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정이 그녀를 찾았을 때, 성유리는 막 슈퍼마켓에서 돌아왔다.그녀는 손에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성유정을 보는 순간 손이 굳어졌다.성유정은 계단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왔어?”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성유정은 또 한 번 싱긋 웃더니 물었다.“나를 보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보러 왔어.”성유정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한빈 오빠는 요즘 너무 바빠서 언니를 돌볼 수 없을 거야. 나는 언니의 동생이니 당연히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언니를 걱정해줘야지.”“그럼 이제 가도 돼.”성유리는 대답하면서 그녀를 스쳐 계속 걸어갔다.예전에 성유리가 이런 태도로 말했으면 성유정은 펄쩍 뛰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고 반대로 성유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성유리, 아직도 박한빈이 널 지켜줄 거로 생각해? 아직도 모르겠어? 너랑 한빈 오빠는... 이젠 불가능해.”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성유정을 바라보았다.그녀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어머니가 이렇게 큰일을 당했는데 한빈 오빠가 언니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아?”성유리는 손을 꽉 잡은 채 뒤 마침내 소리 내 말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아줌마가 준 서류가 뭔지 알아?”성유정은 빙긋 웃으며 성유리에게 답안을 말해줬다.“한빈 오빠에게 주는 유서야.”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성유정은 얼마 안 지나 돌아갔고 성유리는 계단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그때 밑에서 누군가 올라오다가 센서 등이 켜지는 순간 그만 비명을 질렀다.“깜짝 놀랐잖아.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야? 귀신 분장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거야?”여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몸이 굳은 채 자신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빨간색 머리를 한 그 여자가 따라오며 물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계속 통화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서훈에게 연락했다.“박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라 오늘 뵐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아니면...”서훈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만날 시간이... 없다니?’성유리는 얼마 전에 그도 매우 바빴던 것을 기억한다.하지만 그때 박한빈은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그녀를 찾을 수 있었고 때로는 출장을 갔다가 한밤중에 비행기에서 내려 직접 그녀를 찾기도 했다.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전화 한 통을 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이런 생각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지만 성유리는 결국 묻지 못하고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알았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렇게 돌아섰다.하지만 택시기사가 주소를 묻자 그녀는 말을 돌렸다.“시월파크로 가요.”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여기에 오지 않았다.예전에 박한빈이 그녀의 거처를 싫어할 때 함께 이곳에 와서 살자고 말하곤 했지만 성유리는 줄곧 허락하지 않았다.그녀는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박한빈에게 문자를 보냈다.[시월파트 쪽에서 기다릴 테니 한 번 만나요.]문자가 전송되자 그녀는 바로 옆 신발장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오늘 금성은 사실 매우 추웠다.복도 옆 창문은 아직 열려 있었고 찬바람이 이렇게 계속 안으로 불어 들어왔지만 성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멍하니 맞은편 엘리베이터를 보고 있었다.박한빈은 끝내 답장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가 올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그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사라져갔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힘껏 문지르며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려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또 시간을 한 번 보았다.벌써 거의 12시가 되었다.성유리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보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시간을 설정하기 시작했다.‘5분만 더 기다리자...’이 5분 안에 그가 여전히 오지 않으면 그녀는 떠나리라 마음먹었다.핸드폰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0시를 1분 남기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문을 닫지 않아 들어오는 찬바람과 실내의 넉넉한 따뜻함이 대조적으로 느껴져 성유리도 지금 자신의 몸이 추운지 더운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느껴질 뿐이었다.한참 만에 목소리를 찾은 그녀는 중얼거리듯 물었다.“그러니까 내 설명도 듣기 싫다는 거예요?”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성유리, 이 세상은 결과만 보면 돼.”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결과는?무엇이 결과란 말인가?결과는 그의 어머니는 지금 병원에 누워 인사불성이 되었고 그 유서가 그녀의 손에서 그의 손까지 온 것이다.