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밤에 할머니랑 어머니가 엄청 크게 싸웠어. 왜 싸운 줄 알아?” 그의 말에 성유리는 몸이 잔뜩 굳었지만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물었다. “네? 왜죠?”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연애를 해서.” 비록 성유리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성유리가 무슨 대답을 하기 전,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넌 알고 있었던 거네?” “네?” “성유리, 나한테 거짓말하려고 하지 마.”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전처럼 싸늘했다. 입술을 꽉 물고 있던 성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한빈이 또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성유리에게 박한빈이 살짝 짜증을 내며 말했다. “말하라고.” “그게 지금 중요해요?” 그 순간, 성유리가 되물었다. “사실 제 생각에 이 일은요...” “당연히 중요하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끊어버리더니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고 있었으면서 나를 속인 거네? 너는 네 선택이 얼마나 멍청한 선택인지 알아?” “네가 미리 알려줬으면 난 준비라도 해뒀을 거야. 이렇게 오늘처럼 갑자기 어머니가 할머니께 들킬 일은 없게 만들었을 거라고!”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우리 아버지가 밖에서 낳은 사생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했던 말. 우리 엄마가 여태까지 나를 박씨 가문에 남겨둔 이유가 바로 지화그룹과 지분들 때문이라고.” “오늘 같이 이런 일이 갑자기 일어나게 하다니. 너 진짜 우리 할머니가 밖에 있는 새끼들한테 지분을 넘기는 꼴을 나한테 보여주려고 그랬어?” 박한빈이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자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어쩌면 성유리는 조금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에 자기 앞에서 이런 사적인 일들은 하지 않던 박한빈이 지금 이
박한빈은 성유리의 집을 또다시 떠났다. 그날 밤 뒤로 박한빈은 며칠간 미화로 쪽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성유리는 이번에 박한빈이 단단히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이제 진짜 끝인 건가?’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성유리는 방 안 곳곳에 남아있는 박한빈의 흔적들을 살폈다. 소파에 한참을 멍때리고 앉아 있던 성유리는 더 이상 안 되겠는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이 시간 동안 성유리는 혼자서 요리를 해 먹기를 즐겼다. 비록 그녀의 요리 실력은 좋지가 않지만 박한빈은 늘 성유리가 해준 음식들을 남기지 않고 싹 먹어 치웠었다. 성유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음식을 두 가지나 준비해 지화그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막상 지화그룹 대문에 서 있으니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사모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성유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이라는 칭호는 이미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성유리의 발걸음을 늘 멈췄었다. 서훈은 성유리에게 빠르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사모님이시군요! 어떻게 이곳에 다 오셨습니까?” “그게...” “아! 박 대표님 뵈러 오신 거지요? 마침 잘 됐습니다. 저랑 함께 가시죠.” 서훈은 아주 기뻐하며 성유리를 안내했다. “박 대표님 위에 계십니다. 사모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아신다면 무조건 저처럼 기뻐하실 겁니다.” 성유리는 서훈의 뒤를 따라가며 몇 번이나 거절을 하려했지만 그의 환한 미소를 발견하고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사무실로 도착했지만 성유리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고개를 돌려 서훈에게 물었다. “오늘 박 대표님 기분은 어때 보여요?” 서훈은 예상치 못한 성유리의 질문에 당황하더니 곧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모님 얼굴을 보신다면 꼭 좋아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는 말이네요?”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서 답안을 알아차렸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박한빈은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안 드실 거예요?” 성유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박한빈에게 되묻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상위에 놓인 도시락을 쳐다봤다. “가지볶음이랑 닭고기 좀 했어요.” 박한빈의 시선을 확인한 성유리는 재빨리 그에게 무슨 음식인지를 알려줬다. “그래?” 박한빈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거절은 하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도시락을 들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도시락을 내려놓자마자 박한빈이 갑자기 손을 뻗어 성유리를 덥석 잡아 자기 무릎에 앉히고는 말했다. “성유리, 난 네가 전부터 나를 계속 속인다고 생각했어.” 박한빈은 복수라도 하듯 성유리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제가 뭘 속이는데요?” “정말 진심으로 나를 좋아했어?”