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131화

작가: 송진
옥상에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불꽃 터지는 소리까지 더해져 주변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갑자기 주위가... 조용하다고 느껴졌는데 마치 세상에 그들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상관없는 사람들, 심지어 머리 위의 불꽃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얼마 전 차제니에게 했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당시 성유리는 차제니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차제니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박한빈도 이렇게 보면... 그런 짓을 할 사람 같지도 않았다.

설령 그가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겨냥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마치 돌덩이처럼 성유리의 고요한 호수 속으로 가라앉아 파도도 일지 않고 잔잔한 물결만 남았는데 그 잔물결은 오늘 밤까지도 가시지 않았다.

순간 그녀는 박한빈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걸 보고 한 걸음 따라나섰다.

이 한 걸음은 마치 강심제처럼 성유리의 심장에 주입되어 몸을 곧게 펴고는 살며시 주먹을 쥔 채 그에게로 걸어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곧 몇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멈출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치는 바람에 성유리는 앞으로 몇 걸음 휘청거렸다.

박한빈은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는데 성유리의 코에는 금방 익숙한 냄새가 가득 찼다.

허리를 잡은 손을 느끼며 성유리는 그들의 첫 포옹을 떠올렸는데 그건 두 사람이 결혼사진을 찍을 때였다.

소녀의 꿈은 갑자기 현실이 되었지만 그날의 성유리는 사실 형편없었다.

화장실에서 무심코 들은 말로는 자세가 굳어 웃는 모습이 보기 싫고 줄 끊어진 꼭두각시 같다고 했다.

촬영장에 돌아오자 카메라맨도 다시 요구했다.

허리를 껴안고 키스하는 등 결혼사진의 가장 정상적인 동작이지만 그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는 처음이었다.

그때 박한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왔는데 미간에 은은하게 피곤으로 인한 짜증이 느껴졌다.

성유리의 긴장하고 조마조마했던 감정이 이렇게 서서히 사라졌다.

박한빈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32화

    창밖에서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실내에 히터를 켜 놓았기 때문에 성유리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는데 오히려 실내 온도가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들 정도여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그녀뿐만 아니라 박한빈도 마찬가지였다.분명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싸우고 있었고 성유리는 심지어 평생 그를 만나지 않을 계획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항상 이렇게 쉽게 그를 용서할 수 있었는데 박한빈은 그녀 마음속의 고질병인 것 같았다.그녀는 수없이 그것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수없이 되살아났다.그때 옥탑에서 그가 그녀를 향해 걸어 나온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수많은 용기를 주었다.어쨌거나 그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니 말이다.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환상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다.얻을 수 없는 것은 항상 아쉬움으로 다가오고, 그런 아쉬움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밖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가 보였는데 수성시의 야경이 더해져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아름다웠다.눈앞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허상인듯해 성유리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러나 그녀의 눈물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그녀의 눈에 키스했다.갑자기 닥친 키스에 성유리의 몸은 경직되었고 손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꼭 안았다.손톱이 그의 살갗을 긁어서 피가 스며 나왔지만 이 순간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마치 종말이 오기 전 최후의 파티처럼, 죽음의 고통을 이겨내야 비로소 이런 밤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듯했다.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잠들었는지 잊었다.하지만 눈을 감기 전에 박한빈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으며 조용히 말했다.“원아.”가벼운 두 글자는 성유리의 감정을 그 순간 절정에 이르게 했고 몸도 따라서 절정에 이르렀다.원이는 엄마가 부르던 이름이었다.지석민이 엄마를 집으로 데려오기 전에 원래 성유리의 이름을 원영이라고 지었었다.엄마는 성유리가 생에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33화

