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금성 공항에서 서훈은 남자의 불쾌한 표정에 눈치가 보이면서도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건넸다.“방금 진성에서 보내온 데이터 보고서인데 한번 보시죠.”박한빈은 보고서를 훑어본 뒤 물었다.“그리고?”“뭐요?”“시장 가치 추정 이후에는? 어떤 각도로 시장 진입을 유도할 거래? 관련 분석 보고서와 언론 보도 계획은?”이 외에도 박한빈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어리둥절하던 서훈도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앞으로 나아가던 박한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다시 바라봤다.그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그 사람들은 모른다 쳐도 서 비서는 내 옆에 오랫동안 있었으면 이런 간단한 것도 몰라?”서훈은 이 보고서가 단지 인수를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일차적으로 박한빈에게 보여주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했는데 그때 박한빈은 아무런 말도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확실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지만 서훈은 이유를 몰랐다.이번 출장에서도 박한빈은 순탄하게 협상을 마친 덕분에 일찍 금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서훈은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죄송하다고만 했다.박한빈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훈에게 파일을 다시 던져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오 기사는 이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박한빈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서훈과 눈빛을 주고받았고 서훈은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운전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차 안에 있던 누구도 감히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서훈은 조수석에 앉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 전 대표님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여기 초대자 명단입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훈이 건네준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때마침 태블릿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는데 바로 동영상이었다.무시하려던 박한빈은 동영상에 멈춘 화면을 보는 순간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붉은 끈 드레스에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긴
성유정은 이날을 위해 특별히 춤까지 연습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모두 망가져 버렸다.성유리 때문에!성유리가 가면을 쓰고 평소와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도 성유정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그 순간 성유정은 정말 달려가서 성유리의 가면을 벗기고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러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 것 같았다.성유정은 그냥 서서 이를 악물고 지켜보기만 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서 성유정은 문득 14살 나던 해 성유리가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지난 10년 동안 성씨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컸고 그런 날이 앞으로도 계속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성유리가 돌아왔다.성유리가 진짜 성씨 집안의 딸이었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건 응당 그녀의 몫이어야 했다.아니면 그들이 자신을 쫓아낼 수도 있었기에 성유정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그래서 성씨 집안 내외에게 더 잘 보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성유리와 그들 사이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걸 빌미로 온갖 일들을 꾸며대기 시작했다.성유리 앞에서는 일부러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다정한지 보여주고 성씨 집안 내외 앞에서는 성유리보다 더 세심하고 상냥하게 행동했다.10년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성유리보다 그들의 생활 습관을 더 잘 알았고 이 바닥에서 또래인 사람들도 다 그녀의 친구들이었다.그녀는 완전히 성씨 집안 아가씨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하지만 박씨 집안에서 두 집안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김서영은 단번에 박한빈과 결혼할 사람은 성씨 집안의 친딸이어야 한다고 대놓고 말했고 그때 성유정은 깊은 무력감만 느꼈다.아무리 노력해도 진실은 바꿀 수 없는 느낌.그리고 지금 성유정은 또다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성유리는 너무 쉽게... 모든 사람의 관심을 빼앗고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을 가져갔다.하지만 성유정은 문득 자신이 잘하는 건 성유리가 개의치 않는 것들뿐이며 성유리
“6시 방향, 저기 서 있는 사람 보이지?”진무혁이 물었다.춤사위 때문에 두 사람의 몸은 서로 바짝 붙어 있었고 성유리는 오랜만에 이렇게 재미있게 놀아본 터라 이미 호흡이 다소 흐트러진 채 가면 아래로 코끝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진무혁이 그렇게 묻자 그녀도 바로 고개를 돌렸다.“네, 그래서요?”“해조그룹 임 대표 아들인데 요즘 너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내가 나중에 소개해 주면 잠깐 같이 춤이라도 춰볼래?”성유리가 피식 웃었다.“내가 왜요?”“내가 요즘 쟤 아버지랑 같이 일하려고 하거든.”진무혁은 성유리에게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이번에 네가 날 도와준다면 판권 제작할 때 네 지분도 넣어줄게. 드라마가 대박 나면 배당금이 쏠쏠할 거야.”성유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진무혁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진무혁 역시 그녀의 반응에 놀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물론 돈은 너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도 있지만 네가 버틸 힘이 되어주잖아?”성유리는 진무혁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몇 초간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녀가 물었다.“도와달라는 게 저 사람이랑 춤추라는 거였어요?”“물론 아니지.”진무혁이 웃었다.“지금 해조그룹이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 저녁에 기회를 노리고 임정우에게 빌붙으려는 사람들이 꽤 많을 텐데 혹시라도 네가 그 사람과 춤을 추게 된다면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잖아?”“나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몇 마디 한다고 그 사람이 들을까요?”“응, 그러면서 다음번에 나와 저쪽 아버지가 따로 만날 식사 약속을 잡아.”