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가만히 앉아 있다 한참 뒤, 정신을 다잡고 박한빈을 밀어내며 입을 뗐다.“여긴 왜 오시는 거예요? 빨리 돌아가서 누워요. 손에 있던 링거는요? 미쳤어요? 지금 다친 사람이 뭐 하는 거예요!”차분하던 평소완 달리 다급한 말투로 외치는 성유리를 박한빈은 옅은 미소만 띤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는 손을 뻗어 성유리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줬지만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다 그를 다시 밀어냈다.“빨리 돌아가요! 간호사는요?”성유리가 호출 벨을 누르려던 순간, 박한빈이 먼저 움직였다.그렇게 그녀는 눈 깜빡할 사이에 박한빈의 품에 안겨버렸다.“급한 일 아니야.”그가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인데 죽기야 하겠어?”“그리고 그때 네가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는 거 몰랐어? 그때 다른 사람들은 다 대피하고 소방원마저 방독면을 낀 채로 현장에 진입했어. 근데 넌? 물불 가리지도 않고 막 달려갔다며? 진짜 죽으려고 그랬어?”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성유리를 ‘혼’내고 있는 박한빈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잘못을 저지른 것을 깨달은 어린아이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고집을 피우듯이.박한빈은 성유리의 기분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혼’ 내진 않았다.“서훈 씨가 그러던데... 그때 진병오 쪽에서 너한테 연락했었어? 넌 또 그 사람이 요구하는 돈을 다 준비했고? 정말 혼자 들어오려고 한 거야?”“네.”“안 무서웠어?”“왜 무서워해야 되는 건데요?”성유리가 되물었다.“만약 정말 원하는 게 돈이라면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일도 끝이 날 거고.”박한빈은 단호한 성유리의 태도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사실 그때 박한빈 씨는 다 알고 계셨죠?”한참을 박한빈과 눈을 맞추던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뭐를?”“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돈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필경 정말 위약금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높은 금액을 제시했을 테니까.”“이번 일에 영향도 꽤 크니까
박한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척 가볍게 말을 마쳤다.단 몇 마디만으로 이번 일을 성유리에게 제대로 ‘설명’해 줬지만 사실 숨겨둔 사실이 있었다.불에 타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마주한 건 박세빈 한 명뿐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었다.그들 또한 박한빈이 살아서 나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만약 박한빈이 그 여자를 잡지 않았다면, 또 화재가 더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면 진병오는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세한 상황까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숨기려는 결정을 내렸다.비록 지금 박한빈은 살아있지만 그런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난다면 살아남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생략’한 말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의 손을 꽉 쥐고 있던 손에도 힘을 서서히 풀더니 화가 난 듯 이를 악물고 박한빈에게 물었다.“제가 진짜 죽으려고 그랬는지 물으셨죠? 그러는 당신은요?”“난 방법이 없었잖아.”박한빈이 대답했다.“박세빈을 구해 나오지 않으면 일은 더 복잡해질 거야. 근데...”“그럼 자기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박한빈 씨가 정말 거기서 죽었다면 저는 어떡하라고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지금 그가 어떤 말을 하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녀는 오직 한 가지 사실만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도 된다는 것.원래 박한빈은 바로 금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올 수도 있었고 성유리와 딱 마주칠 수도 있었다.만약 그때 성유리가 조금만 더 빨랐고 박한빈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가장 직관적으로 말해 만약 소방원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를 잡는 사람이 없었다면?성유리는 아마 미친 듯이 타고 있는 집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섰을 것이다.정말 그랬다면 그 결과 또한 박한빈이 예상했던 것이었을까?성유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속상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감정보다는 슬픈 감정이 더 강했다.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저녁 7시가 되자마자, 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다.성유정은 거실에 있다가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오빠, 이제 퇴근한 거야?”박한빈은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외투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말했다.“저녁 식사 준비됐어.”식사 중에 성유정은 먼저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언니랑 오빠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사실 엄마한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데도 엄마가 걱정된다고...”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편하게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정말? 