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희가 던진 무거운 찻잔은 그대로 박한빈의 뒤통수에 날아가 버렸다. 무방비 상태로 머리를 맞은 박한빈은 아픈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피는 머리카락을 따라 줄 줄 흘러 내려왔다. 찻잔을 던진 김난희가 놀라 멍해 있을 때, 집사가 급히 박한빈에게 달려가 물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이거...”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의 손을 치워버리더니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김서영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그녀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뭡니까?” 냉랭한 그의 목소리에 김서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김서영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박한빈이 지금 마치 진실 된 대답을 원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은 김서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김서영이 어찌 친아들인 박한빈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박한빈이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김서영은 그의 목적을 알아차렸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박한빈을 막았다.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알아봐야죠.” 김서영의 물음에 박한빈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알아내면? 그 다음엔?” 김서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계속 말했다. “이건 내 일이야!” “그렇습니까?” 박한빈은 피식 웃더니 대답을 이어갔다. “박씨 가문에 사모님이라는 분이 지금 다른 남자랑 연애를 하고 있다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제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고 할머니도 연세가 있으신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으십니까? 할머니를 속상하게 해서 좋으십니까?” 박한빈은 마치 김난희를 매우 신경 쓰고 있고 사랑하는 것처럼 따져 물었다. 그러나 김서영의 눈에 박한빈은 김난희의 기분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손에 있는 지분들을 탐내는 것 같아 보였다. 김서영이 김난희의 기분을 망쳤다면 자연스럽게 박한빈에게도 피해가 갈 것이 분명했
그날 밤 내내 성유리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계속 뒤척거렸지만 깊은 잠에 빠지지 못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너무 피곤해 스르르 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자신의 옆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아직 제대로 정신이 들지 않아 눈을 열심히 뜨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잘 안됐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을 때 성유리는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악!” 깜짝 놀란 성유리가 비명을 지르자 이윽고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힘없는 그의 목소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서서히 정신이 들었고 다리를 들어 그에게 발차기를 날리려 했다. 어쩌다 깊은 잠에 빠져 자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깨버렸으니 사람이라면 다 화가 날 만한 상황 아닌가! 성유리가 다리를 치켜들자 박한빈은 곧바로 그녀의 다리를 손으로 꽉 잡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 밑에 누워있던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다리를 잡히는 순간, 너무 추워졌다. “이거 놔요! 손이 너무 차잖아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다리를 더 꽉 잡더니 바로 성유리에게 쓰러지듯 안겨버렸다. “저기...” 성유리가 뭐라 하려고 입을 떼려고 하니 박한빈은 머리를 한껏 숙인 채로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성유리는 자신의 이불을 잡고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강한 박한빈의 힘에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박한빈의 머리를 잡으려는 그때, 성유리는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왜 이렇게 축축하지?’ 창문을 통해 은은하게 들어오는 불빛으로 박한빈의 머리를 자세히 본 성유리는 빨간색 피를 발견했다. 너무도 놀라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성유리는 박한빈을 마구 흔들며 물었다. “다쳤어요? 머리에 왜 피가 나는 거예요? 박한빈 씨, 일어나 봐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조급해졌고 박한빈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
박한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밤에 할머니랑 어머니가 엄청 크게 싸웠어. 왜 싸운 줄 알아?” 그의 말에 성유리는 몸이 잔뜩 굳었지만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물었다. “네? 왜죠?”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연애를 해서.” 비록 성유리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성유리가 무슨 대답을 하기 전,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넌 알고 있었던 거네?” “네?” “성유리, 나한테 거짓말하려고 하지 마.”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전처럼 싸늘했다. 입술을 꽉 물고 있던 성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한빈이 또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성유리에게 박한빈이 살짝 짜증을 내며 말했다. “말하라고.” “그게 지금 중요해요?” 