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민이 재빨리 동의했다.성유리는 천천히 일어섰지만 서둘러 떠나지 않고 오히려 지석민의 상처를 바라보더니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지석민이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고 뭔가 하려고 할 때 성유리는 발을 들어 하체를 힘껏 밟았다!“이런 건 망가져야 해.”지석민이 아파서 기절하기 전에 들은 성유리의 마지막 말이었다.성유리는 더는 그를 보지 않고 걸어 나가다가 마침 맞은편 사람과 부딪혔다.“죽고 싶어? 너...”한 달 넘게 관찰했지만 성유리의 그 ‘남자친구’가 더는 오지 않는 것을 발견한 여자는 욕을 하려고 했다. 남자의 버림을 받은 여자라면 거리낄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이때 욕을 하려고 입을 열었던 여자는 성유리의 몸에 핏자국이 있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 두 눈이 퀭해진 것을 보고는 소리 질렀다.“세상에! 당신 뭐 한 거야?”성유리는 대답없이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어갔다.여자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봤지만 그녀가 문조차 닫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평소에 성유리는 문을 꼭 닫고 있었는데 이제 드디어 내부를 볼 기회가 생기자 여자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침실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 여자의 비명이 뒤에서 들려와 성유리는 주춤했지만 상관하지 않고 아래로 계속 내려갔다.성유리는 겉보기엔 침착해 보였으나 밖으로 나와 보니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녀는 원래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고 싶었으나 갑자기 온몸의 힘이 다 빠진 것처럼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그녀는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 떨리는 손가락으로 신고 번호를 눌렀다.“안녕하세요. 저... 자수할래요.”...박한빈은 최근 해외에 있었다.얼마 전에 지화 그룹의 주가가 하락세를 보였지만 실은 모두 박한빈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는 오히려 이 기회에 불필요한 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았다.다시 금성에 돌아오니 이미 설이 다가오고 있어 공항에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서훈이 마중을 나와 그의 짐을 들어주며 그동안 회사에
박한빈은 성유리가 구속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 믿기지 않았고 심지어... 어처구니없었다.그의 기억 속에서 성유리는 줄곧 다른 사람보다도 더 이성적이었다. 칼로 사람을 찌른다는 말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고 심지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했다.하지만 박한빈은 차에 오른 후 태블릿을 켜고 이 사건에 관한 명확한 기사를 보았다.지석민, 이 부상자 이름을 본 박한빈은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경찰은 CCTV에서 지석민이 먼저 성유리를 미행했고 그의 손에는 현장에서 발견된 다른 흉기가 들려있었다고 했고, 나중에 성유리의 몸에서 목이 졸린 흔적을 보았으며 당시 그녀가 자수할 때 머리카락과 옷은 모두 헝클어져 있었다고 했다.이런 흔적은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런데도 지석민이 과다 출혈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진 것은 성유리의 탓도 있었다.이 뉴스는 성유리와 지석민의 과거도 언급했다. 그녀는 어릴 때 외진 시골로 유괴되었고 양아버지에게 성추행 및 강간당할뻔했는데 양어머니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식물인간이 되었다...성유리에 관한 과거는 낱낱이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 온라인에는 그녀에 관한 토론이 대부분이었다.박한빈은 몇 번 본 후 휴대전화를 껐다. 성유정이 전화했지만 박한빈은 받기 싫어서 끊어버렸다. 성유정은 또 전화를 걸었지만 박한빈이 여전히 거부하자 문자를 발송했다.[난 지석민이 다친 이유를 알아. 오빠에게 알려줄게.]박한빈은 이 문자를 한참 동안 보다가 결국 전화를 걸었다.“너 어디야?”...박한빈이 변호사와 함께 올 줄 생각지도 못한 성유정은 일부러 호텔에 방을 예약한 후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그를 기다렸다.그녀의 옷차림을 본 변호사는 난처해하며 눈길을 돌렸지만 박한빈은 오히려 침착하게 물었다.“넌 뭘 알고 있어?”성유정은 악수한 후 웃으며 말했다.“알려줄 수 있지만 한빈 오빠, 난 오빠 한 사람에게만 알려줄 거야.”“이분은 변호사야.”“알아, 하지만 난 지금 오빠만 보고 싶어.”
