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남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전 조 대표님께서 바쁘실까 봐 그랬죠. 조 대표님이랑 밥 한 끼 먹으려 하는 사람이 저 빼고도 너무 많아서 아직 제 순서가 안 온 줄 알았어요.” 예쁜 그녀의 미소에 조 대표는 기분이 풀렸는지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지금 시간이 넘쳐나는데 성 대표님은 언제 저한테 밥을 사주시려나?” 성유리는 옆에 있던 술 한 잔을 들어 조 대표의 손에 건네주며 대답했다. “저야 당연히 아무 때나 괜찮죠. 내일 조 대표님 비서분을 통해서 연락드릴까요?” “뭐 그렇게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제 번호 있지 않으십니까?” 조 대표는 술잔을 쥐고는 성유리의 손을 어루만졌다. 뚱뚱한 편이 아닌 조 대표는 얼굴도 꽤 잘생겼지만 성유리는 그를 볼 때마다 느끼하다는 생각이 들고 보기 거북했다. 아무리 불편하고 싫어도 성유리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오늘 집에 가서 식당 제대로 찾아봐야겠네요. 내일 전화 드릴게요.” 두 사람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고 성유리는 조 대표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애를 썼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어 광대마저 아파지기 시작할 때, 입구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 사람이 배지수인가?” 성유리는 옆에 있던 사람들이 토론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성유리가 의아해하고 있던 그때, 다른 사람이 말했다. “맞아. 이번에 연극영화 대학 졸업한 사람이라는데 도대체 전생에 무슨 일을 했기에 저렇게 운이 좋은지 모르겠다니까.” “그냥 보기에는 별로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성유리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배지수라는 여성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저 여자가 박한빈 씨 새로운 여자 친구구나.’ 연예계와 그들의 일하는 업계는 사실 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오늘 연회에 참석한 배우와 가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은 배지수가 박한빈이 아닌 매니저와 같이 왔다는 사실이다. 성유리는 배지수를 힐끔 쳐다보고는 그녀에게서
성유리는 사실 오늘 밤 술을 별로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연회장에서는 미처 못 느꼈지만 모든 것이 끝이나자 목이 너무 간질거려 참기 힘들었다. 성유리는 가는 길 내내 기침을 했고 호텔 밖으로 나오자 불어오는 찬 바람에 목은 더욱 간질거리고 아파왔다. 그녀의 기사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성유리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비서에게로 전화를 하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 대표님!” 어딘가 불길한 청아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성유리는 배지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안 가셨네요?” 밝게 웃으며 묻는 배지수에게 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여줬다. “기사님이 아직 안 오셨어요?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성유리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답했다. “곧 오실 거예요.” “저도 괜찮아요. 시간도 늦었는데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배지수는 성유리에게 친한 척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잡힌 손을 빼내려는 순간, 배지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저 여기 있어요!” 배지수의 목소리는 어딘가 격동돼 있었다. 성유리는 이미 배지수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예상했기에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파오는 목 때문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배지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병원 먼저 모셔다드릴까요?” 성유리는 뒤를 돌아 기침을 하더니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남자는 이미 그녀들의 앞에 서 있었다. “한빈 오빠, 저희 성 대표님 모셔다드릴까요? 어디 아프신 것 같은데 기사분도 연락이 안 된대요.”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남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응.” 박한빈은 배지수의 말에 짧게 대답을 해줬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성유리는 기침을 애써 참
게다가 지금 마침 남자랑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으니 배지수는 내심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박한빈을 등에 업고 자신의 위치를 더욱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내려야 하는 층에 도착했고 박한빈은 먼저 내리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긴장한 탓에 손에서도 땀이 나는 배지수와는 달리 박한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배지수가 박한빈을 보며 물었다. “저 먼저 씻을까요?” “응.” 박한빈은 짧은 대답만 했지만 배지수의 얼굴을 터질 듯 빨개졌다. 배지수는 방 안에 있는 박한빈을 한 번 더 힐끔 쳐다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떨려 하는 배지수와는 달리 박한빈은 전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 안에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연성의 밤이 금성의 밤보다 조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축 기술의 발전으로 연성 또한 높은 빌딩과 화려한 조명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박한빈은 창문 너머 빌딩의 불빛만 조용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성유리의 눈빛이 떠올랐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이 경계하던 눈빛과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가던 뒷모습. ‘얼마 만에 보는 거지?’ 박한빈은 한참을 생각하다 마지막으로 성유리를 본 곳이 윤청하의 장례식장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그날 박한빈도 장례식장을 찾았지만 도착했을 때 시간이 꽤 늦었던 터라 바로 제일 뒤쪽에 서 있었다. 박한빈은 아직도 떨리던 성유리의 어깨와 꽉 쥔 두 주먹을 선명하게 기억났다. 성유리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박한빈이었지만 창백한 그녀의 안색과 참으려고 이빨이 으스러질 정도로 물고 있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박한빈이 그날 성유리를 떠올리고 있을 무렵, 뒤에 있는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배지수가 수건 한 장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진한 화장을 지운 배지수의 민낯은 청순했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배지수의 눈을 보고는 순간 가슴이