그 순간, 성유리가 되물었다. “사실 제 생각에 이 일은요...” “당연히 중요하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끊어버리더니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고 있었으면서 나를 속인 거네? 너는 네 선택이 얼마나 멍청한 선택인지 알아?” “네가 미리 알려줬으면 난 준비라도 해뒀을 거야. 이렇게 오늘처럼 갑자기 어머니가 할머니께 들킬 일은 없게 만들었을 거라고!”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우리 아버지가 밖에서 낳은 사생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했던 말. 우리 엄마가 여태까지 나를 박씨 가문에 남겨둔 이유가 바로 지화그룹과 지분들 때문이라고.” “오늘 같이 이런 일이 갑자기 일어나게 하다니. 너 진짜 우리 할머니가 밖에 있는 새끼들한테 지분을 넘기는 꼴을 나한테 보여주려고 그랬어?” 박한빈이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자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어쩌면 성유리는 조금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에 자기 앞에서 이런 사적인 일들은 하지 않던 박한빈이 지금 이
박한빈은 성유리의 집을 또다시 떠났다. 그날 밤 뒤로 박한빈은 며칠간 미화로 쪽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성유리는 이번에 박한빈이 단단히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이제 진짜 끝인 건가?’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성유리는 방 안 곳곳에 남아있는 박한빈의 흔적들을 살폈다. 소파에 한참을 멍때리고 앉아 있던 성유리는 더 이상 안 되겠는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이 시간 동안 성유리는 혼자서 요리를 해 먹기를 즐겼다. 비록 그녀의 요리 실력은 좋지가 않지만 박한빈은 늘 성유리가 해준 음식들을 남기지 않고 싹 먹어 치웠었다. 성유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음식을 두 가지나 준비해 지화그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막상 지화그룹 대문에 서 있으니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사모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성유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이라는 칭호는 이미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성유리의 발걸음을 늘 멈췄었다. 서훈은 성유리에게 빠르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사모님이시군요! 어떻게 이곳에 다 오셨습니까?” “그게...” “아! 박 대표님 뵈러 오신 거지요? 마침 잘 됐습니다. 저랑 함께 가시죠.” 서훈은 아주 기뻐하며 성유리를 안내했다. “박 대표님 위에 계십니다. 사모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아신다면 무조건 저처럼 기뻐하실 겁니다.” 성유리는 서훈의 뒤를 따라가며 몇 번이나 거절을 하려했지만 그의 환한 미소를 발견하고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사무실로 도착했지만 성유리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고개를 돌려 서훈에게 물었다. “오늘 박 대표님 기분은 어때 보여요?” 서훈은 예상치 못한 성유리의 질문에 당황하더니 곧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모님 얼굴을 보신다면 꼭 좋아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는 말이네요?”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서 답안을 알아차렸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박한빈은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안 드실 거예요?” 성유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박한빈에게 되묻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상위에 놓인 도시락을 쳐다봤다. “가지볶음이랑 닭고기 좀 했어요.” 박한빈의 시선을 확인한 성유리는 재빨리 그에게 무슨 음식인지를 알려줬다. “그래?” 박한빈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거절은 하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도시락을 들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도시락을 내려놓자마자 박한빈이 갑자기 손을 뻗어 성유리를 덥석 잡아 자기 무릎에 앉히고는 말했다. “성유리, 난 네가 전부터 나를 계속 속인다고 생각했어.” 박한빈은 복수라도 하듯 성유리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제가 뭘 속이는데요?” “정말 진심으로 나를 좋아했어?”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바로 굳어버렸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 사무실 밖에서 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사모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무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윽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김서영이었지만 성유리는 다행히 서훈의 목소리를 들듣은는 순간 박한빈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김서영의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성유리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녀가 성유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김서영은 성유리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해 버리고는 박한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 맞지?”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려 서훈을 쳐다봤다. 그러자 서훈은 빠르게 김서영에게 다가가 빌 듯이 말했다. “사모님, 저랑 함께 손님 실로 갑시다. 이곳은...” “지금 나는 꼭 답을 알아야겠다. 박한빈, 네가 한 짓이 맞아?” 김서영은 잔뜩 화를 내며 박한빈에게 따졌다. “네가 일부로 사람을 시켜 그 사람 회사를 그딴 식으로 대한 거야? 네가 어떻게 그래?” “왜 그러면 안 됩니까?” 서훈이 김서영을 데리고 나
