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성유리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도착했는지 알지 못했다.그녀의 세계에 오직 박한빈이라는 존재만 남은 듯 떨어질 수도 없다는 듯이 그에게 매달려 그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취하도록 내버려두었다.이성을 버리고 본능에만 몸을 맡긴 대가로 다음날 그녀는 깨어났을 때 거대한 차에 짓눌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목구멍은 타들어 가듯 갈증이 일었고 살짝 몸을 움직이기 바쁘게 다리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어쩔 수 없이 끙끙대며 침대에 누워 한참을 쉬다가 겨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곳은 낯설었다.그녀가 지내는 작은 월셋집도, 도연제도 아니었다.박한빈이 금성에 수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 또한 놀랍지도 않았다.성유리는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허리를 굽혀 옷을 주운 다음 최대한 천천히 입었다.그녀가 방에서 나왔을 때 휴대폰도 켜졌고 거기에는 수많은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성유리가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일어났어?”성유리의 발걸음이 멈췄다!그 순간 성유리는 서서히 온몸의 피가 얼어붙으며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이 다른 방문 앞에 선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직... 안 갔어요?”성유리는 입을 열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쉬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순간 어젯밤 화면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얘기 좀 해.”말하며 박한빈이 그녀를 지나쳐 거실 쪽으로 향했고 성유리는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어젯밤 실수로 마시면 안 되는 술을 마셨을 뿐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건 아니었기에 자신과 박한빈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그랬기에 지금 더더욱 어떻게 그의 얼굴을 봐야 할지 막막해서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의 맞은편 좌석에 앉은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어젯밤에 진무열이
“응, 만족해.”박한빈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그럼 이제 가도 되죠?”그 말과 함께 성유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곧바로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 너 약에 취했다고 해서 어젯밤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한 채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단 몇 초 만에 성유리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그녀에게 어떤 대가를 원하는 걸까, 이걸 빌미로 협박하려는 걸까?아니면 단순히...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는 변명일까?마지막 생각이 떠올랐을 때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잠재우려 했지만 그 전에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양어머니 병원에 계시지?”“뭐 하려고요?”성유리의 표정이 확 바뀌며 분노와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슬쩍 볼 뿐이었다.“내가 더 좋은 병원에 모실 수도 있어. 병원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책임질게.”“당신... 그게 무슨 뜻이에요?”“무슨 뜻일 것 같은데?”“제 생각엔... 박 대표님처럼 고귀하신 분한텐 제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말하는 성유리의 목소리가 씁쓸했고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가볍게 두 번 돌린 뒤 다시 말했다.“그래도 우리가 잘 맞는 부분은 있잖아.”그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했고 그가 말하는 잘 맞는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한참이 걸렸다.순간 그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박 대표님은 지화그룹 대표이고 금성에서 알아주는 귀한 분이니 마음만 먹으면 알아서 달려오는 여자가 수두룩한데 왜 하필... 저와 엮이려는 거죠?”“알고 있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잠시 멈칫했다.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네 눈에는 나랑 그 절름발이 조경우, 바깥에서 데려온 잡종 진무열이 별반 다를 게 없는 줄 알았지.”성유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어떠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를 꽉 깨문 성유리의 목소리가 극도로 갈라져 있었다.성유리는 그동안 이미 그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스스로 과대평가를 한 것이었다.이제 성씨 집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만이 몇 마디 말만 해도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그녀의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것 같았다.박한빈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응시하다가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억울해? 그럼 이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다른 남자랑 맞선 보는 건 얼마나 고고한 행위지?”성유리가 말하지 않자 박한빈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그리고, 어젯밤에 내 침대에 먼저 기어오른 건 너야. 그땐 왜 천박하다는 생각 안 했어?”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조롱하는 듯한 표정이 꼭 성유리의 뺨을 손으로 때린 것 같았다.성유리는 이를 악물었지만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은 점점 느슨해졌다.박한빈은 그녀와 빙빙 말을 주고받을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성유리, 사실 너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이 말을 남기고 그가 걸음을 옮겨 앞으로 가려는 순간 뒤에서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기간은요?”박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그가 고개를 돌리자 성유리도 마침 고개를 들었다.이미 눈꼬리는 빨개져 있었고 입술은 깨물어 피가 나는데도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 자신을 바라보던 촉촉한 눈동자가 떠올라 목울대가 꿈틀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2년으로 하자.”성유리는 더욱 이를 꽉 물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박한빈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어디 가는 거야?”“제집으로 가야죠.”대답을 마친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오늘은 내가 필요 없죠? 필요할 때 올게요.”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그녀의 마음은 한결 진정된 상태였고 사무적인 어투는 둘 사이의 일을 완전히 거래 취급하고 있었다.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성유
