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와 박한빈은 이미 이혼을 한 사이인데 왜 서로 놓지를 못하는지 성유정은 이해가 안 갔다. ‘한빈 오빠가 미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지?’ ‘성유리도 지금 크고 작은 구설수 때문에 깨끗하지 않은데 왜 하필 성유리 편을 들어주는 거야?’ 몇 분이나 흘렀을까, 한참 동안 창밖만 쳐다보던 성유정이 앞에 있는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시동 거세요.” “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는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뒷좌석 여자가 이상해 뒤를 돌아 그녀를 쳐다봤다. 성유정은 한쪽만 주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택시 기사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았다. “어라? 저거 마사라제 아니에요? 이런 곳에서 저런 비싸 차를 모는 사람도 있네요?” 택시 기사는 저 멀리 보이는 외제 차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지만 성유정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차가 있는 방향을 주시하던 성유정의 입술은 이미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빈 오빠는 아닐 거야.’ ‘절대 오빠일 리가 없어.’ 성유정은 이런 곳에 박한빈이 있을 리가 없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했다.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성유정은 차에서 내리는 박한빈을 발견하고는 분노에 겨워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한편, 차에서 내린 박한빈의 손에는 예쁘게 포장까지 된 케이크 하나가 들려있었다. ... 성유리는 밤 내내 마음이 심란해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픽 테블릿은 열려있었지만 성유리는 쉽게 손을 대지 못했고 씻고 나온 박한빈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박한빈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깜짝 놀란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테블릿 화면을 가리려 애를 썼다. 그리더니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물었다. “언제 나오셨어요?” “방금.”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자신의 화면을 꺼버렸다. 박한빈은 원래 그녀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다음날, 성유리는 결국 성유정이 말한 병원으로 찾아갔다. 마스크까지 끼고 얼굴을 완벽하게 가린 성유리는 간호사에게서 윤청하의 입원기록을 얻어냈지만 구체적인 일은 알아내지 못했다. 예를 들어 환자의 지금 상황이나 구체적인 병명 말이다. 성유리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위층으로 향했다. 병실 앞에 도착하자 마침 성유정과 윤청하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진무열 그 사람 괜찮던데? 만약 네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면 무조건...” “엄마! 근데 저는 그 사람 안 좋아한다고요.” 성유정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리고 그 사람도 나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엄마 그거 아세요? 진무열 씨가 다친 이유는 교통사고가 아니라...” 성유정은 말하다가 문득 입을 꾹 닫아버렸다. 윤청하는 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성유정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라? 뭐 때문에 다친 건데?” “아무튼 그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는 제가 아니라고요! 저도 진무열 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윤청하는 성유정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성유정은 마치 기회라도 잡은 사람처럼 윤청하의 손을 꼭 잡더니 말했다. “엄마,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한빈 오빠라고요. 엄마가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진무열 씨는 지금 진씨 가문에서 아무런 권력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그런 사람한테 시집을 간다 해도 우리 성씨 가문에게 좋은 점이 없다니까요?” “하지만 한빈이는...” “한빈 오빠는 저를 좋아하는 게 확실해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인데 제가 어떻게 오빠 감정을 모를 수가 있겠어요? 엄마만 저를 도와주시면 돼요.” “도와주면 어떻게 할 생각이니?” 윤청하는 떼를 쓰며 말하는 성유정에게 단호하게 물었다. 성유정이 깊은숨을 내쉬고 자기 생각을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의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병실 입구를 막아서고 있는 거니?” 그 목소리를 들은 성유정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만약 네가 나중에 그런 일을 겪을 줄 알았다면 나는 너를 내 옆에 꼭 묶어두고 절대 한 발짝도 못 떨어지게 했을 거야.” “근데 유리야, 네가 고생한 것만큼 나도 꽤 험난하게 살고 있었단다. 너도 전에 엄마가 될 뻔했지 않았니? 너도 이제 엄마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지?” 윤청하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성유리는 그런 윤청하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물었다. “그래서 도대체 목적이 뭔데요?” 그녀의 목소리는 냉정하고도 차가웠다. 마치 다들 참여하는 “연기”를 탐탁치 않아 하는 관중처럼 그들이 하는 “연극”을 멈추려 하는 것 같았다. 윤청하는 고개를 들어 한없이 냉정한 성유리를 보며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너... 너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제 추측이 틀린 건가요?”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계속 물었다. “괜찮나 보네요. 