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묻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박한빈이 갑자기 성유리를 뚫어져라 주시했고 성유리는 그의 시선에 몸이 잔뜩 굳어졌다. 박한빈의 눈빛은 마치 하루빨리 그녀와 어떤 관계를 성사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그저 너와 진무혁 씨가 너무 가까이 있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유정이도 이제는 진무열 씨랑 약혼을 했으니 나는 그 가문 사람들의 도구 따위가 되고 싶지 않다고.” 박한빈은 아주 이성적으로 분석을 해 성유리를 설득했다. “이렇게 하는 걸로 하자.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이 명함으로 전화 해.” 성유리가 입을 뻥긋할 새도 없이 박한빈은 이미 결정을 내려주며 말을 이어갔다. “성유리, 나는 지금 너한테 딱 한 가지 요구밖에 없어. 나한테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게 잘 행동하고 다녀. 알았어?” ... 차제니의 전화가 걸려 올 때, 성유리는 마침 호텔 방 안에 누워있었다. “성유리 씨, 안녕하세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밝은 여자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귀를 기울였다. “저는 차제니라고 해요. 박 대표님께서 성유리 씨에게 배정한 가이드이기도 하고요. 혹시 오늘 밤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괜찮다면 지금 저랑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괜찮아요. 저는 지금 그냥 가만히 쉬고 싶어서.” “오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차제니는 상냥한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성유리 씨, 저는 당신의 가이드예요. 만약 저한테 아무것도 시키시지 않는다면 저는 일자리를 잃을지도 몰라요.” “박 대표님 쪽은 저도 뭐라 할 수가 없잖아요.” 성유리는 차제니의 말에 고민하다가 작은 부탁 하나를 했다. “그럼 죄송하지만 혹시 진통제 하나만 사다 줄 수 있나요?” “네? 어디 불편하세요?” “생리통이요. 이것도 아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제니는 짧은 대답과 함께 전화를 빠르게 끊어버렸고 성유리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지금 그녀
그 후로 며칠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차제니는 성유리의 가이드라는 역할로 며칠 동안 성유리와 함께 수성 시의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이 간 곳은 대부분 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곳도 아니었고 차제니 또한 일정을 잘 안배했다. 천천히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기에 성유리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웠다. “저녁에 이곳에서 폭죽 쇼도 한 대요.” 두 사람이 함께 저녁밥을 먹을 때, 차제니가 성유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다 알려줬다. “이 쇼는 매일 있는 것도 아니래요. 오늘이 입동이잖아요. 수성 시에서는 입동 일에만 이런 쇼를 주최한다고 해요. 위층에 제가 성유리 씨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뒀어요. 전체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완전 제일 좋은 자리예요. 밥 다 드시고 올라가서 꼭 보세요.” “제니 씨는 저랑 같이 안 가나요?” 차제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리 씨, 저는 남자 친구가 있는 몸이라서요. 며칠 동안 별로 안 놀아줬는데 오늘 저녁까지 안 돌아가면 무조건 화낼 거예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괜찮아요. 이건 제 직업이니까요. 해야 할 일이죠. 제가 짠 계획이나 여행 일정이 마음에 드셨다면 나중에 박 대표님 앞에서 저 좀 칭찬해 주세요.” “저랑 박 대표님은...” “아이고, 괜찮아요. 유리 씨 마음에 드셨으니 제 일은 완벽하게 끝을 맺은 것 같네요.” 차제니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먼저 가볼게요. 폭죽 쇼 꼭 보셔야 해요. 아시겠죠?” 그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건넸다. 성유리는 차제니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이 일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차제니는 이미 떠나버렸으니 물을 사람도 없어졌기에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지만 성유리는 가기 싫었다. 그러나 창밖의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을 확인한 성유리는 결국 올라갈 채비를 했
옥상에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불꽃 터지는 소리까지 더해져 주변이 시끄러웠다.하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갑자기 주위가... 조용하다고 느껴졌는데 마치 세상에 그들 둘만 남은 것 같았다.상관없는 사람들, 심지어 머리 위의 불꽃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얼마 전 차제니에게 했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당시 성유리는 차제니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차제니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박한빈도 이렇게 보면... 그런 짓을 할 사람 같지도 않았다.설령 그가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겨냥한 것은 아닐 것이다.하지만 그 말은 마치 돌덩이처럼 성유리의 고요한 호수 속으로 가라앉아 파도도 일지 않고 잔잔한 물결만 남았는데 그 잔물결은 오늘 밤까지도 가시지 않았다.순간 그녀는 박한빈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걸 보고 한 걸음 따라나섰다.이 한 걸음은 마치 강심제처럼 성유리의 심장에 주입되어 몸을 곧게 펴고는 살며시 주먹을 쥔 채 그에게로 걸어갔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곧 몇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멈출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치는 바람에 성유리는 앞으로 몇 걸음 휘청거렸다.박한빈은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는데 성유리의 코에는 금방 익숙한 냄새가 가득 찼다.허리를 잡은 손을 느끼며 성유리는 그들의 첫 포옹을 떠올렸는데 그건 두 사람이 결혼사진을 찍을 때였다.소녀의 꿈은 갑자기 현실이 되었지만 그날의 성유리는 사실 형편없었다.화장실에서 무심코 들은 말로는 자세가 굳어 웃는 모습이 보기 싫고 줄 끊어진 꼭두각시 같다고 했다.촬영장에 돌아오자 카메라맨도 다시 요구했다.허리를 껴안고 키스하는 등 결혼사진의 가장 정상적인 동작이지만 그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는 처음이었다.그때 박한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왔는데 미간에 은은하게 피곤으로 인한 짜증이 느껴졌다.성유리의 긴장하고 조마조마했던 감정이 이렇게 서서히 사라졌다.박한빈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
