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는 거예요?”성유리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이거 놔요! 박한빈 씨, 이거 놓으라고!”쉬지 않고 발을 버둥거리자 하이힐이 벗겨졌고 카펫이 깔린 호텔 복도에는 신발이 떨어져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는 성유리를 내려놓았다.하지만 이내 성유리를 구석으로 몰아 가둬놓고 그녀가 가려고 하자 단번에 턱을 그러쥐고 입을 맞췄다.그는 성유리가 망설이거나 저항할 틈도 주지 않았고 입술을 대자마자 잇새를 가르고 혀끝을 밀어 넣었다.거침없이 헤집는 움직임에 성유리는 숨이 막혔지만 두 손마저 그에게 잡혀 있어 밀어낼 기회조차 없었다.이윽고 박한빈의 무릎이 재빨리 그녀의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누구보다 성유리의 몸에 익숙했던 그의 거친 움직임은 성유리를 마치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가 된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눈을 훤히 뜬 채 칼날이 떨어지면서 그녀의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성유리를 더욱 굴욕적으로 만든 것은 이 와중에도 그녀의 몸이 반응한다는 사실이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리며 허리 쪽에 힘이 풀렸다.당연히 이 반응을 박한빈도 감지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나 싶더니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성유리의 어깨끈이 그의 손에 의해 내려가고 엘리베이터로 전해오는 에어컨 바람이 목선 사이로 파고들어 성유리의 몸은 더욱 떨렸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띵-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갑자기 열리며 재빨리 반응한 박한빈이 문이 열리는 순간 재킷을 벗어 성유리의 몸을 덮은 뒤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그 본인은 아직 가면을 쓰고 있었다.문밖에 있던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박한빈은 그들이 반응을 보이거나 자세히 볼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성유리는 내내 움직이지 않고 그의 품에 바짝 붙어 있었고 그 얌전한 모습이 박한빈은 마음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나쁜 놈.” 성유리가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의 목을 물어뜯으려던 남자는 그 말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이윽고 시선을 들어보니 성유리의 립스틱은 다 번져 있었고 흘리는 눈물로 아이라인도 살짝 번져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져 볼품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속눈썹에 맺힌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박한빈의 심장이 철렁하며 곧 천천히 움직임을 늦추더니 팔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고 그대로 키스했다.전보다 한결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에 성유리도 아까처럼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박한빈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성유리의 태도가 한풀 꺾이는 듯해 보이자 박한빈도 이성을 되찾았다.하지만 박한빈이 제대로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그의 입술을 세게 콱 깨물었다!...“대표님.”벌써 하루가 지났고, 서훈은 말하면서도 이따금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박한빈의 뺨에 남은 손바닥 자국도 눈에 띄었지만 입술에 남은 피멍보다는 아니었다.단순한 손바닥 자국이었으면 사람들이 박씨 집안에 내부 갈등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겠지만 입술에 남긴 흔적이라면 말이 달라진다.이 두 가지 흔적을 동시에 남길만한 사람은 여자밖에 없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이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런 흔적을 남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무슨 일이야?”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사모님께서 오셨어요.”“무슨 일로 왔대?”“대표님께 전해줄 게 있다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만날 시간 없어. 난...”“뭐가 바빠서 날 볼 시간도 없어?”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의 이마가 찡그려졌다.서훈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사모님, 대표님께서...”“얼굴이 왜 그래?”김서영은 이내 그의 몰골을 보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너 연애하니?”“아니요.”“그럼 얼굴에 난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실수로 부딪혔어요.”박한빈은 무심하
날이 어두워지고 밖은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저녁 러시아워의 붉은 불빛이 어우러져 번잡하고 차가운 이 도시를 대표하는 하나의 모습을 만들어냈다.지화그룹 건물은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통유리창은 액자처럼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박한빈은 그 자리에 서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라이터를 손에 쥐고 거듭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파란 불꽃이 튀어나왔다가 사그라들었다.한번 또 한 번...박한빈은 이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지금 떠오르는 건 그저 웃지 않던 얼굴과 자신에게 엄격했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 있던 모습뿐이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박한빈은 겨우 열두 살이었다.