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바로 굳어버렸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 사무실 밖에서 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사모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무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윽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김서영이었지만 성유리는 다행히 서훈의 목소리를 들듣은는 순간 박한빈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김서영의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성유리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녀가 성유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김서영은 성유리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해 버리고는 박한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 맞지?”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려 서훈을 쳐다봤다. 그러자 서훈은 빠르게 김서영에게 다가가 빌 듯이 말했다. “사모님, 저랑 함께 손님 실로 갑시다. 이곳은...” “지금 나는 꼭 답을 알아야겠다. 박한빈, 네가 한 짓이 맞아?” 김서영은 잔뜩 화를 내며 박한빈에게 따졌다. “네가 일부로 사람을 시켜 그 사람 회사를 그딴 식으로 대한 거야? 네가 어떻게 그래?” “왜 그러면 안 됩니까?” 서훈이 김서영을 데리고 나
성유리가 다시 김서영을 만났을 때는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김서영이 먼저 주동적으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카페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목적을 몰랐기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 금성을 떠나려고 해.”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김서영은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줬다. 김서영의 말에 놀란 성유리는 눈이 두 배로 커지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세요?” “그냥 그런 뜻이지.” “저번에 그 일 때문에 그러세요? 어머님 지금 한빈 씨한테 화가 나셔서...” “아니야.”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을 끊어버리며 대답했다. “내가 왜 떠나려는지 말해줄게. 그 사람은 저번에 한빈이가 했던 테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이야.” 김서영의 대답에 성유리는 천천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서 어머님 생각은...” “금성에는 우리 둘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게다가 수년 동안 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질릴 대로 질려서 숨도 잘 안 쉬어져. 나도 더 이상 이렇게 살기는 싫어서 정한 거야.” “아무도 우리 둘을 모르는 곳에 가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했어.” “요즘 말로는 야반도주한다고 할 수 있지. 사랑을 위해서.” 김서영은 말만 해도 행복한지 환하게 웃었다. 성유리는 예전부터 늘 김서영의 미모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박한빈이 김서영을 닮아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잘생겼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늘 김서영은 한 폭의 그림 속에 사는 여인처럼 그 아름다움은 그저 외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성유리는 오늘 처음으로 김서영의 웃음에서 그녀의 진심과 진짜 감정을 알아보았다. ‘저렇게 웃으시는 걸 보니까 심장이 너무 빨리 뛰네.’ 한참 뒤,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한빈 씨는 이 일을 아나요?” “모르지. 알려줄 생각도 없고.” “그러시면 안 되지 않나요?” 성유리가 김서영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그래도 한빈 씨 어머니신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숨기면 안 되잖아요.” “만약 걔가
성유리는 김서영이 건넨 편지봉투가 마치 폭탄같이 느껴져 자신의 서랍 안에 넣어두는 것이 불안했다. 결국 성유리는 편지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있는 자신의 책꽂이 사이에 넣어두었다. 책들 사이에 작은 편지봉투가 껴있었지만 성유리는 편지봉투가 제일 눈에 잘 들어왔다. 하지만 저녁에 돌아온 박한빈은 그 편지봉투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요즘 그의 컨디션은 거의 최상을 찍고 있었는데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았다. 성유리가 이 집에서 떠나기를 계속 거부하자 박한빈은 그냥 그녀의 옆에 있는 빈집을 월세를 내며 살았다. 그래서 현재, 더 이상 그 어떤 누구도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오늘 밤 금성에는 올해 첫눈이 내려 박한빈은 유독 신나 했지만 성유리는 무관심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창가로 끌고 가더니 “강박적”으로 그녀를 내리는 눈을 보게 만들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그만하고 돌아가자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요구 하나를 제안했다. “여보라고 불러. 그러면 생각해 볼게.” “여보. 여보 우리 제발 돌아가요.” 성유리가 박한빈을 몇 번이나 “여보”라고 불러준 후에야 그는 다시 성유리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박한빈이 거의 끝이 날 때쯤에 성유리는 이미 잠에 들기 직전인 상태였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 성유리를 바라보던 박한빈은 그녀를 업고는 욕실로 향했다. “며칠 뒤에 우리 둘이 도인국 한번 갈까?” 박한빈이 물었다. “갑자기 도인국은 왜요?” “휴가. 가서 눈도 보고.” 그의 대답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해가더니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그 뜻이 아니라 진짜로 눈 구경하러 가자고.”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대답했다. “관심 없어요.” “난 관심 있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줘.” 말을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를 욕실 구석까지 가둬두고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
