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성유리의 집을 또다시 떠났다. 그날 밤 뒤로 박한빈은 며칠간 미화로 쪽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성유리는 이번에 박한빈이 단단히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이제 진짜 끝인 건가?’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성유리는 방 안 곳곳에 남아있는 박한빈의 흔적들을 살폈다. 소파에 한참을 멍때리고 앉아 있던 성유리는 더 이상 안 되겠는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이 시간 동안 성유리는 혼자서 요리를 해 먹기를 즐겼다. 비록 그녀의 요리 실력은 좋지가 않지만 박한빈은 늘 성유리가 해준 음식들을 남기지 않고 싹 먹어 치웠었다. 성유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음식을 두 가지나 준비해 지화그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막상 지화그룹 대문에 서 있으니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사모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성유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이라는 칭호는 이미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성유리의 발걸음을 늘 멈췄었다. 서훈은 성유리에게 빠르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사모님이시군요! 어떻게 이곳에 다 오셨습니까?” “그게...” “아! 박 대표님 뵈러 오신 거지요? 마침 잘 됐습니다. 저랑 함께 가시죠.” 서훈은 아주 기뻐하며 성유리를 안내했다. “박 대표님 위에 계십니다. 사모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아신다면 무조건 저처럼 기뻐하실 겁니다.” 성유리는 서훈의 뒤를 따라가며 몇 번이나 거절을 하려했지만 그의 환한 미소를 발견하고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사무실로 도착했지만 성유리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고개를 돌려 서훈에게 물었다. “오늘 박 대표님 기분은 어때 보여요?” 서훈은 예상치 못한 성유리의 질문에 당황하더니 곧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모님 얼굴을 보신다면 꼭 좋아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는 말이네요?”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서 답안을 알아차렸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박한빈은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안 드실 거예요?” 성유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박한빈에게 되묻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상위에 놓인 도시락을 쳐다봤다. “가지볶음이랑 닭고기 좀 했어요.” 박한빈의 시선을 확인한 성유리는 재빨리 그에게 무슨 음식인지를 알려줬다. “그래?” 박한빈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거절은 하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도시락을 들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도시락을 내려놓자마자 박한빈이 갑자기 손을 뻗어 성유리를 덥석 잡아 자기 무릎에 앉히고는 말했다. “성유리, 난 네가 전부터 나를 계속 속인다고 생각했어.” 박한빈은 복수라도 하듯 성유리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제가 뭘 속이는데요?” “정말 진심으로 나를 좋아했어?”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바로 굳어버렸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 사무실 밖에서 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사모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무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윽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김서영이었지만 성유리는 다행히 서훈의 목소리를 들듣은는 순간 박한빈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김서영의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성유리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녀가 성유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김서영은 성유리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해 버리고는 박한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 맞지?”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려 서훈을 쳐다봤다. 그러자 서훈은 빠르게 김서영에게 다가가 빌 듯이 말했다. “사모님, 저랑 함께 손님 실로 갑시다. 이곳은...” “지금 나는 꼭 답을 알아야겠다. 박한빈, 네가 한 짓이 맞아?” 김서영은 잔뜩 화를 내며 박한빈에게 따졌다. “네가 일부로 사람을 시켜 그 사람 회사를 그딴 식으로 대한 거야? 네가 어떻게 그래?” “왜 그러면 안 됩니까?” 서훈이 김서영을 데리고 나
성유리가 다시 김서영을 만났을 때는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김서영이 먼저 주동적으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카페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목적을 몰랐기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 금성을 떠나려고 해.”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김서영은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줬다. 김서영의 말에 놀란 성유리는 눈이 두 배로 커지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세요?” “그냥 그런 뜻이지.” “저번에 그 일 때문에 그러세요? 어머님 지금 한빈 씨한테 화가 나셔서...” “아니야.”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을 끊어버리며 대답했다. “내가 왜 떠나려는지 말해줄게. 그 사람은 저번에 한빈이가 했던 테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이야.” 