미화로 37번지, 여기가 성유리의 현재 지내는 곳이었고 박한빈은 처음 와 본다.아무리 오늘날 지화그룹이 부동산 업계에서 굴지의 대기업이라고 해도 성유리가 앞장서지 않았다면 금성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성유리는 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앞에 있던 기사에게 감사하다는 말만 남긴 채 뒤돌아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뜻밖에도 박한빈이 그녀의 뒤를 따라 함께 내렸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해요?”“올라가서 보려고.”성유리는 대체 그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는지 알 턱이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불편해요.”“왜 불편해?”박한빈은 옆 벽에 붙어 있는 여러 광고들을 흘끗 훑어보다가 다시 물었다.“집에 다른 사람 있어?”“당연히 없죠!”“그럼 뭐가 그렇게 불편한데?”성유리는 목소리를 높였다.“굳이 거기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잖아요.”“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게 다야.”박한빈은 천천히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그동안 우리 관계는 깨끗하게 유지했으면 좋겠어.”“날 못 믿으면서 왜 날 찾는 건데요?”“어젯밤 일을 내가 몇 번이나 상기시켜 줘야 하지?”성유리는 더 대꾸하지 못했다.그제야 어젯밤의 일로 자신과 박한빈 관계에서 자신이 완전히 을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심지어 수치스러운 모욕까지 당해야 했다.그녀가 먼저 시작했으니 결국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성유리는 더 그와 말을 섞지 않고 곧바로 뒤돌아 걸음을 옮겼고 박한빈이 그 뒤를 따랐다.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그의 미간은 점점 더 찡그려졌다.비좁은 계단, 축축하고 눅눅한 벽, 구석진 곳에는 온갖 쓰레기가 방치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악취가 진동했다.박한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곳이 성유리가 말한 ‘집’이 될 수가 있는 거지?더 어이없는 것은 그녀가 이런 곳에 살면서도 자신이 주는 건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성유리의 발걸음은 3층에서 멈췄고 곧 고개를 숙인 채 문을 열었다.안의 상태를 확인한 박한빈의 표정
그렇게 기를 쓰고 떠나서 지내는 곳이 고작 손바닥만 한 이 집이라고 조롱하는 거겠지.성유리가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데 짧게 대꾸한 박한빈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뒤돌아 가버렸다.문 앞에 다다르자 그는 갑자기 멈춰 서서 말했다.“열쇠는 바꾸는 게 좋겠어. 여기 이상한 사람 많은데 안전 생각해야지.”말을 마친 후 그는 성유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알아서 걸어 나갔다.언제나처럼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이었다.성유리는 잠금장치를 힐끗 쳐다보고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쾅!단호한 소리에 계단을 내려오던 박한빈이 살짝 멈칫했지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갔다.운전기사가 도로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초호화 모델과 차량 번호판은 순식간에 많은 구경꾼을 끌어모았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를 굽혀 차에 올랐다.운전기사는 그에게 문을 닫아주고는 앞쪽 운전석으로 돌아갔다.시동을 걸고 한참을 운전하던 중 갑자기 앞에 스쿠터 한 대가 나타나며 부딪힐 뻔했고 겁에 질린 스쿠터 주인은 얼른 차에서 내려 연신 사과를 했다.“별일 없으면 그냥 가.”박한빈이 상대와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스럽게 말하는데 이윽고 기사가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저 사람 성유리 씨 아니에요? 어디 가는 걸까요?”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성유리는 이미 심플한 티셔츠와 반바지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채 그들을 등지고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그녀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근처 약국으로 걸어 들어갔다.박한빈은 손을 말아쥐며 입꼬리가 경직되었다.“대표님, 성유리 씨 어디 아픈 거 아닐까요? 가서...”“운전해.”박한빈이 극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성유리는 약을 사자마자 바로 삼켰다.하얀 알약은 맛조차 성유리에겐 이미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아무리 익숙해도 쓴맛은 여전히 그녀의 입속을 맴돌며 사라지지 않았다.그녀가 뒤돌아
“그래.”성유리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성유리, 그럼 네가 뭔데 날 비난해? 너도 박한빈이랑 만나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잖아?”그의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고 뭐라고 대꾸하려던 찰나 진무열이 멋대로 말을 이어갔다.“네가 아직 그 사람 포기 못 한 게 아니면 왜 하필 그 사람 차를 탔어? 왜 병원으로 안 갔어? 그러고도 이게... 네가 꾸민 짓이 아니야? 성유리,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내가 잘못했어. 이런 내 마음은 감당 못 한다면서 본질적으로 너랑 내가 다를 게 뭔데? 어젯밤에 그 사람이 널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그 사람 차에 탄 거지?”대낮에 강한 햇살이 두 사람에게 내리쬐자 피부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온몸에 서늘함만 감돌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 불끈 쥐고 있던 주먹도 힘이 풀렸다.진무열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허를 찔렀다고 생각하곤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동안 그의 눈동자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박한빈도 알아?”