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의 이런 냉정함 때문에 성유리는 그가 더 무서웠다. 성유리는 이런 박한빈을 처음 봤다.일반적으로 사람은 화가 났기 때문에 싸우지만 박한빈은 전혀 달랐다.성유리는 오히려 박한빈이 냉철해 보였는데 심지어 아까 진무열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처럼 죽든 살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이때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한빈은 그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성유리를 힐끗 본 다음 직접 휴대전화를 꺼냈다.경찰에 신고하려는 박한빈을 보고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달려들어 그의 손을 눌렀다.“안돼요...”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눈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먼저 병원에 보내요.”마침내 성유리는 목소리를 되찾았지만 박한빈은 대답도 움직이지도 않았다.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성유리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더듬어 꺼내 전화하려고 했는데 손을 뻗고서야 그녀는 손에 가위를 든 채 휴대전화는 어디로 내팽개쳤는지 알 수도 없다는 걸 발견했다.성유리가 휴대전화를 찾으려고 돌아설 때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뭘 그렇게 두려워해?”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는데 성유리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거야?”박한빈이 계속해서 물었다.이 말을 들은 성유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봤다.“걱정하지 마. 죽지 않아!”박한빈이 평온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성유리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고 박한빈을 바라봤다. 박한빈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고 그저 비서에게 전화해 와서 처리하게 했다.“가자.”전화가 끊긴 후 그는 직접 성유리의 손을 잡아당겼는데 이에 그녀는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간다고요? 어디로... 가요?”“아직도 여기에 있고 싶어?”박한빈이 당연한 듯 물어보자 성유리는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박한빈은 아주 결단력이 있게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틈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철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성유리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의 동작은 마치 성유리가 그의 뜻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면 당장 부숴버릴 것만 같은 착각을 주었다.“만나기 싫은 게 아니에요.”성유리가 대답하자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저... 만날 필요가 없었어요.”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우리는...”“그럼 전에 왜 나와 결혼했어?”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성유리는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곧 침착해졌다.“이건 우리 두 집안에서 약정한 일이에요...”“그저 이것 때문이야?”“아니면 또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은 조금씩 느슨해졌다.성유리는 이 화제가 끝난 줄 알았지만 곧 그는 천천히 계속해서 물었다.“성유리, 당신이 성씨 가문과 관계를 끊는 성격과 태도로 보아 그들에게 휘둘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만약 정말 이 원인이라면 넌 몇 달 전에 조씨네 아들과 결혼했을 거야.”박한빈은 말하면서 성유리를 쳐다봤는데 그 눈빛에 성유리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그러나 그녀는 곧 눈길을 피했다.“저는... 그저 후에 그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아, 그래?”“아니면요? 다른 이유라도 있겠어요?”“당신이 나를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어.”박한빈의 말은 마치 주먹처럼 성유리의 심장을 때렸다. 심한 떨림과 통증이 있고 난 뒤 근육이 움츠러들면서 성유리는 호흡마저 빨라지기 시작했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박한빈의 장난스러운 눈빛과 마주했는데 성유리는 자신이 광대 같아 보였다.벌거벗은 채로 무대에 올랐으나 조심스럽게 몸을 가리며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려 했지만 나중에 옷감이 벗겨지면서 불빛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광대가 되어버렸다.성유리의 손이 조금씩 조여졌다.“왜 이렇게 말해요?”한참 만에 목소리를 찾은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냥
박한빈이 성유리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끊어버리는 바람에 성유리는 더 말할 흥취도 없어졌다. 성유리는 서서히 입을 꾹 닫아버렸고 화가 난 듯 박한빈을 째려보았다. “왜냐하면 나도 이젠 알았어.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박한빈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랑 결혼했을 때 별로 많이 불편하지 않았어.” “나한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줄래?” 성유리는 지금 눈앞에 놓인 모든 것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마치 절벽에 서 있는 듯 아찔한 기분이 들었고 조금만 발을 헛딛어도 바로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뼈가 다 으스러지는 고통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구름 위에 누워있는 듯 포근하고 기분 좋은 냄새도 났다. 