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정은 말을 하는 한편 손을 뻗어 자신의 어깨끈을 살짝 내렸다. 어두운 조명 아래 보이는 것은 하얀 여자의 속살뿐. 그러나 박한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힐끔 쳐다만 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번에 본가에서 너한테 아주 명확하게 말했던 것 같은데.”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성유정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박한빈의 말에 그때 박씨 본가 앞에서 그에게 거부당했던 그 입맞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성유정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다시 박한빈을 꽉 끌어안았다. “한빈 오빠, 저 진짜 오빠를 많이 좋아해요. 아무런 명분이 없어도 좋으니 딱 이번 한 번만 하고 싶어요.” “전... 소중한 제 첫 몸을 제가 제일 사랑하는 남자에게 주고 싶어요. 한빈 오빠, 그러니까 제발 딱 한 번 만요.” 성유정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애원했다. 예쁜 얼굴을 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말하는 성유정의 모습을 그 어떤 남자도 매정하게 뿌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박한빈은 달랐고 그는 울먹이는 성유정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난 너를 그냥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럴 리가 없어요! 전에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만약 성유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결혼했을 거라고요!” “만약 저를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왜 저한테 그렇게 비싼 선물을 해준 거예요? 저를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왜 저를 안아주셨어요? 한빈 오빠, 이제 더는 저를 속이지 말아요. 오빠의 진실 된 감정을 더는 모른척 하지 마시라고요.” “정말 성유리 씨가 없었다고 해도 난 너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박한빈은 성유정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 “뭐라고요?” 성유정이 박한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너한테서 아무런 욕망이 느껴지지 않아.” 박한빈은 자신이 하려던 말을 담담하게 이어 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어.” 망신.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성유정은 지금 자신의 처지가 한 벌의 옷가지 같아 보였다
“송효주 씨를 만난 거라면 왜 내가 건 전화는 안 받은 거야?” “핸드폰 진동모드로 설정해 둬서 전화 오는 줄도 몰랐어요.” 성유리의 대답을 들은 박한빈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키도 크고 몸도 좋은 박한빈이 좁은 현관 앞으로 가까이 오자 성유리는 말도 설명할 수 없는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두려움 때문인지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등에 문이 닿자 이젠 물러날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성유리는 조용히 박한빈을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눈빛엔 의아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박한빈도 마찬가지로 전혀 당황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성유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박한빈이 그제야 천천히 입을 뗐다. “오늘 성유정이 나한테 전화 왔었어. 너랑 같이 술을 먹고 있다고 하면서.” “제가 걔랑요?” 성유리는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설마?” “응. 나도 처음엔 안 믿었지. 근데 네가 취했다고 하기에 바로 달려갔어.” “왜냐하면 그때까지 성유리 너는 미화로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내 전화도 안 받았기 때문이야.” 박한빈은 성유리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대답을 해주려고 입을 뻥긋거렸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성유정이 호텔 주소 하나를 보내주더니 나보고 오라고 하더라. 우리 둘이 호텔 안에서 뭐 했는지 맞혀봐.” 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성유리에게 계속 말했다. 그의 말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 있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야 모르죠.” “그러니까 맞춰보라고 하는 거잖아.” “저는 맞추기 싫은데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러더니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우리 둘은 아무 일도 없었어.” “전에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있을 리 없어.” “하지만 성유리, 나는 오늘 너한테 크게 실망했다.” “나를 시험하려는
성유정과 원유진은 화장실에서 딱 마주쳤다. 진무열과 성유정이 약혼을 한 뒤로 두 사람의 왕래는 점점 더 잦아졌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이가 나빠진 것은 아니기에 오다가다 서로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었다. “진무열 씨 다쳤다면서요? 요즘은 어때요?” 원유진은 거울 앞에서 화장을 보충하는 성유정을 힐끔 보더니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이미 퇴원도 마친 상태라.” 성유정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며 대답을 했지만 원유진은 그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옛날이랑은 뭐가 좀 달라졌는데?’ 원유진이 더 말을 걸기도 전, 성유정은 이미 화장실에서 나가버렸다. 