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성유리는 무작정 아무 매운탕 집이나 들어갔다.뜨겁고 보글보글 끓는 빨간 국물은 누가 봐도 박한빈의 슈트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솔직히 박한빈이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그냥 단순히 그녀를 도구로 이용한다기엔 지금 그의 행동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둘이 부부로 지낼 때도 두 사람이 밖에서 따로 외식하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보석 따위를 사주긴 했어도 굳이 사람을 시켜 케이크를 보내준 적은 없었는데 박한빈의 이런 태도는 성유리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착각을 불러오게 했다.물론 성유리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 바쁘게 서둘러 차단해 버렸다.“이거 좋아해?”박한빈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자리에 도착하자 성유리 바로 맞은편에 앉아서 물었다.“네.” 성유리가 답했다.“난 천성에서 자라서 매운 거 좋아해요.”하지만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 이후엔 이런 것들을 못 먹게 했다.그들 눈에는 음식도 급이 나뉜 것 같았고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술이 빨개지고 눈물, 콧물이 나고 냄새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으니 성씨 집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밥상에 오르지 못했다.물론 박씨 집안도 마찬가지였다.사실 성유리도 그다지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저 단순히 박한빈의 반응을 보고 싶었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그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에 성유리는 문득...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음식을 먹기만 했다.“여기, 이거 봐.”박한빈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건네며 말하자 성유리는 살짝 놀랐다.위에 적힌 이름을 보자 그녀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거... 뭐예요?”“경매, 가고 싶어?” 그가 묻자 성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반응만으로도 박한빈은 답을 알 수 있었기에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다음 달에 같이 가.”성유리가 손을 맞잡았다.“왜요?”“왜라니?”“왜 날 데리고 가는데요?”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나 김난희는 기분이 좋은 듯 박한빈이 들어서자 옆 사람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신나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도련님 오셨어요.”집사가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하고 웃으며 말하자 박한빈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김난희를 바라봤다.곧 김난희가 잔뜩 들뜬 채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얼른 와서 봐.”“뭘 봐요?”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박한빈은 다가가서 태블릿에 담긴 내용을 보자마자 웃고 있던 입꼬리가 굳어갔다.“이것 좀 봐. 이건 설씨 집안 딸인데 지난번에...”“이런 건 왜 보고 있으세요?”박한빈은 흥미가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왜 보긴, 내가 직접 손주며느리 고르려고 그러지. 방금 내가 말한...”“아직 그럴 생각 없어요.”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지금 당장 결혼하라는 게 아니라 일단 좀 보라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우선 만나보다가 약혼하면 되지. 이번엔 신중하게 천천히 해. 괜히 성유리 같은 애 만나지 말고, 하는 짓마다 재수 없게.”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여기서 성유리 얘기가 왜 나와요?”“내 말이 틀렸어? 걔 전에 양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어쩐지 그렇게 흔쾌히 이혼에 동의한다고 했더니 역시 찔리는 게 있었어.”“그건 누구한테 들으셨어요?”순간 가라앉은 박한빈의 목소리에 김난희도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왜, 기분이 안 좋아?”“안 좋은 게 아니라 이미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에 대한 쓸데없는 얘기 듣지 마시라고요.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음... 하긴. 그래도 유정이 녀석이 좋은 마음으로 매일 와서 나랑 얘기도 나눠주다가 실수로 나온 말이니까 오해하지는 마.”박한빈은 얼굴을 찡그린 채 짧게 대꾸했다.“너도 말 돌리지 마. 난 지금 너랑 손주며느리 얘기하고 있잖아.”김난희는 태블릿을 다시 건네주며 말했다.“빨리 봐봐.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내가 품행이 올바른 여자들만 골랐으니까 성유리 때와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
이틀 뒤, 박한빈의 생일이었다.원래 생일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는 가족들이 그를 위해 자리를 준비한다고 하니 거절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당연히 파티에 오지 못했고 박한빈은 저녁에 시월 파크에 가서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파티는 성공적이었고 이 바닥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참석했다.대외적으로 공개된 파티가 아니었지만 몇몇 연예인들도 따라 들어왔다.박한빈의 이혼 소문이 퍼지자 더 직접적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서려는 사람들이 몇 명 더 늘어났다.밤새 박한빈은 옷에 뭐가 튄 것만 세 번이었다.마지막에 누군가 다가왔을 때 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몸에 닿으려는 손을 밀쳐냈다.“박 대표님, 제가 좀 닦아드릴까요?”가슴을 겨우 가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더없이 농염하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올곧게 쳐다봤지만 박한빈은 동요하지 않았다.무표정한 얼굴로 됐다고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비서를 바라보았고 서훈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그가 여자를 떨어뜨리자 박한빈이 지시했다.“난 먼저 갈 테니까 손님들은 네가 배웅해.”“지금 가시려고요? 그럼 제가 운전기사를 부를게요...”“아니, 택시 타고 갈 거야.”박한빈은 차를 몰고 나가면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 분명했기에 지금은 그냥 혼자 조용히 가고 싶었다.서훈의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박한빈은 이미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차창 밖에는 여전히 번잡한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었다.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문득 작년 자신의 생일이 떠올랐다.그때도 어머니가 손수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지만 당시 자신과 성유리의 결혼 1주년 파티에 불참했던 탓에 성유리는 며칠 동안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었고 게다가 그도 무척 바빴기에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했다.그저 그렇게 별일 없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축하 인사나 선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 결과 그날 밤 그는 성유리가 준비한 라이터를 선물로 받았고 그녀가 직접 만든 미역국도
