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표님?”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의문스러워 물었다.“알았어.”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전화를 끊고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겉보기엔 차분했지만 약간 떨리고 있었다.“금성에 돌아가려고 짐 싸고 있어요.”성유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를 숙여 캐리어를 닫으며 대답했다.박한빈은 덤덤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성유리는 그제야 비로소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단예진 씨가 여기에 왔으니 내가 계속 남아 있는 게... 불편하지 않으세요?”이 말을 들은 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한빈 씨 약혼녀 아닌가요?”성유리가 계속해서 물었다.성유리의 질문이 끝나자 박한빈은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질투하는 거야?”“아니에요.”성유리는 눈을 내리깔았다.‘내가 그럴 자격이 있겠어요?’박한빈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벗은 외투를 옆에 내팽개치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손에 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동그란 담배 연기는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흐트러졌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박하 냄새는 여전히 공기 속으로 퍼졌다.성유리는 제자리에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한참을 지나서야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난 단예진과 결혼 안 해. 지금은 비즈니스적으로 연결돼 있을 뿐 협력이 끝나면 단예진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러니 신경 쓰지 마.”박한빈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말했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나는요?”이 말에 박한빈의 손동작이 멈칫했다. 성유리는 계속해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우리는... 그럼 무슨 사이죠?”“성유리, 나한테 명분을 달라는 거야?”박한빈은 가볍게 웃었다.“잊지 마. 당시 이혼은... 당신이 제기했어.”그녀는 원래 그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 합법적으로 말이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우리 박씨 가문은 당신이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임신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임신
“며칠 동안... 신세 졌어요. 단예진 씨가 오해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는... 더 연락하지 말아요.”박한빈은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래서 성유리, 나와 선을 긋고 싶은 거지?”성유리는 말없이 그저 캐리어를 당기며 행동으로 답했것과 마찬가지다.박한빈은 웃어버렸다.“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원한다면... 후보자가 많아.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물론 알고 있어요. 또 한빈 씨 마음속에서... 제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요.”성유리도 웃으며 대답하자 박한빈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그럼 먼저 갈게요. 단예진 씨와 좋은 인연이 되길 바라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캐리어를 끌고 말없이 돌아섰다. 박한빈은 그녀를 말라지 않고 그저 묵묵히 담배만 피웠다.성유리는 그에게 무슨 말을 더하고 싶었지만 더 할 필요도 없어 그저 몸을 돌려 떠났다.문이 닫히고 방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박한빈은 그 자리에 앉아서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다음 문을 바라보니 그녀가 남긴 방카드가 보였다.박한빈은 갑자기 씩하고 웃더니 발을 들어 앞에 있는 탁자를 걷어찼다....성유리는 밤새 기차를 타고 금성으로 돌아갔다.월세 방에 도착해서 숨을 돌리기도 전에 그녀는 의료진을 철수하겠다는 병원 측의 통지를 받았다.박한빈이 이 일로 성유리를 위협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 적이 없으므로 성유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병원에서 갑자기 통지를 보내서야 성유리는 이게 바로 박한빈이 선을 긋는 방식임을 알았다.성유리는 병원으로 달려갔다.“의료비는 제가 부담할 수 있어요. 의료진이 필요한 것도 저에게 말하면 돼요.”성유리가 말했다.“성유리 씨, 환자의 하루 비용이 얼마인지 아세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그녀의 단호한 태도를 보자 상대방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유리가 다시 박한빈을 만난 것은 두 달 후였다.진무혁은 성유리를 데리고 경매에 갔다. 그때 성유리는 정원에 있었고 그 앞에는 몇 달 동안 보지 못했던 임정우가 서있었다.지난번 볼 때보다 임정우는 많이 수척해졌고 얼굴도 야위었지만 성유리를 대할 때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오랜만이에요.”성유리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이런 곳에 데려온 진무혁을 욕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오랜만이에요.”“그동안 잘 지냈어요?”임정우가 물었다.“네.”“박 대표님과... 재결합하지 않았어요?”임정우의 말이 끝나자 그날 차 안에서의 불쾌한 기억이 다시 성유리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아니요.”임정우는 말이 없었다. 성유리는 이런 말이 없는 분위기가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먼저 갈게요.”말을 마치고 마침 앞으로 나아갈 때 임정우는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럼 나와 함께 있는 건 어때요?”임정우는 진지하게 물었다.“저는 싫...”