하지만 입술이 닫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힘껏 밀쳤다. 그에게 떠밀린 성유정은 몇 걸음 뒤로 휘청거려서야 겨우 똑바로 설 수 있었다.그런후 성유정은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한빈 오빠...”“보아하니 기억력이 나쁘네.”박한빈은 쌀쌀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봤다.“다시 기회를 한 번 줄게. 말할래 말래?”성유정은 바닥에 앉은 채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 눈빛에는 두려움이 조금도 없었다.박한빈은 갑자기 피식 웃어버렸다.“좋아.”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성유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아빠가 기획했어.”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발걸음이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성유정은 두 눈이 붉어졌다.“엄마가... 상태가 좋지 않지만 언니가 기어코 이식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려서 아빠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박한빈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은 순간 아주 흉측하게 변했고 옆에 늘어뜨린 손은 주먹을 꽉 쥐었는데 이마에는 핏줄이 솟아올랐다.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유정을 힐끗 쳐다보고는 돌아섰다.변호사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박한빈이 갑자기 방문을 열고 나오자 어리둥절한표정으로 바로 따라갔다.“박 대표님!”그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성유정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반대편에서 핀홀 카메라를 꺼내 화면을 캡처하기 시작했다.마침내 성유정은 만족스러운 사진 한 장을 찾았는데 바로 그녀가 발돋움해서 박한빈에게 키스할 때였다.이 각도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는지는 제대로 찍히지 않았지만 키스하는 사진으로 보이기엔 충분했다.성유정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성유리는 아직도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많은 관계를 통해서 겨우 변호사와 함께 그녀를 만났다.뜻밖에도 성유리의 컨디션은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건 단지... 정서가 괜찮다는 것뿐이다.박한빈을 보았을 때 성유리는 의아해하지 않았고 심지어 고개를 끄덕였다. 박한빈은 그녀의 야
“어쨌든 병원에 계신 양어머니를 생각해봐.”이것이 박한빈이 떠나기 전에 성유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성유리는 그가 뭔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느꼈다. 아마 자신의 모습이 너무 차분해서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심지어 자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이건 그가 오해한 것이 틀림없다. 성유리는 그저 차분하고... 정신을 차렸을 뿐이다. 만약 정말 자살해서 죽는다면 아마 성시원의 뜻대로 되었을 것이다.결국 성시원이 바란 것이 바로 성유리가 죽는 것이 아닌가?그들이 한 더럽고... 심지어 끔찍한 일을 생각하면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자신이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그녀의... 친부모일 줄 성유리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성유리는 침대에 앉아서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미 말라붙어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릴 수 없었다.성유리는 변호사에게 성시원과 지석민이 한 거래를 알려주며 찾아보라 했다. 변호사는 직접 확인했지만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고 지석민이 혼수상태에 있어 인증도 없었다. 성유리는 이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시간은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교도관이 그녀에게 갑자기 떡만두국 한 그릇을 주었는데 그제야 성유리는 오늘이 설날임을 알게 됐다.성유리는 떡만두국을 보며 갑자기 작년 설날이 생각났다. 그날 성유리는 박한빈과 함꼐 박씨 본가에서 보냈는데 저녁 늦게까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본가에서 밤을 지냈다.이것은 성유리가 그의 방에 머무를 수 있는 얼마 안 된 시간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본가에 있는 그의 방을 좋아한다고 한 번도 말한 적 없다.그 방에는 그의 과거에 대한 물건이 많이 있었고 김서영은 기분이 좋으면 그의 사진첩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한빈이 초등학교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의 사진, 대회에 참가해 수상받은 사진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성유리는 애써 머릿속에 기억했지만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옛일에 연연하지 않았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아직도
그런데 이 순간, 이 큰 도시에서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었다.운전대를 잡고 차를 천천히 길가에 세우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석민이 깨어났다고 병원 사람이 알려줬다....병원.성시원은 병상에서 얼굴이 창백해지고 수척해진 아내를 바라보며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하필이면 지석민이 계속 소란을 피우고 있었고 박한빈이 이미 개입했다고 들었다.성시원은 박한빈이 왜 이 시점에 개입했는지 모르지만 관여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와 지석민의 거래가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에 관여하면 오히려 그 단서가 드러날 것이다.다행히 성시원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지석민과 성유리의 주장만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성시원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성유리의 변호사가 갑자기 연락하여 성유리가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성시원은 성유리의 의도를 알 수 없었으나 거절하지 않았다.