    차제니는 성유리가 믿지 않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시겠어요?”“무슨 말이야?”“예를 들면... 이 모든 것은 사실 박 사장님의 계획이고, 저는 단지 집행하는 사람일 뿐이라든가...”성유리는 차제니의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럴 리가 없어.”“왜 그럴 리 없어요? 설마 박 대표님이 당신의 헌신에 대해 아직도 의심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박 대표님이 어떤 분이세요? 정말 여자가 필요한 거라면 왜 꼭 성유리 씨를 찾으시는 거죠? 솔직히 저도 침대로 달려들 생각이 있었어요.”차제니의 말은 너무도 태연해서 성유리가 한 말이 농담인지 사실인지 순간적으로 구분할 수 없었다.“그래도 저는 저를 좀 아는 편이에요.”차제니는 오히려 그날 밤의 일을 성유리에게 털어놓았다.“박 대표님이 저를 보는 순간 저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박 대표님 같은 남자는 정말 여자에게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마음에 두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젯밤 두 사람의 상황을 보면 분명히 후자였어요.”말을 하던 차제니가 다시 웃었다.성유리는 어색한 듯 자신의 옷깃은 만졌다.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차제니는 웨이터를 불러 점심을 사 오라고 했다.“이 시간에 박 대표님은 아직 밥을 안 드셨을 거예요. 우리는 이미 배가 불렀으니 가는 길에 박 대표님께 점심을 좀 갖다 드리는 게 어때요? 성유리 씨도 아시겠지만 박 대표님은 일을 시작하면 정말 밤낮이 따로 없어요. 이대로 가다간 위가 어떻게 될지도 몰라요.”성유리는 이전에 차제니가 비서직으로 옮기기 전에 영업했다고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차제니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에 와서야 진정한 말솜씨를 체험했다.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차제니에게 속아 점심밥을 받아들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건물 문 앞에 도착했는지도 몰랐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그곳에 서 있었다.한참을 망설인 후에 성유리는 결국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34화

    이 문제가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성유리는 갑자기 성씨 가문의 그 부부가 생각났다.그들을 대할 때도 성유리는 수없이 자신에게 이 질문을 했다.하지만 사실, 그녀는 분명히 답을 알고 있었다.몇 번의 실망을 겪었지만 상처가 다 나았을 때 그녀는 또다시 희망을 품었는데 그 희망은 땅에 밟히고 완전히 으스러져 버렸다.‘맞아,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거야? 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박한빈이 정말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2년 동안 녹이지 못한 그의 마음이 어떻게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단 말인가?그녀가 주제넘은 거라고, 심지어... 어이없다고 생각했다.마치 어렸을 때 학교 앞에 노점상을 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있을 때 같았다.할아버지의 노점에는 다양한 색깔의 솜사탕이 놓여 있었다.그때 그녀는 꼭 한 입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멀찌감치 서서 지켜봐야만 했다.그녀는 매일 그렇게 지켜봤다.그녀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서도 그 노점의 솜사탕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고대했다.그녀의 엄마가 갑자기 지나가다가 자신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또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선심을 써서 자신에게 작은 걸 하나 주지 않을까도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환상은 실현되지 않았다.단예진이 박한빈의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성유리는 말없이 돌아섰다.그 점심 식사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다.웃기는 건 그녀가 호텔로 돌아가려고 할 때 마침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솜사탕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여전히 밝은색이지만 솜사탕의 모양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했다.한참을 곁에서 지켜본 성유리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다가가서 자신을 위해 하나 샀다.빨간색은 딸기 맛이었다.입에 넣자마자 달콤하고 느끼한 맛이 성유리의 입안을 가득 채우며 공업용 화학약품 냄새를 풍겼다.‘조금도 맛이 없어...’길가에 서서 솜사탕을 들고 있던 성유리는 일곱 살짜리 성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35화