성유리가 거절하려고 입을 막 열자 임정우가 서둘러 말을 잘랐다.“유리 씨의 마음속에 아직 지난 그 사람을 잊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이러는 제가 유치하겠지만 저는 유리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또 유리 씨를 즐겁게 해주고 싶어요.”성유리가 거절하려던 말은 그의 진심 어린 고백 때문에 삼켜졌다.비록 임정우에게 애정이 없지만 그의 눈빛과 고백은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성유리의 가슴에 구멍을 냈다.성유리가 입을 벌리고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정우!”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는 분명한 분노가 섞여 있었는데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재빨리 다가와서 성유리를 확 밀쳤다.“내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에 답장도 안 해 무인도에 간 줄 알았는데 여기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느라 그럤어?”그 여자는 칼을 품은 듯한 쌀쌀한 눈빛으로 성유리를 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이 뻔뻔한 여우 년 같으니라고! 이 남자가
임정우는 이렇게 제자리에서 멈췄고 여자가 곧 성유리를 가리켰다.“이 년을 위해서지? 애초에 박한빈이 왜 이 여자와 이혼했을 거로 생각해? 바로 이 여자가 이미 다른 사람이랑 잤기 때문이야! 이 여자는 10대에 양부랑 간통했는데 이런 여자랑 있으면 병에 걸릴 가 두렵지도 않아?”현관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이쪽에 모여 있었다.여자는 말이 빨랐는데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이렇게 모든 사람의 귀에 들려왔다.성유리는 이렇게 제자리에서 굳어진 채 하고 싶은 말을 까맣게 잊었다.임정우는 표정이 여러 번 변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충격의 눈빛과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주변의 소리는 마치 갑작스러운 쓰나미처럼 성유리를 온통 뒤덮었다.성유리는 원래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몇 달 전부터 레스토랑에서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파헤쳤는데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 온갖 악플이 난무할 거라는 걸 짐작했었다.그녀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 그때의 소식이 감춰졌을 뿐이라 생각했다.지금 이 화면은 단지 몇 달 늦었을 뿐이다.하지만 성유리가 그동안 어떻게 상상했든 눈앞의 현실과는 차이가 있었다.특히 그런 신중함과 경멸의 시선이 악마의 눈초리처럼 그녀에게 떨어졌을 때 성유리는 갑자기 자신이 숨쉬기조차 어려워졌다고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진무혁을 찾으려 했다.어쨌든 그가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이니 말이다.이때 그녀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살릴 수 있는 지푸라기를 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그녀는 진무혁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구경꾼들 사이에서 박한빈을 만났다.그는 인파 밖에 서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시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낯선 모습? 비아냥? 경멸?성유리는 그 표정을 분간해 낼 수 없었다.그 차가운 술은 아직도 그녀의 머릿결을 타고 흘러내려 다시 그녀의 피부를 타고 오장육부로 스며들며 마침내 혈액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온몸이 차가웠지만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유정아, 너...”차가 시동을 걸려고 할 때 누군가가 돌진해 왔는데 마치 성유정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주려는 것 같았다.하지만 성유정은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말했다.“우리 언니예요. 전 언니를 두고 갈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전 괜찮아요.”이때 그녀의 부드럽고 자상한 모습이 외부인의 눈에는 천사처럼 보였다.말을 마친 성유정은 재빨리 창문을 닫았다.이윽고 차 안에는 이들과 기사 세 사람만 남았다.성유정은 계속 연기하려 했지만 성유정이 직설적으로 물었다.“네가 말했어?”이때 성유리는 서서히 이성을 회복하였다.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최선을 다해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써도 가볍게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성유정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웃다가 대답했다.“맞아.”성유리가 눈을 치켜들었다.“오늘 이 연기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겠네.”성유정은 눈을 깜빡이며 다시 말했다.“하지만 언니, 그건 언니가 단순해서 그래. 임정우 같은 남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어? 아니면 너무 자신만만해서 정말 언니에게 빠질 남자가 있을 줄 알았어? 참, 내가 왜 이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성유리는 고개를 들고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대답했다.“너랑 진무혁이 함께 주선한 거지?”“언니도 그렇게까지 미련한 건 아닌 것 같아. 맞아, 내가 진무혁 오빠와 함께 준비했어.”성유정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언니, 설마 언니가 진무혁 오빠와 친구가 된 줄 알았어? 언니는 너무 순진해. 언니는 지금 오빠에게 무슨 이용가치가 있어? 하지만 나는 달라. 나는 지금 성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고 진무열의 약혼녀야. 내가 원한다면... 오빠가 진씨 가문의 자리를 확실히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 그러니 성유리, 네가 버림받은 건 당연한 거야.”성유정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가 갑자기 또 웃었다.“그래서 진무열까지 계산에 넣었단 말이야? 그리고 진무혁은 너에게 무엇을 주겠다고 약속했어? 진씨 가문의 자리를 잡으면 진무열과 파혼한 후에 박한
