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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Author: 송진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임정우가 건넨 외투를 걸치고 손에 든 따뜻한 차를 조심스레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임정우는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왔는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처음에는 우세를 점했는데 상대방이 많았던 탓에 곧 몇 명이 그를 둘러싸며 상황이 불리해졌다.

성유리는 그를 도우려 했지만 임정우는 끝까지 그녀를 뒤로 막아섰다. 만약 오락실 직원들이 빠르게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요. 전 괜찮으니까.”

임정우는 경찰에게 진술하던 중에도 성유리가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성유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든 순간 마치 눈앞에 무언가 끔찍한 광경이 떠오른 듯 창백했던 얼굴이 더욱 하얘졌고 손가락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임정우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려고 할 때 성유리의 어깨에 묵직한 손이 얹혔다.

“안녕하세요. 성유리 씨를 보석하러 왔습니다.”

낯선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단정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경찰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누구십니까?”

남자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스치듯 지나가 임정우가 잡고 있던 손에 멈췄다. 그 차가운 눈빛 속에 잠시 감정이 드러나는 듯했지만 곧 다시 평온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는... 성유리 씨 전남편입니다.”

그 말에 경찰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대답할 새도 없이 다른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나와 남자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짧은 인사가 오간 뒤 박한빈은 보석 서류에 서명을 마쳤다.

“가자.”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하고 온화했지만 그의 깊은 눈빛 속에는 성유리만이 알 수 있는 강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성유리는 순간 겁이 났다.

“먼저 가세요, 유리 씨. 전 괜찮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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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유리의 앞을 막아선 사람은 며칠 전 호텔 앞에서 그녀를 붙잡았던 바로 그 여자였다.여자는 오늘도 여전히 스태프 복장을 하고 있었다.“너희 촬영팀에서 엑스트라 모집한다고 하길래 나도 지원했어.”여자는 웃으며 계속 말했다.“그냥 한 번 와봤는데 정말 너를 만날 줄은 몰랐네. 너, 지서연 맞지?”“네 말대로 너도 잘못한 거 없잖아. 근데 왜 나만 보면 도망가는 거야?”성유리는 조용히 손을 뺐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여자를 쳐다보았다.“대체 무슨 일이죠?”성유리의 냉랭한 반응에 여자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곧 다시 웃으며 말했다.“뭘 그렇게 겁먹어? 난 그냥 네가 돌아와서 반가운 거야.”“이렇게 얼굴 보는 게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네.”‘거짓말.’성유리는 여자의 말을 단 한 글자도 믿지 않았다.하지만 뭐라 반박하지도 않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성유리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드러냈음에도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어갔다.“근데 너 이번에 돌아왔으면 고향에도 한 번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동네 사람들이 전부 네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어. 다들 서연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예전에는...”“제가 왜 거길 가야 하죠?”성유리는 단칼에 여자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거긴 제 고향도, 제 집도 아니에요.”“볼일 없으시면 그냥 가세요. 전 일해야 하니까.”사실, 성유리는 낯선 사람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편이 아니었다.실제로 감독이나 스태프들도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배경은 화려하지만 절대 잘난 척하지 않고 누구보다 스태프들에게 친절한 사람이라고.그렇지만 지금 성유리의 안색은 너무 어두웠다.성유리는 더 이상 이 여자와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여자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성유리의 앞을 다시 가로막으며 말했다.“하긴... 마침 잘 만났다. 너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거든.”성유리는 여자의 갑작스러운 말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다가올 줄 알았으니까.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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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유리는 입을 삐죽이며 계속 투덜거렸다.“이건 제 잘못도 아닌데 왜 저한테 화를 내는 건데요?”그 말에 박한빈의 걸음이 뚝 멈췄고 잠시 침묵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 화 안 났어.”“그럼 왜 계속 앞만 보고 가고 저랑 말도 안 하세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그리고 이우빈 씨가 대체 뭐라고 이러세요?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촬영장에서 내쫓아 버려요. 어차피 지금 이 영화, 박한빈 씨가 최대 투자자인데.”그 말에 박한빈이 흥미를 보이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이 영화, 이우빈 씨 소속사도 투자한 거라서 교체하려면 복잡해.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면 이 프로젝트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데 괜찮아?”“망해도 상관없어요. 전 당신이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성유리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 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고 가라앉았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그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진짜?”“당연하죠.”성유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든 박한빈 씨보다 중요한 건 없어.”방금까지만 해도 차 안에서 박한빈의 한마디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졌던 성유리였다.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박한빈이 그녀와 똑같이 얼굴을 붉혔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있는 박한빈의 힘에 너무 아파 빼내려 했지만 곧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박한빈 씨, 당신 혹시 얼굴 빨개진 거예요?”“아니.”박한빈은 단호하게 부정했다.하지만 눈길을 돌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티가 났다.그 반응에 성유리는 더욱 확신했고 그녀는 빙글빙글 돌며 박한빈의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맞는 것 같은데? 한빈 씨 지금 얼굴 빨개진 거 맞죠?”“설마... 부끄러운 거예요?”성유리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려던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허리를 갑자기 당겼다.그리고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술을 덮쳐버렸다.멍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02화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처음엔 그녀도 자신처럼 화가 난 줄 알았다.하지만 잠시 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다시 성유리를 바라보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너... 울어?”박한빈은 성유리의 어깨를 살짝 붙잡으며 무슨 말을 더 하려 했다.그러나 정작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순간 박한빈이 굳어버리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너... 지금 웃고 있는 거야?”박한빈의 목소리는 낮았고 눈빛은 싸늘하게 식었다.사실 성유리도 아주 오랜만에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았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 아니요.”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그럼 그 웃음부터 참아봐.”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 움찔했지만 아직 제대로 해명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앞좌석에 있는 기사를 향해 말했다.“차 세워요.”“아니, 잠깐만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그러자 성유리가 다급히 말했다.그렇지만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에서 내려버렸고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미안해요. 제 잘못이에요. 박한빈 씨를 비웃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리고... 사실 전 이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데...”박한빈의 발걸음은 빨랐다.성유리는 그를 따라가며 거의 뛰듯이 걷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 뚝 멈춰 섰고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성유리는 그대로 그의 등에 부딪쳤다.뒤돌아본 박한빈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방금 뭐라고 했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다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이우빈 씨조차 한빈 씨를 좋아한다고요. 그만큼 당신 매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잖아요? 이건... 좋은 일 아닌가?”처음엔 나름 진지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성유리는 점점 목소리를 줄였다.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01화