창밖에서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실내에 히터를 켜 놓았기 때문에 성유리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는데 오히려 실내 온도가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들 정도여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그녀뿐만 아니라 박한빈도 마찬가지였다.분명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싸우고 있었고 성유리는 심지어 평생 그를 만나지 않을 계획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항상 이렇게 쉽게 그를 용서할 수 있었는데 박한빈은 그녀 마음속의 고질병인 것 같았다.그녀는 수없이 그것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수없이 되살아났다.그때 옥탑에서 그가 그녀를 향해 걸어 나온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수많은 용기를 주었다.어쨌거나 그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니 말이다.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환상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다.얻을 수 없는 것은 항상 아쉬움으로 다가오고, 그런 아쉬움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밖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가 보였는데 수성시의 야경이 더해져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아름다웠다.눈앞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허상인듯해 성유리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러나 그녀의 눈물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그녀의 눈에 키스했다.갑자기 닥친 키스에 성유리의 몸은 경직되었고 손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꼭 안았다.손톱이 그의 살갗을 긁어서 피가 스며 나왔지만 이 순간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마치 종말이 오기 전 최후의 파티처럼, 죽음의 고통을 이겨내야 비로소 이런 밤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듯했다.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잠들었는지 잊었다.하지만 눈을 감기 전에 박한빈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으며 조용히 말했다.“원아.”가벼운 두 글자는 성유리의 감정을 그 순간 절정에 이르게 했고 몸도 따라서 절정에 이르렀다.원이는 엄마가 부르던 이름이었다.지석민이 엄마를 집으로 데려오기 전에 원래 성유리의 이름을 원영이라고 지었었다.엄마는 성유리가 생에서
차제니는 성유리가 믿지 않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시겠어요?”“무슨 말이야?”“예를 들면... 이 모든 것은 사실 박 사장님의 계획이고, 저는 단지 집행하는 사람일 뿐이라든가...”성유리는 차제니의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럴 리가 없어.”“왜 그럴 리 없어요? 설마 박 대표님이 당신의 헌신에 대해 아직도 의심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박 대표님이 어떤 분이세요? 정말 여자가 필요한 거라면 왜 꼭 성유리 씨를 찾으시는 거죠? 솔직히 저도 침대로 달려들 생각이 있었어요.”차제니의 말은 너무도 태연해서 성유리가 한 말이 농담인지 사실인지 순간적으로 구분할 수 없었다.“그래도 저는 저를 좀 아는 편이에요.”차제니는 오히려 그날 밤의 일을 성유리에게 털어놓았다.“박 대표님이 저를 보는 순간 저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박 대표님 같은 남자는 정말 여자에게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마음에 두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젯밤 두 사람의 상황을 보면 분명히 후자였어요.”말을 하던 차제니가 다시 웃었다.성유리는 어색한 듯 자신의 옷깃은 만졌다.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차제니는 웨이터를 불러 점심을 사 오라고 했다.“이 시간에 박 대표님은 아직 밥을 안 드셨을 거예요. 우리는 이미 배가 불렀으니 가는 길에 박 대표님께 점심을 좀 갖다 드리는 게 어때요? 성유리 씨도 아시겠지만 박 대표님은 일을 시작하면 정말 밤낮이 따로 없어요. 이대로 가다간 위가 어떻게 될지도 몰라요.”성유리는 이전에 차제니가 비서직으로 옮기기 전에 영업했다고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차제니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에 와서야 진정한 말솜씨를 체험했다.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차제니에게 속아 점심밥을 받아들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건물 문 앞에 도착했는지도 몰랐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그곳에 서 있었다.한참을 망설인 후에 성유리는 결국
이 문제가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성유리는 갑자기 성씨 가문의 그 부부가 생각났다.그들을 대할 때도 성유리는 수없이 자신에게 이 질문을 했다.하지만 사실, 그녀는 분명히 답을 알고 있었다.몇 번의 실망을 겪었지만 상처가 다 나았을 때 그녀는 또다시 희망을 품었는데 그 희망은 땅에 밟히고 완전히 으스러져 버렸다.‘맞아,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거야? 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박한빈이 정말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2년 동안 녹이지 못한 그의 마음이 어떻게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단 말인가?그녀가 주제넘은 거라고, 심지어... 어이없다고 생각했다.마치 어렸을 때 학교 앞에 노점상을 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있을 때 같았다.할아버지의 노점에는 다양한 색깔의 솜사탕이 놓여 있었다.그때 그녀는 꼭 한 입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멀찌감치 서서 지켜봐야만 했다.그녀는 매일 그렇게 지켜봤다.그녀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서도 그 노점의 솜사탕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고대했다.