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진무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과 영정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가족들은 윤청하가 젊었을 적에 찍어둔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걸어두었다. 성유리는 사진 속 윤청하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장례식 당일, 금성에는 갑자기 큰 비가 쏟아졌고 기온은 작년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성유리는 두꺼운 외투로 갈아입고 묘지 앞에 서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청하의 유골함은 빠르게 묘지 안에 안장되었고 그녀의 혼을 기리는 목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성유리는 윤청하가 정말 떠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성유리가 그녀에 대한 사랑과 원망의 감정은 윤청하의 죽음을 따라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때, 성유리는 윤청하가 눈을 감는 그날이 떠올랐다. 미안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청하는 성유리를 불러 자신의 앞에 세워두었다. 그때 윤청하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그날의 공기마저도 성유리는 다 기억이 났다. 성유리를 잃어버리기 전에 윤청하는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보살펴줬었다. 늘 성유리를 안고 잠에 들었고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흐르는 땀도 닦아주던 윤청하에 대한 기억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무 말도 없이 성유리를 묵묵히 쳐다보던 윤청하는 눈을 감았고 성유리는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빗방울들은 점점 거세게 떨어져 성유리의 옷깃을 적셨지만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는 성유리의 옆에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성유리는 스스로 두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그쳤고 장례는 빠르게 끝이 났다. 손님들을 다 돌려보낸 뒤, 성시원이 성유리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나랑 같이 집에 가지 않겠니?”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성유정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성유정은 성유리를 죽일 듯 노려보았고 성유리는 성시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같이 가요.”
“성 대표님, 전 대표님이랑 단둘이 밥 드시러 가는 건가요? 그분도 참...” 성유리와 통화 중이던 비서가 문득 하던 말을 멈췄다. 사실 비서의 말을 끝까지 못 들었지만 성유리는 비서의 뜻을 다 알고 있었다. 전 대표는 연성에서 결코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에 전 대표가 특별히 성유리랑 단둘만의 식사를 하자고 했으니 비서가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괜찮아요. 같이 저녁만 먹으면 되니까.” 성유리는 비서를 안심시키며 대답했고 그녀는 오히려 큰 걱정이 없어 보였다. 이 말을 끝으로 성유리는 차 문을 닫고 내렸다. 오늘 식사 자리는 성유리가 예약을 했는데 혹시나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들을 대비하기 위해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다.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미리 나오는 차들이 밥상 위에 다 차려졌을 때, 마침 진 대표도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성 대표님을 기다리게 했네요.” “괜찮아요. 저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다 정상이었다. 하지만 와인을 몇 잔 마시고 나서부터 전 대표는 슬슬 다른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했다. “성 대표님도 연성에 오신 지 이젠 몇 달이나 지나지 않았습니까?” “3개월 됐어요.” 성유리는 여전히 웃으며 대답을 해줬다. “적응은 잘해 나가고 계십니까?” “네. 다 전 대표님 덕분이죠.” 성유리는 조용히 전 대표가 내민 손을 비키며 술잔을 들었다. “받으세요. 제가 따라드릴게요.” 전 대표는 성유리의 말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 성 대표님이 노력하신 덕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챙겨주는 건 금상첨화를 이루기 위함이고.” “그럼 금상첨화가 되게끔 도와주신 전 대표님께 감사드려야겠네요.” 옅게 웃으며 대답하는 성유리를 보던 전 대표가 술잔을 들어 부딪히며 대답했다. “별말씀을.” 저녁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잘 흘러갔다. 몇 번이나 슬금슬금 손을 내밀며 다가오
그 여자는 식당 밖으로 나오다가 어딘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자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쳐다보던 성유리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검은 차 한 대를 발견했다. 낯선 번호판이었지만 차의 모양과 디자인은 성유리가 제일 익숙한 것이었다. 그건 바로 박한빈이 제일 좋아하는 차였다. 성유리는 잠시 멍해서 차를 쳐다보다 택시를 잡는 것도 잊어버리고는 뒤를 돌아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오셨어요?” 여자는 기사가 내려 문을 열어주자 밝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검은색 코트에 화려하고 진한 금색의 단추와 무늬가 새겨진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가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져 딱 봐도 잘생긴 남자는 여자가 옆에 앉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박 대표님?” 가만히 있는 박한빈을 여자가 다시 불렀지만 그는 옆을 힐끔 쳐다만 볼 뿐이었다. “갑시다.” 박한빈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자 여자 또한 입을 굳게 닫았다. 예약한 호텔에 도착하자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올라가실래요?” 여자의 물음에 박한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내 박한빈의 뜻을 알아챈 여자는 결국 포기를 해야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여자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박한빈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의 기사가 터지고 나서부터 여자는 평소보다 더욱 바쁘게 일을 했고 돈도 많이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박한빈과 만나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좋은 자원들이 계속 들어왔다. 