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여전히 도인국을 좋아하지 않았다.매년 관광객들로 붐비고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여전히 이곳을 좋아할 수 없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단지 빨리 금성으로 돌아가서 그녀만의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성씨 가문에서 찾아왔다.윤청하가 위독하다고 했다.성시원이 그동안 알맞은 신장이식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성유리는 친딸로 의료적으로도 이식 적임자였다.성유리는 거의 강제로 차에 태워졌는데 성시원을 본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요? 날 억지로 수술대에 올려놓고 싶어요?”성시원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손을 흔들어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그러고는 성유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원하는 게 뭐야?”성유리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대답했다.“당신 아내에게 분명히 말했었는데요? 회사를 주면 할 게요.”“회사는 내 피와 땀이야.”“그럼 당신의 아내는 뭔가요?”성유리가 되묻자 성시원은 말문이 막힌 채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성유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장 일어나 떠나려 했다.하지만 곧 성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술만 한다면 성씨 가문의 모든 재산 상속권을 줄 수 있어.”“헐, 당신이 죽으면 준다고요?”성유리의 말이 듣기 거북했던지 성시원은 결국 화를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당신이 언제 죽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유언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요.”성유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더욱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있어서 당신들은 이미 어떠한 신용도 없다는 거예요.”“성유리, 너무 그러지 마!”성시원은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난 네 아버지고 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은 너의 어머니야. 엄마가 없으면 네가 있을 수 있겠어? 한때는 피를 나눈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알고 있어요.”성유리가 대답했다.“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만약 그날이 온다면... 내가 직접 보내드릴 거예
성유정의 말이 끝나자 성시원의 얼굴빛은 갑자기 변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문득 성유정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이 지독한 생각을 뱉을 수 있냐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성유정도 이를 의식한 듯 황급히 말했다.“전 그저 엄마가 살아있길 바랄 뿐이에요. 아빠도 보셨잖아요. 엄마가 병마에 시달려서 어떻게 되었는지. 전 정말... 차마 지켜볼 수 없었어요.”성시원은 말을 하지 않았다.비록 그도 성유리가 죽어가는 엄마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을 원망하고, 그녀가 죽기를 수없이 저주했지만 성유정의 말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맞은편에 있는 성유정도 별말 없이 고개만 치켜든 채 그를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봤다.마침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족들 다 왜 여기 있어요? 빨리 와요.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이 말을 들은 성시원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여 바로 달려갔지만 윤청하는 이미 응급실에 실려 갔다.성시원이 도착했을 때, 의사는 그에게 위독 고지서를 건네줬다.성시원은 손을 떨며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아빠...”성유정은 울면서 그를 바라보았다.“엄마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에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요?”성시원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곳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냉정해 보였다. 한참 후에야 그는 갑자기 중얼거렸다.“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성유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일이 성공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켜진 수술 등을 힐끗 보았다.죽도록 억누르지 않았다면 그녀는 심지어 웃었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하늘도 자신을 돕는 것 같았다.“아빠, 만약 정말 손을 쓴다면 우리가 직접 할 수는 없어요.”성유정은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나서 말했다.“잊었어요? 지금 성유리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지석민이어야 해요.”“맞는 말이야.”성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하지만 지석민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알아?”“찾아보라고 하면 알아요.”성유정은
성유리는 누군가 미행하는 것 같았다.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해서 평소 외출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생필품을 사러 나갔다.원칙대로라면 그녀는 이동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보통 누군가 눈여겨볼 가능성은 없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성유리는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슈퍼마켓에 가려고 할 때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왔다. 그 오토바이는 목적이 분명한 듯 직접 그녀를 들이받을 기세였다!성유리가 깜짝 놀라 연신 뒷걸음질을 칠 때 길가에 마침 다른 사람이 지나갔고 오토바이는 그렇게 그녀 옆을 지나쳐 훌쩍 떠났다.쌩쌩 지나가는 그 바람은 아직도 성유리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온몸이 굳어져 꼼짝도하지 못했다.