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69화

작가: 송진
나중에 성유리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도착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세계에 오직 박한빈이라는 존재만 남은 듯 떨어질 수도 없다는 듯이 그에게 매달려 그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취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성을 버리고 본능에만 몸을 맡긴 대가로 다음날 그녀는 깨어났을 때 거대한 차에 짓눌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목구멍은 타들어 가듯 갈증이 일었고 살짝 몸을 움직이기 바쁘게 다리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끙끙대며 침대에 누워 한참을 쉬다가 겨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곳은 낯설었다.

그녀가 지내는 작은 월셋집도, 도연제도 아니었다.

박한빈이 금성에 수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 또한 놀랍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허리를 굽혀 옷을 주운 다음 최대한 천천히 입었다.

그녀가 방에서 나왔을 때 휴대폰도 켜졌고 거기에는 수많은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성유리가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성유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순간 성유리는 서서히 온몸의 피가 얼어붙으며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이 다른 방문 앞에 선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안 갔어요?”

성유리는 입을 열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쉬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어젯밤 화면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얘기 좀 해.”

말하며 박한빈이 그녀를 지나쳐 거실 쪽으로 향했고 성유리는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실수로 마시면 안 되는 술을 마셨을 뿐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건 아니었기에 자신과 박한빈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 더더욱 어떻게 그의 얼굴을 봐야 할지 막막해서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의 맞은편 좌석에 앉은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젯밤에 진무열이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0화

    “응, 만족해.”박한빈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그럼 이제 가도 되죠?”그 말과 함께 성유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곧바로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 너 약에 취했다고 해서 어젯밤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한 채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단 몇 초 만에 성유리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그녀에게 어떤 대가를 원하는 걸까, 이걸 빌미로 협박하려는 걸까?아니면 단순히...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는 변명일까?마지막 생각이 떠올랐을 때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잠재우려 했지만 그 전에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양어머니 병원에 계시지?”“뭐 하려고요?”성유리의 표정이 확 바뀌며 분노와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슬쩍 볼 뿐이었다.“내가 더 좋은 병원에 모실 수도 있어. 병원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책임질게.”“당신... 그게 무슨 뜻이에요?”“무슨 뜻일 것 같은데?”“제 생각엔... 박 대표님처럼 고귀하신 분한텐 제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말하는 성유리의 목소리가 씁쓸했고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가볍게 두 번 돌린 뒤 다시 말했다.“그래도 우리가 잘 맞는 부분은 있잖아.”그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했고 그가 말하는 잘 맞는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한참이 걸렸다.순간 그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박 대표님은 지화그룹 대표이고 금성에서 알아주는 귀한 분이니 마음만 먹으면 알아서 달려오는 여자가 수두룩한데 왜 하필... 저와 엮이려는 거죠?”“알고 있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잠시 멈칫했다.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네 눈에는 나랑 그 절름발이 조경우, 바깥에서 데려온 잡종 진무열이 별반 다를 게 없는 줄 알았지.”성유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어떠한 감정이 느껴졌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1화

    이를 꽉 깨문 성유리의 목소리가 극도로 갈라져 있었다.성유리는 그동안 이미 그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스스로 과대평가를 한 것이었다.이제 성씨 집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만이 몇 마디 말만 해도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그녀의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것 같았다.박한빈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응시하다가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억울해? 그럼 이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다른 남자랑 맞선 보는 건 얼마나 고고한 행위지?”성유리가 말하지 않자 박한빈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그리고, 어젯밤에 내 침대에 먼저 기어오른 건 너야. 그땐 왜 천박하다는 생각 안 했어?”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조롱하는 듯한 표정이 꼭 성유리의 뺨을 손으로 때린 것 같았다.성유리는 이를 악물었지만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은 점점 느슨해졌다.박한빈은 그녀와 빙빙 말을 주고받을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성유리, 사실 너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이 말을 남기고 그가 걸음을 옮겨 앞으로 가려는 순간 뒤에서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기간은요?”박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그가 고개를 돌리자 성유리도 마침 고개를 들었다.이미 눈꼬리는 빨개져 있었고 입술은 깨물어 피가 나는데도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 자신을 바라보던 촉촉한 눈동자가 떠올라 목울대가 꿈틀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2년으로 하자.”성유리는 더욱 이를 꽉 물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박한빈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어디 가는 거야?”“제집으로 가야죠.”대답을 마친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오늘은 내가 필요 없죠? 필요할 때 올게요.”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그녀의 마음은 한결 진정된 상태였고 사무적인 어투는 둘 사이의 일을 완전히 거래 취급하고 있었다.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성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2화

