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원래 이런 수법을 쓸 정도로 치졸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가 성유리라니...그녀는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도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우스워졌다.성유리와 임정우가 안 지 얼마나 됐다고?박한빈의 정보가 정확하다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게 그때의 가면무도회일 텐데, 벌써 이렇게 깊은 사이가 된 건가?아까 그녀가 했던 말이 뭘까? 임정우가 더 세심하고 더 자상하다고?정말이지 너무 우스웠다.살면서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비교당할 줄이야. 박한빈은 상상조차 못 했다.임정우라니?사실 조금 전까지 박한빈은 그에게 눈길조차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성유리는 그보다 임정우가 낫다고 말했다.지금 성유리는 마치 궁지에 몰린 토끼처럼 자신에게 덤벼들 기세였다.그리고 그녀가 지키려는 상대는 임정우라니.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왔다.그 순간 성유리의 휴대전폰이 울렸다. 두 사람은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화면에 뜬 이름을 본 둘의 표정은 동시에 굳어졌다.성유리가 급하게 손을 뻗어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박한빈이 더 빨랐다. 그는 그녀의 휴대폰을 낚아채 받았다. 심지어 스피커까지 켜고서.“여보세요? 유리 씨?”임정우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조용한 차 안에서 그의 선명한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성유리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임정우는 잠시 기다리더니 다시 물었다.“왜 말이 없어요? 안 들려요?”“나...”성유리가 겨우 입을 열었지만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은 그녀의 의자를 강제로 눕히더니 곧바로 성유리의 위에 몸을 얹었다.그 동작에 성유리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박한빈이 무엇을 하려는지 즉각 깨달은 그녀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하지만 그는 단단히 그녀를 붙잡았다.핸드폰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임정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무슨 일이에요? 지금 어디예요? 집에 갔어요?”성유리는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두
“미안하네요, 정우 씨. 유리가 지금 그쪽 전화를 받을 시간이 없어요.”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의 치마 속에서 손을 빼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벨트를 풀면서 다른 손으로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유리는 지금 아주... 좋아하니까.”그 말을 하며 박한빈의 눈은 성유리를 계속해서 꿰뚫어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아까 짧게 새어 나온 그 소리 이후 성유리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아무런 반응도 주지 않았다.임정우가 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은 말끝을 맺자마자 전화를 끊었고 주저 없이 성유리를 다시 눌러 제압했다.둘의 몸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빈틈없이 밀착되어 있었다.박한빈의 눈은 조금 전까지 분노로 차 있었지만 이제는 약간의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희미하게 붉어진 그의 눈가에는 욕망의 빛이 서려 있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가 누르고 있던 손은 점차 힘없이 축 늘어졌다.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술을 향해 몸을 기울여 키스하려 했으나 성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을 피했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곧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입을 맞췄다.성유리는 다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지만 그는 틈을 놓치지 않고 성유리의 입을 벌려 깊이 키스했다.차 안은 점점 더 거칠게 흔들렸고 성유리는 마치 산소가 전부 빨려 나가는 듯 숨이 막혔다.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의 정신은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입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성유리는 끝내 말을 꺼냈다.“박한빈, 더럽지 않아?”그 말에 박한빈의 움직임이 멈칫하더니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난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너야말로 너 자신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박한빈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는 성유리의 손을 다시
이날 밤 박한빈은 자신의 자제력과 품위를 모두 내던져 버린 듯했다.성유리 역시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심지어 옷매무시도 정리하지 않은 채 두 팔을 감싸안고 조용히 걸어갔다.차 문이 닫히고 박한빈은 바로 가속페달을 밟았다.검은색 마세라티는 이내 밤 속으로 사라졌다. 성유리는 이것이 아마도 그와의 마지막 만남일 것임을 직감했다....박한빈은 그대로 도연제로 돌아왔다.이곳에 온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지난 두 달 동안 성유리가 시월파크에 더는 오지 않아도 그는 그곳에서 머무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그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자 숙자 아주머니는 매우 기뻤다.“저녁은 드셨나요? 뭘 좀 준비해 드릴까요?”“아니요, 괜찮아요.”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2층으로 올라갔다.그러다 복도 끝에 있는 방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 방은 성유리가 쓰던 방이었다.성유리는 이혼할 때 자신의 물건만 챙겨갔고 남은 보석과 옷들은 그대로 남겨뒀었다.박한빈은 그 물건들을 치우지 않고 문을 잠가둔 상태였는데, 오늘은...숙자는 박한빈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시선을 발견한 후 급히 설명했다.“오늘 사모님께서 오셔서 방을 정리하라고 하셨어요. 계속 문을 잠가둘 수는 없다고 하시면서 보석과 옷들을 가져가셨습니다.”숙자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곧바로 그 방으로 향했다.