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가 몸을 일으킨 뒤 고개를 들어 남자의 입술에 키스하려는데 박한빈이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입술을 피했다.성유리의 몸이 약간 경직되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혀끝을 내밀어 박한빈의 목울대를 핥았다.박한빈의 몸이 움찔하더니 곧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성유리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머리카락이 흩어진 채 나른한 모습을 보니 비 오는 밤에 버려진 힘없는 새끼 고양이 같았다.박한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벨트를 풀었다.그녀를 말리려는데 성유리의 휴대폰이 빠르게 울렸고 슬쩍 시선을 돌리자 액정 위에 뜨는 이름이 단번에 시야에 들어왔다.진무열.익숙한 소리에 조금 정신을 차린 성유리의 몸이 살짝 흔들리더니 턱을 그러쥐고 있는 그의 손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휴대폰에 손을 뻗으려 했다.그런데 박한빈의 손이 곧바로 거칠게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며 단번에 그녀의 입술로 파고들었다.몸의 열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녀의 입술은 박한빈의 키스로 고통에서 해방된 듯했고 성유리는 조금 전 통화도 잊은 채 그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싸며 화답했다.차 안 칸막이가 올라가면서 공간이 한층 더 비좁아졌고 온도는 금세 위로 치솟았다.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은 채 귓가엔 두 사람이 주고받는 거친 호흡 소리와 자신의 격렬한 심장 박동 소리만 들릴 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지속되는 약효에 성유리는 곧 키스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박한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가져오더니 다소 차가운 그의 손끝으로 열기를 식히려 했다.박한빈은 손을 빼지 않았다.2년 동안 부부로 지냈기 때문에 성유리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성유리의 숨결이 점점 더 거칠어지며 손끝이 그의 목과 팔을 거듭 맴돌았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을 녹이진 못했다.“박한빈 씨...”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을 터뜨렸다.그 나른한 모습이 마치 과거로
나중에 성유리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도착했는지 알지 못했다.그녀의 세계에 오직 박한빈이라는 존재만 남은 듯 떨어질 수도 없다는 듯이 그에게 매달려 그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취하도록 내버려두었다.이성을 버리고 본능에만 몸을 맡긴 대가로 다음날 그녀는 깨어났을 때 거대한 차에 짓눌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목구멍은 타들어 가듯 갈증이 일었고 살짝 몸을 움직이기 바쁘게 다리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어쩔 수 없이 끙끙대며 침대에 누워 한참을 쉬다가 겨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곳은 낯설었다.그녀가 지내는 작은 월셋집도, 도연제도 아니었다.박한빈이 금성에 수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 또한 놀랍지도 않았다.성유리는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허리를 굽혀 옷을 주운 다음 최대한 천천히 입었다.그녀가 방에서 나왔을 때 휴대폰도 켜졌고 거기에는 수많은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성유리가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일어났어?”성유리의 발걸음이 멈췄다!그 순간 성유리는 서서히 온몸의 피가 얼어붙으며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박한빈이 다른 방문 앞에 선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직... 안 갔어요?”성유리는 입을 열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쉬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순간 어젯밤 화면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얘기 좀 해.”말하며 박한빈이 그녀를 지나쳐 거실 쪽으로 향했고 성유리는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어젯밤 실수로 마시면 안 되는 술을 마셨을 뿐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건 아니었기에 자신과 박한빈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그랬기에 지금 더더욱 어떻게 그의 얼굴을 봐야 할지 막막해서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의 맞은편 좌석에 앉은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어젯밤에 진무열이
“응, 만족해.”박한빈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그럼 이제 가도 되죠?”그 말과 함께 성유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곧바로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 너 약에 취했다고 해서 어젯밤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한 채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단 몇 초 만에 성유리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그녀에게 어떤 대가를 원하는 걸까, 이걸 빌미로 협박하려는 걸까?아니면 단순히...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는 변명일까?마지막 생각이 떠올랐을 때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잠재우려 했지만 그 전에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양어머니 병원에 계시지?”“뭐 하려고요?”성유리의 표정이 확 바뀌며 분노와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슬쩍 볼 뿐이었다.“내가 더 좋은 병원에 모실 수도 있어. 병원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책임질게.”