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재가 그녀의 곁을 따라다녔다.성유리의 지난번 ‘귀띔'을 통해 그는 이제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는 묻지 않지만 길에서 여전히 성유리를 보며 계속 눈빛을 반짝였다.성유리가 그를 향해 눈을 흘긴 후에야 그는 마침내 조용해졌다.성유리의 예상과 달리 오늘 저녁 술자리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고명도는 주동자로서 박한빈과 계속 협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고, 성유리는 옆에서 시간만 보내며 함께 술을 권했다.모든 과정에서 박한빈은 그녀에게 특별히 눈빛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성유리는 곧 뭔가 깨달았는데 순간 자신이 마지막으로 박한빈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박한빈은 어떤 사람이던가.옷이 더러워져도 두 번 다시 입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계속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단 말인가.그는 그럴 리 없다. 그의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이런 생각에 성유리는 숨통이 트였다.마침 이때 그녀의 휴대전화도 울리기 시작했는데 맑은 벨 소리가 룸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렸다.성유리는 얼른 휴대전화를 들고 일어나며 말했다.“죄송해요. 전화 좀 받을게요.”“남자친구지?”고명도는 웃으며 말했다.성유리는 웃기만 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휴대전화를 들고 나갔다.전화를 건 사람은 확실히 연정우였는데 왜 이렇게 늦었는데도 아직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식사 자리가 있어.”“아직 안 끝났어?”“응, 거의 다 됐을 거야.”성유리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상대방은 만족스럽지 못한 듯 한마디 했다.“기침이 아직 낫지 않았어.”“알아. 별로 안 마셨어.”“어디 있어? 내가 데리러 갈게.”괜찮다고 말하려던 성유리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언제 끝날지 아직 몰라. 거의 끝나갈 때 전화할게.”“그래, 그럼 조금만 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마.”“알았어.”실제로 담배와 라이터까지 꺼내든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연정우에게 약속했으니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담배와 라이터를 갖다 놓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하
성유리는 오늘 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그러나 이 어지러움은 그녀에게 너무 익숙했다.게다가 이 순간 룸에 아무도 없다는 것까지...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박한빈 씨, 이런 비열한 수단을 쓰다니요!”그녀는 눈이 빨개진 채 주먹을 꼭 쥐고 분노에 찬 눈길로 믿기지 않은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팔은 물론 몸 전체가 가볍게 떨었다.박한빈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곧 반응하고 대답했다.“나 아니야.”“당신이 아니면...”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득 한 사람, 즉 고명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어쩐지!오늘 밤 박한빈의 태도를 보면 그들과 100% 협력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오늘 고명도는 그녀 앞에서 매우 자신감을 보였다.그렇다면 그는 오늘 밤 자신을 박한빈에게 선물로 주려는 속셈이었다.하지만 이런 생각에 성유리는 아주 빨리 냉정해졌다.그녀도 그와 계속 논쟁하지 않고 그냥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어쨌거나 그녀는 자신의 술잔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랐고 박한빈과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하지만 성유리가 막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갔을 때 박한빈이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를 훌쩍 안아 들었다.이 동작에 깜짝 놀란 성유리는 손발은 내저으며 몸부림쳤다.“내려줘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박한빈은 대답도 하지 않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다.그러던 중 성유리도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단순히 어지러운 게 아니라 이런 느낌은... 전에도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수백 번 욕설을 퍼부으며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연정우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휴대전화를 꺼내자마자 박한빈에게 빼앗겼다.약물 때문에 성유리의 사고와 행동도 조금 느려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몇 초 후에야 박한빈의 행동을 알아차렸다.“뭐 하는 거예요? 핸드폰 돌려줘요!”“휴대전화로 뭘 하려고?”박한빈이 가볍게 웃었다.“남자친구에게 알리려고? 그 자식이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성유리는 눈이 휘둥그레져
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냉정하고 진지했다.그런데 문득 미화로에서 그가 진무열을 발로 걷어찼을 때의 진지했던 표정이 떠올랐다.오직 이때에만 성유리는 그의 조용한 눈빛에 감춰진 광기를 읽을 수 있었다.그는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다.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곧 차는 호텔 주차장에 세워졌다.박한빈은 다시 다가와 성유리를 안았다.“놔... 놓으라고!”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여전히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쳤다.“박한빈 씨,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요. 당신이 스스로 끝이라고 말했잖아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는데 그가 예약한 스위트룸은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었다.방문을 닫는 순간 박한빈은 더는 억제하지 않고 성유리를 문에 밀착했다. 그러고는 몸에 걸쳤던 외투를 확 잡아당겼다.“놔요! 박한빈, 이 나쁜 놈!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뭐야? 당신 전에는...”“후회했어.”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말에 성유리는 어리둥절해졌다.