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청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발걸음을 재촉하던 성유리는 천천히 멈춰 섰다. 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빠르게 달려와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언니, 왜 내 말 못 들은 척해요?” “지금 여기 살아요? 왜요? 힘들지 않아요? 만약...” “손 놔.” 성유리는 성유정을 말을 여전히 무시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성유정은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언니, 언니가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죠.” “집안 상황이 지금 어떤지 알기나 해요? 언니 때문에 엄마가 쓰러지셨어요. 게다가 회사 상황도 지금 말이 아니고. 이게 다...” “네가 그렇게 만든 거잖아.” 성유리는 성유정의 말을 채 들어주지도 않았다. “저...” 뭐라 변명하려던 성유정은 입을 꾹 닫았고 성유리는 담담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 둘이 차에서 나눈 대화 기억해? 네가 말한 그 모든 것들 다 몰래 녹음해 뒀어.” “뭐라고요?” 그녀의 말에 성유정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비록 그 사람들이 내 생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들이 수년간 보물처럼 키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알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성유정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갔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뻥긋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성유정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관심이 없어 짜증을 내며 물었다. “아직도 그 손 안 놓을 거야?” “언니, 지금 나 속이는 거죠?” 성유정은 이내 정신을 차렸고 또박또박 성유리에게 따지며 물었다. “만약 녹음했으면 진즉에 내놨겠죠. 아직도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없는 거 아닌가요?” “내가 그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았을 뿐이야. 나는 네가 가진 더러운 것들을 뺏을 생각이 전혀 없거든.” “나를 꽉 물고 놓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봐주지는 않을 거니까 명심하고.” 성유리의 경고와도 같은 말에
성유리와 박한빈은 이미 이혼을 한 사이인데 왜 서로 놓지를 못하는지 성유정은 이해가 안 갔다. ‘한빈 오빠가 미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지?’ ‘성유리도 지금 크고 작은 구설수 때문에 깨끗하지 않은데 왜 하필 성유리 편을 들어주는 거야?’ 몇 분이나 흘렀을까, 한참 동안 창밖만 쳐다보던 성유정이 앞에 있는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시동 거세요.” “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는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뒷좌석 여자가 이상해 뒤를 돌아 그녀를 쳐다봤다. 성유정은 한쪽만 주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택시 기사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았다. “어라? 저거 마사라제 아니에요? 이런 곳에서 저런 비싸 차를 모는 사람도 있네요?” 택시 기사는 저 멀리 보이는 외제 차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지만 성유정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차가 있는 방향을 주시하던 성유정의 입술은 이미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빈 오빠는 아닐 거야.’ ‘절대 오빠일 리가 없어.’ 성유정은 이런 곳에 박한빈이 있을 리가 없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했다.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성유정은 차에서 내리는 박한빈을 발견하고는 분노에 겨워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한편, 차에서 내린 박한빈의 손에는 예쁘게 포장까지 된 케이크 하나가 들려있었다. ... 성유리는 밤 내내 마음이 심란해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픽 테블릿은 열려있었지만 성유리는 쉽게 손을 대지 못했고 씻고 나온 박한빈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박한빈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깜짝 놀란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테블릿 화면을 가리려 애를 썼다. 그리더니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물었다. “언제 나오셨어요?” “방금.”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자신의 화면을 꺼버렸다. 박한빈은 원래 그녀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다음날, 성유리는 결국 성유정이 말한 병원으로 찾아갔다. 마스크까지 끼고 얼굴을 완벽하게 가린 성유리는 간호사에게서 윤청하의 입원기록을 얻어냈지만 구체적인 일은 알아내지 못했다. 예를 들어 환자의 지금 상황이나 구체적인 병명 말이다. 성유리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위층으로 향했다. 병실 앞에 도착하자 마침 성유정과 윤청하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진무열 그 사람 괜찮던데? 만약 네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면 무조건...” “엄마! 근데 저는 그 사람 안 좋아한다고요.” 성유정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리고 그 사람도 나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엄마 그거 아세요? 진무열 씨가 다친 이유는 교통사고가 아니라...” 성유정은 말하다가 문득 입을 꾹 닫아버렸다. 윤청하는 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성유정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라? 뭐 때문에 다친 건데?” “아무튼 그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는 제가 아니라고요! 