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와 임정우의 만남을 주선했어.”진무혁이 말했다.“하지만 그 여자가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고 그런 말을 할 줄은 더더욱 몰랐어. 유리야, 어쨌든 우린 친구고 나는... 이렇게까지 너를 모해할 처지는 아니야.”성유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녀의 눈은 그의 말의 진의를 헤아리는 듯 천천히 내리깔고 있었다.진무혁은 말을 계속 이었다.“하지만 어쨌든 오늘 밤 일은 내가 소홀했어. 정식으로 사과할게. 앞으로...”“아니에요.”성유리는 그의 말을 끊었다.“우리 앞으로 계속 만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무슨 말이야?”진무혁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들려왔다.“날 못 믿는 거구나?”성유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먼저 올라갈게요. 안녕히 가세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하지만 그녀가 진무혁 곁을 지나갈 때 갑자기 그가 손을 뻗어 손목을 잡았다.“결혼하자.”그가 말했다.이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성유리는 몸을 움찔하더니 서서히 눈길을 그에게로 향했다.그 눈빛이 마치 한 미친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진무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아. 네가 정말... 그렇다면 너도 분명 피해자일 거라고 믿어. 성유리, 너와 친구가 되어서 정말 기뻤어. 오늘 밤 일은 내가 너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더욱 굳게 했어. 그러니까 우리 결혼하자.”...한편, 단예진은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결국 참지 못하고 박한빈에게 물었다.“들어가서 차 한잔하실래요?”“너무 늦었어요. 다음에요.”박한빈의 대답은 직설적이었는데 이전의 어떤 대답과도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매번 다음번이라고 하는데 이 ‘다음’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단예진은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차를 마실 뿐인데 우리...”“아직 할 일이 있어서요.”박한빈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했는데 거절의 뜻이 명확했다.단예진은 자신이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했고 실제 주변에 좋아하는 남자가 부족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예진이 처음 박씨 가문에 방문하는 것이다.그녀는 세심하게 어르신과 박한빈의 어머니에게 선물을 준비했다.두 사람이 단예진의 방문을 매우 환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몇 달 동안 조용했던 이 집은 오늘 마침내 활력을 되찾았다.박한빈은 어머니의 반응이 의외라 생각했다.어쨌든 그는 줄곧 어머니가 성유리를 좋아하고 아버지의 뜻을 매우 존경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오늘에야 그는 모든 것이 그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단순히 성유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전에 그녀는 박한빈에게 성유정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면 다 괜찮다고 한 적이 있다.그래서 그녀가 성유리에게 보였던 미소를 지금은 단예진에게 보여주고 있었다.식사할 때 할머니가 갑자기 어젯밤의 경매회를 언급했다.“누군가 소란을 피웠다면서?”박한빈이 멈칫했지만 단예진이 먼저 할머니를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할머니, 어떻게 아셨어요?”“오늘 업계에 소문이 퍼졌는데 내가 모를 리 없지.”할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성유리는 적어도 성실한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오해이었나 봐...”“어머님.”김서영이 갑자기 말을 끊자 김난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다 우리 박씨 집안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니 그만 하세요.”김서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분명 불쾌하게 들렸다.김난희는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우리 박씨 집안이랑 상관없는 거 알아. 하지만 예진이 앞에서 그냥 한번 말해보는 거야. 예진아, 넌 모를 거야. 우리 박씨 가문도 사실 피해자야. 성씨 가문이 이 일을 너무 잘 숨겨서 우린 전혀 몰랐어. 알면... 우리가 그런 애를 받아들일 수 잆지.”그러자 도예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할머니, 그건 다 지난 일이에요. 그리고 제 생각엔... 성유리 씨도 불쌍해요.”“뭐가 불쌍해? 우리가 한빈이가 불쌍하지. 그런 애에게 속아서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할머니.”박한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가벼운 한마디는 잘 드는 가위인 듯 다른 사람이