여기서 지내는 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정 씨가 여기 계시면 저희도 좋아요.”숙자 아주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오랜만에 집이 북적여서 정말 좋네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유리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성유정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서툴렀다.숙자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집에서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성유리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식사해.”“언니, 이거밖에 안 먹어?”성유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괜찮아.”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천천히 먹어. 나는 괜찮아.”그 말만을 남기고 성유리는 식탁에서 멀어졌다. 다이닝룸을 벗어나기 전, 성유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언니... 화난 것 같지 않아? 내가 와서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박
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한빈아, 너...”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네. 아직이요.”“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는...”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그건 너무 이른
박한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척 가볍게 말을 마쳤다.단 몇 마디만으로 이번 일을 성유리에게 제대로 ‘설명’해 줬지만 사실 숨겨둔 사실이 있었다.불에 타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마주한 건 박세빈 한 명뿐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었다.그들 또한 박한빈이 살아서 나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만약 박한빈이 그 여자를 잡지 않았다면, 또 화재가 더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면 진병오는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세한 상황까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숨기려는 결정을 내렸다.비록 지금 박한빈은 살아있지만 그런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난다면 살아남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생략’한 말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의 손을 꽉 쥐고 있던 손에도 힘을 서서히 풀더니 화가 난 듯 이를 악물고 박한빈에게 물었다.“제가 진짜 죽으려고 그랬는지 물으셨죠? 그러는 당신은요?”“난 방법이 없었잖아.”박한빈이 대답했다.“박세빈을 구해 나오지 않으면 일은 더 복잡해질 거야. 근데...”“그럼 자기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박한빈 씨가 정말 거기서 죽었다면 저는 어떡하라고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지금 그가 어떤 말을 하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녀는 오직 한 가지 사실만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도 된다는 것.원래 박한빈은 바로 금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올 수도 있었고 성유리와 딱 마주칠 수도 있었다.만약 그때 성유리가 조금만 더 빨랐고 박한빈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가장 직관적으로 말해 만약 소방원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를 잡는 사람이 없었다면?성유리는 아마 미친 듯이 타고 있는 집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섰을 것이다.정말 그랬다면 그 결과 또한 박한빈이 예상했던 것이었을까?성유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속상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감정보다는 슬픈 감정이 더 강했다.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성유리는 가만히 앉아 있다 한참 뒤, 정신을 다잡고 박한빈을 밀어내며 입을 뗐다.“여긴 왜 오시는 거예요? 빨리 돌아가서 누워요. 손에 있던 링거는요? 미쳤어요? 지금 다친 사람이 뭐 하는 거예요!”차분하던 평소완 달리 다급한 말투로 외치는 성유리를 박한빈은 옅은 미소만 띤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는 손을 뻗어 성유리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줬지만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다 그를 다시 밀어냈다.“빨리 돌아가요! 간호사는요?”성유리가 호출 벨을 누르려던 순간, 박한빈이 먼저 움직였다.그렇게 그녀는 눈 깜빡할 사이에 박한빈의 품에 안겨버렸다.“급한 일 아니야.”그가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인데 죽기야 하겠어?”“그리고 그때 네가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는 거 몰랐어? 그때 다른 사람들은 다 대피하고 소방원마저 방독면을 낀 채로 현장에 진입했어. 근데 넌? 물불 가리지도 않고 막 달려갔다며? 진짜 죽으려고 그랬어?”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성유리를 ‘혼’내고 있는 박한빈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잘못을 저지른 것을 깨달은 어린아이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고집을 피우듯이.박한빈은 성유리의 기분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혼’ 내진 않았다.“서훈 씨가 그러던데... 그때 진병오 쪽에서 너한테 연락했었어? 넌 또 그 사람이 요구하는 돈을 다 준비했고? 정말 혼자 들어오려고 한 거야?”“네.”“안 무서웠어?”“왜 무서워해야 되는 건데요?”성유리가 되물었다.“만약 정말 원하는 게 돈이라면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일도 끝이 날 거고.”박한빈은 단호한 성유리의 태도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사실 그때 박한빈 씨는 다 알고 계셨죠?”한참을 박한빈과 눈을 맞추던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뭐를?”“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돈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필경 정말 위약금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높은 금액을 제시했을 테니까.”“이번 일에 영향도 꽤 크니까