깊은 밤의 병원은 늘 유난히 이상하게 느껴진다.복도 끝의 그 빛나는 구조등은 마치 빨간 피처럼 마음을 졸이게 했다.성유리는 의외로 지금 응급실 앞에 박한빈의 비서 외에 성유정도 함께 앉아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그녀의 몸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는 듯했는데 안색이 창백한 채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한빈 오빠!”긴장의 끈이 풀린 듯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나... 오빠 왔어? 어떻게 해? 아줌마가 많이 다치셨어. 그러다가...”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보았지만 이내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비서에게 눈길을 돌렸다.“아직 사고 조사를 하고 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도로에는 다른 차량은 없었고 사모님의 차는 갑자기 통제력을 잃고 돌진해 버렸다고 합니다.”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차에는... 진성민 씨도 계셨는데 방금 의사 선생님께서 응급처치 중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비서는 말을 돌려 하느라 노력했지만 박한빈의 안색은 지극히 보기 힘들었다.성유정은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한빈 오빠, 지금... 언론 쪽부터 신경 쓰는 게 어때?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안 좋은 기사가 쏟아질 게 뻔해.”“뭐라고?”그녀를 돌아보며 묻는 박한빈의 한마디는 진지한 질문 같기도 하고 협박 같기도 했다.하지만 성유정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아줌마가 낯선 남자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언론에서 함부로 추측할 거야.”말을 마친 성유정이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언니, 언니는 사정을 아는 사람으로서 왜 아줌마를 말리지 않았어?”성유리는 이럴 때 자신이 아무리 위로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박한빈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는데 성유정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어리둥절해졌다.그녀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성유정은 이미 계속 말했다.“아줌마가 오늘 밤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성유정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날카로운 눈빛
그러고 나서 박한빈의 비서도 앞으로 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뭐라고 말했다.박한빈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이 여론이 내일 인터넷에 터지면...”“사람 찾아 일단 눌러. 그리고 진성민의 가족에게 연락해.”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냉정했다.“박씨 저택 쪽은 내가 직접 가서 말할 거야.”말을 던진 그는 이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다가 성유리 곁을 지날 때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듯 말했다.“내가 먼저 데려다줄게.”“전... 오늘 밤에 병원 쪽에 남을게요.”사모님이 ICU에 계셔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성유리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갑자기 박한빈과 함께 있는 것이 두려워졌다.방금 한 성유정의 말에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김서영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정말 몰랐다.그녀는 김서영이 정말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내 말대로 해.”박한빈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따라갔다.“몰랐어요...”차에 오른 성유리는 결국 입을 열었다.“한빈 씨 어머니가 그럴 줄은...”“성유정이 방금 한 말, 너에게 뭘 줬다고 했어.”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게 뭐야?”“서류예요...”“어디 있어?”미화로에 돌아온 성유리는 가장 먼저 그 서류를 박한빈에게 건넸다.그런 물건이 눈에 확 띄는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본 박한빈은 자기도 모르게 쌀쌀하게 웃었다.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건만 들고 돌아섰다.“한빈 씨!”성유리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그는 발걸음은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 괜찮아요? 한빈 씨 어머니 일은 제가 설명할 수 있어요...”“설명할 필요 없어.”이 말을 던진 박한빈은 계속 앞으로 나갔다.성유리는 그 자리에 혼자 서 있다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온
성유정이 그녀를 찾았을 때, 성유리는 막 슈퍼마켓에서 돌아왔다.그녀는 손에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성유정을 보는 순간 손이 굳어졌다.성유정은 계단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왔어?”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성유정은 또 한 번 싱긋 웃더니 물었다.“나를 보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보러 왔어.”성유정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한빈 오빠는 요즘 너무 바빠서 언니를 돌볼 수 없을 거야. 나는 언니의 동생이니 당연히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언니를 걱정해줘야지.”“그럼 이제 가도 돼.”성유리는 대답하면서 그녀를 스쳐 계속 걸어갔다.예전에 성유리가 이런 태도로 말했으면 성유정은 펄쩍 뛰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고 반대로 성유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성유리, 아직도 박한빈이 널 지켜줄 거로 생각해? 