여성은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왜 그 업계의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면 승승장구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팬이 많고 영화가 흥행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돈을 버는 기계로 보일 뿐만 아니라 장난감 취급을 당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요즘 박한빈을 따라다니며 인생의 달콤한 맛을 맛봤으니 여성은 자연스레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박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 의심되는 점이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사는 층수를 눌렀다. 서훈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두 자리 숫자를 보다가 성유리에게 다시 물었다. “성유리 씨는 이곳에서...” 그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성유리는 서훈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전화를 받았다. “조 대표님? 저예요.” “대표님도 계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알았더라면 가서 술 한 잔 따라드릴 텐데.”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나중에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지은 죄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당연하죠. 장소는 대표님께서 정하세요.” 널찍한 엘리베이터 안에는 서훈과 성유리 둘뿐인지라 성유리의 목소리가 아무리 낮다 해도 서훈은 잘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성유리 층수에 도착하자 두 사람의 통화는 마침 끝이 났다.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서훈을 쳐다보며 물었다. “서 비서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니요. 별거 아닙니다. 제 여자 친구도 이쪽에 혼자 있어서 혹시 괜찮으시면 소개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서로 챙겨주고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서훈은 하려던 물음을 끝내 내뱉지 못했고 급히 다른 말을 지어서 대답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성유리는 서훈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답했다. “여기 보안이 아주 잘돼있어요. 서비스도 되게 좋고요.” 서훈은 성유리의 대답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뗐다. “네. 알겠습니다.” 성유리는 서훈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한마디 인사도 없이 내리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서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내 그가 내려야 할 층수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서훈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만약 성유리가 서훈을 따라 들어왔다면 어두운 집안을 발견할 거고 여자 친구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다. ... 성유리는 요즘 자신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
성유리는 남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전 조 대표님께서 바쁘실까 봐 그랬죠. 조 대표님이랑 밥 한 끼 먹으려 하는 사람이 저 빼고도 너무 많아서 아직 제 순서가 안 온 줄 알았어요.” 예쁜 그녀의 미소에 조 대표는 기분이 풀렸는지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지금 시간이 넘쳐나는데 성 대표님은 언제 저한테 밥을 사주시려나?” 성유리는 옆에 있던 술 한 잔을 들어 조 대표의 손에 건네주며 대답했다. “저야 당연히 아무 때나 괜찮죠. 내일 조 대표님 비서분을 통해서 연락드릴까요?” “뭐 그렇게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제 번호 있지 않으십니까?” 조 대표는 술잔을 쥐고는 성유리의 손을 어루만졌다. 뚱뚱한 편이 아닌 조 대표는 얼굴도 꽤 잘생겼지만 성유리는 그를 볼 때마다 느끼하다는 생각이 들고 보기 거북했다. 아무리 불편하고 싫어도 성유리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오늘 집에 가서 식당 제대로 찾아봐야겠네요. 내일 전화 드릴게요.” 두 사람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고 성유리는 조 대표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애를 썼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어 광대마저 아파지기 시작할 때, 입구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 사람이 배지수인가?” 성유리는 옆에 있던 사람들이 토론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성유리가 의아해하고 있던 그때, 다른 사람이 말했다. “맞아. 이번에 연극영화 대학 졸업한 사람이라는데 도대체 전생에 무슨 일을 했기에 저렇게 운이 좋은지 모르겠다니까.” “그냥 보기에는 별로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성유리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배지수라는 여성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저 여자가 박한빈 씨 새로운 여자 친구구나.’ 연예계와 그들의 일하는 업계는 사실 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오늘 연회에 참석한 배우와 가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은 배지수가 박한빈이 아닌 매니저와 같이 왔다는 사실이다. 성유리는 배지수를 힐끔 쳐다보고는 그녀에게서
