그 문자를 보고 있자니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났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기사로부터 연락이 왔다.“사모님, 저 미화로 쪽에 있는데 차가 골목으로 못 들어가니 나와주셔야겠어요.”성유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하지 않자 오 기사가 다시 한번 불렀다.“사모님?”“알겠어요.”성유리는 겨우 대답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사모님!”오 기사는 다른 차로 바꿨는데 이 혼잡하고 우울한 도심 속 시골에서 은백색의 파나메라가 눈에 띄었다.성유리는 차에 탈 때 옆집 여자를 발견했고 노란 머리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성유리는 무시했다.오 기사는 그녀에게 문을 닫아주고는 앞쪽 운전석으로 돌아갔다.“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사모님. 조금 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들었으니까 다음번에는 제가...”“저랑 박한빈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성유리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상기시켰다.“그냥 성유리라고 불러요.”“대표님이 저한테 모시러 오라고 하셨어요.”그런데 오 기사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제가 봤을 땐 대표님 아직 사모님 마음에 두고 계신 것 같아요. 안 그럼 저보고 모시러 오라고 하지도 않았겠죠. 어제 대표님 정말 초조해하셨어요. 사모님 먼저 나오시지 않았으면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을걸요.”오 기사는 진심을 담아 말했고 성유리는 문득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제 박한빈이 호텔 근처에 있었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고요?”“당연히 아니죠. 대표님 어제 성유정 씨랑 식사하셨는데 성유정 씨한테서 사모님에게 무슨 일 생겼다는 걸 들었나 봐요. 그때 얼마나...”오 기사가 그 뒤에 무슨 말을 했는지 성유리는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차가 언제 시월 파크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박한빈이 알려준
하지만 지금은 마음속이 시리도록 차가울 뿐이었다.“왜요?”그녀는 박한빈에게 다시 물었고 상대가 이런 식으로 쏘아붙이는 걸 싫어하는 박한빈의 눈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담겼다.성유리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만 이어갔다.“그래도 우리가 나름 2년 동안 부부로 지냈으니까 나에 대해 잘 알고 날 믿어서? 아니면... 어젯밤에 벌어진 일이 사실은 당신 작품이라?”앞선 말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박한빈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단번에 표정이 싸늘해졌다.“무슨 소리야?”“아니지, 끼어들지는 않았겠죠.”성유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렇게 대단하신 박 대표님께서 굳이 그런 수작을 부리지는 않겠죠. 하지만 다 알고 있었던 거죠? 지난번에 지석민이 그 식당에 나타난 것도 사실은 우연이 아닌 거죠?”성유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분해졌다.이런 질문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오늘 성유정에게 걸려 온 전화가 그녀를 정신 차리게 했다.은밀한 곳에 있는 식당을 조경우가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예 존재조차 몰랐을 텐데 지석민은 그러면 어떻게 알았을까?그녀의 과거를 알고 하루빨리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성유정뿐이다.그렇다면 박한빈은?거기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손 놓고 지켜보기만 했나?그러다 그녀가 무기력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손을 뻗어 구해주면서 충직한 개를 길들이듯 자신을 고마워하도록 만들었다.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야?”“난 진실을 알 자격도 없어요?”“무슨 진실? 내가 그렇게 해서 얻을 게 뭔데?”“당신이 한 짓은 아니죠. 하지만 다 알고도 일이 벌어지는 걸 방관하고 있었죠, 아니에요?”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고 피식 웃은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걸음을 옮겨 가려는데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그걸 왜 막아야 하는데? 아니,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막을까? 잊지 마, 우린 이혼했어. 네가 아직 내 아내였다면 아마...”“그랬을까요?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