서서히 눈을 뜬 성유리는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도, 절벽도 그리고 구름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방 구조는 성유리에게 아주 익숙했다. 그곳은 바로 시월파크였다. ‘그럼 어제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건가?’ 성유리가 멍하니 서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두 개의 기사를 보내준 것이다. 첫 번째 기사는 진무열에 관한 기사였는데 그가 어젯밤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골절만 했을 뿐 생명에는 위협이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지화그룹과 단풍 그룹에 관한 기사였다. 두 가문에서 함께 하던 일은 이미 순조롭게 끝이 났다는 사실과 뉴스 발표회에 기자가 박한빈에게 그와 단예진의 사이를 물었던 일이 적혀있었다. 박한빈은 단예진과 그저 친구 사이라고 대답하는 동시에 두 가문의 인연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으니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도 좋다는 대답을 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단예진과 났던 많은 추문들이 하루아침에 농담거리가 돼버렸다. 성유리는 아주 자세하게 두 개의 기사를 다 읽었지만 박한빈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사실 성유리는 아직 신분의 변화에 익숙해지지 않아 박한빈이 자신을 대하
“그게...” 성유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말을 끊어버리며 다시 물었다. “아직 안에 있어? 나 이미 도착했는데.” 그의 말에 성유리는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들자 마침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고 김서영 또한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성유리와 김서영이 눈이 마주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아주 냉정해졌다. “왜 오신 거예요?” “밥 먹으러.” 박한빈의 대답은 짧고도 명료했다. “지금 이미 엘리베이터 안이에요. 주차장에서 기다려주세요.” 성유리는 말하며 1층 버튼을 눌렀다. 김서영은 그때까지도 가만히 성유리의 앞에 서 있었다. 1층에 도착한 순간, 성유리가 내리려 하자 김서영이 발 빠르게 먼저 내렸다. 옆에 있던 남자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는지 멍해 있다가 별다른 말 없이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김서영을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바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차를 보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먹고 싶은 음식 있어?” 박한빈은 오늘 운전기사도 없이 혼자 운전해서 이곳에 왔다. 운전대에 올려놓은 박한빈의 팔은 핏줄도 선명해 관능적으로 보이기 그지없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팔을 조금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무거나 다 돼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성유리가 안전벨트를 다 메고 나서야 시동을 걸었다. 박한빈의 차가 시월 파크를 빠져나갈 때, 성유리는 길가에 서 있는 김서영과 남자를 발견했다. 운전을 하던 박한빈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성유리의 시선을 따라 그곳을 쳐다보려 했다. 그러자 성유리는 빠르게 박한빈의 손을 잡으며 그의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하마터면 옆에 주차된 차에 부딪힐 뻔했다. 다행히 가까스로 사고를 막아낸 박한빈은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봤지
하지만 박한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유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표현도 안 했다. 설령 박한빈이 슬쩍 감정표현을 했다 하더라도 성유리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유리는 지금 제대로 된 답을 알고 싶어졌다. 옆에 앉아서 묻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던 박한빈이 되물었다. “성유리 네 생각엔 내가 왜 이러는 거 같은데?” 성유리는 박한빈의 애매모호한 말에 입술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 “말해주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그녀는 여전히 박한빈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녀가 저항할수록 더욱 꽉 잡았다. “너 점점 더 짜증이 많아지는 것 같다?”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박 대표님, 제 성격은 항상 이랬어요.” 반면 성유리는 그의 말에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알다시피 저는 유정이나 단예진 씨처럼 그렇게 다정한 스타일이 아니라 서요.” 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뜨끔했는지 당황하더니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빠르게 운전대를 돌려 길가에 차를 세웠고 성유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를 덮쳤다. “박 대표님? 보아하니 너도 질투가 많은 사람인가 보네?” “아니거든요.” 성유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정했다. “내가 보내준 기사 안 봤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턱을 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나랑 단예진 씨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리고 성유정이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성유리는 이빨을 꽉 깨문 채로 박한빈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유정이한테 늘 다정다감하게 잘 대해주셨잖아요.” 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조금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여 성유리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대답했다. “앞으론 안 그럴게.” “앞으로라고요? 무슨 뜻이에요?” 성유리가 물었다. “네 생각에는 무슨 뜻인 거 같아?” 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을 이어갔다. “유리야, 나는 너랑 숨바꼭질할 시간이 없어.” “지금
