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정은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성유리의 차분한 모습과 비교하면 성유정은 날뛰는 어릿광대처럼 보였다.안색이 더 나빠진 성유정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성유리가 계속해서 말했다.“내가 너라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볼 거야.”“무슨 뜻이야? 뭘 하라는 거야?”“너를 보호하는 그분이 죽어가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어?”성유리가 천천히 말했다.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반박하려고 했지만 입가에 맴도는 말을 삼켜버렸다.성유리가 말한 사람은 당연히 윤청하였다.지난 몇 년 동안 비록 성시원이 성씨 가문의 주인 노릇을 했지만 성유리와 성유정 사이의 일에서는 줄곧 윤청하의 태도가 더 중요했다. 성시원은 줄곧 윤청하의 뜻에 따라 두 사람을 대했다.그런데 지금 윤청하가 곧 죽게 되었고 이는 성유정의... 유일한 우세였다.여기까지 생각한 성유정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진 채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야? 아빠는 너의 말을 믿지 않을 거야. 아빠는...”“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아빠의 딸이라는 것은 사실이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성유리의 말을 들은 성유정은 잠자코 있었다.성유리는 멍해진 성유정을 보며 귀띔했다.“진무열이 곧 퇴원할 거지? 너희는 약혼한 지 꽤 됐는데 이참에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면 아마 기뻐할 거야.”‘그 사람?’성유정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성유리가 옆을 지나갈 때야 문득 깨달았다.“장난해? 그 사람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어! 하지만 이건 내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이야.”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정은 성시원이 대뜸 허락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진씨 가문에서도 다른 의견이 없자 그녀와 진무열의 결혼식은 이렇게 준비하기 시작했다.맞춤 웨딩드레스도 없었고 로맨틱한 세기의 결혼식은 더더욱 불가능했다.심지어 결혼식장도 임시로 만들어져 결혼식
이번 결혼식은 비록 급하게 치렀지만 초대할 사람은 모두 초대했다.성유리는 언니로서 성시원과 함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 샴페인 색 롱 드레스를 입고 긴 생머리를 올려 하얗고 늘씬한 목덜미를 드러냈고 단아한 메이크업으로 세련미를 더했다.그녀의 옷차림은 매우 점잖았지만 얼마 전 일로 인해 주위에는 여전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들은 성유리의 앞에서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한 눈빛은 여전히 예리한 칼처럼 사람들을 뚫고 그녀에게로 향했다.오기 전에 이런 상황에 대해 충분히 예상했던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인사했다.이때 원유진이 나타났다.원유진은 오늘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신부의 눈치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은은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었고 화장도 여느 때보다 더 정교하고 화려했는데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신부를 보기도 전에 오히려 먼저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성유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은 태도로 그녀에게 웃으며 인사했다.“무슨 염치로 여기에 있어? 살인범이 여기에 손님 맞이하다니? 재수 없어!”원유진이 쌀쌀하게 웃었다.그녀의 말에 성시원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원유진, 말을 가려서 해.”“내 말이 틀렸어? 얼마 전 뉴스에서 보도된 사실이잖아.”원유진은 그녀를 힐끗 훑어보며 계속해서 말했다.“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너 또 박한빈에게 차였다며? 불쌍하네. 하지만 이 세상은 원래 그래. 네 것이 아닌 물건은 네가 갖은 수단을 써서 얻으려고 애써도 여전히 네 것이 아니야.”원유진의 목소리는 낮은 편이 아니었고 마침 문 앞에 서 있어서 주위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원유진은 더 의기양양해서 턱을 쳐들고 성유리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은 여자라면 다 참을 수 없기에 그녀는 성유리가 반드시 화를 낼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의외로... 성유리는 차분했다.성유리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원유진을 바라봤다.“난 오히려... 가졌다가 잃는 것이 누군가
성유리는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원유진이 들어오고 나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음 손님을 맞이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곳으로 오신 것을 환영...” 다음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성유리는 인사말을 제대로 못 끝냈고 표정도 조금 굳어갔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내 정신을 다잡아 더욱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도착했는지도 몰랐다. 박한빈의 뒤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아하니 방금 원유진과 성유리가 나눈 대화를 그가 똑똑히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성시원에게로 다가가더니 악수를 청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두 사람은 짧은 악수를 마치고 빠르게 서로에게서 손을 뗐다. 성유리는 박한빈을 오래 쳐다보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다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 오늘 찾아온 손님은 족히 천 명이 넘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한 성유리는 얼굴 근육이 아파 나기까지 했다. 뒤에 있는 행사들은 성유리가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 틈을 타 복도로 나갔다. 