진무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고 아주 직설적으로 저녁 약속을 성사해야만 이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성유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진무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이때 두 사람의 춤도 끝이 났다.성유리는 진무혁의 손을 놓았고 혼자서 몇 바퀴를 돈 후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파티장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봐요, 먼저 온 사람이 우선 아닌가요?”임정우가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로 물었지만 박한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알죠, 하지만 선택은 이 숙녀분이 하셔야 할 것 같아요.”그의 말은 상대를 말문이 막히게 했고 박한빈도 더 이상 임정우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성유리만 올곧게 쳐다보았다.늘 호수처럼 잔잔하던 그 눈동자가 지금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요동치며 흐르는 게 보였다.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드리운 손을 꽉 말아쥐었다.잠시 후, 그녀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임정우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초대에 응했다.박한빈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갔고 내밀었던 손도 꽉 움켜쥐었다.그가 다시 성유리를 바라봤을 때 성유리는 이미 남자를 따라 돌아선 뒤였다.박한빈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조금 더 악물었다.그때 진무혁이 다가왔다.“박 대표님.”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참석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아직 축하 인사를 못 드렸네요. G국에서 협상 아주 잘 끝냈다고 들었어요.”“감사합니다.”박한빈은 형식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대충 답했고 시종일관 고개를 돌려 진무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박 대표님께서는 오늘 성유리 때문에 오신 건가요?”진무혁이 덧붙이자 박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박 대표님하고 성유리가 이혼한 게 안타까워서요. 참 매력적인 여자 아닌가요?”말하며 진무혁의 시선도 다시 성유리에게 향했다.이때 이미 성유리와 임정우의 춤은 반쯤 진행된 상태였고 두 사람의 동작은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호흡이 아주 잘 맞아 서로 밀고 당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왜요, 좋아해요?”진무혁의 시선을 따라가던 박한빈이 다그치듯 물었다.“저런 여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겠죠.” “아, 그런데 진 대표님은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 몸이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행복을
성유리와 임정우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노래가 끝나도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두 번째 춤을 추기 시작했다.“아직도 그쪽 이름을 모르네요?”임정우가 참지 못하고 묻자 성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면무도회인데 이름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그런데 그쪽은 날 알잖아요. 그건 나한테 불공평한 것 아닌가?”“여기서 임정우 씨를 아는 사람은 많죠. 그렇게 유명하시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성유리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력감이 묻어났지만 임정우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오늘 밤이 지나면 그쪽이랑 식사 한 번도 같이 할 기회가 없다는 말 아닌가요?”“아뇨, 기회는 있어요.” 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은 아버님과 함께, 전 진 대표와 같이 만나서 식사하면 더 좋지 않아요?”“그러니까 결국엔 진무혁 부하직원이다? 비서인가? 아니면 비서 실장? 그것도 아니면 회사 소속 연예인?”임정우는 하나하나 추측을 해보았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되묻기만 했다.“그럼 식사하는 건 동의하세요?”“그쪽이 온다면 난 무조건 동의죠.”“좋아요.”성유리는 흔쾌히 동의했고 한참을 쳐다보던 임정우가 말했다.“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미리 말하는데 나 오늘 당신 제대로 기억했어요. 진무혁이 다른 사람을 대신 데려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요.”성유리는 미소만 지었다.“뭐에요, 나 못 믿어요?”“믿어요.”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임정우 씨 관심은 감사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간다고 했으면 전 꼭 갈 거니까. 알아보는 건 임정우 씨 눈썰미에 달렸죠.”“그렇게 말하니까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임정우가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스텝을 빌미로 성유리에게 성큼 다가갔다.성유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갑자기 옆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임정우의 발등을 밟았다.“누구야!”임정우는 순간 화가 나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위에 매달려 있던 크리스털 조명이 깜박
그제야 성유리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계속해서 걷어차려던 다리를 거두었다.그의 가면은 여전히 얼굴에 제대로 붙어 있었고 시리도록 차가운 두 눈은 성유리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당... 당신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요?”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와 두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왜, 즐거운 시간 방해해서 싫어?”박한빈의 얼굴은 점점 더 험악해졌고 그의 손은 성유리의 턱을 꽉 쥐었다.아까 춤추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것과 조금 전 차였던 발길질에 대한 복수심이 차오른 듯 성유리의 뼈를 분질러 버리려는 듯한 힘이었다.성유리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는데 박한빈이 그녀의 두 손을 낚아챈 뒤 무릎을 위로 들어 그녀의 두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성유리 씨 인기가 참 많네.”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교계의 꽃이 될 자질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과거 그녀는 늘 얌전하고 조용했으며 딱 어떠한 순간에만 그토록 유혹적인 모습을 드러냈었고 박한빈은 그런 모습을 자신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은 마치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아니, 속았다기보다... 자신을 갖고 노는 것 같았다.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박 대표님 눈에는 누가 다른 사람과 춤 두 번 추면 사교계의 꽃이 되나 봐요?”“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넌 신분이 다르잖아. 다른 남자한테 그렇게 웃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내 신분은 뭐가 다른데요?”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가 말을 뱉는 동시에 무언가 떠올라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이 반응은 그녀의 생각이 맞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신분이 뭐가 다른데? 결국 다른 사람에게 험한 짓 당할뻔했다는 거잖아.지석민이 잡혀간 후 성유리는 그녀가 조심하지 않아 이런 일을 당했다는 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