박한빈은 전화한 후 서둘러 식당에 돌아가지 않고 정원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박하 냄새가 입안에 퍼지며 그의 마음도 점점 평온해졌다.담배 한 대를 거의 다 피웠을 때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박한빈은 발신자 번호를 힐끗 본 후 바로 꺼버렸다.상대방이 또 전화를 걸어오자 박한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 끝에 결국 전화를 받았다.“박한빈.”진무열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퍼플 프로젝트는 일부러 형에게 양보해서 낙찰받게 했어?”박한빈은 가볍게 그렇다고 대답했다.진무열은 갑자기 웃었다.“박 대표님은 정말 대범하네.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남에게 그저 양보하다니! 형이 성유리 씨와 혼인 신고 올리도록 도와주는 거야?”“말 다 했어? 다 했으면 전화 끊어.”박한빈은 짜증스럽게 말했다.“형이 성유리와 결혼하는 거 알아?”진무열이 불쑥 말했다. 이 말은 마치 박한빈의 언어 시스템을 잘라버린 가위처럼 말문이 막히게 했다. 그는 심지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했다.박한빈이 경악했을 거라고 짐작한 진무열은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넌 아직 모르나 봐? 하긴, 안다면 이렇게 형을 돕지 않았겠지. 그럼 이 상황은 뭐지? 네가 전처를 위해 길을 터주는 셈인가? 그러고 보니 박 대표님은 정말... 대범하네.”빈정거리는 진무열의 말을 들으며 박한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그럴 수 없어.”박한빈의 단호한 말투에 진무열은 웃어버렸다.“그럴 수 없다니? 이건 오늘 밤 형이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한 일이야. 진심으로 성유리 씨를 사랑하고 결혼을 목적으로 교제한다고 했어! 말하자면 형은 너에게 고마워해야 해. 어제저녁 전까지만 해도 성유리 씨가 진씨 가문에 시집오려면 어려움이 많았어. 하지만 형이 퍼플 프로젝트를 따냈으니 시즌 그룹의 일등 공신이 되어 앞으로 누구와 결혼하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어.”“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에 골인하게 되면 박한빈이 제일 큰 조력자야!”진무열은 무슨 말을 더하고 싶었지만 박한빈은 이미 전화를
“이런 사람은 없어. 그럼 왜 너의 사업에 도움이 될 사람을 거절해?”김서영은 여전히 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박한빈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 익숙했다. 만약 이런 김서영이 가르치지 않았다면 오늘의 박한빈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때 김서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한빈이 물었다.“하지만 내가 왜 꼭 결혼해야죠?”이 물음에 김서영은 말문이 막혔다.박한빈은 싱긋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지금은 비록 좋아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나의 혼인으로 이익을 교환하고 싶지 않아요. 때문에... 나와 단예진 씨는 결혼할 수 없고 협력이 끝나면 아무런 관계가 없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난 박한빈이 앞으로 나가려고 하자 김서영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하지만 혼인으로 이익을 교환하는 일은 지난번에도 하지 않았어? 다시 하는 것뿐인데 무슨 상관이야? 아니면 그전에... 상대가 성유리기 때문에 일부러 동의한 거야?”“아니에요.”이 말을 듣고 박한빈은 발걸음이 주춤했으나 대뜸 부인했다. 그러나 김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박한빈을 지켜봤다.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지만 그녀의 비웃는 눈길에 박한빈은 불쾌해서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로 하지 뭐.”김서영이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한빈아, 거짓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건 괜찮은데 자신까지 속여서는 안 돼.”박한빈은 김서영을 잠시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어버렸다.“엄마의 이 말은 자신을 말하는 거예요? 분명히 그 사람이 밖에 사생아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엄마를 사랑한다고 모든 사람을 속였어요. 거짓말이 너무 많아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스스로도 분간할 수 없죠?”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김서영의 표정도 조금씩 어두워졌다. 하지만 박한빈은 그녀를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정원을 떠났다.단예진은 거실에서 김난희와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외로 비위를 잘 맞춰주었는데 김난희는 웃느라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시간이