잠시 바람을 쐬며 숨을 고른 성유리는 가방 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려 했지만 라이터를 두고 나온 사실을 발견했다. 가방 안을 샅샅이 더 뒤졌지만 라이터는 보이지 않았고 성유리는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은 성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급히 뒤돌아보느라 손에 들린 담배도 숨기지 못한 성유리를 박한빈이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비록 이젠 그의 눈빛이 어떻든 신경을 쓰지 않는 성유리였지만 박한빈이 미간을 찌푸릴 때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박한빈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박 대표님이 왜 지금 이 시간에 여기 계시는 거죠? 안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성유리는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손에 들린 담배를 끊어 버린 뒤 쓰레기통
그 시각, 연회장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급히 진행된 결혼식이었지만 아무런 실수도 없이 무사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덧 신랑과 신부가 서로 반지를 교환하는 시간이자 이 결혼식의 하이라이트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성유정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갑자기 말했다. “오늘 결혼식을 올리려는 선택을 누가 했는지 알아요?” 진무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유정이 또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성유리, 우리 언니가 그랬어요.” “아직 우리 언니 좋아하죠? 결과는? 제 기분 좀 망치겠다고 무열 오빠까지 끌어들였잖아요.” 진무열은 성유정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순서대로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성유정은 덤덤한 그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빨을 꽉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언니는 제가 시집가면 성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봐요. 미련하기도 하지? 그냥 우리 아빠한테 제 이런 꼴을 보게 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요. 기다려요. 제가 가져야 하는 물건은 어떻게든 다 뺏어오겠으니까. 그래서 오빠는...” 성유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성유정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저녁에 있는 성유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왔던 윤청하는 이미 성시원의 품에 안겨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다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했고 성시원은 이성을 잃고 의사를 부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제일 “효녀”인 성유정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역시 내 결혼식이 순조롭게 끝날 리가 없지.’ 성유정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사방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내 입구 쪽에서 성유리를 발견한 성유정은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을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두 손을 꼭 쥐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가식적인 년! 더러
성유리는 진무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과 영정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가족들은 윤청하가 젊었을 적에 찍어둔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걸어두었다. 성유리는 사진 속 윤청하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장례식 당일, 금성에는 갑자기 큰 비가 쏟아졌고 기온은 작년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성유리는 두꺼운 외투로 갈아입고 묘지 앞에 서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청하의 유골함은 빠르게 묘지 안에 안장되었고 그녀의 혼을 기리는 목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성유리는 윤청하가 정말 떠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성유리가 그녀에 대한 사랑과 원망의 감정은 윤청하의 죽음을 따라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때, 성유리는 윤청하가 눈을 감는 그날이 떠올랐다. 미안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청하는 성유리를 불러 자신의 앞에 세워두었다. 그때 윤청하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그날의 공기마저도 성유리는 다 기억이 났다. 성유리를 잃어버리기 전에 윤청하는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보살펴줬었다. 늘 성유리를 안고 잠에 들었고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흐르는 땀도 닦아주던 윤청하에 대한 기억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무 말도 없이 성유리를 묵묵히 쳐다보던 윤청하는 눈을 감았고 성유리는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빗방울들은 점점 거세게 떨어져 성유리의 옷깃을 적셨지만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는 성유리의 옆에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성유리는 스스로 두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그쳤고 장례는 빠르게 끝이 났다. 손님들을 다 돌려보낸 뒤, 성시원이 성유리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나랑 같이 집에 가지 않겠니?”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성유정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성유정은 성유리를 죽일 듯 노려보았고 성유리는 성시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같이 가요.”