그가 말하자 성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진무열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통화 중이었다.“네가 작정하고 자길 이용한 거?”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은 뒤 성유리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저 입술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고 성유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 다 했지?”진무열은 대답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조금 전 그의 말을 묵인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가려는데 진무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 이제 너한테도 기회 없어. 사랑할 사람과 함께할 기회.”그의 말에 성유리의 발걸음이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 걸음을 옮겼다.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에 있던 사람이 소리쳤다.“이봐요!”성유리는 이곳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인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대방이 자신을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
그녀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어젯밤 제대로 자지 못한 성유리는 지금 탈진할 정도로 몸이 지쳐있었지만 이 시간에도 그녀는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결국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창밖 풍경은 보이지 않았고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빽빽한 집들과 바깥 발코니에 걸려 있는 다양한 색깔의 옷들뿐이었다.성유리는 몸을 뒤척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이제 겨우 잠이 올까 싶었는데 옆에 있던 휴대폰이 두 번 진동했다.성유리가 무시하려는데 상대가 끈질기게 연달아 메시지를 계속 보내며 진동이 끊기지 않았다.성유리가 막 확인하려던 찰나 성유정의 전화가 걸려 왔고 끊기 바쁘게 상대는 전화를 다시 걸었다.결국 성유리가 아예 번호를 차단해 버리자 성유정은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더 이상 그녀와 놀아줄 흥미가 없었던 성유리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성유리, 이 나쁜 년!”반대편에 있던 성유정이 곧바로 욕설을 퍼부었다.“어젯밤에 한빈 오빠랑 같이 있었지? 어떻게 뻔뻔하게 오빠를 찾아가? 차라리 죽지 그래? 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한빈 오빠 꼬드겨서 아빠랑 협상하라고 한 게 아니었으면 이번에 결혼식장에 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너 나랑 한빈 오빠 만나는 거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지? 악독한 년. 한빈 오빠랑 결혼할 사람은 나였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빈 오빠 곁에 있었는데 네가 뺏어갔잖아! 다 너 때문이야! 넌 왜 안 죽고 살아있는 거야?”성유정의 욕설이 쉬지 않고 들려오고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정신력이 제대로 무너진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조금 전 말의 요지를 단번에 파악했다.“박한빈이 회장님과 협상했다고? 뭘?”“성유리, 모르는 척하지 마! 네가 꼬드긴 게 아니면 한빈 오빠가 왜 프로젝트를 넘기면서까지 아빠한테 너랑 다른 사람 정략결혼을 취소하라고 해? 네가 다 망쳤어. 한빈 오빠를 2년 동안 해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성유리는
성유리에겐 익숙한 글자였다.도연제에 있을 때도 박한빈은 필요할 때마다 그녀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지금 그 문자를 보고 있자니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났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기사로부터 연락이 왔다.“사모님, 저 미화로 쪽에 있는데 차가 골목으로 못 들어가니 나와주셔야겠어요.”성유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하지 않자 오 기사가 다시 한번 불렀다.“사모님?”“알겠어요.”성유리는 겨우 대답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사모님!”오 기사는 다른 차로 바꿨는데 이 혼잡하고 우울한 도심 속 시골에서 은백색의 파나메라가 눈에 띄었다.성유리는 차에 탈 때 옆집 여자를 발견했고 노란 머리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성유리는 무시했다.오 기사는 그녀에게 문을 닫아주고는 앞쪽 운전석으로 돌아갔다.“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사모님. 조금 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들었으니까 다음번에는 제가...”“저랑 박한빈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성유리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상기시켰다.“그냥 성유리라고 불러요.”“대표님이 저한테 모시러 오라고 하셨어요.”그런데 오 기사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제가 봤을 땐 대표님 아직 사모님 마음에 두고 계신 것 같아요. 안 그럼 저보고 모시러 오라고 하지도 않았겠죠. 어제 대표님 정말 초조해하셨어요. 사모님 먼저 나오시지 않았으면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을걸요.”오 기사는 진심을 담아 말했고 성유리는 문득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제 박한빈이 호텔 근처에 있었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고요?”“당연히 아니죠. 대표님 어제 성유정 씨랑 식사하셨는데 성유정 씨한테서 사모님에게 무슨 일 생겼다는 걸 들었나 봐요. 그때 얼마나...”오 기사가 그 뒤에 무슨 말을 했는지 성유리는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차가 언제 시월 파크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박한빈이 알려준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방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예상대로 남자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요즘 이런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예전에는 가끔 박한빈과 함께 공개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결혼식 때였지만 그 결혼식조차 끝까지 진행되지 못해 참석자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자 남자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우리 아내가 전에 성유리 씨랑 꼭 얘기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요 며칠 집에서 차 모임을 열었는데 시간 되시면 꼭 오십시오.” “성유리 씨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경매장에서…” 이런 자리에서 하는 형식적인 대화는 성유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과거 성리 그룹에서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지만 지금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박한빈이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바로 나서서 그녀의 술잔을 대신 받아들었다. “지금은 유리가 마실 수 없으니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사실 그의 신분으로는 그냥 그녀를 데리고 나가도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의 웃음이 살짝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박 대표님이 부인을 참 아끼시네요.” “성유리 씨 남편 복이 정말 많으십니다. 