성유리는 말하며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그러자 앞에 있던 소방원은 조용히 자신이 쓰고 있던 방독면을 벗어서 건넸다.그녀는 소방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방독면을 건네받지 않았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싫어요.”“만약 박한빈 씨가 안에 있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거라면... 그냥 같이 갈래요.”성유리의 말에 소방원은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려는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유리야.”남자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행여나 자신이 환청일까 봐 두려워 고개를 돌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성유리.”그가 성유리의 이름을 다시 한번 외치기 전까지는.그녀가 천천히 뒤돌아보자 그토록 찾았던 박한빈이 그곳에 서 있었다.그는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는데 하얀 옷 위에 까만 자국 같은 것이 얼핏 보였다. 아니, 다시 말하면 까만 자국이 아닌 핏자국이었다.평소 정갈한 모습과는 달리 한껏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급박했던 현장 상황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멍하니 박한빈을 바라보다 환각이 아님을 깨닫고는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없이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당시 박한빈은 이미 다쳐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성유리가 달려와 끌어안을 때, 그 힘에 배 위에 나 있던 상처 부위가 찢어져 버렸다.꽤 강한 고통이 느껴짐에도 박한빈은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성유리를 안아줬다.이미 그녀의 눈물은 박한빈의 셔츠를 다 적셨고 여전히 덜덜 떨고 있었다.‘많이 무섭고 놀랐나 보네.’두 사람의 몸이 가까이 닿는 순간, 그들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걱정 많이 했어?”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난 그렇게 쉽게 안 죽어.”“난 방금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박한빈의 물음에도 성유리는 대답이 없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가 고개를 숙여보자 그녀는 이미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뭐지?’그가 손에 힘을 살짝 푸는 순간 성유리는 픽 쓰러져버렸다.깜짝 놀란 박한
불길은 멈출 기미가 없이 점점 활활 타올랐다.이곳의 건물들은 거의 다 붙어있는 형식이기에 어느 한 집에 화재가 발생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온 촌이 다 불타기도 했다.주위에 거주하던 촌민들은 이미 다 대피를 한 상태지만 불길이 제일 센 그 집에서는 아무도 도망 나오지 않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집 안에 있다고 확신했다.웬일인지 순간 성유리는 이 며칠 동안 박한빈과 발생했던 일들이 떠올랐다.마지막으로 본 건 승마장에 갈 때였다.박한빈이 애써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시도했지만 성유리는 계속 그의 말을 끊어버렸었다. 그때 그녀는 화가 나 있는 상태였기에.그래서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사실 그 또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이 말을 꺼낼 때마다 성유리는 조용히 하라고 심술을 썼다.승마장 이후로 박한빈과 대화를 나눈 건, 영상통화로 자신이 있는 곳에 오라고 할 때였다.성유리는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알고 있었고 박한빈이 은근슬쩍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 성유리는 듣기 좋은 말 한마디도 없이 박한빈을 거절해 버렸다.지금은?성유리가 말해주고 싶어도... 박한빈이 못 들을지도 모른다.‘지금 이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머리론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화재가 발생하면 경찰들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현장을 통제한다는 것도.그러나 성유리는 본인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엔 온통 박한빈과의 일상들이 떠올랐고 다리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이건 몸의 본능이다.마치 몇 번이고 포기하려고 애를 써도, 수백 번 박한빈에 대한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해도 결국 박한빈의 옆에 돌아가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이런 감정은 성유리의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본능적인 마음이 되었다.화재로 인한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성유리는 호흡마저 가빠졌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박한빈의 이름을 외쳤다.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하게도 없었다.이미 마음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성유리는