미화로.박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차를 몰고 이곳에 왔다. 지금 그는 손에 핸들을 잡고 앞에 있는 작은 골목길을 몇 번 쳐다보았지만 결국 차에서 내리지 않고 방향을 바꾸었다.그러나 그는 마침 봉지를 들고 약국에서 나오는 성유리를 보았다.오늘 금성의 기온은 아주 낮았다. 검은색 패딩을 입고 긴 머리를 어깨에 드리운 그녀는 추위에 코끝이 빨갛게 되었는데 부드럽고 얌전해 보였다.박한빈은 그녀를 보자마자 오늘 밤 어머니가 그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확실히 그는 혼인으로 이익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당시 두 가문에서 그와 성유리의 혼인을 말할 때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는데 그는 어머니의 그 말씀에 감명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누구와 결혼해도 차이가 없으니 차라리...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보니 아마... 틀린 것 같았다.‘혹시 내가 성유리를 좋아하는 건가?’박한빈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결국 차에서 내리기로 했다.하지만 이때 진무혁이 그녀의 뒤에서 달려왔는데 두 사람은 무슨 논쟁이 있는 것 같았다. 진무혁이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을 빼앗았지만 성유리가 피하자 그는 이를 악물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이 말을 마치고 성유리는 곧 돌아서 떠났다.진무혁은 그녀를 막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비로소 몸을 돌려 떠났다.이때 그는 마침 길 맞은편에 세워진 박한빈의 차를 보았는데 박한빈은 이미 차창을 내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진무혁은 주춤하다가 곧장 그를 향해 걸어갔다.박한빈은 움직이지 않고 차에 앉아 그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봤다.“박 대표님, 우연이네요. 하지만 박 대표님 신분으로는 이런 곳에 올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죠?”박한빈은 피식 웃었다.“제가 무엇을 하든 당신 승인이 필요해요?”박한빈의 말에 진무혁은 말문이 막혔으나 곧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아니죠. 그저 유리 씨의 기분을 고려해서 영향받을까 봐 걱정되었을 뿐이에요.”“영향?”“
그가 이렇게 말하자 성유리 비로소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눈도 조금 붉어졌는데 아무리 보아도 멀쩡한 것 같지는 않았다.“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말해.”성유리가 말했다.진무열은 문 옆에 서서 한참 동안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말했다.“왜 내 약혼식에 안 왔어?”지난번 일 이후 성유리와 그는 연락이 없는데 지금 진무열이 불쑥 자신에게 묻자 성유리도 조금 의외였다.하지만 이내 냉정함을 되찾고 대답했다.“참석할 필요가 없었어.”“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친구 아니야?”친구라는 두 글자를 진무열의 말은 더없이 어렵게 했다.성유리는 잠시 그를 바라본 뒤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너와 성유정이 손을 잡고 나를 모함했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친구가 아니었어.”“그래서 진무혁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복수하는 거야? 그래?”진무열의 표정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지금도 그 자식과 결혼할 생각이야?”“내가 무혁 오빠와 결혼한다고 누가 그래?”“아니야? 진무혁이 오늘 밤 진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인정했다. 그리고 방금 아래층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 나누는 걸 직접 봤어.”진무열의 말을 듣던 그녀는 어이없어 피식 웃어버렸다.“유리야,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 알아. 저번에 내가 그렇게 한 건... 같이 죽자는 마음이었어.”“그런데 왜 하필이면 진무혁이야? 내가 진무혁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뻔히 알잖아. 이 세상에서 누구와 함께 있고 누구와 결혼하고 싶어도 괜찮지만 그 사람만은 안돼. 어릴 때부터 진무혁은 진씨 가문의 잘나가는 도련님이고, 나는 영원히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 없었어. 먹고 쓰는 모든 것은 진무혁이 원하지 않는 물건들만 나에게 주어졌어.”“너도 알잖아...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됐을까?”“하지만 유리야. 넌 결국 날 배신했어. 왜 그랬어?”진무열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몸도 성유리 쪽으로 다가갔다.성유리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진무열의 손은 이내 문에 닿았다.