저도 진무열 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윤청하는 성유정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성유정은 마치 기회라도 잡은 사람처럼 윤청하의 손을 꼭 잡더니 말했다. “엄마,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한빈 오빠라고요. 엄마가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진무열 씨는 지금 진씨 가문에서 아무런 권력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그런 사람한테 시집을 간다 해도 우리 성씨 가문에게 좋은 점이 없다니까요?” “하지만 한빈이는...” “한빈 오빠는 저를 좋아하는 게 확실해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인데 제가 어떻게 오빠 감정을 모를 수가 있겠어요? 엄마만 저를 도와주시면 돼요.” “도와주면 어떻게 할 생각이니?” 윤청하는 떼를 쓰며 말하는 성유정에게 단호하게 물었다. 성유정이 깊은숨을 내쉬고 자기 생각을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의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병실 입구를 막아서고 있는 거니?” 그 목소리를 들은 성유정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만약 네가 나중에 그런 일을 겪을 줄 알았다면 나는 너를 내 옆에 꼭 묶어두고 절대 한 발짝도 못 떨어지게 했을 거야.” “근데 유리야, 네가 고생한 것만큼 나도 꽤 험난하게 살고 있었단다. 너도 전에 엄마가 될 뻔했지 않았니? 너도 이제 엄마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지?” 윤청하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성유리는 그런 윤청하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물었다. “그래서 도대체 목적이 뭔데요?” 그녀의 목소리는 냉정하고도 차가웠다. 마치 다들 참여하는 “연기”를 탐탁치 않아 하는 관중처럼 그들이 하는 “연극”을 멈추려 하는 것 같았다. 윤청하는 고개를 들어 한없이 냉정한 성유리를 보며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너... 너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제 추측이 틀린 건가요?”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계속 물었다. “괜찮나 보네요. 이제 아프지 않나 보죠? 그럼 더 다행이네요. 저는 이만.” “잠깐만!” 몸을 일으켜 떠나려는 성유리를 재빨리 불러 세운 윤청하는 결국 그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말은 성유리의 예상에 딱 맞는 말들이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돌려 조롱의 의도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는지 윤청하는 멈칫거리다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아니?” “몰라요.” “급성 신장 손상. 그게 내 병명이야.” 윤청하는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의사가 그러더라. 이 병은 재앙과도 같은 병이라고. 치료하고 싶으면 신장 이식을 받는 방법밖에 없대.” 그녀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비록 처음부터 짧은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윤청하의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사실 아까 한 순간이지만 성유리는 자신이 드디어 친 엄마로부터 인정을 받고 이해를 받은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건 다 성
성씨 가문 사람들의 저주와도 같은 말들에 성유리는 이미 익숙해졌다. 예전에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험한 말들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 며칠간 우울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성유리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평온했다. 성유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윤청하의 말에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그때 저를 죽이시지 못하셨네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저한테 욕하는 거 빼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요.” 윤청하는 성유리의 말에 숨이 턱 막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아닌 마치 높은 자리에 서서 기어다니는 개미 새끼 한 마리를 보는듯한 성유리의 눈빛에 놀란 것이다. 분명히 전에 성유리는 늘 윤청하를 볼 때면 애정과 존경심이 듬뿍 담긴 눈으로 봤었는데 말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사이가 이렇게 변할 걸까?’ 윤청하는 자신이 던진 질문의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몸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점점 얼어붙어 가 움직일 수도 없는 느낌이 들었다. 성유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병실 밖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오늘 이곳에 찾아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필경 오늘 만약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실망하지 않았을 거고 그렇게 된다면 윤청하를 신경 쓰면서 살아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번 “테스트”를 통해 성유리는 자신은 절대로 성씨 가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제 희망 따위도 없어.’ 성유리가 병원 밖으로 나왔을 때, 저 멀리 성유정의 모습이 보였다. 성유정은 성유리를 발견한 순간 얼른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엄마랑 무슨 얘기 나누셨어요? 한다고 했어요?” 성유정의 질문에 성유리는 그녀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됐다. ‘하긴 얘가 나보고 오라고 했으니까.’ 성씨 가문이 세운 계획에 대해 성유정이 모를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묻는 성유정을 힐끔 쳐다보고는 대답을 해주기도 귀찮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만약 제가 언니였으면