    미화로 37번지, 여기가 성유리의 현재 지내는 곳이었고 박한빈은 처음 와 본다.아무리 오늘날 지화그룹이 부동산 업계에서 굴지의 대기업이라고 해도 성유리가 앞장서지 않았다면 금성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성유리는 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앞에 있던 기사에게 감사하다는 말만 남긴 채 뒤돌아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뜻밖에도 박한빈이 그녀의 뒤를 따라 함께 내렸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해요?”“올라가서 보려고.”성유리는 대체 그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는지 알 턱이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불편해요.”“왜 불편해?”박한빈은 옆 벽에 붙어 있는 여러 광고들을 흘끗 훑어보다가 다시 물었다.“집에 다른 사람 있어?”“당연히 없죠!”“그럼 뭐가 그렇게 불편한데?”성유리는 목소리를 높였다.“굳이 거기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잖아요.”“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게 다야.”박한빈은 천천히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그동안 우리 관계는 깨끗하게 유지했으면 좋겠어.”“날 못 믿으면서 왜 날 찾는 건데요?”“어젯밤 일을 내가 몇 번이나 상기시켜 줘야 하지?”성유리는 더 대꾸하지 못했다.그제야 어젯밤의 일로 자신과 박한빈 관계에서 자신이 완전히 을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심지어 수치스러운 모욕까지 당해야 했다.그녀가 먼저 시작했으니 결국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성유리는 더 그와 말을 섞지 않고 곧바로 뒤돌아 걸음을 옮겼고 박한빈이 그 뒤를 따랐다.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그의 미간은 점점 더 찡그려졌다.비좁은 계단, 축축하고 눅눅한 벽, 구석진 곳에는 온갖 쓰레기가 방치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악취가 진동했다.박한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곳이 성유리가 말한 ‘집’이 될 수가 있는 거지?더 어이없는 것은 그녀가 이런 곳에 살면서도 자신이 주는 건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성유리의 발걸음은 3층에서 멈췄고 곧 고개를 숙인 채 문을 열었다.안의 상태를 확인한 박한빈의 표정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3화

    그렇게 기를 쓰고 떠나서 지내는 곳이 고작 손바닥만 한 이 집이라고 조롱하는 거겠지.성유리가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데 짧게 대꾸한 박한빈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뒤돌아 가버렸다.문 앞에 다다르자 그는 갑자기 멈춰 서서 말했다.“열쇠는 바꾸는 게 좋겠어. 여기 이상한 사람 많은데 안전 생각해야지.”말을 마친 후 그는 성유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알아서 걸어 나갔다.언제나처럼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이었다.성유리는 잠금장치를 힐끗 쳐다보고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쾅!단호한 소리에 계단을 내려오던 박한빈이 살짝 멈칫했지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갔다.운전기사가 도로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초호화 모델과 차량 번호판은 순식간에 많은 구경꾼을 끌어모았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를 굽혀 차에 올랐다.운전기사는 그에게 문을 닫아주고는 앞쪽 운전석으로 돌아갔다.시동을 걸고 한참을 운전하던 중 갑자기 앞에 스쿠터 한 대가 나타나며 부딪힐 뻔했고 겁에 질린 스쿠터 주인은 얼른 차에서 내려 연신 사과를 했다.“별일 없으면 그냥 가.”박한빈이 상대와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스럽게 말하는데 이윽고 기사가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저 사람 성유리 씨 아니에요? 어디 가는 걸까요?”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성유리는 이미 심플한 티셔츠와 반바지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채 그들을 등지고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그녀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근처 약국으로 걸어 들어갔다.박한빈은 손을 말아쥐며 입꼬리가 경직되었다.“대표님, 성유리 씨 어디 아픈 거 아닐까요? 가서...”“운전해.”박한빈이 극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성유리는 약을 사자마자 바로 삼켰다.하얀 알약은 맛조차 성유리에겐 이미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아무리 익숙해도 쓴맛은 여전히 그녀의 입속을 맴돌며 사라지지 않았다.그녀가 뒤돌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4화