성유리가 다시 김서영을 만났을 때는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김서영이 먼저 주동적으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카페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목적을 몰랐기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 금성을 떠나려고 해.”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김서영은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줬다. 김서영의 말에 놀란 성유리는 눈이 두 배로 커지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세요?” “그냥 그런 뜻이지.” “저번에 그 일 때문에 그러세요? 어머님 지금 한빈 씨한테 화가 나셔서...” “아니야.”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을 끊어버리며 대답했다. “내가 왜 떠나려는지 말해줄게. 그 사람은 저번에 한빈이가 했던 테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이야.” 김서영의 대답에 성유리는 천천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서 어머님 생각은...” “금성에는 우리 둘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게다가 수년 동안 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질릴 대로 질려서 숨도 잘 안 쉬어져. 나도 더 이상 이렇게 살기는 싫어서 정한 거야.” “아무도 우리 둘을 모르는 곳에 가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했어.” “요즘 말로는 야반도주한다고 할 수 있지. 사랑을 위해서.” 김서영은 말만 해도 행복한지 환하게 웃었다. 성유리는 예전부터 늘 김서영의 미모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박한빈이 김서영을 닮아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잘생겼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늘 김서영은 한 폭의 그림 속에 사는 여인처럼 그 아름다움은 그저 외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성유리는 오늘 처음으로 김서영의 웃음에서 그녀의 진심과 진짜 감정을 알아보았다. ‘저렇게 웃으시는 걸 보니까 심장이 너무 빨리 뛰네.’ 한참 뒤,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한빈 씨는 이 일을 아나요?” “모르지. 알려줄 생각도 없고.” “그러시면 안 되지 않나요?” 성유리가 김서영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그래도 한빈 씨 어머니신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숨기면 안 되잖아요.” “만약 걔가
성유리는 김서영이 건넨 편지봉투가 마치 폭탄같이 느껴져 자신의 서랍 안에 넣어두는 것이 불안했다. 결국 성유리는 편지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있는 자신의 책꽂이 사이에 넣어두었다. 책들 사이에 작은 편지봉투가 껴있었지만 성유리는 편지봉투가 제일 눈에 잘 들어왔다. 하지만 저녁에 돌아온 박한빈은 그 편지봉투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요즘 그의 컨디션은 거의 최상을 찍고 있었는데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았다. 성유리가 이 집에서 떠나기를 계속 거부하자 박한빈은 그냥 그녀의 옆에 있는 빈집을 월세를 내며 살았다. 그래서 현재, 더 이상 그 어떤 누구도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오늘 밤 금성에는 올해 첫눈이 내려 박한빈은 유독 신나 했지만 성유리는 무관심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창가로 끌고 가더니 “강박적”으로 그녀를 내리는 눈을 보게 만들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그만하고 돌아가자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요구 하나를 제안했다. “여보라고 불러. 그러면 생각해 볼게.” “여보. 여보 우리 제발 돌아가요.” 성유리가 박한빈을 몇 번이나 “여보”라고 불러준 후에야 그는 다시 성유리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박한빈이 거의 끝이 날 때쯤에 성유리는 이미 잠에 들기 직전인 상태였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 성유리를 바라보던 박한빈은 그녀를 업고는 욕실로 향했다. “며칠 뒤에 우리 둘이 도인국 한번 갈까?” 박한빈이 물었다. “갑자기 도인국은 왜요?” “휴가. 가서 눈도 보고.” 그의 대답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해가더니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그 뜻이 아니라 진짜로 눈 구경하러 가자고.”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대답했다. “관심 없어요.” “난 관심 있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줘.” 말을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를 욕실 구석까지 가둬두고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