김서영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는 성유리는 미화로에서 지낸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시간 있니? 우리 한번 만날까?” 김서영이 물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만남 제안을 자신은 절대 거절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성유리는 지금까지 김서영의 모든 요청과 제안에 거절한 적이 없었다. 김서영은 만남 장소를 어느 한 찻집으로 정했다. 성유리가 찻집에 도착했을 때, 김서영은 이미 조용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하얀색의 긴 치마를 입고 머리카락은 아주 정갈하게 빚은 모습이었는데 세월을 비껴갔는지 아름답고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차 한 잔을 건네주며 말을 꺼냈다. “마셔봐, 올해 새로 나온 룽징 차란다. 네가 좋아했던 게 생각이 나서 시켰어.” “감사합니다.” 성유리는 짧은 인사를 한 뒤, 차를 한 모금 마시려 했다. “너랑 한빈이 언제부터 다시 만난 거야?” 순간 김서영이 물었다. 성유리는 그녀의 물음에 잔뜩 당황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전부터 조금 느끼긴 했어.” 그에 반면 김서영은 평온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전에 둘이 크게 싸웠었니? 한빈이 얼굴에 남은 그 자국으로 회사 사람들이 꽤나 오랫동안 토론했단다.” 성유리는 진즉에 이 일을 잊어버렸지만 김서영의 말에 얼굴이 빨개졌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봤다. “처음엔 요즘 한빈이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가 했는데 다시 생각 해보니 너밖에 없더라. 한빈이가 안 작가님 그림을 사는 거 있지? 그 그림 너한테 사준 거니?” ‘그림?’ 성유리는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했다. 하지만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성유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그 그림 보지도 못했어요.” “그럼 아직 너한테 줄 시기를 못 찾았나 보구나.” 김서영은 완전히 확실하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난 알아. 무조건 유리 너한테 줄 거야.”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너 안 작가님 그림 좋아하지 않았
“유리 네 양아버지 일 말이니? 나도 들었다.” 김서영의 태도는 여전히 느긋하고 담담했다. “비록 밖에 나가보면 별의별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너를 알고 지낸 시간도 오래됐잖니. 네가 어떤 사람인지도 내가 모를까 봐?” 김서영의 담담한 말에 성유리는 무슨 뜨거운 물건 하나가 자기 심장에 천천히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유리는 두 손을 꽉 쥐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님, 고마워요.” “응. 너랑 한빈이 일은 얘기가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내 얘기를 좀 해볼게.” 김서영은 한껏 더 다정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고마웠어.” “저... 아니에요.” 성유리의 긴장한 모습에 김서영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왜? 놀랐니?” “그건 아닌데요. 그냥 조금 의외라서요.” “뭐가 의왼데? 한빈이 어머니라는 신분에 익숙해져서 나도 보통 여자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성유리가 김서영에게 먼저 물었다. “박한빈 씨도 아세요?” “걔는 알 필요 없어.” 김서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건 내 사적인 일이라서. 그리고 난 아직 박씨 가문을 떠날 생각이 없어.” 그녀의 대답을 들은 성유리는 김서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직 박씨 가문에 몸을 담그고 있는 김서영이니 다음 후계자는 당연하게도 박한빈 뿐이었다. 만약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박씨 가문의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시는 것은 물론 손에 꽤 많은 지분을 쥐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알면 어떡하지?’ “혹시 박한빈 씨한테 정말 다른 형제가 있는 거예요?” 성유리는 말을 빙빙 돌려서 김서영에게 물었다. “알고 싶니?” 김서영은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 “성유정 씨.”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성유정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어느새 단예진이 성유정의 앞에 다가왔고 성유정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단예진 씨. 요즘 너무 바쁘셔서 얼굴도 못 보는 줄
“언니.” 청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발걸음을 재촉하던 성유리는 천천히 멈춰 섰다. 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빠르게 달려와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언니, 왜 내 말 못 들은 척해요?” “지금 여기 살아요? 왜요? 힘들지 않아요? 만약...” “손 놔.” 성유리는 성유정을 말을 여전히 무시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성유정은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언니, 언니가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죠.” “집안 상황이 지금 어떤지 알기나 해요? 언니 때문에 엄마가 쓰러지셨어요. 게다가 회사 상황도 지금 말이 아니고. 이게 다...” “네가 그렇게 만든 거잖아.” 성유리는 성유정의 말을 채 들어주지도 않았다. “저...” 