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금 신영 체육관 쪽에 있다. 박 대표님께서 너랑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데 시간 있니?” 성유리는 고 대표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저랑 직접이요?” “응. 지금 어디니? 기사님보고 데리러 가라고 할까?” “괜찮아요. 저 오늘 운전하고 와서 혼자 갈 수 있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몰랐지만 성시원과 친하게 지내는 고명도의 말을 거절한다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아무리 가기 싫어도 꼭 오라는 장소로 향해야 했다. 박한빈과 고명도는 그 시각 배드민턴장에 있었다.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늘 올리고 있던 앞머리도 내려 평소와 달리 인상이 아주 순해 보였다. “유리 왔니?” 고명도는 성유리에게 빠르게 다가오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얘가 비록 회사에 온 지는 몇 개월밖에 안 됐지만 그래도 실력 하나는 뛰어납니다. 이번에 하시는 인주 프로젝트 항목에 제가 유리 의견을 들어보니...” “성 대표님도 배드민턴 잘 치신다고 들었는데?” 박한빈은 고명도의 말을 끊어버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 성유리도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쳐다봤지만 그의 눈빛에서 어떠한 감정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박한빈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네. 그럼 박 대표님과 한 번 겨뤄볼까요?” 두 사람의 체력은 원래 차이가 크게 났지만 박한빈은 성유리를 조금이라도 봐주지 않았다. 몇 분 안 지나서 성유리는 너무 힘들어 숨을 거칠게 내쉬었고 위까지 아파 나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지금 자신을 일부로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직접 성유리와 애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녀를 조롱하려고 했던 것 같다. “박 대표님 실력이 너무 뛰어나신데요? 저는 상대가 안 되네요.” 숨을 고르고 난 후, 성유리가 이를 꽉 깨물고 박한빈에게 말했다.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라켓을 땅에 던져버리고는 손목 보호대를 벗었다. “너도 꽤나 괜찮은데? 근데 박 대
“유리야.” 화장실에 나온 성유리를 고명도가 불러 세웠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서 있었는데 방금 전, 성유리의 표현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이번 프로젝트가 우리 회사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너도 알고 있지?” “네.” “그걸 아는 사람이 박 대표님한테 쌀쌀맞게 굴어?” 고명도는 굳은 얼굴로 성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 “박 대표가 지금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핑계 따위는 하지 마.” 인주 프로젝트같이 큰 일은 아직 초기에 진입해 있어 박한빈의 업무량이 얼마나 많을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박한빈은 고명도의 요청으로 그들과 함께 운동도 하고 밥까지 먹었다. 성유리가 술을 권할 때, 박한빈이 그녀를 쳐다보던 눈빛은 눈먼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나 다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그의 “덫”에 걸려들려고 하지 않았고 고명도에게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이미 그 사람이랑 이혼했는데요.” 성유리의 대답에 고명도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이혼했는데 뭐? 그럼 너랑 전 대표, 그리고 조 대표는 부부 사이야?” 그의 말에 성유리는 매섭게 고명도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비록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생각으로 접근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고명도에게서까지 이런 말을 듣자 성유리는 전에 자기가 했던 수단과 방법들이 다른 사람 눈에는 이렇게 보였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는 성유리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들였던 노력과 성과들이 다 인간관계 덕분으로 보일 뿐이었다. 성유리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고명도를 째려보았고 그는 성유리의 눈빛을 발견하고는 말을 돌렸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란다.” “그럼 무슨 뜻이죠?” 고명도의 나이와 성시원의 나이는 비슷했기에 전에 명절을 보낼 때면 성유리도 가끔 고명도를 봤었다. 그때의 성유리는 고명도를 삼촌이라고 칭하기도 했을 정도로 두 사람은 꽤 친했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고명도를 삼촌이라고 부
“항목은 바로 너희 회사에 넘기겠다고 보장 못 해. 하지만 공평하게 경쟁을 할 기회는 줄게.” 성유리가 박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조건은요?” 그녀의 물음에 박한빈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알았어? 나한테 조건이 있다는 거,” 성유리는 조용히 박한빈을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이내 서서히 표정을 바꾸며 손가락으로 상을 살짝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나랑 배지수는 그냥 비즈니스 연인이야. 일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기사를 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왜 갑자기 자기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엄마 쪽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의사가 그러더라. 깨어날 희망이 아주 크대.” 박한빈은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에 일은...” “박 대표님?” 성유리가 그의 말을 뚝 끊어버리더니 물었다. “전에 도인국거리에서 저한테 하셨던 말 기억하세요?”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저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하셨잖아요.” 박한빈은 묵묵히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저 혼자 김칫국물을 먹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방금 그 말씀... 혹시 저랑 다시 만나보려는 의도는 아니죠?” “아니야.” 박한빈의 단호한 대답에 성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내 말은 너 혼자 김칫국물 먹는 게 아니라고.” 그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살짝 변했지만 박한빈은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박 대표님, 죄송해요.” “저는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안색이 어두워지다가 빠르게 웃음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전에 아파트에서 만났던 그 남자? 네 비서라고 들었는데? 게다가 여자 친구도 따로 있다고...” “그 사람 말고요.” 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내밀어 박한빈