“성 대표님, 전 대표님이랑 단둘이 밥 드시러 가는 건가요? 그분도 참...” 성유리와 통화 중이던 비서가 문득 하던 말을 멈췄다. 사실 비서의 말을 끝까지 못 들었지만 성유리는 비서의 뜻을 다 알고 있었다. 전 대표는 연성에서 결코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에 전 대표가 특별히 성유리랑 단둘만의 식사를 하자고 했으니 비서가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괜찮아요. 같이 저녁만 먹으면 되니까.” 성유리는 비서를 안심시키며 대답했고 그녀는 오히려 큰 걱정이 없어 보였다. 이 말을 끝으로 성유리는 차 문을 닫고 내렸다. 오늘 식사 자리는 성유리가 예약을 했는데 혹시나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들을 대비하기 위해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다.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미리 나오는 차들이 밥상 위에 다 차려졌을 때, 마침 진 대표도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성 대표님을 기다리게 했네요.” “괜찮아요. 저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다 정상이었다. 하지만 와인을 몇 잔 마시고 나서부터 전 대표는 슬슬 다른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했다. “성 대표님도 연성에 오신 지 이젠 몇 달이나 지나지 않았습니까?” “3개월 됐어요.” 성유리는 여전히 웃으며 대답을 해줬다. “적응은 잘해 나가고 계십니까?” “네. 다 전 대표님 덕분이죠.” 성유리는 조용히 전 대표가 내민 손을 비키며 술잔을 들었다. “받으세요. 제가 따라드릴게요.” 전 대표는 성유리의 말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 성 대표님이 노력하신 덕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챙겨주는 건 금상첨화를 이루기 위함이고.” “그럼 금상첨화가 되게끔 도와주신 전 대표님께 감사드려야겠네요.” 옅게 웃으며 대답하는 성유리를 보던 전 대표가 술잔을 들어 부딪히며 대답했다. “별말씀을.” 저녁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잘 흘러갔다. 몇 번이나 슬금슬금 손을 내밀며 다가오
그 여자는 식당 밖으로 나오다가 어딘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자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쳐다보던 성유리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검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 낯선 번호판이었지만 차의 모양과 디자인은 성유리가 제일 익숙한 것이었다. 그건 바로 박한빈이 제일 좋아하는 차였다. 성유리는 잠시 멍해서 차를 쳐다보다 택시를 잡는 것도 잊어버리고는 뒤를 돌아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오셨어요?” 여자는 기사가 내려 문을 열어주자 밝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검은색 코트에 화려하고 진한 금색의 단추와 무늬가 새겨진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가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져 딱 봐도 잘생긴 남자는 여자가 옆에 앉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박 대표님?” 가만히 있는 박한빈을 여자가 다시 불렀지만 그는 옆을 힐끔 쳐다만 볼 뿐이었다. “갑시다.” 박한빈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자 여자 또한 입을 굳게 닫았다. 예약한 호텔에 도착하자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올라가실래요?” 여자의 물음에 박한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내 박한빈의 뜻을 알아챈 여자는 결국 포기를 해야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여자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박한빈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의 기사가 터지고 나서부터 여자는 평소보다 더욱 바쁘게 일을 했고 돈도 많이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박한빈과 만나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좋은 자원들이 계속 들어왔다. 여성은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왜 그 업계의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면 승승장구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팬이 많고 영화가 흥행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돈을 버는 기계로 보일 뿐만 아니라 장난감 취급을 당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요즘 박한빈을 따라다니며 인생의 달콤한 맛을 맛봤으니 여성은 자연스레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박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 의심되는 점이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사는 층수를 눌렀다. 서훈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두 자리 숫자를 보다가 성유리에게 다시 물었다. “성유리 씨는 이곳에서...” 그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성유리는 서훈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전화를 받았다. “조 대표님? 저예요.” “대표님도 계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알았더라면 가서 술 한 잔 따라드릴 텐데.”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나중에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지은 죄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당연하죠. 장소는 대표님께서 정하세요.” 널찍한 엘리베이터 안에는 서훈과 성유리 둘뿐인지라 성유리의 목소리가 아무리 낮다 해도 서훈은 잘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성유리 층수에 도착하자 두 사람의 통화는 마침 끝이 났다.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서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서 비서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니요. 별거 아닙니다. 제 여자 친구도 이쪽에 혼자 있어서 혹시 괜찮으시면 소개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서로 챙겨주고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서훈은 하려던 물음을 끝내 내뱉지 못했고 급히 다른 말을 지어서 대답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성유리는 서훈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답했다. “여기 보안이 아주 잘돼있어요. 서비스도 되게 좋고요.” 서훈은 성유리의 대답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뗐다. “네. 알겠습니다.” 성유리는 서훈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한마디 인사도 없이 내리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서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내 그가 내려야 할 층수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서훈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만약 성유리가 서훈을 따라 들어왔다면 어두운 집안을 발견할 거고 여자 친구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다. ... 성유리는 요즘 자신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