깊은 밤의 병원은 늘 유난히 이상하게 느껴진다.복도 끝의 그 빛나는 구조등은 마치 빨간 피처럼 마음을 졸이게 했다.성유리는 의외로 지금 응급실 앞에 박한빈의 비서 외에 성유정도 함께 앉아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그녀의 몸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는 듯했는데 안색이 창백한 채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한빈 오빠!”긴장의 끈이 풀린 듯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나... 오빠 왔어? 어떻게 해? 아줌마가 많이 다치셨어. 그러다가...”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보았지만 이내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비서에게 눈길을 돌렸다.“아직 사고 조사를 하고 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도로에는 다른 차량은 없었고 사모님의 차는 갑자기 통제력을 잃고 돌진해 버렸다고 합니다.”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차에는... 진성민 씨도 계셨는데 방금 의사 선생님께서 응급처치 중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비서는 말을 돌려 하느라 노력했지만 박한빈의 안색은 지극히 보기 힘들었다.성유정은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한빈 오빠, 지금... 언론 쪽부터 신경 쓰는 게 어때?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안 좋은 기사가 쏟아질 게 뻔해.”“뭐라고?”그녀를 돌아보며 묻는 박한빈의 한마디는 진지한 질문 같기도 하고 협박 같기도 했다.하지만 성유정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아줌마가 낯선 남자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언론에서 함부로 추측할 거야.”말을 마친 성유정이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언니, 언니는 사정을 아는 사람으로서 왜 아줌마를 말리지 않았어?”성유리는 이럴 때 자신이 아무리 위로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박한빈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는데 성유정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어리둥절해졌다.그녀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성유정은 이미 계속 말했다.“아줌마가 오늘 밤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성유정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날카로운 눈빛
병원에서는 아무 말 없던 하늘이가 병원을 나서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뛰어다니면서도 성유리의 손을 놓지 않았고 가끔 뒤를 돌아보며 밝게 웃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 뭐 먹고 싶어?” “엄마가 간장 베이스로 만든 닭 날개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마트 가서 재료 사자. 어때?” 하늘이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마트 가서 카트도 탈래요.” 성유리는 흔쾌히 허락했다.최근 하늘이가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지 쇼핑카트에 앉아 있어도 성유리에게는 전혀 무리 되지 않았다. 마트의 밝은 조명 아래 하늘이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 성유리는 마음이 놓였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하늘이었다. “엄마! 저거 사고 싶어!” 하늘이는 오랜만에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나와서인지 잔뜩 흥분했고 작은 다리를 흔들며 쇼핑카트를 이리저리 움직이려 했다. 성유리는 조미료의 제조 일자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쇼핑카트가 그녀 손에서 벗어나 앞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이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잡으려 했지만 이미 카트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갔다. “꺅!” 그때, 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마트 안을 울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급히 쇼핑카트를 잡아당기며 연신 사과했다. “제가 아이를 잘 보지 못했네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여성은 화가 난 듯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서인지 억지로 화를 삭이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이 데리고 나왔으면 조심해야죠!” “맞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허리를 공손하게 숙이며 사과했다. 하늘이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는지 여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성유리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는 그녀의 다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하늘이 앞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말을 걸었다. “하늘이 방금 깨어났는데 언니가 안 보이니까 너무 투정을 부려서 제가 언니한테 전화했어요.” “봤어. 근데 그때는 내가 좀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네.”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대답해 주며 하늘이의 침대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그래? 우리 하늘이 엄마가 보고 싶었어?” 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유리의 손을 바라봤다. “내 사자 인형은?” 방금까지 울었던 건지 하늘이의 눈은 조금 붉어져 있었고 목소리는 쉰 상태였다. 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며 대답해 줬다. “미안해. 하늘아, 엄마가 사자 인형을 못 찾았어. 대신 엄마가 새로 하나 사 줄게. 그래도 괜찮을까?” “새로 산 게 예전 거랑 똑같아요?” 하늘이의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하늘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근데 저는 예전 그 사자 인형이 좋은데.” “알아. 엄마도... 다 알아.” 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다시 가서 꼭 찾아볼게. 괜찮지? 걱정하지 마. 사자 인형은 그냥 숨바꼭질하는 거야. 엄마가 꼭 찾아줄게. 알았지?” 하늘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난 엄마 믿어.” 성유리는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제 밥 먹을 준비하자. 하늘이는 뭐 먹고 싶어? 엄마가 사다 줄게.” “엄마가 만든 만둣국 먹고 싶어요.” “알겠어. 지금 사 올게. 여기서 기다려줘. 대신 이모랑 같이 잘 놀고 있을래?”