부자의 유대감은 별로 없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그는 적어도 평범한 아버지였고 어머니와는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였다.그게 아니고서야 어머니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켰을까.처음 그에게 성유리와 결혼하라고 한 것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는 자신이 거짓말투성이인 세상 속에서 살아온 것 같았다.마지막으로 라이터 스위치를 똑딱이던 박한빈은 라이터를 책상 쪽으로 던지고는 뒤돌아 걸어 나갔다.오 기사는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박한빈이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정중하게 다가갔지만 박한빈은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운전석으로 향했다.오 기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액셀을 밟았고 곧바로 시월 파크에 도착했다.하지만 박한빈이 안으로 들어서자 칠흑 같은 공허함만이 그를 반길 뿐이었다.불을 켜고 보니 성유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집안까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어젯밤 성유리가 자신을 물었기에 그는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마지막은 욕실에서 끝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울면서 고개를 흔들며 놓아달라고 애원하면서도 그의 요구대로 숱한 말들을 뱉었던 게 선명하게 떠올랐다.적어도 여
박한빈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유혹을 받아왔고 눈앞에 있는 여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하수였다.그래서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은 들리는데 받는 사람이 없자 박한빈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둡게 일그러졌다.그의 뒤에 서 있던 여자는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박한빈의 차와 한눈에 봐도 돈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의 옷을 보며 여자는 결국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다가갔다.“성유리 씨랑은 무슨 관계예요? 친구? 근데 지금 그쪽 전화 받을 시간이 있겠어요? 이 시간까지 집에 안 들어왔다는 건 남자랑 데이트하러 간 것 같은데? 미리 알려주는데 그 여자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뒤에서 얼마나 방탕하게 노는데, 내가 아침에 글쎄...”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고 차갑고 매서운 눈빛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여자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 그녀는 뒷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그녀도 나름 많은 사람을 만나봤다고 자부하며 지독하게 싸우는 양아치들도 본 적이 있지만 눈빛 하나로 이토록 강한 위압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마치 그녀가 한 마디만 더하면 그가 정말로 죽일 것 같았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시선을 거둔 뒤 곧바로 열쇠 전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기사가 와서 집주인이나 임대인인 걸 증명할 서류를 보여줘야 문을 열 수 있지만 그가 도착하고 박한빈은 별말 없이 지니고 있던 모든 현금을 던져준 뒤 덤덤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열어.”기사는 이곳의 집 몇 채나 살 수 있는 그의 시계를 슬쩍 보고는 얼른 돈을 받고 문을 열었다.지난번에 성유리에게 잠금장치를 바꾸라고 충고했는데 그녀는 듣지 않은 것 같았다.느슨해진 열쇠 구멍은 기사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열 수 있었고 박한빈의 성의가 있으니 특별히 도어락으로 바꿔주기까지 했다.박한빈은 내내 아무 말도 없었고 그가 일을 마치자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그대로 닫아버렸다.문밖에 있던
박한빈은 휴대폰 화면을 먼저 흘깃 쳐다본 뒤 이렇게 물었다.“어디 갔었어?”성유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왜 멋대로 열쇠를 바꿔요?”“대답부터 해.”박한빈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와 끝까지 따지고 들려다 한참을 그와 눈을 마주친 뒤 마침내 말을 꺼냈다.“병원에요.”박한빈의 표정이 살짝 변하며 그의 시선이 그녀를 훑어보았다.성유리는 그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오늘 오후에 엄마가 깨어났다고 하던데 내가 갔을 때는 다시 잠들어 있어서 다시 깨어나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기다렸어요.”나지막한 성유리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얼음장 같던 박한빈의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이내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그럼 전화는 왜 안 받아?”“무음으로 해놔서 못 봤어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물었다.“이제 들어가도 돼요?”그제야 박한빈은 몸을 옆으로 돌려 성유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성유리는 허리를 굽혀 신발을 갈아 신은 뒤 들고 있던 에코백을 내려놓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래서 당신은 여기서 뭐 하는 건데요?”박한빈도 모른다.그저 시월 파크에 혼자 있기 싫고 도연제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한참을 차를 몰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나 배고파.” 박한빈이 갑자기 말했다.“네?”“뭐 좀 먹고 싶어.”그 말과 함께 박한빈은 식탁 바로 옆에 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비좁은 성유리 집에 고작 60센티미터 남짓한 식탁 앞에 앉으니 그는 다리조차 제대로 뻗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성유리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왜 아직도 먹을 것을 준비해 주지 않냐고 다그치는 눈빛이었다.성유리는 도우미가 음식을 다 준비해 주는 도연제로 돌아가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쯤 되니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그와 다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뭐 먹고 싶어요? 배달시킬게요.”“배달 얼마나 걸리는데? 난 지금 바