박한빈은 성유리라는 이름을 김서영의 입에서 처음 전해 들었었다. 김서영은 성유리가 박성훈이 고른 박한빈의 결혼 상대라고 알려주었다. 그쯤 성씨 가문에서 애타게 찾고 있던 성유리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된 터라 김서영은 핑계 삼아 성유리를 데리러 가라는 말도 했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결혼 상대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았고 김서영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박한빈은 끝내 성유리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다 두 사람의 결혼이 가문들 사이 무언의 계약이라고 여겼다. 심지어는 결혼하는 박한빈마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김서영은 세상에서 박한빈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만약 박한빈이 한사코 거부했다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박한빈이 성유리와의 결혼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오늘에서야 박한빈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이 성유리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 말이다. 좋아하니까 성유리와 결혼을 하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전에 박한빈은 성유리와 오직 육체적인 욕망을 해결하는 사이라고만 생각했다. 필경 성유리는 자신의 아내이자 제일 잘 맞는 반쪽이라고 느꼈으니까. 육체적인 욕망을 빼고도 사실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치기 싫었지만 소유욕이 강해지면 질수록 이혼이 하고 싶었다. 그런 감정은 성유리가 아니어도 다른 여자가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박한빈은 자신의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허비하기 싫었다. 그래서 늘 성유리를 제일 먼저 선택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때면 그녀를 제일 먼저 버렸다. 성유리는 항상 박한빈이 마음대로 버려버리는 “장난감”이었다. 상인으로서 박한빈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에 능했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이 틀렸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너무 높게 평가했고 성유리가 자신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너무 낮게 평가했다. 박한빈은 문득 성유리와 갓 결혼
그때, 성유리의 목소리가 집안에서 들렸다. “민재 씨, 밖에 누구 왔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내가 잘 못 찾아온 게 아니구나.’ 성유리의 집에 낯선 남성이 있다는 사실을 안 박한빈은 피식 웃더니 뒤돌아 떠나버렸다. ‘좋아한다면서 가능성이 없냐고 물을 때는 언제고 지금 저러고 있어?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만약 자신에게 깊은 감정이 있었다면 그렇게 깔끔하게 이혼을 해줄 리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박한빈의 기억이 맞는 거라면 이혼 전, 성유리는 몰래 수많은 피임약을 복용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정말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런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성유리는 자기감정을 너무 잘 아는 여자여서 연성에서도 승승장구를 한다고 확신했다. 그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여기저기 웃으며 인사를 하는 성유리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박한빈은 제일 먼저 봤었다.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다면 박한빈은 영상 속 성유리와 자신이 알던 성유리가 동일 인물이라고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전에 함께 참여했던 가면무도회에서도 신나게 놀던 성유리가 떠올랐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 모습들이 전부 성유리의 진짜 얼굴이고 자신과 생활할 때 얼굴은 “가면”을 쓴 채 감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어두운 안색으로 차에 올라타고는 기사에게 말했다. “출발하세요.” 그의 안색을 본 기사는 무슨 일인지 물어볼 용기조차 없어 묵묵히 시동을 걸었다. 한참 뒤, 박한빈은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먼저 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성유리에 관련된 일들은 저한테 보고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드림 타운에 있는 집도 이젠 내놓으세요.” 자신의 할 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시각, 성유리의 집. 정민재는 문을 닫고도 벨을 누르던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지만 이름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박한빈은 이 세상에 어떤 규칙들이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규칙은 바로 늘 속으로 행여나 진짜로 발생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일은 꼭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마주치기 싫어 요리조리 피해 다녀도 꼭 어딘가에서 의도치 않게 만나게 되는 규칙도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 시각,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오늘 여자의 옷차림은 평소보다 더 정갈하고 깔끔했다. 연한 파란색의 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고 머리도 낮게 묶은 여성은 화장도 어젯밤보다 더 연하게 했다. 하지만 여성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앞에 있는 남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 대표님?” 옆에 있던 사람은 박한빈의 지시를 기다리다 가만히 서 있는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박한빈은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저분 조 대표님 아니에요?” 