뭐라 변명하려던 성유정은 입을 꾹 닫았고 성유리는 담담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 둘이 차에서 나눈 대화 기억해? 네가 말한 그 모든 것들 다 몰래 녹음해 뒀어.” “뭐라고요?” 그녀의 말에 성유정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비록 그 사람들이 내 생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들이 수년간 보물처럼 키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알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성유정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갔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뻥긋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성유정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관심이 없어 짜증을 내며 물었다. “아직도 그 손 안 놓을 거야?” “언니, 지금 나 속이는 거죠?” 성유정은 이내 정신을 차렸고 또박또박 성유리에게 따지며 물었다. “만약 녹음했으면 진즉에 내놨겠죠. 아직도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없는 거 아닌가요?” “내가 그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았을 뿐이야. 나는 네가 가진 더러운 것들을 뺏을 생각이 전혀 없거든.” “나를 꽉 물고 놓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봐주지는 않을 거니까 명심하고.” 성유리의 경고와도 같은 말에
꿈속에서 박한빈은 성유리가 연정우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으려고 다급히 뛰어갔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망치고 성유리를 다시 자기 곁에 세우고 싶어 그녀의 손에 거의 닿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부시게 비추는 햇살 때문인지 박한빈은 눈물이 맺혔고 정신을 다잡고는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안으려 했다. 하지만 옆에 있는 것은 오직 베개 하나뿐이었다. 큰 방에 홀로 남겨진 박한빈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빠른 속도로 아래층에 내려간 박한빈은 얼른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전화를 꽤 빨리 받았다. “어디야?” 박한빈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내, 문 벨 소리가 성유리의 대답 대신 들렸다. 성유리도 벨 소리를 들었는지 박한빈과의 통화를 끊어버리고는 입구 앞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른 곳이 아닌 뒤에 있는 정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를 본 박한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 손에 들려있는 약 봉투를 발견했다. 머릿속에는 약 봉투 안에 뭐가 담겼는지 떠올랐지만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성유리는 약을 개봉하더니 물과 함께 꿀꺽 삼키더니 박한빈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왜 저를 찾은 거죠?”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없이 상위에 놓인 약상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예상은 딱 맞아떨어졌고 박한빈은 꽉 쥐었던 주먹에 서서히 힘을 풀었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보며 되물었다. “배 안 고파? 나가서 밥 먹을까?” “저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돼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이미 그녀가 외출복 차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허리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성유리는 유난히 더 아름다웠다. 안 하던 화장까지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묶어 목선이 드러난 성유리를 말없이 쳐다보던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랑 한 약속인데?” “...” 아무 대답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건지도 기억을 못 했다. 몇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진 성유리는 비몽사몽인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의 몸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 서서히 눈을 뜬 성유리는 자기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깨어난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바로 성유리의 종아리를 잡더니 힘껏 그녀를 깔았다. 성유리는 화가 나 손을 뻗어 박한빈의 얼굴이라도 할퀴고 싶었지만 그는 어느새 그녀의 두 손을 다 잡아 자신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박한빈의 힘을 당할 수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는 순순히 따르는 그녀에 더 흥분했다. 가만히 있는 자신을 잡고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며 사랑을 나누고 있던 박한빈이 방심하는 틈을 타 성유리는 그의 배를 강하게 차버렸다. “저 숨 좀 쉬게 놔두면 안 돼요?” 진심이 담긴 자신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그가 정말 정신병자라고 생각했다. 성유리는 옆으로 돌아 박한빈을 애써 무시하며 자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저항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안던 박한빈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할게.” “근데 네가 이렇게 계속 움직이면 난 안 한다는 보장은 못 해.” 박한빈의 말이 성유리에게 먹혔는지 그녀는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시간이 오래 흐르도록 잠에 들지 못한 박한빈은 지금 자기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사람은 아주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어나면 또 나를 그런 눈으로 보겠지.’ 