그 시각, 방 안의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성유정이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와 너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갑작스러운 인파에 성유정은 피할 틈도 없었고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뒤에서 오던 원유진이 그녀를 붙잡아줬다. “다들 테라스로 나가려는 모양이에요.” 원유진이 많이 놀란 성유정을 달래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새해맞이 카운트가 시작되잖아요. 그래서 금성에 오늘 밤 폭죽 쇼가 열린대요.” “네.” 정신을 차린 성유정은 그제야 원유진에게 짧은 대답을 해줬다. “가요. 같이 올라가서 구경이나 하자고요.” 원유진은 성유정의 손을 덥석 잡더니 앞장서서 테라스로 향하기 시작했다. 성유정은 원유진의 뒤에 서서 그녀에게 잡혀있는 것이 싫은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테라스로 도착했을 무렵,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사람들이 다 입구에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유정의 시선은 사람들에 의해 가로막혀있었지만 원유진은 뒤꿈치까지 들어가며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쪽을 쳐다보았다. “박한빈 씨? 저분이 왜 이곳에 있는 거예요?” 원유진은 이내 사람들이 보고 있는 방향에 박한빈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말에 성유정은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근데 옆에 있는 여성분은 누구지?
“미친! 진짜 성유리 맞는데?” “성유정 씨, 언니분이랑 박 대표님 언제부터 다시 만난 거예요?” “아니 도대체 박한빈 씨는 성유리 씨 어디가 마음에 든 거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끊기지 않았고 그 바람에 성유정은 머릿속에서 뭔가가 터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성유정은 아무 말도, 행동도 심지어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테라스에 있던 박한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예상치 못한 인파에 당황해 미간을 찌푸리던 박한빈은 이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성유리를 품에 꼭 안아 그녀를 가려줬다. “박 대표님, 여기서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네요.” 사람들은 일제히 박한빈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새로운 여자 친구이신가 봐요? 저희는 왜 몰랐지?” 오늘 밤 이곳에서 파티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기에 박한빈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넘지 말아야 하는 선도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에 성유리는 등을 돌린 상태로 있었고 지금은 박한빈에 의해 품에 안겨버렸으니 사람들은 다 누구인지 몰라 헷갈려했다. 하지만 원유진의 말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여자가 성유리일 줄은 몰랐다면서 뜨겁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오늘 사람들이 다 이곳에 모여 있는데 저희한테 여자 친구분을 소개해 줄 생각은 없나요?”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박한빈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박한빈은 몰려있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성유리를 놓아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성유리 씨입니다. 아마 다들 아실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런 기복이 없었는데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눈썹으로 사람들은 다 박한빈이 지금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입술에 묻어있는 붉은 무언가의 자국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옆에 있는 성유리의 립스틱과 똑같은 색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당하게 성유리와의 만남을 공개해 버린 박한빈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박한빈과 성유리는 그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폭죽이 터지는 것을 얼마간 지켜보다가 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성유리는 그때까지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고 바로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를 썼다. 박한빈은 질 세라 더 세게 힘을 주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고 그로 인해 성유리는 팔이 부러질 듯 아팠다. “아! 저 진짜 확 물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성유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박한빈을 째려보며 말했다. “어디를 물 건데?” 그의 대답에 성유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입을 꾹 닫았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집에 갈래요.” 성유리가 이빨을 꽉 깨물며 말했다. “응. 같이 가자.” 박한빈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좁아터진 제 집에서 지내는 게 박 대표님은 불편하지도 않으세요?” “그럼 네가 나랑 같이 시월파크가서 살래? 아니면 도연제?” “안 가요.” 성유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묵묵히 차에 올라탔다. 성유리는 조수석에 앉아 고개를 휙 돌려 창밖만 주시했고 박한빈은 운전석에서 그런 그녀를 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 말이야.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돼.” “저는 박 대표님이 하도 카리스마 있는 분이셔서 저를 끌고 갈 줄 알았는데.” 성유리는 박한빈을 비꼬듯 대답했다. “오호라, 이런 방법도 있었단 말이지.” “한번 해보시던가요.” 성유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매운탕 먹으러 갈래?” 박한빈은 이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안 가요.” “직접 가서 먹고 싶지 않다면 집으로 배달시키자.” “그럼 온 집안에 다 냄새 나잖아요. 그리고 또 그 집이 누구 집인데.” 박한빈은 또다시 실실 웃음을 지었고 성유리는 전에는 못 보던 그의 웃음에 잠시 멍