김서영의 대답에 성유리는 천천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서 어머님 생각은...” “금성에는 우리 둘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게다가 수년 동안 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질릴 대로 질려서 숨도 잘 안 쉬어져. 나도 더 이상 이렇게 살기는 싫어서 정한 거야.” “아무도 우리 둘을 모르는 곳에 가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했어.” “요즘 말로는 야반도주한다고 할 수 있지. 사랑을 위해서.” 김서영은 말만 해도 행복한지 환하게 웃었다. 성유리는 예전부터 늘 김서영의 미모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박한빈이 김서영을 닮아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잘생겼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늘 김서영은 한 폭의 그림 속에 사는 여인처럼 그 아름다움은 그저 외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성유리는 오늘 처음으로 김서영의 웃음에서 그녀의 진심과 진짜 감정을 알아보았다. ‘저렇게 웃으시는 걸 보니까 심장이 너무 빨리 뛰네.’ 한참 뒤,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한빈 씨는 이 일을 아나요?” “모르지. 알려줄 생각도 없고.” “그러시면 안 되지 않나요?” 성유리가 김서영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그래도 한빈 씨 어머니신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숨기면 안 되잖아요.” “만약 걔가
성유리는 김서영이 건넨 편지봉투가 마치 폭탄같이 느껴져 자신의 서랍 안에 넣어두는 것이 불안했다. 결국 성유리는 편지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있는 자신의 책꽂이 사이에 넣어두었다. 책들 사이에 작은 편지봉투가 껴있었지만 성유리는 편지봉투가 제일 눈에 잘 들어왔다. 하지만 저녁에 돌아온 박한빈은 그 편지봉투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요즘 그의 컨디션은 거의 최상을 찍고 있었는데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았다. 성유리가 이 집에서 떠나기를 계속 거부하자 박한빈은 그냥 그녀의 옆에 있는 빈집을 월세를 내며 살았다. 그래서 현재, 더 이상 그 어떤 누구도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오늘 밤 금성에는 올해 첫눈이 내려 박한빈은 유독 신나 했지만 성유리는 무관심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창가로 끌고 가더니 “강박적”으로 그녀를 내리는 눈을 보게 만들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그만하고 돌아가자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요구 하나를 제안했다. “여보라고 불러. 그러면 생각해 볼게.” “여보. 여보 우리 제발 돌아가요.” 성유리가 박한빈을 몇 번이나 “여보”라고 불러준 후에야 그는 다시 성유리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박한빈이 거의 끝이 날 때쯤에 성유리는 이미 잠에 들기 직전인 상태였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 성유리를 바라보던 박한빈은 그녀를 업고는 욕실로 향했다. “며칠 뒤에 우리 둘이 도인국 한번 갈까?” 박한빈이 물었다. “갑자기 도인국은 왜요?” “휴가. 가서 눈도 보고.” 그의 대답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해가더니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그 뜻이 아니라 진짜로 눈 구경하러 가자고.”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대답했다. “관심 없어요.” “난 관심 있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줘.” 말을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를 욕실 구석까지 가둬두고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
깊은 밤의 병원은 늘 유난히 이상하게 느껴진다.복도 끝의 그 빛나는 구조등은 마치 빨간 피처럼 마음을 졸이게 했다.성유리는 의외로 지금 응급실 앞에 박한빈의 비서 외에 성유정도 함께 앉아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그녀의 몸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는 듯했는데 안색이 창백한 채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한빈 오빠!”긴장의 끈이 풀린 듯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나... 오빠 왔어? 어떻게 해? 아줌마가 많이 다치셨어. 그러다가...”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보았지만 이내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비서에게 눈길을 돌렸다.“아직 사고 조사를 하고 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도로에는 다른 차량은 없었고 사모님의 차는 갑자기 통제력을 잃고 돌진해 버렸다고 합니다.”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차에는... 진성민 씨도 계셨는데 방금 의사 선생님께서 응급처치 중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비서는 말을 돌려 하느라 노력했지만 박한빈의 안색은 지극히 보기 힘들었다.성유정은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한빈 오빠, 지금... 언론 쪽부터 신경 쓰는 게 어때?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안 좋은 기사가 쏟아질 게 뻔해.”“뭐라고?”그녀를 돌아보며 묻는 박한빈의 한마디는 진지한 질문 같기도 하고 협박 같기도 했다.하지만 성유정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아줌마가 낯선 남자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언론에서 함부로 추측할 거야.”말을 마친 성유정이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언니, 언니는 사정을 아는 사람으로서 왜 아줌마를 말리지 않았어?”성유리는 이럴 때 자신이 아무리 위로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박한빈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는데 성유정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어리둥절해졌다.그녀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성유정은 이미 계속 말했다.“아줌마가 오늘 밤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성유정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날카로운 눈빛