“뭐 하는 거예요?”성유리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이거 놔요! 박한빈 씨, 이거 놓으라고!”쉬지 않고 발을 버둥거리자 하이힐이 벗겨졌고 카펫이 깔린 호텔 복도에는 신발이 떨어져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는 성유리를 내려놓았다.하지만 이내 성유리를 구석으로 몰아 가둬놓고 그녀가 가려고 하자 단번에 턱을 그러쥐고 입을 맞췄다.그는 성유리가 망설이거나 저항할 틈도 주지 않았고 입술을 대자마자 잇새를 가르고 혀끝을 밀어 넣었다.거침없이 헤집는 움직임에 성유리는 숨이 막혔지만 두 손마저 그에게 잡혀 있어 밀어낼 기회조차 없었다.이윽고 박한빈의 무릎이 재빨리 그녀의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누구보다 성유리의 몸에 익숙했던 그의 거친 움직임은 성유리를 마치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가 된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눈을 훤히 뜬 채 칼날이 떨어지면서 그녀의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성유리를 더욱 굴욕적으로 만든 것은 이 와중에도 그녀의 몸이 반응한다는 사실이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리며 허리 쪽에 힘이 풀렸다.당연히 이 반응을 박한빈도 감지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나 싶더니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성유리의 어깨끈이 그의 손에 의해 내려가고 엘리베이터로 전해오는 에어컨 바람이 목선 사이로 파고들어 성유리의 몸은 더욱 떨렸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띵-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갑자기 열리며 재빨리 반응한 박한빈이 문이 열리는 순간 재킷을 벗어 성유리의 몸을 덮은 뒤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그 본인은 아직 가면을 쓰고 있었다.문밖에 있던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박한빈은 그들이 반응을 보이거나 자세히 볼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성유리는 내내 움직이지 않고 그의 품에 바짝 붙어 있었고 그 얌전한 모습이 박한빈은 마음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나쁜 놈.” 성유리가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의 목을 물어뜯으려던 남자는 그 말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이윽고 시선을 들어보니 성유리의 립스틱은 다 번져 있었고 흘리는 눈물로 아이라인도 살짝 번져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져 볼품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속눈썹에 맺힌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박한빈의 심장이 철렁하며 곧 천천히 움직임을 늦추더니 팔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고 그대로 키스했다.전보다 한결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에 성유리도 아까처럼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박한빈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성유리의 태도가 한풀 꺾이는 듯해 보이자 박한빈도 이성을 되찾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제대로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그의 입술을 세게 콱 깨물었다!...“대표님.”벌써 하루가 지났고, 서훈은 말하면서도 이따금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박한빈의 뺨에 남은 손바닥 자국도 눈에 띄었지만 입술에 남은 피멍보다는 아니었다.단순한 손바닥 자국이었으면 사람들이 박씨 집안에 내부 갈등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겠지만 입술에 남긴 흔적이라면 말이 달라진다.이 두 가지 흔적을 동시에 남길만한 사람은 여자밖에 없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이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런 흔적을 남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무슨 일이야?”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사모님께서 오셨어요.”“무슨 일로 왔대?”“대표님께 전해줄 게 있다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만날 시간 없어. 난...”“뭐가 바빠서 날 볼 시간도 없어?”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의 이마가 찡그려졌다.서훈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사모님, 대표님께서...”“얼굴이 왜 그래?”김서영은 이내 그의 몰골을 보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너 연애하니?”“아니요.”“그럼 얼굴에 난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실수로 부딪혔어요.”박한빈은 무심하
“지금 이게 무슨 의미야?”금미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정우가 며칠 전까지 여기 있었던 건 맞지만 어젯밤에 이미 떠났어요.”“그래?”금미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잘됐네.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왔어.”성유리는 금미라의 말에 순순히 몸을 옆으로 비켜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게 했다.금미라는 고급스러운 맞춤 드레스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녀의 표정에는 이 집에 대한 명백한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무슨 음료 드릴까요?”성유리가 물었지만 금미라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로 돌렸다.하늘이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아이의 직감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누가 선한 사람인지, 누가 날카로운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금미라가 자신을 쳐다보는 동안 하늘이는 성유리 뒤로 숨으며 그녀를 몰래 쳐다봤다. 아이의 눈빛에는 평소에 잘 없던 두려움이 그득하게 서려 있었다.금미라는 그런 하늘이를 보며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하늘아, 엄마 말 잘 듣고 방에 가서 잠깐만 기다려줄래?”하늘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하늘이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성유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금미라를 힐끔 쳐다본 후 빠르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아이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이내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금미라 앞에 놓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집이 좀 어수선하네요.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방문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갑자기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너 지금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정우를 찾으러 오신 거 아니었나요?