진무열이 말을 할 때 입김이 전부 성유리의 뺨에 뿌려졌다.그 느낌에 성유리는 갑자기 자신이 지석민의 집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구역질이 순간적으로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천천히 이를 악물고 앞에 있는 사람을 주시한 채 말했다.“진무열, 오늘 감히 나한테 허튼짓을 하면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야...”“신고해.”진무열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네가 지금 업계에서의 소문이 있는데 네가 하는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 거로 생각해? 그때가 되면 다들 네가 날 꼬셨다고 생각할 거야?”진무열의 얼굴에 간사한 웃음이 떠올랐는데 그 모습 역시 성유리에게 익숙했다.하지만 이때 그녀는 익숙한 얼굴이 마치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는 독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그녀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을 벌렸으나 말은 결국 창백하게 변했다.진무열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웃음을 더하더니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유리야, 가자.”그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성유리의 입술에 키스했다.“오늘 밤이 지난 후 함께 이곳을 떠나 아무도 우리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하는 게 어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은 조용히 자신의 뒤 서랍을 열었다.진무열의 키스가 떨어지려던 참에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문을 발길질에 열렸다.요란한 인기척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박한빈이 문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그의 각도에서 바라본 진무열의 손은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성유리의 한 손은 진무열의 어깨에 닿아 있었지만 얼굴에는 몸부림치는 기색이 전혀 없는 듯 보여 마치 자신의 난입으로 그들의 못다 한 키스를 방해한 듯 보였다.하지만 곧 박한빈은 뒤에 숨어 있는 성유리의 손을 보았는데 그녀는 가위를 쥐고 있다.박한빈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곧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진무열을 걷어차 땅에 쓰러뜨렸다.진무열은 아직 박한빈의 출현에 충격을 받은
바로 그의 이런 냉정함 때문에 성유리는 그가 더 무서웠다. 성유리는 이런 박한빈을 처음 봤다.일반적으로 사람은 화가 났기 때문에 싸우지만 박한빈은 전혀 달랐다.성유리는 오히려 박한빈이 냉철해 보였는데 심지어 아까 진무열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처럼 죽든 살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이때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한빈은 그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성유리를 힐끗 본 다음 직접 휴대전화를 꺼냈다.경찰에 신고하려는 박한빈을 보고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달려들어 그의 손을 눌렀다.“안돼요...”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눈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먼저 병원에 보내요.”마침내 성유리는 목소리를 되찾았지만 박한빈은 대답도 움직이지도 않았다.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성유리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더듬어 꺼내 전화하려고 했는데 손을 뻗고서야 그녀는 손에 가위를 든 채 휴대전화는 어디로 내팽개쳤는지 알 수도 없다는 걸 발견했다.성유리가 휴대전화를 찾으려고 돌아설 때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뭘 그렇게 두려워해?”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는데 성유리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거야?”박한빈이 계속해서 물었다.이 말을 들은 성유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봤다.“걱정하지 마. 죽지 않아!”박한빈이 평온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성유리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고 박한빈을 바라봤다. 박한빈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고 그저 비서에게 전화해 와서 처리하게 했다.“가자.”전화가 끊긴 후 그는 직접 성유리의 손을 잡아당겼는데 이에 그녀는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간다고요? 어디로... 가요?”“아직도 여기에 있고 싶어?”박한빈이 당연한 듯 물어보자 성유리는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박한빈은 아주 결단력이 있게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틈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에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채 정리할 틈도 없이 성유리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죽었다는 그 사람이 혹시 최정민 씨야?” ... 연정우가 말한 죽은 자는 정말로 최정민이었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21층 발코니에서 추락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죽었을 당시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바로최정민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집 안에는 그녀외에 오직 박한빈만 있었다. 늦은 시각, 다 큰 성인인 남녀 단둘만 남겨진 상황.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온갖 추측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박한빈의 신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각종 소문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최정민과 박한빈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는 최근 그들 사이에서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그녀가 옷차림이 흐트러진 채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지나치게 방탕한 놀이를 하다 사고로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그런 상태로 죽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원래 재벌가의 이야기는 연예계의 가십보다 더 자극적이다. 