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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Author: 송진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10-25 13:43:44
박한빈과 성유리는 한 번도 같은 침대에서 나란히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박한빈이 그녀를 아무리 지치게 해도 성유리는 항상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그들 사이가 부부라기보다는 단순한 파트너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침대 위의 파트너, 일상 속의 파트너.

성유리에게는 한 침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이 오히려 성관계보다 더 친밀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한빈과 성유리는 분명히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성유리는 잠든 박한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수도 없이 봤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낯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아도 그의 얼굴 윤곽을 정확히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학생 시절부터 이미 수없이 그려본 얼굴이었다.

그 시절 하얀 교복을 입고 있었던 박한빈은 학교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시간이 흐르며 그는 점점 더 성숙하고 잘생긴 외모로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고상하고 차가운 분위기도 더욱 뚜렷해졌고 이제는 그가 그녀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때 갑자기 잠들어 있던 박한빈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박한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찌푸려졌고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성유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잡아채더니 그녀를 침대로 확 끌어당겼다.

그는 겨우 수건 하나만 두르고 있었고 성유리의 말린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그의 피부를 살며시 간지럽혔다.

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이내 성유리를 침대에 눕히고 몸을 그녀 위에 얹었다. 이번에는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머리카락 깔았잖아요!”

그러나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손이 멈췄다.

성유리는 의아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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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민이 용기를 내 다가가 박한빈을 한번 불렀지만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최정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한번 박한빈을 불렀다. “박 대표님!” 이번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박한빈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고 그녀를 본 순간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누군가 박한빈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여자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결국 너도 네 허리춤을 못 지킨 거야?”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최정민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최정민의 목소리는 쉰 듯했고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부탁드릴게요. 저 좀 도와주실 수 없나요?” “저는... 저는 제 의지로 박세빈 씨와 만나는 게 아니에요. 지난번에 그가 저를 취하게 만든 뒤 호텔로 데려가서 입에 못 담을 그런 사진들을 찍었어요.” “정말 무서워요. 박 대표님, 제발 도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최정민은 말하며 속이 많이 상했는지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들은 얼굴을 타고 목으로까지 흘러내렸다. 하지만 박한빈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부모님께는 말할 용기도 없어요. 박 대표님 말고는 이 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지만 박한빈은 빠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녀와의 거리를 벌렸고 동시에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최정민은 그의 반응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다가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에요. 정말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요.” “내가 박세빈이랑 얘기해 볼게.” 박한빈의 말에 최정민의 눈빛이 즉시 반짝였다. “정말?” “응.”“고마워! 아니, 정말 감사합니다!” 최정민은 잔뜩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순간 그의 손을 잡으려다 다시 생각난 듯 멈췄고 결국 허공에 붕 뜬 손을 가만히 내렸다. 최정민은 다시 한번 박한빈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나쳐 걸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34화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다 지화 그룹의 대주주들이었다. 박세빈은 이미 사직한 상태지만 그래도 손에 주식을 들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박한빈을 발견한 박세빈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형! 오셨어요?” “자. 다들 오셨으니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여긴 제 여자 친구인 최정민이라고 합니다.” 박한빈은 자리에 앉아 있는 최정민을 잠시 쳐다보더니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알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그들을 지나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세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스스로 술을 한 잔 따라 최정민 옆에 앉았다. “난 형이 형수님을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박세빈이 고개를 돌려 최정민에게 물었다. “아직 형수님 못 보셨죠?” 최정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조용히 대답했다.“봤어요.” “그래요?” 박세빈은 조금 의아해하다가 이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생각났다. 예전에 병원에서 일했었잖아요. 아마 거기서 본 거겠죠?” “형수님 임신하셨잖아요. 형은 거의 매번 산부인과 검진 때 따라간다던데요?” “솔직히 우리 형 정도의 위치에서 이 정도까지 하는 건 정말 대단한 거죠. 우리 주변 사람들 봤으면 알 거예요. 외모도 별로고 돈도 얼마 없으면서 바깥에서 엉망진창으로 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최정민은 왜 박세빈이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몰라 고개만 숙인 채 무기력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박세빈은 처음엔 흥분해서 말하던 중이었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최정민의 무덤덤한 반응에 그의 표정 또한 이내 사라져 버렸다. “지금 무슨 뜻입니까? 제가 하는 얘기 듣기 싫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최정민이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박세빈은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안았다.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건 누구 보라고 그러는 겁니까? 당신 혹시 제가 가진 게 뭔지 잊은 건가요?” 그 말에 최정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33화