“날 뭐로 보는 거예요?”한참 후에야 그녀는 중얼거렸다.“박한빈 씨, 당신 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이 끝내고 싶으면 끝내고 후회한다고 하면 다시 시작해야 해요? 당신 눈에는 내가 그렇게 천하게 보여요?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하고 다시 하고 싶으면 다시 시작하고? 박한빈 씨, 계속 나한테 이러면 평생 미워할 거예요.”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녀의 옷을 벗기려던 손이 잠깐 흠칫하더니 눈을 들었다.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젖은 눈동자 속에는... 한이 엿보였다.박한빈은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웃더니 한마디 했다.“그래, 미워해.”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녀는 박한빈이 왜 이러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예전에 그녀가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 분명히 박한빈이 그녀에게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했었다.그는 그들 사이의 마지막 가능성을 차단했고 심지어 그녀에게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그녀는
선혈은 곧 성유리의 두피와 머리카락을 통해 스며 나왔다.박한빈이라도 지금 이 순간은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한참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곧 성유리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았다.이 기회를 틈타 성유리도 그를 앞으로 힘껏 밀었다.그녀는 더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몸을 가누고 돌아서서 문을 열려 했다.하지만 아직 발을 내디디기도 전에 박한빈이 이미 뒤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거 놔! 박한빈, 개자식 이거 놔!”성유리는 황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박한빈이 손을 놓을 의사가 없는 것을 보고 고민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숙여 그의 팔을 덥석 물었다!미쳐버릴 것만 같은 그녀는 마음이 약해질 겨를도 없었다.곧 그녀는 비릿한 피 맛을 느꼈지만 박한빈은 신음조차 하지 않았다.성유리가 계속 물려고 할 때 고통을 참고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병원에 데려다 줄게.”...성유리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병원에 있었는데 연정우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하지만 잠에서 깬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황급히 물었다.“어때? 어디 아픈 곳은 없어?”“괜찮아.”“앉을래?”연정우가 또 물었다.“어지러워.”“그래, 그럼 의사가 다 검사해 준 다음에 보자.”연정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성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고는 다시 물었다.“너... 나한테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얘기하고 싶어?”연정우가 되물었다.성유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푹 쉬어.”“고명도 때리러 갈 거야.”그러자 갑자기 성유리가 말했다.연정우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웃으며 물었다.“이건 좀 아니지 않아?”성유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표정을 짓자 연정우도 웃음을 거두며 대답했다.“아니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어.”그의 이 생각은 오히려 성유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연정우를 바라
죽을 먹고 난 성유리는 정민재를 보았다.그는 지금 문 앞에 서서 망설이는 얼굴로 자신이 여기에 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그를 쳐다보고는 직설적으로 말했다.“들어오세요.”“성 대표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정민재는 들어오자마자 설명했다.“어젯밤 고 대표님이 억지로 끌고 가시며 성 대표님이 박 대표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런 더러운 수법을 쓰신 줄 몰랐어요.”정민재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성유리는 정민재를 비난하지 않았다.“고명도에게 전화해서 내가 만나야 한다고 말해요.”“지금요?”“그래요. 지금.”성유리의 말에 정민재는 더는 묻지 못했다.고명도가 찾아오자 그녀는 정민재와 간병인을 모두 내보냈다.고명도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고 심지어 계획이 실패한 것 때문에 안색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고 대표님이 내 술에 약을 탔어요?”성유리가 직접 물었다.고명도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어젯밤 병원에 실려 왔는데 건강 상태는 어떤지 의사가 잘 알고 있고 검사 결과도 정확하게 나왔으니 잡아떼지 못할 거에요. 고 대표님이 아니라면... 그럼 박한빈 씨인가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매우 냉정했다.고명도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인주 프로젝트는 제가 노력해 볼게요.”성유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지만 고 대표님이 인성에서 나갔으면 좋겠어요.”“뭐라고?”“제가 방금 제대로 말하지 못했어요?”성유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전에 말했잖아요. 인주 프로젝트는 전체 그룹의 이익이라고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희생으로 얻은 프로젝트인데 무슨 근거로 고 대표님이 그 몫을 챙기려는 거죠?”“협력이 확인되면 회사는 이 프로젝트를 올해 사업 중점으로 추진할 거예요. 하지만 이 작업은 분명히 당신이 필요하지 않으니 고 대표님도 당연히 여기에 더는 머무를 필요가 없어요.”“제가 이러는 건 다 고 대표님이 잘되라는 거예요.”성유리
