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성유리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성유리, 그럼 네가 뭔데 날 비난해? 너도 박한빈이랑 만나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잖아?”그의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고 뭐라고 대꾸하려던 찰나 진무열이 멋대로 말을 이어갔다.“네가 아직 그 사람 포기 못 한 게 아니면 왜 하필 그 사람 차를 탔어? 왜 병원으로 안 갔어? 그러고도 이게... 네가 꾸민 짓이 아니야? 성유리,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내가 잘못했어. 이런 내 마음은 감당 못 한다면서 본질적으로 너랑 내가 다를 게 뭔데? 어젯밤에 그 사람이 널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그 사람 차에 탄 거지?”대낮에 강한 햇살이 두 사람에게 내리쬐자 피부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온몸에 서늘함만 감돌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 불끈 쥐고 있던 주먹도 힘이 풀렸다.진무열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허를 찔렀다고 생각하곤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동안 그의 눈동자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박한빈도 알아?”그가 말하자 성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진무열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통화 중이었다.“네가 작정하고 자길 이용한 거?”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은 뒤 성유리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저 입술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고 성유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하고 싶은 말 다 했지?”진무열은 대답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조금 전 그의 말을 묵인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가려는데 진무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 이제 너한테도 기회 없어. 사랑할 사람과 함께할 기회.”그의 말에 성유리의 발걸음이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계속 걸음을 옮겼다.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기도 전에 맞은편에 있던 사람이 소리쳤다.“이봐요!”성유리는 이곳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인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대방이 자신을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
그녀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기회가 없을 거라고.어젯밤 제대로 자지 못한 성유리는 지금 탈진할 정도로 몸이 지쳐있었지만 이 시간에도 그녀는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결국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창밖 풍경은 보이지 않았고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빽빽한 집들과 바깥 발코니에 걸려 있는 다양한 색깔의 옷들뿐이었다.성유리는 몸을 뒤척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이제 겨우 잠이 올까 싶었는데 옆에 있던 휴대폰이 두 번 진동했다.성유리가 무시하려는데 상대가 끈질기게 연달아 메시지를 계속 보내며 진동이 끊기지 않았다.성유리가 막 확인하려던 찰나 성유정의 전화가 걸려 왔고 끊기 바쁘게 상대는 전화를 다시 걸었다.결국 성유리가 아예 번호를 차단해 버리자 성유정은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더 이상 그녀와 놀아줄 흥미가 없었던 성유리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성유리, 이 나쁜 년!”반대편에 있던 성유정이 곧바로 욕설을 퍼부었다.“어젯밤에 한빈 오빠랑 같이 있었지? 어떻게 뻔뻔하게 오빠를 찾아가? 차라리 죽지 그래? 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한빈 오빠 꼬드겨서 아빠랑 협상하라고 한 게 아니었으면 이번에 결혼식장에 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너 나랑 한빈 오빠 만나는 거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지? 악독한 년. 한빈 오빠랑 결혼할 사람은 나였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한빈 오빠 곁에 있었는데 네가 뺏어갔잖아! 다 너 때문이야! 넌 왜 안 죽고 살아있는 거야?”성유정의 욕설이 쉬지 않고 들려오고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정신력이 제대로 무너진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조금 전 말의 요지를 단번에 파악했다.“박한빈이 회장님과 협상했다고? 뭘?”“성유리, 모르는 척하지 마! 네가 꼬드긴 게 아니면 한빈 오빠가 왜 프로젝트를 넘기면서까지 아빠한테 너랑 다른 사람 정략결혼을 취소하라고 해? 네가 다 망쳤어. 한빈 오빠를 2년 동안 해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성유리는
성유리에겐 익숙한 글자였다.도연제에 있을 때도 박한빈은 필요할 때마다 그녀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지금 그 문자를 보고 있자니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났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기사로부터 연락이 왔다.“사모님, 저 미화로 쪽에 있는데 차가 골목으로 못 들어가니 나와주셔야겠어요.”성유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하지 않자 오 기사가 다시 한번 불렀다.“사모님?”“알겠어요.”성유리는 겨우 대답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사모님!”오 기사는 다른 차로 바꿨는데 이 혼잡하고 우울한 도심 속 시골에서 은백색의 파나메라가 눈에 띄었다.성유리는 차에 탈 때 옆집 여자를 발견했고 노란 머리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성유리는 무시했다.오 기사는 그녀에게 문을 닫아주고는 앞쪽 운전석으로 돌아갔다.“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사모님. 조금 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들었으니까 다음번에는 제가...”“저랑 박한빈 씨는 이미 이혼했어요.”성유리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상기시켰다.“그냥 성유리라고 불러요.”“대표님이 저한테 모시러 오라고 하셨어요.”그런데 오 기사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제가 봤을 땐 대표님 아직 사모님 마음에 두고 계신 것 같아요. 안 그럼 저보고 모시러 오라고 하지도 않았겠죠. 어제 대표님 정말 초조해하셨어요. 사모님 먼저 나오시지 않았으면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을걸요.”오 기사는 진심을 담아 말했고 성유리는 문득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제 박한빈이 호텔 근처에 있었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고요?”“당연히 아니죠. 대표님 어제 성유정 씨랑 식사하셨는데 성유정 씨한테서 사모님에게 무슨 일 생겼다는 걸 들었나 봐요. 그때 얼마나...”오 기사가 그 뒤에 무슨 말을 했는지 성유리는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차가 언제 시월 파크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박한빈이 알려준