다만 갈수록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방으로 바로 갈 수도 없어서 소파에 쓰러져 잠시 잠을 청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기 위를 덮친 실루엣을 보고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는데 박한빈이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의 손이 다가온 순간 성유리도 상대를 알아차리고 경직되었던 몸이 풀렸다.이를 감지한 박한빈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짓누르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성유리가 그의 몸에서 나는 술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며 피하려는데 박한빈이 그런 그녀의 턱을 잡은 채 그대로 입술을 감쳐물었다.그러자 샴페인의 과일 향이 성유리의 입안으로 옮겨졌다.다소 흥분한 박한빈의 모습에 성유리는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거칠게 움켜잡고 올곧은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그 눈빛이 꼭 깊은 밤 매복해 있는 맹수처럼 보여 성유리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몸을 들어 먼저 그의 입술에 키스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움직임은 녹아내리는 샘물처럼 박한빈의 사납고 적대적이었던 감정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성유리는 다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가볍게 소리를 냈다.박한빈이 말했던 것처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도,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없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꽤 궁합이 잘 맞는 둘이었다.마지막 한 번을 침대에서 끝낸 뒤 박한빈은 성유리의 허리를 잡고 그녀의 등에 가슴을 붙여오며 물었다.“뭐 잊은 거 없어?”성유리는 온몸이 기진맥진한 데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이렇게 되물었다.“뭐요?”“뭐일 것 같은데?”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하지 않았다.박한빈은 한참 동안 기다려도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손을 풀었다.진작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성유리는 그대로 자리에 엎드렸고 몸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바로 돌아서서 자리를
박한빈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침실에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살짝 멈칫한 그가 밖으로 나오니 현관에서 성유리가 신발을 신고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던 박한빈의 눈빛은 곧바로 가라앉았다. “어디 가는 거야?”“집이요.”성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입술을 꽉 다문 박한빈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달칵...소리와 함께 그녀가 문을 닫자 넓은 집 안에 곧 박한빈 혼자 남겨졌다.그리고 돌아서면서 바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성유리는 집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커프스단추는 아직 그녀의 가방 안에 있었다. 쓰레기통을 지나치면서 버리려고 했지만 손이 허공에 멈춘 채 성유리는 끝내 버리지 못했다.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자기, 아직 안 잤지?”저쪽에서 송효주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좋은 소식이 있어.”“안 잤어, 말해.”성유리가 커프스단추를 다시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지난번 네 책 영화로 제작될 것 같아! 밀레니엄 픽처스라고 알아? 엄청나게 큰 제작사야!”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은 소식이네. 그래서?”“쯧, 재벌가 사모님이었던 사람이라 이 정도 돈은 눈에도 안 차겠지만 그래도 큰 건이니까 이번 일만 성공하면 앞으로 판권 못 팔 일은 없어. 그러니 이번에 잘 협상해야 해!”“그래, 힘내.”“아니, 왜 나만 힘내? 그럼 너는?”“내가 판권은 다 그쪽에 맡겼잖아?”“음... 그렇긴 한데 네가 직접 협상에 나서면 일이 한결 쉬워질 거야.”성유리가 걸음을 멈추며 답했다.“안 가.”“왜?”“이유는 없어. 협상할 수 있으면 하고 안 되면 말아.”성유리의 단호하고 여유로운 태도에 송효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아니, 잠깐만!” 송효주가 황급히 외쳤다.“자기, 우리 같이 한번 만나보자, 응? 내가 이미 편집장님한테 너 데리고 온다고 했단 말이야. 네가 안 가면 난 할 말이 없
사교성이 좋았던 송효주는 처음에는 조금 소심하게 굴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활발하게 움직였다.“어머, 양 대표님, 안녕하세요!”송효주는 어렵사리 오늘 드디어 자신이 찾던 사람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스타 코믹스 송효주입니다. 전에 얘기 나눈 적 있는데!”“아, 안녕하세요.”맞은편에 있던 남자는 송효주와 먼저 악수를 나눈 뒤 천천히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리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전에 얘기했던 [해당화] 작품 작가님이세요.”“아,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양 대표는 눈썹을 추켜세웠다.“뭔가 낯익은 느낌이 드는데요?”“아닐 거예요, 전 자주 외출하지 않아서요.”성유리는 그저 웃으며 대답했고 남자는 여전히 다소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렇게 말했다.“작품은 이미 봤어요. 각색하기 아주 좋던데요. 게다가 우리 진 대표도 읽고 나서 굉장히 흥미로워서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성유리는 원래도 상대가 송효주에게 이런 초대장을 보낸 게 수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말이 나오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송효주는 오히려 신나서 말했다.