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제야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자리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가만히 멍만 때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선명한 라이터 소리를 들었다. 딸깍하는 소리에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누가 서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마 어젯밤에 미리 마주친 탓일까? 오늘 그를 마주한 순간 성유리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의 손은 뜻대로 되지 않아 미세하게 떨려왔고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길고 넓은 복도에 오직 두 사람이 남아있었고 박한빈과 전혀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성유리는 불편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조금 망설이던 성유리는 불편함을 못 이겨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앞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틀거리는 그 사람은 성유리를 못 봤는지 그대로 그녀의 몸에 강하게 부딪혀버렸다. 상대가 자신의 몸에 부딪히는 그 찰나에 성유리는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를 맡았다. 촬영장에서 주는 도시락도 느끼하고 저녁으로 먹는 일식도 성유리의 입맛이 아니었기에 오늘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맡아버린 진한 알코올 냄새에 성유리는 위안에서 뭔가가 강하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부딪히려는 그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아 옆으로 비켜 세웠다. 성유리에게 부딪힌 그 남자는 비틀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성유리는 빠르게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다. 예상보다 센 성유리의 힘에 박한빈은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안색이 어두워진 박한빈이 뭐라 하기도 전,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구토하기 시작했다. 위가 이상하리만큼 불편한데 더해 하루 종일 먹은 음
성유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늘 시기를 잘 맞춰 오던 생리 주기가 늦춰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사실까지 발견한 성유리는 하던 생각도 멈춘 채, 박한빈에게 손을 잡힌 채로 그를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침 방 밖으로 나온 진무혁은 두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봐버렸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박한빈을 따라나서는 성유리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진무혁의 의도를 빠르게 알아차렸는지 그를 슥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우리 둘 사이 일이니 진 대표님께서 끼어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박한빈의 목소리는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지만 경고하려는 의도는 명확했다. 진무혁은 그의 말에 하던 행동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성유리는 얼른 괜찮다고 말했다. 진무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성유리를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박한빈은 약국을 들러 사 온 물건을 성유리에게 건넸다. 성유리는 깜짝 놀라더니 이를 꽉 물고 박한빈에게 물었다. “병원 가는 거 아니었어요?” “지금 시간에 병원 가면 응급실밖에 없어. 원하다면 내가 사람을 시켜 특별히 안배해 줄게.” 박한빈이 대답했다. “아니요. 됐어요.” 성유리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만약 박한빈에게 안배해달라고 말한다면 소문이 빠르게 퍼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임신 결과보다 이런 결과를 더욱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먼저 테스트라도 해봐.” 박한빈이 말을 이어갔다. “내일 아침 병원 가서 피검사도 하자.” 아주 담담해 보이는 박한빈은 마치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 같아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성유리는 쓸데없는 질문은 던지지 않으려 결심했고 손에 들린 테스트기 상자를 꽉 쥐었다. 차는 빠르게 달려 어느덧 호텔에 도착했고 성유리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박한빈이 그녀 뒤를 따랐다. “저 혼자 해보면 돼요.” 성유리는 자신을 따라오는 박한빈이 불편한
“성유리?” 박한빈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하더니 살짝 노크하며 성유리를 불렀다. “...” 하지만 그는 안에 있는 성유리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걱정되는 마음에 몇 번이고 노크했지만 안에서 여전히 반응이 없자 박한빈은 발로 문을 차서 억지로 열 준비를 했다. 박한빈이 뒤로 물러나 다리에 힘을 주려는 그 순간, 성유리가 화장실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는 하려던 행동을 빠르게 멈췄고 조용히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임신 아니에요.” 말하는 성유리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평온해 보였다.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한빈에게 성유리는 들고 있던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며 다시 말했다. “박 대표님, 이제 안심하셔도 되겠어요.”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테스트기를 확인했고 위에는 선명하게 한 줄이 나타나 있었다. “내일 병원 가보자.” “이게 정확할지 안 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박한빈이 입을 뗐다. “안 가요.” 단호하게 거절하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데 왜 그러시죠?” 성유리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전 그저 위가 불편할 뿐이에요. 박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우연은 없을 거라는 말이죠.” “아침 8시, 데리러 올게.”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자신이 할 말만 내뱉고는 몸을 휙 돌렸고 빠르게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럼 저 혼자 갈게요.” 뒤에서 들려오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재촉하던 발걸음을 뚝 멈췄다. “결과가 나타나면 꼭 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성유리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박한빈 씨, 우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게다가 병원엔 보는 눈도 많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죠. 저는 그 어떤 예외도 발생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과 선을 딱 그어버리려는 의도가 가득한 말을 했다. 박한빈은 전에 늘 성유리가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보니 참 단호