    박한빈이 화가 난 채로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마침 손에 들고 있던 게 게 껍질을 내려놓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미처 박한빈이 화가 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성유리는 돌아서면서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밀었다.“이거 보세요. 제가 한빈 씨 거 다 발라놨어요! 빨리...”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릇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더니 곧장 성유리의 손을 잡아끌었다.“나랑 가자.”박한빈의 얼굴은 잿빛처럼 어두워져 있었는데 성유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랭한 표정이었다.잔뜩 당황한 성유리가 천천히 웃음을 거두었다.“왜 그러는데요? 무슨...”하지만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몇 걸음 가던 그는 문득 무언가 떠올렸는지 발걸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성유리가 힘들게 발라놓은 게살이 담긴 그릇을 다시 집어 들더니 옆에 멍하니 서 있던 웨이터에게 내밀었다.“포장해 주세요.”웨이터는 박한빈의 기세에 놀라 움찔했지만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박한빈은 더 이상 웨이터를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성유리를 끌고 나섰다.성유리는 복도로 나오면서 이우빈을 쓱 쳐다보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박한빈이 성유리를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자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무슨 일인데요?”성유리는 이제야 벌어진 상황을 퍼즐조각처럼 맞춰 보려 박한빈에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박한빈의 싸늘한 눈빛만 봐도 기분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조금 후, 웨이터가 포장한 게살을 들고나오자 박한빈은 차창을 내리고 그것을 받아 들더니 바로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출발.”박한빈의 태도는 마치 이곳에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했다.쌩쌩 달린 차가 일정 거리를 지나고 나서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이우빈 씨가 뭐라고 했어요?”성유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박한빈은 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00화

    박한빈이 성유리를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의 귀 끝과 뺨은 여전히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방금 전 차 안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성유리의 얼굴에 남아 있는 열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게다가 그녀의 머리끈도 아까 차 안에서 박한빈이 잡아당겨 풀려버린 터라 긴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며 얼굴을 가렸다.덕분에 얼굴이 빨개진 모습을 어느 정도 숨길 수 있었다.반면, 박한빈은 아까까지도 불만 가득한 욕설들을 쏟아냈으면서도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표정이었다.오히려 성유리의 반응이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박한빈의 기분은 한결 나아져 보였다.그래서인지 이우빈이 다가와서 술을 권할 때도 그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이우빈 씨 원래 술 알레르기 있지 않아요?”성유리는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얼마 전, 이우빈이 술을 조금 마셨다가 온몸이 가렵고 붉어지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때도 결국 성유리가 직접 알레르기 약을 챙겨줬었다.지금도 단순히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박한빈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그 차가운 눈빛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괜찮습니다.”이우빈은 웃으며 대답했다.“성 작가님께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신다니... 정말 영광입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눈앞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한편, 테이블 아래 박한빈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찻잔을 내려놓고 슬쩍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단박에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그러자 성유리는 다시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고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 더욱 단단히 쥐었다.박한빈은 한숨을 쉬듯 성유리의 손을 거칠게 뒤집어 쥔 후, 힘을 주어 꽉 눌렀다.“아!”성유리는 그 힘에 저도 모르게 작게 신음했다.“작가님, 괜찮으세요?”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이우빈이 그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99화