하늘이는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사하나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다리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별일 아니야. 그냥 어디에 좀 부딪혀서 조금 아픈 것뿐이지.”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에 박한빈은 살짝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졌고 안색마저 어두워졌다. 바로 그때, 성유리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인형을 찾던 동작을 멈춘 성유리는 손을 쭉 뻗어 휴대폰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때, 박한빈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성유리의 휴대폰은 그의 힘에 밀려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떨어진 휴대폰 화면에는 발신자 이름이 또렷하게 보였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사하나였다. 박한빈의 입가에는 또다시 조롱 섞인 미소가 드리워지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사하나 씨랑 꽤 친해졌나 보네?”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 네가 사는 이 집도 사하나 씨가 마련해 준 거겠지? 지금 네가 이렇게 초라하게 살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난 네가 날 떠난 뒤 더 좋은 남자를 만나 멋지게 살 줄 알았어.” 그는 성유리를 비웃으며 계속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엔 연예인이랑 엮였었다며? 그런데 네가 팬들에게 둘러싸여 모욕당할 때는 그 연예인이 아무 말도 안 했더라? 참 안됐다.” 박한빈의 조롱은 끝이 없었고 그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조금의 슬픈 감정도 없었다. 박한빈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슨 감정이라도 읽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저 조용히 서 있다가 그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말씀 끝나셨어요? 다 끝났으면 제 손 좀 놔줘요.” 그녀의 냉정한 반응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을 쥔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성유리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제 대답에서 뭘 얻고 싶은 거죠? 제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당신을 떠난 걸 후회한다고 말하길 원하세요?” “그렇게 해서 박한빈 씨가 얻고 싶은 게 뭔데요?” “박한빈 씨, 당신은 지금 충분히 성공했잖아요.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사실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런 감정
사하나가 마련해 준 집은 병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집들은 대부분 오래된 탓에 성유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발에 묻은 피는 이미 닦아냈지만 피가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길고 깊은 상처는 마치 다른 감정 없이 벌어진 입처럼 보였다. 성유리는 어처구니없게도 빨간 상처 자국이 마치 웃고 있는 입 같아서 섬뜩했다. 겨우겨우 그녀가 탄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성유리는 상처를 간단히 소독한 뒤 하늘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긴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숨길 수 없었다. 특히 하늘이가 찾고 싶어 하던 작은 사자 인형을 찾으려고 몇 번이고 방을 오가며 헤매는 모습은 더더욱 다친 사람인 것이 티가 났다. 세 번째로 상자를 열었을 때도 인형이 보이지 않자 성유리는 점점 불안해졌고 찾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좌절하기도 했다. 결국 쇼핑 앱을 열어 같은 인형을 새로 사려고 했지만 화면을 본 순간 멍해졌다. 그 인형은 이미 단종되어 더 이상 구매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건가?”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박한빈이 서 있었다. 사하나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늘이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를 따라온 이유는 대체 뭘까?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성유리는 박한빈의 눈빛 속에 담긴 조롱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한빈은 어지러운 집 안 풍경을 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기까지 했다. 그의 기억 속 성유리는 어떤 집에서 살더라도 항상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있는 공간은 항상 정돈된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정리되지 못한 수많은 상자들뿐이었다. 심지어 일부 상자는 그녀가 찾던 물건을 꺼내려다 열어 둔 상태라 더욱 어수선해 보였다
“당신은...” “아까 경찰 부르셨다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거죠? 제가 대신 한 번 전화를 걸어볼까요? CCTV 자료도 요청해 볼 겸.” “아니요! 됐습니다. 오늘 제 재수가 없는 거로 치죠.” 남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휙 돌려 떠나가 버렸다. 서훈은 떠나가는 운전자를 굳이 막지 않고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남자의 차량 번호판을 찍었다. 그 후, 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성유리 씨, 괜찮으세요?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성유리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곧바로 앞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종아리의 통증은 여전히 느껴졌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절뚝거리며 사람들의 시야에서 애써 벗어났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도착하자 약국에 들러 간단히 상처를 처치할 물품을 샀다. “이거 뭐에 긁히셨길래 그러신 거예요? 