    그녀는 성유리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성유리도 거절할 수 없었다.곧 두 사람은 카페에 도착했다.“언제 수성시에 왔어요?”단예진이 물었다.“며칠 전에요.”“그래요? 혼자 왔어요?”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들어 단예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눈을 마주친 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단예진은 사진 몇 장을 성유리 앞에 내놓으며 물었다.“사진 속 사람이 성유리 씨죠?”불꽃 쇼, 떠들썩한 옥상, 두 사람이 키스를 하는 사진이었다.박한빈의 얼굴은 그 위에 매우 선명했다. 성유리는 그때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박한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어 그녀의 모습은 사실 잘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부인해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그래서 성유리는 주먹을 살짝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성유리 씨도 아시겠지만, 이제 박한빈은 당신의 남편이 아니라 제 약혼자예요.”단예진은 다시 천천히 말했다.“전에 성유리 씨를 두 번 만난 적 있어요. 늘 성유리 씨가 사리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제가 잘못 본 것 같네요. 아니면 성씨 가문 가정교육이 그런 건가요? 남의 남자만 노리라고 가르치던가요?”단예진의 말이 끝나자 얼굴에 피어난 표정도 조금씩 사라졌다.성유리는 설명할 길이 없어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미안해요. 어젯밤에...”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어떤 설명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힘이 없었기에 결국 침묵으로 일괄했다.단예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입가의 냉소가 오히려 더 깊어졌다.“성유리 씨, 내 앞에서 가련한 척할 필요 없어요.”그녀는 말했다.“오늘 온 것은 당신의 현재 신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예요. 다시 또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만진다면, 이 커피 한 잔을 바로 당신에게 끼얹어 망신 줄 거에요.”말을 마친 단예진은 바로 떠났고 성유리는 그곳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손은 단예진이 떠나갈 때까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는데 손을 풀고 나서야 손바닥에서 피가 스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36화

    “박 대표님?”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의문스러워 물었다.“알았어.”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전화를 끊고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겉보기엔 차분했지만 약간 떨리고 있었다.“금성에 돌아가려고 짐 싸고 있어요.”성유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를 숙여 캐리어를 닫으며 대답했다.박한빈은 덤덤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성유리는 그제야 비로소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단예진 씨가 여기에 왔으니 내가 계속 남아 있는 게... 불편하지 않으세요?”이 말을 들은 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한빈 씨 약혼녀 아닌가요?”성유리가 계속해서 물었다.성유리의 질문이 끝나자 박한빈은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질투하는 거야?”“아니에요.”성유리는 눈을 내리깔았다.‘내가 그럴 자격이 있겠어요?’박한빈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벗은 외투를 옆에 내팽개치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손에 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동그란 담배 연기는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흐트러졌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박하 냄새는 여전히 공기 속으로 퍼졌다.성유리는 제자리에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한참을 지나서야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난 단예진과 결혼 안 해. 지금은 비즈니스적으로 연결돼 있을 뿐 협력이 끝나면 단예진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러니 신경 쓰지 마.”박한빈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말했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나는요?”이 말에 박한빈의 손동작이 멈칫했다. 성유리는 계속해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우리는... 그럼 무슨 사이죠?”“성유리, 나한테 명분을 달라는 거야?”박한빈은 가볍게 웃었다.“잊지 마. 당시 이혼은... 당신이 제기했어.”그녀는 원래 그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 합법적으로 말이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우리 박씨 가문은 당신이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임신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임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37화

    “며칠 동안... 신세 졌어요. 단예진 씨가 오해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는... 더 연락하지 말아요.”박한빈은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래서 성유리, 나와 선을 긋고 싶은 거지?”성유리는 말없이 그저 캐리어를 당기며 행동으로 답했것과 마찬가지다.박한빈은 웃어버렸다.“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원한다면... 후보자가 많아.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물론 알고 있어요. 또 한빈 씨 마음속에서... 제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요.”성유리도 웃으며 대답하자 박한빈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그럼 먼저 갈게요. 단예진 씨와 좋은 인연이 되길 바라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캐리어를 끌고 말없이 돌아섰다. 박한빈은 그녀를 말라지 않고 그저 묵묵히 담배만 피웠다.성유리는 그에게 무슨 말을 더하고 싶었지만 더 할 필요도 없어 그저 몸을 돌려 떠났다.문이 닫히고 방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박한빈은 그 자리에 앉아서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다음 문을 바라보니 그녀가 남긴 방카드가 보였다.박한빈은 갑자기 씩하고 웃더니 발을 들어 앞에 있는 탁자를 걷어찼다....성유리는 밤새 기차를 타고 금성으로 돌아갔다.월세 방에 도착해서 숨을 돌리기도 전에 그녀는 의료진을 철수하겠다는 병원 측의 통지를 받았다.박한빈이 이 일로 성유리를 위협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 적이 없으므로 성유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병원에서 갑자기 통지를 보내서야 성유리는 이게 바로 박한빈이 선을 긋는 방식임을 알았다.성유리는 병원으로 달려갔다.“의료비는 제가 부담할 수 있어요. 의료진이 필요한 것도 저에게 말하면 돼요.”성유리가 말했다.“성유리 씨, 환자의 하루 비용이 얼마인지 아세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그녀의 단호한 태도를 보자 상대방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38화

