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213화

작가: 송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1-08 11:57:21
하지만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속을 꿰뚫어 보는 사람처럼 그녀가 입을 떼기 전 먼저 말을 꺼냈다.

“조 대표님이랑 성 대표님 두 분 많이 친하십니까?”

그의 말에 룸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만 껌뻑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문득 박한빈과 성유리의 관계가 떠올랐다.

조 대표는 등 뒤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 입을 떼지도 못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친구 사이예요.”

“그러시구나.”

박한빈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다 똑같으니까 서로 어색해하지 맙시다.”

말을 마친 박한빈이 술잔을 들었고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눈치껏 같이 술잔을 들 수밖에 없었다.

시원하게 술을 마신 박한빈은 또다시 조 대표에게 말을 걸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남원의 항목이 조 대표님 회사 것이죠?”

“네. 맞습니다.”

조 대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박한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 박 대표님 덕분이죠.”

“저는 그 항목이 괜찮아 보이더군요. 마침 저도 비슷한 개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한빈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현 대표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성유리도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조 대표는 현 대표와 경쟁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박한빈의 말에 그저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그러십니까? 전에는 왜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못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쉽지만 이번 저희 회사의 중점은...”

“지화 개발. 조 대표님은 그저 저랑 협업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돈을 많이 투자하실 필요도 없는데... 혹시 저랑 함께 일할 의향이 없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조 대표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을 했지만 다른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현 대표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박한빈에게 말했다.

“박 대표님, 그 항목은...”

“현 대표님
잠긴 챕터
앱에서 이 책을 계속 읽으세요.