그러고 나서 박한빈의 비서도 앞으로 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뭐라고 말했다.박한빈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이 여론이 내일 인터넷에 터지면...”“사람 찾아 일단 눌러. 그리고 진성민의 가족에게 연락해.”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냉정했다.“박씨 저택 쪽은 내가 직접 가서 말할 거야.”말을 던진 그는 이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다가 성유리 곁을 지날 때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듯 말했다.“내가 먼저 데려다줄게.”“전... 오늘 밤에 병원 쪽에 남을게요.”사모님이 ICU에 계셔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성유리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갑자기 박한빈과 함께 있는 것이 두려워졌다.방금 한 성유정의 말에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김서영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정말 몰랐다.그녀는 김서영이 정말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내 말대로 해.”박한빈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따라갔다.“몰랐어요...”차에 오른 성유리는 결국 입을 열었다.“한빈 씨 어머니가 그럴 줄은...”“성유정이 방금 한 말, 너에게 뭘 줬다고 했어.”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게 뭐야?”“서류예요...”“어디 있어?”미화로에 돌아온 성유리는 가장 먼저 그 서류를 박한빈에게 건넸다.그런 물건이 눈에 확 띄는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본 박한빈은 자기도 모르게 쌀쌀하게 웃었다.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건만 들고 돌아섰다.“한빈 씨!”성유리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그는 발걸음은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 괜찮아요? 한빈 씨 어머니 일은 제가 설명할 수 있어요...”“설명할 필요 없어.”이 말을 던진 박한빈은 계속 앞으로 나갔다.성유리는 그 자리에 혼자 서 있다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온
성유정이 그녀를 찾았을 때, 성유리는 막 슈퍼마켓에서 돌아왔다.그녀는 손에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성유정을 보는 순간 손이 굳어졌다.성유정은 계단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왔어?”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성유정은 또 한 번 싱긋 웃더니 물었다.“나를 보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보러 왔어.”성유정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한빈 오빠는 요즘 너무 바빠서 언니를 돌볼 수 없을 거야. 나는 언니의 동생이니 당연히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언니를 걱정해줘야지.”“그럼 이제 가도 돼.”성유리는 대답하면서 그녀를 스쳐 계속 걸어갔다.예전에 성유리가 이런 태도로 말했으면 성유정은 펄쩍 뛰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고 반대로 성유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성유리, 아직도 박한빈이 널 지켜줄 거로 생각해? 아직도 모르겠어? 너랑 한빈 오빠는... 이젠 불가능해.”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성유정을 바라보았다.그녀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어머니가 이렇게 큰일을 당했는데 한빈 오빠가 언니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아?”성유리는 손을 꽉 잡은 채 뒤 마침내 소리 내 말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아줌마가 준 서류가 뭔지 알아?”성유정은 빙긋 웃으며 성유리에게 답안을 말해줬다.“한빈 오빠에게 주는 유서야.”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성유정은 얼마 안 지나 돌아갔고 성유리는 계단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그때 밑에서 누군가 올라오다가 센서 등이 켜지는 순간 그만 비명을 질렀다.“깜짝 놀랐잖아.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야? 귀신 분장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거야?”여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몸이 굳은 채 자신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빨간색 머리를 한 그 여자가 따라오며 물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계속 통화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서훈에게 연락했다.“박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라 오늘 뵐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아니면...”서훈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만날 시간이... 없다니?’성유리는 얼마 전에 그도 매우 바빴던 것을 기억한다.하지만 그때 박한빈은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그녀를 찾을 수 있었고 때로는 출장을 갔다가 한밤중에 비행기에서 내려 직접 그녀를 찾기도 했다.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전화 한 통을 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이런 생각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지만 성유리는 결국 묻지 못하고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알았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렇게 돌아섰다.