두 분 정말 보기 좋아요.”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박한빈이 두 번째 잔을 들려는 것을 보자 그제야 나서서 그를 막았다. “방금 병원에서 퇴원했잖아요. 죽고 싶어서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행동은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는 더 커졌지만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계속 노려봤다. 박한빈은 자신을 말리려는 성유리를 보며 웃음을 짓
그녀의 말이 끝나고 박한빈은 잠시 멍해지더니 천천히 물었다.“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나... 아니, 너는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잖아. 게다가 남자라면 여자가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보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최정민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맞은편에 서 있는 박한빈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의무감을 느끼지 않아. 그럴 생각도 없고.” “너... 역시 남자들은 다 똑같네!” 최정민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다 같은 패거리잖아!” 박한빈은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정민이 갑자기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손을 확 밀쳐냈다. “꺼져.”그의 목소리는 차가움을 넘어 얼음처럼 서늘했다. 최정민은 처음엔 분노에 차 있었지만 박한빈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보자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런데도 박한빈은 최정민에게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그때 매니저의 전화가 걸려 왔고 매니저는 그녀에게 당장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미 해고된 최정민으로서는 매니저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으니 그녀는 바로 자신의 물건을 챙겨 식당을 떠나버렸다.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최정민은 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 조금 전 그가 보였던 눈빛이 떠오른 최정민은 가슴이 갑자기 먹먹해졌다. 그와 다시 몇 마디라도 나눠볼까 다가가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의 표정과 분위기가 아까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한빈은 차 옆에 서서 차 안에 있는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정민은 거리가 멀어 차 안의 사람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사실 그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
최정민은 분명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죠?” 남자는 그냥 장난으로 가볍게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행동은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최정민의 강렬한 반응에 그는 멈칫했다가 곧 비웃듯 말했다.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제가 뭘 했냐고요? 방금 당신이 저를 만졌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봤을 거예요!” 최정민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그때까지 박한빈은 옆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최정민의 시선도 마침 박한빈에게 머물렀지만 이내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누가 널 만졌다고?” 남자는 여전히 조롱하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새로 들어온 거야?” “맞아요.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요! 이 방엔 CCTV가 있어요. 확인하면 당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나 올 겁니다!” 최정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는 최정민의 말에 잔뜩 화가 나서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감히 네가 지금 나한테 까불어? 네가 뭔데!” 이때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상황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남자는 체면이 깎이는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차분하고도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죠?” 그의 평온한 한마디는 남자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버렸다. 박한빈의 존재만으로도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서둘러 중재하려 했고 마침 식당의 매니저가 방으로 들어왔다. 최정민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매니저는 들어오자마자 오히려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방에서 끌어내며 남자들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했다. 당연히 최정민은 사과할 수 없다고