“엄마 상태는 어때요?”성유리가 그를 보고 한 첫마디였다. 성시원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녀만 쳐다봤다.“늦지 않으면 제가 이식해주고 싶어요.”성유리가 갑자기 말하자 성시원은 어리둥절해졌다.“이젠 이해할 수 있어요.”성유리는 그를 향해 씩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어쨌든 저의 어머니잖아요?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성시원은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뭔데?”“저는 성리 그룹에 들어가고 싶어요. 이곳엔... 오래 있었어요.”성유리가 대답했다.성유리의 말이 끝났어도 성시원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현재 그녀의 상황은... 사실 나쁘지 않았다.지석민이 칼을 갖고 들어간 것도 사실이고 또 전과가 있으니 과잉방위를 했더라도 지석민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을 것이다.이 점을 성유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수술에 동의한다고?“싫어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시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왜?”“이곳에 오래 있었다고 말했잖아요.”성시원은 쌀쌀하게 웃으며 그녀의
설날 연휴가 끝나고 첫 출근 일.박한빈은 이날이 바로 성유리 사건의 첫 재판 날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곧 그쪽에서는 재판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성유리와 지석민 사이에 양해각서를 썼다고 했는데 박한빈은 믿을 수 없었다.지석민이 성유리에 대한 상처는 그날 칼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온 것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에 나쁜 기억을 심어준 것도 있었다.박한빈은 그날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지석민을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는 냉철한 사람이지만 말이다.그래서 성유리가 반격한 것에 대해 그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지석민 같은 사람은 응당... 지옥에 가야 한다.그런데 지금 성유리가 그와 화해했다고 하다니?박한빈은 믿지 않았고 심지어 처음에는 성시원이 그녀를 협박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성유리에게 또 무슨 약점이 있을까?박한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양어머니가... 병원에 잘 있으니 말이다.“박 대표님.”박한빈은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훈은 그의 맞은편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박한빈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방금 접한 소식에 의하면 성유리 씨는 이미 보석으로 풀려났고 다른 문제도 없을 겁니다. 내부 소식에 의하면 성시원 회장님은 이미 성유리 씨에게 주식 8%를 넘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성 지사의 부대표로 임명되어 한 달 후에 정식으로 부임할 거라고 했습니다.”서훈의 말이 끝났지만 박한빈은 잠자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상황을 모두 종합해보니 그 이유가 매우 분명했다. 원래 성유리는 지석민을 용서할 필요가 없었지만 성시원과의 거래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러면 그녀가 이번 일로 성시원과 거래했단 말인가?아니... 이뿐만이 아니다.이번 사건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지석민인데 성시원이 왜 그를 위해 이런 희생을 했을까?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원인은... 하지만...박한빈은 다른 일이 생각나서 벌떡 일어섰다.“대표님...”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성유리도 간병인의 동작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어리둥절했다가 곧 옆에 있던 간병인을 쳐다보며 말했다“먼저 나가주세요.”“아... 네.”간병인은 멍하니 대답했다. 비록 박한빈이 두려웠지만 잘생긴 얼굴에 간병인은 저도 모르게 몇 번 쳐다본 후 몸을 돌려 나가며 문을 닫아주었다.박한빈은 가만히 선 채 쌀쌀하게 성유리를 보며 아무런 말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성유리는 잠시 그를 바라본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박 대표, 다른 용건이 없으면 그만 나가주세요. 저는 휴식이 필요해요.”“너 미쳤어?”박한빈은 그제야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알아요.”성유리가 냉정하고 분명한 대답을 내뱉았다.“고작 성리 그룹의 쥐꼬리만 한 주식을 위해서야? 이 수술이 몸에 어떤 위험을 줄 수 있는지 몰라?”“알고 있어요.”“알면서도 왜 그래?”“대표님께서 말한 것처럼 그 쥐꼬리만 한 주식 때문이에요. 안 돼요?”성유리가 말했다.“돈을 갖고 싶다면 그때...”“당신 돈은 싫어요. 그리고 저는 성씨이고 저분은 엄마이니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해요.”성유리는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박한빈은 그녀를 마주 보다가 피식 웃었다.“누구를 속이는 거야? 정말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면 넌 이미 이 수술에 동의했고 오늘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거야.”“제 마음이 변했다면 안 될까요? 그리고 박 대표님, 박 대표님은 무슨 입장으로 저의 선택을 간섭하는 거죠?”박한빈은 말문이 막혔다.성유리는 그곳에 앉아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우린 이미 이혼했고 더는 얽힌 게 없어요. 박 대표님, 여기에 나타나지 말아야 했어요.”그렇다. 박한빈은 그곳에 서 있었지만 성유리의 말은 마치 가늘고 긴 바늘처럼 그의 포만된 정서를 찔러놓는 것 같았다.그는 오기 전에 여러 가지 상황을 예상해 봤다. 만약 성유리가 성시원이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녀를 도와주려고 생각했다.