단호한 태도로 말을 마친 성유리는 몸을 일으켜 떠났다. 조금 전, 성유리는 사실 고명도가 해준 말들을 다 새겨들었고 이제부터는 박한빈을 다른 고객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게 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두 사람 사이의 오묘한 감정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비록 성유리는 전에 직장에서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했었지만 살아가다 보니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차별을 당하던 성유리마저 이제는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극악무도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수년간 성유리는 박한빈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최근 전까지만 해도 그런 감정들이 남아있었다. 박한빈을 볼 때마다 성유리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기에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그녀는 박한빈을 그저 평범한 고객으로 대할 수 없었다. 고명도가 명확하게 성유리에게 이건 그저 업무일 뿐이라고 말을 했지만 성유리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성유리는 어쩌면 자기는 아직 사업을 하기에 탁월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문자를 한 통 보냈다. [내일 밤 8시. 도착 예정.] 성유리는 그의 문자를 확인하고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줬다. [알겠어.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 연정우는 더 이상 답장이 없었지만 성유리는 이미 그의 이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핸드폰을 툭 내려놓은 성유리는 평온한 표정으로 시동을 걸어 출발할 준비를 했다. 다음 날, 성유리가 회사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정민재가 그녀한테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성 대표님, 어제 대표님도 배드민턴장 가셨습니까?”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쓱 쳐다보고는 되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다름이 아니라 그냥 성 대표님과 박 대표님께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다시 물었다. “근데 말이에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런 일이 있
연정우는 아이보리 색상의 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세팅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더해 안경까지 끼고 있는 연정우의 첫인상은 누가 봐도 신사답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 같았다. 그는 성유리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물었다. “오래 기다렸어?” 성유리는 핸드폰으로 답장을 보내며 연정우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그래. 이제 가자.” 연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자고 말했지만 캐리어를 밀고 있는 손을 제외한 다른 한쪽 손은 이상하게 조금 굽혀져 있었다. 성유리는 그제야 연정우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그의 팔짱을 꼈다. “밥부터 먹을까?” 연정우가 물었다. “좋아.” 성유리의 대답에 연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좀 이상한데?” “며칠 전부터 감기에 걸려서 이래. 지금은 괜찮아졌는데 그래도 기침은 계속 나네.” 성유리가 기침을 연신 해대며 힘겹게 말했다. “집에 가면 비파고 챙겨줄게.” “그래.” ... 그 시각, 연성 지화 지사. 박한빈은 사무실 책상에 마주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누군가가 보낸 사진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진 속 남성과 여성은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고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는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사람마냥 깔깔거리며 웃던 박한빈은 핸드폰을 바로 꺼버렸다. 박한빈은 자꾸만 머릿속에 성유리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그 누구도 제 자리에서 그대로 서서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 만약 전이었다면 성유리의 이런 말에도 신경 쓰지 않았을 박한빈이지만 지금은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고통스러웠다. 사진 속 두 사람의 웃음과 다정한 행동을 볼 때마다 비수가 꽂힌 가슴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는 기분이 들었고 박한빈이 느끼기에 그 피는 너무도 뜨거웠다. 사람들은 다들 지금 박한빈의 이런 감정을 “질투”라고 형용했다. 그때, 박한빈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힐끔 쳐
박한빈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누군가 또다시 그에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는 보내온 사진을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삭제해 버리려고 했다. 필경 확인하지 않아도 그 사진이 누구를 찍은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에. 현재 박한빈은 아무리 많은 사진을 보고 분노를 한 대도 전혀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고명도가 방금 해준 말을 곱씹던 박한빈은 어이가 없어 웃음만 터져 나왔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거지?’ ‘상대가 대학교수면 뭐가 변하는데?’ 박한빈은 고명도의 말이 그더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성유리를 다시 빼앗아 오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해본 적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개입해 제3자를 해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박한빈은 웃겼다. 