박현빈은 차에 올라타며 성유정에게 대답했다. “기다려. 곧 갈게.” “우리 지금 술집 거리 부근에 있어요. 언니가 너무 취해서 안 되겠어요. 언니를 호텔에 데려다줘야겠어요.” “그 자리에 그대로 가만히 있어. 주소 보내주고. 빨리 갈게.” 말을 마친 박한빈은 기사에게 얼른 시동을 걸어 출발하라는 눈치를 줬다. 하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말을 채 듣지 못했는지 주소 하나만 보내주고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보내온 주소를 확인한 박한빈은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자기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미화로로 가서 성유리의 행방을 알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만 걸릴 뿐 받는 사람이 없었다. 박한빈이 성유정이 보내준 주소에 따라 호텔 앞에 도착하자 마침 비서에게서도 문자 한 통이 왔다. [성유리 씨 지금 미화로에 없습니다.] 박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호텔 안으로 발을 들였다. 1608호 방. 박한빈이 벨을 누른 지 얼마 안 되어 성유정이 문을 열어줬다. 방 안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어 성유정은 검은색의 나시 치마만 입고 있었다. 게다가 성유정의 몸에서는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문을 열어주려고 나올 때도 비틀거렸다. 박한빈의 얼굴을 확인한 성유정은 그의 몸에 쓰러지다시피 넘어졌고 당황한 박한빈은 몸이 꼿꼿하게 굳어져버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는데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이불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한빈은 망설임도 없이 성유정을 밀어내고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 이불을 확 거뒀다. “한빈 오빠.” 성유정이 말릴 틈도 없이 박한빈은 이불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약 아직까지도 박한빈이 성유정이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바보가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유정을 쳐다보며 물었다. “성유리는?” “저... 언니는 이미 다른 분이 오셔서 데리고 갔어요.” 성유정의 대답에 박한빈의 얼굴
성유정은 말을 하는 한편 손을 뻗어 자신의 어깨끈을 살짝 내렸다. 어두운 조명 아래 보이는 것은 하얀 여자의 속살뿐. 그러나 박한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힐끔 쳐다만 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번에 본가에서 너한테 아주 명확하게 말했던 것 같은데.”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성유정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박한빈의 말에 그때 박씨 본가 앞에서 그에게 거부당했던 그 입맞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성유정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다시 박한빈을 꽉 끌어안았다. “한빈 오빠, 저 진짜 오빠를 많이 좋아해요. 아무런 명분이 없어도 좋으니 딱 이번 한 번만 하고 싶어요.” “전... 소중한 제 첫 몸을 제가 제일 사랑하는 남자에게 주고 싶어요. 한빈 오빠, 그러니까 제발 딱 한 번 만요.” 성유정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애원했다. 예쁜 얼굴을 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말하는 성유정의 모습을 그 어떤 남자도 매정하게 뿌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박한빈은 달랐고 그는 울먹이는 성유정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난 너를 그냥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럴 리가 없어요! 전에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만약 성유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결혼했을 거라고요!” “만약 저를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왜 저한테 그렇게 비싼 선물을 해준 거예요? 저를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왜 저를 안아주셨어요? 한빈 오빠, 이제 더는 저를 속이지 말아요. 오빠의 진실 된 감정을 더는 모른척 하지 마시라고요.” “정말 성유리 씨가 없었다고 해도 난 너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박한빈은 성유정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 “뭐라고요?” 성유정이 박한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너한테서 아무런 욕망이 느껴지지 않아.” 박한빈은 자신이 하려던 말을 담담하게 이어 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어.” 망신.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성유정은 지금 자신의 처지가 한 벌의 옷가지 같아 보였다
“송효주 씨를 만난 거라면 왜 내가 건 전화는 안 받은 거야?” “핸드폰 진동모드로 설정해 둬서 전화 오는 줄도 몰랐어요.” 성유리의 대답을 들은 박한빈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키도 크고 몸도 좋은 박한빈이 좁은 현관 앞으로 가까이 오자 성유리는 말도 설명할 수 없는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두려움 때문인지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등에 문이 닿자 이젠 물러날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성유리는 조용히 박한빈을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눈빛엔 의아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박한빈도 마찬가지로 전혀 당황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성유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박한빈이 그제야 천천히 입을 뗐다. “오늘 성유정이 나한테 전화 왔었어. 너랑 같이 술을 먹고 있다고 하면서.” “제가 걔랑요?” 성유리는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설마?” “응. 나도 처음엔 안 믿었지. 근데 네가 취했다고 하기에 바로 달려갔어.” “왜냐하면 그때까지 성유리 너는 미화로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내 전화도 안 받았기 때문이야.” 