아직도 모르겠어? 너랑 한빈 오빠는... 이젠 불가능해.”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성유정을 바라보았다.그녀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어머니가 이렇게 큰일을 당했는데 한빈 오빠가 언니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아?”성유리는 손을 꽉 잡은 채 뒤 마침내 소리 내 말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아줌마가 준 서류가 뭔지 알아?”성유정은 빙긋 웃으며 성유리에게 답안을 말해줬다.“한빈 오빠에게 주는 유서야.”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성유정은 얼마 안 지나 돌아갔고 성유리는 계단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그때 밑에서 누군가 올라오다가 센서 등이 켜지는 순간 그만 비명을 질렀다.“깜짝 놀랐잖아.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야? 귀신 분장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거야?”여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몸이 굳은 채 자신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빨간색 머리를 한 그 여자가 따라오며 물
하지만 그 전제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할 때만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이 자신을 봤을 때는 어땠었나!차갑고 경멸적인 표정, 그리고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치 자신이 반드시 그 돈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때는 결국 그 돈을 받았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박한빈이 자신을 경멸할 이유는 될 수 없었다.그리고 자신이 성유리와 첫 만남에서 느꼈던 설렘과 그때 그동안 그녀에게 쏟았던 감정을 떠올리며 그저 억울하고 분하고 불만이 치밀었다.“너 지금 뭘 하려는 거야?”성유리는 그의 몸에서 전해지는 위협적인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계속 뒤로 물러섰지만 염우섭은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염우섭은 소름 끼치게 웃으며 말했다.“답은 간단해. 네가 나랑 한 번만 자면 돼.”“뭐라고?”성유리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정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하지만 염우섭은 금세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시*, 진짜 순진한 척하지 마. *같으니까!”“진즉에 더럽혀진 여자라는 거 알고 있었어. 아침에 그 남자가 너네 집에서 나오는 거 봤다고. 참 대단하다. 엄마 몰래 그런 짓이나 하고.”“정 그렇게 욕망을 못 참겠다면 내가 도와줄게.”염우섭은 말하며 한 걸음 더 다가와 성유리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그만둬. 이거 놔!”성유리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염우섭은 그 손을 더욱 강하게 쥐고 그녀를 잡아끌며 쓰러뜨렸다.“소리 지른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진정하라고. 곧 너도 소리칠 때가 올 거니까.”염우섭은 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그때 그 일이 없었으면 넌 이미 내 아내였을 텐데. 그때 너랑 만날 때는 내 입술조차 대지 못하게 해서 되게 깨끗한 여자인 줄 알았어. 근데 결국 너도 그냥 남들 발에 밟히는 더러운 존재였어. 오늘 내가 너 무조건 먹...”남자의
성유리는 결국 먼저 방을 나섰는데 방을 나서자마자 문을 쾅 닫았다.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표현숙은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문은 왜 닫는 거야?”“아, 그냥 습관이에요.”성유리는 대충 얼버무리다가 표현숙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표현숙은 여전히 의아해했지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후, 표현숙은 뒷산으로 약초를 채취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시장에 팔기 위해서라고 하면서.성유리는 어차피 표현숙을 어떻게든 멀리할 생각이었기에 이때가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랑 같이 가.”표현숙이 제안하자 성유리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예전에도 여러 번 같이 갔던 일이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결국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물 두 병만 가져가요.”하지만 나가기 전에 성유리는 갑자기 말없이 문을 확인하며 말했다.“문은 제가 닫을게요.”그 말은 생각보다 꽤 크게 나와서 방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다 들을 수 있었다.표현숙은 그런 성유리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누구한테 말하는 거야?”“그... 그게... 엄마한테요.”“내가 여기 옆에 있는데 왜 그래? 내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성유리는 옅게 웃으면서도 곧바로 표현숙의 팔을 잡고 함께 나갔다.“가요, 빨리 다녀오자고요.”표현숙은 딸의 이상한 행동에 조금 의문을 느꼈지만 성유리의 친근한 모습에 금세 잊어버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얘, 이제 결혼도 할 나이가 다 됐는데 아직도 애처럼 왜 이래?”성유리는 그냥 웃어 보였다.표현숙이 말한 뒷산은 사실 마을의 더 깊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곳은 숲이 넓어서 햇볕도 잘 들지 않고 산길을 따라가면 작은 시냇가도 여러 개 나왔다.시냇가에는 가재나 작은 게도 잡을 수 있었다.성유리는 약초를 알지 못했기에 표현숙은 성유리에게 바구니를 들게 하고 작은 시냇가 옆에서 게나 달팽이를 주워 오라고 했다.표현숙의 말대로 성유리가 열심히 주워 모으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엄마, 봐요. 제가 또 이