결국, 그는 그들이 이제 만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심지어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도 그녀에게 인색했다.성유리는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문득 그동안 그들이 함께 지냈던 시절을 떠올렸다.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들이 침대에서 속삭이던 다정한 모든 장면...그 박한빈들이 눈앞의 그와 서서히 겹쳤다.하지만 그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갑고 매몰찼다.마치 쓸모없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듯 그는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얼마 전의 일들은 모두 자신의 상상인 것만 같았다.“그래요.”마침내 성유리는 이 말을 뱉었다.그녀는 사실 오늘 여기 온 것은 그에게... 모든 걸 해명하려는 것뿐이었다.그녀는 심지어 문밖에서 기다리며 졸렬한 고육책을 연출하기까지 했다.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결과만 본다고...’과정이 더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그는 신경 안 쓴다는 뜻이니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그럼 가볼게요.”성유리는 이런 말을 남기고 그냥 돌아섰다.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성유리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코트 주머니 속에 넣은 손을 꽉 잡았다.“안 작가님이 청첩장을 보내주셨어.”박한빈은 그녀
심지어 아까 첫술보다 더 맛이 없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채 그 하얀 그림자를 보았다.그는 높은 층에 서 있었는데 아래층의 모든 물건은 이때 희미한 점으로 변했다.하지만 그때 박한빈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는 심지어 그녀가 쓰레기통 옆에 서서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박한빈은 갑자기 술잔을 꽉 움켜쥐었는데 한참 후에야 서서히 풀었다.자신이 결코 감정을 중요시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신 덕분이었다.지금 그녀를 생각하면 박한빈은 그녀의 부드러운 말투와 겉으로 드러나는 미소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었다.어머니에게 사고가 나기 전까지 박한빈은 그녀에게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박한빈은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일찍이 그녀의 몸 안에 존재했었는데 작은 탯줄이 그들을 하나로 연결했다. 그 감정은 그녀의 유서를 보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그녀는 그에게 미안해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떠나려 했다.떠나면서 그녀는 그 ‘혼외자'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함께 주었다.그녀 명의의 모든 재산과 주식도 그에게 남겼는데 그 재산들은 지화 그룹 외의 것이었다.만약 어느 날 다른 사람들과 더는 경쟁하고 싶지 않다면 떠나라고 하면서 이 재산은 그가 먹고 입는 걱정 없이 살기에 충분하다고 했다.그녀의 아이로서, 사실 그녀의 가장 큰 희망은 그가...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아이러니하게 지난 30년 동안 그녀는 그에게 어떤 칭찬의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박한빈은 예전에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녀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유서에서 박한빈은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김서영이 박씨 집안의 미래 후계자에게 주는 감정이 아니라 평범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이었다.그걸 깨달은 순간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보니 불쌍하고
박한빈은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그는 처음으로 병원 보안요원에게 그들을 내쫓으라고 했다.연약해 보이는 두 노인은 끌려갈 때 욕설을 퍼부으며 기자를 찾아가 아들이 박씨 가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겠다고 했다.당시 박한빈은 차갑게 한마디만 했다.“그렇게 해요.”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한 그 태도는 사람의 마음에 서리가 내리게 했다.박한빈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잠시 후, 서훈이 달려와 미화로 쪽에 있는 물건들을 이미 시월파크로 옮겼다고 보고했다.박한빈이 알았다고 한마디만 하자 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모... 성유리 씨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병이 난 것 같아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사실 이 일은 성유리 씨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성유리 씨에게 화를 내신 거예요?”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그를 쳐다보았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을 그냥 삼켜버리고 속으로만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정말 병이 났다.찬바람에 몇 시간씩 앉아있었으니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그녀는 원래 늘 비상약을 집에 두고 있었지만 약을 먹기 직전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천천히 약상자를 내려놓고 따뜻한 물 한 잔만 따라 마셨다.다행히 그녀의 상황은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이틀 동안 집에 누워 있었더니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지만 기침만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특히 밤이면 원래도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연이은 기침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어려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는 것에 익숙해졌다.‘왜 또 그럴까’에 대한 심경에서 ‘역시 그래’로 바뀌었다.사실 박한빈의 마음을 믿은 적은 없다.그들의 감정이 가장 ‘불타오를' 때도 그녀는 여전히 그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거절하는 것을 배워내지 못했을 뿐인데 비소를