그렇기에 대중의 관심은 더욱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성유리에게 연락을 시도해 이번 사건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박한빈이 성유리의 결혼식에서 그녀 대신 칼을 맞아준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때 그의 행동에 충격받는 한편 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모두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진 일은 이 모든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박한빈과 최정민의 관계에 대해 그녀가 남들보다 더 아는 것도 없었으니 최정민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다친 성유리를 실은 구급차는 얼마 안 지나 바로 병원에 도착했다.성유리의 얼굴에 흐르던 피는 이미 멈췄지만 의사는 봉합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마취주사 때문에 얼굴에 감각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성유리는 의사가 자신의 피부를 바늘과 실로 꿰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봉합 수술이라 성유리의 치료는 응급실 안에서 진행되었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응급실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성유리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봉합을 끝마칠 때까지도 박한빈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 반면 연정우는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유리가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연정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진 않아?” 성유리는 묻는 연정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 집에 데려다줄게.” 연정우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가던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우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정우는 내색하지 않았고 이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왜 그래?” “유효정 씨 일은 처리 안 해도 돼?” 침묵하던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지금쯤 경찰 손에 잡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너는...”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연정우는 화를 억누르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성유리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효정 씨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연정우는 빠르게 표정을 바꾸며 다시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이번에 유효정이 건드린 사람이 너니까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근데 박한빈 씨는 오늘 밤 왜 안 왔을까?” 그의 말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왜 안 왔는지는 모르겠어. 근데 이제 보니 유효정 씨가 대체 왜 그렇
“제가 얼마나 배려심이 많은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유리 씨도 저 좀 배려해 주세요. 움직이려고 애쓰지 마시고요. 알아들으셨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실수로 당신의 배에 떨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저도 되게 민망해질 텐데?” 유효정은 말하면서 손에 점점 더 세게 힘을 주었고 성유리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한 고통을 견뎠다. 그녀의 칼이 그어지는 곳에서는 빨간 피가 쏟아져 내렸고 방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추웠다. 이 상황에 성유리는 문득 박한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유리는 혹시 자기가 먼저 떠나버려 박한빈이 기분이 나빠졌는지, 아니면 지금 다른 곳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찾고 있는지 몰랐다. 둘 다 아니면 최정민의 전화를 받느라 성유리의 실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유리는 감히 다른 경우들을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씁쓸해졌기 때문에. 통증은 점점 더 뚜렷해졌지만 그녀는 몸부림치지도 못했다. 유효정의 말대로 아직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심기를 다시 건드려 한 번 더 화를 낸다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성유리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성유리 얼굴의 살이 점점 벗겨지자 유효정은 피를 본 상어처럼 눈이 번쩍이고 눈빛에는 광기가 서렸다. 그러더니 유효정의 손에 힘이 더 더해졌다. 성유리가 자신의 목에 곧 칼날이 꽂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유효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칼을 쥐고 있던 손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그쪽에 있던 사람들이 벌써 달려들어 그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순간, 유효정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땅에 툭 떨어졌다. 원래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고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많은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비추는 환한 불빛에 성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박한빈의 차에서 내려 길을 건넜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세게 때린 것 같았다.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보기도 전에, 그 사람은 이미 그녀의 입과 코를 가려버렸고 그 직후 그녀는 모든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성유리는 이상한 방에 누워 있었다.그녀의 손과 발은 묶여 있었고 방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났으며 달빛이 조금 비추는 창문을 제외하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성유리는 누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상대방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집 안에서 자신이 묶여있는 밧줄을 끊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깜짝 놀란 성유리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사람을 보자 성유리의 동공은 심하게 떨렸고 그와 동시에 살짝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에요?” “많이 놀란 것 같네요?” 