    “그래.”성유리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성유리, 그럼 네가 뭔데 날 비난해? 너도 박한빈이랑 만나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잖아?”그의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고 뭐라고 대꾸하려던 찰나 진무열이 멋대로 말을 이어갔다.“네가 아직 그 사람 포기 못 한 게 아니면 왜 하필 그 사람 차를 탔어? 왜 병원으로 안 갔어? 그러고도 이게... 네가 꾸민 짓이 아니야? 성유리,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내가 잘못했어. 이런 내 마음은 감당 못 한다면서 본질적으로 너랑 내가 다를 게 뭔데? 어젯밤에 그 사람이 널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그 사람 차에 탄 거지?”대낮에 강한 햇살이 두 사람에게 내리쬐자 피부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온몸에 서늘함만 감돌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 불끈 쥐고 있던 주먹도 힘이 풀렸다.진무열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허를 찔렀다고 생각하곤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동안 그의 눈동자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박한빈도 알아?”그가 말하자 성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진무열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통화 중이었다.“네가 작정하고 자길 이용한 거?”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은 뒤 성유리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저 입술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고 성유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 다 했지?”진무열은 대답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조금 전 그의 말을 묵인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가려는데 진무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 이제 너한테도 기회 없어. 사랑할 사람과 함께할 기회.”그의 말에 성유리의 발걸음이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 걸음을 옮겼다.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에 있던 사람이 소리쳤다.“이봐요!”성유리는 이곳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인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대방이 자신을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화

    그녀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어젯밤 제대로 자지 못한 성유리는 지금 탈진할 정도로 몸이 지쳐있었지만 이 시간에도 그녀는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결국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창밖 풍경은 보이지 않았고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빽빽한 집들과 바깥 발코니에 걸려 있는 다양한 색깔의 옷들뿐이었다.성유리는 몸을 뒤척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이제 겨우 잠이 올까 싶었는데 옆에 있던 휴대폰이 두 번 진동했다.성유리가 무시하려는데 상대가 끈질기게 연달아 메시지를 계속 보내며 진동이 끊기지 않았다.성유리가 막 확인하려던 찰나 성유정의 전화가 걸려 왔고 끊기 바쁘게 상대는 전화를 다시 걸었다.결국 성유리가 아예 번호를 차단해 버리자 성유정은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더 이상 그녀와 놀아줄 흥미가 없었던 성유리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성유리, 이 나쁜 년!”반대편에 있던 성유정이 곧바로 욕설을 퍼부었다.“어젯밤에 한빈 오빠랑 같이 있었지? 어떻게 뻔뻔하게 오빠를 찾아가? 차라리 죽지 그래? 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한빈 오빠 꼬드겨서 아빠랑 협상하라고 한 게 아니었으면 이번에 결혼식장에 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너 나랑 한빈 오빠 만나는 거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지? 악독한 년. 한빈 오빠랑 결혼할 사람은 나였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빈 오빠 곁에 있었는데 네가 뺏어갔잖아! 다 너 때문이야! 넌 왜 안 죽고 살아있는 거야?”성유정의 욕설이 쉬지 않고 들려오고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정신력이 제대로 무너진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조금 전 말의 요지를 단번에 파악했다.“박한빈이 회장님과 협상했다고? 뭘?”“성유리, 모르는 척하지 마! 네가 꼬드긴 게 아니면 한빈 오빠가 왜 프로젝트를 넘기면서까지 아빠한테 너랑 다른 사람 정략결혼을 취소하라고 해? 네가 다 망쳤어. 한빈 오빠를 2년 동안 해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성유리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6화