“허튼소리!”성유정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는데 목소리에 화가 조금 섞여 있는 것 같았다.“성유리, 이간질하지 마. 넌 질투한다는 걸 알아...”“애당초 박한빈의 어머니가 나에게 결혼하라고 한 것은 맞지만 문제는 박한빈 자신도 고집하지 않았다는 거야... 사실 누구와 결혼해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박한빈이 정말 널 좋아한다면 진무열과 약혼하게 했겠어? 성유정, 한 남자의 소유욕을 얕보지 마.”“그러니까 이 모든 건... 박한빈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너를 좋아하지 않는 다는걸 설명해. 게다가 나는 지금 박한빈과 관계가 없으므로 네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은 더 의미가 없어.”성유리는 단숨에 말을 끝냈다.성유정의 안색은 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그녀는 그곳에 앉아 성유리를 보고 있었는데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 운전자에게만 덤덤하게 말했다.“차를 세워요.”운전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차는 천천히 멈추었다.성유리가 차에서 내리려 하자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 너는 지금 이미 망신당했어. 네가 언제까지 도도할 수 있을지 두고 볼 거야!”성유리는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만 걸어갔다.이때 진무혁의 전화가 걸려왔다.“어디야?”성유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다가 방금 성유정의 말을 다시 떠올리며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비록 그녀도 성유정의 말을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오늘 밤 벌어진 이 모든 일을 우연의 일치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기 싫어져 발신지를 보고 전화를 끊었다.진무혁은 두 번 세 번 전화를 걸어왔다.이미 택시를 잡은 성유리는 문을 닫은 뒤 전화를 받았다.“유리야.”진무혁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조금 배어 있었다.“어디야? 너..."“돌아가는 길이에요.”성유리가 직접 말했다.“죄송해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나왔어요.”“괜찮아. 나...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저녁에 거기 데려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너와 임정우의 만남을 주선했어.”진무혁이 말했다.“하지만 그 여자가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고 그런 말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어. 유리야, 어쨌든 우린 친구고 나는... 이렇게까지 너를 모해할 처지는 아니야.”성유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녀의 눈은 그의 말의 진의를 헤아리는 듯 천천히 내리깔고 있었다.진무혁은 말을 계속 이었다.“하지만 어쨌든 오늘 밤 일은 내가 소홀했어. 정식으로 사과할게. 앞으로...”“아니에요.”성유리는 그의 말을 끊었다.“우리 앞으로 계속 만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무슨 말이야?”진무혁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들려왔다.“날 못 믿는 거구나?”성유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먼저 올라갈게요. 안녕히 가세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하지만 그녀가 진무혁 곁을 지나갈 때 갑자기 그가 손을 뻗어 손목을 잡았다.“결혼하자.”그가 말했다.이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성유리는 몸을 움찔하더니 서서히 눈길을 그에게로 향했다.그 눈빛이 마치 한 미친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진무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아. 네가 정말... 그렇다면 너도 분명 피해자일 거라고 믿어. 성유리, 너와 친구가 되어서 정말 기뻤어. 오늘 밤 일은 내가 너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더욱 굳게 했어. 그러니까 우리 결혼하자.”...한편, 단예진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결국 참지 못하고 박한빈에게 물었다.“들어가서 차 한잔하실래요?”“너무 늦었어요. 다음에요.”박한빈의 대답은 직설적이었는데 이전의 어떤 대답과도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매번 다음번이라고 하는데 이 ‘다음’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단예진은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차를 마실 뿐인데 우리...”“아직 할 일이 있어서요.”박한빈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했는데 거절의 뜻이 명확했다.단예진은 자신이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했고 실제 주변에 좋아하는 남자가 부족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예진이 처음 박씨 가문에 방문하는 것이다.그녀는 세심하게 어르신과 박한빈의 어머니에게 선물을 준비했다.두 사람이 단예진의 방문을 매우 환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몇 달 동안 조용했던 이 집은 오늘 마침내 활력을 되찾았다.박한빈은 어머니의 반응이 의외라 생각했다.어쨌든 그는 줄곧 어머니가 성유리를 좋아하고 아버지의 뜻을 매우 존경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오늘에야 그는 모든 것이 그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단순히 성유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전에 그녀는 박한빈에게 성유정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면 다 괜찮다고 한 적이 있다.그래서 그녀가 성유리에게 보였던 미소를 지금은 단예진에게 보여주고 있었다.식사할 때 할머니가 갑자기 어젯밤의 경매회를 언급했다.“누군가 소란을 피웠다면서?”