하지만 지금은 마음속이 시리도록 차가울 뿐이었다.“왜요?”그녀는 박한빈에게 다시 물었고 상대가 이런 식으로 쏘아붙이는 걸 싫어하는 박한빈의 눈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담겼다.성유리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만 이어갔다.“그래도 우리가 나름 2년 동안 부부로 지냈으니까 나에 대해 잘 알고 날 믿어서? 아니면... 어젯밤에 벌어진 일이 사실은 당신 작품이라?”앞선 말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박한빈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단번에 표정이 싸늘해졌다.“무슨 소리야?”“아니지, 끼어들지는 않았겠죠.”성유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렇게 대단하신 박 대표님께서 굳이 그런 수작을 부리지는 않겠죠. 하지만 다 알고 있었던 거죠? 지난번에 지석민이 그 식당에 나타난 것도 사실은 우연이 아닌 거죠?”성유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분해졌다.이런 질문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오늘 성유정에게 걸려 온 전화가 그녀를 정신 차리게 했다.은밀한 곳에 있는 식당을 조경우가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예 존재조차 몰랐을 텐데 지석민은 그러면 어떻게 알았을까?그녀의 과거를 알고 하루빨리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성유정뿐이다.그렇다면 박한빈은?거기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손 놓고 지켜보기만 했나?그러다 그녀가 무기력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손을 뻗어 구해주면서 충직한 개를 길들이듯 자신을 고마워하도록 만들었다.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야?”“난 진실을 알 자격도 없어요?”“무슨 진실? 내가 그렇게 해서 얻을 게 뭔데?”“당신이 한 짓은 아니죠. 하지만 다 알고도 일이 벌어지는 걸 방관하고 있었죠, 아니에요?”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고 피식 웃은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걸음을 옮겨 가려는데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그걸 왜 막아야 하는데? 아니,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막을까? 잊지 마, 우린 이혼했어. 네가 아직 내 아내였다면 아마...”“그랬을까요?
울고 싶지 않았다.아주 어릴 적부터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통하는 것이라고 배웠고 박한빈은 누가 봐도 그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흘리는 이 눈물은 더더욱 그의 혐오감만 불러올 뿐이었다.성유리는 재빨리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듯 닦아냈다.박한빈은 그녀의 바로 맞은편에 서서 이마를 살짝 찌푸린 채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성유리는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물었다.“내가 사고 난 날 밤에 당신 어디 있었어요?”“뭐?”“내가 유산한 날 밤, 당신 어디 있었어요?”박한빈은 말이 없었고 성유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벼워졌다.“성유정 말로는 그날 밤에 자기 생일 선물 사주려고 경매장에 있었다고 하던데, 맞아요?”“예전부터 사달라고 한 거였고 네 이른... 그냥 사고였어.”박한빈이 말했다.이런 것도 해명이라면 해명인가?성유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세상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몸까지 떨며 웃는 그녀는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결코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다.“박한빈 씨, 그거 사고 아니에요.”그녀가 박한빈에게 말했다.“성유정이 날 계단에서 밀었어요.”그의 이마에 금세 미간이 찌푸려졌다.성유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하려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하려던 말이 천천히 사라졌다.“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죠?”성유리가 물었다.“이미 지나간 일이야.”박한빈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지나간 일?”성유리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박한빈 씨, 당신에겐 그저 한낱 생명 없는 핏덩어리일 뿐이죠? 하지만... 그건 내 아이예요. 박한빈 씨, 당신 돌아오고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아픈지 안 아픈지 물어본 적 있어요? 그리고 우리 결혼기념일엔 어디 있었어요? 내 생일에는 또 어디 있었는데요?”성유리가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2년 동안 머릿속에만 맴돌다가 이제야 출구를 찾은 듯 와르르 쏟아져나왔다.이젠 더 이상 의미는 없었지만.박한빈은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
“성유리, 기억해. 우리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는 내 손에 달렸어. 애초에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순조로운 이혼이 가능했을 것 같아?”그 말에 여전히 힘을 주고 있던 성유리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박한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슬픔이나 분노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의 말이 맞다.그녀에게 무슨 권리가 있겠나.그의 눈에 그녀는 그저 물건에 불과한 것을.예전에는 대를 이어줄 아내였고 지금은... 그저 욕구나 해소하는 도구일 뿐인걸.성유리의 이런 차분한 표정은 박한빈에게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저도 모르게 그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지며 곧바로 성유리의 턱을 움켜잡은 채 거칠게 입 맞추었다.입술이 맞닿는 순간 성유리가 또다시 툭 눈물을 흘렸고 그 서늘한 느낌에 박한빈은 멈칫했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의 잇새를 벌리고 혀를 밀어 넣어 거칠게 헤집었다.그 어느 때보다 숨 막히게 하는 키스였다.성유리는 금세 불편함을 느꼈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대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한 손으로 그녀를 제압하고 다른 한 손을 밑으로 내렸다.