성유리는 말을 하지 못했다.그녀도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고 말하려다 입까지 나온 말을 다시 삼켜 버렸다.이 일들을... 박한빈은 아마 다 잊었을 것이다.오죽했으면 이곳에 와서 휴가를 보내자고 제안했겠는가.그래서 성유리는 그와 그녀 사이의 ‘뜨거운' 감정도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마치 그녀가 그를 좋아할 때 그들이 함께 지내는 모든 일, 모든 세부 사항을 머릿속에 새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그녀를 선택한 것은 단지 그들이... 속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이번에 혼자 도인국에 온 성유리는 미리 인터넷에서 알아보고 전문적인 가이드를 찾았다.가이드는 이쪽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깔끔한 단발머리에 열정적이고 밝은 성격이었다.“성유리 언니죠?”성유리가 짐을 찾자마자 그녀가 다가왔는데 손에는 ‘성유리’라는 이름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다.“안녕하세요. 사하나예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안녕.”“호텔 예약했으니 바로 가면 돼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 그녀를 앞으로 안내했다.그녀는 전문적인 가이드였는데 가는 내내 성유리에게 이곳의 풍경을 소개하고, 성유리의 음식 취향을 물으며 그녀에게 맞는 레스토랑을 추천했다.“내일 단풍사부터 가봐요. 마침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서하나가 말했다.“최근 단풍사가 갑자기 핫해서 휴일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그래.”성유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사하나는 성유리의 냉담함을 느끼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다행히 앞으로 이틀 동안 그들은 즐겁게 지냈다.성유리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사하나의 스케줄에도 이의가 없었다. 사하나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탄할 만큼 순조롭게 진행했다.사흘째 되던 날, 성유리는 한 바에서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
“아까 저 사람 전 남자친구예요?”룸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가 직접 성유리에게 물었다.성유리는 먼저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에요? 하지만 두 사람이...”“전남편이야.”성유리의 대답에 사하나는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뒤에야 손뼉을 치며 말했다.“생각났어요. 금성의 지화 그룹 그분 아니에요?”“아는 사이야?”“음... 아는 사이라 할 수도 있죠. 국내 뉴스를 지켜봤는데 다른 회사 대머리 느끼한 남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편이잖아요.”성유리는 웃기만 했다.“그럼 아까 옆에 있던 사람은 누군데 유리 언니에게 언니라고 어떻게 부르나요?”“부모님이 입양한 딸이야.”성유리의 말에 너무 많은 정보량이 담겼는지 사하나의 입이 달걀 하나라도 집어넣을 수 있을만큼 벌어졌다.성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다시 잔을 들었다.“하지만 이젠 두 사람 모두 나랑 아무 관계가 없어. 며칠 동안... 재미있게 놀았어. 고마워.”사하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기쁨'이라는 두 글자가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지만 모른 척 술잔만 따라 들었다.“그럼 됐어요. 다음에 다시 오면 또 절 찾아요.”“그래.”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 속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이곳의 술 도수는 사실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술이 목구멍을 지나자 성유리는 맵고 쓰려 눈물을 흘릴 뻔했다.사하나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급하게 마셔서 그래요. 하지만 이틀 전에 술 못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왜 갑자기 마시는 거예요?”“응, 오늘은 마실 수 있어.”성유리는 웃으며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그녀는 원래... 하늘이 또 자신을 불쌍히 여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마지막 희망마저 허사가 됐다.아마 처음부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른다.많은 것은 그녀가 평생 얻지 못할 운명일 지도 모른다.온전한 가정이든 부모님의 사랑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아이든 말이다.스물여섯 살 먹도록 성유리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그녀는 술을 마셔서 볼이 발그스름해졌고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유리는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인한 뒤 그를 불렀다.“박한빈?”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마치 아까 그가 바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눈이 와요.”성유리는 그의 표정을 개의치 않는 듯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봐요. 눈이 엄청 많이 와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곳의 눈은 확실히 금성보다 더 아름다워요. 그래도 저는 금성의 눈이 더 좋아요.”성유리는 중얼거리며 계속 발걸음을 휘청거렸다. 박한빈이 팔을 꽉 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하지만 금성은 너무 추워요.”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물론 여기도 춥죠. 이번 겨울은... 참 기네요.”