관련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14화

    사실 성유리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이 일부로 조 대표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어 성유리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성유리는 도대체 박한빈이 자신한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러는지 몰랐다. 하지만 성유리는 조 대표처럼 체면을 차라기 좋아하는 사람이 오늘 박한빈에게 당한 일을 언젠가 자기한테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억지로라도 일어서야만 했다. 박한빈도 성유리가 나서자 입을 꾹 닫았고 술잔을 손에 들고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성유리는 또다시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는 말했다. “마침 현씨 가문 성립 10주년을 기념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으니 제가 먼저 오늘 이 자리에서 축하드릴게요.” 현 대표는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지만 술잔을 손에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 대표님도 참 별말씀을.” 박한빈의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듣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성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뗐다. “성 대표님과 현 대표님 사이가 아주 각별해 보입니다?” “현 대표님이 저를 잘 챙겨주셔서 그래요.” “그렇다면 저와 현 대표님 사이 협업에 성 대표님이 작은 제안을 해주실 수도 있겠군요. 방금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요즘 시간이 있으셔서 제가 모르는 일들을 알려줄 수 있다고.” 웃으며 말하는 박한빈에게서는 범접하지 못할 포스가 철철 흘러넘쳤다. 성유리는 처음으로 박한빈이 업무에 관해 토론을 하는 모습을 봤지만 그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하찮은 개미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다들 박한빈의 눈치를 살피며 긴장하고 있었다.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박 대표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 영광이네요.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현 대표님을 대신해 담보를 해줘야겠어요.” “하지만 저도 제 자신을 잘 아는 타입이라 여기서 무슨 말을 하던 다 소용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주량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15화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성유리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자 술병 채로 손에 들고는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박한빈이 상 밑에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 화장실에 다녀온 성유리는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지나가던 직원이 성유리의 상태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그녀를 챙기려 했지만 성유리는 직원을 밀어내고는 쓰레기통에 마구 구토를 했다. 알코올의 쓴맛과 독한 냄새가 위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성유리는 위액까지 깨끗하게 토해냈다. 아직 기침이 제대로 치료되지도 않았던 터라 성유리는 콧물과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오늘 단아하고 청순한 느낌으로 신경 써서 한 화장마저 다 벗겨졌지만 성유리는 그런 것을 상관할 겨를도 없었다. “괜찮으세요? 119라도 불러드릴까요?” 옆에 있던 직원은 이런 경험이 풍부한 탓에 성유리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는 핸드폰을 꺼내 신고하려고 했다. “아니요. 저 괜찮아요.” 성유리가 힘겹게 말하며 직원을 말렸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절대 여기서 쓰러지지는 않을 테니까.” 성유리는 직원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애를 써 몸을 일으키며 비틀비틀 밖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오늘 안 신던 하이힐까지 신었고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몸을 가누기 힘들어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화분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성유리는 생각보다 고통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무언가에 맞은 듯 심한 고통이 밀려오는 머리보다 위가 더 아팠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런 곳에서 쓰러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필경 이곳에는 성유리를 아는 사람도, 성유리가 아는 사람도 없었기에 쓰러지면 자신을 그 누구도 챙겨주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남자의 손이 다가오는 순간,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그 남자는 성유리를 더욱 꽉 잡았다. 그때,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고 그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16화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성유리는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했지만 결국은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어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렸고 정민재가 보이자 성유리는 긴장이 풀렸다. 성유리는 조 대표라는 사람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밤 비록 혼자 이곳으로 왔지만 성유리는 혹시 몰라 정민재에게 메시지를 보내 시간이 되면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정민재는 성유리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식당 로비에서 그녀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성유리를 발견한 정민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곁에 있는 박한빈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정민재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간 뒤, 그대로 쓰러졌고 정민재는 그런 그녀를 급히 붙잡았다. “병원으로 가주세요.” 성유리는 고통을 꾹 참고 짧은 말을 내뱉은 뒤, 바로 기절해 버렸다. 정민재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기회도 없었고 쓰러진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 과정에서 정민재는 엘리베이터 안에 또 다른 남자가 있었던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의 손은 성유리를 붙잡으려는 듯 공중에 경직된 채로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 두 사람이 사라진 후, 그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비록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고 오히려 끝없는 암울함만이 가득했다. ... 성유리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녀 곁을 지키는 사람은 오직 정민재와 그의 여자 친구뿐이었다. 여자 친구는 두 사람의 사이가 불안한 듯 옆에서 핸드폰을 보면서도 가끔 성유리를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가 먼저 성유리가 깨어난 것을 발견했다. 이내 정민재도 성유리가 깨어난 사실을 알아차렸고 다급하게 벨을 눌러 의사를 호출했다. “지금 몇 시죠?” 성유리가 깨어나자마자 바로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매우 쉰 것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17화

    “너희들 어젯밤 만나지 않았니?” 성시원은 성유리의 거짓말을 바로 알아차렸다. “...” 성유리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성시원이 입을 열었다. “지화랑 연성 쪽에 아마 큰 움직임이 있을 거다. 요즘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너도 잘 알겠지? 만약 같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꼭 붙잡아라. 그게 성리 그룹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너도 잘 알지?” “평생 지사에서만 썩을 생각은 너도 없지 않니? 이번 기회만 붙잡으면 네 능력을 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거야. 그때가 되면 나도 너를 당당하게 다시 회사로 불러올 거다. 아마 그때는 그 누구도 네가 우리 회사를 상속받는 것에 의견이 없겠지.” 성시원의 말을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지만 달콤한 꿀 덩어리처럼 성유리를 유혹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성시원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절대 그가 순순히 성리 그룹을 자기한테 넘겨줄 리가 없었다. 성시원은 여전히 윤청하의 죽음을 누가 방관했는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껏 성유리를 옆에 남겨둔 원인은 그저 유일한 핏줄이기 때문이다. 성유리는 성시원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단칼에 거절하지 않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아직은 잘 몰라서요. 그래도 곧 자세하게 알아볼게요.” “그래.” 성시원은 성유리한테 몸을 잘 챙기라고 대충 말을 하다가 이내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성유리는 성시원이 이미 어젯밤 식당에서 그녀와 박한빈이 만난 사실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직 병원에 누워있었지만 성시원은 괜찮냐는 말조차 해주지 않았다. 이미 실망할 대로 실망한 성유리였기에 딱히 서운하지는 않았고 핸드폰을 옆에 툭 놓고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무언가가 문득 떠오른 성유리는 핸드폰을 열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현 대표님. 저 성유리예요.” ... 성유리와 현 대표는 어느 한 찻집에서 만남을 약속했다. 남자의 나이는 성시원과 비슷했고 비록 성격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18화