박한빈이 아무리 애를 쓰며 관심을 받고 싶어 해도 성유리는 눈길 한번 돌려주지 않았고 분노와 원망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또 좋아지겠지.’ 박한빈의 강압 아래 다시 혼인을 한 두 사람이니 그는 성유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고 품에 있는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 성유리는 잠에 들었지만 매우 불편한지 미간을 찌푸렸고 박한빈은 서서히 힘을 풀었다. 박한빈은 잠이 든 성유리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성유리는 물이 마시고 싶은 것도 꾹 참고 뒤척거리며 잠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목이 너무 말라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혼자만의 싸움을 벌이던 성유리는 결국 아래 주방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기를 선택했다. 조명이 다 꺼진 집은 어두컴컴했고 성유리는 복도 등만 켠 채로 주방에서 물을 따랐다. 물컵에 물이 가득 채워지는 순간, 성유리의 뒤에서 누군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한 잔만 따라줘.”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성유리는 컵을 떨어뜨렸고 놀란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 보호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그의 손을 뿌리쳤고 박한빈은 멋쩍은 듯 주방으로 걸어가더니 다시 물을 따라 성유리에게 먼저 건넸다. 성유리는 그가 내민 물컵을 무시하고는 다시 혼자 따랐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쳐다만 보다가 표정이 굳어갔다. 갈증을 해소한 성유리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자려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확 낚아채듯 잡았다.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른 쪽 손까지 잡더니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강한 박한빈의 힘에 못 이겨 벽에 딱 붙은 채로 화를 내며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뭐 하려는 것 같은데?” 박한빈은 씩 웃으며 되물었다. “유리야, 오늘 우리 신혼 첫날밤인데?” ‘첫날밤?’ 성유리가 생각에 잠기는 찰나,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온 박한빈의 입에서는 아직 강한 술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는 마치 맹렬한 짐승처럼 성유리의 입술을 탐했다. 성유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더욱 강하게,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 그녀의 두 손은 여전히 박한빈에 의해 꽉 잡혀있었기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잠옷 안으로 천천히 손을 넣었다. 성유리가 입고 있던 잠옷은 박한빈이 방 안에 준비해 둔 실크 잠옷이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다 잠근 성유리
늦은 밤, 도연제. 박한빈은 꽤 늦은 시각이었지만 돌아오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그를 상관하지 않고 혼자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얼굴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을 계단으로 비비자 점점 옅게 변했다. 성유리는 원래 박한빈이 집에 돌아와 자신의 얼굴을 보면 뭐라 할 것 같아 내심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성유리는 오늘 박한빈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진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았다. 똑같은 넓은 집에 똑같이 홀로 남아 남편을 기다리는 것 말이다. 그러나 성유리가 지금 누운 곳은 작은 방이 아닌 큰방이었다. 아마 이런 큰 변화 때문일까, 성유리는 누운 지 한참이 지났지만 잠에 들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차라리 작은 방에 누워있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작은 방은 성유리가 익숙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곳은 익숙한 냄새였지만 성유리와 박한빈에 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고 전과는 사뭇 달랐다. 익숙하고도 낯선 장소는 마치 천천히 자신을 베는 날카로운 칼처럼 느껴졌고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심한 고통이었다. 성유리는 침대에서 한 시간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려고 할 무렵, 아래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으려 눈을 더욱 질끈 감았지만 이내 누군가 벨을 누르는 소리를 들었고 성유리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도 않고 한번, 또 한 번 눌러댔고 성유리는 그제야 집안에 다른 도우미가 없기에 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결국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준 성유리는 문 앞에 서 있는 서훈과 박한빈을 발견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주무시는 데 방해했네요.” 서훈은 잔뜩 움츠러들며 말을 이어갔다. “박 대표님께서 너무 취하시는 바람에 모시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유리는 박한빈과 서훈을 번갈아 보다 문 앞에서 비켜주며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그거랑은 다르죠.” “뭐가 다른데?” 성유리도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며 계속 물었다. “다 알면서 왜 계속 묻는 거죠?” 박한빈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점점 더 실렸다. 