박한빈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성유리도 따라 내려놓았다.“이제 가도 되죠?”성유리는 곧바로 그를 내보내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갑작스럽게 물었다.“왜 시월파크에 안 살고 여기서 지내?”“거긴 내 집이 아니잖아요.”성유리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박한빈은 그녀와 잠시 눈을 맞추고 난 후 말했다.“집을 너한테 넘겨줄 수도 있어.”“괜찮아요. 난 여기가 좋아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미간은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아직 더 할 말이 남았어요?”성유리가 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깨끗한 수건 좀 줘.”말을 마치고 그는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성유리는 황급히 그를 막아섰다.“뭐 하는 거예요? 여긴 내 집이라고요!”“시월파크는 내 집인데 너도 거기서 씻고 자고 했잖아?”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박한빈은 욕실 문을 열었다. 욕실을 둘러본 박한빈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이런 곳에 욕조가 없는 건 당연했지만 박한빈은 여기에 샤워실조차 없을 줄은 몰랐다. 목욕하는 공간이라고 해봤자 세면대와 변기를 하나의 커튼으로 구분해 놓은 게 전부였다.“여긴 박 대표님 같은 분에게 안 어울려요.”성유리는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고개를 돌린 박한빈은 성유리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표정을 본 그는 더욱 심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적응 안 되는 곳이긴 하네. 그래도 누군가랑 같이 있으면 그리 나쁘진 않지.”“지금 뭐라고...”성유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확 끌어당겨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물러설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바로 샤워기를 틀었다.차가운 물이 가열되기도 전에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성유리의 머리카락과 옷을 흠뻑 적셨다.“뭐 하는 거야!”성유리는 버럭 소리쳤다.하지만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샤워기를 옆
박한빈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으려던 성유리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내가 오늘 어떤 소식을 들었는지 알아?”박한빈이 그렇게 말하자 성유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에게 내가 모르는 형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는 듯 평온하게 말했다.성유리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무슨... 소리예요?”“아버지에게 사생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야.”박한빈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다. 마치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왜 그가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부부였을 때조차 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성유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묻지 않았고 박한빈은 그녀보다 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며칠 동안 마주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던 날들이 있었다.그런 부부 관계였으니 그들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 새삼 우스울 정도였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성유리에게 자신의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다니. 그녀는 어리둥절함과 동시에 뭔가 불편했다.“어떻게 알았어요?”성유리는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어.”“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요?”“모른대. 하지만 어머니랑 할머니는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아.”박한빈은 말할수록 목소리가 차가워졌다.성유리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박한빈이 눈을 내리깔고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동정하는 거야?”“아니요...”성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한빈 씨를 동정할 자격이 있나요?”사실 그녀는 여전히 어젯밤 그가 했던 말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박한빈은 그걸 느낀 듯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 싫었지만 먼저 문제를 일으킨 건 성유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간에 완전히 잘못한 일은 아니었으니 더 이상 탓할 필요도 없었다고 여겼다.“이제 그만해도 되겠지.”성유리는 그가 잡고 있던 수