    성유리에겐 익숙한 글자였다.도연제에 있을 때도 박한빈은 필요할 때마다 그녀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지금 그 문자를 보고 있자니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났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기사로부터 연락이 왔다.“사모님, 저 미화로 쪽에 있는데 차가 골목으로 못 들어가니 나와주셔야겠어요.”성유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하지 않자 오 기사가 다시 한번 불렀다.“사모님?”“알겠어요.”성유리는 겨우 대답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사모님!”오 기사는 다른 차로 바꿨는데 이 혼잡하고 우울한 도심 속 시골에서 은백색의 파나메라가 눈에 띄었다.성유리는 차에 탈 때 옆집 여자를 발견했고 노란 머리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성유리는 무시했다.오 기사는 그녀에게 문을 닫아주고는 앞쪽 운전석으로 돌아갔다.“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사모님. 조금 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들었으니까 다음번에는 제가...”“저랑 박한빈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성유리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상기시켰다.“그냥 성유리라고 불러요.”“대표님이 저한테 모시러 오라고 하셨어요.”그런데 오 기사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제가 봤을 땐 대표님 아직 사모님 마음에 두고 계신 것 같아요. 안 그럼 저보고 모시러 오라고 하지도 않았겠죠. 어제 대표님 정말 초조해하셨어요. 사모님 먼저 나오시지 않았으면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을걸요.”오 기사는 진심을 담아 말했고 성유리는 문득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제 박한빈이 호텔 근처에 있었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고요?”“당연히 아니죠. 대표님 어제 성유정 씨랑 식사하셨는데 성유정 씨한테서 사모님에게 무슨 일 생겼다는 걸 들었나 봐요. 그때 얼마나...”오 기사가 그 뒤에 무슨 말을 했는지 성유리는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차가 언제 시월 파크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박한빈이 알려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7화

    하지만 지금은 마음속이 시리도록 차가울 뿐이었다.“왜요?”그녀는 박한빈에게 다시 물었고 상대가 이런 식으로 쏘아붙이는 걸 싫어하는 박한빈의 눈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담겼다.성유리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만 이어갔다.“그래도 우리가 나름 2년 동안 부부로 지냈으니까 나에 대해 잘 알고 날 믿어서? 아니면... 어젯밤에 벌어진 일이 사실은 당신 작품이라?”앞선 말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박한빈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단번에 표정이 싸늘해졌다.“무슨 소리야?”“아니지, 끼어들지는 않았겠죠.”성유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렇게 대단하신 박 대표님께서 굳이 그런 수작을 부리지는 않겠죠. 하지만 다 알고 있었던 거죠? 지난번에 지석민이 그 식당에 나타난 것도 사실은 우연이 아닌 거죠?”성유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분해졌다.이런 질문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오늘 성유정에게 걸려 온 전화가 그녀를 정신 차리게 했다.은밀한 곳에 있는 식당을 조경우가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예 존재조차 몰랐을 텐데 지석민은 그러면 어떻게 알았을까?그녀의 과거를 알고 하루빨리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성유정뿐이다.그렇다면 박한빈은?거기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손 놓고 지켜보기만 했나?그러다 그녀가 무기력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손을 뻗어 구해주면서 충직한 개를 길들이듯 자신을 고마워하도록 만들었다.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야?”“난 진실을 알 자격도 없어요?”“무슨 진실? 내가 그렇게 해서 얻을 게 뭔데?”“당신이 한 짓은 아니죠. 하지만 다 알고도 일이 벌어지는 걸 방관하고 있었죠, 아니에요?”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고 피식 웃은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걸음을 옮겨 가려는데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그걸 왜 막아야 하는데? 아니,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막을까? 잊지 마, 우린 이혼했어. 네가 아직 내 아내였다면 아마...”“그랬을까요?