파상풍 주사 맞아야 할 수도 있는데요.” 약사는 피가 줄줄 흐르는 그녀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 “상처가 꽤 심한데요.” “괜찮아요. 우선 소독약하고 거즈만 주세요. 나중에 병원 가서 주사 맞을게요.” 성유리가 연신 괜찮다고 말하자 약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필요한 물품을 빠르게 계산해 주었다. 약을 받은 성유리가 약국을 나서려는 순간, 약사는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치 성유리가 그곳을 더럽혔을까 봐 걱정하는 듯한 눈치였다.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재촉했고 문을 열고 나가는 그때, 성유리는 저 멀리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발걸음을 뚝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는 박한빈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차에 기댄 채로 있었고 저무는 햇살이 가로수 사이로 비쳐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빛은 그의 뚜렷하고 강인한 이목구비를 더 뚜렷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여전히 뛰어난 외모였다. 지금의 그는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 같아 보였고 성유리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과거 박한빈의
사하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침묵만으로도 성유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성유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음, 잘됐네.” “뭐가요?” 사하나는 이미 나있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드러내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성유리가 박한빈에 관한 주제로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가 이렇게 애써 담담한 척하는 모습을 보니 사하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그 사람을 어디서 만났는지 알아요? 그 사람이 맞선을 보려고 했다고요! 그리고는 나한테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말했어요. 언니가 생각해 봐도 너무 냉정하지 않나요?” 사하나는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이보다 적합한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괜찮아요.” 사하나는 시무룩해 보이는 성유리를 보고는 금세 손까지 내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 쓰레기는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생각해요. 걱정 마세요. 저희는 앞으로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거니까.” 성유리는 살짝 웃어 보이며 하늘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하늘이가 평범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거야. 그 외의 모든 건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사하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그래요. 언니 말이 맞아요. 반드시 그렇게 될 거고요.” ... 사하나의 말 덕분에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디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의 태도를 사하나를 통해 들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녀가 직접 박한빈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지금처럼 담담하게 있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된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과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를 다시 만날 이유도 다시 얽힐 필요도 없어졌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병실 안에는 성유리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유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하늘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한편 하늘이는 그림책을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 최근에 살이 빠진 탓에 커다란 눈이 더 두드러졌고 창백한 피부 때문에 마치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유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들은 하늘이는 고개를 들어 입구를 쓱 쳐다보았다.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사하나를 보자마자 하늘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모!” 평소 같았으면 사하나는 활기차게 반응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박한빈의 차가운 반응이 그녀를 너무나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의 일, 그리고 성유리가 자신에게 털어놓았던 자세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때 성유리가 박한빈을 떠난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그녀가 “가라앉는 배”인 그를 서둘러 떠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박한빈이 성유리를 원망하는 것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늘이는 그의 친딸 아닌가? 