이제 아프지 않나 보죠? 그럼 더 다행이네요. 저는 이만.” “잠깐만!” 몸을 일으켜 떠나려는 성유리를 재빨리 불러 세운 윤청하는 결국 그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말은 성유리의 예상에 딱 맞는 말들이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돌려 조롱의 의도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는지 윤청하는 멈칫거리다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아니?” “몰라요.” “급성 신장 손상. 그게 내 병명이야.” 윤청하는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의사가 그러더라. 이 병은 재앙과도 같은 병이라고. 치료하고 싶으면 신장 이식을 받는 방법밖에 없대.” 그녀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비록 처음부터 짧은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윤청하의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사실 아까 한 순간이지만 성유리는 자신이 드디어 친 엄마로부터 인정을 받고 이해를 받은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건 다 성
성씨 가문 사람들의 저주와도 같은 말들에 성유리는 이미 익숙해졌다. 예전에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험한 말들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 며칠간 우울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성유리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평온했다. 성유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윤청하의 말에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그때 저를 죽이시지 못하셨네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저한테 욕하는 거 빼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요.” 윤청하는 성유리의 말에 숨이 턱 막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아닌 마치 높은 자리에 서서 기어다니는 개미 새끼 한 마리를 보는듯한 성유리의 눈빛에 놀란 것이다. 분명히 전에 성유리는 늘 윤청하를 볼 때면 애정과 존경심이 듬뿍 담긴 눈으로 봤었는데 말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사이가 이렇게 변할 걸까?’ 윤청하는 자신이 던진 질문의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몸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점점 얼어붙어 가 움직일 수도 없는 느낌이 들었다. 성유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병실 밖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오늘 이곳에 찾아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필경 오늘 만약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실망하지 않았을 거고 그렇게 된다면 윤청하를 신경 쓰면서 살아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번 “테스트”를 통해 성유리는 자신은 절대로 성씨 가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제 희망 따위도 없어.’ 성유리가 병원 밖으로 나왔을 때, 저 멀리 성유정의 모습이 보였다. 성유정은 성유리를 발견한 순간 얼른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엄마랑 무슨 얘기 나누셨어요? 한다고 했어요?” 성유정의 질문에 성유리는 그녀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됐다. ‘하긴 얘가 나보고 오라고 했으니까.’ 성씨 가문이 세운 계획에 대해 성유정이 모를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묻는 성유정을 힐끔 쳐다보고는 대답을 해주기도 귀찮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만약 제가 언니였으면
박현빈은 차에 올라타며 성유정에게 대답했다. “기다려. 곧 갈게.” “우리 지금 술집 거리 부근에 있어요. 언니가 너무 취해서 안 되겠어요. 언니를 호텔에 데려다줘야겠어요.” “그 자리에 그대로 가만히 있어. 주소 보내주고. 빨리 갈게.” 말을 마친 박한빈은 기사에게 얼른 시동을 걸어 출발하라는 눈치를 줬다. 하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말을 채 듣지 못했는지 주소 하나만 보내주고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보내온 주소를 확인한 박한빈은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자기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미화로로 가서 성유리의 행방을 알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만 걸릴 뿐 받는 사람이 없었다. 박한빈이 성유정이 보내준 주소에 따라 호텔 앞에 도착하자 마침 비서에게서도 문자 한 통이 왔다. [성유리 씨 지금 미화로에 없습니다.] 박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호텔 안으로 발을 들였다. 1608호 방. 박한빈이 벨을 누른 지 얼마 안 되어 성유정이 문을 열어줬다. 방 안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어 성유정은 검은색의 나시 치마만 입고 있었다. 게다가 성유정의 몸에서는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문을 열어주려고 나올 때도 비틀거렸다. 박한빈의 얼굴을 확인한 성유정은 그의 몸에 쓰러지다시피 넘어졌고 당황한 박한빈은 몸이 꼿꼿하게 굳어져버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는데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이불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한빈은 망설임도 없이 성유정을 밀어내고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 이불을 확 거뒀다. “한빈 오빠.” 성유정이 말릴 틈도 없이 박한빈은 이불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약 아직까지도 박한빈이 성유정이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바보가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유정을 쳐다보며 물었다. “성유리는?” “저... 언니는 이미 다른 분이 오셔서 데리고 갔어요.” 성유정의 대답에 박한빈의 얼굴