그녀의 목소리는 서서히 사라졌고 눈도 서서히 감겼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허리를 숙여 안아 올렸다.“한빈 오빠!”가게에서 나오던 심유정이 마침 이 광경을 보고 얼굴빛이 갑자기 하얗게 질려 아무 생각없이 달려들려고 했다.그러자 사하나가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섰다.“뭐 하는 거야? 비켜! 내가 누군지 알아?”성유정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는데 그 흉악한 모습은 방금 박한빈 앞에서 보여줬던 부드러움과는 완전히 달랐다.사하나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내가 누군지 알아요?”...박한빈은 그렇게 성유리를 안고 가버렸다.멀리 성유리는 아직도 성유정의 화가 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박한빈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달빛과 가로등을 비추어 남자의 얼굴도 어느 정도... 부드럽게 느껴졌다.이런 부드러움은 성유리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하지만 그녀는 똑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더없이 단호하던 그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지금 성유리 앞에 나타난 이 모습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갑자기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끝내 참
하지만 그 전제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할 때만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이 자신을 봤을 때는 어땠었나!차갑고 경멸적인 표정, 그리고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치 자신이 반드시 그 돈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때는 결국 그 돈을 받았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박한빈이 자신을 경멸할 이유는 될 수 없었다.그리고 자신이 성유리와 첫 만남에서 느꼈던 설렘과 그때 그동안 그녀에게 쏟았던 감정을 떠올리며 그저 억울하고 분하고 불만이 치밀었다.“너 지금 뭘 하려는 거야?”성유리는 그의 몸에서 전해지는 위협적인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계속 뒤로 물러섰지만 염우섭은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염우섭은 소름 끼치게 웃으며 말했다.“답은 간단해. 네가 나랑 한 번만 자면 돼.”“뭐라고?”성유리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정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하지만 염우섭은 금세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시*, 진짜 순진한 척하지 마. *같으니까!”“진즉에 더럽혀진 여자라는 거 알고 있었어. 아침에 그 남자가 너네 집에서 나오는 거 봤다고. 참 대단하다. 엄마 몰래 그런 짓이나 하고.”“정 그렇게 욕망을 못 참겠다면 내가 도와줄게.”염우섭은 말하며 한 걸음 더 다가와 성유리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그만둬. 이거 놔!”성유리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염우섭은 그 손을 더욱 강하게 쥐고 그녀를 잡아끌며 쓰러뜨렸다.“소리 지른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진정하라고. 곧 너도 소리칠 때가 올 거니까.”염우섭은 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그때 그 일이 없었으면 넌 이미 내 아내였을 텐데. 그때 너랑 만날 때는 내 입술조차 대지 못하게 해서 되게 깨끗한 여자인 줄 알았어. 근데 결국 너도 그냥 남들 발에 밟히는 더러운 존재였어. 오늘 내가 너 무조건 먹...”남자의
성유리는 결국 먼저 방을 나섰는데 방을 나서자마자 문을 쾅 닫았다.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표현숙은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문은 왜 닫는 거야?”“아, 그냥 습관이에요.”성유리는 대충 얼버무리다가 표현숙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표현숙은 여전히 의아해했지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후, 표현숙은 뒷산으로 약초를 채취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시장에 팔기 위해서라고 하면서.성유리는 어차피 표현숙을 어떻게든 멀리할 생각이었기에 이때가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랑 같이 가.”표현숙이 제안하자 성유리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예전에도 여러 번 같이 갔던 일이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결국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물 두 병만 가져가요.”하지만 나가기 전에 성유리는 갑자기 말없이 문을 확인하며 말했다.“문은 제가 닫을게요.”그 말은 생각보다 꽤 크게 나와서 방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다 들을 수 있었다.표현숙은 그런 성유리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누구한테 말하는 거야?”“그... 그게... 엄마한테요.”“내가 여기 옆에 있는데 왜 그래? 내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성유리는 옅게 웃으면서도 곧바로 표현숙의 팔을 잡고 함께 나갔다.“가요, 빨리 다녀오자고요.”표현숙은 딸의 이상한 행동에 조금 의문을 느꼈지만 성유리의 친근한 모습에 금세 잊어버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얘, 이제 결혼도 할 나이가 다 됐는데 아직도 애처럼 왜 이래?”성유리는 그냥 웃어 보였다.표현숙이 말한 뒷산은 사실 마을의 더 깊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곳은 숲이 넓어서 햇볕도 잘 들지 않고 산길을 따라가면 작은 시냇가도 여러 개 나왔다.시냇가에는 가재나 작은 게도 잡을 수 있었다.성유리는 약초를 알지 못했기에 표현숙은 성유리에게 바구니를 들게 하고 작은 시냇가 옆에서 게나 달팽이를 주워 오라고 했다.표현숙의 말대로 성유리가 열심히 주워 모으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엄마, 봐요. 제가 또 이