그러나 성유리의 말은 그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고 간 다음 날 밤, 그녀는 병상에서 옆 병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성유리는 침대에서 일어난 후에야 윤청하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오늘 저녁 이후로 그녀의 상황이 나빠졌는데 지금은... 급격히 악화했다.성시원은 이미 도착했지만 성유정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구급실 밖에 앉아있는 성유리를 본 그는 달려들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뭐래?”성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응급 처치중이에요.”“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갈 때까지 분명히 멀쩡했어! 혹시 네가 무슨 말을 해서 자극받은 게 아니야?”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성시원은 이 정서를 발설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찾았다.성유리는 덤덤하게 그를 바라봤다.“병실에 CCTV가 있죠? 직접 확인해 보세요.”차분히 말하는 성유리를 보며 성시원은 말문이 막혔다.곧 응급실 문이 열리자 성시원은 쏜살같이 뛰어갔다.“환자분이...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선생님의 말씀에 성시원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무슨... 무슨 뜻이에요? 이식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이미 동의했으니 당장 하세요!”말을 마친 성시원은 성유리를 앞으로 힘껏 밀쳤다.그의 힘이 너무 커서 성유리는 앞으로 몇 걸음 휘청거리다가 겨우 옆에 있는 간호사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회장님, 진정하세요. 저희가 살펴본 바로 환자의 지금 상태로는 이식수술을 해도 별 의미가 없어요. 오히려 이식수술에 따른 거부반응이 고통을 가중할 수 있으므로...”성시원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녹초가 되어 걸상에 털썩 주저앉았다.이때에야 성유리는 그도 많이 늙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아내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았고 이런 사랑은 옆에 있는 사람도 감동하게 했다.성유리는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의료진도 감동하는 것을 보았다.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의 결과물’인 성유리는 외부인처럼 그곳에 덤덤히 있었을 뿐 가슴속에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이때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엄마...”성시원은
성유리는 하늘이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를 썼고 덕분에 아이는 이내 즐거워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퇴원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차례차례 성유리에게 말해줬고 그녀는 옆에 앉아 아이의 말을 경청해줬다.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건네줄 때에도 하늘이는 떼도 안 쓰고 순순히 약을 복용했고 부작용 때문에 힘든지 침대에 누워 성유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며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녀의 자세는 어딘가 이상했지만 아이가 너무 편해하니 바꾸지도 않았다. 하늘이는 병원 병실에 있는 것이 너무 안정감이 없는 건지 눈을 떠서도, 눈을 감을 때도 성유리가 안 보이면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저려오는 다리와 팔을 애써 주무르며 하늘이 곁을 지켜야 했고 아이가 깊은 잠에 들어서야 천천히 팔을 뺐다. “성유리 씨.” 간병인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 하늘이가 잠에 든 후, 성유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밖에 어떤 사람이 계속 앉아 있던데 아시는 분이에요?” 성유리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곧 애써 부정했다. 필경 박한빈이 어떤 사람인지 성유리는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방금 전, 하늘이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박한빈은 화가 나 바로 병원을 떠났다고 성유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병실 밖을 나가보니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성유리가 돌아왔을 때에도 그 의자에 앉아 있던 그였지만 현재는 태블릿도 보지 않은 채로 멍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박한빈에게로 다가가며 먼저 말했다. “죄송해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눈빛은 마치 왜 사과를 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하늘이가 요즘... 불안정해요. 일부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하려던 말을 이어갔고 그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물었다. “연정우 씨도 하늘이를 만났어?” 성유리는 왜 박
하늘이의 목소리는 아주 날카로웠다. 박한빈은 물론, 성유리조차 하늘이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며 아이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했다. “하늘아, 너...” “난 저 사람 보기 싫어. 엄마, 저 사람 나가게 해. 나가게 하란 말이야!” 하늘이는 떼를 쓰며 성유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작디작은 아이의 손등에는 아직도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는데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바늘이 당겨지며 피가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하늘이가 다칠까 봐 재빨리 아이의 손을 눌러 진정시키며 달랬다. “알았어. 보지 마. 하늘아, 괜찮으니까 진정해.” 