성유리의 상처는 큰 문제가 없었기에 검사가 끝난 후 다음날 퇴원했다.다만 상처가 아물지 않아 이마에 거즈를 붙이고 있었는데 흉터가 남을 수도 있다고 했다.성유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녀가 레스토랑에 나타나자 오가는 사람들이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봤다.성유리는 조용히 그곳에 앉아 유리창 밖 인성의 번화한 거리를 바라보았다.빨간 전조등과 멀리 떨어진 동네에 켜진 불빛, 그리고 길거리에 과일과 다른 음식을 파는 임시 노점이 있어 도시 분위기를 이루었는데 고층 빌딩이 널려 있는 금성보다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성유리가 넋을 잃고 보고 있을 때 귀에 익은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레스토랑 로비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의 발소리였다.그녀는 그를 안지... 몇 년 되었다.성유리는 자신이 언제부터 그를 몰래 지켜봤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그가 블랙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모든 새콤달콤한 음식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어두운색 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을 알며 그가 즐겨 매는 넥타이 스타일이 무엇인지 안다.이런 생활 습관들은 그들이 결혼 2년 동안 그녀가 조심스럽게 관찰한 것이고,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그녀 스스로 몰래 지켜본 결과이기도 하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원히 알 수 없었다.성유리는 이제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젯밤의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그였다.이기적이고 잔인하고 미친 사람 말이다.“오래 기다렸어?”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오늘 흰색 셔츠를 입었는데 재킷 없이 소매를 풀어 위로 걷어 올리자 하얗고 탄탄한 팔뚝이 드러났다.그리고 그 팔뚝에는 또 하나의 또 다른 선명한 이빨 자국이 보였다.그 자국은 매우 깊어서 지금도 아래쪽에서 핏기가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성유리는 자연히 그 이빨
그리고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하고 싶어?”박한빈이 물었다.이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더욱 깨물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신의 입가를 닦았다.“그 증거로 경찰에 신고할 수 있어요.”그녀가 덤덤하게 말했다.“그래? 경찰에 신고해서 날 잡아가라고?”박한빈이 빙긋 웃었다.성유리는 그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왜 웃어요?”“어? 내가 웃어야 하는 거 아니야?”박한빈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곧 웃음을 거두며 다시 물었다.“경찰서에 신고할 거면 지금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여기 앉아서 나랑 밥 먹으려고 하는 거지?”성유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이 일로 나를 협박하려는 건가?”박한빈은 일회용 장갑을 끼고 천천히 새우껍질을 까기 시작했다.그의 동작은 매우 우아했고, 또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어 마치 그들이 지금 정말 평범한 데이트 식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더니 박한빈이 갑가지 물었다.“인주 협력권을 달라는 거야? 누구 아이디어인데? 그 남자친구? 그럼 오늘 왜 같이 안 왔어? 용의자인 내가 너에게 무슨 짓 할까 봐 두렵지 않대? 설마 레스토랑 로비 같은 곳에서 만나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가 한마디 한마디 물어왔다.밋밋해 보이는 말투는 압박감이 역력했지만 날카로운 눈빛에 성유리는 협상 중이던 박한빈의 모습을 떠올렸다.왠지 모르는 불안감에 성유리는 더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박한빈은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그 어이없어하는 모습에 성유리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이때 박한빈이 일회용 장갑을 벗고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결국 말을 삼켰다.‘됐어. 더 놀라게 하면 안 돼.’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견뎌낸 거로... 이미 충분하다.박한빈은 깐 새우살을 성유리 앞에 놓고 나서 말했다.“너의 조건에 동의해.”“뭐... 라고요?”“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려는 것 아니야?”박한빈이 말했다.“경찰에
“얘기 다 됐어?”성유리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연정우는 꾹 참았다가 드림 타운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성유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아프지 않아?”연정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만지려고 했지만 갑작스러운 동작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몸이 조금 굳어졌다.하지만 그녀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연정우는 이미 손을 거두었다.“다행히 열이 나지 않네.”그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말했다.“하지만 너는 좀 더 쉬어야 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기 전 그를 향해 말했다.“고마워.”연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너 예전에 박한빈과 함께 있을 때도 이렇게 자주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어?”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성유리는 한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연정우가 계속 물었다.“사실 궁금하긴 했어. 오늘 밤 박한빈이 네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경찰에 정말 신고할 예정이었어?”“나는... 그랬을 거야.”성유리가 말했다.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 자신조차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했다.연정우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됐어. 푹 쉬어.”말을 마친 연정우는 몸을 돌려 그의 방으로 돌아갔지만 성유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잠에서 깬 듯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퇴원한 후부터 그녀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는데 전부 오늘 밤 박한빈의 담판을 위해서였다.그녀는 원래 자신이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이 너무 쉽게 대답해서 그녀가 준비한 것을 다 꺼내지 못했다.정신적으로 피로가 극에 달했지만 정작 침대에 누웠을 때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방금 연정우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만약 박한빈이 동의하지 않았다면...사실 오늘 밤 약속 장소에 나갔을 때 성유리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녀가 정말 그를 경찰서로 보낼 수 있을까?방금 성유리는 시원하게 대답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