성유리는 그와 달리 아주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희는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잖아요. 굳이 결혼식을 해야겠어요?” 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유리랑 같아. 그리고 혼인 신고서도 이미 손에 넣지 않았니? 결혼식은 그저 형식일 뿐이야. 중요하지 않잖니?” “하지만 결혼 사실은 알려야 할 거야. 그러니까 결혼식보다는 연회 같은 거 준비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니?”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더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저는 꼭 결혼식을 치를 겁니다. 이미 다 말해놔서 번복 못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는 김서영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성유리만 쳐다봤다. 성유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지금 자기가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툭 터져버려 공중에서 사라지는 그런 우스운 풍선 말이다. 풍선이 아니라면 떼를 쓰는 어린아이나 관심받고 싶어서 애를 쓰는 철없는 어른이라고 형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옆에서 별의별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어떠한 반응도 해주지 않는 성유리가 미웠고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저는 또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게?” 김서영이 물었다. “회사요.” “그럼 유리는?”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한빈을 보고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마 김서영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속으로 내심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랐지만 성유리는 그러지 않았다. 뒤돌아 빠른 속도로 앞으로 걸어 나가는 박한빈은 사실 별일이 없었지만 빨리 이곳에서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에 김서영은 불쾌함을 느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역시 사모님은 여전히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고 계시네요.” 가볍게 던진 성유리의 한 마디에 김서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사모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다 해서 박한빈 씨를 용서할 생각은 없고요.” 성유리는 찻잔을 상에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박한빈 씨가 업계 상의 위치를 이용해 그렇고 그런 수단과 방법으로 강압하고 위협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됐을 거예요.” “만약 사모님이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다시 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에 뭐라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성유리가 자신의 말에 강하게 반박하고 따졌다면 김서영은 아직 그녀가 박한빈에게 감정이 남아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나도 알아.” 몇 분 뒤, 김서영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름이 연정우라고 했나? 근데 유리 너도 그 남자를 좋아했어?” “네.” 평온한 말투로 제일 듣기 버거운 말을 내뱉는 성유리의 대답에 계단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은 몸이 굳어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성유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연정우와는 그저 평범한 비즈니스 사이라고 성유리가 직접 인정했었다. 왜 결혼을 하냐고 물었을 때도 성유리는 직접 박한빈에게 연정우의 외할아버지가 건강이 악화돼서 서두른다고 알려줬다. ‘어떻게 유리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박한빈의 뒤에 서 있던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집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서영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동공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옆에 있던 성유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김서영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비록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네가 우리 한빈이랑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니까 주는 거야. 이건 내가 결혼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건데 오늘 유리 너한테 넘겨줄게. 처음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받아.” “이건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한빈이는 평생 유리 너랑 살겠다고 마음먹었잖아. 결국 이건 네 손에 들려야 할 거야.”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하는 김서영을 성유리는 조용히 쳐다만 보았다. 눈앞에 있는 김서영은 여전히 성유리가 알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고 전과는 다를 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러한 김서영도 박씨 가문이라는 큰 “철창”에서 벗어나려고 목숨까지 바친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서영이 사랑했던 남자는 이미 세상을 떴고 두 사람의 일은 세상에서 점점 잊혀갔다. 