성유리는 마치 모래밭에서 그와 결투를 벌이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심지어 성유리는 미처 공격할 틈도 없이 그에게 약점이 잡히고 갑옷이 벗겨졌다.줄곧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그는 그녀의 몸이 무너지는 걸 알아차린 순간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그 조롱 섞인 웃음소리에 성유리는 단번에 이를 악물었고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박한빈은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성유리는 지난 2년간 참아왔던 서러움의 분출구를 찾은 듯 온 힘을 동원해 그의 살을 콱 깨물었다.하지만 이내 박한빈에게 보복당하고 만다.금성의 야경이 아름답다는 건 알았는데 이날 밤 그녀는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금성의 밤을 두 눈을 보게 되었다.짙은 어둠 속 번쩍이는 네온 불빛은 마치 칵테일을 부은 듯 몽환적이면서도 흐릿했다.나중에는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는 조용하고 공허한 방에 선명하게 울렸고 박한빈마저 행동을 멈추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성유리가 그의 눈에서 ‘당혹스러운’ 감정을 본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박한빈은 더 이상 행동을 이어가지 않고 손을 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뭐 먹고 싶어?” 그가 물었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은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그냥 걸어 나갔다.성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손을 뻗어 눈을 가렸다.얼마나 지났을까, 박한빈이 다시 돌아왔다.“밥 먹자.” 그가 말했다.성유리는 그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거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이쯤 되니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결국 그녀는 몸의 본능에 굴복했다.박한빈은 사람을 시켜 적지 않은 음식을 시켰고 음식은 언제나 그랬듯 도연제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하게 담백했다.하지만 성유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옆에 놓인 케이크였다.다크 초콜릿에 붉은 체리가 놓여있는 케이크.성유리가 천천히 손을 말아쥐며 그를 돌아보았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반대편에 앉았다.케이크가 놓인 자리는 그렇게 그녀의 몫이 되었다.성유리는 생각했다.‘개를 길들이는 데는 타고났네.’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선사하는 게 이보다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다가간 성유리는 케이크를 건드리지 않은 채 젓가락을 들어 조용히 밥을 먹었다.둘 다 말이 없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케이크에 박한빈의 시선이 몇 번이고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러면서도 끝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배가 고팠지만 입맛이 별로 없어서 몇 입 겨우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잠깐.”그런데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꺼내자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박한빈은 입술을 다물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도 더 묻지 않고 그냥 돌아서서 자기
그 후 며칠 동안 박한빈은 다시 연락이 없었지만 성유리는 매일 다른 디저트 가게에서 보내오는 케이크를 받았다.게다가 한 개가 아니었다.성유리는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상대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심지어 노골적으로 케이크를 주는 것이 자신들이 할 일이라며 그녀가 케이크를 가지고 뭘 하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라고 말했다.성유리는 마지못해 케이크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며칠 연속으로 케이크를 먹다가 결국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나한테 뭐 보내지 마요.”“왜, 마음에 안 들어?”박한빈은 기분이 무척 좋은지 말할 때도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좋아한다며? 그럼 매일 보내서 배 터질 때까지 먹으라고.성유리는 더 말하지 않고 단번에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얼떨결에 통화가 끊겨서 들리는 신호음에 그대로 굳어버렸다.휴대폰을 떼어내자 그녀가 정말 전화를 끊어버렸다는 걸 알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기가 막혀 나오는 웃음이었다.성유리가 갈수록 성깔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성격인데 더 이상 그 앞에서 가식을 부리지 않는 걸 수도.하지만 어쨌든 나름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말없이 속에 담아두기만 하던 예전보다는 나았다.박한빈이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대표님, 전에 눈여겨보라고 하시던 안 작가님 그림 경매가 정해졌습니다. 이달 말 진성에서 열릴 예정이랍니다.”서훈은 이렇게 말하며 박한빈 바로 앞에 초대장을 내밀었고 박한빈은 짧게 대꾸했다.하지만 서훈은 서둘러 자리를 뜨지 않고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박한빈은 의아했다.“더 할 말 있어?”“저택에서 전화가 와서 대표님 전화로 연락이 안 된다며 내일 저녁에 식사하러 오시랍니다.”“알았어.”박한빈이 대답하자 서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그가 나가자마자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오늘 밤 시월 파크에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전송 버튼을 누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방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예상대로 남자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요즘 이런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예전에는 가끔 박한빈과 함께 공개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결혼식 때였지만 그 결혼식조차 끝까지 진행되지 못해 참석자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자 남자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우리 아내가 전에 성유리 씨랑 꼭 얘기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요 며칠 집에서 차 모임을 열었는데 시간 되시면 꼭 오십시오.” “성유리 씨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경매장에서…” 이런 자리에서 하는 형식적인 대화는 성유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과거 성리 그룹에서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지만 지금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박한빈이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바로 나서서 그녀의 술잔을 대신 받아들었다. “지금은 유리가 마실 수 없으니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사실 그의 신분으로는 그냥 그녀를 데리고 나가도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의 웃음이 살짝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박 대표님이 부인을 참 아끼시네요.” “성유리 씨 남편 복이 정말 많으십니다. 