성유리는 병실 밖에서 잠시 머물다 천천히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병실 밖에 앉아 있는 김서영을 마주쳤다. 김서영은 병실 문 앞에 앉아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성유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돌아왔네?” 성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한빈이를 돌보느라 고생 많았어.” 김서영이 말을 이어갔다. “한빈이가 성격이 워낙 가만히 있질 못하잖아. 이렇게 아픈 상황에서도 매일 일을 하고 있으니 네가 잘 지켜봐 줘야 해.”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들의 관계가 아직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김서영이 그렇게 당부하니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김서영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계속 말했다. “비록 결혼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너희 둘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잖아. 그래서 나는 너무 기뻐.” 그녀는 성유리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잘 지내길 바란다. 약속할 수 있겠니?” 그 말에는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고 김서영의 눈빛도 사뭇 진지해졌다. 성유리는 순간 가슴이 뛰었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김서영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성유리는 왜 그녀의 부탁에 그렇게 쉽게 응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병실로 돌아갔을 때, 예상대로 박한빈은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고 그녀의 행동을 쳐다보던 박한빈은 그녀가 떠날 준비를 하자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집에 가요.” “아직 시간이 이른데 벌써 가려고?” “어차피 당신은 이제 간호가 필요 없잖아요?” 성유리는 그의 손에 있던 서류를 한 번 쓱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이렇게 일을 잘하고 있는 걸 보니.”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고 그녀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깨어났어요?” 그녀가 다가오자 박한빈의 얼굴에 서려 있던 감정이 단숨에 사라졌다.“정말 놀랐잖아. 얼마 전 갑자기 응급실 근무에 차출되어 며칠간 정신없이 바빴는데 오늘 간신히 핸드폰을 확인했어. 그리고 처음으로 너에 대한 뉴스를 확인했고.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최정민이 눈가가 붉어진 채로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눈살을 바짝 찌푸리며 물었다.“여긴 왜 온 거지?”“너 보러 왔지. 마침 이 방에 아무도 없고 나도 마침 퇴근해서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온 거였어. 그런데 네가 딱 깨어난 거야. 물 마실래? 내가 따라줄게.” “나가.” 최정민이 말을 이어가며 자리에 앉으려 하자 박한빈은 단호히 말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최정민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한 말은 못 알아들었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최정민은 처음엔 걱정과 열정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태도에 점차 무표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나가지 않고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냉정할 필요 있나? 그냥 잠깐 보러 온 건데.” 박한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최정민은 그의 태도에 이를 악물며 계속 말했다. “좋아. 내가 괜히 참견했네. 다음엔 안 오면 되잖아? 걱정 마, 너한테서 빌린 돈은 반드시 갚을 테니까. 돈 갚고 나면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 거야!” 최정민의 마지막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우리 사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던 거지? 또 누가 쟤랑 우리라는 말을 쓴다고?’ 그러나 박한빈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최정민은 이미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슬퍼 보였지만 그것은 박한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성유리는 언제 나간 거지? 혹시 이 상황을 보고 오해한 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박한빈은 급히 핸드폰
그들은 전에 훨씬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박한빈이 손에 힘을 살짝 풀자 성유리는 바로 손을 빼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를 조용히 쳐다보며 그녀가 먹여주기를 기다렸다. 결국 성유리는 계속해서 그의 요청에 응했고 이번에는 그도 얌전히 협조했기 때문에 한 그릇의 죽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하지만 박한빈은 곧바로 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기대앉아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숙여 도시락을 정리했다. “전 가볼게요. 푹 쉬세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지만 박한빈이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박한빈이 물었다. “나랑 잠깐만 더 있어 줄래?” 성유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하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그의 곁에 앉았다. 사실 박한빈은 그녀가 거절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조금 지나친 부탁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성유리는 예상과 달리 박한빈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지금 그녀는 박한빈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고작 20cm 남짓이었다. 병실 안에는 여전히 둘 뿐이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숨결이 매우 뚜렷하게 느껴졌다. 원래 박한빈은 잠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배를 든든히 채워서인지 점점 졸음이 밀려왔고 살짝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박한빈은 그날 아주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그는 성유리가 귀여운 딸을 낳는 장면을 보았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는 박한빈의 품에 안겨 있었고 마치 단단한 끈처럼 그와 성유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단단히 이어진 것 같았다. 박한빈은 그 아이가 자라난 모습도 꿈에서 보았는데 성유리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꿈속에서 굳게 다짐했다. 딸의 평생을 걱정 없고 평온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성유리는 그의 모습에 서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죠?” “그런데 사모님 의사 선생님께서 박 대표님은 이미...” 