사하나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냉정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러던 그녀는 곧 하늘이와 성유리가 겪어온 일들과 성유리가 출산과 산후조리 때 겪었던 고통들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자신이 옆에 없었다면 성유리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 모든 걸 박한빈은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걸까? 이제 와서 친딸인 하늘이가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는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무관심한 걸까? 수많은 의문들과 이해가지 않는 박한빈의 행동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모!” 하늘이의 밝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제야 사하나는 정신을 차리고 하늘이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이상하게 여긴 하늘이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성유리 또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하나를 보고 있었다.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사하나는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대
하룻밤이 지나가자 사하나는 한결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녀는 이번 일이 박한빈의 계략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설령 진짜 결혼을 생각한다 해도 금성에 이렇게 많은 명문가 출신의 아가씨들 중 왜 하필 자신을 선택했을까?그는 분명히 자신과 성유리의 관계를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혹시 일부러 그런 건 아닐까?’ 일부러 자신과 맞선을 보고 이 사실을 성유리에게 알리려는 의도, 그녀를 질투하게 하고 괴롭게 만들려는 계산일 수도 있다. 사하나는 생각할수록 박한빈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졌다.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녀의 분노는 어느새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사하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세심하게 단장한 후 약속 장소인 카페로 향했다.그러나 카페에서 박한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를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한빈은 그녀를 보더니 많이 놀란 듯해 보였다. 분명 박한빈은 여기서 그녀를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 자신과 맞선을 볼 사람이 사하나라는 것을 아예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사하나가 전날 밤 머릿속에서 그렸던 모든 시나리오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사하나의 계획과는 달리 박한빈은 진짜로 결혼을 하려는 거였다. 그녀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박한빈을 뚫여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사하나는 이미 수백 번 박한빈을 찔렀을 것이다. “사하나 씨.” 박한빈은 매우 태연하게 그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만나는 사람이 당신일 줄은 몰랐습니다.” “오? 그럼 누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사하나는 박한빈을 비웃듯 물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근데 사하나 씨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군요. 그렇죠?”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말했다. “당신은 성유리의 친구죠. 그러니까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그럼 이만.” 그는 말을 마치자
“아니야!” 류수미는 쏘아붙이는 사하나의 말에 너무 급한 나머지 손을 쭉 뻗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이어가려 했다. “이번에 소개받은 사람은 바로 지화그룹의 박 대표야!” 사하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행동을 멈췄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내려간 뒤에서야 사하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누구라고요? 지화그룹에는 두 명이 있잖아요. 둘 중 어떤 박 대표 말씀이세요?” “지금 지화그룹에 박한빈 대표 빼고 대표가 또 있긴 해?” 류수미는 좀처럼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은 사하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줬다. “박세빈 그 사람을 몇 년 전에 박한빈이 해외로 보냈잖아. 경험을 쌓으라고 보내긴 했지만 사실상 포기나 다름없었지.” “그래서 말인데 그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어쩜 친형제한테도 그럴 수 있어? 네 아버지가 그 사람을...” “잠깐만요.”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려 하자 사하나는 서둘러 류수미의 말을 뚝 끊었다. “아까 그 얘기로 돌아가요. 박한빈 씨가 저랑 맞선을 본다고요?” “맞아. 그 사람 조건 어때?” “미치셨어요?” 사하나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면 박세빈 씨가 미쳤나요? 저랑 유리 언니가 어떤 사이인지 모르는 건가요?” “그러니까 내가 이 얘길 빨리하는 거지. 네가 보기엔 이거 심각한 문제 아니야?” 류수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사하나에게 되물었고 그 말에 사하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해졌다. “그래서 넌 갈 거야 안 갈 거야?” 류수미가 다시 물었다. “당연히...” 사하나는 단호히 거절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맞선을 본다는 건 분명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거 아닌가요?” “누가 알겠어? 어쩌면 네가 첫 번째일지도 모르지.” “네? 그러니까 지금 박한빈 씨가 맞선을 보면서 새로운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