“진병오 씨,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걸음을 멈춘 박세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다 당신과 피와 살을 나눈 형제들이죠. 그들이 여기서 죽기를 바라지 않지 않습니까?”“그리고 다시 말해 당신 형이 당신 때문에 죽었는데 정말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진병오 씨가 죽으면 당신 형수의 삶은... 더 좋아지겠죠.”박세빈은 말하며 옆에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휙 돌렸다.후자는 공포에 질려 사색이 된 얼굴로 있었는데 마치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안다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진병오는 이를 꽉 깨물고 있다 천천히 입을 뗐다.“나는 상관하지 말고 박한빈 이 인간부터 죽여!”그의 한 마디에 망설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한빈에게 달려들었다.결국, 박한빈은 앞에 있던 남자를 툭 차버린 뒤 의자 하나를 끌어당겼다.그리곤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사실 그는 오래전 담배를 끊은 상태였다.하지만 성유리가 선물로 준 라이터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으니 라이터는 온전했다.박한빈이 라이터를 살짝 누르자 이내 파란 불이 나왔고 그의 행동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얼어붙었다.특히 박세빈.박한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챈 그는 몇 초간 굳어있더니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얼른 저 사람 막아!”다리가 불편한 박세빈은 빨리 다가가 박한빈을 막기에 부족했다.그러나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박세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한빈은 눈앞에 있던 커튼에 불을 붙였고 문도 잠가버렸다.방안 구조를 틈틈이 관찰한 박한빈은 비록 장식이 다 새롭기는 했지만 나무판자들은 그대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렇기에 이런 집은..,불이 한번 붙으면 통제하기가 어려웠다.박한빈이 굳이 다른 짓을 더 하지 않아도 불길은 마구 솟아 집을 통째로 삼켜버렸다....“불이야!”성유리가 촌 어구에 갓 도착했을 때, 이 목소리를 마침 들었다.순간 불길한 예감이 든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 촌을 쳐다봤고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그 목소리에 박한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그가 고개를 들 때, 사람들 틈에 있던 남자 한 명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기 시작했다.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왜냐하면 모자 뒤에 숨겨져 있던 남자의 얼굴이... 박한빈과 똑같았기 때문이다.당연하게도 몇 년 동안 강한 햇볕 아래에서 생활한 터라 그의 피부는 눈에 띠게 건조해졌고 목소리도 예전과는 달리 듣기 싫을 정도로 잠겨있었다.사람들이 박세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때, 박한빈의 시선은 그의 다리로 향했다.하지만 그는 박한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피식 웃더니 자신의 바지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드러난 건, 장애인들이 쓰는 가짜 다리 즉 의족이었다.“아, 안 죽었었구나.”박한빈은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한 듯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맞아요. 전 아직 안 죽고 살아있었습니다. 실망이 크십니까?”박세빈은 여전히 선량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그러나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자신에 의해 제압당한 남자를 보며 물었다.“쟤가 바로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지시한 사람입니까?”“아마 아닐걸? 당신은 쟤랑 너무 어색해 보이는데.”“게다가 이때쯤이면 해외에 있어야 하지 않나?”뒤의 말들은 박한빈이 박세빈한테 하는 말이었다.“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여기에 나타날 수 있다는 건 누가 너를 돕고 있다는 증거겠지. 내가 한번 맞춰볼까? 그 사람 혹시... 연정우 씨야?”박한빈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세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역시 그 사람이 맞나보군. 근데 이제야 기사회생을 한 사람이 이런 멍청한 짓을 꾸며낼 리가 없을 거야. 그러니 너라는 패를 이용해 죄를 짓는 거겠지. 필경... 넌 정말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박세빈은 여유롭게 박수를 치며 대답했다.“못 본 몇 년 사이에 형님은 더 똑똑해지셨습니다? 역시 이래서 박한빈 박한빈 하나 봅니다.”“사실 전 원래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이미 다리는 부실
“이렇게 오래 앉아계셨는데 배고프시죠?”여자는 억지로 준비한 음식을 박한빈의 손에 쥐여주며 계속 말했다.“얼른 이거라도 드세요!”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손을 뻗어 여자가 준비한 음식을 던져버렸다.“내 몸에 손대지 마.”냉랭한 그의 목소리에 여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바닥이 떨어지는 소리에 밖에 있던 남자가 급히 들어오며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십니까?”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으며 물었는데 어찌나 다정한지 모르고 보면 남편 같았다.하지만 여자는 당황해하며 자기 손을 빼내더니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요. 실수로 면을 쏟아버려서...”여자의 말에 남자는 밑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엉망진창이 된 바닥을 발견하곤 얼굴이 새빨개졌다.그리더니 박한빈을 보며 경고하듯 말했다.“이러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박한빈은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만 봤다.분명 남자가 서 있었고 밖에 그의 형제들도 어마무시한 도구들을 들고 있었지만 그들은 박한빈의 기세에 놀란 듯 움츠러들었다.분위기는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되었고 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외쳤다.“큰일 났습니다! 