말을 마친 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살짝 바라보았고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성유리는 그에게 상처 주지 않게 에둘러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예상과 달리 박한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스스로 뒤돌아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하늘이는 조금씩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성유리의 팔을 꼭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괜찮아졌어?” 성유리는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에게 물었다. “하늘이가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여기 있잖아.” 하늘이는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보더니 한참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 하늘이가 왜 그 사람을 보기 싫은지 엄마에게 말해줄 수 있어?”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아이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며 더 묻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늘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사람도 하늘이를 싫어하니까.” 그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란 듯 멈칫했다. 그리고 하늘이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하늘이가 먼저 말을 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그 사람은 하늘이를 싫어해. 그래서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잖아. 저번에도 하늘이를 붙잡고 억지로 사과하게 했잖아.” “그건 아니야. 하늘아.” 성
그녀의 말이 끝나자 연정우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네가 하고 싶었던 말이지?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말을 마친 성유리는 그대로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연정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더니 물었다. “그래서 넌 결국 박한빈 씨를 선택한 거야? 그런데 너 그거 알아? 그는 곧 결혼할 사람이야.” ... 성유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이가 있는 병실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병실 밖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옆에는 항상 들고 다니는 노트북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는 태블릿을 들고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진지하고도 엄숙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방금 어딘가에서 급히 온 것처럼 보이는 그는 평소 항상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옷에도 약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원래 태블릿 화면만 보고 있던 그는 성유리가 그를 바라보는 순간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약 십 미터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VIP 병동 복도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고요한 나머지 성유리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잠깐 망설이던 성유리는 그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왔어?” 박한빈이 태블릿을 닫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 태도에 박한빈은 살짝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일 없으면 오면 안 되나?” 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예요. 며칠 전에는 계속 안 오셨잖아요?” “출장 다녀왔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넌 계속 날 기다렸던 거야?” 성유리는 자신의 말을 들은 그가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내렸는지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박한빈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연정우는 지금 웃고는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그의 눈빛엔 지금 냉철함과 날카로움 뿐만 남아있는 듯했다. 성유리는 그 눈빛에 당황했지만 이내 진정하며 입을 땠다.“넌 아닐 거야.” “응?” “넌 유효정 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았잖아. 근데 전에 그 사람은 납치와 상해치사죄로 벌을 받았고. 그러니까 네 목표는 이뤄졌지. 굳이 네가 유씨 가문을 신고할 필요가 없지 않아? 그래서 난 너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 성유리는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게 분석했고 연정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더욱 환하게 웃더니 물었다. “난 지금 기뻐해야 되는 건가? 네가 나를 이렇게 잘 알아주고 믿어줘서?” 자신이 지금 연정우를 믿은 건지 성유리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그저 연정우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정말 연정우가 신고한 것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박한빈 씨야.” 성유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연정우가 바로 답을 알려줬다. 연정우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웃어 보이더니 계속 말했다. “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 기억해?” “나도 알고 있었어. 유효정 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유씨 가문에서는 그 사건을 덮었을 거야. 하지만 그 일에 네가 연루됐다면 일은 달라지지. 박한빈 씨는 당연하게도 절대 그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너 대신 복수를 한 거지.” 성유리는 침묵했다. “넌 감동도 안 받아?” 연정우가 물었다. “왜 감동받아야 하는데?” “당연히 그 남자가 너를 위해 이런 복수를 한 거랑 너를 많이 아낀다는 것에 감동해야지.” 연정우가 계속 말했다. “그때 박한빈 씨에게도 일이 되게 많았을 거야. 그럼에도 네 일에 신경 쓰고 있었던 거고. 박한빈 씨는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오늘 하고 싶다던 말이 이거야?” 성유리의 물음에 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가 말하고