    며칠 전, 성유리가 이우빈에게 식사 약속을 한 것은 그저 형식적인 응대였을 뿐이었다.이미 이우빈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는 이상 괜히 기회를 줄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며 오히려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감싸 쥔 채 말했다.“이우빈 씨께서 정성껏 초대해 주셨는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디에서 식사할 예정인지 궁금하군요.”박한빈의 말에 유재국의 표정이 순간 딱 굳어졌다.보통 이런 단체 회식은 메운탕 집이나 고깃집 정도에서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수백, 수천 명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 정도면 충분히 최고급 대우라고 할 수 있었다.그렇지만 박한빈의 신분이 촬영팀의 조명 담당자나 촬영기사들과는 분명 다른 급이었다.부잣집 도련님 같은 그를 고깃집으로 데려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하지 않았다.유재국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박 대표님께서는 어떤 음식을 드시고 싶으신가요?”“저는 음식에 별다른 욕심이 없습니다.”박한빈의 대답에 유재국은 속으로 안도하며 이제야 회식 장소를 알려주려고 했다.그런데 그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이 근처에 괜찮은 고급 레스토랑이 하나 있더군요. 거기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박한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재국의 표정이 경직되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웃음을 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성유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이 정도 돈이 이우빈에게 큰 부담이 되는 건 아니었다.요즘 한창 잘나가는 인기 배우인 그는 하루 출연료만 해도 몇억이 되는 정도였다.하지만 문제는 돈이 많다고 해서 모든 비용을 무작정 써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촬영팀을 위해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었다.그러나 그 장소가 1인당 몇백만 원 하는 고급 레스토랑이라면?이건 단순히 대인배 이미지 구축을 넘어서 그야말로 지출의 비효율적인 낭비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박한빈이 그렇게 정해버린 이상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98화

    박한빈 덕분에 성유리는 제대로 갑을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쪽의 재미를 느껴볼 수 있었다.그가 투자하자마자 원래 끼어들겠다고 떠들던 사람들은 조용해졌고 감독도 더 이상 말을 아꼈다.사실 감독도 처음부터 성유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 그녀와 박한빈이 워낙 조용하게 지내 온 데다 이우빈이 흘린 여러 소문 때문에 성유리의 현재 위치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감독은 늘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만약 두 사람 관계가 정말 돈독하다면 박한빈 씨가 성유리 씨에게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킬 리가 없잖아?’그렇지만 오늘에서야 그는 깨달았다.성유리야말로 자신이 가장 존중해야 할 갑이라는 사실을.처음엔 혹여나 자신이 전에 했던 말 중 실례가 되는 게 있었을까 걱정하며 눈치를 살폈지만 예상과 달리 성유리는 신분이 바뀌었다고 해서 거만하게 구는 일 없이 평소처럼 촬영팀 회의에 참석했다.시나리오 수정이 있을 때도 가장 먼저 의견을 냈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감독은 몇 번이나 회의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박한빈을 보게 됐다.성유리가 회의를 하는 동안, 박한빈은 밖에서 전화를 하거나 노트북을 보며 일을 했다.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 성유리가 문을 나서는 순간 즉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두 사람의 관계는 누가 봐도 너무나도 좋아 보였다.그래서 감독은 속으로 생각했다.‘그동안 떠돌던 소문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박한빈의 투자 덕분에 외부 자본이 끼어들 걱정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그리고 감독은 이 점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기뻤다.마침내 촬영 시작일이 다가왔다.촬영장에는 이미 기자들과 남녀 주인공의 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성유리도 개막식에서 상징적으로 받은 축의금 봉투를 살짝 열어 보았다.그 안에는 현금 대신 복권 한 장이 들어 있었다.호기심에 긁어 보니 뜻밖에도 5천 원이 당첨되었다.그 돈으로 성유리는 자신과 박한빈에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97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투자를 받으려면 최소 몇 근 정도 되는 엄청난 양의 술은 마셔야 해. 그런데 넌 뭘 했지?”“전 당신 아내잖아요. 저한테 그 정도 특권도 없나요?”성유리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고 아내라는 단어도 이제는 꽤 자연스럽게 나왔다.박한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눈빛 속에 감춰지지 않는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그들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서연?”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췄고 모든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지서연이라는 이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래전이라 성유리는 자신도 이미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혹은, 이제는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어차피 지금은 박한빈과 예전의 일을 평온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과거의 자신을 농담처럼 가볍게 흘려보낼 수도 있으니까.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유리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지금 그 이름이 다시 들려온 순간, 날카로운 기억들이 마치 조각난 유리처럼 성유리의 차분한 겉모습을 찢어버리고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벌써 성큼성큼 다가왔다.“정말 너 맞지? 아까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그런데 진짜 너였네.”여자는 잔뜩 흥분하며 말을 이어갔다.“나 요즘도 뉴스에서 너 자주 봤어! 다들 그러더라? 너 요즘 잘나간다고. 부자 남편 만나서 유복하게 산다며?”“원래 너 찾으려고 금성까지 갈까 했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못 갔어.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만날 줄이야!”여자는 감격한 듯 팔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예전에는 너랑 우리 단이가 같은 반 친구였잖아! 맞다, 그리고 너...”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손을 뿌리쳤다.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사람 잘못 보셨네요.”그 말에 여자가 순간 멍해졌지만 이내 다시 물었다.“그럴 리가 없어. 내가 널 어떻게 몰라보겠어? 네 집 예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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