두 사람의 영혼은 마치 한데 엉겨 붙은 듯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춰주었다. 옆집 사람은 이미 이사를 간 상태지만 성유리는 큰 소리를 차마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참을 수가 없을 때는 박한빈의 목을 세게 물었다. 박한빈은 아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성유리에 의해 물리고는 그녀의 턱을 살짝 움켜쥐더니 미친 듯이 키스를 했다. 집안은 조명 하나도 켜지지 않아 어두웠고 창밖에서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그때, 누군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성유리도 그 소리를 듣고는 바로 박한빈을 밀어냈지만 박한빈은 멈추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전화를 거는 사람은 끈질기게 계속 걸었고 성유리가 박한빈을 몇 번이나 불러서야 그는 짜증 나 하며 전화를 받으러 갔다. “여보세요?” 박한빈의 잠긴 목소리에는 화가 서려 있었다. 수화기 너머 발신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한빈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하며 물었다. “그래서요?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얼마 뒤, 박한빈은 잔뜩 굳은 표정을 하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그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며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다. “왜 그래요?” 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집에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그렇다고 봐야지. 구체적인 상황은 가서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아니면 나랑 같이 갈래?”“아니요. 안 가요.” 성유리는 고민하지도 않고 거절했다. 그녀의 단호한 모습에 박한빈은 웃음을 터뜨리며 땅에 떨어뜨린 옷가지들을 주우며 말했다. “먼저 가볼게. 아마 다시 못 돌아올 거야. 문단속 잘하고.” “네.” “갈게.” 박한빈은 얼른 밖으로 나설 채비를 했고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박한빈은 갑자기 무언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휙 돌렸다. 성유리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시 몸이 굳어갔고 박한빈은 씩 미소를 짓더니 문을 닫
그 시각, 박씨 저택 안. 김난희의 생활 루틴은 늘 똑같기에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지금 시간에 자고 있었야 했다. 그리고 박씨 가문 사람들은 다 김난희의 루틴을 알기에 그녀를 도와주고 시간이 되면 알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 새벽 1시가 거의 다 되는 시간이지만 박씨 저택에는 환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집사는 이미 오랫동안 밖에서 박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차가 저택 안에 들어서자 다급하게 달려오며 말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박한빈은 집사를 흘깃 쳐다보고는 물었다. “지금 안에 상황은 어떻습니까?” “어르신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그리고 사모님도 돌아오셨고요. 두 사람이 서로 말이 잘 안 통하시는 것 같은데... 도련님께서 들어가셔서 잘 좀 해결해 보십시오.” 집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은 얼른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사가 말한 대로 집 안의 분위기는 살벌했고 차가운 공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김난희는 한껏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는데 두 손은 소파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김서영이 가만히 서 있었다. 비록 머리는 숙이고 있었지만 등은 곧게 펴고 있어 잘못을 반성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을 발견하고는 얼른 그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래! 한빈이 마침 잘 왔다.” “너! 아까는 말만 잘하지 않았니? 이제 네 아들 앞에서 한번 똑같이 말해 보거라.”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김서영을 쳐다보았다. 김서영은 김난희의 말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김난희는 그녀의 태도에 불같이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보아하니 이제야 창피한 줄 아는 모양이구나! 네 스스로 말하기가 부끄러우면 내가 대신 말해주마!” “한빈아, 네 엄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 우리 박씨 가문의 밥을 먹고 우리 가문의 자원을 써가며 다른 남자랑 한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정말 박씨 가문의
김난희가 던진 무거운 찻잔은 그대로 박한빈의 뒤통수에 날아가 버렸다. 무방비 상태로 머리를 맞은 박한빈은 아픈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피는 머리카락을 따라 줄 줄 흘러 내려왔다. 찻잔을 던진 김난희가 놀라 멍해 있을 때, 집사가 급히 박한빈에게 달려가 물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이거...”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의 손을 치워버리더니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김서영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그녀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뭡니까?” 