박한빈이 멈칫했지만 단예진이 먼저 할머니를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할머니, 어떻게 아셨어요?”“오늘 업계에 소문이 퍼졌는데 내가 모를 리 없지.”할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성유리는 적어도 성실한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오해이었나 봐...”“어머님.”김서영이 갑자기 말을 끊자 김난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다 우리 박씨 집안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니 그만 하세요.”김서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분명 불쾌하게 들렸다.김난희는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우리 박씨 집안이랑 상관없는 거 알아. 하지만 예진이 앞에서 그냥 한번 말해보는 거야. 예진아, 넌 모를 거야. 우리 박씨 가문도 사실 피해자야. 성씨 가문이 이 일을 너무 잘 숨겨서 우린 전혀 몰랐어. 알면... 우리가 그런 애를 받아들일 수 잆지.”그러자 도예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할머니, 그건 다 지난 일이에요. 그리고 제 생각엔... 성유리 씨도 불쌍해요.”“뭐가 불쌍해? 우리가 한빈이가 불쌍하지. 그런 애에게 속아서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할머니.”박한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가벼운 한마디는 잘 드는 가위인 듯 다른 사람이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에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채 정리할 틈도 없이 성유리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죽었다는 그 사람이 혹시 최정민 씨야?” ... 연정우가 말한 죽은 자는 정말로 최정민이었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21층 발코니에서 추락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죽었을 당시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바로최정민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집 안에는 그녀외에 오직 박한빈만 있었다. 늦은 시각, 다 큰 성인인 남녀 단둘만 남겨진 상황.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온갖 추측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박한빈의 신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각종 소문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최정민과 박한빈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는 최근 그들 사이에서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그녀가 옷차림이 흐트러진 채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지나치게 방탕한 놀이를 하다 사고로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그런 상태로 죽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원래 재벌가의 이야기는 연예계의 가십보다 더 자극적이다. 그렇기에 대중의 관심은 더욱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성유리에게 연락을 시도해 이번 사건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박한빈이 성유리의 결혼식에서 그녀 대신 칼을 맞아준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때 그의 행동에 충격받는 한편 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모두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진 일은 이 모든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박한빈과 최정민의 관계에 대해 그녀가 남들보다 더 아는 것도 없었으니 최정민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다친 성유리를 실은 구급차는 얼마 안 지나 바로 병원에 도착했다.성유리의 얼굴에 흐르던 피는 이미 멈췄지만 의사는 봉합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마취주사 때문에 얼굴에 감각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성유리는 의사가 자신의 피부를 바늘과 실로 꿰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봉합 수술이라 성유리의 치료는 응급실 안에서 진행되었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응급실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성유리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봉합을 끝마칠 때까지도 박한빈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 반면 연정우는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유리가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연정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진 않아?” 성유리는 묻는 연정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 집에 데려다줄게.” 연정우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가던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우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정우는 내색하지 않았고 이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왜 그래?” “유효정 씨 일은 처리 안 해도 돼?” 침묵하던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지금쯤 경찰 손에 잡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너는...”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연정우는 화를 억누르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성유리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효정 씨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연정우는 빠르게 표정을 바꾸며 다시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이번에 유효정이 건드린 사람이 너니까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근데 박한빈 씨는 오늘 밤 왜 안 왔을까?” 그의 말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왜 안 왔는지는 모르겠어. 근데 이제 보니 유효정 씨가 대체 왜 그렇