박한빈은 성유리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대답을 해주려고 입을 뻥긋거렸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성유정이 호텔 주소 하나를 보내주더니 나보고 오라고 하더라. 우리 둘이 호텔 안에서 뭐 했는지 맞혀봐.” 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성유리에게 계속 말했다. 그의 말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 있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야 모르죠.” “그러니까 맞춰보라고 하는 거잖아.” “저는 맞추기 싫은데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러더니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우리 둘은 아무 일도 없었어.” “전에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있을 리 없어.” “하지만 성유리, 나는 오늘 너한테 크게 실망했다.” “나를 시험하려는
그는 그저 조용히 성유리를 품에 끌어안았고 그렇게 밤 내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은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마음과 성유리의 마음이 가까이 붙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성유리가 다시 사하나의 부모님을 봤을 때는 청명절이 다가올 무렵이었다.사민혁과 류슈미가 자신을 마주치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성유리는 특별히 청명절 전날에 사하나를 찾아갔다.하늘이도 함께.아이는 이미 한 달째 유치원에 다니던 상황이었고 생각보다 더 잘 적응해 갔다.지금껏 하늘이는 죽음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기에 사하나의 영정사진을 마주하자 많이 의아해했다.마치 전에 늘 자기랑 나가 놀던 이모가, 늘 치마나 선물을 사주던 이모가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 몰라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준비한 꽃다발을 사하나의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그녀는 사하나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했었다. 심지어 행여 잊어버리고 못 한 말들이 있을까 봐 메모지에 며칠 전부터 적어두기까지 했다.하지만 막상 사하나의 무덤을 마주 서고 나니 목이 꽉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메모지에 적어둔 익숙한 글자들을 몇 번이나 봐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멍하니 사하나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성유리는 잔뜩 굳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사하나의 부모님은 먼발치에서 성유리와 하늘이를 보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오늘 두 사람이 찾아올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성유리는 무의식 간에 하늘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지만 이런 행동이 류수미와 사민혁을 더 화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본능적인 모성애로 그런 행동을 해버렸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항상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사하나의 부모님은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했다.심지어는 왜 이곳에 찾아왔냐고 따져 묻지도 않았고 뚜벅뚜벅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그들의 반응에 성유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단 한 가지는 똑바로 알
박한빈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성유리는 오랫동안 침묵했다.입술을 꾹 닫고 있는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박한빈의 말에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볼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자?”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유효정 씨는... 정말 병 들어서 사망한 건가요?”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누가 진실을 알겠어? 어차피 연정우 씨가 모든 사람에게 사인이 병사라고 알려줬는데.”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에도 조용히 있다 한참 뒤,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그때 유씨 가문 일 말이에요. 도대체... 박한빈 씨가 신고한 건가요 아니면 정우가 그런 건가요?”이번엔 박한빈이 입을 꾹 닫아버렸고 성유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행동을 멈췄다. 그리곤 그녀의 귓가에 있는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리기 시작했다.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머리카락에 닿을 때마다 귓가가 너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어 피해버렸다.그 순간, 박한빈이 씩 웃더니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볼에 입을 맞췄다.그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성유리의 볼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려했지만 그녀는 박한빈을 밀어냈다.“아직 제 질문에 대답 안 하셨어요.”성유리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자 박한빈은 솔직하게 대답해 줬다.“신고한 건 연정우 씨야.”“근데 그 증거들은... 내가 조금 힘을 보탰다고 할 수 있지. 게다가 네 생각엔 원래부터 검찰의 행동이 그렇게 빠르다고 생각해?”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그러니까... 그때 연정우는 박한빈이 둔 “패”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비록 다들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자세히 검사를 해도 그는 깨끗했다.“내가 너무 무섭나?”성유리가 아무 말도 못 하자 박한빈이 조심스레 물었다.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고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봤다.“내가 이렇게 하는