성유정은 말을 하는 한편 손을 뻗어 자신의 어깨끈을 살짝 내렸다. 어두운 조명 아래 보이는 것은 하얀 여자의 속살뿐. 그러나 박한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힐끔 쳐다만 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번에 본가에서 너한테 아주 명확하게 말했던 것 같은데.”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성유정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박한빈의 말에 그때 박씨 본가 앞에서 그에게 거부당했던 그 입맞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성유정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다시 박한빈을 꽉 끌어안았다. “한빈 오빠, 저 진짜 오빠를 많이 좋아해요. 아무런 명분이 없어도 좋으니 딱 이번 한 번만 하고 싶어요.” “전... 소중한 제 첫 몸을 제가 제일 사랑하는 남자에게 주고 싶어요. 한빈 오빠, 그러니까 제발 딱 한 번 만요.” 성유정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애원했다. 예쁜 얼굴을 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말하는 성유정의 모습을 그 어떤 남자도 매정하게 뿌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박한빈은 달랐고 그는 울먹이는 성유정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난 너를 그냥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럴 리가 없어요! 전에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만약 성유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결혼했을 거라고요!” “만약 저를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왜 저한테 그렇게 비싼 선물을 해준 거예요? 저를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왜 저를 안아주셨어요? 한빈 오빠, 이제 더는 저를 속이지 말아요. 오빠의 진실 된 감정을 더는 모른척 하지 마시라고요.” “정말 성유리 씨가 없었다고 해도 난 너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박한빈은 성유정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 “뭐라고요?” 성유정이 박한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너한테서 아무런 욕망이 느껴지지 않아.” 박한빈은 자신이 하려던 말을 담담하게 이어 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어.” 망신.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성유정은 지금 자신의 처지가 한 벌의 옷가지 같아 보였다
“송효주 씨를 만난 거라면 왜 내가 건 전화는 안 받은 거야?” “핸드폰 진동모드로 설정해 둬서 전화 오는 줄도 몰랐어요.” 성유리의 대답을 들은 박한빈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키도 크고 몸도 좋은 박한빈이 좁은 현관 앞으로 가까이 오자 성유리는 말도 설명할 수 없는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두려움 때문인지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등에 문이 닿자 이젠 물러날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성유리는 조용히 박한빈을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눈빛엔 의아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박한빈도 마찬가지로 전혀 당황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성유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박한빈이 그제야 천천히 입을 뗐다. “오늘 성유정이 나한테 전화 왔었어. 너랑 같이 술을 먹고 있다고 하면서.” “제가 걔랑요?” 성유리는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설마?” “응. 나도 처음엔 안 믿었지. 근데 네가 취했다고 하기에 바로 달려갔어.” “왜냐하면 그때까지 성유리 너는 미화로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내 전화도 안 받았기 때문이야.” 박한빈은 성유리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대답을 해주려고 입을 뻥긋거렸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성유정이 호텔 주소 하나를 보내주더니 나보고 오라고 하더라. 우리 둘이 호텔 안에서 뭐 했는지 맞혀봐.” 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성유리에게 계속 말했다. 그의 말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 있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야 모르죠.” “그러니까 맞춰보라고 하는 거잖아.” “저는 맞추기 싫은데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러더니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우리 둘은 아무 일도 없었어.” “전에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있을 리 없어.” “하지만 성유리, 나는 오늘 너한테 크게 실망했다.” “나를 시험하려는