박한빈은 차제니에게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 8시, 아래층 1613호실로 가서 여자 한 명 찾아. 그리고 그 여자랑 같이 병원으로 가고.” 그의 요구에 차제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박한빈을 쳐다봤다. “이 일은 그 누구한테도 알려지면 안 돼. 만약 소문이 조금이라도 퍼진다면 무슨 대가를 치를지 알 것이라고 믿어.” 박한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차제니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까지 오해한 것을 알아차렸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넵.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봐.” 박한빈은 차제니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차제니마저 방을 떠나자 방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박한빈은 방금 발생한 일을 더 생각하기 싫었지만 저녁에 잠을 잘 때, 갑자기 아이가 나타나는 꿈 하나를 꿨다. 그는 종래로 어린아이들에게 깊은 감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다루는 법이 서툴렀던 박한빈은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부모님에게도 의지하지도 않았다. 박한빈이 다 커서도 그의 가정은 딱히 화목한 편이 아니었기에 사랑에 서툴렀다. 그렇다고 박한빈이 아이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확고히 키워왔던 개념 탓일까? 박한빈은 늘 자신에게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버지가 된 자기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아이가 갖고 싶었다. 꿈속에 나타난 아이는 흐릿한 뒷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박한빈은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아이는 뒤돌아 박한빈을 쓱 쳐다보고는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박한빈이 뒤늦게 쫓아가려고 할 때, 아이는 이미 종적을 감췄다. 이상한 꿈에 눈을 번쩍 뜬 박한빈은 날이 이미 밝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꿈이 너무 생생하고 기이했기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이의 정체를 추측했다. 그때, 차제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박 대표님, 1613호실에 사람이 없는데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차제니의 말
한편, 성유리는 이미 피검사를 다 마치고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성유리는 지금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지금 그녀 본인조차도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서운 건지 파악이 안 됐다. 성유리는 당연히 아이가 생기면 꼭 낳고 싶었다. 필경 그 아이는 자신과 피를 나눈 사람이자 자신에게 행복한 가정을 선사할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성유리는 가정을 이루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두려운 감정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날 아이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아이가 태어난다면 박씨 가문에서 아이를 뺏어갈까 두려웠다. 박한빈의 태도를 떠올려보니 그는 절대 아이를 자기 자신에게 남겨둘 것 같지 않았다. 성유리는 정말 그때가 되면 자신이 어떻게 박한빈과 싸울지 가늠이 안 됐다. 어젯밤, 이것까지 생각한 성유리는 일부로 수돗물로 테스트했었다. 결과를 보여준다면 순순히 포기할 줄 알았던 박한빈은 완강히 자신을 데리고 병원을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말 그대로 그에게서 도망을 쳤다. 뭐가 어떻게 되든 성유리는 지금 그저 검사 결과만 알고 싶었다. 결과를 알게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되기 때문이다. 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에 깊게 잠겼을 때, 그녀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앉았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거니와 병원에 오고 가는 사람도 많아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성유리는 무언가 감지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유리가 고개를 들자 박한빈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표정이 삽시간에 바뀐 성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박한빈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다시 앉혔다. “또 어디로 갈 생각이지?” 묻는 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애를 쓰며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조용히 말했다. “만약 정말 임신이 맞는 거