약을 다 먹은 후 잠에 든 성유리는 그날 오후까지 자버렸다.그 덕에 휴대폰에 쌓인 메시지들을 저녁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메시지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홍지은이 올린 사진 속 사람이 성유리가 맞냐고 물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금성에 돌아온 것을 확인하며 언제 한번 만나 밥을 먹자고 했다.하지만 사실, 성유리가 금성에 돌아온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지난번 사하나의 장례식 때도 이미 업계 사람들 대부분이 참석했었으니까.다만, 그때 성유리는 사씨 가문 사람들에게 쫓겨난 신세였다.심지어 그 자리에서 불길한 존재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이렇게 태도를 180도 바꾸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기회주의적으로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고 손익을 따져 움직이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게다가 메시지를 보낸 이들의 이름조차 성유리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았다.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예전의 성유리였다면 아무리 그들이 싫어도 박한빈의 아내라는 신분 때문에 억지로라도 상대해 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이 어떻게 나오든 이젠 상관없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본 뒤,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옆에 툭 던져버렸다.그때, 하늘이가 성유리를 찾으러 방에 들어왔다.아직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은 터라 혹시라도 다시 옮길까 봐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문가에 서 있었다.“엄마, 괜찮아?”하늘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많이 아파?”성유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괜찮아. 너는 어때?”“나도 괜찮아! 의사 아저씨가 말했어. 내일이면 완전히 나을 거래! 봐, 나 오늘도 이렇게 멀쩡해!”말을 마친 하늘이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두 번이나 뛰어 보였다.그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그건
“하늘이가 아팠을 때도...”말을 꺼내던 박한빈 스스로 말을 뚝 멈췄다.박한빈은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일로 인해 성유리에게 영원히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성유리를 꼭 끌어안아야만 했다.그래야만 그녀가 정말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박한빈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때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그러나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그때 내가 잘못한 거 알아.”박한빈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땐 그냥... 너무 화가 났고 받아들이기 싫었어.”“네가 내게 한 번만 져주길 바랐어. 처음 호텔에서도... 난 네가 내게 순순히 져주길 바랐다고.”“그때 네가 내 앞에서 돌연히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했을 때 난 마치... 팔려 가는 기분이었어.”“그래서 일부러 버텼던 거야. 그냥 네가 나한테 한 발자국만 양보해 주길 바랐을 뿐이었어.”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이며 계속 말했다.“그때 난 정말 형편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하늘이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도박을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됐어.”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봤다.“하지만 유리야, 이거 하나만 믿어 줘. 나도 우리 아이를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네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그의 진심 어린 말에도 성유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사실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지금 자신이 내린 선택과 현재의 태도가 과거의 신념과는 어긋난다는 것을.늘 스스로를 다독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홍지은이 올린 사진에는 성유리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뒤로 경매장에서 산 조명이 너무 잘 보였다. 업계 사람들은 익명의 구매자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실 다들 눈치 차리고 쉬쉬하고 있을 뿐이었다.거기에 더해 성유리는 전에 이런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많은 사람들은 성유리의 옛날 사진과 홍지은이 올린 사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곤 그 사람이 정말 성유리가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그렇게 성유리와 박한빈의 사이는 순식간에 퍼졌지만 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원래 약간의 감기 기운이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심부터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도우미가 다시 박한빈에게 연락했을 때, 그는 의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의사는 빠르게 성유리의 체온을 재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병원으로 향해 피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피검사요?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가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에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닙니다. 