성유정과 원유진은 화장실에서 딱 마주쳤다. 진무열과 성유정이 약혼을 한 뒤로 두 사람의 왕래는 점점 더 잦아졌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이가 나빠진 것은 아니기에 오다가다 서로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었다. “진무열 씨 다쳤다면서요? 요즘은 어때요?” 원유진은 거울 앞에서 화장을 보충하는 성유정을 힐끔 보더니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이미 퇴원도 마친 상태라.” 성유정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며 대답을 했지만 원유진은 그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옛날이랑은 뭐가 좀 달라졌는데?’ 원유진이 더 말을 걸기도 전, 성유정은 이미 화장실에서 나가버렸다. 그 시각, 방 안의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성유정이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와 너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갑작스러운 인파에 성유정은 피할 틈도 없었고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뒤에서 오던 원유진이 그녀를 붙잡아줬다. “다들 테라스로 나가려는 모양이에요.” 원유진이 많이 놀란 성유정을 달래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새해맞이 카운트가 시작되잖아요. 그래서 금성에 오늘 밤 폭죽 쇼가 열린대요.” “네.” 정신을 차린 성유정은 그제야 원유진에게 짧은 대답을 해줬다. “가요. 같이 올라가서 구경이나 하자고요.” 원유진은 성유정의 손을 덥석 잡더니 앞장서서 테라스로 향하기 시작했다. 성유정은 원유진의 뒤에 서서 그녀에게 잡혀있는 것이 싫은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테라스로 도착했을 무렵,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사람들이 다 입구에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유정의 시선은 사람들에 의해 가로막혀있었지만 원유진은 뒤꿈치까지 들어가며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쪽을 쳐다보았다. “박한빈 씨? 저분이 왜 이곳에 있는 거예요?” 원유진은 이내 사람들이 보고 있는 방향에 박한빈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말에 성유정은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근데 옆에 있는 여성분은 누구지?
꿈속에서 박한빈은 성유리가 연정우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으려고 다급히 뛰어갔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망치고 성유리를 다시 자기 곁에 세우고 싶어 그녀의 손에 거의 닿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부시게 비추는 햇살 때문인지 박한빈은 눈물이 맺혔고 정신을 다잡고는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안으려 했다. 하지만 옆에 있는 것은 오직 베개 하나뿐이었다. 큰 방에 홀로 남겨진 박한빈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빠른 속도로 아래층에 내려간 박한빈은 얼른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전화를 꽤 빨리 받았다. “어디야?” 박한빈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내, 문 벨 소리가 성유리의 대답 대신 들렸다. 성유리도 벨 소리를 들었는지 박한빈과의 통화를 끊어버리고는 입구 앞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른 곳이 아닌 뒤에 있는 정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를 본 박한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 손에 들려있는 약 봉투를 발견했다. 머릿속에는 약 봉투 안에 뭐가 담겼는지 떠올랐지만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성유리는 약을 개봉하더니 물과 함께 꿀꺽 삼키더니 박한빈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왜 저를 찾은 거죠?”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없이 상위에 놓인 약상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예상은 딱 맞아떨어졌고 박한빈은 꽉 쥐었던 주먹에 서서히 힘을 풀었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보며 되물었다. “배 안 고파? 나가서 밥 먹을까?” “저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돼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이미 그녀가 외출복 차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허리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성유리는 유난히 더 아름다웠다. 안 하던 화장까지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묶어 목선이 드러난 성유리를 말없이 쳐다보던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랑 한 약속인데?” “...” 아무 대답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건지도 기억을 못 했다. 몇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진 성유리는 비몽사몽인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의 몸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 서서히 눈을 뜬 성유리는 자기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깨어난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바로 성유리의 종아리를 잡더니 힘껏 그녀를 깔았다. 성유리는 화가 나 손을 뻗어 박한빈의 얼굴이라도 할퀴고 싶었지만 그는 어느새 그녀의 두 손을 다 잡아 자신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박한빈의 힘을 당할 수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는 순순히 따르는 그녀에 더 흥분했다. 가만히 있는 자신을 잡고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며 사랑을 나누고 있던 박한빈이 방심하는 틈을 타 성유리는 그의 배를 강하게 차버렸다. “저 숨 좀 쉬게 놔두면 안 돼요?” 진심이 담긴 자신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그가 정말 정신병자라고 생각했다. 성유리는 옆으로 돌아 박한빈을 애써 무시하며 자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저항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안던 박한빈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할게.” “근데 네가 이렇게 계속 움직이면 난 안 한다는 보장은 못 해.” 