두 분 정말 보기 좋아요.”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박한빈이 두 번째 잔을 들려는 것을 보자 그제야 나서서 그를 막았다. “방금 병원에서 퇴원했잖아요. 죽고 싶어서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행동은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는 더 커졌지만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계속 노려봤다. 박한빈은 자신을 말리려는 성유리를 보며 웃음을 짓
그녀의 말이 끝나고 박한빈은 잠시 멍해지더니 천천히 물었다.“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나... 아니, 너는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잖아. 게다가 남자라면 여자가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보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최정민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맞은편에 서 있는 박한빈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의무감을 느끼지 않아. 그럴 생각도 없고.” “너... 역시 남자들은 다 똑같네!” 최정민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다 같은 패거리잖아!” 박한빈은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정민이 갑자기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손을 확 밀쳐냈다. “꺼져.”그의 목소리는 차가움을 넘어 얼음처럼 서늘했다. 최정민은 처음엔 분노에 차 있었지만 박한빈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보자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런데도 박한빈은 최정민에게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그때 매니저의 전화가 걸려 왔고 매니저는 그녀에게 당장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미 해고된 최정민으로서는 매니저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으니 그녀는 바로 자신의 물건을 챙겨 식당을 떠나버렸다.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최정민은 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 조금 전 그가 보였던 눈빛이 떠오른 최정민은 가슴이 갑자기 먹먹해졌다. 그와 다시 몇 마디라도 나눠볼까 다가가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의 표정과 분위기가 아까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한빈은 차 옆에 서서 차 안에 있는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정민은 거리가 멀어 차 안의 사람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사실 그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
최정민은 분명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죠?” 남자는 그냥 장난으로 가볍게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행동은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최정민의 강렬한 반응에 그는 멈칫했다가 곧 비웃듯 말했다.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제가 뭘 했냐고요? 방금 당신이 저를 만졌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봤을 거예요!” 최정민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그때까지 박한빈은 옆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최정민의 시선도 마침 박한빈에게 머물렀지만 이내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누가 널 만졌다고?” 남자는 여전히 조롱하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새로 들어온 거야?” “맞아요.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요! 이 방엔 CCTV가 있어요. 확인하면 당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나 올 겁니다!” 최정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는 최정민의 말에 잔뜩 화가 나서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감히 네가 지금 나한테 까불어? 네가 뭔데!” 이때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상황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남자는 체면이 깎이는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차분하고도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죠?” 그의 평온한 한마디는 남자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버렸다. 박한빈의 존재만으로도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서둘러 중재하려 했고 마침 식당의 매니저가 방으로 들어왔다. 최정민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매니저는 들어오자마자 오히려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방에서 끌어내며 남자들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했다. 당연히 최정민은 사과할 수 없다고