“저 밤새 못 잤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잠시 쉴 수 있을까요?”“그럼 왜 당신 방에서 자지 않으세요?”“당신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어서요.”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성유리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박한빈의 호흡이 금세 고르고 평온해진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봤다.박한빈의 얼굴에는 선명한 다크서클이 있었고 평소 깔끔했던 턱선에 작은 수염도 보였다. 성유리는 그의 손을 밀쳐내려던 생각을 접고 손을 천천히 내렸다.박한빈도 자신이 이렇게 빨리 잠이 들 줄은 몰랐다.성유리를 찾았지만 사실 지난 며칠간 그는 잘 자지 못했었다. 자주 깨어나거나, 이곳 환경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성유리의 방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비록 여전히 낮고 습한 집,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성유리의 향기와 햇볕에 말린 이불의 냄새가 그를 아주 편안하게 만들었다.성유리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에 들었다.박한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녀의 잠이 달아났지만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점차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성유리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설아, 왜 아직 안 일어났어? 아픈 거 아니야?”성유리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바로 눈을 떴다.순간 박한빈 또한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깨어나려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계속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민설아?”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졌고 행여나 박한빈이 말을 할까 봐 걱정되어 그의 입을 재빨리 막아버렸다.그리고는 급히 대답했다.“저... 금방 일어날게요.”“괜찮아? 몸이 아픈 거 아니지?”“괜찮아요. 그냥 피곤해서 오래 잔 것뿐이에요. 금방 일어날게요.”성유리는 손발이 바빠지며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박한빈의 다친 손을 우연히 건드렸다.강한 고통에 박한빈은 즉시 움찔하며 신음을 했고 성유리는 깜짝 놀라서 그의 입을 다시 막았다.평소 큰 목소리로 말하는 할머니
박한빈은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이곳에는 인터넷도 없어서 일을 하며 정신을 분산시킬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 앨범을 반복해서 보며 문밖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박한빈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래서 그의 휴대폰에 두 사람의 사진은 거의 없었다. 성유리가 실종되었던 그 시간 동안, 그는 그 사진들을 모두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보았다.몇 번을 넘기던 박한빈은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자기 말이 농담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진짜로 성유리를 찾으러 벽을 넘으려고 했다.하지만 곧 그는 자신이 한 쪽 팔에 아직 보호대를 차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이 몸으로 높은 벽을 넘는 건 불가능했다.결국 박한빈은 벽 밖에 서서 문만 응시했다.성유리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박한빈은 돌아서서 다시 자기 방으로 갔다.동이 틀 무렵, 마침내 그는 이웃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그 소리는 바로 할머니가 괭이를 들고 밭에 나간 것이었다.박한빈은 주저하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이 마을은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아 있기에 그 흔한 도둑도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성유리의 방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녀의 창문은 훨씬 낮았다.그 덕에 박한빈은 힘들지 않게 창을 넘어 들어갔다.그는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지만 성유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지 이불을 덮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깨울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손을 내리게 되었다.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의 뺨에 손을 살짝 대었다.그 차가운 느낌에 성유리는 몸을 살짝 떨더니 눈을 번쩍 떴다.자신의 침대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보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그리고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박한빈이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저예요.”성유리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창밖의 희미한 빛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후, 힘겹게 입을 열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