성유리는 자신을 부르는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고 의아해하며 뒤돌아봤다. 박한빈은 조용히 성유리에게 다가가 자기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박한빈의 행동에 성유리는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 그때, 성유리는 몸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유리는 잘 알았다. 그녀는 박한빈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 “임신 아닙니다.” 의사가 단호하게 성유리에게 결과를 알려줬다. “생리가 늦춰지는 원인은 아마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생리가 끝난 후에 다시 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비록 성유리는 조금 전 이미 결과를 알아버렸지만 의사의 입에서 확실한 결과를 듣자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임신하시려고 준비 중이십니까?”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유리를 발견한 의사가 물었다. “아니에요.” 의사는 신유리의 대답을 바로 무시해 버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너무 조급해하시면 안 됩니다. 조급해하시면 하실수록 임신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보면 되고요.” 의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주며 많은 말을 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성유리는 응당 기뻐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박한빈과 있었던 그 일을 자세히 떠올려보면 임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 만약 그날 일로 성유리가 임신했다면 정말 하늘이 내린 장난과도 같은 기적이었다. ‘나한테 그런 기적은 없나 보네.’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성유리가 더 이상 그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어떻게 박한빈과 싸울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설명했다. 성유리는 임신이 아니니 이건 좋은 일이라고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고 결과를 알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성유리가 진료실에서 나왔을 때, 박한빈은 이미 떠나버렸는지
성유리가 옷을 바꾸고 나온 순간까지 박한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외투는 아직도 성유리에게 있어 박한빈은 셔츠 한 장만 입은 차림이었다. 박한빈은 팔 쪽에 있는 단추를 풀어 헤친 상태라 그의 적나라한 근육과 핏줄들이 그대로 보였다. 거기에 더해 박한빈의 포스와 곱게 빚은 듯 정교한 이목구비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박한빈은 사람들의 시선에 이미 익숙해졌는지 고개를 숙여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를 본 체하고 앞으로 걸어가려던 성유리의 발걸음이 멈췄지만 박한빈은 그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성유리는 입술을 조금 오므리다가 결국 박한빈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박한빈 씨 옷이 조금 더러워졌어요.”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가서 깨끗하게 씻어서 다시 돌려드릴게요.” 박한빈은 원래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 했지만 성유리의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 짧은 대화를 마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만 만이 흘렀다. 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제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제 알았으니...” “아침 안 먹었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뚝 잘라버리며 물었다. “가자. 밥부터 먹자.” 그는 성유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녀의 캐리어를 들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아예 말릴 틈도 없었다. “전에 수성 시 와본 적 있어?” 어느 한 식당 안, 먹을 메뉴를 다 시킨 박한빈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럼 마침 이번 기회를 빌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전 내일이면 돌아가려고 했어요.” 성유리의 대답을 들은 박한빈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옆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이번에 진무혁이랑 함께 왔니? 결국 제작권을 그 사람한테 넘
되묻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박한빈이 갑자기 성유리를 뚫어져라 주시했고 성유리는 그의 시선에 몸이 잔뜩 굳어졌다. 박한빈의 눈빛은 마치 하루빨리 그녀와 어떤 관계를 성사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그저 너와 진무혁 씨가 너무 가까이 있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유정이도 이제는 진무열 씨랑 약혼을 했으니 나는 그 가문 사람들의 도구 따위가 되고 싶지 않다고.” 박한빈은 아주 이성적으로 분석을 해 성유리를 설득했다. “이렇게 하는 걸로 하자.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이 명함으로 전화 해.” 성유리가 입을 뻥긋할 새도 없이 박한빈은 이미 결정을 내려주며 말을 이어갔다. “성유리, 나는 지금 너한테 딱 한 가지 요구밖에 없어. 나한테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게 잘 행동하고 다녀. 알았어?” ... 차제니의 전화가 걸려 올 때, 성유리는 마침 호텔 방 안에 누워있었다. “성유리 씨, 안녕하세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밝은 여자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귀를 기울였다. “저는 차제니라고 해요. 박 대표님께서 성유리 씨에게 배정한 가이드이기도 하고요. 혹시 오늘 밤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괜찮다면 지금 저랑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괜찮아요. 저는 지금 그냥 가만히 쉬고 싶어서.” “오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차제니는 상냥한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성유리 씨, 저는 당신의 가이드예요. 만약 저한테 아무것도 시키시지 않는다면 저는 일자리를 잃을지도 몰라요.” “박 대표님 쪽은 저도 뭐라 할 수가 없잖아요.” 성유리는 차제니의 말에 고민하다가 작은 부탁 하나를 했다. “그럼 죄송하지만 혹시 진통제 하나만 사다 줄 수 있나요?” “네? 어디 불편하세요?” “생리통이요. 이것도 아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제니는 짧은 대답과 함께 전화를 빠르게 끊어버렸고 성유리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지금 그녀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