“정말요? 그럼 진 대표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곧 남자는 웃으며 앞으로 다가갔다.“진 대표, 전에 관심 있게 봤던 만화책 작가가 이분이야. 참... 그러고 보니 이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저는 송효주라고 합니다!”송효주는 성유리를 흘끗 쳐다보며 순간적으로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앞을 막아 나섰다.“아니, 내 말은...”“성유리 씨 맞죠?”양 대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이미 먼저 말을 꺼냈다.성유리는 그들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밀레니엄 픽처스는 진씨 가문의 시즌그룹 산하에 있는 회사다.진무열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시즌그룹에서 공식적인 자리를 맡지 않았다.그러니 상대방이 말하는 진 대표는 아마도 진무열의 형이겠지.더 이상 피할
성유리는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진무혁은 웃기만 했다.“하긴, 미안해. 내가 너무 갑자기 이런 말을 했지.”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그의 대범한 태도에 비해 성유리가 지나치게 쏘아붙인 감이 없지 않았다.성유리도 이를 깨닫고 사과를 덧붙였다.“제가 너무 흥분했네요.”“괜찮아, 너도 네 평판이 있는데 그러는 게 당연하지. 내가 잘못했어.”진무혁의 말하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의 말대로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말 멋졌다.저 멀리 점점이 흩어져 있는 네온사인과 불어오는 저녁 바람이 사람의 기분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진무혁은 먼저 성유리의 반응을 살피며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말을 이어갔다.“사실 난 진무열과 성유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야. 예전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진무열은 내 동생이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잖아. 내가 봤을 때 성유정은 아내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야.”그의 말은 성유리에게 다소 의외였다.그전까지만 해도 이 바닥 사람들은 전부 성유정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배척하지는 않았을 테니까.물론 이를 위해 성유정이 들인 노력도 절대 작지 않았다.어쨌든 그 정도의 위선을 떠는 것도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성유정은 속셈이 너무 많아. 우리 집안 사정이 안 그래도 복잡한데 걔가 결혼해서 들어오면 분명 문제를 일으킬 거야. 난 그걸 보고 싶지 않아. 미안해, 성유정이 네 동생인 건 알아. 험담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저 단지... 너랑 이 일에 대해 상의하고 싶어서.”진무혁은 미안한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성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오히려 조금 전 진무혁의 말에 성유리는 마치 아군을 만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건... 진무혁은 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네 작품 봤는데 아주 좋아. 로열티는 최대한 높게 책정해 줄 테니 시간 되면 대본 집필에도 참여해
성유리가 차창을 살며시 두드렸다.“사모님!”성유리가 몇 번이나 상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오 기사는 이렇게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성유리도 차마 시정해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여긴 왜 오셨어요?”“대표님 출장 가셨어요.”오 기사가 그녀에게 설명했다.“해외 출장 가셨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돌아오실 텐데 초대장과 비행기 티켓을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당황한 성유리가 시선을 내리자 그의 손에 지난번 박한빈이 건넸던 것과 똑같은 경매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지난번 성유리는 가면서 초대장을 시월 파크에 두고 갔는데 박한빈이 다시 보내줄 줄은 몰랐다.심지어 이번엔 양성 행 티켓까지 직접 예매해 주었다.“사모님?”성유리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오 기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고 그가 이상하단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안 받을래요.”“그래도... 사모님, 이건 대표님께서 특별히 준비해 주신 건데요. 대표님 성격 아시잖아요. 누구한테 고개 숙이는 일 없는 분인데 이러시면...”“저랑 그 사람은 지금 단순히 거래 관계인데 이런 경매장에는 업계 사람들이 많이 가잖아요. 그때 가서 일일이 해명하기 귀찮아요.”단호한 성유리의 태도에 오 기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괜히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오셨네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세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성유리도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오 기사는 그녀의 뒤에서 뭐라고 말하려다가 망설임 끝에 결국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말았다.성유리가 집으로 돌아온 직후 박한빈의 전화가 걸려 왔지만 2초 정도 울리고 뚝 끊겨버렸다.마치 실수로 잘못 건 것처럼.성유리 역시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오히려 진무혁 측에서 빠르게 연락이 왔고 그가 바라는 건 간단했다.이번 주말에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성유리가 거절하려는데 진무혁이 그녀가 뭘 망설이는지 아는 듯 재빨리 두 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평생 당신과 함께할 거니까.” 연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유효정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가 궁금해졌다. ‘이건 약속인가? 약속이겠지?’ 유효정은 연정우의 맞은편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아 입이 살짝 벌어진 채로 멍하니 연정우를 바라봤다. “어쨌든 저희는 결혼할 겁니다. 그리고... 함께 늙어가겠죠. 이건 제가 당신 아버지에게 한 약속이기도 하니 반드시 지킬 거예요.” “저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됩니다. 유효정 씨는 더 있고 싶으면 계속 돌아다녀도 되니 저희는 저녁에 봅시다.” 말을 마친 연정우는 곧바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는데 유효정은 더 이상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구나. 역시 나랑 하는 약속이었어.’ 