박한빈과 성유리는 한 번도 같은 침대에서 나란히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박한빈이 그녀를 아무리 지치게 해도 성유리는 항상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그들 사이가 부부라기보다는 단순한 파트너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침대 위의 파트너, 일상 속의 파트너.성유리에게는 한 침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이 오히려 성관계보다 더 친밀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박한빈과 성유리는 분명히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성유리는 잠든 박한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수도 없이 봤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낯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아도 그의 얼굴 윤곽을 정확히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학생 시절부터 이미 수없이 그려본 얼굴이었다.그 시절 하얀 교복을 입고 있었던 박한빈은 학교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점점 더 성숙하고 잘생긴 외모로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고상하고 차가운 분위기도 더욱 뚜렷해졌고 이제는 그가 그녀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그때 갑자기 잠들어 있던 박한빈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박한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찌푸려졌고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잡아채더니 그녀를 침대로 확 끌어당겼다.그는 겨우 수건 하나만 두르고 있었고 성유리의 말린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그의 피부를 살며시 간지럽혔다.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이내 성유리를 침대에 눕히고 몸을 그녀 위에 얹었다. 이번에는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머리카락 깔았잖아요!”그러나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손이 멈췄다.성유리는 의아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순간
그런 날들을 성유리는 대체 홀로 어떻게 버텨낸 걸까?배도 제대로 못 채우고 하루하루 지석민의 협박 속에서 벌벌 떨며 살아야 했던 그 시간 동안 성씨 가문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그들은 성유정을 진짜 딸처럼 아끼고 무용과 피아노까지 가르치며 키웠다.그래서 결국 성유정은 성유리보다 훨씬 더 귀한 집 딸처럼 보이게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유리의 촌스럽고 무례한 행동을 비웃었다.하지만 아무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성유리는 단 한 번도 자기 인생이 원래는 그런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걸.지금까지 살아온 그 10년이 사실은 애초에 잘못된 자리에 있었던 삶이란 걸.그때, 귀신처럼 성유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박한빈은 마침 식탁에 앉아 있던 중이었다.주변 사람들은 잔을 들고 연신 술을 따라주며 극진히 대접해 줬고 박한빈은 그들이 무슨 속셈인지 이미 훤히 알고 있었다.길을 닦고 학교를 짓자는 말은 그냥 명분일 뿐, 그들이 지금 이렇게 그에게 들러붙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어떻게든 성유리와 인연을 맺어 박한빈으로부터 실질적인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그게 이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박한빈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기 때문에 능숙하게 응대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이름이 뜬 화면을 보는 순간, 문득 정신이 흐트러졌다.곧바로 정신을 다잡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지금 어디예요?”수화기 너머 들리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잠시 망설였다.“밖에... 있어.”“누구랑 있는데요?”마을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는 밖으로 나와 조용한 자리를 찾아도 완전히 막을 수 없었고 당연하게도 수화기 너머로 그 소리가 성유리에게 전해졌다.고스란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의아한 듯 물었다.“왜 이렇게 시끄러워요?”“음... 공사장 근처에 있어서 그래.”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자기가 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크게 고민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내뱉었다.“그럼 거기서 밥 드셨겠네요?”다행
“저기요! 거기 들어가면 안 돼요!”곽단이 급하게 뒤에서 소리쳤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집 앞의 잡초가 워낙 무성했기 때문에 안쪽도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박한빈은 이미 집 안의 방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발길을 옮기려 할 때마다 잡초가 앞을 가로막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그때 뒤에 있던 곽단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혹시 뭐 찾으시는 거예요? 근데 이 집은 몇 년 전부터 방치된 곳이라 값나가는 건 다 누가 가져갔을 텐데... 이제 남은 건 하나도 없을걸요?”박한빈은 여전히 한마디 대꾸도 없이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그리고 곧장 작은 골목을 돌아 집 옆쪽으로 향했다.다행히 창문은 이미 깨져 있었기에 그는 무리 없이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실내는 예상한 그대로였다.오랜 시간 비워져 있던 만큼 바닥이며 창틀이며 온통 먼지투성이였다.한 바퀴 방안을 둘러본 후, 박한빈이 마지막으로 시선을 멈춘 곳은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 하나였다.오래되어 삐걱거리는 책상이었는데 어딘가 학교에서 쓰던 책상을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그 위엔 천 조각이 덮여 있었고 휴대폰 손전등을 비추어보니 작은 꽃무늬가 박혀 있었다.그리고 책상 옆 바닥에 내팽개쳐진 책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박한빈은 몸을 숙여 책들을 주워들었고 마침 그때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문이 열리면서 쌓였던 먼지가 우수수 쏟아졌고 그 소리까지 들려올 정도였다.뭔가 이상한 기분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 순간, 앞장선 남자가 급히 다가오며 소리쳤다.“이런 데를 들어오시게 어떡해요! 미리 말씀만 해주셨으면 제가 먼저 정리라도 해놨을 텐데.”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그제야 남자는 뭔가 깨달은 듯, 급히 손을 내밀었다.“아, 제가 소개를 깜빡했습니다. 저는 이 마을 이장, 지세찬이라고 합니다.”박한빈은 그와 짧게 악수를 나누며 대답했다.“그냥 궁금해서 한번 들어와 봤습니다.”“이 집은