성유리는 간병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뒤돌아 연정우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우리 지금... 1년 만에 만난 거 아니야?” 연정우가 말했다. “그땐 너도 출산한 지 얼마 안 됐었고 나도 바쁘고 너도 바빴잖아. 그래서 너랑 제대로 말도 못 나눴네.” 병원 정원에는 마침 햇살을 만끽하러 나온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연정우와 성유리는 정자에 앉아 있었는데 몹시 여유로워 보였다. 성유리는 문득 연정우에게서 박한빈의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기억 속 늘 다정하고 착하던 연정우가 이런 태도로 자신에게 말하자 성유리는 너무 이상했다. “응.” 그녀는 한참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 장성그룹 세웠어. 너도 알지?” 연정우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응. 기사 봤어. 회사 되게 잘되는 것 같더라? 축하해.” 성유리의 대답에 연정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고마워.” “아, 네가 모를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어.” 그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경 그가 돌아갔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으니까. 전에 많이 존경하던 화가이자 몇 번 만났을 때도 늘 잘 대해주던 어르신의 부고 소식은 성유리를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연정우는 그녀의 이런 반응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병을 잘 통제하고 있었어. 근데 너도 알잖아. 할아버지는 늘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이었다는 걸.” “만약 계속 그 상태로 살아계셨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건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들었나 봐.” “자기 몸에 입혀져 있는 기저귀와 엉망진창이 돼버린 침대도 발견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나 보지. 간병인이 잠깐 방심했을 때 바로 뛰어내리셨어.” 연정우는 마치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이 아닌 것처럼 아주 담담히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전해줬다. 하지만 성유리는 잘 안다. 연정우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를 말이다. 만약 할아버지의 명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다음날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말한 의료진 팀은 약속대로 도착해 하늘이를 맡고 있던 의사들과 간단한 회의를 마친 뒤,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늘이 엄마인 성유리는 전에 검사를 받았지만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지 못했고 지금은 박한빈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만약 박한빈의 결과도 부적합이라고 한다면 성유리의 세상은 무너질 것이다. 그녀는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기도 싫었고 이틀이 지나도록 박한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의 이런 태도는 성유리로 하여금 빠르게 박한빈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만들었다. 의료진을 동원하고 검사를 받는 것 또한 그저 아버지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는 의도 말이다. 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시름을 놓았다. 다른 일이랑은 상관이 없어 보이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필경 전에 사하나도 아이는 부모 사이를 잇는 끈과 같다는 말을 해줬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이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진즉에 연락이 끊겼을 것이다. 그때 사하나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두려웠다. 다들 제일 아팠던 기억이 제일 오래 남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당시 사하나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성유리는 이제야 더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가 다시 입원한 지 4일이 흐른 날, 누군가가 병문안을 왔다. 그는 바로 연정우. 성유리는 이미 오랫동안 연정우와 만난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아마 성유리의 어느 한 사인회였을 것이다. 연정우는 그날 특별 초청된 게스트로 사인회에 참석했는데 이유는 바로 성유리와 협업한 출판사에 그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인회에서 만났지만 별다른 교류도 없이 업무에만 몰두했고 다 끝이 나서도 함께 밥 한 끼 먹지도 않았다. 성유리가 나중에서야 연정우가 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는 업계에 발을 들였다는