사모님의 지금 상황으론 감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 맞는 것 같은데 피검사를 하면 다른 상황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다른 상황이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때, 가만히 누워있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의사 선생님, 걱정마세요. 저 임신 안 했어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한껏 당황하며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주 차분한 말투로 의사에게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병원 안 가도 돼요. 바로 약 처방 해주세요.”“아... 네.”의사는 잠시 주춤거리다 결정을 내린 듯 성유리에게 하려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떤 상황엔 생리주기가 일정하다고 해서 임신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임신초기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피임을 하지 않으셨다면...”“저 했어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계속 피
그의 말에 항상 생글생글 웃던 홍지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이 문제는... 사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필경 전에 성유리가 박한빈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에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으니 말이다.그래서 홍지은은 성유리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성유리는 지금 엄연히 박한빈의 안사람이자 사모님이다.처음에 이 소식을 접해 들은 홍지은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이 정말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확신했다.게다가 성유리는 전에 항상 박한빈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각종 모임이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홍지은은 성유리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어젯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홍지은은 여전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다 박한빈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지금 그의 신분과 지위로 만약 성유리와 다시 만난다는 일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그리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성유리를 지켜주고 있었다.이건 어떠한 감정일까?박한빈을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적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성유리만 선택했다.그제야 홍지은은 성유리에 대한 박한빈의 감정을 알아차렸다.그게 아니면 왜 어젯밤부터 끈질기게 성유리와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겠는가.전에 홍지은이 알던 평범하기 짝이 없던 성유리라면 그녀는 자신이 사과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박한빈이 이렇게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맞출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었다.그래서 그의 말에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 있다 한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전에 유리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래서 사과를 못했죠.”“그러십니까?”박한빈은 살짝 미소 지으며 홍지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그 미소가 무엇보다 더 두려웠다.
홍지은은 구렁이 담 넘듯이 능글맞게 핸드폰을 꺼내더니 성유리에게 반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셔터를 눌렀다.성유리는 셔터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홍지은과의 거리를 더 넓혔다.“아, 맞다. 어젯밤 제가 했던 말은 다 진심이었어.”홍지은은 원하던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난 뒤,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전에... 내가 너무 어려서 철이 안 들었나 봐. 게다가 그때는 나랑 유정 씨 사이가 꽤 괜찮았잖아?”“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유정 씨가 뭐라고 하면 그 말을 다 믿었어. 근데 누가 알기나 했겠어? 유정 씨가 그렇게 나쁜 *이라는 걸.”“뭐가 어떻게 됐든 내가 유리 너한테 큰 상처를 준 건 맞아. 그래서 진심으로 정중하게 사과하고 싶어. 정말... 미안해.”홍지은은 몸을 일으키더니 성유리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려고 허리를 굽혔다.그녀의 행동에 성유리는 행여나 임산부인 홍지은이 자기 배에 머리를 부딪힐까 봐 두려워 얼른 막았다.“이미 다 지나간 일이에요.”홍지은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막고자 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정말? 이 말은 나를 용서한다는 말이야?”성유리의 대답에 홍지은은 잔뜩 흥분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진짜 잘 됐다! 사실 전부터 알고 있었어. 유리 네가 유정 씨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친구로 삼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것도 알았어.”“필경 우리야말로 진짜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 아니겠어? 한 사람 성격이 어떤지, 인성이 어떤지는 사실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거지.”“네가 진짜 성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 우리 둘이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어야 해.”홍지은은 성유리에게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마치 그녀가 물기를 기다리는 어부처럼.성유리가 아무리 자기 손을 빼내려고 애를 써도 홍지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원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성유리기에 더는 홍지은을 마주할 힘이 없어졌다.그 순간, 다행히도 박한빈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박...