최신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83화

    “지금 이게 무슨 의미야?”금미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정우가 며칠 전까지 여기 있었던 건 맞지만 어젯밤에 이미 떠났어요.”“그래?”금미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잘됐네.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왔어.”성유리는 금미라의 말에 순순히 몸을 옆으로 비켜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게 했다.금미라는 고급스러운 맞춤 드레스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녀의 표정에는 이 집에 대한 명백한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무슨 음료 드릴까요?”성유리가 물었지만 금미라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로 돌렸다.하늘이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아이의 직감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누가 선한 사람인지, 누가 날카로운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금미라가 자신을 쳐다보는 동안 하늘이는 성유리 뒤로 숨으며 그녀를 몰래 쳐다봤다. 아이의 눈빛에는 평소에 잘 없던 두려움이 그득하게 서려 있었다.금미라는 그런 하늘이를 보며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하늘아, 엄마 말 잘 듣고 방에 가서 잠깐만 기다려줄래?”하늘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하늘이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성유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금미라를 힐끔 쳐다본 후 빠르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아이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이내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금미라 앞에 놓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집이 좀 어수선하네요.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방문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갑자기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너 지금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정우를 찾으러 오신 거 아니었나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82화

    그 캡처 사진은 사하나가 박한빈에게 보낸 것이었다.그녀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고 그저 단순히 사진 한 장만 보냈다. 하지만 그 사진 하나로 박한빈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분명했다.사하나는 박한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당신은 이미 게임에서 탈락했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그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곧바로 사진을 삭제하고 사하나를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그리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일을 하려 했지만 더는 데이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휴대폰에서 사진은 삭제됐지만 그 장면은 박한빈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듯 사라지지 않았다.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잠시 후, 버티다 못한 박한빈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 열쇠를 손에 쥐고는 밖으로 나섰다.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는 박한빈 본인도 잘 몰랐다.결국 그는 한 공사 현장 앞에 차를 세웠다.이곳은 그가 1년 전에 매입한 땅이었다. 몇 달 전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설계도만 다듬는 데 반년 넘게 걸렸다.그리고 최근, 현장은 또 한 번 더 설계도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하늘이가 회전목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박한빈은 바로 앞에 예쁜 회전목마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그리고 2층에는 성유리를 위해 마련한 전용 화실도 있었다.사실 박한빈에게는 이미 여러 채의 부동산이 있다.하지만 그는 성유리가 돌아오면 이전의 별장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아파트 같은 곳에 사는 건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라 여겼다.그래서 오직 성유리만을 위한 집을 새로 짓기로 했고 집이 완성되면 그녀의 이름으로 등록할 계획이었다.그렇게 성유리를 맞이할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끝난 상태였다.심지어 연정우 쪽에 제시할 조건까지 생각해 둔 채로 말이다.박한빈은 절대로 두 사람이 계속 연인 사이로 지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성유리가 연정우를 마음속에 두고 싶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그게 아니라면 연정우가 먼저 성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81화

    연정우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다른 사람들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적어도 성유리가 보고 들은 것들로만 해도 연정우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가 성유리 때문에 무너져버리고 있다.그래서 만약 연정우가 자신을 밀어내더라도 성유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전혀 놀랍지도 않았다.그런데 지금 그가 한 대답은 성유리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일이 아닌 자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성유리는 이를 꽉 악문 채 눈앞의 사람을 올려다봤다.“넌 싫어?”연정우가 물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여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 후 다시 연정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아니. 좋아.”“이런 삶은 전혀 힘들지 않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난 어릴 때부터...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크지 않아도 되고 화려할 필요도 없었어. 가사도우미 같은 건 필요도 없고. 내 아이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있으면 돼.”“그게 내가 원했던 삶이야.”성유리가 할 말을 끝내자 연정우도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그럼 우리 함께 그런 집을 만들어가자.”한편, 금성.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사무실은 여전히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의 데이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놓인 재떨이는 이미 꽉 차있었다.그는 현재 거의 이틀 가까이 잠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바라던 그 소식 또한 전해졌다. 장성 그룹이 소유한 자금으로는 더 이상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수화기 너머 그 사람은 내일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하면 장성 그룹은 바로 붕괴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냉랭했다.그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로 간결했다.“네. 알겠습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80화