화면 속 사람이 웃는 장면에 맞춰 가게 안의 여자도 따라 웃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어디가 웃기는지는 박한빈은 알 수 없었다.“거기서 왜 멍하니 있어?”여자는 화가 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카운터 위에 있던 장난감 상자 하나를 그대로 들고 상대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손님 온 거 안 보여!?”안쪽에 앉아 있던 여자는 원래 그 말조차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있었다.그렇지만 물건이 얼굴에 부딪히고 나서야 박한빈을 힐끔 쳐다보았다.그런데 단 한 번의 눈길 이후, 그녀의 얼굴빛이 확 바뀌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혹시... 당신은 그...”“아까 말했잖아. 이분은 지서연 남편, 큰 회사의 사장님이시라고!”여자는 다가가 딸의 팔을 세게 꼬집은 뒤, 박한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이쪽은 제 딸 곽단이에요. 서연이랑 같은 반 친구였답니다.”박한빈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그럼 제가 바로 이장님께 알리러 갈게요. 다만 지금 이 시간이면 다들 낮잠 자고 있을 수도 있어서 제가 직접 집마다 다녀볼게요. 곽단, 너는 얼른 사장님 모시고 마을 한 바퀴 돌면서 안내 좀 해드려!”이름이 불린 곽단은 마지못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는데 박한빈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잠시 후, 곽단은 안내를 하려는 듯 앞장서며 천천히 입을 뗐다.“따라오세요.”박한빈은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사실 두 사람이 굳이 안내하지 않아도 그는 처음부터 이 마을을 둘러볼 생각이었다.애초에 그것이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가이드’가 하나 생겼다 해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뉴스에서 본 적 있어요, 사장님에 대한 기사요.”마을을 걷던 중, 곽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진짜로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어요…”“그 사람 집은 어딥니까?”곽단은 뜻밖의 질문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쳐다봤다.“당신 옛 동창 말입니다.”박한빈은 성유리라는 이름을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고 지서연이라고 부르기도 싫었기에 그냥 동창이라는 단어로
여자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침묵만 유지했다.하지만 그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 존재감만으로 주변 공기가 묵직해졌다.여자도 그 기운을 감지한 듯,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도 서서히 사라졌다.처음에는 자기가 너무 성급하게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순간,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좋습니다.”“다만 그 사람은 이쪽에 아직 일이 있어서요. 지금은 저희와 함께 갈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먼저 다녀오는 게 좋겠네요.”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여자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좋아요, 좋아요!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원래 여자는 성유리 이야기를 미끼 삼아 박한빈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순순히 따라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여자 입장에선 성유리가 오든 말든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여자가 진짜 원하는 건, 오직 박한빈이 가진 권력이었으니까.지금처럼 성유리를 건너뛰고 박한빈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아까 하신 말씀 중에... 유리랑 이웃사촌이었다고 하셨죠?”가는 길에 박한빈이 먼저 물었다.여자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그러다 잠시 뒤에야 박한빈이 말한 성유리가 예전에 자신이 말했던 그 이웃임을 떠올렸다.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맞아요! 우리 집이랑 서연이 집이 바로 옆에 있었거든요! 어릴 때는 유리가 아빠한테 자주 맞고 저희 집으로 도망 오기도 했어요! 제가 그럴 때마다 우유랑 빵도 챙겨줬답니다!”물론 이건 전부 여자가 직접 지어낸 이야기였다.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 성유리가 없으니 반박할 사람도 없으니 뭐라 말하든 여자의 마음대로였다.박한빈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여자는 그런 박한빈을 힐끗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제 딸도요. 전에 서연이랑 같은 반이었어요! 둘이서 꽤 친하게 지냈다니까요. 근데 서연이는 워낙 특별한 집안 출신이잖아요. 그래서