그렇지만 유효정은 그 약속이 자신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를 위한 거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약속이라기보다는 조건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교환한 조건 말이다. 연정우는 평생 그녀와 함께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유효정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평생 함께하기만 하겠다는 말이었지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는 유효정은 할 말을 잃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유효정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이름은 바로 성유리였다. 연정우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지에 대한 이유가 전부 다 성유리 때문이라는 확신이 든 유효정이 화가 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맞아. 전부 다 저 여자 때문이야!’ ... 성유리는 곧 도연제로 돌아갔다. 비록 백화점에서 잔뜩 물건을 사긴 했지만 전부 일상용품이었고 생일 선물로 주기엔 너무 성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뒤, 성유리는 인터넷에서 박한빈을 위한 다른 선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너무 몰두한 탓일까?
유효정의 말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정우는 그것을 막으려 손을 뻗었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아주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 태도에 유효정의 표정이 굳어졌고 연정우도 천천히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성유리는 더 머물지 않고 짧게 말을 해준 뒤 곧바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유효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다시 달려들며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확실히 말해줄게. 이건...” “진실이라면 진실이겠죠.” 성유리가 그녀의 말을 뚝 끊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부부 사이의 문제고 유효정 씨가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 태도는 유효정에게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친 듯한 허탈함을 안겨줬다. 그녀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보며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성유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부부 사이의 문제였고 유효정이 나설 이유 또한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성유리가 잘 사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 내장이 뒤틀릴 것 같았다. 그리고 성유리의 행복 뒤에는 박한빈이 든든한 “산”이 되어 주고 있었다. 만약 박한빈이 아니었다면 유효정은 성유리를 눈에 담지도 않았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그녀를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성유리가 자신에게 넘을 수 없는 장애물로 느껴졌다. “갑시다.” 연정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유효정에게 말했다. 유효정은 성유리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유효정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요? 지금 심정이 어떠시냐고요?” 연정우는 미간을
새해가 오기 전, 성유리는 또 다른 중요한 일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박한빈의 생일이었다. 병원을 나선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근처의 쇼핑몰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생일까지 며칠 남지 않았기에 맞춤 제작을 하기엔 시간이 아주 촉박했다.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에게 딱 맞는 옷을 사기로 했다. 남성복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반갑게 다가오며 물었다. “대표님 부인이시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서도 익숙한 얼굴이 되었음을 느끼며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 “그냥 구경 좀 하려고요.” “박 대표님께 선물하시려는 건가요? 새로 들어온 외투를 한번 보시는 건 어떠세요?”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직원의 추천을 받다 보니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여러 가지를 고르게 되었다. 결제는 당연히 박한빈의 카드로 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매장을 나서는 순간,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 사람은 바로 연정우였다. 그는 크게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지만 성유리를 보자마자 먼저 그녀의 뒤를 힐끔거렸다. “너... 쇼핑하러 온 거야?” “응.” “남성복을?” 연정우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신경질적인 톤이 섞여 있었고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화해했구나.” 그러자 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좋은 일이네. 어차피 결혼한 사이니까 잘 사는 게 맞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연정우의 얼굴에는 뚜렷한 감정이 그대로 비쳤다. 성유리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먼저 말을 걸었다. “너는 요즘 어때? 지난번에...” “별거 아니야. 그냥 피부만 조금 다쳤을 뿐이야. 보기만 무섭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정우 씨!” 그 소리에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고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유효정이 먼저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유효정의 힘에 성유리의 몸이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다가 결국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려고 결심했다. “오늘 최 선생님 마주쳤어요?” “누구?” “최 선생이요.” 박한빈은 아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려고 마음먹었다. “최정민 씨요. 최 선생님.” “두 사람... 무슨 사이예요?” “무슨 사이냐고? 당연히 아무 사이도 아니지.” 