“당신... 그게 무슨 뜻이에요?”“무슨 뜻일 것 같은데?”“제 생각엔... 박 대표님처럼 고귀하신 분한텐 제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말하는 성유리의 목소리가 씁쓸했고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가볍게 두 번 돌린 뒤 다시 말했다.“그래도 우리가 잘 맞는 부분은 있잖아.”그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했고 그가 말하는 잘 맞는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한참이 걸렸다.순간 그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박 대표님은 지화그룹 대표이고 금성에서 알아주는 귀한 분이니 마음만 먹으면 알아서 달려오는 여자가 수두룩한데 왜 하필... 저와 엮이려는 거죠?”“알고 있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잠시 멈칫했다.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네 눈에는 나랑 그 절름발이 조경우, 바깥에서 데려온 잡종 진무열이 별반 다를 게 없는 줄 알았지.”성유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어떠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를 꽉 깨문 성유리의 목소리가 극도로 갈라져 있었다.성유리는 그동안 이미 그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스스로 과대평가를 한 것이었다.이제 성씨 집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만이 몇 마디 말만 해도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그녀의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것 같았다.박한빈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응시하다가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억울해? 그럼 이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다른 남자랑 맞선 보는 건 얼마나 고고한 행위지?”성유리가 말하지 않자 박한빈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그리고, 어젯밤에 내 침대에 먼저 기어오른 건 너야. 그땐 왜 천박하다는 생각 안 했어?”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조롱하는 듯한 표정이 꼭 성유리의 뺨을 손으로 때린 것 같았다.성유리는 이를 악물었지만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은 점점 느슨해졌다.박한빈은 그녀와 빙빙 말을 주고받을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성유리, 사실 너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이 말을 남기고 그가 걸음을 옮겨 앞으로 가려는 순간 뒤에서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기간은요?”박한빈의 발걸음이 멈췄다.그가 고개를 돌리자 성유리도 마침 고개를 들었다.이미 눈꼬리는 빨개져 있었고 입술은 깨물어 피가 나는데도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 자신을 바라보던 촉촉한 눈동자가 떠올라 목울대가 꿈틀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2년으로 하자.”성유리는 더욱 이를 꽉 물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박한빈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어디 가는 거야?”“제집으로 가야죠.”대답을 마친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오늘은 내가 필요 없죠? 필요할 때 올게요.”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그녀의 마음은 한결 진정된 상태였고 사무적인 어투는 둘 사이의 일을 완전히 거래 취급하고 있었다.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성유
미화로 37번지, 여기가 성유리의 현재 지내는 곳이었고 박한빈은 처음 와 본다.아무리 오늘날 지화그룹이 부동산 업계에서 굴지의 대기업이라고 해도 성유리가 앞장서지 않았다면 금성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성유리는 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앞에 있던 기사에게 감사하다는 말만 남긴 채 뒤돌아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뜻밖에도 박한빈이 그녀의 뒤를 따라 함께 내렸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해요?”“올라가서 보려고.”성유리는 대체 그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는지 알 턱이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불편해요.”“왜 불편해?”박한빈은 옆 벽에 붙어 있는 여러 광고들을 흘끗 훑어보다가 다시 물었다.“집에 다른 사람 있어?”“당연히 없죠!”“그럼 뭐가 그렇게 불편한데?”성유리는 목소리를 높였다.“굳이 거기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잖아요.”“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게 다야.”박한빈은 천천히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그동안 우리 관계는 깨끗하게 유지했으면 좋겠어.”“날 못 믿으면서 왜 날 찾는 건데요?”“어젯밤 일을 내가 몇 번이나 상기시켜 줘야 하지?”성유리는 더 대꾸하지 못했다.그제야 어젯밤의 일로 자신과 박한빈 관계에서 자신이 완전히 을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심지어 수치스러운 모욕까지 당해야 했다.그녀가 먼저 시작했으니 결국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성유리는 더 그와 말을 섞지 않고 곧바로 뒤돌아 걸음을 옮겼고 박한빈이 그 뒤를 따랐다.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그의 미간은 점점 더 찡그려졌다.비좁은 계단, 축축하고 눅눅한 벽, 구석진 곳에는 온갖 쓰레기가 방치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악취가 진동했다.박한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곳이 성유리가 말한 ‘집’이 될 수가 있는 거지?더 어이없는 것은 그녀가 이런 곳에 살면서도 자신이 주는 건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성유리의 발걸음은 3층에서 멈췄고 곧 고개를 숙인 채 문을 열었다.안의 상태를 확인한 박한빈의 표정