    그 순간, 울리는 박한빈의 휴대폰 벨 소리가 방 안의 평화가 깨버렸다. 그는 애초에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오늘 중요한 식사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박한빈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결국 몸을 일으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마지막엔 낮은 목소리로 알겠다는 말을 남긴 뒤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박한빈은 성유리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네.” 성유리는 무척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치 방금 전의 따뜻한 순간은 전혀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고 이번 키스는 평소와는 달리 부드럽지만 깊고 따뜻했다.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느낌이 든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려 손으로 그의 셔츠를 꽉 잡았다. 두 사람 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을 때가 돼서야 박한빈은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스치며 남은 흔적을 지웠다. “이제 갈게.” 박한빈은 말을 하며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손을 쳐다봤다.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그의 셔츠를 꼭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순간 귀 끝까지 빨개져 손을 급히 뗐다. 박한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성유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저녁에 나 기다리지 말고 푹 쉬어.” “알았어요.” 성유리는 대답하며 박한빈의 시선은 피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개의치 않아 하며 성유리를 한 번 더 가볍게 안아준 뒤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실외는 실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평소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박한빈도 밖에 나서자마자 너무 추워 몇 번이고 헛기침을 했다. 순간 실내의 온기가 그리워진 박한빈은 무의식적으로 뒤돌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32화

    “뭔데?” 박한빈은 궁금한 듯 물었지만 성유리는 그가 유효정이 한 말에 호기심을 가진 게 아니라 연정우라는 사람이 자리에 있었기에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기분이 좋든 나쁘든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른 여자랑 호텔 들어가는 걸 봤다고 알려주던데요?” “뭐라고 했다고?” 박한빈은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고 하던 행동마저 멈췄다. 하지만 성유리는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걔 정말 미친 거 아닌가?”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에게 대답했고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성유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고 미간마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럼 그냥 헛소리하셨다고 생각하세요.” 성유리가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을 한 게 유효정이야 아니면 연정우야?”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다소 불쾌해졌고 불만이 가득한지 인상도 일그러졌다. “아까 분명히 유효정 씨라고 했잖아요.” “하하.”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반응은 분명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이미 박한빈은 머릿속에서 이 모든 책임을 다 연정우에게 돌린 것 같았다. 그래서 성유리 또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더 많은 것을 상상할 테니 차라리 침묵하기로 했다. 박한빈이 계속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을 본 성유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는데 갑자기 박한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래서? 넌 진짜 그걸 믿은 거야?”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성유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을 잠시 마주 보더니 오히려 당당하게 되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떤 데요?” 박한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가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그녀가 무심하게 상관이 없다는 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31화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평생 당신과 함께할 거니까.” 연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유효정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가 궁금해졌다. ‘이건 약속인가? 약속이겠지?’ 유효정은 연정우의 맞은편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아 입이 살짝 벌어진 채로 멍하니 연정우를 바라봤다. “어쨌든 저희는 결혼할 겁니다. 그리고... 함께 늙어가겠죠. 이건 제가 당신 아버지에게 한 약속이기도 하니 반드시 지킬 거예요.” “저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됩니다. 유효정 씨는 더 있고 싶으면 계속 돌아다녀도 되니 저희는 저녁에 봅시다.” 말을 마친 연정우는 곧바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는데 유효정은 더 이상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구나. 역시 나랑 하는 약속이었어.’  그렇지만 유효정은 그 약속이 자신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를 위한 거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약속이라기보다는 조건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교환한 조건 말이다. 연정우는 평생 그녀와 함께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유효정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평생 함께하기만 하겠다는 말이었지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는 유효정은 할 말을 잃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유효정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이름은 바로 성유리였다. 연정우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지에 대한 이유가 전부 다 성유리 때문이라는 확신이 든 유효정이 화가 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맞아. 전부 다 저 여자 때문이야!’ ... 성유리는 곧 도연제로 돌아갔다. 비록 백화점에서 잔뜩 물건을 사긴 했지만 전부 일상용품이었고 생일 선물로 주기엔 너무 성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뒤, 성유리는 인터넷에서 박한빈을 위한 다른 선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너무 몰두한 탓일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30화

    유효정의 말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정우는 그것을 막으려 손을 뻗었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아주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 태도에 유효정의 표정이 굳어졌고 연정우도 천천히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성유리는 더 머물지 않고 짧게 말을 해준 뒤 곧바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유효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다시 달려들며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확실히 말해줄게. 이건...” “진실이라면 진실이겠죠.” 성유리가 그녀의 말을 뚝 끊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부부 사이의 문제고 유효정 씨가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 태도는 유효정에게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친 듯한 허탈함을 안겨줬다. 그녀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보며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성유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부부 사이의 문제였고 유효정이 나설 이유 또한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성유리가 잘 사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 내장이 뒤틀릴 것 같았다. 그리고 성유리의 행복 뒤에는 박한빈이 든든한 “산”이 되어 주고 있었다. 만약 박한빈이 아니었다면 유효정은 성유리를 눈에 담지도 않았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그녀를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성유리가 자신에게 넘을 수 없는 장애물로 느껴졌다. “갑시다.” 연정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유효정에게 말했다. 유효정은 성유리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유효정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요? 지금 심정이 어떠시냐고요?” 연정우는 미간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29화