    현 대표를 차까지 배웅하고 난 뒤, 성유리는 홀로 찻집 입구에 서 있었다. 뜨거운 바람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입구의 에어컨 바람에 성유리는 목이 간질거려 버티기 힘들었다. 기침을 애써 참고 있던 성유리는 가방 안에서 목을 촉촉하게 해주는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그때, 회사에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회의의 내용은 전에 성시원이 성유리에게 했던 말고 비슷했는데 최근 시장이 크게 변동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업계에서 제일가는 지화 그룹에는 딱히 영향이 없었다. 박한빈 어머니의 일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로 인해 박한빈은 “불효자”라는 별명까지 생겨버렸다. 사람들은 다들 박한빈이 스스로 김서영을 절벽 끝까지 밀어붙였다고 평가했다. 김서영의 애인이던 진성민이 죽고 그의 어머니는 일부로 기자들까지 동원해 가며 박한빈을 마구 욕했다. 박한빈은 이런 일들에 전혀 신경을 안 쓰는지 평소대로 자신의 일상을 살아갔고 심지어는 여유시간으로 새로운 여자 친구도 사귀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박한빈의 모습에 그를 나무라던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박한빈이 이번에 연성으로 온 원인은 연성 교외에 있는 항목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폐공장이 없어지고 그 위에 규모가 큰 리조트를 건설할 줄은 박한빈도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 리조트가 지어진 곳에 연성 특유의 건물들이 있었다. 여행지를 더욱 개발한다는 이유와 교육과 의료 기술을 발전시킨다는 이유로 다 없애버렸다. 이런 장소를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지 않은가? “성 대표님, 저 뭐 하나 생각난 거 있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정민재는 성유리를 급히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성유리는 뒤돌아 정민재를 쳐다보지도 않고는 물었다. “뭔데요?” “저번에 성 대표님 집 앞에 찾아왔던 그 남자 말입니다. 누군지 생각났어요!” “그래요? 누군데요?” “지화 그룹 박 대표님! 어쩐지 익숙하다 했습니다. 방금 자료들을 훑어보다가 생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19화

    “우리 지금 신영 체육관 쪽에 있다. 박 대표님께서 너랑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데 시간 있니?”  성유리는 고 대표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저랑 직접이요?” “응. 지금 어디니? 기사님보고 데리러 가라고 할까?” “괜찮아요. 저 오늘 운전하고 와서 혼자 갈 수 있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몰랐지만 성시원과 친하게 지내는 고명도의 말을 거절한다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아무리 가기 싫어도 꼭 오라는 장소로 향해야 했다. 박한빈과 고명도는 그 시각 배드민턴장에 있었다.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늘 올리고 있던 앞머리도 내려 평소와 달리 인상이 아주 순해 보였다. “유리 왔니?” 고명도는 성유리에게 빠르게 다가오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얘가 비록 회사에 온 지는 몇 개월밖에 안 됐지만 그래도 실력 하나는 뛰어납니다. 이번에 하시는 인주 프로젝트 항목에 제가 유리 의견을 들어보니...” “성 대표님도 배드민턴 잘 치신다고 들었는데?” 박한빈은 고명도의 말을 끊어버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 성유리도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쳐다봤지만 그의 눈빛에서 어떠한 감정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박한빈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네. 그럼 박 대표님과 한 번 겨뤄볼까요?” 두 사람의 체력은 원래 차이가 크게 났지만 박한빈은 성유리를 조금이라도 봐주지 않았다. 몇 분 안 지나서 성유리는 너무 힘들어 숨을 거칠게 내쉬었고 위까지 아파 나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지금 자신을 일부로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직접 성유리와 애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녀를 조롱하려고 했던 것 같다. “박 대표님 실력이 너무 뛰어나신데요? 저는 상대가 안 되네요.” 숨을 고르고 난 후, 성유리가 이를 꽉 깨물고 박한빈에게 말했다.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라켓을 땅에 던져버리고는 손목 보호대를 벗었다. “너도 꽤나 괜찮은데? 근데 박 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20화