    “실은 나도 그렇다고 딱 확신할 수는 없어.”한참을 침묵하던 연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지만 최근 우리 회사에서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아. 큰 문제는 아니지만 연달아 일어나는 사고들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기엔 어렵고.”연정우는 하던 말을 뚝 멈추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성유리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그리고 뭐?”“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와 오랫동안 협력하던 은행 몇 곳이 최근 갑자기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나와의 협상을 아예 거부하고 있어. 누군가 뒤에서 압박을 넣고 있는 게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거지.”‘금성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이 뒷말을 연정우는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성유리라면 충분히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생각에 잠겨있던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꼭 쥐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바로 그때,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물었다.“이 싸움에서 내가 진다면 넌 나한테 실망할 거야?”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그리고 바로 묻는 연정우의 눈을 바라보았고 연정우도 성유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근데 넌 아마 많이 힘들 거야.”연정우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다시 학교로 돌아가 강의를 해야 하겠지. 그러면 가사 도우미를 둘 형편은 안 될 거야. 그래서 너는 계속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뭐 어때? 난 이런 삶이 좋은데.”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말했고 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웃음을 빵 터뜨렸다.연정우의 환한 웃음을 본 성유리는 꽉 조여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걸 느꼈다.“나를 원망하지는 않아?”성유리가 물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너를 원망해야 하지?”“나 때문에... 박한빈 씨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9화

    잠시 망설이던 하늘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연정우는 성유리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연정우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기에 다소 서툴렀지만 하늘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고 머리를 말리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성유리는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이 장면이 너무나 따뜻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정우가 바로 자신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그래서 연정우를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휴대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조명이 비추는 아래에서 연정우는 다정하게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고 하늘이는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사진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처럼 보였다.성유리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가 내일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반죽은 이미 미리 만들어 두었기에 이제 고기소를 넣고 찜기에서 찌기만 하면 되었다.성유리가 이렇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이유는 하늘이가 달걀노른자에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외부에서 파는 만두에는 대부분 달걀물이 들어가 있어서 하늘이를 위해 성유리는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원래 성유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평소에 잠자리에 들 때 늘 엄마를 찾곤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방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도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성유리가 하늘이 방으로 향하려 하는 순간, 연정우가 아이의 방에서 나왔다.“하늘이 잠들었어.”연정우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자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뭐라고?”“방금 잠들었다고.”연정우는 웃으며 말했다.“책을 조금 읽어줬더니 졸린다고 하더니 바로 잠들었어.”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이 믿기지 않아 방을 열어 직접 확인해 보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이는 정말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아까 너무 많이 놀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8화

    연정우는 할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반면 성유리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긴장한 듯 주먹을 더 꽉 쥐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손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성유리는 놀란 듯 연정우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그 순간, 연정우는 그것만으로도 성유리에게 다가갈 더 큰 용기를 얻은 듯했다.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한 연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그녀에게 조금씩 가까이 대기 시작할 무렵.“엄마!”집안을 울리는 하늘이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고 그 소리는 마치 번개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았다,성유리는 깜짝 놀라 연정우를 급히 밀쳐버렸고 너무 갑작스러운 힘에 연정우는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 있던 찬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쾅!맑은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고 성유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바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 미안해. 정말 괜찮아?”“응.”연정우는 걱정하는 성유리에게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 별로 안 아팠어.”그의 말에도 성유리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었다.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늘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 둘이 지금 뭐 하고 있었어?”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의 존재를 떠올리고 아이를 향해 돌아서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늘이는 무슨 일 있었어?”“아저씨가 준 인형 어떻게 말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어.”하늘이는 말하면서 손을 뻗어 연정우의 손을 잡아끌었고 연정우는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아이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향했다.혼자 주방에 남은 성유리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연정우의 여행 가방은 여전히 현관에 놓여 있었다.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아저씨, 오늘 밤 여기서 주무실 거예요?”연정우는 아이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7화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행동에 연정우는 제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왜? 나 많이 보고 싶었어?”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웠지만 어딘가 우울한 듯한 느낌이 숨겨지지 않았다.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잠시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연정우는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망설이던 성유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먼저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 많이 힘들어?”“그냥 좀 바빴어.”“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니고?”성유리는 지금 연정우에게 질문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확신에 찬 뉘앙스가 그득히 섞여 있었다.연정우는 성유리의 물음에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 듯했으나 금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걱정 마. 별일 아니야. 다 해결됐어.”그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하늘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넌? 요즘 잘 지냈어?”하늘이는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잘 지냈어요.”“그럼 됐어. 내가 하늘이 줄 선물 사 왔는데 뭔지 보고 싶어?”선물이라는 말에 하늘이는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연정우가 선물을 줄 때는 다소 어색해하던 하늘이도 이후 연정우가 선물을 고르는 순간이 더 즐겁다고 말한 뒤로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이번에도 하늘이는 연정우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성유리는 얼른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연정우는 여행 가방을 현관에 두 따로 준비한 가방을 열어 하늘이에게 준비한 선물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약 30cm 크기의 인형이 들어 있었다.성유리는 한눈에 그 인형이 유명 영화의 협업 한정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티나게 팔린 인형은 이곳 경운시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제품이었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연정우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하늘이는 이런 거 잘 몰라. 굳이 비싼 거 살 필요 없어. 그냥 간단한 걸로도 괜찮아.”“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6화