    새해가 오기 전, 성유리는 또 다른 중요한 일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박한빈의 생일이었다. 병원을 나선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근처의 쇼핑몰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생일까지 며칠 남지 않았기에 맞춤 제작을 하기엔 시간이 아주 촉박했다.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에게 딱 맞는 옷을 사기로 했다. 남성복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반갑게 다가오며 물었다. “대표님 부인이시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서도 익숙한 얼굴이 되었음을 느끼며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 “그냥 구경 좀 하려고요.” “박 대표님께 선물하시려는 건가요? 새로 들어온 외투를 한번 보시는 건 어떠세요?”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직원의 추천을 받다 보니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여러 가지를 고르게 되었다. 결제는 당연히 박한빈의 카드로 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매장을 나서는 순간,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 사람은 바로 연정우였다. 그는 크게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지만 성유리를 보자마자 먼저 그녀의 뒤를 힐끔거렸다. “너... 쇼핑하러 온 거야?” “응.” “남성복을?” 연정우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신경질적인 톤이 섞여 있었고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화해했구나.” 그러자 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좋은 일이네. 어차피 결혼한 사이니까 잘 사는 게 맞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연정우의 얼굴에는 뚜렷한 감정이 그대로 비쳤다. 성유리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먼저 말을 걸었다. “너는 요즘 어때? 지난번에...” “별거 아니야. 그냥 피부만 조금 다쳤을 뿐이야. 보기만 무섭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정우 씨!” 그 소리에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고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유효정이 먼저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유효정의 힘에 성유리의 몸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28화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다가 결국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려고 결심했다. “오늘 최 선생님 마주쳤어요?” “누구?” “최 선생이요.” 박한빈은 아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려고 마음먹었다. “최정민 씨요. 최 선생님.” “두 사람... 무슨 사이예요?”  “무슨 사이냐고? 당연히 아무 사이도 아니지.” 박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언가 떠오른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유리야,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확 빼냈다.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미소를 더욱 환하게 지으며 물었다. “역시 그런 것 같네?” “아니에요.” 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다. 박한빈은 더는 따져 묻지 않았고 그저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은 보이지 않는 바늘이 되어 성유리의 얼굴을 감춰진 감정을 쑤셔내며 들춰내려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처음엔 애써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그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박한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무 이유 없어. 그냥 재미있어서.” 박한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성유리는 이를 꽉 악물었지만 그가 그녀가 진짜 화내기 전에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걔랑 무슨 사이가 되겠어?” “네가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난 걔가 누군지도 기억 못 했을 거야. 그런 애는 네 신발 끈을 묶을 자격도 없어.” ... 이 세상에는 이런 법칙이 있는 것 같다. 언제나 당신 곁에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자꾸 눈에 들어오게 되는 법칙. 성유리와 최정민이 딱 그런 경우였다. 성유리는 이전에는 그녀를 알지도 못했다. 병원에 와서 산부인과 검진을 받을 때도 그녀의 존재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27화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방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는 예상대로 남자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요즘 이런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예전에는 가끔 박한빈과 함께 공개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결혼식 때였지만 그 결혼식조차 끝까지 진행되지 못해 참석자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자 남자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우리 아내가 전에 성유리 씨랑 꼭 얘기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요 며칠 집에서 차 모임을 열었는데 시간 되시면 꼭 오십시오.” “성유리 씨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경매장에서…” 이런 자리에서 하는 형식적인 대화는 성유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과거 성리 그룹에서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지만 지금은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박한빈이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바로 나서서 그녀의 술잔을 대신 받아들었다. “지금은 유리가 마실 수 없으니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사실 그의 신분으로는 그냥 그녀를 데리고 나가도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의 웃음이 살짝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박 대표님이 부인을 참 아끼시네요.” “성유리 씨 남편 복이 정말 많으십니다. 두 분 정말 보기 좋아요.”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박한빈이 두 번째 잔을 들려는 것을 보자 그제야 나서서 그를 막았다. “방금 병원에서 퇴원했잖아요. 죽고 싶어서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행동은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는 더 커졌지만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박한빈을 계속 노려봤다. 박한빈은 자신을 말리려는 성유리를 보며 웃음을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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