그 캡처 사진은 사하나가 박한빈에게 보낸 것이었다.그녀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고 그저 단순히 사진 한 장만 보냈다. 하지만 그 사진 하나로 박한빈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분명했다.사하나는 박한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당신은 이미 게임에서 탈락했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그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곧바로 사진을 삭제하고 사하나를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그리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일을 하려 했지만 더는 데이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휴대폰에서 사진은 삭제됐지만 그 장면은 박한빈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듯 사라지지 않았다.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잠시 후, 버티다 못한 박한빈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 열쇠를 손에 쥐고는 밖으로 나섰다.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는 박한빈 본인도 잘 몰랐다.결국 그는 한 공사 현장 앞에 차를 세웠다.이곳은 그가 1년 전에 매입한 땅이었다. 몇 달 전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설계도만 다듬는 데 반년 넘게 걸렸다.그리고 최근, 현장은 또 한 번 더 설계도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하늘이가 회전목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박한빈은 바로 앞에 예쁜 회전목마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그리고 2층에는 성유리를 위해 마련한 전용 화실도 있었다.사실 박한빈에게는 이미 여러 채의 부동산이 있다.하지만 그는 성유리가 돌아오면 이전의 별장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아파트 같은 곳에 사는 건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라 여겼다.그래서 오직 성유리만을 위한 집을 새로 짓기로 했고 집이 완성되면 그녀의 이름으로 등록할 계획이었다.그렇게 성유리를 맞이할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끝난 상태였다.심지어 연정우 쪽에 제시할 조건까지 생각해 둔 채로 말이다.박한빈은 절대로 두 사람이 계속 연인 사이로 지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성유리가 연정우를 마음속에 두고 싶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그게 아니라면 연정우가 먼저 성
연정우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다른 사람들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적어도 성유리가 보고 들은 것들로만 해도 연정우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가 성유리 때문에 무너져버리고 있다.그래서 만약 연정우가 자신을 밀어내더라도 성유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전혀 놀랍지도 않았다.그런데 지금 그가 한 대답은 성유리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일이 아닌 자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성유리는 이를 꽉 악문 채 눈앞의 사람을 올려다봤다.“넌 싫어?”연정우가 물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여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 후 다시 연정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아니. 좋아.”“이런 삶은 전혀 힘들지 않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난 어릴 때부터...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크지 않아도 되고 화려할 필요도 없었어. 가사도우미 같은 건 필요도 없고. 내 아이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있으면 돼.”“그게 내가 원했던 삶이야.”성유리가 할 말을 끝내자 연정우도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그럼 우리 함께 그런 집을 만들어가자.”한편, 금성.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사무실은 여전히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의 데이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놓인 재떨이는 이미 꽉 차있었다.그는 현재 거의 이틀 가까이 잠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바라던 그 소식 또한 전해졌다. 장성 그룹이 소유한 자금으로는 더 이상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수화기 너머 그 사람은 내일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하면 장성 그룹은 바로 붕괴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냉랭했다.그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로 간결했다.“네. 알겠습니
“실은 나도 그렇다고 딱 확신할 수는 없어.”한참을 침묵하던 연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지만 최근 우리 회사에서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아. 큰 문제는 아니지만 연달아 일어나는 사고들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기엔 어렵고.”연정우는 하던 말을 뚝 멈추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성유리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그리고 뭐?”“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와 오랫동안 협력하던 은행 몇 곳이 최근 갑자기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나와의 협상을 아예 거부하고 있어. 누군가 뒤에서 압박을 넣고 있는 게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거지.”‘금성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이 뒷말을 연정우는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성유리라면 충분히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생각에 잠겨있던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꼭 쥐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바로 그때,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물었다.“이 싸움에서 내가 진다면 넌 나한테 실망할 거야?”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그리고 바로 묻는 연정우의 눈을 바라보았고 연정우도 성유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근데 넌 아마 많이 힘들 거야.”연정우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다시 학교로 돌아가 강의를 해야 하겠지. 그러면 가사 도우미를 둘 형편은 안 될 거야. 그래서 너는 계속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뭐 어때? 난 이런 삶이 좋은데.”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말했고 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웃음을 빵 터뜨렸다.연정우의 환한 웃음을 본 성유리는 꽉 조여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걸 느꼈다.“나를 원망하지는 않아?”성유리가 물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너를 원망해야 하지?”“나 때문에... 박한빈 씨가