박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언가 떠오른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유리야,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확 빼냈다.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미소를 더욱 환하게 지으며 물었다. “역시 그런 것 같네?” “아니에요.” 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다. 박한빈은 더는 따져 묻지 않았고 그저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은 보이지 않는 바늘이 되어 성유리의 얼굴을 감춰진 감정을 쑤셔내며 들춰내려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처음엔 애써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그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박한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무 이유 없어. 그냥 재미있어서.” 박한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성유리는 이를 꽉 악물었지만 그가 그녀가 진짜 화내기 전에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걔랑 무슨 사이가 되겠어?” “네가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난 걔가 누군지도 기억 못 했을 거야. 그런 애는 네 신발 끈을 묶을 자격도 없어.” ... 이 세상에는 이런 법칙이 있는 것 같다. 언제나 당신 곁에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자꾸 눈에 들어오게 되는 법칙. 성유리와 최정민이 딱 그런 경우였다. 성유리는 이전에는 그녀를 알지도 못했다. 병원에 와서 산부인과 검진을 받을 때도 그녀의 존재를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방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예상대로 남자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요즘 이런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예전에는 가끔 박한빈과 함께 공개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결혼식 때였지만 그 결혼식조차 끝까지 진행되지 못해 참석자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자 남자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우리 아내가 전에 성유리 씨랑 꼭 얘기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요 며칠 집에서 차 모임을 열었는데 시간 되시면 꼭 오십시오.” “성유리 씨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경매장에서…” 이런 자리에서 하는 형식적인 대화는 성유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과거 성리 그룹에서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지만 지금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박한빈이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바로 나서서 그녀의 술잔을 대신 받아들었다. “지금은 유리가 마실 수 없으니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사실 그의 신분으로는 그냥 그녀를 데리고 나가도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의 웃음이 살짝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박 대표님이 부인을 참 아끼시네요.” “성유리 씨 남편 복이 정말 많으십니다. 두 분 정말 보기 좋아요.”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박한빈이 두 번째 잔을 들려는 것을 보자 그제야 나서서 그를 막았다. “방금 병원에서 퇴원했잖아요. 죽고 싶어서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행동은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는 더 커졌지만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계속 노려봤다. 박한빈은 자신을 말리려는 성유리를 보며 웃음을 짓
그녀의 말이 끝나고 박한빈은 잠시 멍해지더니 천천히 물었다.“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나... 아니, 너는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잖아. 게다가 남자라면 여자가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보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최정민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맞은편에 서 있는 박한빈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의무감을 느끼지 않아. 그럴 생각도 없고.” “너... 역시 남자들은 다 똑같네!” 최정민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다 같은 패거리잖아!” 박한빈은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정민이 갑자기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손을 확 밀쳐냈다. “꺼져.”그의 목소리는 차가움을 넘어 얼음처럼 서늘했다. 최정민은 처음엔 분노에 차 있었지만 박한빈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보자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런데도 박한빈은 최정민에게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그때 매니저의 전화가 걸려 왔고 매니저는 그녀에게 당장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미 해고된 최정민으로서는 매니저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으니 그녀는 바로 자신의 물건을 챙겨 식당을 떠나버렸다.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최정민은 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 조금 전 그가 보였던 눈빛이 떠오른 최정민은 가슴이 갑자기 먹먹해졌다. 그와 다시 몇 마디라도 나눠볼까 다가가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의 표정과 분위기가 아까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한빈은 차 옆에 서서 차 안에 있는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정민은 거리가 멀어 차 안의 사람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사실 그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