성유리는 박한빈이 여전히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마치 성유리의 생각을 읽은 듯 말을 이어갔다.“전에 유효정 씨가 찾아갔었지?”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갑자기 유효정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지 몰랐다.날 선 눈빛으로 박한빈을 째려보던 성유리는 경계심을 풀며 물었다.“무슨 뜻이에요?”“너도 아마 짐작하고 있었을 거야. 유효정 씨가 연정우 씨에게 말한 거 말이야. 해외에 투자자들. 그거 사실 내가 위조한 거였어.”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그 일이 다시 떠올랐다.솔직히 말해 요즘 성유리는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연정우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에도 너무 옛날 옛적의 일 같은 느낌이 들었다.박한빈은 성유리의 반응과 표정을 살펴보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잡더니 말했다.“내 말 아직 안 끝났어.”그의 목소리에는 불쾌하다는 감정이 잔뜩 묻어나 있었지만 성유리가 아플까 봐 손에는 아무런 힘을 주지 않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럼에도 불만이 큰지 박한빈의 손을 밀쳐냈다.팍!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모습에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성유리는 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 문제로 다투기 싫어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나도 최근에 알았어. 내가 유효정 그 사람에게 속았더라고.”“다르게 말하면 시실 그 투자자는 정말 존재하는 사람이었어.”박한빈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그때 유효정 씨 아버지에게 그 일이 있었을 때 사실은 뒤에 길 하나를 만들어뒀나 봐. 근데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 자기 사위에게 신고를 당했을 줄은.”“조사하는 쪽에서 발 빠르게 움직인 덕에 아버지는 도망가지 못했지만 유효정 씨에게 그것들은 남겨둔 거지.”“하지만 유효정 씨도 감옥에 들어가 버린 탓에 출소하고 나서는 그 사람 연락처도 몰랐었지.”“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야. 겉으론 나랑 협업해서 연정우 씨에게 복수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가 다리를 놓아주기를 바랐던 거지. 투자자를 만들 기회를
“내가 맨발로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박한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성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집안에 난방이 너무 잘 돼서요.”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대답했다.“그래도 안 돼.”“네.”성유리는 박한빈을 지그시 쳐다보다 결국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아까 뭐 보고 있었어?”“요즘 왜 그렇게 바쁘세요?”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물었다.너무도 기막힌 타이밍에 박한빈은 멈칫하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를 본 성유리는 기분이 이상해져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웃으세요?”“알고 싶어?”박한빈은 대답 대신 성유리에게 되물었고 그녀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마침 잘됐네.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근데 내가 아직 씻지를 못해서... 나 좀 기다려줄래?”“먼저 알려주시면 안 돼요?”“안 돼.”아마 요즘 박한빈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성유리는 그의 그런 모습에 익숙해졌다.그래서 지금 박한빈이 고민도 안 하고 자신의 말에 거부 의사를 밝히자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도 못했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은 이미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고 성유리에겐 기회가 없어졌다.원래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쓱 물어보려 했던 성유리지만 박한빈의 말을 듣고 나니 흥미가 생겼다.김서영도 박한빈의 회사에 별일이 없다고 말했으니까.게다가 박한빈도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성유리는 이 업계 일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그러니 그가 하려던 말을 바로 성유리와 관련된 사람에 대한 주제일 것이다.이미 욕실로 들어선 박한빈의 뒤를 성유리가 따라가려는 순간, 박한빈은 뒤에도 눈이 달린 듯 고개를 휙 돌리더니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맨발로 걸어 다니지 말라고.”바닥에 닿아있던 성유리의 발은 박한빈의 말에 움츠러들어갔고 그 틈을 타 그는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결국 성유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침대로 돌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창문만 바라봤다.다행히 박한빈은 성유리를 오랜 시간 기다리지 않게 했고 10여 분이 흘렀을 즈음, 가
하늘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성유리는 또다시 물었다.“여기서 지내는 게... 안 행복해?”성유리의 물음에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다시 끄덕였다.“난 엄마가 안 행복해 보여서.”침묵하던 하늘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엄마, 엄마는 지금... 하늘이를 보고도 웃어주지 않아.”“난 엄마가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멍해졌고 하늘이의 손을 잡고 있던 손도 점점 굳어갔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도우미는 계속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성유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도우미는 빠르게 하늘이에게로 다가가더니 말했다.“성하늘 아가씨, 아까 그림 그리고 싶다고 하셨죠? 저랑 같이 그리러 갈까요?”