“제가 얼마나 배려심이 많은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유리 씨도 저 좀 배려해 주세요. 움직이려고 애쓰지 마시고요. 알아들으셨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실수로 당신의 배에 떨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저도 되게 민망해질 텐데?” 유효정은 말하면서 손에 점점 더 세게 힘을 주었고 성유리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한 고통을 견뎠다. 그녀의 칼이 그어지는 곳에서는 빨간 피가 쏟아져 내렸고 방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추웠다. 이 상황에 성유리는 문득 박한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유리는 혹시 자기가 먼저 떠나버려 박한빈이 기분이 나빠졌는지, 아니면 지금 다른 곳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찾고 있는지 몰랐다. 둘 다 아니면 최정민의 전화를 받느라 성유리의 실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유리는 감히 다른 경우들을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씁쓸해졌기 때문에. 통증은 점점 더 뚜렷해졌지만 그녀는 몸부림치지도 못했다. 유효정의 말대로 아직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심기를 다시 건드려 한 번 더 화를 낸다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성유리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성유리 얼굴의 살이 점점 벗겨지자 유효정은 피를 본 상어처럼 눈이 번쩍이고 눈빛에는 광기가 서렸다. 그러더니 유효정의 손에 힘이 더 더해졌다. 성유리가 자신의 목에 곧 칼날이 꽂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유효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칼을 쥐고 있던 손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그쪽에 있던 사람들이 벌써 달려들어 그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순간, 유효정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땅에 툭 떨어졌다. 원래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고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많은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비추는 환한 불빛에 성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박한빈의 차에서 내려 길을 건넜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세게 때린 것 같았다.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보기도 전에, 그 사람은 이미 그녀의 입과 코를 가려버렸고 그 직후 그녀는 모든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성유리는 이상한 방에 누워 있었다.그녀의 손과 발은 묶여 있었고 방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났으며 달빛이 조금 비추는 창문을 제외하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성유리는 누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상대방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집 안에서 자신이 묶여있는 밧줄을 끊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깜짝 놀란 성유리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사람을 보자 성유리의 동공은 심하게 떨렸고 그와 동시에 살짝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에요?” “많이 놀란 것 같네요?” 유효정은 성유리의 모습을 비웃으며 깔깔 웃었다. “유효정 씨, 당신의 신분으로 왜 굳이 이런 일을 하시는 거죠?” “굳이라고요? 굳이?” 유효정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대답했다. “이런 당신의 모습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요. 너무 힘들고 마음이 불편하게 사는 저와 성유리 씨를 비교해보면 자꾸만 질투가 나서요.” 유효정은 말을 하는 동안 시선이 조금씩 내려가더니 성유리의 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신 몇 개월 되셨죠?” 성유리는 그녀가 갑자기 이런 물음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었고 몸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웅크렸다. 이 어설픈 성유리의 행동에 유효정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러면 제 마음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유효정은 손을 뻗어 성유리의 배를 쿡쿡 찔러보았다. 그녀의 힘은 별로 세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충격에 휩싸였고 눈으로는 유효정