옆에 있던 사람이 박한빈의 시선을 따라 쳐다본 곳에서 조 대표와 그 여성을 발견했다. 성유리와 잔을 부딪치며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박한빈의 옆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이내 박한빈을 발견한 남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성유리는 사실 아까부터 박한빈을 발견했지만 못 본척 하고 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이곳에서 마주칠 줄 몰랐는지 미간이 찌푸려졌고 인사조차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성유리는 박한빈과 인사를 하기 싫었지만 결국 남성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박 대표님도 식사하시러 오셨습니까? 이것 참 우연이네요.” 조 대표는 박한빈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우리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박 대표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랑 함께 식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게...” 박한빈이 뭐라 하기도 전,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필경 박한빈이 연성에 머무는 시간이 짧았으
하지만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속을 꿰뚫어 보는 사람처럼 그녀가 입을 떼기 전 먼저 말을 꺼냈다. “조 대표님이랑 성 대표님 두 분 많이 친하십니까?” 그의 말에 룸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만 껌뻑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문득 박한빈과 성유리의 관계가 떠올랐다. 조 대표는 등 뒤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 입을 떼지도 못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친구 사이예요.” “그러시구나.” 박한빈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다 똑같으니까 서로 어색해하지 맙시다.” 말을 마친 박한빈이 술잔을 들었고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눈치껏 같이 술잔을 들 수밖에 없었다. 시원하게 술을 마신 박한빈은 또다시 조 대표에게 말을 걸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남원의 항목이 조 대표님 회사 것이죠?” “네. 맞습니다.” 조 대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박한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 박 대표님 덕분이죠.” “저는 그 항목이 괜찮아 보이더군요. 마침 저도 비슷한 개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한빈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현 대표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성유리도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조 대표는 현 대표와 경쟁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박한빈의 말에 그저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그러십니까? 전에는 왜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못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쉽지만 이번 저희 회사의 중점은...” “지화 개발. 조 대표님은 그저 저랑 협업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돈을 많이 투자하실 필요도 없는데... 혹시 저랑 함께 일할 의향이 없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조 대표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을 했지만 다른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현 대표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박한빈에게 말했다. “박 대표님, 그 항목은...” “현 대표님
사실 성유리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이 일부로 조 대표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어 성유리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성유리는 도대체 박한빈이 자신한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러는지 몰랐다. 하지만 성유리는 조 대표처럼 체면을 차라기 좋아하는 사람이 오늘 박한빈에게 당한 일을 언젠가 자기한테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억지로라도 일어서야만 했다. 박한빈도 성유리가 나서자 입을 꾹 닫았고 술잔을 손에 들고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성유리는 또다시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는 말했다. “마침 현씨 가문 성립 10주년을 기념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으니 제가 먼저 오늘 이 자리에서 축하드릴게요.” 현 대표는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지만 술잔을 손에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 대표님도 참 별말씀을.” 박한빈의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듣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성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뗐다. “성 대표님과 현 대표님 사이가 아주 각별해 보입니다?” “현 대표님이 저를 잘 챙겨주셔서 그래요.” “그렇다면 저와 현 대표님 사이 협업에 성 대표님이 작은 제안을 해주실 수도 있겠군요. 방금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요즘 시간이 있으셔서 제가 모르는 일들을 알려줄 수 있다고.” 웃으며 말하는 박한빈에게서는 범접하지 못할 포스가 철철 흘러넘쳤다. 성유리는 처음으로 박한빈이 업무에 관해 토론을 하는 모습을 봤지만 그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하찮은 개미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다들 박한빈의 눈치를 살피며 긴장하고 있었다.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박 대표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 영광이네요.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현 대표님을 대신해 담보를 해줘야겠어요.” “하지만 저도 제 자신을 잘 아는 타입이라 여기서 무슨 말을 하던 다 소용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주량은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