하늘이는 도우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성유리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아이의 시선을 느낀 성유리는 심호흡 한 번 하고는 애써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기회가 생기면 엄마가 하늘이 데리고 한번 갔다 올게. 알겠지?”“진짜?”성유리의 말에 하늘이의 눈이 순식간에 빛났고 성유리는 그제야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진정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얼마 뒤,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이와 약속했다.“응. 진짜.”하늘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도우미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갔고 성유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비록 오늘 박한빈이 외출한 상태지만 집안에 남아있는 도우미들은 항시 성유리 곁을 지키며 감시 아닌 감시를 하고 있었다.성유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그녀가 화장실에 조금 오랫동안 머물러도 재빨리 다가와 괜찮냐고 묻곤 했다.그들은 항상 성유리가 괜찮다는 대답을 하고나서야 안심하며 화장실 밖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성유리가 멍하니 앉아 있을 무렵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오늘 저녁 식사 또한 변함없이 세 사람이 함께 먹었다.김서영은 하늘이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갑자기 물었다.“한빈이 요즘 왜 저렇게 바빠?”성유리는 그녀의 물음에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나
성유리와 다른 사람들은 엔젤 월드에서 대보름날까지 머물렀다.하늘이도 이젠 나이가 됐으니 성유리는 원래 경운시에 아이가 다닐 유치원을 찾아보려고 했다.하지만... 경운시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결국 하늘이가 다닐 유치원은 박한빈이 직접 골랐다. 그 유치원은 금성시에서 꽤 이름을 날린 국제 유치원이다.유치원에 다니는 학생들의 집안과 조건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월등했기에 성유리가 전에 찾아보던 유치원과는 차원이 달랐다.사실 성유리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하늘이가 박한빈 옆에 남아있으면 접하는 영역과 사귀는 친구, 그리고 사는 수준은 성유리가 평생 노력해도 하지 못할 것들이라는 사실을.지금 하늘이가 입고 있는 옷, 먹는 음식, 쓰는 물건들 전부 다 제일 좋은 것들이었다.전에 김서영은 하늘이를 데리고 각종 파티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전에 그녀는 그런 떠들썩한 장소에 가는 것을 꺼렸다.하지만 하늘이만큼은 세상의 이런저런 모습을 많이 봐야지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서 자주 데리고 나갔다.이런 일은 원래 엄마인 성유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마치 지금 사람들은 이미 성유리가 박한빈의 아내임을 확신하고 있듯이.박한빈의 아내로서 그런 연회나 파티엔 응당 성유리가 참석해야 했고 그게 제일 기본적인 일이었다.하지만 김서영은 성유리를 강박하지 않았고 홀로 하늘이를 데리고 나가기를 반복했다.나중에 그녀는 하늘이를 데리고 승마장까지 갔고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말을 바로 사주기도 했었다.집에 돌아온 하늘이는 성유리에게 승마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자랑했다.사진 속 조련사는 하늘이를 앞에 앉히고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고 아이는 승마복을 입은 채로 즐거운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성유리는 행복해 보이는 사진 속 아이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엄마, 거기 진짜 재밌어. 다음에 우리 같이 갈까?”하늘이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난 말 탈 줄 몰라.”성유리가 난처해하며 대답했다.“괜찮아. 거기 말 잘 타는
“사실 요즘 한빈이가 매일 사씨 저택으로 향했어.”“아니면 왜 사하나 씨 가족들이 그렇게 흥분하겠니?”“근데 한빈이 걔가... 하도 멍청해서 듣기 좋은 말들을 하는 법을 몰라. 그래서 가족분들이 반겨주지 않는 거고.”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그 사람이 사씨 저택에 왜... 뭐 하러 갔는데요?”“유리 네가 보기엔 뭐 하러 간 것 같은데?”김서영은 묻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했다.“당연히 널 위해서지.”“네가 사하나 씨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발이 묶여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것도 보기가 싫었을 거야.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도 없으니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유가족들이 너를 용서하게 하는 일이었겠지.”“아마 네가 그 사람들에게 용서받는다면 좀 괜찮아질 줄 알았나 봐.”“사실 걔가 한 일이 오늘 내가 한 일과 별반 다를 건 없었어. 그냥... 난 네가 보는 앞에서 하기를 선택했을 뿐이지.”“성유리, 난 네가 알았으면 해. 요즘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우리가 다 봤으니까 넌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제자리에 앉아 김서영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그러다 조금 뒤,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마치 온몸에 남은 모든 힘을 주먹을 쥐는데 쓰는지 손가락 마디는 이미 하얗게 변해있었고 몸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김서영은 그런 성유리의 모습을 보고도 그저 묵묵히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기만 했다.이때, 두 사람이 탄 차가 엔젤 월드에 들어서자 박한빈이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달려 나왔다.어찌나 급히 나온 건지 외투조차 걸치지 않은 그는 평소 무덤덤하던 표정과는 달리 한껏 더 격동돼 있었다.기사가 차를 주차하고 나서야 박한빈은 헐레벌떡 달려오며 김서영에게 물었다.“유리 데리고 어디 갔다 오시는 겁니까?”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거짓말을 하기 싫어 솔직히 대답했다.“사씨 저택.”그러자 박한빈의 안색이 더 어두워지더니 김서영에게 따지듯 물었다.