    성유리가 다시 박한빈을 만난 것은 두 달 후였다.진무혁은 성유리를 데리고 경매에 갔다. 그때 성유리는 정원에 있었고 그 앞에는 몇 달 동안 보지 못했던 임정우가 서있었다.지난번 볼 때보다 임정우는 많이 수척해졌고 얼굴도 야위었지만 성유리를 대할 때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오랜만이에요.”성유리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이런 곳에 데려온 진무혁을 욕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오랜만이에요.”“그동안 잘 지냈어요?”임정우가 물었다.“네.”“박 대표님과... 재결합하지 않았어요?”임정우의 말이 끝나자 그날 차 안에서의 불쾌한 기억이 다시 성유리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아니요.”임정우는 말이 없었다. 성유리는 이런 말이 없는 분위기가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먼저 갈게요.”말을 마치고 마침 앞으로 나아갈 때 임정우는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럼 나와 함께 있는 건 어때요?”임정우는 진지하게 물었다.“저는 싫...”성유리가 거절하려고 입을 막 열자 임정우가 서둘러 말을 잘랐다.“유리 씨의 마음속에 아직 지난 그 사람을 잊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이러는 제가 유치하겠지만 저는 유리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또 유리 씨를 즐겁게 해주고 싶어요.”성유리가 거절하려던 말은 그의 진심 어린 고백 때문에 삼켜졌다.비록 임정우에게 애정이 없지만 그의 눈빛과 고백은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성유리의 가슴에 구멍을 냈다.성유리가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정우!”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는 분명한 분노가 섞여 있었는데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재빨리 다가와서 성유리를 확 밀쳤다.“내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에 답장도 안 해 무인도에 간 줄 알았는데 여기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느라 그럤어?”그 여자는 칼을 품은 듯한 쌀쌀한 눈빛으로 성유리를 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이 뻔뻔한 여우 년 같으니라고! 이 남자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139화

    임정우는 이렇게 제자리에서 멈췄고 여자가 곧 성유리를 가리켰다.“이 년을 위해서지? 애초에 박한빈이 왜 이 여자와 이혼했을 거로 생각해? 바로 이 여자가 이미 다른 사람이랑 잤기 때문이야! 이 여자는 10대에 양부랑 간통했는데 이런 여자랑 있으면 병에 걸릴 가 두렵지도 않아?”현관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이쪽에 모여 있었다.여자는 말이 빨랐는데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이렇게 모든 사람의 귀에 들려왔다.성유리는 이렇게 제자리에서 굳어진 채 하고 싶은 말을 까맣게 잊었다.임정우는 표정이 여러 번 변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충격의 눈빛과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주변의 소리는 마치 갑작스러운 쓰나미처럼 성유리를 온통 뒤덮었다.성유리는 원래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몇 달 전부터 레스토랑에서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파헤쳤는데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 온갖 악플이 난무할 거라는 걸 짐작했었다.그녀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 그때의 소식이 감춰졌을 뿐이라 생각했다.지금 이 화면은 단지 몇 달 늦었을 뿐이다.하지만 성유리가 그동안 어떻게 상상했든 눈앞의 현실과는 차이가 있었다.특히 그런 신중함과 경멸의 시선이 악마의 눈초리처럼 그녀에게 떨어졌을 때 성유리는 갑자기 자신이 숨쉬기조차 어려워졌다고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진무혁을 찾으려 했다.어쨌든 그가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이니 말이다.이때 그녀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살릴 수 있는 지푸라기를 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그녀는 진무혁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구경꾼들 사이에서 박한빈을 만났다.그는 인파 밖에 서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시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낯선 모습? 비아냥? 경멸?성유리는 그 표정을 분간해 낼 수 없었다.그 차가운 술은 아직도 그녀의 머릿결을 타고 흘러내려 다시 그녀의 피부를 타고 오장육부로 스며들며 마침내 혈액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온몸이 차가웠지만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최신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83화