잠시 망설이던 하늘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연정우는 성유리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연정우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기에 다소 서툴렀지만 하늘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고 머리를 말리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성유리는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이 장면이 너무나 따뜻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정우가 바로 자신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그래서 연정우를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휴대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조명이 비추는 아래에서 연정우는 다정하게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고 하늘이는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사진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처럼 보였다.성유리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가 내일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반죽은 이미 미리 만들어 두었기에 이제 고기소를 넣고 찜기에서 찌기만 하면 되었다.성유리가 이렇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이유는 하늘이가 달걀노른자에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외부에서 파는 만두에는 대부분 달걀물이 들어가 있어서 하늘이를 위해 성유리는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원래 성유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평소에 잠자리에 들 때 늘 엄마를 찾곤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방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도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성유리가 하늘이 방으로 향하려 하는 순간, 연정우가 아이의 방에서 나왔다.“하늘이 잠들었어.”연정우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자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뭐라고?”“방금 잠들었다고.”연정우는 웃으며 말했다.“책을 조금 읽어줬더니 졸린다고 하더니 바로 잠들었어.”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이 믿기지 않아 방을 열어 직접 확인해 보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이는 정말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아까 너무 많이 놀아
연정우는 할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반면 성유리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긴장한 듯 주먹을 더 꽉 쥐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손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성유리는 놀란 듯 연정우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그 순간, 연정우는 그것만으로도 성유리에게 다가갈 더 큰 용기를 얻은 듯했다.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한 연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그녀에게 조금씩 가까이 대기 시작할 무렵.“엄마!”집안을 울리는 하늘이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고 그 소리는 마치 번개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았다,성유리는 깜짝 놀라 연정우를 급히 밀쳐버렸고 너무 갑작스러운 힘에 연정우는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 있던 찬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쾅!맑은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고 성유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바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 미안해. 정말 괜찮아?”“응.”연정우는 걱정하는 성유리에게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 별로 안 아팠어.”그의 말에도 성유리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었다.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늘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 둘이 지금 뭐 하고 있었어?”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의 존재를 떠올리고 아이를 향해 돌아서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늘이는 무슨 일 있었어?”“아저씨가 준 인형 어떻게 말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어.”하늘이는 말하면서 손을 뻗어 연정우의 손을 잡아끌었고 연정우는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아이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향했다.혼자 주방에 남은 성유리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연정우의 여행 가방은 여전히 현관에 놓여 있었다.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아저씨, 오늘 밤 여기서 주무실 거예요?”연정우는 아이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행동에 연정우는 제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왜? 나 많이 보고 싶었어?”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웠지만 어딘가 우울한 듯한 느낌이 숨겨지지 않았다.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잠시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연정우는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망설이던 성유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먼저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 많이 힘들어?”“그냥 좀 바빴어.”