그렇게 기를 쓰고 떠나서 지내는 곳이 고작 손바닥만 한 이 집이라고 조롱하는 거겠지.성유리가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데 짧게 대꾸한 박한빈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뒤돌아 가버렸다.문 앞에 다다르자 그는 갑자기 멈춰 서서 말했다.“열쇠는 바꾸는 게 좋겠어. 여기 이상한 사람 많은데 안전 생각해야지.”말을 마친 후 그는 성유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알아서 걸어 나갔다.언제나처럼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이었다.성유리는 잠금장치를 힐끗 쳐다보고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쾅!단호한 소리에 계단을 내려오던 박한빈이 살짝 멈칫했지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갔다.운전기사가 도로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초호화 모델과 차량 번호판은 순식간에 많은 구경꾼을 끌어모았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를 굽혀 차에 올랐다.운전기사는 그에게 문을 닫아주고는 앞쪽 운전석으로 돌아갔다.시동을 걸고 한참을 운전하던 중 갑자기 앞에 스쿠터 한 대가 나타나며 부딪힐 뻔했고 겁에 질린 스쿠터 주인은 얼른 차에서 내려 연신 사과를 했다.“별일 없으면 그냥 가.”박한빈이 상대와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스럽게 말하는데 이윽고 기사가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저 사람 성유리 씨 아니에요? 어디 가는 걸까요?”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성유리는 이미 심플한 티셔츠와 반바지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채 그들을 등지고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그녀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근처 약국으로 걸어 들어갔다.박한빈은 손을 말아쥐며 입꼬리가 경직되었다.“대표님, 성유리 씨 어디 아픈 거 아닐까요? 가서...”“운전해.”박한빈이 극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성유리는 약을 사자마자 바로 삼켰다.하얀 알약은 맛조차 성유리에겐 이미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아무리 익숙해도 쓴맛은 여전히 그녀의 입속을 맴돌며 사라지지 않았다.그녀가 뒤돌아
“그래.”성유리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성유리, 그럼 네가 뭔데 날 비난해? 너도 박한빈이랑 만나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잖아?”그의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고 뭐라고 대꾸하려던 찰나 진무열이 멋대로 말을 이어갔다.“네가 아직 그 사람 포기 못 한 게 아니면 왜 하필 그 사람 차를 탔어? 왜 병원으로 안 갔어? 그러고도 이게... 네가 꾸민 짓이 아니야? 성유리,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내가 잘못했어. 이런 내 마음은 감당 못 한다면서 본질적으로 너랑 내가 다를 게 뭔데? 어젯밤에 그 사람이 널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그 사람 차에 탄 거지?”대낮에 강한 햇살이 두 사람에게 내리쬐자 피부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온몸에 서늘함만 감돌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 불끈 쥐고 있던 주먹도 힘이 풀렸다.진무열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허를 찔렀다고 생각하곤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동안 그의 눈동자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박한빈도 알아?”그가 말하자 성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진무열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통화 중이었다.“네가 작정하고 자길 이용한 거?”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은 뒤 성유리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저 입술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고 성유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 다 했지?”진무열은 대답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조금 전 그의 말을 묵인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가려는데 진무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 이제 너한테도 기회 없어. 사랑할 사람과 함께할 기회.”그의 말에 성유리의 발걸음이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 걸음을 옮겼다.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에 있던 사람이 소리쳤다.“이봐요!”성유리는 이곳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인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대방이 자신을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
그녀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어젯밤 제대로 자지 못한 성유리는 지금 탈진할 정도로 몸이 지쳐있었지만 이 시간에도 그녀는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결국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창밖 풍경은 보이지 않았고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빽빽한 집들과 바깥 발코니에 걸려 있는 다양한 색깔의 옷들뿐이었다.성유리는 몸을 뒤척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이제 겨우 잠이 올까 싶었는데 옆에 있던 휴대폰이 두 번 진동했다.성유리가 무시하려는데 상대가 끈질기게 연달아 메시지를 계속 보내며 진동이 끊기지 않았다.성유리가 막 확인하려던 찰나 성유정의 전화가 걸려 왔고 끊기 바쁘게 상대는 전화를 다시 걸었다.결국 성유리가 아예 번호를 차단해 버리자 성유정은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더 이상 그녀와 놀아줄 흥미가 없었던 성유리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성유리, 이 나쁜 년!”