여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아직 촬영이 시작되기 전이라 현장은 조용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성유리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내가 무슨 말을 할지...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여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는 재벌가 사모님이시라면서? 재벌 집안은 체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과거에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들 알게 되면 어떨까? 그때도 지금처럼 네 곁에 있어 줄까?”말을 마친 여자는 성유리를 시험하듯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의 눈에는 그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그 조용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여자의 심장은 세차게 요동쳤다.마치 자신이 ‘위협’한 게 아니라 오히려 판단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여자는 재빨리 입을 열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먼저 입을 뗐다.“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보세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그 태연한 반응에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저 그대로 뒤돌아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러나 이건 여자의 입장에선 명백한 도발이라고 느껴졌다.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거기, 뭐 하는 거야?”감독이 여자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몇 번이나 불렀는데 왜 대답이 없어? 빨리 자리로 돌아와!”여자는 잠시 멈칫하다 곧장 대꾸했다.“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되는데? 나 안 해!”말을 마친 여자는 곧바로 촬영장을 나와 버렸다.그렇지만 몇 걸음 채 가지도 않아 그녀는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그래서 곧장 택시에 올라탔고 그녀가 향한 곳은 박한빈이 머무는 호텔이었다.호텔 앞, 여자는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들고 곧장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단아,
성유리의 앞을 막아선 사람은 며칠 전 호텔 앞에서 그녀를 붙잡았던 바로 그 여자였다.여자는 오늘도 여전히 스태프 복장을 하고 있었다.“너희 촬영팀에서 엑스트라 모집한다고 하길래 나도 지원했어.”여자는 웃으며 계속 말했다.“그냥 한 번 와봤는데 정말 너를 만날 줄은 몰랐네. 너, 지서연 맞지?”“네 말대로 너도 잘못한 거 없잖아. 근데 왜 나만 보면 도망가는 거야?”성유리는 조용히 손을 뺐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여자를 쳐다보았다.“대체 무슨 일이죠?”성유리의 냉랭한 반응에 여자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곧 다시 웃으며 말했다.“뭘 그렇게 겁먹어? 난 그냥 네가 돌아와서 반가운 거야.”“이렇게 얼굴 보는 게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네.”‘거짓말.’성유리는 여자의 말을 단 한 글자도 믿지 않았다.하지만 뭐라 반박하지도 않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성유리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드러냈음에도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어갔다.“근데 너 이번에 돌아왔으면 고향에도 한 번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동네 사람들이 전부 네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어. 다들 서연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예전에는...”“제가 왜 거길 가야 하죠?”성유리는 단칼에 여자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거긴 제 고향도, 제 집도 아니에요.”“볼일 없으시면 그냥 가세요. 전 일해야 하니까.”사실, 성유리는 낯선 사람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편이 아니었다.실제로 감독이나 스태프들도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배경은 화려하지만 절대 잘난 척하지 않고 누구보다 스태프들에게 친절한 사람이라고.그렇지만 지금 성유리의 안색은 너무 어두웠다.성유리는 더 이상 이 여자와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여자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성유리의 앞을 다시 가로막으며 말했다.“하긴... 마침 잘 만났다. 너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거든.”성유리는 여자의 갑작스러운 말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다가올 줄 알았으니까.아무
성유리는 입을 삐죽이며 계속 투덜거렸다.“이건 제 잘못도 아닌데 왜 저한테 화를 내는 건데요?”그 말에 박한빈의 걸음이 뚝 멈췄고 잠시 침묵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 화 안 났어.”“그럼 왜 계속 앞만 보고 가고 저랑 말도 안 하세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그리고 이우빈 씨가 대체 뭐라고 이러세요?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촬영장에서 내쫓아 버려요. 어차피 지금 이 영화, 박한빈 씨가 최대 투자자인데.”그 말에 박한빈이 흥미를 보이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이 영화, 이우빈 씨 소속사도 투자한 거라서 교체하려면 복잡해.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면 이 프로젝트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데 괜찮아?”“망해도 상관없어요. 전 당신이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성유리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 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고 가라앉았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그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진짜?”“당연하죠.”성유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든 박한빈 씨보다 중요한 건 없어.”방금까지만 해도 차 안에서 박한빈의 한마디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졌던 성유리였다.