“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니고?”성유리는 지금 연정우에게 질문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확신에 찬 뉘앙스가 그득히 섞여 있었다.연정우는 성유리의 물음에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 듯했으나 금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걱정 마. 별일 아니야. 다 해결됐어.”그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하늘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넌? 요즘 잘 지냈어?”하늘이는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잘 지냈어요.”“그럼 됐어. 내가 하늘이 줄 선물 사 왔는데 뭔지 보고 싶어?”선물이라는 말에 하늘이는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연정우가 선물을 줄 때는 다소 어색해하던 하늘이도 이후 연정우가 선물을 고르는 순간이 더 즐겁다고 말한 뒤로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이번에도 하늘이는 연정우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성유리는 얼른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연정우는 여행 가방을 현관에 두 따로 준비한 가방을 열어 하늘이에게 준비한 선물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약 30cm 크기의 인형이 들어 있었다.성유리는 한눈에 그 인형이 유명 영화의 협업 한정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티나게 팔린 인형은 이곳 경운시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제품이었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연정우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하늘이는 이런 거 잘 몰라. 굳이 비싼 거 살 필요 없어. 그냥 간단한 걸로도 괜찮아.”“이
그날 밤 연정우는 끝내 식사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 날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에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이를 본 사하나는 화가 난 듯 연정우를 나무라며 몇 마디 욕설까지 퍼부었다.“괜찮아. 아마... 무슨 중요한 일이 있겠지.”“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언니랑 하늘이를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나중에 꼭 연정우 씨한테 한마디 해야겠어요.”사하나는 말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화가 나 있는 사하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무슨 문제요?”사하나가 되물었다.“글쎄 지금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사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듣지도 못했는데요? 언니 혹시 무슨 얘기 들으신 거 있으세요?”“아니. 그냥... 걱정돼서.”“뭐가 걱정되는데요?”긴장 탓에 경직돼 있던 사하나는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연정우 대표님 회사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잖아요. 대기업이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꽤 단단해진 상태예요. 그러니까 별일은 없을 거고요.”“저도 아무 얘기 못 들었으니까 괜히 걱정하지 마세요.”사하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겨우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사하나는 원래 화를 빨리 내고 빨리 풀리는 다혈질이었다.성유리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연정우를 욕하겠다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하늘이와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차 안은 다시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왔다.요즘 사하나는 집안 회사 일을 물려받느라 바빴기 때문에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 터미널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떠나버렸다.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짐을 부치고 안전 점검까지 마친 후,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는 연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하나 씨가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줬어. 지금 대기 중이야.]하지만 연정우는 평소와 다르게 바로 답장
사실 오늘 성유리는 연정우와 함께 김난희의 빈소를 찾을 예정이 아니었다.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성유리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그의 전처의 신분으로 장례식을 찾는 것만으로 이미 민망한 상황인데 연정우까지 함께 간다면 박씨 가문에게 수치를 안겨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우는 누구한테서 성유리의 일정을 전해 들은 건지 몰래 따라왔고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렸다.연정우는 자신 또한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으니 성유리는 그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연정우도 아예 성유리를 만날 것을 예상치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차 안에서 연정우는 이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를 꺼냈고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연정우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사실 나도 꼭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어. 그냥... 너 혼자 오면 위험할까 봐. 그리고 혹시 어색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오려고 한 거였어.”연정우의 핑계는 누가 들어도 거짓이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그를 들춰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래서 아까 박한빈 씨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건데?”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물었다.“별거 아니야. 그냥 흔한 말들이었어.”성유리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고 연정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려던 말들을 꾹 삼키기로 했다.‘이런 상태로 말하면 안 돼.’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게 있어 과거로 남은 사람이었으니 연정우는 그녀 앞에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혹시나 박한빈을 잊고 살던 성유리가 자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까 봐 말이다.하지만 연정우는 쉽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일을 겪은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성유리는 전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