하지만 택시기사가 주소를 묻자 그녀는 말을 돌렸다.“시월파크로 가요.”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여기에 오지 않았다.예전에 박한빈이 그녀의 거처를 싫어할 때 함께 이곳에 와서 살자고 말하곤 했지만 성유리는 줄곧 허락하지 않았다.그녀는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박한빈에게 문자를 보냈다.[시월파트 쪽에서 기다릴 테니 한 번 만나요.]문자가 전송되자 그녀는 바로 옆 신발장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오늘 금성은 사실 매우 추웠다.복도 옆 창문은 아직 열려 있었고 찬바람이 이렇게 계속 안으로 불어 들어왔지만 성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멍하니 맞은편 엘리베이터를 보고 있었다.박한빈은 끝내 답장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가 올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그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사라져갔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힘껏 문지르며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려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또 시간을 한 번 보았다.벌써 거의 12시가 되었다.성유리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보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시간을 설정하기 시작했다.‘5분만 더 기다리자...’이 5분 안에 그가 여전히 오지 않으면 그녀는 떠나리라 마음먹었다.핸드폰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0시를 1분 남기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
성유리는 능청맞게 말하는 박한빈을 보기도 싫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짓더니 바로 병실 밖을 나갔다. “저게 무슨 말이냐? 지금 두 사람 같이 살고 있어?” 성시원은 박한빈이 나가자마자 성유리를 보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정우랑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성유리는 성시원의 물음에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오늘 저는 성리 그룹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이미 그럴 필요 없겠네요. 저는 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잠깐만! 아까 내가 한 물음에 대답부터 해줘야지. 정말 같이 사는 거야? 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둘이 짜고 한 판이다 이거야? 어쩐지 시간을 넉넉하게 주겠다고 한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빠르게 찾아와서 결판을 짓는지 궁금했는데... 다 네가 한 짓이었구나.” “됐어요.” 성유리는 피로에 잔뜩 찌든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뭐라고?” “이미 다 알고 계세요. 박 대표님은.” 성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는 그냥 그 사람의 손아귀에 잡힌 사냥감일 뿐이었다고요.” “아예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평 공정하게 싸울 수 있겠어요?” 성유리의 평온한 목소리는 마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 같았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입만 뻥끗거리다 결국 연정우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럼 연정우는? 이미 무산된 결혼 아니냐? 그 사람 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런 정 없고 매정한 인간은 우리 성씨 가문과 절대 어떠한 관련도 없어!” 성유리는 화를 내며 말하는 성시원의 앞에서 효녀가 되고 싶지 않아 아무 말 없이 뒤돌아 떠났다. “성유리!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데 어디가? 당장 돌아와!” 뒤에서 들리는 성시원의 고함에도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걷는 와중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병원 앞에 몰려있던 기자들은 이미 다 떠났는지 조용했기에 성유리는
성유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박한빈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 있던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성유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이제 더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성유리는 이제야 박한빈이 예전부터 다른 투자자들과 다 얘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유리가 손에 쥐고 있던 작디작은 지분까지 뺏겼지만 그녀는 저항할 자격도 없었다. 허나 성시원에게는 성유리보다 많은 발언권이 있다. 박한빈이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을 막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시간은 끌 수 있었다. 만약 그 시간들을 충분히 이용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면 두 사람에게는 솟아날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성유리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다 세우며 병원으로 향했지만 뜻밖의 인물과 마주쳐버렸다. ‘박한빈 씨?’ 그녀를 발견한 박한빈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먼저 건네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 대표님도 계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오셨군요. 그럼 저희 이 자리에서 바로 얘기 나눕시다.” 박한빈은 냉정하고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게 바로 성리 그룹의 현재 금전 흐름 상황입니다. 오늘 아침까지 통계한 결과 이미...” 