박한빈의 말이 성유리에게 먹혔는지 그녀는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시간이 오래 흐르도록 잠에 들지 못한 박한빈은 지금 자기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사람은 아주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어나면 또 나를 그런 눈으로 보겠지.’ 박한빈이 아무리 애를 쓰며 관심을 받고 싶어 해도 성유리는 눈길 한번 돌려주지 않았고 분노와 원망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또 좋아지겠지.’ 박한빈의 강압 아래 다시 혼인을 한 두 사람이니 그는 성유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고 품에 있는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 성유리는 잠에 들었지만 매우 불편한지 미간을 찌푸렸고 박한빈은 서서히 힘을 풀었다. 박한빈은 잠이 든 성유리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성유리는 물이 마시고 싶은 것도 꾹 참고 뒤척거리며 잠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목이 너무 말라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혼자만의 싸움을 벌이던 성유리는 결국 아래 주방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기를 선택했다. 조명이 다 꺼진 집은 어두컴컴했고 성유리는 복도 등만 켠 채로 주방에서 물을 따랐다. 물컵에 물이 가득 채워지는 순간, 성유리의 뒤에서 누군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한 잔만 따라줘.”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성유리는 컵을 떨어뜨렸고 놀란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 보호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그의 손을 뿌리쳤고 박한빈은 멋쩍은 듯 주방으로 걸어가더니 다시 물을 따라 성유리에게 먼저 건넸다. 성유리는 그가 내민 물컵을 무시하고는 다시 혼자 따랐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쳐다만 보다가 표정이 굳어갔다. 갈증을 해소한 성유리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자려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확 낚아채듯 잡았다.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른 쪽 손까지 잡더니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강한 박한빈의 힘에 못 이겨 벽에 딱 붙은 채로 화를 내며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뭐 하려는 것 같은데?” 박한빈은 씩 웃으며 되물었다. “유리야, 오늘 우리 신혼 첫날밤인데?” ‘첫날밤?’ 성유리가 생각에 잠기는 찰나,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온 박한빈의 입에서는 아직 강한 술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는 마치 맹렬한 짐승처럼 성유리의 입술을 탐했다. 성유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더욱 강하게,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 그녀의 두 손은 여전히 박한빈에 의해 꽉 잡혀있었기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잠옷 안으로 천천히 손을 넣었다. 성유리가 입고 있던 잠옷은 박한빈이 방 안에 준비해 둔 실크 잠옷이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다 잠근 성유리
늦은 밤, 도연제. 박한빈은 꽤 늦은 시각이었지만 돌아오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그를 상관하지 않고 혼자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얼굴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을 계단으로 비비자 점점 옅게 변했다. 성유리는 원래 박한빈이 집에 돌아와 자신의 얼굴을 보면 뭐라 할 것 같아 내심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성유리는 오늘 박한빈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진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았다. 똑같은 넓은 집에 똑같이 홀로 남아 남편을 기다리는 것 말이다. 그러나 성유리가 지금 누운 곳은 작은 방이 아닌 큰방이었다. 아마 이런 큰 변화 때문일까, 성유리는 누운 지 한참이 지났지만 잠에 들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차라리 작은 방에 누워있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작은 방은 성유리가 익숙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곳은 익숙한 냄새였지만 성유리와 박한빈에 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고 전과는 사뭇 달랐다. 익숙하고도 낯선 장소는 마치 천천히 자신을 베는 날카로운 칼처럼 느껴졌고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심한 고통이었다. 성유리는 침대에서 한 시간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려고 할 무렵, 아래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으려 눈을 더욱 질끈 감았지만 이내 누군가 벨을 누르는 소리를 들었고 성유리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도 않고 한번, 또 한 번 눌러댔고 성유리는 그제야 집안에 다른 도우미가 없기에 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결국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준 성유리는 문 앞에 서 있는 서훈과 박한빈을 발견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주무시는 데 방해했네요.” 서훈은 잔뜩 움츠러들며 말을 이어갔다. “박 대표님께서 너무 취하시는 바람에 모시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유리는 박한빈과 서훈을 번갈아 보다 문 앞에서 비켜주며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그거랑은 다르죠.” “뭐가 다른데?” 성유리도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며 계속 물었다. “다 알면서 왜 계속 묻는 거죠?” 