성유리는 사실 오늘 밤 술을 별로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연회장에서는 미처 못 느꼈지만 모든 것이 끝이나자 목이 너무 간질거려 참기 힘들었다. 성유리는 가는 길 내내 기침을 했고 호텔 밖으로 나오자 불어오는 찬 바람에 목은 더욱 간질거리고 아파왔다. 그녀의 기사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성유리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비서에게로 전화를 하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 대표님!” 어딘가 불길한 청아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성유리는 배지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안 가셨네요?” 밝게 웃으며 묻는 배지수에게 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여줬다. “기사님이 아직 안 오셨어요?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성유리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답했다. “곧 오실 거예요.” “저도 괜찮아요. 시간도 늦었는데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배지수는 성유리에게 친한 척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잡힌 손을 빼내려는 순간, 배지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저 여기 있어요!” 배지수의 목소리는 어딘가 격동돼 있었다. 성유리는 이미 배지수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예상했기에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파오는 목 때문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배지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병원 먼저 모셔다드릴까요?” 성유리는 뒤를 돌아 기침을 하더니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남자는 이미 그녀들의 앞에 서 있었다. “한빈 오빠, 저희 성 대표님 모셔다드릴까요? 어디 아프신 것 같은데 기사분도 연락이 안 된대요.”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남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응.” 박한빈은 배지수의 말에 짧게 대답을 해줬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성유리는 기침을 애써 참
게다가 지금 마침 남자랑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으니 배지수는 내심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박한빈을 등에 업고 자신의 위치를 더욱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내려야 하는 층에 도착했고 박한빈은 먼저 내리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긴장한 탓에 손에서도 땀이 나는 배지수와는 달리 박한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배지수가 박한빈을 보며 물었다. “저 먼저 씻을까요?” “응.” 박한빈은 짧은 대답만 했지만 배지수의 얼굴을 터질 듯 빨개졌다. 배지수는 방 안에 있는 박한빈을 한 번 더 힐끔 쳐다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떨려 하는 배지수와는 달리 박한빈은 전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 안에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연성의 밤이 금성의 밤보다 조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축 기술의 발전으로 연성 또한 높은 빌딩과 화려한 조명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박한빈은 창문 너머 빌딩의 불빛만 조용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성유리의 눈빛이 떠올랐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이 경계하던 눈빛과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가던 뒷모습. ‘얼마 만에 보는 거지?’ 박한빈은 한참을 생각하다 마지막으로 성유리를 본 곳이 윤청하의 장례식장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그날 박한빈도 장례식장을 찾았지만 도착했을 때 시간이 꽤 늦었던 터라 바로 제일 뒤쪽에 서 있었다. 박한빈은 아직도 떨리던 성유리의 어깨와 꽉 쥔 두 주먹을 선명하게 기억났다. 성유리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박한빈이었지만 창백한 그녀의 안색과 참으려고 이빨이 으스러질 정도로 물고 있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박한빈이 그날 성유리를 떠올리고 있을 무렵, 뒤에 있는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배지수가 수건 한 장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진한 화장을 지운 배지수의 민낯은 청순했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배지수의 눈을 보고는 순간 가슴이
박한빈은 성유리라는 이름을 김서영의 입에서 처음 전해 들었었다. 김서영은 성유리가 박성훈이 고른 박한빈의 결혼 상대라고 알려주었다. 그쯤 성씨 가문에서 애타게 찾고 있던 성유리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된 터라 김서영은 핑계 삼아 성유리를 데리러 가라는 말도 했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결혼 상대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았고 김서영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박한빈은 끝내 성유리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다 두 사람의 결혼이 가문들 사이 무언의 계약이라고 여겼다. 심지어는 결혼하는 박한빈마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김서영은 세상에서 박한빈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만약 박한빈이 한사코 거부했다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박한빈이 성유리와의 결혼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오늘에서야 박한빈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이 성유리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 말이다. 좋아하니까 성유리와 결혼을 하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전에 박한빈은 성유리와 오직 육체적인 욕망을 해결하는 사이라고만 생각했다. 필경 성유리는 자신의 아내이자 제일 잘 맞는 반쪽이라고 느꼈으니까. 육체적인 욕망을 빼고도 사실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치기 싫었지만 소유욕이 강해지면 질수록 이혼이 하고 싶었다. 그런 감정은 성유리가 아니어도 다른 여자가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박한빈은 자신의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허비하기 싫었다. 그래서 늘 성유리를 제일 먼저 선택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때면 그녀를 제일 먼저 버렸다. 성유리는 항상 박한빈이 마음대로 버려버리는 “장난감”이었다. 상인으로서 박한빈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에 능했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이 틀렸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너무 높게 평가했고 성유리가 자신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너무 낮게 평가했다. 박한빈은 문득 성유리와 갓 결혼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