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박한빈이 그녀와 똑같이 얼굴을 붉혔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있는 박한빈의 힘에 너무 아파 빼내려 했지만 곧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박한빈 씨, 당신 혹시 얼굴 빨개진 거예요?”“아니.”박한빈은 단호하게 부정했다.하지만 눈길을 돌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티가 났다.그 반응에 성유리는 더욱 확신했고 그녀는 빙글빙글 돌며 박한빈의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맞는 것 같은데? 한빈 씨 지금 얼굴 빨개진 거 맞죠?”“설마... 부끄러운 거예요?”성유리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려던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허리를 갑자기 당겼다.그리고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술을 덮쳐버렸다.멍해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처음엔 그녀도 자신처럼 화가 난 줄 알았다.하지만 잠시 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다시 성유리를 바라보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너... 울어?”박한빈은 성유리의 어깨를 살짝 붙잡으며 무슨 말을 더 하려 했다.그러나 정작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순간 박한빈이 굳어버리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너... 지금 웃고 있는 거야?”박한빈의 목소리는 낮았고 눈빛은 싸늘하게 식었다.사실 성유리도 아주 오랜만에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았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 아니요.”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그럼 그 웃음부터 참아봐.”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 움찔했지만 아직 제대로 해명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앞좌석에 있는 기사를 향해 말했다.“차 세워요.”“아니, 잠깐만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그러자 성유리가 다급히 말했다.그렇지만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에서 내려버렸고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미안해요. 제 잘못이에요. 박한빈 씨를 비웃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리고... 사실 전 이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데...”박한빈의 발걸음은 빨랐다.성유리는 그를 따라가며 거의 뛰듯이 걷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 뚝 멈춰 섰고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성유리는 그대로 그의 등에 부딪쳤다.뒤돌아본 박한빈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방금 뭐라고 했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다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이우빈 씨조차 한빈 씨를 좋아한다고요. 그만큼 당신 매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잖아요? 이건... 좋은 일 아닌가?”처음엔 나름 진지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성유리는 점점 목소리를 줄였다.결
박한빈이 화가 난 채로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마침 손에 들고 있던 게 게 껍질을 내려놓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미처 박한빈이 화가 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성유리는 돌아서면서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밀었다.“이거 보세요. 제가 한빈 씨 거 다 발라놨어요! 빨리...”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릇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더니 곧장 성유리의 손을 잡아끌었다.“나랑 가자.”박한빈의 얼굴은 잿빛처럼 어두워져 있었는데 성유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랭한 표정이었다.잔뜩 당황한 성유리가 천천히 웃음을 거두었다.“왜 그러는데요? 무슨...”하지만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몇 걸음 가던 그는 문득 무언가 떠올렸는지 발걸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성유리가 힘들게 발라놓은 게살이 담긴 그릇을 다시 집어 들더니 옆에 멍하니 서 있던 웨이터에게 내밀었다.“포장해 주세요.”웨이터는 박한빈의 기세에 놀라 움찔했지만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박한빈은 더 이상 웨이터를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성유리를 끌고 나섰다.성유리는 복도로 나오면서 이우빈을 쓱 쳐다보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박한빈이 성유리를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자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무슨 일인데요?”성유리는 이제야 벌어진 상황을 퍼즐조각처럼 맞춰 보려 박한빈에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박한빈의 싸늘한 눈빛만 봐도 기분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조금 후, 웨이터가 포장한 게살을 들고나오자 박한빈은 차창을 내리고 그것을 받아 들더니 바로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출발.”박한빈의 태도는 마치 이곳에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했다.쌩쌩 달린 차가 일정 거리를 지나고 나서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이우빈 씨가 뭐라고 했어요?”성유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박한빈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