성유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도망치듯 떠나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병실로 돌아갔다. 사하나는 병상 옆에 앉아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비록 손가락으로 열심히 화면을 넘기고 있었지만 그다지 집중한 모습은 아니었다. 성유리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왔어요?”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얘기했어요? 그 나쁜 새...” “그 사람은 하늘이가 아팠던 걸 몰랐다고 했어.”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으며 대답했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사하나는 놀란 듯 멍해졌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하나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약점을 건드린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요! 그 사람이 모를 리가 없는데... 박한빈 씨가 직접 저한테 말했어요. 언니가 그런 선택을 한 거라고 했고 심지어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겠다고도...” 사하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하늘이를 곁눈질하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사하나는 자신이 지금 극도로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 인간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언니 선택이라면서 다른 여자랑 아이를 가지겠다고...” “그만해.” 사하나가 계속 얘기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평소완 다른 성유리의 모습에 사하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과거에 알았던 몰랐든 이제 상황은 이렇게 됐잖아. 그리고 박한빈 씨는 이미 해외 전문가한테 연락을 한 것 같아. 나한테 그들이 내일 도착한다고 했어.” “언니가 동의한 거예요?” “응.” “왜요?” 사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소개한 의료진 팀을 못 믿어서 그랬어요?” “그건 아니야.” “그럼 왜요? 왜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이나 있어서?” “나는 하늘이를 박한빈 씨와의 자존심 싸움에 이용하고 싶지 않
죄송하다는 성유리의 한 마디에 박한빈은 고작 그 네 글자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슨 대답이라도 해주려고 입을 움찔거렸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오늘 오후에 하늘이가 당신들에게 사과했어야 했어요.” 성유리는 고개를 떨군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잘못한 일에는 사과를 해야 하죠. 만약 그때 사과했다면 뒤에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엄마로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에요. 그래서 박한빈 씨에게 사과하는 거예요.” “그리고 오후에 제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땐 너무 다급했거든요. 부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해요.” 성유리가 말을 끝냈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했다. “아, 그리고 의료진 관련해서도 정말 감사해요. 저 그게...” “됐어.” 성유리가 말을 이어가려 하자 박한빈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이빨을 꽉 깨물고 있는 박한빈의 표정에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이렇게 말해서 나를 더 힘들게 하려는 거냐고!”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지금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이가 아픈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그래. 지난 2년간 내가 너희 생활에 신경 쓰지 않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네가 선택한 거 아니었어?” “처음 네가 내 곁을 떠나겠다고 고집했던 것도 너였잖아! 버려진 사람은 나야! 그런데 나더러 뭘 더 어쩌란 거야? 눈치 없이 매달리기라도 했어야 했어?” “오늘 일도 마찬가지야. 네가 아이가 아프다는 걸 미리 말했으면 내가 이렇게 했겠어? 내가 뭐로 보이는데? 그래도 내 핏줄인데!” 박한빈은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성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는 스스로도
박한빈은 마침 하늘이가 있는 병실 밖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사하나는 조롱하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박 대표님 아니신가? 설마 마트에서 한 일도 부족하다고 느껴서 여기까지 와서 교육자 흉내를 내시려고 그러는 건가요?”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무시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할 말이 있어.”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하나가 끼어들었다. “당신 뭐야? 무슨 자격으로 유리 언니한테 그런 말투로 말하는데?” 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박한빈의 태도는 사하나로 하여금 표정이 더 굳어지게 만들었다. 화가 나 무언가 더 말하려던 사하나를 가로막던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 좀 봐줘.” 사하나는 성유리의 말에 이를 악물고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그녀 옆을 지나쳤고 박한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반면, 박한빈은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손바닥만큼 작고 창백했고 수액이 꽂혀 있는 마른 손에는 혈관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뒤를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마와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박한빈은 그녀가 정말 많이 야위었음을 깨달았다. 성유리에게서는 병약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을 때의 초췌한 모습은 표절 문제로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때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길 바랐다. 세간의 폭풍 같은 여론을 자신이 충분히 잠재울 수 있었고 책임감 없는 남자조차도 자신이 손봐서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사라지면 그의 팬들도 잠잠해질 터였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마디라도 약한 소리를 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