그녀는 방금 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그 매서운 눈빛은 마치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벗겨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성유리도 많은 걸 생각할 겨를이 없어 슈퍼마켓도 가지 않고 외투를 꽁꽁 여미고 돌아갔다.문을 닫은 후에야 그녀는 자신의 벌렁이던 심장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슈퍼마켓에 갈 수 없어서 그녀는 배달 음식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고 비고에는 원래대로 배달 기사에게 문 앞에 두라고 썼다.그러나 30분 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배달입니다.”둔탁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성유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방 안에서 소리쳤다.“문 앞에 두면 돼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성유리는 2분을 더 기다린 후 일어나서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카메라를 통해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그제야 문을 열었다.그러나 문 옆에는 그녀의 배달 음식이 없었다.성유리가 어리둥절해 하며 배달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순간 차가운 칼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성유리의 온몸을 차갑게 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서연아, 오랜만이야.”성유리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며 고개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갑자기 발을 들어 그의 하체를 세게 걷어찼다.성유리가 독기를 품은 데다 그곳이 남자의 가장 약한 곳이기 때문에 지석민은 아파서 즉시 손으로 그곳을 움켜쥐며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감히 나에게 손을 써? 죽여버릴 거야!”말을 마친 지석민은 이번엔 사정없이 손으로 성유리의 목을 졸랐다.“천한 년! 배은망덕한 년! 재수 없어! 오늘 널 죽여버릴 거야!”그는 욕하면서 손에 힘을 점점 더 세게 주었는데 성유리는 숨을 쉴 수 없어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부림치며 그의 팔을 잡았지만 핏자국을 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날 창피하게 여긴다는 걸 알아. 네 친아버지보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네 친아버지도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겠어? 지금도 널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널 죽여 그 여편네를 살리려 계획했어.”지석민의 말을 듣자 성유리의 흐려져 있던 의식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그녀는 애써 눈을 뜨며 간신히 물었다.“뭐라고요?”“내가 뭐라고 했냐고?”지석민이 쌀쌀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너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 네가 여기에 있는 걸 내가 어떻게 안 것 같아? 네 친엄마가 곧 죽는다며? 네가 죽지 않으면 누가 이식수술을 해주겠어?”이 말은 총알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이식수술... 내가 이식수술을 하도록 심지어 지석민을 보냈어?’아니다. 그녀에게 수술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죽으라는 것이다.이게 친부모가 할 짓인가?성유리는 지석민의 팔뚝을 잡았던 손을 갑자기 놓았다. 지석민은 그녀가 몸부림을 포기한 줄 알고 힘을 점점 풀며 그녀의 옷을 잡아당겼다.“일찍 나와 함께 잤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널 얼마나 예뻐해 줬겠어? 지금의 넌 부모 사랑도 없고 남편은 다른 여자랑 도망갔어. 넌...”지석민은 말을 채 하지도 못하고 끊었다. 짜릿한 아픔이 아랫배에서 느껴져 그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는데 그곳엔... 가위가 꽂혀 있었다.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성유리를
“너의 그 아빠야! 너 빨리 날 풀어줘. 나 병원에 가야 해. 안그러면 곧 죽을 거야!”성유리는 몸부림치려는 지석민의 목에 가위를 대고 더 깊숙이 찔렀다.“거짓말하지 마. 난 믿을 수 없어.”성유리가 말했다.“정말이야. 거짓말 아니야. 서연아. 정말 널 속이지 않았어! 원래 나더러 널 납치한 후 교통 사고를 만들어달라고 했어.”지석민은 계획을 말했다.“네가 어머니에게 이식수술을 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유체기증 계약에 사인했기 때문에 의외의 사고로 죽은 거면 네 엄마가 이식받을 수 있대. 난 그저 이기심에 어차피 너 죽을 거면 먼저 할 것 다 하고...”지석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발은 갑자기 그의 복부에 난 상처를 밟았다.상처에서 피가 빠르게 솟구쳐 나오자 가슴을 찢는듯한 지석민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하지만 성유리의 눈빛에 지석민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성유리의 손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지만 눈빛은 마치 생명체가 없는 물건을 보는 것처럼 냉혹했다. 그제야 지석민은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이런 공포 속에서 지석민의 안색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렸다.“서연아, 흥분하지 마. 난 너의 아빠야. 잊지마, 내가 너를 인신매매범에게서 빼앗아왔어. 내가 아니라면 너...”“아빠?”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당신 따위가 아빠라고? 내 아빠라고 생각이나 해봤어? 아빠라는 단어를 모욕하지 마.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는데 그를 바라보는 눈빛도 싸늘해졌다.지석민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무슨 말을 하려던 참에 성유리가 갑자기 입을열었다.“성시원에게 전화해.”“뭐... 뭐라고?”“성시원에게 전화해서 그자가 날 죽이러 당신을 보냈다는 걸 인정하면 그만 놓아줄게. 아니면... 당신을 죽일 거야.”말을 마친 성유리는 정말로 칼날을 지석민의 목에 대고 찌르려고 힘을 줬다.지석민은 즉시 소리 질렀다.“좋아! 전화할게. 내가 당장 전화할게!”지석민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려고