냉랭한 그의 목소리에 김서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김서영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박한빈이 지금 마치 진실 된 대답을 원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은 김서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김서영이 어찌 친아들인 박한빈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박한빈이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김서영은 그의 목적을 알아차렸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박한빈을 막았다.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알아봐야죠.” 김서영의 물음에 박한빈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알아내면? 그 다음엔?” 김서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계속 말했다. “이건 내 일이야!” “그렇습니까?” 박한빈은 피식 웃더니 대답을 이어갔다. “박씨 가문에 사모님이라는 분이 지금 다른 남자랑 연애를 하고 있다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제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고 할머니도 연세가 있으신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으십니까? 할머니를 속상하게 해서 좋으십니까?” 박한빈은 마치 김난희를 매우 신경 쓰고 있고 사랑하는 것처럼 따져 물었다. 그러나 김서영의 눈에 박한빈은 김난희의 기분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손에 있는 지분들을 탐내는 것 같아 보였다. 김서영이 김난희의 기분을 망쳤다면 자연스럽게 박한빈에게도 피해가 갈 것이 분명했
하지만 그 전제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할 때만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이 자신을 봤을 때는 어땠었나!차갑고 경멸적인 표정, 그리고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치 자신이 반드시 그 돈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때는 결국 그 돈을 받았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박한빈이 자신을 경멸할 이유는 될 수 없었다.그리고 자신이 성유리와 첫 만남에서 느꼈던 설렘과 그때 그동안 그녀에게 쏟았던 감정을 떠올리며 그저 억울하고 분하고 불만이 치밀었다.“너 지금 뭘 하려는 거야?”성유리는 그의 몸에서 전해지는 위협적인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계속 뒤로 물러섰지만 염우섭은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염우섭은 소름 끼치게 웃으며 말했다.“답은 간단해. 네가 나랑 한 번만 자면 돼.”“뭐라고?”성유리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정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하지만 염우섭은 금세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시*, 진짜 순진한 척하지 마. *같으니까!”“진즉에 더럽혀진 여자라는 거 알고 있었어. 아침에 그 남자가 너네 집에서 나오는 거 봤다고. 참 대단하다. 엄마 몰래 그런 짓이나 하고.”“정 그렇게 욕망을 못 참겠다면 내가 도와줄게.”염우섭은 말하며 한 걸음 더 다가와 성유리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그만둬. 이거 놔!”성유리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염우섭은 그 손을 더욱 강하게 쥐고 그녀를 잡아끌며 쓰러뜨렸다.“소리 지른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진정하라고. 곧 너도 소리칠 때가 올 거니까.”염우섭은 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그때 그 일이 없었으면 넌 이미 내 아내였을 텐데. 그때 너랑 만날 때는 내 입술조차 대지 못하게 해서 되게 깨끗한 여자인 줄 알았어. 근데 결국 너도 그냥 남들 발에 밟히는 더러운 존재였어. 오늘 내가 너 무조건 먹...”남자의
성유리는 결국 먼저 방을 나섰는데 방을 나서자마자 문을 쾅 닫았다.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표현숙은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문은 왜 닫는 거야?”“아, 그냥 습관이에요.”성유리는 대충 얼버무리다가 표현숙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표현숙은 여전히 의아해했지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후, 표현숙은 뒷산으로 약초를 채취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시장에 팔기 위해서라고 하면서.성유리는 어차피 표현숙을 어떻게든 멀리할 생각이었기에 이때가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랑 같이 가.”표현숙이 제안하자 성유리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예전에도 여러 번 같이 갔던 일이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결국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물 두 병만 가져가요.”하지만 나가기 전에 성유리는 갑자기 말없이 문을 확인하며 말했다.“문은 제가 닫을게요.”그 말은 생각보다 꽤 크게 나와서 방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다 들을 수 있었다.표현숙은 그런 성유리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누구한테 말하는 거야?”“그... 그게... 엄마한테요.”“내가 여기 옆에 있는데 왜 그래? 내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성유리는 옅게 웃으면서도 곧바로 표현숙의 팔을 잡고 함께 나갔다.“가요, 빨리 다녀오자고요.”표현숙은 딸의 이상한 행동에 조금 의문을 느꼈지만 성유리의 친근한 모습에 금세 잊어버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얘, 이제 결혼도 할 나이가 다 됐는데 아직도 애처럼 왜 이래?”성유리는 그냥 웃어 보였다.표현숙이 말한 뒷산은 사실 마을의 더 깊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곳은 숲이 넓어서 햇볕도 잘 들지 않고 산길을 따라가면 작은 시냇가도 여러 개 나왔다.시냇가에는 가재나 작은 게도 잡을 수 있었다.성유리는 약초를 알지 못했기에 표현숙은 성유리에게 바구니를 들게 하고 작은 시냇가 옆에서 게나 달팽이를 주워 오라고 했다.표현숙의 말대로 성유리가 열심히 주워 모으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엄마, 봐요. 제가 또 이