안에 있던 물건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침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깔끔한 침대 시트가 덮여 있었다.이제는 그저 집 안의 다른 손님방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마치 그 방에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박한빈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그때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단예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박 대표님이 저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여쭤볼게요. 내일 저녁 식사 어떠세요?]박한빈은 잠시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다가 방을 한 번 더 둘러본 후 짧게 답장을 보냈다.[좋아요.]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한 달 동안 내리던 잔잔한 비가
“네.”“그래. 유정이에게 줄 선물도 준비했으니 그때 같이 가져가렴.”김난희가 말했다.“진씨 집안의 그 애... 신분이 좀 탐탁지 않긴 하지만 성씨 집안의 일이니, 그저 둘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김난희는 박한빈의 반응을 기다리며 말을 건넸다. 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약혼식에 성유리도 오겠지?”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김서영이 불쑥 말을 꺼냈다.성유리의 이름은 박씨 집안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았기에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다른 두 사람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성유리가 성씨 집안과 더는 상관없지 않나?”김난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박한빈을 한 번 쳐다보았다.박한빈은 조용히 식사를 계속하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김서영은 말을 덧붙였다.“그날 많은 기자들이 올 텐데, 성씨 집안이야 어떻게든 체면을 유지하겠죠.”“그렇겠지.”“그래서 내 생각인데 한빈이는 이번 약혼식에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김서영이 말했다.“선물은 내가 전해주면 되니까.”말을 하며 그녀는 박한빈의 의견을 묻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것도 괜찮네. 어차피 약혼식이니까 누가 가도 상관없지.”“전 다 먹었어요.”김난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한빈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럼 주말은...”“알아서 하세요.”박한빈은 이 주제에 더 이상 관심 없는 듯 말했다.“회사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김난희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김서영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주말은 금방 찾아왔다.약혼식은 진씨 가문의 저택에서 열렸다.정원에는 하얀 긴 테이블과 신선한 꽃잎으로 장식된 아치 프레임이 있었다. 성유정은 약혼식이라 웨딩드레스를 입지는 않았지만 옅은 파란색 드레스가 그녀의 몸매를 완벽히 살려주었다
하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성유정을 바라보지 않았다.그는 먼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곧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한빈 오빠.”성유정은 참다못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가득했다.그제야 박한빈은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넸다.“축하해.”고작 축하해라니...성유정은 그가 마지막으로 해줄 말이 이렇게 가벼운 한마디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선물을 받아서 들었다.“고마워.”선물 상자를 받으며 성유정은 무심코 그의 손끝을 살짝 스쳤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차갑기만 했다.성유정은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조용히 손을 내릴 뿐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때 진무열이 성유정의 곁으로 다가왔다.“박 대표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그는 손을 내밀어 박한빈과 악수를 나누었다.“오늘 같은 중요한 날에 진 대표님은 안 보이시네요?”단예진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출장 중입니다.”진무열이 웃으며 설명했다.“회사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수성에서 시작돼서 그쪽으로 가셨어요.”단예진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중요한 프로젝트인가 보네요. 진 대표님이 직접 가셨다니?”진무열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었다.박한빈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약혼식의 주요 행사는 이미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손님들과의 대화와 인사였다.금성의 대표적인 기업인 지화그룹의 대표 박한빈이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물론 더 주목할 만한 것은 단예진이 그의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모습이었다.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성씨 집안 쪽을 바라보았다.이제 보니 성씨 집안의 그 사람, 성유리는 이제 완전히 과거의 인물이 된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 오늘 성유리는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조롱거리가 될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박한빈은 주변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