    “지금 이게 무슨 의미야?”금미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정우가 며칠 전까지 여기 있었던 건 맞지만 어젯밤에 이미 떠났어요.”“그래?”금미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잘됐네.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왔어.”성유리는 금미라의 말에 순순히 몸을 옆으로 비켜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게 했다.금미라는 고급스러운 맞춤 드레스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녀의 표정에는 이 집에 대한 명백한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무슨 음료 드릴까요?”성유리가 물었지만 금미라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로 돌렸다.하늘이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아이의 직감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누가 선한 사람인지, 누가 날카로운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금미라가 자신을 쳐다보는 동안 하늘이는 성유리 뒤로 숨으며 그녀를 몰래 쳐다봤다. 아이의 눈빛에는 평소에 잘 없던 두려움이 그득하게 서려 있었다.금미라는 그런 하늘이를 보며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하늘아, 엄마 말 잘 듣고 방에 가서 잠깐만 기다려줄래?”하늘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하늘이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성유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금미라를 힐끔 쳐다본 후 빠르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아이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이내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금미라 앞에 놓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집이 좀 어수선하네요.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방문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갑자기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너 지금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정우를 찾으러 오신 거 아니었나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82화

    그 캡처 사진은 사하나가 박한빈에게 보낸 것이었다.그녀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고 그저 단순히 사진 한 장만 보냈다. 하지만 그 사진 하나로 박한빈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분명했다.사하나는 박한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당신은 이미 게임에서 탈락했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그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곧바로 사진을 삭제하고 사하나를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그리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일을 하려 했지만 더는 데이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휴대폰에서 사진은 삭제됐지만 그 장면은 박한빈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듯 사라지지 않았다.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잠시 후, 버티다 못한 박한빈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 열쇠를 손에 쥐고는 밖으로 나섰다.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는 박한빈 본인도 잘 몰랐다.결국 그는 한 공사 현장 앞에 차를 세웠다.이곳은 그가 1년 전에 매입한 땅이었다. 몇 달 전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설계도만 다듬는 데 반년 넘게 걸렸다.그리고 최근, 현장은 또 한 번 더 설계도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하늘이가 회전목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박한빈은 바로 앞에 예쁜 회전목마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그리고 2층에는 성유리를 위해 마련한 전용 화실도 있었다.사실 박한빈에게는 이미 여러 채의 부동산이 있다.하지만 그는 성유리가 돌아오면 이전의 별장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아파트 같은 곳에 사는 건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라 여겼다.그래서 오직 성유리만을 위한 집을 새로 짓기로 했고 집이 완성되면 그녀의 이름으로 등록할 계획이었다.그렇게 성유리를 맞이할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끝난 상태였다.심지어 연정우 쪽에 제시할 조건까지 생각해 둔 채로 말이다.박한빈은 절대로 두 사람이 계속 연인 사이로 지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성유리가 연정우를 마음속에 두고 싶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그게 아니라면 연정우가 먼저 성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81화

    연정우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다른 사람들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적어도 성유리가 보고 들은 것들로만 해도 연정우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가 성유리 때문에 무너져버리고 있다.그래서 만약 연정우가 자신을 밀어내더라도 성유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전혀 놀랍지도 않았다.그런데 지금 그가 한 대답은 성유리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일이 아닌 자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성유리는 이를 꽉 악문 채 눈앞의 사람을 올려다봤다.“넌 싫어?”연정우가 물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여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 후 다시 연정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아니. 좋아.”“이런 삶은 전혀 힘들지 않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난 어릴 때부터...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크지 않아도 되고 화려할 필요도 없었어. 가사도우미 같은 건 필요도 없고. 내 아이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있으면 돼.”“그게 내가 원했던 삶이야.”성유리가 할 말을 끝내자 연정우도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그럼 우리 함께 그런 집을 만들어가자.”한편, 금성.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사무실은 여전히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의 데이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놓인 재떨이는 이미 꽉 차있었다.그는 현재 거의 이틀 가까이 잠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바라던 그 소식 또한 전해졌다. 장성 그룹이 소유한 자금으로는 더 이상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수화기 너머 그 사람은 내일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하면 장성 그룹은 바로 붕괴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냉랭했다.그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로 간결했다.“네. 알겠습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80화