반대편에 있던 성유정이 곧바로 욕설을 퍼부었다.“어젯밤에 한빈 오빠랑 같이 있었지? 어떻게 뻔뻔하게 오빠를 찾아가? 차라리 죽지 그래? 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한빈 오빠 꼬드겨서 아빠랑 협상하라고 한 게 아니었으면 이번에 결혼식장에 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너 나랑 한빈 오빠 만나는 거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지? 악독한 년. 한빈 오빠랑 결혼할 사람은 나였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빈 오빠 곁에 있었는데 네가 뺏어갔잖아! 다 너 때문이야! 넌 왜 안 죽고 살아있는 거야?”성유정의 욕설이 쉬지 않고 들려오고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정신력이 제대로 무너진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조금 전 말의 요지를 단번에 파악했다.“박한빈이 회장님과 협상했다고? 뭘?”“성유리, 모르는 척하지 마! 네가 꼬드긴 게 아니면 한빈 오빠가 왜 프로젝트를 넘기면서까지 아빠한테 너랑 다른 사람 정략결혼을 취소하라고 해? 네가 다 망쳤어. 한빈 오빠를 2년 동안 해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성유리는
성유리는 그때 말했다.하늘이는 이날을 정말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까 꼭 하루 종일 시간을 내서 함께 있어 달라고.박한빈은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하지만 지금, 이 모든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걸까?“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어?”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물었다.그러자 하늘이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다 금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박한빈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하늘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박한빈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그토록 자신 있던 일조차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박한빈도 안다.하늘이를 엔젤 월드에 두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을.그는 너무 바빴고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도 몰랐다.하지만 박한빈은 하늘이를 데려오고 싶었다.실버 포레스트, 그들의 집으로.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혼자 돌아오는 집, 텅 빈 공간, 모든 것이 그대로인 듯 보이지만 단 하나만이 비어 있는 공간.그곳은 오직 하나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성유리는 이곳에 없다.그리고 만약 하늘이까지 없어진다면 박한빈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어쩌면 그 모든 순간이 박한빈의 행복이 그저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갇히게 될 테니까 말이다.하지만 하늘이를 데려온 것이 정답이 아니었음을 그는 곧 깨달았다.아이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고 박한빈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커다란 식탁,단둘이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들려오는 것은 오직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뿐.박한빈은 새우를 까서 하늘이의 그릇에 놓으려 했지만 아이는 피해버렸다.그리고 담담히 말했다.“안 먹어요.”아이가 정말 새우를 싫어했었나?박한빈은 기억나지 않았다.그러나 분명 전에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새우를 까주곤 했다.그렇다면 하늘이는 정말 새우를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박한빈이 까준 것을 먹기 싫은 걸까?그는 더 깊이 묻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히 새우를 먹었다.그렇게
장성 그룹은 최근 금성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이 되었다.몇 건의 대형 프로젝트를 따낸 것은 물론 해외 기업과의 협력 프로젝트가 국제적으로 상을 받으며 명성을 쌓았다.그 결과, 마치 지화 그룹조차 그 빛에 가려지는 듯했다.박한빈은 알고 있었다.이 모든 것이 사씨 가문의 지원 덕분이라는 것을.그렇지 않고서야 유효정이 연정우에게 남긴 자금만으로 이 정도 성과를 이루기는 불가능했다.하지만 아무렴 어떤가.사씨 가문이라 해도 박한빈에게는 눈엣가시일 뿐이었다.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직접 손을 쓸 수 있었다.하지만 에릭이 말한 것처럼 국내의 법과 규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몇 달, 길게는 일 년도 걸릴 수 있었다.그런데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한 달.그것이 그의 인내심이 닿을 수 있는 한계였다.성유리의 소식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면 박한빈은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차가 도착한 곳은 엔젤 월드.박한빈이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하늘이는 뒷마당에 서 있었다.나무 아래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뒷모습.그는 아이를 부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고 가까이 다가가서야 깨달았다.하늘이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은 한 마리 나비였다.그러나 그 나비는 이미 사마귀에게 붙잡혀 있었다.가만히 놔둔다면 나비는 이제 곧 먹혀버릴 운명이었다.“구해주고 싶어?”박한빈이 하늘이에게 물으며 손을 뻗으려 하자 하늘이가 바로 대답했다.“아니요.”그 순간, 박한빈의 손이 멈췄다.“약육강식.”하늘이는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자연의 법칙이에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고개를 숙여 하늘이를 바라보았다.