사진을 지우려던 박한빈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그 사진을 눌렀다. 성유리와 연정우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까운 마트로 가 물품을 구매한 다음 성유리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마지막 사진은 두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박한빈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힘껏 바닥에 던져버렸고 강한 힘에 핸드폰 액정은 박살이 났다. 아무 표정도 없이 박살 난 핸드폰만 쳐다보던 박한빈은 사진들을 확인하지 않았어야했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을 해도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한빈의 손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박한빈은 시동을 켜더니 발에 힘을 주며 액셀을 밟았다. 박한빈의 팔에는 핏줄이 선명하게 나와 있었고 입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 차는 원래 그대로 직진을 해 호텔 방향으로 가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박한빈은 빠르게 방향을 바꿔버렸다. 깜빡이도 없이 방향을 틀어버린 박한빈의 차를 따라오던 뒤에 차는 하마터면 사고를 낼 뻔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운전자는 박한빈의 차에 대고 험한 말들을 마구 내뱉었지만 박한빈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속도만 더 올렸
연이어 담배 두 대를 피고 난 박한빈은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고명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대표님?” 고명도는 그의 전화를 빠르게 받았다. 박한빈은 라이터를 휙 던져버리고는 입을 열었다. “같이 일을 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을 다 마쳤습니다. 하지만 고 대표님 쪽의 성의가 어떤지는 저한테 보여주셨으면 하는데.” ... 드림 타운. 성유리가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연정우는 거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는 무선 이어폰을 낀 채로 노트북으로 계속 타자를 했고 성유리는 조심스레 그를 불러보았다. “정우야.” “어. 잠깐만.” 그는 통화를 하던 사람과 양해를 구하고는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밤에는 안 돌아갈 거야?” 성유리가 물었다. “응. 아직 집에 문제가 있어서.” 연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다음 주에 또 출장이 있는데 유리 네 집에서 며칠만 더 얹혀살면 안 될까?” “그래 그럼. 거실에 있는 물건들은 마음대로 써도 돼.” 말을 마친 성유리가 뒤를 돌아 연정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리야.” “프로겐 끓여서 주방에 뒀어. 가서 조금만 마셔 봐.” 성유리는 이제 감기 기운이 거의 다 나았다는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연정우는 이내 업무에 집중해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주방으로 향해 프로겐를 마셨다. 맛도 꽤 있는 프로겐를 한잔 다 마신 성유리는 목 상태가 아까보다 훨씬 좋아진 것을 느꼈다. 성유리가 비파고가 담겼던 컵을 씻으려 할 때, 연정우가 거실에서 주방으로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요즘 별일 없었지?” “응.” 성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을 했다가 연정우에게 다시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있겠어?” “그럼 됐어. 다음 달에 외할아버지 생신인데 나랑 같이 갈래?” “그래.” “내가 말한 곳은 금성인데 괜찮아?” 연정우의 물음에 성유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가? 금성은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인가?” “
“성 대표님, 고 대표님이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요.”성유리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비서가 말했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알았다고 대답만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어제와 달리 고명도는 열성스레 맞이했다.“유리야, 왔어? 어젯밤에 일찍 가는 것 같던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네, 남자친구가 돌아왔어요.”성유리의 대답은 매우 차분했다.이 말에 고명도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갑자기 어젯밤 박한빈이 자신에게 걸었던 그 전화를 떠올렸다.‘그런 거였구나.’고명도는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말했다.“연 교수님이 돌아오셨어? 이번 출장에 꽤 오래 간 것 같은데?”“네, 한 달 가까이 있었어요.”“이렇게 출장을 자주 가는 것도 장거리 연애지 않아? 두 사람의 감정에 무슨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렵지 않아?”고명도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고 대표님과 상관이 없지 않아요? 이런 개인적인 일을 물어보려고 아침부터 저를 부르셨어요?”“내가 널 걱정해서 그러는 거잖아. 어쨌든, 너 예전에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으니.”성유리가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계속 말을 이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고명도는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사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인주 프로젝트에 관해 얘기해볼까 해.”“네?”“박 대표님 쪽에서 이미 우리와 협력하기로 동의했어.”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표정은 오히려 눈에 띄게 변했다.“아, 직접 동의한 건 아니고. 우리 제안에 관심이 좀 있다는 얘긴데 계약서 같은 건 당연히 우리가 계속 쟁취해야지. 오늘 밤에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인주처럼 큰 프로젝트에 초기 투자만도 수천억 원이 들었고 지화라 하더라도 신중히 생각해야 하는데 어떻게 며칠 만에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고명도가 이렇게 말하니 성유리는 오히려 박한빈이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뭐가 그리 급한 걸까?이 인기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이 경쟁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