    “실은 나도 그렇다고 딱 확신할 수는 없어.”한참을 침묵하던 연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지만 최근 우리 회사에서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아. 큰 문제는 아니지만 연달아 일어나는 사고들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기엔 어렵고.”연정우는 하던 말을 뚝 멈추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성유리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그리고 뭐?”“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와 오랫동안 협력하던 은행 몇 곳이 최근 갑자기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나와의 협상을 아예 거부하고 있어. 누군가 뒤에서 압박을 넣고 있는 게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거지.”‘금성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이 뒷말을 연정우는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성유리라면 충분히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생각에 잠겨있던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꼭 쥐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바로 그때,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물었다.“이 싸움에서 내가 진다면 넌 나한테 실망할 거야?”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그리고 바로 묻는 연정우의 눈을 바라보았고 연정우도 성유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근데 넌 아마 많이 힘들 거야.”연정우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다시 학교로 돌아가 강의를 해야 하겠지. 그러면 가사 도우미를 둘 형편은 안 될 거야. 그래서 너는 계속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뭐 어때? 난 이런 삶이 좋은데.”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말했고 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웃음을 빵 터뜨렸다.연정우의 환한 웃음을 본 성유리는 꽉 조여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걸 느꼈다.“나를 원망하지는 않아?”성유리가 물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너를 원망해야 하지?”“나 때문에... 박한빈 씨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9화

    잠시 망설이던 하늘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연정우는 성유리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연정우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기에 다소 서툴렀지만 하늘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고 머리를 말리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성유리는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이 장면이 너무나 따뜻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정우가 바로 자신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그래서 연정우를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휴대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조명이 비추는 아래에서 연정우는 다정하게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고 하늘이는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사진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처럼 보였다.성유리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가 내일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반죽은 이미 미리 만들어 두었기에 이제 고기소를 넣고 찜기에서 찌기만 하면 되었다.성유리가 이렇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이유는 하늘이가 달걀노른자에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외부에서 파는 만두에는 대부분 달걀물이 들어가 있어서 하늘이를 위해 성유리는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원래 성유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평소에 잠자리에 들 때 늘 엄마를 찾곤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방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도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성유리가 하늘이 방으로 향하려 하는 순간, 연정우가 아이의 방에서 나왔다.“하늘이 잠들었어.”연정우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자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뭐라고?”“방금 잠들었다고.”연정우는 웃으며 말했다.“책을 조금 읽어줬더니 졸린다고 하더니 바로 잠들었어.”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이 믿기지 않아 방을 열어 직접 확인해 보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이는 정말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아까 너무 많이 놀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8화