어젯밤 침대에서의 화면들이 떠오른 성유리는 지금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성리 그룹의 미래 계획을 말하고 있는 박한빈이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아주 냉철하고 침착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박한빈의 모습에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성유리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성시원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동의하신 거예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성시원이지만 성유리는 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사실 성유리도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으로 놓고 말하면 누군가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 않다면 회사의 재무 상황이 공개될 것이니 회사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게 뻔했다. 법원까지 가 회사를 매매로 넘기는
“네.” “근데 네가 나를 믿지 않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그 증거들은 네가 스스로 찾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렇죠.”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그래도 박한빈 씨가 편하게 살지는 못하게 할 것 같아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입을 닦은 휴지를 상위에 내려놓더니 옆에 있던 물 한 잔을 그의 얼굴에 뿌렸다. 물방울들은 박한빈의 얼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고 속눈썹마저 젖어버렸다. 박한빈은 물을 맞고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고 환한 조명 아래에 있는 탓인지 안색은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던 말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갔다. 순간, 박한빈은 성유리의 팔을 확 낚아채더니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버렸다. “이렇게?” 박한빈은 성유리를 보며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게 네가 말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인가? 이건 너무 소아과 수준 아니야?”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얼굴을 꽉 잡더니 바로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박한빈의 어깨에 손까지 올렸다. 평소와 다른 성유리의 행동에 당황한 박한빈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성유리의 눈빛을 발견했다. 성유리의 눈빛은 마치 박한빈에게 네가 하는 행동도 유치하다는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박한빈에게 또 무슨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가까이 붙어있는 두 사람이지만 박한빈은 마음속이 공허할 따름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상처가 난 부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저 끝없이 성유리에게 키스를 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야만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원이야,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마.” 박한빈은 애원하듯 성유리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그의 어깨를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집안에는 적막만 흘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박한빈은 성유리를 보지도 않으며 누군가에게 저녁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고개를 휙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성유리는 묻는 박한빈의 말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거나 다 돼요. 될 수록이면 간이 덜 된 음식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향하려 했고 박한빈은 뒤돌아있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뭐 찾으려는 물건이라도 있으면 직접 나한테 말해. 내가 알려줄 테니까.”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성유리는 박한빈이 아까 CCTV 얘기를 꺼낼 때부터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단도직입적인 박한빈의 말에 당황했는지 그녀는 발걸음을 뚝 멈추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손톱은 손바닥에 박혀버린 듯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성유리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한 뒤, 뒤를 돌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히 박한빈 씨와 고명도 씨 사이에 있던 타협이나 거래에 대한 증거겠죠?” 그녀의 당당한 대답에 박한빈은 또 너털웃음을 짓더니 물었다. “응? 그건 왜 찾는 거야?” “박한빈 씨 생각에는 왜 찾는 거 같은데요?” 성유리의 되묻는 말에 박한빈은 입을 꾹 닫아버렸고 미소 또한 천천히 사라졌다. 고개를 숙인 박한빈의 팔에는 핏줄들이 선명하게 나타났고 성유리는 그를 가만히 쳐다만 봤다. 그러다가 박한빈은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기침을 연신 해댔고 성유리는 그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대화를 나눌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주저하지도 않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고 샤워를 했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올 때, 박한빈이 저녁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마침 집에 도착했었다. 입맛이 없던 성유리는 밥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