박한빈은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번엔 전화를 바로 끊어버리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 모습에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더니 말했다. “됐어요. 그냥 저 혼자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릴 채비를 했다. 이때,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어디 가려고?” “바쁘신 것 같아서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려고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택시를 어떻게 혼자 타!” “길 가다 보면 널리고 널린 게 택신데 제가 왜 못 타죠?” “빨리 앉아. 나 곧...” 박한빈의 뭐라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 번째 전화가 걸려 왔고 성유리는 그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봐요. 많이 바빠 보이시니까 저 그냥 혼자 갈게요. 방해되지 않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는 다시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성유리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차에서 내려서는 바로 길 맞은편으로 향했다. 박한빈은 그녀를 따라가려고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려고 했지만 마침 신호등 불빛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 해도 금성 도로엔 쌩쌩 달리는 차가 꽤 많았다. 그래서 박한빈은 아예 차를 몰고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빨간 불이 다시 초록 불로 바뀌는 순간, 박한빈은 재빨리 길 맞은편을 쳐다보았지만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핸드폰을 열어 성유리에게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그녀의 폰은 여전히 꺼져있는 상태였다. 화가 난 박한빈은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세게 차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차로 올라타 도연제로 향했다. 빠르게 운전을 한 박한빈이기에 그는 성유리보다 먼저 도연제에 도착했다. 그는 무서울 만큼 조용한 별장이 너무 싫어 모든 조명을 다 환하게 켜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성유리가 오기를 기다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때 시간은 이미 12시가 넘은 자정이었으니 박한빈의 생일이라고 해도 되는 시간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생일을 이토록
박한빈은 원래 무표정한 얼굴로 사하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하나의 마지막 말에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반박했다. “내가 집에 안 들어온다고?” “제 말이 틀렸나요? 정말 사람을 바보로 아시나...” 사하나는 점점 더 격분했고 성유리는 빨리 다가가 그녀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사하나는 성유리의 손을 뿌리치더니 계속 말했다. “언니는 상관하지 마세요! 오늘 꼭 제대로 한번 말해봐야겠어요.” 사하나는 고개를 휙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말씀해 보세요. 잘나신 박 대표님. 박 대표님이랑 그 여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업계에 소문이 쫙 났어요. 사람들 입이 얼마나 싼지 설마 모르고 계실 리는 없겠죠?” “아니면 그 소문이 사실이라 반박할 자격이 없는 건가요?” “정말 대단하세요. 유리 언니랑 화해하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이러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언니를 말렸어야 해요. 영원히 절대로 박 대표님을 용서하지 말라고 할 걸 그랬다고요!” 사하나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박한빈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평온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은 마치 그녀에게 사하나와 똑같이 자신을 의심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소파에 앉은 채로 침묵할 뿐이었다. “이건 저희 부부 사이의 일이니 사하나 씨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박한빈은 사하나에게 짧은 대답을 해주고는 바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 아무렇지 않은 박한빈의 태도에 사하나는 더욱 분노가 치밀어 두 사람을 가로막아 서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사하나를 조용히 바라봐줬다. ‘뭐지?’ 사하나는 그녀의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성유리는 사하나를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박한빈은 이곳까지 직접 운전을 하고 왔기에 성유리는 순순히 그의 차에 올라타며 안전벨트까지 맸다. 이런 순한 모습에 박한빈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를 꽉 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사하나 씨가
“난 이미 전에 한번 봤었어.” “저도 봤어요! 근데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걸요?” 사하나는 뭐가 그리 슬픈지 휴지로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고 성유리는 그저 물만 마셔댔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죠?” 사하나는 순간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성유리에게 물었다. “제가 빨리 모셔다 드릴 까요?” “그럴 필요 없어.” 성유리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고 사하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무슨 뜻이에요? 두 분 혹시 싸우셨어요?” 사하나는 문득 어제 자기가 해줬던 말들이 떠올랐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계속 물었다. “아니면... 어제 제가 말한 그 일들에 관해 박 대표님께 물어보신 거예요?” 성유리는 그저 사하나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 대표님께서 정말...” 사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벨이 울렸다. 그녀는 늦은 시간에 들리는 벨 소리에 의아해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아무 말 없는 성유리를 보던 사하나는 그제야 눈치챘는지 다시 말했다. “박한빈 씨 아니에요? 언니가 가서 문 열어주세요.” “나도 모르지.” 성유리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문을 열어주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사하나가 그녀를 다시 앉히며 말했다. “됐어요. 