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아는 남편인지 의심스러워졌다.그들은 한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기에 그가 성유리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그래서 그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고자 했던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박한빈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듯, 천천히 물었다.“어머니랑 떨어지기 싫으신 거죠?”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걱정 마십시오, 저는 지금 당장 유리 씨를 데려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금성 쪽에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거기 일이 끝나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죠.”“그리고 유리 씨 어머니는... 나중에 저희가 돌아갈 때 같이 모시고 가면 되니까 걱정 마십시오. 당신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 아주 잘 보답할 테니까.”잠시 정적이 흐른 후,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하지만 유리 씨는 어머니라는 분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안 됩니다. 당신은 이미 제 아내잖습니까. 만약 유리 씨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그건 바람이고 저한테는 무책임한 겁니다.”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성유리가 대답하지 않는 걸 보더니 점점 더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듣고 계시는 거죠?”성유리는 박한빈과 눈을 맞춘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유리 씨는 이제 어머니라는 분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셨습니까?”“뭐를요?”“당연히 당신은 결혼 못 한다는 얘기죠. 상대방이 누구든 상관없으니 결혼하면 안 됩니다.”“알겠어요.”성유리는 처음에는 이 얘기가 끝난 줄 알았지만,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럼 저와 유리 씨가 무슨 사이인지는 어머니한테 뭐라고 설명할 겁니까?”“저희는... 무슨 사이죠?”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유리 씨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방금 제가 한 말은 듣지도
박한빈은 원래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낼 생각이 없었다.의사가 말했듯이 혈종이 가라앉으면 성유리가 스스로 그 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을 못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그는 짧은 시간 이곳에 있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유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이 늘 원하던 모성애를 느꼈을 것이다.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결혼이었다. 성유리의 나이가 적당해지면서 바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고 첫 키스도 웨딩 촬영 중에 했다.그래서 박한빈은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그 모든 걸 잊었다면 다시 ‘구애’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겠다고.그때는 그들이 함께하지 않았던 연애라는 과정을 보충할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박한빈이 이미 성유리를 찾았는데 만약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그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그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을 것이다.박한빈의 말이 끝난 후, 성유리는 그가 예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영화에서 기억을 잃은 사람이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 보통은 머리가 아프다고 하지 않던가.그런데 성유리는 전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박한빈을 쳐다보고 있었다.박한빈은 행여나 성유리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걱정되어 계속 말을 이어갔다.“당신 배에 약 5cm 정도 되는 상처 자국이 있을 겁니다. 그건 하늘이를 낳을 때 생긴 거죠.”“왼쪽 허벅지 안쪽에 빨간 점이 있고 허리 쪽에도...”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갑자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의 목소리가 멈췄다.박한빈이 더 이상 말을 못 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성유리는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그걸... 박한빈 씨가 어떻게 아세요?”“당신은 제 아내입니다. 그러니 유리 씨 몸에 제가 모르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박한빈은 오히려 태연하게 되물었고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왜 안 갔습니까?”“뭐라고요?”“왜 병원에 안 갔냐고 물었습니다. 집에서 결혼할 준비라도 하고 있는 겁니까?”박한빈은 말하며 한 걸음 가까이 성유리에게로 다가갔다.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성유리의 몸에서 뭔가를 끌어내려는 듯했고 그녀는 순간 멈칫했지만 금세 대답했다.“저... 저한테 꼭 가야 한다는 말 안 하셨잖아요?”“성유리 씨는 저를 돌봐준다고 했잖습니까.”“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건 박한빈 씨 혼자 결론 내린 거예요.”성유리는 바로 반박했다.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저는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해요.”“뭐라고요?”“박한빈 씨 곁에... 예전에도 분명히 여자들이 많았겠죠?”성유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전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 그 여자들과 다르니까... 만약 박한빈 씨가 그냥 장난치려는 거라면 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마세요.”성유리의 목소리에는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눈가는 조금 붉어져 있었고 목이 떨리며 뭔가를 삼키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박한빈은 잠시 그런 성유리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전에는 성유리가 그냥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돌아와서 잘 달래면 될 거라 여겼었다.