지석민이 재빨리 동의했다.성유리는 천천히 일어섰지만 서둘러 떠나지 않고 오히려 지석민의 상처를 바라보더니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지석민이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고 뭔가 하려고 할 때 성유리는 발을 들어 하체를 힘껏 밟았다!“이런 건 망가져야 해.”지석민이 아파서 기절하기 전에 들은 성유리의 마지막 말이었다.성유리는 더는 그를 보지 않고 걸어 나가다가 마침 맞은편 사람과 부딪혔다.“죽고 싶어? 너...”한 달 넘게 관찰했지만 성유리의 그 ‘남자친구’가 더는 오지 않는 것을 발견한 여자는 욕을 하려고 했다. 남자의 버림을 받은 여자라면 거리낄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이때 욕을 하려고 입을 열었던 여자는 성유리의 몸에 핏자국이 있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 두 눈이 퀭해진 것을 보고는 소리 질렀다.“세상에! 당신 뭐 한 거야?”성유리는 대답없이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어갔다.여자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봤지만 그녀가 문조차 닫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평소에 성유리는 문을 꼭 닫고 있었는데 이제 드디어 내부를 볼 기회가 생기자 여자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침실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 여자의 비명이 뒤에서 들려와 성유리는 주춤했지만 상관하지 않고 아래로 계속 내려갔다.성유리는 겉보기엔 침착해 보였으나 밖으로 나와 보니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녀는 원래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고 싶었으나 갑자기 온몸의 힘이 다 빠진 것처럼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그녀는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 떨리는 손가락으로 신고 번호를 눌렀다.“안녕하세요. 저... 자수할래요.”...박한빈은 최근 해외에 있었다.얼마 전에 지화 그룹의 주가가 하락세를 보였지만 실은 모두 박한빈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는 오히려 이 기회에 불필요한 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았다.다시 금성에 돌아오니 이미 설이 다가오고 있어 공항에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서훈이 마중을 나와 그의 짐을 들어주며 그동안 회사에
박한빈은 성유리가 구속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 믿기지 않았고 심지어... 어처구니없었다.그의 기억 속에서 성유리는 줄곧 다른 사람보다도 더 이성적이었다. 칼로 사람을 찌른다는 말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고 심지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했다.하지만 박한빈은 차에 오른 후 태블릿을 켜고 이 사건에 관한 명확한 기사를 보았다.지석민, 이 부상자 이름을 본 박한빈은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경찰은 CCTV에서 지석민이 먼저 성유리를 미행했고 그의 손에는 현장에서 발견된 다른 흉기가 들려있었다고 했고, 나중에 성유리의 몸에서 목이 졸린 흔적을 보았으며 당시 그녀가 자수할 때 머리카락과 옷은 모두 헝클어져 있었다고 했다.이런 흔적은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런데도 지석민이 과다 출혈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진 것은 성유리의 탓도 있었다.이 뉴스는 성유리와 지석민의 과거도 언급했다. 그녀는 어릴 때 외진 시골로 유괴되었고 양아버지에게 성추행 및 강간당할뻔했는데 양어머니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식물인간이 되었다...성유리에 관한 과거는 낱낱이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 온라인에는 그녀에 관한 토론이 대부분이었다.박한빈은 몇 번 본 후 휴대전화를 껐다. 성유정이 전화했지만 박한빈은 받기 싫어서 끊어버렸다. 성유정은 또 전화를 걸었지만 박한빈이 여전히 거부하자 문자를 발송했다.[난 지석민이 다친 이유를 알아. 오빠에게 알려줄게.]박한빈은 이 문자를 한참 동안 보다가 결국 전화를 걸었다.“너 어디야?”...박한빈이 변호사와 함께 올 줄 생각지도 못한 성유정은 일부러 호텔에 방을 예약한 후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그를 기다렸다.그녀의 옷차림을 본 변호사는 난처해하며 눈길을 돌렸지만 박한빈은 오히려 침착하게 물었다.“넌 뭘 알고 있어?”성유정은 악수한 후 웃으며 말했다.“알려줄 수 있지만 한빈 오빠, 난 오빠 한 사람에게만 알려줄 거야.”“이분은 변호사야.”“알아, 하지만 난 지금 오빠만 보고 싶어.”
하지만 입술이 닫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힘껏 밀쳤다. 그에게 떠밀린 성유정은 몇 걸음 뒤로 휘청거려서야 겨우 똑바로 설 수 있었다.그런후 성유정은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한빈 오빠...”“보아하니 기억력이 나쁘네.”박한빈은 쌀쌀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봤다.“다시 기회를 한 번 줄게. 말할래 말래?”성유정은 바닥에 앉은 채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 눈빛에는 두려움이 조금도 없었다.박한빈은 갑자기 피식 웃어버렸다.“좋아.”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성유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아빠가 기획했어.”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발걸음이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성유정은 두 눈이 붉어졌다.“엄마가... 상태가 좋지 않지만 언니가 기어코 이식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려서 아빠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박한빈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은 순간 아주 흉측하게 변했고 옆에 늘어뜨린 손은 주먹을 꽉 쥐었는데 이마에는 핏줄이 솟아올랐다.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유정을 힐끗 쳐다보고는 돌아섰다.변호사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한빈이 갑자기 방문을 열고 나오자 어리둥절한표정으로 바로 따라갔다.“박 대표님!”그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성유정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반대편에서 핀홀 카메라를 꺼내 화면을 캡처하기 시작했다.마침내 성유정은 만족스러운 사진 한 장을 찾았는데 바로 그녀가 발돋움해서 박한빈에게 키스할 때였다.이 각도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는지는 제대로 찍히지 않았지만 키스하는 사진으로 보이기엔 충분했다.성유정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성유리는 아직도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많은 관계를 통해서 겨우 변호사와 함께 그녀를 만났다.뜻밖에도 성유리의 컨디션은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건 단지... 정서가 괜찮다는 것뿐이다.박한빈을 보았을 때 성유리는 의아해하지 않았고 심지어 고개를 끄덕였다. 박한빈은 그녀의 야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