    “유리야.” 화장실에 나온 성유리를 고명도가 불러 세웠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서 있었는데 방금 전, 성유리의 표현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이번 프로젝트가 우리 회사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너도 알고 있지?” “네.” “그걸 아는 사람이 박 대표님한테 쌀쌀맞게 굴어?” 고명도는 굳은 얼굴로 성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 “박 대표가 지금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핑계 따위는 하지 마.” 인주 프로젝트같이 큰 일은 아직 초기에 진입해 있어 박한빈의 업무량이 얼마나 많을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박한빈은 고명도의 요청으로 그들과 함께 운동도 하고 밥까지 먹었다. 성유리가 술을 권할 때, 박한빈이 그녀를 쳐다보던 눈빛은 눈먼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나 다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그의 “덫”에 걸려들려고 하지 않았고 고명도에게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이미 그 사람이랑 이혼했는데요.” 성유리의 대답에 고명도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이혼했는데 뭐? 그럼 너랑 전 대표, 그리고 조 대표는 부부 사이야?” 그의 말에 성유리는 매섭게 고명도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비록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생각으로 접근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고명도에게서까지 이런 말을 듣자 성유리는 전에 자기가 했던 수단과 방법들이 다른 사람 눈에는 이렇게 보였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는 성유리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들였던 노력과 성과들이 다 인간관계 덕분으로 보일 뿐이었다. 성유리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고명도를 째려보았고 그는 성유리의 눈빛을 발견하고는 말을 돌렸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란다.” “그럼 무슨 뜻이죠?” 고명도의 나이와 성시원의 나이는 비슷했기에 전에 명절을 보낼 때면 성유리도 가끔 고명도를 봤었다. 그때의 성유리는 고명도를 삼촌이라고 칭하기도 했을 정도로 두 사람은 꽤 친했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고명도를 삼촌이라고 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21화

    “항목은 바로 너희 회사에 넘기겠다고 보장 못 해. 하지만 공평하게 경쟁을 할 기회는 줄게.” 성유리가 박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조건은요?” 그녀의 물음에 박한빈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알았어? 나한테 조건이 있다는 거,” 성유리는 조용히 박한빈을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이내 서서히 표정을 바꾸며 손가락으로 상을 살짝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나랑 배지수는 그냥 비즈니스 연인이야. 일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기사를 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왜 갑자기 자기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엄마 쪽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의사가 그러더라. 깨어날 희망이 아주 크대.” 박한빈은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에 일은...” “박 대표님?” 성유리가 그의 말을 뚝 끊어버리더니 물었다. “전에 도인국거리에서 저한테 하셨던 말 기억하세요?”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저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하셨잖아요.” 박한빈은 묵묵히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저 혼자 김칫국물을 먹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방금 그 말씀... 혹시 저랑 다시 만나보려는 의도는 아니죠?” “아니야.” 박한빈의 단호한 대답에 성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내 말은 너 혼자 김칫국물 먹는 게 아니라고.” 그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살짝 변했지만 박한빈은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박 대표님, 죄송해요.” “저는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안색이 어두워지다가 빠르게 웃음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전에 아파트에서 만났던 그 남자? 네 비서라고 들었는데? 게다가 여자 친구도 따로 있다고...” “그 사람 말고요.” 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내밀어 박한빈

최신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03화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02화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01화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00화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9화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8화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7화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6화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295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