유효정은 성유리의 모습을 비웃으며 깔깔 웃었다. “유효정 씨, 당신의 신분으로 왜 굳이 이런 일을 하시는 거죠?” “굳이라고요? 굳이?” 유효정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대답했다. “이런 당신의 모습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요. 너무 힘들고 마음이 불편하게 사는 저와 성유리 씨를 비교해보면 자꾸만 질투가 나서요.” 유효정은 말을 하는 동안 시선이 조금씩 내려가더니 성유리의 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신 몇 개월 되셨죠?” 성유리는 그녀가 갑자기 이런 물음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었고 몸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웅크렸다. 이 어설픈 성유리의 행동에 유효정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러면 제 마음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유효정은 손을 뻗어 성유리의 배를 쿡쿡 찔러보았다. 그녀의 힘은 별로 세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충격에 휩싸였고 눈으로는 유효정
박한빈은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번엔 전화를 바로 끊어버리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 모습에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더니 말했다. “됐어요. 그냥 저 혼자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릴 채비를 했다. 이때,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어디 가려고?” “바쁘신 것 같아서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려고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택시를 어떻게 혼자 타!” “길 가다 보면 널리고 널린 게 택신데 제가 왜 못 타죠?” “빨리 앉아. 나 곧...” 박한빈의 뭐라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 번째 전화가 걸려 왔고 성유리는 그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봐요. 많이 바빠 보이시니까 저 그냥 혼자 갈게요. 방해되지 않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는 다시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성유리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차에서 내려서는 바로 길 맞은편으로 향했다. 박한빈은 그녀를 따라가려고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려고 했지만 마침 신호등 불빛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 해도 금성 도로엔 쌩쌩 달리는 차가 꽤 많았다. 그래서 박한빈은 아예 차를 몰고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빨간 불이 다시 초록 불로 바뀌는 순간, 박한빈은 재빨리 길 맞은편을 쳐다보았지만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핸드폰을 열어 성유리에게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그녀의 폰은 여전히 꺼져있는 상태였다. 화가 난 박한빈은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세게 차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차로 올라타 도연제로 향했다. 빠르게 운전을 한 박한빈이기에 그는 성유리보다 먼저 도연제에 도착했다. 그는 무서울 만큼 조용한 별장이 너무 싫어 모든 조명을 다 환하게 켜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성유리가 오기를 기다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때 시간은 이미 12시가 넘은 자정이었으니 박한빈의 생일이라고 해도 되는 시간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생일을 이토록
박한빈은 원래 무표정한 얼굴로 사하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하나의 마지막 말에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반박했다. “내가 집에 안 들어온다고?” “제 말이 틀렸나요? 정말 사람을 바보로 아시나...” 사하나는 점점 더 격분했고 성유리는 빨리 다가가 그녀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사하나는 성유리의 손을 뿌리치더니 계속 말했다. “언니는 상관하지 마세요! 오늘 꼭 제대로 한번 말해봐야겠어요.” 사하나는 고개를 휙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말씀해 보세요. 잘나신 박 대표님. 박 대표님이랑 그 여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업계에 소문이 쫙 났어요. 사람들 입이 얼마나 싼지 설마 모르고 계실 리는 없겠죠?” “아니면 그 소문이 사실이라 반박할 자격이 없는 건가요?” “정말 대단하세요. 유리 언니랑 화해하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이러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언니를 말렸어야 해요. 영원히 절대로 박 대표님을 용서하지 말라고 할 걸 그랬다고요!” 사하나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박한빈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평온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은 마치 그녀에게 사하나와 똑같이 자신을 의심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소파에 앉은 채로 침묵할 뿐이었다. “이건 저희 부부 사이의 일이니 사하나 씨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박한빈은 사하나에게 짧은 대답을 해주고는 바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 아무렇지 않은 박한빈의 태도에 사하나는 더욱 분노가 치밀어 두 사람을 가로막아 서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사하나를 조용히 바라봐줬다. ‘뭐지?’ 사하나는 그녀의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성유리는 사하나를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박한빈은 이곳까지 직접 운전을 하고 왔기에 성유리는 순순히 그의 차에 올라타며 안전벨트까지 맸다. 이런 순한 모습에 박한빈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를 꽉 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사하나 씨가