    그날 밤 연정우는 끝내 식사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 날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에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이를 본 사하나는 화가 난 듯 연정우를 나무라며 몇 마디 욕설까지 퍼부었다.“괜찮아. 아마... 무슨 중요한 일이 있겠지.”“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언니랑 하늘이를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나중에 꼭 연정우 씨한테 한마디 해야겠어요.”사하나는 말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화가 나 있는 사하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무슨 문제요?”사하나가 되물었다.“글쎄 지금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사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듣지도 못했는데요? 언니 혹시 무슨 얘기 들으신 거 있으세요?”“아니. 그냥... 걱정돼서.”“뭐가 걱정되는데요?”긴장 탓에 경직돼 있던 사하나는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연정우 대표님 회사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잖아요. 대기업이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꽤 단단해진 상태예요. 그러니까 별일은 없을 거고요.”“저도 아무 얘기 못 들었으니까 괜히 걱정하지 마세요.”사하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겨우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사하나는 원래 화를 빨리 내고 빨리 풀리는 다혈질이었다.성유리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연정우를 욕하겠다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하늘이와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차 안은 다시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왔다.요즘 사하나는 집안 회사 일을 물려받느라 바빴기 때문에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 터미널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떠나버렸다.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짐을 부치고 안전 점검까지 마친 후,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는 연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하나 씨가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줬어. 지금 대기 중이야.]하지만 연정우는 평소와 다르게 바로 답장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5화

    사실 오늘 성유리는 연정우와 함께 김난희의 빈소를 찾을 예정이 아니었다.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성유리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그의 전처의 신분으로 장례식을 찾는 것만으로 이미 민망한 상황인데 연정우까지 함께 간다면 박씨 가문에게 수치를 안겨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우는 누구한테서 성유리의 일정을 전해 들은 건지 몰래 따라왔고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렸다.연정우는 자신 또한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으니 성유리는 그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연정우도 아예 성유리를 만날 것을 예상치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차 안에서 연정우는 이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를 꺼냈고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연정우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사실 나도 꼭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어. 그냥... 너 혼자 오면 위험할까 봐. 그리고 혹시 어색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오려고 한 거였어.”연정우의 핑계는 누가 들어도 거짓이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그를 들춰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래서 아까 박한빈 씨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건데?”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물었다.“별거 아니야. 그냥 흔한 말들이었어.”성유리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고 연정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려던 말들을 꾹 삼키기로 했다.‘이런 상태로 말하면 안 돼.’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게 있어 과거로 남은 사람이었으니 연정우는 그녀 앞에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혹시나 박한빈을 잊고 살던 성유리가 자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까 봐 말이다.하지만 연정우는 쉽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일을 겪은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성유리는 전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