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한 것 같아요.”그 목소리를 들은 남자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고 바로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봤다.“경찰에 신고하라고 시켰습니까?”이 소식은 박한빈에게도 의외였기에 그도 지금 안색이 어두워졌다.이미 몇 년 동안 자신을 따르던 비서 서훈이 이런 경거망동한 짓을 벌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게다가 박한빈이 지금 사람들에 의해 감금돼 있는 상황인데 경찰에 출동하면 더 위험해지지 않겠는가?그러니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서훈이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다.박한빈의 앞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화나게 해 그를 죽이려는 셈이었을까?“시*!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어.”제일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박한빈을 죽일 듯 다가오는 그때, 박한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무릎을 강하게 찼다.꽤 센 힘에 남자가 바로 주저앉아
박한빈은 지금 마당을 마주한 거실에 앉아 있었다. 앞쪽의 대문은 이미 닫혀 있었고 마당에는 몇 사람이 괭이와 쇠망치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그들은 혹시라도 그가 도망칠까 봐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오히려 조금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들이 지키고 있지 않아도 애초에 뛰쳐나갈 생각이 없었다.왜냐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사실 이 보상금 처음부터 저한테 얘기하셨으면 안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누군가 뒤에서 당신들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박한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그 말을 들은 남자의 눈동자가 급격히 떨리고 있었다.“당신 형의 죽음, 혹시 숨겨진 진실이 더 있는 건 아닙니까?”박한빈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희 형은 당신이 죽인 거잖아요. 당신 같은 파렴치한 개발업자들은 돈만 되면 뭐든 하는 놈들이잖아요! 안 그랬으면...”“그래요. 괜찮습니다. 당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차피 입막음 돈을 받았으니까.”박한빈이 남자의 말을 끊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다만, 사람의 운명이라는 건 정해진 게 있는 법이죠. 당신이 가져서는 안 될 걸 억지로 가지려고 하면...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군요.”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옆에 놓여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쾅.작은 소리였지만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제 쪽에 있는 사람이 곧 돈을 가져올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나가 보세요.”박한빈은 평소처럼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이 상대방에게는 이상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이 상황에서 그가 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걸 장악하고
성유리는 다시 하늘이를 바라보았다.하늘이는 조금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고 성유리의 시선이 닿자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엄마, 난 동생이 갖고 싶어. 근데 남동생 말고 여동생이었으면 좋겠어.”...결국, 성유리는 혼자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마침 꽃집이 보여 잠시 들러 꽃 한 다발을 샀다. 그리고 꽃을 들고 공항에서 서 있다가 문득 이상함을 깨달았다.‘내가 왜 박한빈 씨한테 꽃을 주려고 했지?’하지만 이미 꽃을 손에 든 상태였고 예쁜 꽃다발을 그냥 버리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들고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더 항공편이 도착했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나오는 게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끝내 박한빈을 찾을 수 없었다.오랜 시간 기다린 성유리는 조금씩 지쳐가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그래서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그 숫자를 보는 순간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지만 곧장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박 대표님 부인되시죠?”상대는 여자였다.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누구시죠?”“하하, 당신 남편이 지금 우리 쪽에 있어요. 그렇게 잘 나신 사장님이 겨우 백만으로 우리를 내쫓으려 하다니... 이거 저희를 무시하는 거 아닌가요?”“말해두는데 제 남편이 죽었어요. 이 일... 몇백만은 받아야 끝낼 수 있을 거예요!””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대체 뭘 하려는 거죠?”순간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타고 올라온 성유리가 급히 물었다.“박한빈 씨는요?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걱정 마세요.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 다만, 지금은 보낼 수 없다는 것뿐이죠.”“당장 돈을 들고 이곳으로 오세요. 저희는 오백만 원을 요구해요. 그것도 현금으로요. 알아들었어요?”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상대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멍해 있던 성유리의 핸드폰에 곧이어 서훈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망설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