그냥 제가 갈게요. 언니는 앉아계세요.” 사하나는 뚜벅뚜벅 걸어 현관으로 향했고 영화를 보려고 켜놓은 작은 조명 때문에 현관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마침 현관에 있던 등이 인기척을 감지하고 켜졌고 박한빈을 환하게 비췄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박한빈이 문 앞에 나타나자 사하나는 예상했음에도 화들짝 놀랐다. 잠시 멍해 있던 사하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박 대표님,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오셔서 저를 놀라게 하는 거예요?” “성유리 여기 있어?” 박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사하나가 다른 무슨 말을 내뱉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집안으
비록 어젯밤 성유리가 박한빔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이미 온천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내일 시간을 여유롭게 쓰기 위해 오늘 일찍 도연제로 돌아온 그는 그날 밤 먼저 성유리와 함께 가려고 했다. 하지만 별장에 도착했을 때, 평소와 달리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얼마 전 성유리가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박한빈은 집안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시간에만 청소하러 오라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 이 집에는 성유리 혼자뿐이었다. 지금 그녀가 없으니 집 안은 더욱 어두워 보였고 차가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그 분위기에 박한빈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고 이 늦은 시간에 그녀는 어디로 간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차가운 음성 안내만 들려왔다. 그는 한층 더 굳어진 얼굴로 바로 가사도우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성유리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오늘 저희가 왔을 때는 이미 집에 안 계셨어요. 요즘 도자기 수업을 계속 듣고 계셨는데 혹시 거기에 계신 거 아닐까요?” ‘도자기 수업?’ 박한빈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 수업 어디에서 하죠? 주소 좀 주십시오.” 가사도우미에게서 주소를 받은 박한빈은 곧바로 도자기 학원으로 향했고 그곳의 불은 켜져 있었지만 안을 둘러봐도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잔뜩 불안해하며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곧 학원 직원이 다가오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유리 씨 여기 있습니까?” “성유리 씨요?” 직원이 잠시 당황하더니 대답했다.“오늘 수업 예약은 하셨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못 오신다고 하셨어요. 혹시 남편분이신가요?” 박한빈은 직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학원을 나섰다.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발걸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밖으로 나왔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을지 감
성유리의 눈을 마주 보게 된 순간, 최정민은 말을 잇기가 어려워졌다. “최정민 씨?”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 그제야 최정민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고 성유리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최정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박 대표님과 관련된 일로 왔습니다.”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최정민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계속 말했다. “당신들이 이미 결혼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정말 방법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혹시 박 대표님을 저에게 양보해 주실 수 있나요?” 그 말을 마친 최정민은 죄책감 탓인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동공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 물었다. “임신했나요?” “아니에요!” 그 질문에 최정민은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고개를 연신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저희가 만난 지 사실 고작 2주밖에 안 됐어요. 임신일 리가 없잖아요?” 성유리는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저희 정말로 사귀고 있어요. 믿기 힘드시면 제가 사진도 보여드릴게요.” 말을 하며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곧바로 화면에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이 보였다. 단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성유리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최정민을 쳐다보던 성유리가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알고 제가 임신 중이라는 것도 알면서 어떻게 저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나요?” 최정민은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왜냐하면 당신은 진실되지 않는 남편을 곁에 두지 않을 분이니까요.” 그녀는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전에 당신이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도 제가 직접 봤거든요.” “그때 당신과 박 대표님은 아직 화해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