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가만히 앉아 있다 한참 뒤, 정신을 다잡고 박한빈을 밀어내며 입을 뗐다.“여긴 왜 오시는 거예요? 빨리 돌아가서 누워요. 손에 있던 링거는요? 미쳤어요? 지금 다친 사람이 뭐 하는 거예요!”차분하던 평소완 달리 다급한 말투로 외치는 성유리를 박한빈은 옅은 미소만 띤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는 손을 뻗어 성유리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줬지만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다 그를 다시 밀어냈다.“빨리 돌아가요! 간호사는요?”성유리가 호출 벨을 누르려던 순간, 박한빈이 먼저 움직였다.그렇게 그녀는 눈 깜빡할 사이에 박한빈의 품에 안겨버렸다.“급한 일 아니야.”그가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인데 죽기야 하겠어?”“그리고 그때 네가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는 거 몰랐어? 그때 다른 사람들은 다 대피하고 소방원마저 방독면을 낀 채로 현장에 진입했어. 근데 넌? 물불 가리지도 않고 막 달려갔다며? 진짜 죽으려고 그랬어?”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성유리를 ‘혼’내고 있는 박한빈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잘못을 저지른 것을 깨달은 어린아이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고집을 피우듯이.박한빈은 성유리의 기분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혼’ 내진 않았다.“서훈 씨가 그러던데... 그때 진병오 쪽에서 너한테 연락했었어? 넌 또 그 사람이 요구하는 돈을 다 준비했고? 정말 혼자 들어오려고 한 거야?”“네.”“안 무서웠어?”“왜 무서워해야 되는 건데요?”성유리가 되물었다.“만약 정말 원하는 게 돈이라면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일도 끝이 날 거고.”박한빈은 단호한 성유리의 태도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사실 그때 박한빈 씨는 다 알고 계셨죠?”한참을 박한빈과 눈을 맞추던 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뭐를?”“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돈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필경 정말 위약금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높은 금액을 제시했을 테니까.”“이번 일에 영향도 꽤 크니까
박한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척 가볍게 말을 마쳤다.단 몇 마디만으로 이번 일을 성유리에게 제대로 ‘설명’해 줬지만 사실 숨겨둔 사실이 있었다.불에 타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마주한 건 박세빈 한 명뿐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었다.그들 또한 박한빈이 살아서 나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만약 박한빈이 그 여자를 잡지 않았다면, 또 화재가 더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면 진병오는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세한 상황까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숨기려는 결정을 내렸다.비록 지금 박한빈은 살아있지만 그런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난다면 살아남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생략’한 말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의 손을 꽉 쥐고 있던 손에도 힘을 서서히 풀더니 화가 난 듯 이를 악물고 박한빈에게 물었다.“제가 진짜 죽으려고 그랬는지 물으셨죠? 그러는 당신은요?”“난 방법이 없었잖아.”박한빈이 대답했다.“박세빈을 구해 나오지 않으면 일은 더 복잡해질 거야. 근데...”“그럼 자기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박한빈 씨가 정말 거기서 죽었다면 저는 어떡하라고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지금 그가 어떤 말을 하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녀는 오직 한 가지 사실만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도 된다는 것.원래 박한빈은 바로 금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올 수도 있었고 성유리와 딱 마주칠 수도 있었다.만약 그때 성유리가 조금만 더 빨랐고 박한빈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가장 직관적으로 말해 만약 소방원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를 잡는 사람이 없었다면?성유리는 아마 미친 듯이 타고 있는 집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섰을 것이다.정말 그랬다면 그 결과 또한 박한빈이 예상했던 것이었을까?성유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속상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감정보다는 슬픈 감정이 더 강했다.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의사는 빠르게 병실로 와 성유리를 위해 검사를 재개했다.다행히 그날 현장 깊은 곳으로 가지 않았기에 짙은 연기 또한 기도에 많이 들어가지 않아 상황은 최악이 아니었다.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박한빈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하지만 서훈은 박한빈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박세빈 씨가 사망하셨습니다.]박한빈이 그를 집에서 구조할 때도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박한빈의 복부를 있는 힘껏 찔렀다.박세빈이 형인 박한빈을 얼마나 증오하고 혐오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그러나 지금, 증오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바보처럼 자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이 딛고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로 만들어줬다.게다가 박세빈의 죽음은 그와 연정우 사이에서 벌어진 거래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박한빈이 아무리 악을 쓰고 구하려고 해도 쓸데가 없었다.진병오 측 사람들이 박한빈을 감금하고 납치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박세빈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했다.그러니 이번 일은 이렇게 깔끔한 끝을 맺는 것이다.연정우를 조사한다고 해도 그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표시될 것이 뻔하다.이건 박한빈이 원하는 결과가 아닌데 말이다.하지만 그 전에 박한빈은 문득 다른 일이 먼저 떠올랐다.‘진병오 그 사람들이 유리한테 어떻게 연락했지?’당시 박한빈은 진병오에 의해 핸드폰을 몰수당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핸드폰엔 비밀번호가 있었으니 그들은 박한빈의 핸드폰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연정우가 성유리의 연락처를 보내주지 않았으면 절대 그녀한테 연락을 못 한다는 말이다.도대체 왜 그들은 성유리에게 연락해 돈을 요구한 걸까? 만약 박세빈이 정체를 계속 숨겼고 박한빈이 불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일은 어떻게 됐을까?박한빈은 더 이상 자세한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다친 사실을 둘 다 금성 쪽엔 알리고 싶지 않아 했지만 너무 큰 화재이기도 하고 그로 인해 박세빈이 죽었으니 김서영이 모