박한빈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점점 더 실렸다. 성유리는 그와 달리 아주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희는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잖아요. 굳이 결혼식을 해야겠어요?” 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유리랑 같아. 그리고 혼인 신고서도 이미 손에 넣지 않았니? 결혼식은 그저 형식일 뿐이야. 중요하지 않잖니?” “하지만 결혼 사실은 알려야 할 거야. 그러니까 결혼식보다는 연회 같은 거 준비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니?”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더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저는 꼭 결혼식을 치를 겁니다. 이미 다 말해놔서 번복 못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는 김서영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성유리만 쳐다봤다. 성유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지금 자기가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툭 터져버려 공중에서 사라지는 그런 우스운 풍선 말이다. 풍선이 아니라면 떼를 쓰는 어린아이나 관심받고 싶어서 애를 쓰는 철없는 어른이라고 형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옆에서 별의별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어떠한 반응도 해주지 않는 성유리가 미웠고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저는 또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게?” 김서영이 물었다. “회사요.” “그럼 유리는?”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한빈을 보고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마 김서영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속으로 내심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랐지만 성유리는 그러지 않았다. 뒤돌아 빠른 속도로 앞으로 걸어 나가는 박한빈은 사실 별일이 없었지만 빨리 이곳에서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에 김서영은 불쾌함을 느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역시 사모님은 여전히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고 계시네요.” 가볍게 던진 성유리의 한 마디에 김서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사모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다 해서 박한빈 씨를 용서할 생각은 없고요.” 성유리는 찻잔을 상에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박한빈 씨가 업계 상의 위치를 이용해 그렇고 그런 수단과 방법으로 강압하고 위협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됐을 거예요.” “만약 사모님이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다시 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에 뭐라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성유리가 자신의 말에 강하게 반박하고 따졌다면 김서영은 아직 그녀가 박한빈에게 감정이 남아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나도 알아.” 몇 분 뒤, 김서영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름이 연정우라고 했나? 근데 유리 너도 그 남자를 좋아했어?” “네.” 평온한 말투로 제일 듣기 버거운 말을 내뱉는 성유리의 대답에 계단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은 몸이 굳어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성유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연정우와는 그저 평범한 비즈니스 사이라고 성유리가 직접 인정했었다. 왜 결혼을 하냐고 물었을 때도 성유리는 직접 박한빈에게 연정우의 외할아버지가 건강이 악화돼서 서두른다고 알려줬다. ‘어떻게 유리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박한빈의 뒤에 서 있던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집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서영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동공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옆에 있던 성유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김서영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비록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네가 우리 한빈이랑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니까 주는 거야. 이건 내가 결혼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건데 오늘 유리 너한테 넘겨줄게. 처음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받아.” “이건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한빈이는 평생 유리 너랑 살겠다고 마음먹었잖아. 결국 이건 네 손에 들려야 할 거야.”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하는 김서영을 성유리는 조용히 쳐다만 보았다. 눈앞에 있는 김서영은 여전히 성유리가 알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고 전과는 다를 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러한 김서영도 박씨 가문이라는 큰 “철창”에서 벗어나려고 목숨까지 바친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서영이 사랑했던 남자는 이미 세상을 떴고 두 사람의 일은 세상에서 점점 잊혀갔다. 