“저 밤새 못 잤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잠시 쉴 수 있을까요?”“그럼 왜 당신 방에서 자지 않으세요?”“당신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어서요.”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성유리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박한빈의 호흡이 금세 고르고 평온해진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봤다.박한빈의 얼굴에는 선명한 다크서클이 있었고 평소 깔끔했던 턱선에 작은 수염도 보였다. 성유리는 그의 손을 밀쳐내려던 생각을 접고 손을 천천히 내렸다.박한빈도 자신이 이렇게 빨리 잠이 들 줄은 몰랐다.성유리를 찾았지만 사실 지난 며칠간 그는 잘 자지 못했었다. 자주 깨어나거나, 이곳 환경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성유리의 방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비록 여전히 낮고 습한 집,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성유리의 향기와 햇볕에 말린 이불의 냄새가 그를 아주 편안하게 만들었다.성유리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에 들었다.박한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녀의 잠이 달아났지만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점차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성유리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설아, 왜 아직 안 일어났어? 아픈 거 아니야?”성유리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바로 눈을 떴다.순간 박한빈 또한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깨어나려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계속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민설아?”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졌고 행여나 박한빈이 말을 할까 봐 걱정되어 그의 입을 재빨리 막아버렸다.그리고는 급히 대답했다.“저... 금방 일어날게요.”“괜찮아? 몸이 아픈 거 아니지?”“괜찮아요. 그냥 피곤해서 오래 잔 것뿐이에요. 금방 일어날게요.”성유리는 손발이 바빠지며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박한빈의 다친 손을 우연히 건드렸다.강한 고통에 박한빈은 즉시 움찔하며 신음을 했고 성유리는 깜짝 놀라서 그의 입을 다시 막았다.평소 큰 목소리로 말하는 할머니
박한빈은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이곳에는 인터넷도 없어서 일을 하며 정신을 분산시킬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 앨범을 반복해서 보며 문밖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박한빈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래서 그의 휴대폰에 두 사람의 사진은 거의 없었다. 성유리가 실종되었던 그 시간 동안, 그는 그 사진들을 모두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보았다.몇 번을 넘기던 박한빈은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자기 말이 농담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진짜로 성유리를 찾으러 벽을 넘으려고 했다.하지만 곧 그는 자신이 한 쪽 팔에 아직 보호대를 차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이 몸으로 높은 벽을 넘는 건 불가능했다.결국 박한빈은 벽 밖에 서서 문만 응시했다.성유리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박한빈은 돌아서서 다시 자기 방으로 갔다.동이 틀 무렵, 마침내 그는 이웃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그 소리는 바로 할머니가 괭이를 들고 밭에 나간 것이었다.박한빈은 주저하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이 마을은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아 있기에 그 흔한 도둑도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성유리의 방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녀의 창문은 훨씬 낮았다.그 덕에 박한빈은 힘들지 않게 창을 넘어 들어갔다.그는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지만 성유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지 이불을 덮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깨울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손을 내리게 되었다.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의 뺨에 손을 살짝 대었다.그 차가운 느낌에 성유리는 몸을 살짝 떨더니 눈을 번쩍 떴다.자신의 침대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보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그리고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박한빈이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저예요.”성유리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창밖의 희미한 빛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후, 힘겹게 입을 열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