박한빈은 원래 그녀가 푹 잘 수 있도록 내버려두려고 했다.하지만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서 억울함이 치밀어 올라 결국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성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코를 잡았다.잘 자다가 숨이 막히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천천히 떴다.그러자 눈앞에는 몸을 숙인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박한빈이 있었다.“뭐 하는 거예요?”몽롱한 상태에서도 성유리는 그의 손을 단숨에 쳐냈다.“성유리.”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혹시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있나?”“이번에... 내가 정말 죽었다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성유리는 가만히 누워 박한빈을 쳐다만 봤고 방금까지도 꿈을 꾸는 것 같았던 머릿속이 단번에 맑아졌다.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대뜸 입을 열었다.“당장 다른 사람과 재혼하겠죠.”그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동공이 급격히 떨렸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다시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다시 자려 했다.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누구랑 재혼할 건데?”“누구든 상관없어요. 박한빈 씨가 말했잖아요? 저라도 잘 살아야 한다고.”“난 네가 살아야 한다고 했지 재혼하라고 한 적 없어!”“저 혼자 애 키우기 너무 힘들잖아요.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부담이 좀 줄겠죠. 당신도 제가 너무 고생하는 건 싫을 거 아니에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잠깐... 나 지금 설득당한 건가?’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는 성유리의 손을 다시 꽉 붙잡았다.“안 돼! 네가 살아 있는 건 좋아. 하지만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 건 절대 안 돼!”“내가 남겨준 돈이 그렇게도 부족해? 보모를 열 명, 스무 명이라도 고용하면 될 거 아냐! 애 키우는 게 문제면 그렇게 해결하면 되잖아!”이를 악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점점 분노가 서렸다.애초에 이런 가정법적인
성유리와 박한빈이 퇴원 후 도한시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경찰이 박한빈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박세빈 씨의 유골을 가져가시겠습니까?”이번 사건에서 박세빈은 ‘주범’이었고 박한빈은 명백한 피해자였다.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였다.하지만 동시에 박한빈은 박세빈의 형이었고 이 세상에서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그렇기에 경찰이 한 번쯤은 물어볼 법도 했다.그 질문을 들었을 때, 박한빈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그리고는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필요 없습니다. 처리할 방법을 모르겠으면 바다에 뿌리든가, 아니면 하수구에 버려도 됩니다.”말을 끝낸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비록 통화 중이었지만 성유리는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에 모든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수화기 너머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박한빈이 끝까지 목숨을 걸고 화재 현장에서 박세빈을 데리고 나왔던 모습이 깊은 형제애처럼 보였을 테니까.그런데 정작 본인은 박세빈의 유골을 하수구에 버려도 된다고 말하다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그때,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생각해?”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 씨생각엔... 박세빈 씨 뒤에 누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이번이 그녀가 처음으로 박한빈에게 던진 질문이었다.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확신보다는 망설임이 서려 있었다.박한빈은 의외라는 듯 살짝 눈썹을 들었다가 되물었다.“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면 어쩌면 성유리도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정해두었는지도 몰랐다.그래서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더군다나 지금 박한빈에게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박세빈은 이미 죽었고 죽기 전까지도 연정우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결국 지금으로선 단순한 의심일 뿐, 연정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반박하지 못했다.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렇지만 만약 저 때문이 아니었다면 박한빈 씨랑 그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당신도 목숨을 잃을 뻔했잖아요.”“음, 말하자면 그렇긴 하지.”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내가 그런 걸 두려워할 것 같아?”그는 말하면서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렇다면 넌 네 남편을 너무 얕본 거지.”처음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박한빈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남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순간 멍해졌다.그래서 얼른 박한빈의 손을 쳐내고는 고개를 돌렸다.지금 비행기는 아직 이륙 전이라, 창밖에는 끝없이 평탄한 활주로만 보일 뿐이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물었다.“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누가 부끄러워한댔어요?”