미화로 37번지로 향하던 길에 박한빈은 진무혁이 올린 SNS 게시물을 보았다. 위치는 수성이었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사진 구석에 하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이 성유리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박한빈의 미간이 즉시 찌푸려졌고 그는 곧바로 말했다.“차 세워요.”택시 기사가 당황한 듯 그를 보며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박한빈이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방향을 돌려서 지화 빌딩으로 가주세요.”택시는 미터기로 요금이 계산되니 택시 기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냥 중얼거리며 조용히 차를 돌렸다.박한빈은 무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기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몇 번 두드리다가 결국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성으로 가는 비행기 표 예약해 줘요.”...성유리는 지금 수성에 있었다. 그녀의 작품이 영화로 각색되는 과정에 참여했지만 그녀의 역할은 그렇게 크지 않았기에 굳이 올 필요는 없었다.그러나 마침 성유정의 약혼식이 다가왔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왔다.그런데 진무혁이 함께 오리라곤 성유리도 생각지 못했다.“나도 약혼식에 가고 싶지 않아서.”레스토랑에서 진무혁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그녀와 같은 편에 서 있는 듯했다.성유리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진무혁이 와인잔을 들자 성유리도 잔을 들어 그와 가볍게 부딪쳤다.“너 정우 씨한테 요즘 연락 안 했어?”진무혁이 물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해조 그룹과의 계약은 끝난 거 아닌가요?”“그렇지. 하지만 정우 씨는 친구 같다고 할까, 요즘 기분이 축 처져 있던데 보는 내내 마음이 좀 안 좋더라고.”성유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와인잔을 내려놓고 말했다.“정우 씨는 괜찮을 거예요. 분명 누군가 정우 씨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거니까요.”“그게 너일 수는 없어?”성유리는 눈을 들어 진무혁을 보며 물었다.“우리 진 대표님 이제 중매까지 하려는 거예요?”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그
성유리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진무혁의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로 박한빈에게 인사말을 했다. “박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또 봅시다.” 진무혁의 인사에 박한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히자 진무혁의 표정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입술을 피가 날 듯이 꽉 깨물고 있었다. 한편, 성유리가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성유리가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진무혁이 물었다. “내일 너 촬영장 갈 거야?” “안 갈 이유가 없지 않아요?” 성유리가 되물었다. 진무혁은 이내 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난 그냥 너한테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어. 혹시 너한테 다른 일정이 있을까봐.” 성유리는 그의 말속에 담긴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없어요.” “그럼 됐어. 푹 쉬어. 잘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기 전, 진무혁은 뒤를 돌아 성유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성유리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진무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입구에서 잠시 머무르다 문득 아까 박한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박한빈이 그들의 모습을 봤을 때도 전혀 놀라지 않아 보였다. 당연하게도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들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박한빈과 그의 눈빛을 보니 박한빈에게 성유리는 그저 낯선 사람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성유리는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근 한 달 내에 성유리는 일부로 자기 자신에게 여유시간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바삐 돌았다. 늘 빽빽한 일정을 유지하고 살아간
방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제야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자리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가만히 멍만 때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선명한 라이터 소리를 들었다. 딸깍하는 소리에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누가 서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마 어젯밤에 미리 마주친 탓일까? 오늘 그를 마주한 순간 성유리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의 손은 뜻대로 되지 않아 미세하게 떨려왔고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길고 넓은 복도에 오직 두 사람이 남아있었고 박한빈과 전혀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성유리는 불편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조금 망설이던 성유리는 불편함을 못 이겨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앞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틀거리는 그 사람은 성유리를 못 봤는지 그대로 그녀의 몸에 강하게 부딪혀버렸다. 상대가 자신의 몸에 부딪히는 그 찰나에 성유리는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를 맡았다. 촬영장에서 주는 도시락도 느끼하고 저녁으로 먹는 일식도 성유리의 입맛이 아니었기에 오늘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맡아버린 진한 알코올 냄새에 성유리는 위안에서 뭔가가 강하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부딪히려는 그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아 옆으로 비켜 세웠다. 성유리에게 부딪힌 그 남자는 비틀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성유리는 빠르게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다. 예상보다 센 성유리의 힘에 박한빈은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안색이 어두워진 박한빈이 뭐라 하기도 전,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구토하기 시작했다. 위가 이상하리만큼 불편한데 더해 하루 종일 먹은 음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