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아는 남편인지 의심스러워졌다.그들은 한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기에 그가 성유리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그래서 그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고자 했던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박한빈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듯, 천천히 물었다.“어머니랑 떨어지기 싫으신 거죠?”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걱정 마십시오, 저는 지금 당장 유리 씨를 데려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금성 쪽에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거기 일이 끝나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죠.”“그리고 유리 씨 어머니는... 나중에 저희가 돌아갈 때 같이 모시고 가면 되니까 걱정 마십시오. 당신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 아주 잘 보답할 테니까.”잠시 정적이 흐른 후,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하지만 유리 씨는 어머니라는 분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안 됩니다. 당신은 이미 제 아내잖습니까. 만약 유리 씨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그건 바람이고 저한테는 무책임한 겁니다.”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성유리가 대답하지 않는 걸 보더니 점점 더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듣고 계시는 거죠?”성유리는 박한빈과 눈을 맞춘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유리 씨는 이제 어머니라는 분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셨습니까?”“뭐를요?”“당연히 당신은 결혼 못 한다는 얘기죠. 상대방이 누구든 상관없으니 결혼하면 안 됩니다.”“알겠어요.”성유리는 처음에는 이 얘기가 끝난 줄 알았지만,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럼 저와 유리 씨가 무슨 사이인지는 어머니한테 뭐라고 설명할 겁니까?”“저희는... 무슨 사이죠?”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유리 씨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방금 제가 한 말은 듣지도
박한빈은 원래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낼 생각이 없었다.의사가 말했듯이 혈종이 가라앉으면 성유리가 스스로 그 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을 못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그는 짧은 시간 이곳에 있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유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이 늘 원하던 모성애를 느꼈을 것이다.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결혼이었다. 성유리의 나이가 적당해지면서 바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고 첫 키스도 웨딩 촬영 중에 했다.그래서 박한빈은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그 모든 걸 잊었다면 다시 ‘구애’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겠다고.그때는 그들이 함께하지 않았던 연애라는 과정을 보충할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박한빈이 이미 성유리를 찾았는데 만약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그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그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을 것이다.박한빈의 말이 끝난 후, 성유리는 그가 예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영화에서 기억을 잃은 사람이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 보통은 머리가 아프다고 하지 않던가.그런데 성유리는 전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박한빈을 쳐다보고 있었다.박한빈은 행여나 성유리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걱정되어 계속 말을 이어갔다.“당신 배에 약 5cm 정도 되는 상처 자국이 있을 겁니다. 그건 하늘이를 낳을 때 생긴 거죠.”“왼쪽 허벅지 안쪽에 빨간 점이 있고 허리 쪽에도...”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갑자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의 목소리가 멈췄다.박한빈이 더 이상 말을 못 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성유리는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그걸... 박한빈 씨가 어떻게 아세요?”“당신은 제 아내입니다. 그러니 유리 씨 몸에 제가 모르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박한빈은 오히려 태연하게 되물었고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왜 안 갔습니까?”“뭐라고요?”“왜 병원에 안 갔냐고 물었습니다. 집에서 결혼할 준비라도 하고 있는 겁니까?”박한빈은 말하며 한 걸음 가까이 성유리에게로 다가갔다.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성유리의 몸에서 뭔가를 끌어내려는 듯했고 그녀는 순간 멈칫했지만 금세 대답했다.“저... 저한테 꼭 가야 한다는 말 안 하셨잖아요?”“성유리 씨는 저를 돌봐준다고 했잖습니까.”“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건 박한빈 씨 혼자 결론 내린 거예요.”성유리는 바로 반박했다.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저는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해요.”“뭐라고요?”“박한빈 씨 곁에... 예전에도 분명히 여자들이 많았겠죠?”성유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전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 그 여자들과 다르니까... 만약 박한빈 씨가 그냥 장난치려는 거라면 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마세요.”성유리의 목소리에는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눈가는 조금 붉어져 있었고 목이 떨리며 뭔가를 삼키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박한빈은 잠시 그런 성유리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전에는 성유리가 그냥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돌아와서 잘 달래면 될 거라 여겼었다.