성유리는 즉시 반박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나 박한빈은 대답 대신 그녀의 귓불을 살짝 꼬집었다.“그럼 이건 왜 이렇게 빨개졌는데?”“더워서요!”성유리는 단박에 부정하며 박한빈의 손을 밀어냈다.마침 그 순간, 승무원이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그리고 성유리의 말을 들은 승무원은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고객님, 혹시 기내 온도가 불편하신가요?”성유리는 그저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뿐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관심을 받게 되자 순간 당황했다.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었다.“조금 덥긴 하네요.”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성유리의 말에 승무원은 즉시 온도를 조절했고 그 바람에 그녀 쪽의 바람 세기가 확연히 강해졌다.원래도 얇은 옷차림이었던 성유리는 추위에 몸을 움츠렸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옆에 있던 박한빈이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성유리가 자신과 끝까지 맞서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아무 말도
박한빈은 여기가 공공장소라는 걸 물론 알고 있었다.사실, 진짜로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단순히 성유리를 놀라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물론 이 방식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이긴 했지만 성유리가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니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비행기는 곧 금성에 도착했다.성유리는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서야 김서영이 하늘이를 데리고 마중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그녀를 발견한 하늘이는 곧장 달려와 성유리를 꽉 껴안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그런 아이를 살며시 안았지만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방금 전, 그녀는 자신이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만약 그때 정말로 박한빈과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건 하늘이에게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니었을까?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두 사람 다 무사히 돌아왔다.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늘이를 꼭 안았다.한편, 김서영은 조용히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시선을 눈치챈 그는 가만히 서서 김서영이 자신의 안전을 확인할 시간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걱정 마세요. 그냥 가벼운 찰과상 정도니까.”박한빈의 말투는 상당히 가벼웠다.원래도 걱정하는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김서영은 그 말을 듣자 미간을 더 깊이 찌푸렸다.“그렇게 자랑스러워할 일인가?”그 말 속에 담긴 불만을 박한빈도 느꼈지만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아뇨, 그냥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린 거예요. 정말 괜찮습니다.”김서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는데 대신 성유리를 바라보았다.“집에 가자.”짧은 김서영의 한마디에 성유리는 가볍게 대답한 뒤, 허리를 숙여 하늘이를 안아 올렸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그녀의 가녀린 체격이 신경 쓰였는지 이내 다가와 말했다.“내가 안을게.”처음에 성유리는 거절하려 했다.평소라면 하늘이도 스스로 걸으려 하거나 내려달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박한빈을 한참 바라보더니 먼저 두 팔을 내밀었다.그 예상치 못한 행동에 성유리와 김서영도 순간 놀랐고
박한빈이 대답하지 않자 성유리는 짜증 섞인 말투로 다시 물었다.“하늘이가 이제 막 박한빈 씨한테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데 좀 더 잘 대해주실 수는 없어요?”“내가 하늘이한테 못 해주고 있나?”그제야 침묵하던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건데요?”다시 묻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그녀를 한번 바라본 후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다쳤으니까 푹 쉬어야 한다고 했어.”“그게 다예요?”“그럼 네 생각엔?”박한빈이 피식 웃어 보이며 되물었다. 성유리는 그가 숨기고 있는 게 더 있는 것 같아 다시 물으려 했지만 박한빈은 순식간에 그녀를 들어 올려 안고는 침실로 빠르게 걸어갔다.“뭐 하시는 거예요!”놀란 성유리가 외치자 박한빈은 태연하게 되물었다.“네 생각엔?”그 한마디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잠시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아까 박한빈 씨가 전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요.”“응. 그래서 쉬게 해주려고.”그렇게 말하면서 박한빈은 이미 성유리를 침실로 데려와 침대 위에 눕혔다.그는 손을 놓지도 않은 채, 발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곧이어 성유리는 침대 위에 깔리듯 눕혀졌다.“박한빈 씨...”그녀는 박한빈의 다 낫지 않은 상처를 걱정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는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박한빈의 동작은 다소 조급했고 숨이 막힐 정도로 거칠었다.당황한 성유리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박한빈의 손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그 순간, 성유리가 입고 있던 잠옷이 단숨에 벗겨졌고 그 바람에 단추가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지며 또랑또랑한 소리를 냈다.하지만 바로 그때, 침묵을 깨듯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갑작스러운 소리에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멈춘 듯했다.그러나 박한빈은 무시한 채 계속 성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그러나 벨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 듣다 못한 성유리가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전화 받으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 표정을 굳혔지만 결국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