그리고 김서영마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김서영을 대해야 하는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 대신 김서영이 건넨 물건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에게 시선을 휙 돌리더니 입을 뗐다. “할머님 편찮으시다. 올라가서 얼굴이나 뵙고 가. 유리는 여기 놔두고.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유리도 같이 올라가고 싶습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꽉 잡으며 김서영의 말에 거부 의사를 비쳤다. “이미 혼인 신고까지 마쳤는데 내가 설마 유리를 어떻게 하겠니?”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뒤돌아 위층으로 뚜벅뚜벅 올라갔다. “앉아.” 멀뚱멀뚱 서 있는 성유리에게 김서영이 다정하게 말했다.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홍차로 끓였어. 이거 좋아하는 거 맞지?” 성유리는 앞에 놓인 찻잔과 김서영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세요?” 김서영은 말없이 성유리를 쳐다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를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자신이 머무르는 호텔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금성에서는 아마 박한빈이 모르는 곳이 없을 테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찾아낼 수 있다. 다음 날, 성유리가 깨어나자마자 초인 종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앞에는 박한빈이 서 있었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 혼인 신고하러 구청에.” 오늘 다른 정장 외투 없이 깔끔한 하얀 셔츠만 입은 박한빈은 앞머리까지 내려 평소와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마치 수년 전, 자신이 몰래 훔쳐보던 박한빈이 떠올라 멍해졌다. 성유리는 이제야 그때 박한빈의 모습 또한 가짜였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진짜 박한빈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옷은 이미 내가 다 준비했어. 혼인 신고하는 데 필요한 물건은 잘 챙겼지?” 성유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다 아는지 웃으며 계속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는데 이제 와서 미처 못 챙겼다는 말로 시간 끄려는 건 아니지?”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인데? 아니야?” 성유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다 챙겼으니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만족한 듯 더 환하게 웃더니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건네주며 재촉했다. “가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와. 빨리 가자.” 두 사람은 이내 빠르게 구청에 도착했고 성유리는 이번에 3번째 방문이라 딱히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3번이나 같은 남자와 구청에 온 본인이 한심했고 올 때마다 성유리의 마음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결혼이 아닌 두 사람인지라 혼인 신고를 하는 모든 과정을 아주 익숙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장이 꾹 찍힌 혼인 신고서는 그들의 손에 쥐어졌다. 성유리는 혼인 신고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가방 안에 던지듯 넣어버리고는 택시를 타려고 뒤를 돌았다. 하지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그러나 그런 감정도 시간이 지나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고 김서영이 깨어난 날, 박한빈은 기쁘다는 감정보다는 성유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부터 고민했다. 성유리의 죄책감을 끌어낸다는 잔인한 계획은 박한빈도 보통 사람이라면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냉철하고 매정한 교육을 받아온 박한빈은 가능했다. 김서영은 어린 박한빈에게 어떻게 해야만 좋은 상인이 되는지, 어떻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줬었다. 그녀는 결국 박한빈을 자신이 원하던 상인으로 만들어 냈지만 좋은 아들로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만약 보통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유리한테 무슨 짓을 했니?”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김서영이 이빨을 꽉 깨물며 다시 물었다. “유리를 협박이라도 한 거야? 요즘 유리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 어떻게 그래? 이게 바로 너의 수단이야?” “네.” 간단하기만 한 박한빈의 대답에 김서영은 안색이 잔뜩 어두워져갔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요?”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서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어머니가 시킨 결혼 아니었습니까? 성유리가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원하던 대로 됐는데 도대체 왜 화를 내시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가네요.” 김서영은 화를 꾹꾹 참으며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난 네가 내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사람인 줄 몰랐어.” 아무 말이 없는 박한빈을 보던 김서영은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는지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빈아, 전에는 엄마가 잘못했어. 유리는 너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이미 이혼하지 않았니? 지나는 길은 지나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