    연정우는 할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반면 성유리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긴장한 듯 주먹을 더 꽉 쥐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손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성유리는 놀란 듯 연정우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그 순간, 연정우는 그것만으로도 성유리에게 다가갈 더 큰 용기를 얻은 듯했다.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한 연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그녀에게 조금씩 가까이 대기 시작할 무렵.“엄마!”집안을 울리는 하늘이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고 그 소리는 마치 번개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았다,성유리는 깜짝 놀라 연정우를 급히 밀쳐버렸고 너무 갑작스러운 힘에 연정우는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 있던 찬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쾅!맑은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고 성유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바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 미안해. 정말 괜찮아?”“응.”연정우는 걱정하는 성유리에게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 별로 안 아팠어.”그의 말에도 성유리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었다.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늘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 둘이 지금 뭐 하고 있었어?”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의 존재를 떠올리고 아이를 향해 돌아서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늘이는 무슨 일 있었어?”“아저씨가 준 인형 어떻게 말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어.”하늘이는 말하면서 손을 뻗어 연정우의 손을 잡아끌었고 연정우는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아이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향했다.혼자 주방에 남은 성유리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연정우의 여행 가방은 여전히 현관에 놓여 있었다.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아저씨, 오늘 밤 여기서 주무실 거예요?”연정우는 아이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7화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행동에 연정우는 제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왜? 나 많이 보고 싶었어?”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웠지만 어딘가 우울한 듯한 느낌이 숨겨지지 않았다.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잠시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연정우는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망설이던 성유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먼저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 많이 힘들어?”“그냥 좀 바빴어.”“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니고?”성유리는 지금 연정우에게 질문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확신에 찬 뉘앙스가 그득히 섞여 있었다.연정우는 성유리의 물음에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 듯했으나 금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걱정 마. 별일 아니야. 다 해결됐어.”그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하늘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넌? 요즘 잘 지냈어?”하늘이는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잘 지냈어요.”“그럼 됐어. 내가 하늘이 줄 선물 사 왔는데 뭔지 보고 싶어?”선물이라는 말에 하늘이는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연정우가 선물을 줄 때는 다소 어색해하던 하늘이도 이후 연정우가 선물을 고르는 순간이 더 즐겁다고 말한 뒤로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이번에도 하늘이는 연정우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성유리는 얼른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연정우는 여행 가방을 현관에 두 따로 준비한 가방을 열어 하늘이에게 준비한 선물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약 30cm 크기의 인형이 들어 있었다.성유리는 한눈에 그 인형이 유명 영화의 협업 한정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티나게 팔린 인형은 이곳 경운시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제품이었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연정우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하늘이는 이런 거 잘 몰라. 굳이 비싼 거 살 필요 없어. 그냥 간단한 걸로도 괜찮아.”“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6화

    그날 밤 연정우는 끝내 식사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 날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에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이를 본 사하나는 화가 난 듯 연정우를 나무라며 몇 마디 욕설까지 퍼부었다.“괜찮아. 아마... 무슨 중요한 일이 있겠지.”“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언니랑 하늘이를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나중에 꼭 연정우 씨한테 한마디 해야겠어요.”사하나는 말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화가 나 있는 사하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무슨 문제요?”사하나가 되물었다.“글쎄 지금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사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듣지도 못했는데요? 언니 혹시 무슨 얘기 들으신 거 있으세요?”“아니. 그냥... 걱정돼서.”“뭐가 걱정되는데요?”긴장 탓에 경직돼 있던 사하나는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연정우 대표님 회사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잖아요. 대기업이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꽤 단단해진 상태예요. 그러니까 별일은 없을 거고요.”“저도 아무 얘기 못 들었으니까 괜히 걱정하지 마세요.”사하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겨우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사하나는 원래 화를 빨리 내고 빨리 풀리는 다혈질이었다.성유리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연정우를 욕하겠다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하늘이와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차 안은 다시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왔다.요즘 사하나는 집안 회사 일을 물려받느라 바빴기 때문에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 터미널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떠나버렸다.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짐을 부치고 안전 점검까지 마친 후,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는 연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하나 씨가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줬어. 지금 대기 중이야.]하지만 연정우는 평소와 다르게 바로 답장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5화

    사실 오늘 성유리는 연정우와 함께 김난희의 빈소를 찾을 예정이 아니었다.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성유리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그의 전처의 신분으로 장례식을 찾는 것만으로 이미 민망한 상황인데 연정우까지 함께 간다면 박씨 가문에게 수치를 안겨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우는 누구한테서 성유리의 일정을 전해 들은 건지 몰래 따라왔고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렸다.연정우는 자신 또한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으니 성유리는 그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연정우도 아예 성유리를 만날 것을 예상치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차 안에서 연정우는 이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를 꺼냈고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연정우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사실 나도 꼭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어. 그냥... 너 혼자 오면 위험할까 봐. 그리고 혹시 어색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오려고 한 거였어.”연정우의 핑계는 누가 들어도 거짓이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그를 들춰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래서 아까 박한빈 씨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건데?”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물었다.“별거 아니야. 그냥 흔한 말들이었어.”성유리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고 연정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려던 말들을 꾹 삼키기로 했다.‘이런 상태로 말하면 안 돼.’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게 있어 과거로 남은 사람이었으니 연정우는 그녀 앞에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혹시나 박한빈을 잊고 살던 성유리가 자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까 봐 말이다.하지만 연정우는 쉽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일을 겪은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성유리는 전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