그리고 김서영마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김서영을 대해야 하는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 대신 김서영이 건넨 물건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에게 시선을 휙 돌리더니 입을 뗐다. “할머님 편찮으시다. 올라가서 얼굴이나 뵙고 가. 유리는 여기 놔두고.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유리도 같이 올라가고 싶습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꽉 잡으며 김서영의 말에 거부 의사를 비쳤다. “이미 혼인 신고까지 마쳤는데 내가 설마 유리를 어떻게 하겠니?”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뒤돌아 위층으로 뚜벅뚜벅 올라갔다. “앉아.” 멀뚱멀뚱 서 있는 성유리에게 김서영이 다정하게 말했다.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홍차로 끓였어. 이거 좋아하는 거 맞지?” 성유리는 앞에 놓인 찻잔과 김서영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세요?” 김서영은 말없이 성유리를 쳐다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를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자신이 머무르는 호텔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금성에서는 아마 박한빈이 모르는 곳이 없을 테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찾아낼 수 있다. 다음 날, 성유리가 깨어나자마자 초인 종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앞에는 박한빈이 서 있었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 혼인 신고하러 구청에.” 오늘 다른 정장 외투 없이 깔끔한 하얀 셔츠만 입은 박한빈은 앞머리까지 내려 평소와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마치 수년 전, 자신이 몰래 훔쳐보던 박한빈이 떠올라 멍해졌다. 성유리는 이제야 그때 박한빈의 모습 또한 가짜였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진짜 박한빈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옷은 이미 내가 다 준비했어. 혼인 신고하는 데 필요한 물건은 잘 챙겼지?” 성유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다 아는지 웃으며 계속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는데 이제 와서 미처 못 챙겼다는 말로 시간 끄려는 건 아니지?”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인데? 아니야?” 성유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다 챙겼으니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만족한 듯 더 환하게 웃더니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건네주며 재촉했다. “가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와. 빨리 가자.” 두 사람은 이내 빠르게 구청에 도착했고 성유리는 이번에 3번째 방문이라 딱히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3번이나 같은 남자와 구청에 온 본인이 한심했고 올 때마다 성유리의 마음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결혼이 아닌 두 사람인지라 혼인 신고를 하는 모든 과정을 아주 익숙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장이 꾹 찍힌 혼인 신고서는 그들의 손에 쥐어졌다. 성유리는 혼인 신고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가방 안에 던지듯 넣어버리고는 택시를 타려고 뒤를 돌았다. 하지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그러나 그런 감정도 시간이 지나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고 김서영이 깨어난 날, 박한빈은 기쁘다는 감정보다는 성유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부터 고민했다. 성유리의 죄책감을 끌어낸다는 잔인한 계획은 박한빈도 보통 사람이라면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냉철하고 매정한 교육을 받아온 박한빈은 가능했다. 김서영은 어린 박한빈에게 어떻게 해야만 좋은 상인이 되는지, 어떻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줬었다. 그녀는 결국 박한빈을 자신이 원하던 상인으로 만들어 냈지만 좋은 아들로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만약 보통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유리한테 무슨 짓을 했니?”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김서영이 이빨을 꽉 깨물며 다시 물었다. “유리를 협박이라도 한 거야? 요즘 유리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 어떻게 그래? 이게 바로 너의 수단이야?” “네.” 간단하기만 한 박한빈의 대답에 김서영은 안색이 잔뜩 어두워져갔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요?”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서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어머니가 시킨 결혼 아니었습니까? 성유리가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원하던 대로 됐는데 도대체 왜 화를 내시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가네요.” 김서영은 화를 꾹꾹 참으며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난 네가 내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사람인 줄 몰랐어.” 아무 말이 없는 박한빈을 보던 김서영은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는지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빈아, 전에는 엄마가 잘못했어. 유리는 너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이미 이혼하지 않았니? 지나는 길은 지나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