“저 밤새 못 잤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잠시 쉴 수 있을까요?”“그럼 왜 당신 방에서 자지 않으세요?”“당신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어서요.”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성유리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박한빈의 호흡이 금세 고르고 평온해진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봤다.박한빈의 얼굴에는 선명한 다크서클이 있었고 평소 깔끔했던 턱선에 작은 수염도 보였다. 성유리는 그의 손을 밀쳐내려던 생각을 접고 손을 천천히 내렸다.박한빈도 자신이 이렇게 빨리 잠이 들 줄은 몰랐다.성유리를 찾았지만 사실 지난 며칠간 그는 잘 자지 못했었다. 자주 깨어나거나, 이곳 환경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성유리의 방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비록 여전히 낮고 습한 집,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성유리의 향기와 햇볕에 말린 이불의 냄새가 그를 아주 편안하게 만들었다.성유리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에 들었다.박한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녀의 잠이 달아났지만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점차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성유리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설아, 왜 아직 안 일어났어? 아픈 거 아니야?”성유리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바로 눈을 떴다.순간 박한빈 또한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깨어나려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계속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민설아?”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졌고 행여나 박한빈이 말을 할까 봐 걱정되어 그의 입을 재빨리 막아버렸다.그리고는 급히 대답했다.“저... 금방 일어날게요.”“괜찮아? 몸이 아픈 거 아니지?”“괜찮아요. 그냥 피곤해서 오래 잔 것뿐이에요. 금방 일어날게요.”성유리는 손발이 바빠지며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박한빈의 다친 손을 우연히 건드렸다.강한 고통에 박한빈은 즉시 움찔하며 신음을 했고 성유리는 깜짝 놀라서 그의 입을 다시 막았다.평소 큰 목소리로 말하는 할머니
박한빈은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이곳에는 인터넷도 없어서 일을 하며 정신을 분산시킬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 앨범을 반복해서 보며 문밖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박한빈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래서 그의 휴대폰에 두 사람의 사진은 거의 없었다. 성유리가 실종되었던 그 시간 동안, 그는 그 사진들을 모두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보았다.몇 번을 넘기던 박한빈은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자기 말이 농담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진짜로 성유리를 찾으러 벽을 넘으려고 했다.하지만 곧 그는 자신이 한 쪽 팔에 아직 보호대를 차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이 몸으로 높은 벽을 넘는 건 불가능했다.결국 박한빈은 벽 밖에 서서 문만 응시했다.성유리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박한빈은 돌아서서 다시 자기 방으로 갔다.동이 틀 무렵, 마침내 그는 이웃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그 소리는 바로 할머니가 괭이를 들고 밭에 나간 것이었다.박한빈은 주저하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이 마을은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아 있기에 그 흔한 도둑도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성유리의 방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녀의 창문은 훨씬 낮았다.그 덕에 박한빈은 힘들지 않게 창을 넘어 들어갔다.그는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지만 성유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지 이불을 덮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깨울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손을 내리게 되었다.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의 뺨에 손을 살짝 대었다.그 차가운 느낌에 성유리는 몸을 살짝 떨더니 눈을 번쩍 떴다.자신의 침대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보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그리고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박한빈이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저예요.”성유리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창밖의 희미한 빛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후, 힘겹게 입을 열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