하지만 방금 그녀와 표현숙의 대화를 듣고 나니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때 성유리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그날 ‘숙련된’ 기술로 그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걸 깨달았다.성유리는 입으로는 자신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손은 박한빈을 밀어내지 않고 있었다.게다가 눈가는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잠시 바라본 후, 물었다.“그래서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아니요!”성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부인했다.그리고 빠르게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사람은 원래 계속 소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근처 이웃들을 다 불러 모을 기세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소리를 지르는 여인은 박한빈을 ‘도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래는 불안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박한빈이 그녀를 쳐다볼 때 눈동자에는 냉기가 돌고 있었다.그 눈빛은 여인의 입에서 나올 말까지 삼켜버리게 만들었다. 그때, 표현숙이 물건을 들고나왔다.할머니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이 개자식, 또 왔어? 정말 죽고 싶은 거구나. 그래, 지금 당장 너를 지옥에 보내주지.”말하면서 표현숙은 박한빈에게 위험해 보이는 도구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마치 예전처럼.하지만 이번에는 박한빈이 표현숙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때만 해도 박한빈의 한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렇지만 한 손만으로도 표현숙의 손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한 힘에 할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때 성유리도 안에서 나왔고 박한빈을 보자 그녀도 잠시 멈칫했다.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다가갔다.“엄마, 물건 먼저 내려놔요.”“안 돼! 이 자식이 분명히 너를 괴롭히려고 했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있어. 엄마가 널 지켜줄게.”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박한빈을 다시 쓱 쳐다보았다.그리고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표현숙의 손을 밀쳐냈다.그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기에 표현숙은 밀려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얼마나 사납고 강한 사람인지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렇게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표현숙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고 계속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그녀를 막아섰다.“엄마, 이제 그만하시고 들어가세요.”“안 돼.”표현숙은 바로 단호하게 대답했다.“내가 들어가면 너는 어쩌려고?”“저분은 저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있잖아요.
“응, 아빠가 약속할게.”박한빈은 이 호칭에 원래 낯설고 어색함을 느꼈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부드러움을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그렇게 확답을 듣자 하늘이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도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도 맑고 화창하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행복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다음 날, 성유리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그뿐만이 아니었다.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록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박한빈은 의사의 만류도 무시한 채 강제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가 없이 운행하는 개인 차량을 빌려 바로 마을로 돌아왔다.그리고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은 채, 곧장 성유리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집 앞에 다다르자마자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난 유씨네 그 총각이 괜찮다고 본다니까. 대학생이잖아. 지금은 월급이 좀 적다고 해도 집도 있다잖아? 너희는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면 되지. 돈이 그렇게 중요해?”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굳었다.마치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행복감?지금 느껴지는 것은 오직 냉기뿐이었다.‘이 노파가 성유리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낼 생각인 건가?’‘정말 미쳤나? 성유리가 진짜 자기 딸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자기를 어머니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진짜 친정엄마라도 된 줄 아는 거 아니야?’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했다.그러나 애써 발걸음을 뚝 멈췄다.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침묵뿐이었다.그래서 더욱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그러던 중,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