성유리는 병실 밖에서 잠시 머물다 천천히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병실 밖에 앉아 있는 김서영을 마주쳤다. 김서영은 병실 문 앞에 앉아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성유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돌아왔네?” 성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한빈이를 돌보느라 고생 많았어.” 김서영이 말을 이어갔다. “한빈이가 성격이 워낙 가만히 있질 못하잖아. 이렇게 아픈 상황에서도 매일 일을 하고 있으니 네가 잘 지켜봐 줘야 해.”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들의 관계가 아직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김서영이 그렇게 당부하니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김서영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계속 말했다. “비록 결혼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너희 둘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잖아. 그래서 나는 너무 기뻐.” 그녀는 성유리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잘 지내길 바란다. 약속할 수 있겠니?” 그 말에는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고 김서영의 눈빛도 사뭇 진지해졌다. 성유리는 순간 가슴이 뛰었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김서영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성유리는 왜 그녀의 부탁에 그렇게 쉽게 응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병실로 돌아갔을 때, 예상대로 박한빈은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고 그녀의 행동을 쳐다보던 박한빈은 그녀가 떠날 준비를 하자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집에 가요.” “아직 시간이 이른데 벌써 가려고?” “어차피 당신은 이제 간호가 필요 없잖아요?” 성유리는 그의 손에 있던 서류를 한 번 쓱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이렇게 일을 잘하고 있는 걸 보니.”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고 그녀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깨어났어요?” 그녀가 다가오자 박한빈의 얼굴에 서려 있던 감정이 단숨에 사라졌다.“정말 놀랐잖아. 얼마 전 갑자기 응급실 근무에 차출되어 며칠간 정신없이 바빴는데 오늘 간신히 핸드폰을 확인했어. 그리고 처음으로 너에 대한 뉴스를 확인했고.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최정민이 눈가가 붉어진 채로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눈살을 바짝 찌푸리며 물었다.“여긴 왜 온 거지?”“너 보러 왔지. 마침 이 방에 아무도 없고 나도 마침 퇴근해서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온 거였어. 그런데 네가 딱 깨어난 거야. 물 마실래? 내가 따라줄게.” “나가.” 최정민이 말을 이어가며 자리에 앉으려 하자 박한빈은 단호히 말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최정민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한 말은 못 알아들었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최정민은 처음엔 걱정과 열정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태도에 점차 무표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나가지 않고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냉정할 필요 있나? 그냥 잠깐 보러 온 건데.” 박한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최정민은 그의 태도에 이를 악물며 계속 말했다. “좋아. 내가 괜히 참견했네. 다음엔 안 오면 되잖아? 걱정 마, 너한테서 빌린 돈은 반드시 갚을 테니까. 돈 갚고 나면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 거야!” 최정민의 마지막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우리 사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던 거지? 또 누가 쟤랑 우리라는 말을 쓴다고?’ 그러나 박한빈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최정민은 이미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슬퍼 보였지만 그것은 박한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성유리는 언제 나간 거지? 혹시 이 상황을 보고 오해한 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박한빈은 급히 핸드폰
그들은 전에 훨씬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박한빈이 손에 힘을 살짝 풀자 성유리는 바로 손을 빼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를 조용히 쳐다보며 그녀가 먹여주기를 기다렸다. 결국 성유리는 계속해서 그의 요청에 응했고 이번에는 그도 얌전히 협조했기 때문에 한 그릇의 죽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하지만 박한빈은 곧바로 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기대앉아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숙여 도시락을 정리했다. “전 가볼게요. 푹 쉬세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지만 박한빈이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박한빈이 물었다. “나랑 잠깐만 더 있어 줄래?” 성유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하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그의 곁에 앉았다. 사실 박한빈은 그녀가 거절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조금 지나친 부탁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성유리는 예상과 달리 박한빈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지금 그녀는 박한빈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고작 20cm 남짓이었다. 병실 안에는 여전히 둘 뿐이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숨결이 매우 뚜렷하게 느껴졌다. 원래 박한빈은 잠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배를 든든히 채워서인지 점점 졸음이 밀려왔고 살짝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박한빈은 그날 아주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그는 성유리가 귀여운 딸을 낳는 장면을 보았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는 박한빈의 품에 안겨 있었고 마치 단단한 끈처럼 그와 성유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단단히 이어진 것 같았다. 박한빈은 그 아이가 자라난 모습도 꿈에서 보았는데 성유리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꿈속에서 굳게 다짐했다. 딸의 평생을 걱정 없고 평온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성유리는 그의 모습에 서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죠?” “그런데 사모님 의사 선생님께서 박 대표님은 이미...” 