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아는 남편인지 의심스러워졌다.그들은 한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기에 그가 성유리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그래서 그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고자 했던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박한빈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듯, 천천히 물었다.“어머니랑 떨어지기 싫으신 거죠?”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걱정 마십시오, 저는 지금 당장 유리 씨를 데려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금성 쪽에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거기 일이 끝나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죠.”“그리고 유리 씨 어머니는... 나중에 저희가 돌아갈 때 같이 모시고 가면 되니까 걱정 마십시오. 당신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 아주 잘 보답할 테니까.”잠시 정적이 흐른 후,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하지만 유리 씨는 어머니라는 분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안 됩니다. 당신은 이미 제 아내잖습니까. 만약 유리 씨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그건 바람이고 저한테는 무책임한 겁니다.”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성유리가 대답하지 않는 걸 보더니 점점 더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듣고 계시는 거죠?”성유리는 박한빈과 눈을 맞춘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유리 씨는 이제 어머니라는 분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셨습니까?”“뭐를요?”“당연히 당신은 결혼 못 한다는 얘기죠. 상대방이 누구든 상관없으니 결혼하면 안 됩니다.”“알겠어요.”성유리는 처음에는 이 얘기가 끝난 줄 알았지만,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럼 저와 유리 씨가 무슨 사이인지는 어머니한테 뭐라고 설명할 겁니까?”“저희는... 무슨 사이죠?”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유리 씨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방금 제가 한 말은 듣지도
박한빈은 원래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낼 생각이 없었다.의사가 말했듯이 혈종이 가라앉으면 성유리가 스스로 그 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을 못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그는 짧은 시간 이곳에 있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유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이 늘 원하던 모성애를 느꼈을 것이다.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결혼이었다. 성유리의 나이가 적당해지면서 바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고 첫 키스도 웨딩 촬영 중에 했다.그래서 박한빈은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그 모든 걸 잊었다면 다시 ‘구애’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겠다고.그때는 그들이 함께하지 않았던 연애라는 과정을 보충할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박한빈이 이미 성유리를 찾았는데 만약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그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그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을 것이다.박한빈의 말이 끝난 후, 성유리는 그가 예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영화에서 기억을 잃은 사람이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 보통은 머리가 아프다고 하지 않던가.그런데 성유리는 전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박한빈을 쳐다보고 있었다.박한빈은 행여나 성유리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걱정되어 계속 말을 이어갔다.“당신 배에 약 5cm 정도 되는 상처 자국이 있을 겁니다. 그건 하늘이를 낳을 때 생긴 거죠.”“왼쪽 허벅지 안쪽에 빨간 점이 있고 허리 쪽에도...”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갑자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의 목소리가 멈췄다.박한빈이 더 이상 말을 못 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성유리는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그걸... 박한빈 씨가 어떻게 아세요?”“당신은 제 아내입니다. 그러니 유리 씨 몸에 제가 모르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박한빈은 오히려 태연하게 되물었고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왜 안 갔습니까?”“뭐라고요?”“왜 병원에 안 갔냐고 물었습니다. 집에서 결혼할 준비라도 하고 있는 겁니까?”박한빈은 말하며 한 걸음 가까이 성유리에게로 다가갔다.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성유리의 몸에서 뭔가를 끌어내려는 듯했고 그녀는 순간 멈칫했지만 금세 대답했다.“저... 저한테 꼭 가야 한다는 말 안 하셨잖아요?”“성유리 씨는 저를 돌봐준다고 했잖습니까.”“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건 박한빈 씨 혼자 결론 내린 거예요.”성유리는 바로 반박했다.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저는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해요.”“뭐라고요?”“박한빈 씨 곁에... 예전에도 분명히 여자들이 많았겠죠?”성유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전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 그 여자들과 다르니까... 만약 박한빈 씨가 그냥 장난치려는 거라면 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마세요.”성유리의 목소리에는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눈가는 조금 붉어져 있었고 목이 떨리며 뭔가를 삼키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박한빈은 잠시 그런 성유리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전에는 성유리가 그냥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돌아와서 잘 달래면 될 거라 여겼었다.