사민혁의 말에 성유리가 나서서 대답하려던 찰나, 김서영이 그녀를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저도 잘 압니다. 사하나 씨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클지.”“하지만 다시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이번 일에 유리의 잘못이 정말 존재하는지.”“자리에 있던 다른 목격자한테도 물었습니다. 근데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러더라고요. 그날 날씨가 안 좋아서 유리가 하나 씨를 말렸답니다. 아이랑 스키 타러 올라가지 말라고. 그런데도 하나 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어요.”“비록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두 분의 슬픔이 더 커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현실이 이렇습니다. 사하나 씨는 본인이 한 행동과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뿐이에요.”“지금 그게 무슨 뜻이죠? 제 딸이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건가요? 그런 선택을 했으니 잘 죽었다는 말이에요?”그 말에 류수미는 또다시 격동된 억양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김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사하나 씨는 너무 젊은 사람이었으니 누구라도 다 안타깝고 가엽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유리는 또 무슨 잘못을 지었나요?”“유리가 먼저 아이를 데리고 스키장에 가기로 한 것도 아니고 말리려고 애를 쓰기도 했잖아요. 눈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유리는 혼자 사고 현장으로 향해 두 사람을 찾으려고 했어요.”“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노력을 다한 아이예요. 그런데 더 이상 또 무얼 해야 되나요? 정말 자기 목숨으로 하나 씨의 죽음을 애도하고 보상해야 하나요? 유리가 죽는다고 해도 사하나 씨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텐데.”김서영의 말투는 너무 차분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들렸다.류수미는 그 말에 표정이 완전 사라져버렸고 사민혁 또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제가 유리를 데리고 온 건 설날에 인사를 드리러 온다는 핑계로 이번 일에 대해 정확히 정정하려는 의도였어요. 두 분은 유리랑 같이 있지 않으니 지금 얘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성유리를 본 김서영이 계속 말했다.“너도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이럴 테니까.”그럼에도 성유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됐어. 그만하고 아침부터 먹자. 밥 다 먹고... 넌 나랑 갈 데가 있어.”...김서영이 말한 갈 곳이 사씨 저택일 줄은 성유리가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마지막으로 사씨 저택에 왔을 때의 기억은 아직 성유리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리고 류수미와 했던 약속도.성유리는 류수미에게 사하나가 하늘이한테 썼던 마음들과 은혜를 꼭 갚겠다는 말을 했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아침에 박한빈이 그녀를 행복을 위해 직접 부탁한 평안부도, 하늘이가 엄마를 볼 때의 그 조심스러운 눈빛도, 사하나의 죽음도 다 잊고 싶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간의 추억들을 성유리가 어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사모님은 내가 비겁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할 거야.’‘분명 약속까지 했으면서...’“가자.”김서영의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성유리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유리의 손을 잡더니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김서영은 이미 사씨 가문의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상황인 것 같았다. 필경 그녀의 신분 또한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말이다.사씨 가문 사람들은 박한빈을 대하던 태도로 김서영을 대하진 않았지만 성유리에게는 쌀쌀맞았다.류수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문 채로 성유리를 노려보며 외쳤다.“쟤가 여길 어디라고 와요!”하지만 김서영은 옅은 미소만 지으며 대답했다.“안부 물으러 왔어요. 설날인데 어떻게 지내시나 보러 오고 싶기도 했고.”“안부요?”류수미는 화가 나 씩씩거리며 따지듯 물었다.“설날에 대체 왜 찾아오신 거예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시러 오셨나 봐요? 혹시나...”“아니요.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