서훈은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눈을 쳐다보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박한빈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손에 넣었다. “죽 좀 끓여왔어요.” 그때, 성유리가 말했다. “이거 좀 드시고 푹 쉬세요.”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유리는 자기가 박한빈의 물건을 빼앗아 그가 화가 난 줄 알았고 입술을 오므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깨어나신 지 얼마 안 되셨기 때문에 잘 쉬셔야죠.” “...” 그 시각, 서훈은 조용히 서류를 건네받더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박한빈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빛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못 본 척 애써 무시하며 준비해 온 도시락통을 열었다. 도시락통 안에 들어있는 죽의 향긋한 냄새는 병실 가득 퍼졌고 죽이 너무 뜨거운 탓에 성유리는 조금 소분하여 박한빈에게 건네주려 했다. 그러나 순간, 박한빈이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목을 꽉 잡았고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몸이 굳어졌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더욱더 힘을 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손목에 고통이 느껴진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박한빈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 주는 거야?” 성유리는 그의 물음이 무척이나 웃겼다. 지금 병실 안에는 둘 뿐인데 박한빈을 주려는 것이 아니면 뭐겠는가?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계속 말했다. “안에 독 탔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박한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고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상처 부위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며 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하지만 박한빈은 통증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리며 누군가를 찾으려 했다. “대표님!” 서훈이 제일 먼저 박한빈의 움직임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달려와 그를 강제로 눕혔다. “지금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박한빈은 서훈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성유리는 어디 있습니까? 다친 데는 없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모님은 아무 이상 없으십니다.” 서훈이 서둘러 대답하자 박한빈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그러나 곧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은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훈은 그제야 박한빈의 의도를 깨달은 듯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 사실 어제 하루 종일 사모님께서는 계속 병원에 계셨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쉬시라고 설득해 보냈을 뿐입니다.” 그의 설명은 타당해 보였지만 박한빈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짧게 물었다. “그래요?” 박한빈의 물음에는 서훈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결혼식 날조차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았다. 만약 성유정이 난입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날 결혼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혹은 만약 성유정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난입했다면 성유리가 그를 따라가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입니다. 대표님.” 서훈은 박한빈의 눈 속에 서려 있는 냉랭한 감정을 알아보았고 이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게다가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깨어나시면 바로 연락 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성유리는 인간이 아닌 나무로 만든 인형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결혼식이 두 사람의 예상대로 평화롭고 순조롭게 진행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 그들 앞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실루엣은 무척이나 야위었지만 그 안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려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성유리는 그 사람이 달려드는 순간 가장 먼저 자신의 배를 감싸안았고 커다란 공포가 한순간에 성유리를 집어삼켰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지난번 성유정과 계단에 서 있었던 장면이었다. 그때 성유정은 손을 뻗어 자신을 계단 아래로 밀어버렸고 그 순간에도 성유정의 입가에는 지금과 똑같은 광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예상했던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눈을 천천히 떴고 그제야 성유정이 이미 현장의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눌려 있는 것을 보았다. “놔! 박한빈, 내가 널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아? 그리고 너 성유리! 네가 원흉이야! 다 너 때문이야!” “왜 돌아온 거야? 이건 원래 다 내 것이었어! 다 내 거라고! 왜 죽지 않았어? 왜 거기서 사라지지 않았냐고?!” “너 같은 건 죽어야 해! 너희 모두 다 죽어야 한다고!” 성유정은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다치지 않은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의사를 불러오라고 외쳤다.‘의사를? 왜?’ 성유리는 의사를 왜 불러야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러다 시선을 돌린 그녀는 성유정의 손에 꽉 쥐어져 있는 과일칼을 발견했다. 그 칼에는 누군가의 선명한 피가 묻어 있었다. ‘저 피는 누구 꺼지?’ 성유리는 느리게 돌아가는 사고 속에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을 굳은 상태로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박한빈의 하얀 정장이 이미 빨간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한빈이 그녀를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