최정민은 분명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죠?” 남자는 그냥 장난으로 가볍게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행동은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최정민의 강렬한 반응에 그는 멈칫했다가 곧 비웃듯 말했다.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제가 뭘 했냐고요? 방금 당신이 저를 만졌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봤을 거예요!” 최정민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그때까지 박한빈은 옆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최정민의 시선도 마침 박한빈에게 머물렀지만 이내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누가 널 만졌다고?” 남자는 여전히 조롱하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새로 들어온 거야?” “맞아요.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요! 이 방엔 CCTV가 있어요. 확인하면 당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나 올 겁니다!” 최정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는 최정민의 말에 잔뜩 화가 나서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감히 네가 지금 나한테 까불어? 네가 뭔데!” 이때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상황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남자는 체면이 깎이는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차분하고도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죠?” 그의 평온한 한마디는 남자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버렸다. 박한빈의 존재만으로도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서둘러 중재하려 했고 마침 식당의 매니저가 방으로 들어왔다. 최정민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매니저는 들어오자마자 오히려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방에서 끌어내며 남자들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했다. 당연히 최정민은 사과할 수 없다고
성유리는 병실 밖에서 잠시 머물다 천천히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병실 밖에 앉아 있는 김서영을 마주쳤다. 김서영은 병실 문 앞에 앉아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성유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돌아왔네?” 성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한빈이를 돌보느라 고생 많았어.” 김서영이 말을 이어갔다. “한빈이가 성격이 워낙 가만히 있질 못하잖아. 이렇게 아픈 상황에서도 매일 일을 하고 있으니 네가 잘 지켜봐 줘야 해.”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들의 관계가 아직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김서영이 그렇게 당부하니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김서영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계속 말했다. “비록 결혼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너희 둘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잖아. 그래서 나는 너무 기뻐.” 그녀는 성유리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잘 지내길 바란다. 약속할 수 있겠니?” 그 말에는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고 김서영의 눈빛도 사뭇 진지해졌다. 성유리는 순간 가슴이 뛰었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김서영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성유리는 왜 그녀의 부탁에 그렇게 쉽게 응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병실로 돌아갔을 때, 예상대로 박한빈은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고 그녀의 행동을 쳐다보던 박한빈은 그녀가 떠날 준비를 하자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집에 가요.” “아직 시간이 이른데 벌써 가려고?” “어차피 당신은 이제 간호가 필요 없잖아요?” 성유리는 그의 손에 있던 서류를 한 번 쓱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이렇게 일을 잘하고 있는 걸 보니.”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고 그녀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박한빈에게 물었다. “깨어났어요?” 그녀가 다가오자 박한빈의 얼굴에 서려 있던 감정이 단숨에 사라졌다.“정말 놀랐잖아. 얼마 전 갑자기 응급실 근무에 차출되어 며칠간 정신없이 바빴는데 오늘 간신히 핸드폰을 확인했어. 그리고 처음으로 너에 대한 뉴스를 확인했고.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최정민이 눈가가 붉어진 채로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눈살을 바짝 찌푸리며 물었다.“여긴 왜 온 거지?”“너 보러 왔지. 마침 이 방에 아무도 없고 나도 마침 퇴근해서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온 거였어. 그런데 네가 딱 깨어난 거야. 물 마실래? 내가 따라줄게.” “나가.” 최정민이 말을 이어가며 자리에 앉으려 하자 박한빈은 단호히 말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최정민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한 말은 못 알아들었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더욱 냉랭해졌다. 최정민은 처음엔 걱정과 열정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태도에 점차 무표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나가지 않고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냉정할 필요 있나? 그냥 잠깐 보러 온 건데.” 박한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최정민은 그의 태도에 이를 악물며 계속 말했다. “좋아. 내가 괜히 참견했네. 다음엔 안 오면 되잖아? 걱정 마, 너한테서 빌린 돈은 반드시 갚을 테니까. 돈 갚고 나면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 거야!” 최정민의 마지막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우리 사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던 거지? 또 누가 쟤랑 우리라는 말을 쓴다고?’ 그러나 박한빈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최정민은 이미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슬퍼 보였지만 그것은 박한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성유리는 언제 나간 거지? 혹시 이 상황을 보고 오해한 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박한빈은 급히 핸드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