서훈은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눈을 쳐다보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박한빈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손에 넣었다. “죽 좀 끓여왔어요.” 그때, 성유리가 말했다. “이거 좀 드시고 푹 쉬세요.”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유리는 자기가 박한빈의 물건을 빼앗아 그가 화가 난 줄 알았고 입술을 오므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깨어나신 지 얼마 안 되셨기 때문에 잘 쉬셔야죠.” “...” 그 시각, 서훈은 조용히 서류를 건네받더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박한빈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빛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못 본 척 애써 무시하며 준비해 온 도시락통을 열었다. 도시락통 안에 들어있는 죽의 향긋한 냄새는 병실 가득 퍼졌고 죽이 너무 뜨거운 탓에 성유리는 조금 소분하여 박한빈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러나 순간, 박한빈이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목을 꽉 잡았고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몸이 굳어졌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더욱더 힘을 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손목에 고통이 느껴진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박한빈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 주는 거야?” 성유리는 그의 물음이 무척이나 웃겼다. 지금 병실 안에는 둘 뿐인데 박한빈을 주려는 것이 아니면 뭐겠는가?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계속 말했다. “안에 독 탔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박한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고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상처 부위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며 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하지만 박한빈은 통증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리며 누군가를 찾으려 했다. “대표님!” 서훈이 제일 먼저 박한빈의 움직임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달려와 그를 강제로 눕혔다. “지금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박한빈은 서훈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성유리는 어디 있습니까? 다친 데는 없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모님은 아무 이상 없으십니다.” 서훈이 서둘러 대답하자 박한빈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그러나 곧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은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훈은 그제야 박한빈의 의도를 깨달은 듯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 사실 어제 하루 종일 사모님께서는 계속 병원에 계셨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쉬시라고 설득해 보냈을 뿐입니다.” 그의 설명은 타당해 보였지만 박한빈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짧게 물었다. “그래요?” 박한빈의 물음에는 서훈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결혼식 날조차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았다. 만약 성유정이 난입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날 결혼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혹은 만약 성유정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난입했다면 성유리가 그를 따라가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입니다. 대표님.” 서훈은 박한빈의 눈 속에 서려 있는 냉랭한 감정을 알아보았고 이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게다가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 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성유리는 인간이 아닌 나무로 만든 인형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결혼식이 두 사람의 예상대로 평화롭고 순조롭게 진행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 그들 앞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실루엣은 무척이나 야위었지만 그 안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려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성유리는 그 사람이 달려드는 순간 가장 먼저 자신의 배를 감싸안았고 커다란 공포가 한순간에 성유리를 집어삼켰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지난번 성유정과 계단에 서 있었던 장면이었다. 그때 성유정은 손을 뻗어 자신을 계단 아래로 밀어버렸고 그 순간에도 성유정의 입가에는 지금과 똑같은 광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예상했던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눈을 천천히 떴고 그제야 성유정이 이미 현장의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눌려 있는 것을 보았다. “놔! 박한빈, 내가 널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아? 그리고 너 성유리! 네가 원흉이야! 다 너 때문이야!” “왜 돌아온 거야? 이건 원래 다 내 것이었어! 다 내 거라고! 왜 죽지 않았어? 왜 거기서 사라지지 않았냐고?!” “너 같은 건 죽어야 해! 너희 모두 다 죽어야 한다고!” 성유정은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다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의사를 불러오라고 외쳤다.‘의사를? 왜?’ 성유리는 의사를 왜 불러야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러다 시선을 돌린 그녀는 성유정의 손에 꽉 쥐어져 있는 과일칼을 발견했다. 그 칼에는 누군가의 선명한 피가 묻어 있었다. ‘저 피는 누구 꺼지?’ 성유리는 느리게 돌아가는 사고 속에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을 굳은 상태로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박한빈의 하얀 정장이 이미 빨간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한빈이 그녀를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