그러나 아이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물론 하늘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한 편이었다.하지만 성유리 앞에서는 언제나 밝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그런데 지금 그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그사이 나비의 날개는 찢겨 나가고 몸뚱이는 천천히 먹혀 사라졌다.그렇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무표정하게 홍지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곁에 있던 경비원을 쓱 쳐다보았다.사실 경비원은 막 홍지은을 제지하려던 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만삭이었다.둥글게 부푼 배가 눈에 띄었고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문제가 생길까 봐 선뜻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의 시선이 느껴지자 아무리 홍지은이 잘못될까 두려워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놔! 네가 뭔데? 당장 이 손 떼라고!!”경비원에 의해 제지당한 홍지은이 더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그러나 그녀를 붙잡은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결국, 홍지은은 그 자리에서 속수무책으로 박한빈이 자신을 지나쳐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홍지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러다 갑자기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알겠다! 그 계집애 죽었지? 그래, 아주 잘됐네. 원래부터 죽어 마땅한 년이었으니까.”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박한빈의 걸음이 뚝 멈췄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바라보았다.홍지은은 더욱 독하게 그를 저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어차피 이제 자신에겐 남은 것도 없었다.집도, 회사도, 공장도 모조리 압류당했다.심지어 남편마저 그녀를 재수 없는 존재라며 외면했다.모두가 그렇게 믿었다.홍지은이 성유리를 건드린 탓에 이런 비참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박한빈을 적으로 돌렸기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고.하지만 그녀는 억울했다.공장을 살리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한 것도 자신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잃게 된 건 자신뿐이었다.그런데도 사람들에게는 비난할 자격이 있었다.그리고 박한빈과 성유리.그 둘이야말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장본인이었다.홍지은의 눈에 분노와 원망이 서렸고 더욱 많은 독설을 퍼붓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 그대로 얼어버렸다.박한빈의 눈을 마주친 순간, 마치 무언가가 목을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숨이 막혀 손끝과 머리까지 싸늘히 식어갔다.그러나 박한빈은 아
“한빈아?”김서영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김서영의 몸이 움찔했다.“무슨 일입니까?”박한빈이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잠시 망설이던 김서영이 입을 열었다.“한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우선 돌아가서 좀 쉬어. 하늘이는 내가 곁에서 봐줄게.”“그럴 필요 없습니다.”박한빈은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하늘이에게 여기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그래도...”“먼저 돌아가세요.”박한빈은 김서영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하늘이를 바라보았다.김서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조용히 먼저 물었다.“성유리는 아직도 소식이 없어?”그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몸이 미세하게 굳어졌으나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괜찮습니다. 찾을 수 있어요.”“설령 찾지 못한다고 해도... 유리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거예요.”성유리의 실종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사씨 저택 내 모든 감시 카메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만큼 이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게다가 성유리의 교통수단 이용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그 말은 즉, 누군가가 그녀를 데리고 사씨 저택을 빠져나간 후 바로 차에 태웠다는 뜻이었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분명 연정우가 미리 계획해 둔 것임이 분명했다.심지어 자신을 에릭의 문제로 떠나게 만든 것조차 그가 미리 계산한 수단일 가능성이 높았다.사씨 부부 두 사람 또한 혹시 이 일에 개입한 걸까?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그들이 입을 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박한빈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두 사람이 입을 열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그 변화를 감지한 김서영이 조심스럽게 불렀다.“한빈아?”그제야 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서영의 말을 듣고서야 박한빈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어서인지 일어나는 순간 어지러움이 몰려와 그는 잠시 가만히 서서 정신을 가다듬고 난 후에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하늘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이전에는 많이 회복된 상태였지만 재발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소한 감기나 열조차도 재발의 신호일 수 있었다.