“난 이미 전에 한번 봤었어.” “저도 봤어요! 근데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걸요?” 사하나는 뭐가 그리 슬픈지 휴지로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고 성유리는 그저 물만 마셔댔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죠?” 사하나는 순간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성유리에게 물었다. “제가 빨리 모셔다 드릴 까요?” “그럴 필요 없어.” 성유리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고 사하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무슨 뜻이에요? 두 분 혹시 싸우셨어요?” 사하나는 문득 어제 자기가 해줬던 말들이 떠올랐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계속 물었다. “아니면... 어제 제가 말한 그 일들에 관해 박 대표님께 물어보신 거예요?” 성유리는 그저 사하나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 대표님께서 정말...” 사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벨이 울렸다. 그녀는 늦은 시간에 들리는 벨 소리에 의아해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아무 말 없는 성유리를 보던 사하나는 그제야 눈치챘는지 다시 말했다. “박한빈 씨 아니에요? 언니가 가서 문 열어주세요.” “나도 모르지.” 성유리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문을 열어주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사하나가 그녀를 다시 앉히며 말했다. “됐어요. 그냥 제가 갈게요. 언니는 앉아계세요.” 사하나는 뚜벅뚜벅 걸어 현관으로 향했고 영화를 보려고 켜놓은 작은 조명 때문에 현관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마침 현관에 있던 등이 인기척을 감지하고 켜졌고 박한빈을 환하게 비췄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박한빈이 문 앞에 나타나자 사하나는 예상했음에도 화들짝 놀랐다. 잠시 멍해 있던 사하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박 대표님,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오셔서 저를 놀라게 하는 거예요?” “성유리 여기 있어?” 박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사하나가 다른 무슨 말을 내뱉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집안으
비록 어젯밤 성유리가 박한빔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이미 온천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내일 시간을 여유롭게 쓰기 위해 오늘 일찍 도연제로 돌아온 그는 그날 밤 먼저 성유리와 함께 가려고 했다. 하지만 별장에 도착했을 때, 평소와 달리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얼마 전 성유리가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박한빈은 집안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시간에만 청소하러 오라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 이 집에는 성유리 혼자뿐이었다. 지금 그녀가 없으니 집 안은 더욱 어두워 보였고 차가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그 분위기에 박한빈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고 이 늦은 시간에 그녀는 어디로 간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차가운 음성 안내만 들려왔다. 그는 한층 더 굳어진 얼굴로 바로 가사도우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성유리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오늘 저희가 왔을 때는 이미 집에 안 계셨어요. 요즘 도자기 수업을 계속 듣고 계셨는데 혹시 거기에 계신 거 아닐까요?” ‘도자기 수업?’ 박한빈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 수업 어디에서 하죠? 주소 좀 주십시오.” 가사도우미에게서 주소를 받은 박한빈은 곧바로 도자기 학원으로 향했고 그곳의 불은 켜져 있었지만 안을 둘러봐도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잔뜩 불안해하며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곧 학원 직원이 다가오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유리 씨 여기 있습니까?” “성유리 씨요?” 직원이 잠시 당황하더니 대답했다.“오늘 수업 예약은 하셨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못 오신다고 하셨어요. 혹시 남편분이신가요?” 박한빈은 직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학원을 나섰다.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발걸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밖으로 나왔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을지 감
성유리의 눈을 마주 보게 된 순간, 최정민은 말을 잇기가 어려워졌다. “최정민 씨?”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 그제야 최정민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고 성유리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최정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박 대표님과 관련된 일로 왔습니다.”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최정민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계속 말했다. “당신들이 이미 결혼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정말 방법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혹시 박 대표님을 저에게 양보해 주실 수 있나요?” 그 말을 마친 최정민은 죄책감 탓인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동공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 물었다. “임신했나요?” “아니에요!” 그 질문에 최정민은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고개를 연신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저희가 만난 지 사실 고작 2주밖에 안 됐어요. 임신일 리가 없잖아요?” 성유리는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저희 정말로 사귀고 있어요. 믿기 힘드시면 제가 사진도 보여드릴게요.” 말을 하며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곧바로 화면에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이 보였다. 단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성유리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최정민을 쳐다보던 성유리가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알고 제가 임신 중이라는 것도 알면서 어떻게 저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나요?” 최정민은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왜냐하면 당신은 진실되지 않는 남편을 곁에 두지 않을 분이니까요.” 그녀는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전에 당신이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도 제가 직접 봤거든요.” “그때 당신과 박 대표님은 아직 화해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