박한빈은 성유리가 보내는 무언의 “나무람”을 못 본 척하며 온도계를 다시 손에 넣었다.“음, 확실히 열은 없네. 그냥 감기 초기 증상인가 봐.”박한빈은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뒤돌아 바로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그때, 아래층에 있던 도우미 한 명이 올라와 박한빈에게 말했다.“박 대표님, 손님 한 분이 오셨습니다.”박한빈은 그 말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누군데요?”“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분 성이 홍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모님과 친구 사이라고 하시던데...”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힐끔 쳐다봤고 그녀는 금세 찾아온 손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홍지은 씨?”“홍지은이 누구야?”박한빈의 물음에도 성유리는 침묵했다. 그러다 그녀의 눈빛을 발견한 순간, 그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는 홍지은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제야 떠올랐다. 그녀는 바로 전에 성유정이랑 잘 어울려 다니던 친구였다.이런 일은 이미 박한빈과 성유리 사이에서 잊힌 지 오래였기에 그는 홍지은이 이런 방식으로 다시 나타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홍지은 씨가 왜 너를 찾아온 거지?”박한빈은 얼른 화제를 돌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저도 몰라요.”“그럼 그냥 가라고 하자.”박한빈은 금세 결정을 내렸다.‘괜히 그때 일이 생각나게 하면 안 돼. 아니면 또 화낼 테니까.’그는 도우미에게 찾아온 손님을 떠나보내는 말을 했지만 돌아온 도우미는 많이 난감해하며 말했다.“그게... 손님께서 떠나기를 거부하십니다. 무조건 사모님을 만나 봬야 한다면서...”“게다가 임산부인 것 같습니다.”도우미의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고민하다 결국 한번 만나기로 결정했다.“제가 가볼게요.”“아니면 내가 갈까?”만약 예전 같았으면 박한빈은 바로 내려가 손님을 내보냈겠지만 행여나 전에 일들에 연루될까 아무런 행동도, 선택도 쉽사리 내리지 못했다.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 박한빈의 말에도 그녀는 침묵했고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바로 걸음
홍지은과의 우연한 만남은 성유리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만약 오늘 하늘이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성유리가 급히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마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전에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는 하늘이기에 성유리는 아이가 작은 병에 걸리기만 해도 극도로 긴장됐다.다행히 오늘 의사가 그저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뿐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성유리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그러던 중, 홍지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밥이나 먹을까?”성유리는 그녀의 제안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필경 두 사람 사이는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홍지은은 눈치가 없는 건지 계속 성유리에게 말했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지. 근데 그거 다 성유정한테 속은 거야. 나도 나중에 알아차렸어. 그때... 너한테 못 할 짓을 했다는 걸.”“그래서 정식으로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홍지은의 사과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성유리는 마땅히 거절할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제가 요즘 많이 바빠서요.”“그냥 밥 한 끼 먹는데 그렇게 오래 안 걸리잖아.”홍지은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유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말을 내뱉었다.“아니면... 내가 그렇게 싫어? 밥도 같이 먹기 싫을 정도로?”“아니요. 너무 멀리 가셨네요.”성유리가 차분한 말투로 그녀의 말에 대답을 이어 나갔다.“전 홍지은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같이 밥 한 끼 먹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정말 없기 때문에.”“다른 일 없으시면 먼저 끊을게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는데 다행히 홍지은에게서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성유리는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바꿔놓고 하늘이의 옆에 살며시 다가가 누웠다.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함께 잠에 든 적이 없는 성유리지만 아이는
신영지는 홍지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대답을 이어갔다.“그리고 오늘은 그저 평범하게 다 같이 차나 마시며 간단한 일상 대화를 나누는 날이에요.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나눌 장소가 아니고.”“그럼 저희 다시 날 잡고 얘기 나눌까요?”홍지은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며 신영지에게 물었다.“연락처가 어떻게 되세요? 통화가 불편하시면 문자라도...”신영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사람이 먼저 말했다.“아이고. 곧 사진 찍는데 두 분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나누세요? 저기 키 크신 분, 뒤에 분 막으셨어요. 뒤로 가서 서세요.”그 사람이 말한 키 큰 분은 바로 홍지은이었다.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었지만 옆에 사람들이 하나둘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사진은 금방 찍었는데 홍지은은 자신의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표정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러나 당연하게도 홍지은의 상태가 어떤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신영지는 홍지은에게 연락처를 주지도 않았고 캐톡 친구를 추가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사진을 다 찍고 나서 바로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로 인해 며칠간 할 말을 준비한 홍지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모임 장소인 찻집에서 나온 홍지은은 남편이 이미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때? 신영지 씨는 봤어? 말은 걸었고?”딱 봐도 야윈 남자가 홍지은에게 다가와 문을 열어주며 묻자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말하긴 뭘 말해? 오늘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말도 안 걸어준다고.”“그래? 그럼 어떡하지? 공장 일... 마땅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면 정말 끝이야.”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홍지은에게 계속 물었다.“넌 다른 생각을 해볼 생각도 안 하는 거야?”“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데?”홍지은은 남자의 말에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다.“네가 남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