이런 하늘이의 상황을 잘 알기에 김서영은 초조함에 눈가까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박한빈을 보자마자 늦게 온 걸 책망하려던 참이었으나 그가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신, 낮은 목소리로 아들인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가서 하늘이 좀 봐.”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병실로 향했고 그 시각 하늘이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며칠 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살이 빠진 게 느껴졌다. 산소마스크를 착용한 채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모습이 박한빈의 가슴을 죄어왔다.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곁에 앉아 나지막이 불렀다.“하늘아.”그제야 하늘이가 천천히 눈을 떴고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던 박한빈을 하늘이가 입을 열었다.“엄마는요?”박한빈은 대답할 수 없었다.원래도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가 이 순간에는 아예 막혀버린 듯했다.“일이 좀 있어서... 며칠 뒤엔 돌아올 거야.”결국 박한빈이는 하늘이한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그런 서툰 거짓말로 자신조차 속일 수 없었는데 하물며 하늘이가 믿을 리 없었다.하늘이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 잠시 후,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가... 저를 버린 거예요?”그 말을 꺼내자마자 하늘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커다란 물방울들이 베개 위로 떨어지며 금세 얼룩을 만들었다.아이의 눈물에 박한빈은 순간 당황했고 황급히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면서도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적어도, 단 하나의 거짓말이라도.하지만 무슨 말을 할 수
박한빈과는 달리 연정우의 표정은 한없이 차분했다. 오히려 박한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의문마저 섞여 있었다.그러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박 대표님, 그걸 저한테 물어보는 게 맞으십니까? 유리는 당신 아내잖아요. 그런데 지금 저한테 와서 유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이게... 적절한 질문입니까?”연정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런 말을 다시 덧붙였다.“아니면 무슨 증거라도 있나요? 제가 유리를 데려갔다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선 채로 연정우를 노려볼 뿐이었다.단단히 쥐어져 있던 박한빈의 두 손이 서서히 풀어지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좋아요. 연정우 씨. 이건 당신이 선택한 겁니다.”말을 마친 그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하지만 연정우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박한빈의 뒷모습을 한 번 바라본 후, 입가에 얕은 미소를 띠며 주위의 직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다들 할 일 없으면 어서 돌아가서 업무들 보세요.”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직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한편, 박한빈은 이미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금성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다.도시 전체를 뒤집어 찾는다면 성유리를 못 찾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다.“죄송합니다. 박 대표님.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그 대답이 또다시 들려오는 순간, 박한빈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성유리는 정말로... 사라져 버렸다.아무런 흔적도 없이.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건, CCTV에 찍힌 성유리의 손끝뿐.그 외에는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 어떤 행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처음엔 불안과 분노가 그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조차 사라지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어두운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뭔가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유리는 나를
박한빈은 단 한 번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는 몸을 돌려 뒤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짧게 명령했다.“찾아.”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러자 류수미가 다급히 외쳤다.“박한빈 씨! 여긴 사씨 저택입니다!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이 무단 침입이라는 거 모르세요?”“제 아내가 당신들께서 주최한 파티에 참석하러 왔는데 실종됐습니다.”“그런데 제가 이곳을 수색하는 게 뭐가 문제죠?”“설마 저희가 유리를 숨겼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박한빈은 그들의 반응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경찰 측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성유리 씨는 누군가에게 끌려갔을 가능성이 큽니다.”상대방의 말에 박한빈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범인은 사씨 저택의 구조를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CCTV가 설치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성유리 씨를 데려갈 때 모든 감시를 피해 움직였습니다.”그들이 포착한 건 단 한 장의 장면이었다.카메라 구석에 스치듯 찍힌 아주 잠깐 드러난 손목 한 조각.성유리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축 늘어진 팔이 순간적으로 화면에 포착된 것이었다.