하지만 방금 그녀와 표현숙의 대화를 듣고 나니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때 성유리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그날 ‘숙련된’ 기술로 그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걸 깨달았다.성유리는 입으로는 자신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손은 박한빈을 밀어내지 않고 있었다.게다가 눈가는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잠시 바라본 후, 물었다.“그래서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아니요!”성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부인했다.그리고 빠르게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사람은 원래 계속 소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근처 이웃들을 다 불러 모을 기세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소리를 지르는 여인은 박한빈을 ‘도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래는 불안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박한빈이 그녀를 쳐다볼 때 눈동자에는 냉기가 돌고 있었다.그 눈빛은 여인의 입에서 나올 말까지 삼켜버리게 만들었다. 그때, 표현숙이 물건을 들고나왔다.할머니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이 개자식, 또 왔어? 정말 죽고 싶은 거구나. 그래, 지금 당장 너를 지옥에 보내주지.”말하면서 표현숙은 박한빈에게 위험해 보이는 도구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마치 예전처럼.하지만 이번에는 박한빈이 표현숙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때만 해도 박한빈의 한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렇지만 한 손만으로도 표현숙의 손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한 힘에 할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때 성유리도 안에서 나왔고 박한빈을 보자 그녀도 잠시 멈칫했다.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다가갔다.“엄마, 물건 먼저 내려놔요.”“안 돼! 이 자식이 분명히 너를 괴롭히려고 했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있어. 엄마가 널 지켜줄게.”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박한빈을 다시 쓱 쳐다보았다.그리고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표현숙의 손을 밀쳐냈다.그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기에 표현숙은 밀려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얼마나 사납고 강한 사람인지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렇게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표현숙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고 계속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그녀를 막아섰다.“엄마, 이제 그만하시고 들어가세요.”“안 돼.”표현숙은 바로 단호하게 대답했다.“내가 들어가면 너는 어쩌려고?”“저분은 저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있잖아요.
“응, 아빠가 약속할게.”박한빈은 이 호칭에 원래 낯설고 어색함을 느꼈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부드러움을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그렇게 확답을 듣자 하늘이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도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도 맑고 화창하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행복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다음 날, 성유리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그뿐만이 아니었다.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록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박한빈은 의사의 만류도 무시한 채 강제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가 없이 운행하는 개인 차량을 빌려 바로 마을로 돌아왔다.그리고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은 채, 곧장 성유리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집 앞에 다다르자마자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난 유씨네 그 총각이 괜찮다고 본다니까. 대학생이잖아. 지금은 월급이 좀 적다고 해도 집도 있다잖아? 너희는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면 되지. 돈이 그렇게 중요해?”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굳었다.마치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행복감?지금 느껴지는 것은 오직 냉기뿐이었다.‘이 노파가 성유리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낼 생각인 건가?’‘정말 미쳤나? 성유리가 진짜 자기 딸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자기를 어머니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진짜 친정엄마라도 된 줄 아는 거 아니야?’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했다.그러나 애써 발걸음을 뚝 멈췄다.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침묵뿐이었다.그래서 더욱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그러던 중,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