그녀의 엄마가 갑자기 지나가다가 자신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또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선심을 써서 자신에게 작은 걸 하나 주지 않을까도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환상은 실현되지 않았다.단예진이 박한빈의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성유리는 말없이 돌아섰다.그 점심 식사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다.웃기는 건 그녀가 호텔로 돌아가려고 할 때 마침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솜사탕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여전히 밝은색이지만 솜사탕의 모양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했다.한참을 곁에서 지켜본 성유리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다가가서 자신을 위해 하나 샀다.빨간색은 딸기 맛이었다.입에 넣자마자 달콤하고 느끼한 맛이 성유리의 입안을 가득 채우며 공업용 화학약품 냄새를 풍겼다.‘조금도 맛이 없어...’길가에 서서 솜사탕을 들고 있던 성유리는 일곱 살짜리 성유
그녀는 성유리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성유리도 거절할 수 없었다.곧 두 사람은 카페에 도착했다.“언제 수성시에 왔어요?”단예진이 물었다.“며칠 전에요.”“그래요? 혼자 왔어요?”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들어 단예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눈을 마주친 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단예진은 사진 몇 장을 성유리 앞에 내놓으며 물었다.“사진 속 사람이 성유리 씨죠?”불꽃 쇼, 떠들썩한 옥상, 두 사람이 키스를 하는 사진이었다.박한빈의 얼굴은 그 위에 매우 선명했다. 성유리는 그때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박한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어 그녀의 모습은 사실 잘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부인해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그래서 성유리는 주먹을 살짝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성유리 씨도 아시겠지만, 이제 박한빈은 당신의 남편이 아니라 제 약혼자예요.”단예진은 다시 천천히 말했다.“전에 성유리 씨를 두 번 만난 적 있어요. 늘 성유리 씨가 사리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제가 잘못 본 것 같네요. 아니면 성씨 가문 가정교육이 그런 건가요? 남의 남자만 노리라고 가르치던가요?”단예진의 말이 끝나자 얼굴에 피어난 표정도 조금씩 사라졌다.성유리는 설명할 길이 없어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미안해요. 어젯밤에...”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어떤 설명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힘이 없었기에 결국 침묵으로 일괄했다.단예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입가의 냉소가 오히려 더 깊어졌다.“성유리 씨, 내 앞에서 가련한 척할 필요 없어요.”그녀는 말했다.“오늘 온 것은 당신의 현재 신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예요. 다시 또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만진다면, 이 커피 한 잔을 바로 당신에게 끼얹어 망신 줄 거에요.”말을 마친 단예진은 바로 떠났고 성유리는 그곳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손은 단예진이 떠나갈 때까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는데 손을 풀고 나서야 손바닥에서 피가 스며
“박 대표님?”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의문스러워 물었다.“알았어.”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전화를 끊고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겉보기엔 차분했지만 약간 떨리고 있었다.“금성에 돌아가려고 짐 싸고 있어요.”성유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를 숙여 캐리어를 닫으며 대답했다.박한빈은 덤덤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성유리는 그제야 비로소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단예진 씨가 여기에 왔으니 내가 계속 남아 있는 게... 불편하지 않으세요?”이 말을 들은 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한빈 씨 약혼녀 아닌가요?”성유리가 계속해서 물었다.성유리의 질문이 끝나자 박한빈은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질투하는 거야?”“아니에요.”성유리는 눈을 내리깔았다.‘내가 그럴 자격이 있겠어요?’박한빈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벗은 외투를 옆에 내팽개치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손에 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동그란 담배 연기는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흐트러졌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박하 냄새는 여전히 공기 속으로 퍼졌다.성유리는 제자리에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한참을 지나서야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난 단예진과 결혼 안 해. 지금은 비즈니스적으로 연결돼 있을 뿐 협력이 끝나면 단예진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러니 신경 쓰지 마.”박한빈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말했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나는요?”이 말에 박한빈의 손동작이 멈칫했다. 성유리는 계속해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우리는... 그럼 무슨 사이죠?”“성유리, 나한테 명분을 달라는 거야?”박한빈은 가볍게 웃었다.“잊지 마. 당시 이혼은... 당신이 제기했어.”그녀는 원래 그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 합법적으로 말이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우리 박씨 가문은 당신이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임신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임신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