고작 2초 남짓한 짧은 영상이었지만 박한빈은 그 한순간을 보고도 확신했다.“이건 성유리가 맞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그럼 지금 유리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현재 차량 소유자를 추적 중입니다.”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바로 경찰과의 통화를 끝냈다.그리고 마치 한순간 힘이 빠진 풍선처럼 옆 벽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었다.그 순간, 류수미의 날 선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이제 확실해졌죠? 유리는 여기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주세요!”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런 태도에 류수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참다못한 그녀가 박한빈을 향해 다가와 뺨을
박한빈은 현재 도한시에 머물고 있었고 그 무렵 에릭은 막 보석으로 풀려난 참이었다.사실 이번 일은 그에게도 꽤 억울한 일이었다. 애초에 초대받은 손님일 뿐이었고 문제의 물건을 가져온 것도 그가 아니었다.정작 그걸 들고 온 사람은 죽었고 에릭과 함께 있던 사람들만 모조리 곤경에 빠졌다. 하지만 에릭은 신경 쓰지 않았다.어차피 자신의 결백만 입증하면 이곳 사람들은 그에게 어찌할 수 없었다.문제는 박한빈이었다.그의 기본적인 사업들은 여전히 국내에 있었고 만약 이번 사건과 관련된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그에게 미칠 영향은 치명적일 터였다.그래서 직접 금성에서 이곳으로 넘어와 경찰 수사에 협조한 것이다.이곳 경찰이 그의 결백을 증명해 준다면 박한빈을 음해하려던 언론 보도는 모두 허위 사실 유포가 될 테니까.박한빈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는 걸 알면서도 에릭은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일은 정말 고마워.”박한빈은 그를 쓱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휴대폰을 들고 화면 속의 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에릭은 한국어를 말하기는 가능했지만 글자는 읽을 줄 몰랐다.그래서 박한빈의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를 봐도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그제야 에릭은 상황을 눈치챘다.“네 아내야?”침묵하던 박한빈이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본 에릭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설마 화난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그냥 나랑 같이 해외로 가는 게 어때? 여기는 제약이 너무 많잖아. 이런 것만 없었어도 너도 굳이 이렇게까지... 야, 내 말 듣고 있긴 해?”박한빈은 에릭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핸드폰을 손에 쥔 채 몇 초 더 기다려 봤지만 성유리의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휴대폰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에릭이 뒤에서 뭐라고 말했는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걸어가면서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걱정스러운 마음에 박한빈의 미간이 점점 더 잔뜻 찌푸
비록 그때의 연정우는 단순한 ‘공범’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친척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오해를 받아야 했다.하지만 정말로 선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들을 돕는 선택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이 터졌을 때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무마하고 수습하려 하지 않았을 거고.권력이라는 것은 중독성 강한 독과도 같아서 한 번 손을 대면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그렇지만 피라미드 꼭대기에 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그 자리에 오르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제일 위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 그리고 성유리의 존재로 인해 연정우가 바라보게 된 대상은 박한빈이었다.더군다나 박한빈 때문에 한때 잃어버린 것들이 있었으니 연정우가 그를 증오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심지어 성유리는 나중에 연정우가 자신에게 그렇게 집착한 것도 단순한 감정 때문만이 아니라 박한빈을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사업적인 수법과 벌이로는 박한빈을 뛰어넘기 어려웠지만 만약 성유리와 함께한다면?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일종의 승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그래서였을까. 박한빈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연정우가 끝까지 자신과 함께 장례식에 가려 했던 이유는 그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박한빈이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을 결국 자신이 가졌다는걸.성유리는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 연정우에게 말했다.그 말투는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듯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였다.감정이 배제된 그저 객관적인 관찰자 같은 어조로.“그러니까 네가 피해자라고 착각하지 마.”성유리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어쩌면 넌... 단 한 번도 날 진짜로 좋아한 적이 없을지도 몰라. 네가 좋아했던 건 박한빈을 이긴다는 그 감정이었을 뿐이야.”그 말이 끝나자 연정우가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정말... 너무하네.”그가 힘없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어찌 됐든 우리는 함께했던 사이였어. 심지어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