하지만 방금 그녀와 표현숙의 대화를 듣고 나니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때 성유리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그날 ‘숙련된’ 기술로 그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걸 깨달았다.성유리는 입으로는 자신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손은 박한빈을 밀어내지 않고 있었다.게다가 눈가는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잠시 바라본 후, 물었다.“그래서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아니요!”성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부인했다.그리고 빠르게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사람은 원래 계속 소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근처 이웃들을 다 불러 모을 기세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소리를 지르는 여인은 박한빈을 ‘도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래는 불안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박한빈이 그녀를 쳐다볼 때 눈동자에는 냉기가 돌고 있었다.그 눈빛은 여인의 입에서 나올 말까지 삼켜버리게 만들었다. 그때, 표현숙이 물건을 들고나왔다.할머니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이 개자식, 또 왔어? 정말 죽고 싶은 거구나. 그래, 지금 당장 너를 지옥에 보내주지.”말하면서 표현숙은 박한빈에게 위험해 보이는 도구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마치 예전처럼.하지만 이번에는 박한빈이 표현숙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때만 해도 박한빈의 한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렇지만 한 손만으로도 표현숙의 손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한 힘에 할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때 성유리도 안에서 나왔고 박한빈을 보자 그녀도 잠시 멈칫했다.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다가갔다.“엄마, 물건 먼저 내려놔요.”“안 돼! 이 자식이 분명히 너를 괴롭히려고 했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있어. 엄마가 널 지켜줄게.”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박한빈을 다시 쓱 쳐다보았다.그리고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표현숙의 손을 밀쳐냈다.그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기에 표현숙은 밀려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얼마나 사납고 강한 사람인지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렇게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표현숙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고 계속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그녀를 막아섰다.“엄마, 이제 그만하시고 들어가세요.”“안 돼.”표현숙은 바로 단호하게 대답했다.“내가 들어가면 너는 어쩌려고?”“저분은 저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있잖아요.
“응, 아빠가 약속할게.”박한빈은 이 호칭에 원래 낯설고 어색함을 느꼈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부드러움을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그렇게 확답을 듣자 하늘이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도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도 맑고 화창하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행복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다음 날, 성유리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그뿐만이 아니었다.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록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박한빈은 의사의 만류도 무시한 채 강제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가 없이 운행하는 개인 차량을 빌려 바로 마을로 돌아왔다.그리고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은 채, 곧장 성유리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집 앞에 다다르자마자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난 유씨네 그 총각이 괜찮다고 본다니까. 대학생이잖아. 지금은 월급이 좀 적다고 해도 집도 있다잖아? 너희는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면 되지. 돈이 그렇게 중요해?”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굳었다.마치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행복감?지금 느껴지는 것은 오직 냉기뿐이었다.‘이 노파가 성유리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낼 생각인 건가?’‘정말 미쳤나? 성유리가 진짜 자기 딸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자기를 어머니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진짜 친정엄마라도 된 줄 아는 거 아니야?’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했다.그러나 애써 발걸음을 뚝 멈췄다.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침묵뿐이었다.그래서 더욱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그러던 중,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