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냉정하고 진지했다.그런데 문득 미화로에서 그가 진무열을 발로 걷어찼을 때의 진지했던 표정이 떠올랐다.오직 이때에만 성유리는 그의 조용한 눈빛에 감춰진 광기를 읽을 수 있었다.그는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다.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곧 차는 호텔 주차장에 세워졌다.박한빈은 다시 다가와 성유리를 안았다.“놔... 놓으라고!”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여전히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쳤다.“박한빈 씨,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요. 당신이 스스로 끝이라고 말했잖아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는데 그가 예약한 스위트룸은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었다.방문을 닫는 순간 박한빈은 더는 억제하지 않고 성유리를 문에 밀착했다. 그러고는 몸에 걸쳤던 외투를 확 잡아당겼다.“놔요! 박한빈, 이 나쁜 놈!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뭐야? 당신 전에는...”“후회했어.”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말에 성유리는 어리둥절해졌다.“날 뭐로 보는 거예요?”한참 후에야 그녀는 중얼거렸다.“박한빈 씨, 당신 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이 끝내고 싶으면 끝내고 후회한다고 하면 다시 시작해야 해요? 당신 눈에는 내가 그렇게 천하게 보여요?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하고 다시 하고 싶으면 다시 시작하고? 박한빈 씨, 계속 나한테 이러면 평생 미워할 거예요.”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녀의 옷을 벗기려던 손이 잠깐 흠칫하더니 눈을 들었다.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젖은 눈동자 속에는... 한이 엿보였다.박한빈은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웃더니 한마디 했다.“그래, 미워해.”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녀는 박한빈이 왜 이러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예전에 그녀가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 분명히 박한빈이 그녀에게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했었다.그는 그들 사이의 마지막 가능성을 차단했고 심지어 그녀에게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그녀는
선혈은 곧 성유리의 두피와 머리카락을 통해 스며 나왔다.박한빈이라도 지금 이 순간은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한참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곧 성유리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았다.이 기회를 틈타 성유리도 그를 앞으로 힘껏 밀었다.그녀는 더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몸을 가누고 돌아서서 문을 열려 했다.하지만 아직 발을 내디디기도 전에 박한빈이 이미 뒤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거 놔! 박한빈, 개자식 이거 놔!”성유리는 황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박한빈이 손을 놓을 의사가 없는 것을 보고 고민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숙여 그의 팔을 덥석 물었다!미쳐버릴 것만 같은 그녀는 마음이 약해질 겨를도 없었다.곧 그녀는 비릿한 피 맛을 느꼈지만 박한빈은 신음조차 하지 않았다.성유리가 계속 물려고 할 때 고통을 참고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병원에 데려다 줄게.”...성유리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병원에 있었는데 연정우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하지만 잠에서 깬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황급히 물었다.“어때? 어디 아픈 곳은 없어?”“괜찮아.”“앉을래?”연정우가 또 물었다.“어지러워.”“그래, 그럼 의사가 다 검사해 준 다음에 보자.”연정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성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고는 다시 물었다.“너... 나한테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얘기하고 싶어?”연정우가 되물었다.성유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푹 쉬어.”“고명도 때리러 갈 거야.”그러자 갑자기 성유리가 말했다.연정우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웃으며 물었다.“이건 좀 아니지 않아?”성유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표정을 짓자 연정우도 웃음을 거두며 대답했다.“아니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어.”그의 이 생각은 오히려 성유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연정우를 바라
죽을 먹고 난 성유리는 정민재를 보았다.그는 지금 문 앞에 서서 망설이는 얼굴로 자신이 여기에 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그를 쳐다보고는 직설적으로 말했다.“들어오세요.”“성 대표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정민재는 들어오자마자 설명했다.“어젯밤 고 대표님이 억지로 끌고 가시며 성 대표님이 박 대표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런 더러운 수법을 쓰신 줄 몰랐어요.”정민재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성유리는 정민재를 비난하지 않았다.“고명도에게 전화해서 내가 만나야 한다고 말해요.”“지금요?”“그래요. 지금.”성유리의 말에 정민재는 더는 묻지 못했다.고명도가 찾아오자 그녀는 정민재와 간병인을 모두 내보냈다.고명도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고 심지어 계획이 실패한 것 때문에 안색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고 대표님이 내 술에 약을 탔어요?”성유리가 직접 물었다.고명도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어젯밤 병원에 실려 왔는데 건강 상태는 어떤지 의사가 잘 알고 있고 검사 결과도 정확하게 나왔으니 잡아떼지 못할 거에요. 고 대표님이 아니라면... 그럼 박한빈 씨인가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매우 냉정했다.고명도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인주 프로젝트는 제가 노력해 볼게요.”성유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지만 고 대표님이 인성에서 나갔으면 좋겠어요.”“뭐라고?”“제가 방금 제대로 말하지 못했어요?”성유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전에 말했잖아요. 인주 프로젝트는 전체 그룹의 이익이라고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희생으로 얻은 프로젝트인데 무슨 근거로 고 대표님이 그 몫을 챙기려는 거죠?”“협력이 확인되면 회사는 이 프로젝트를 올해 사업 중점으로 추진할 거예요. 하지만 이 작업은 분명히 당신이 필요하지 않으니 고 대표님도 당연히 여기에 더는 머무를 필요가 없어요.”“제가 이러는 건 다 고 대표님이 잘되라는 거예요.”성유리
성유리의 상처는 큰 문제가 없었기에 검사가 끝난 후 다음날 퇴원했다.다만 상처가 아물지 않아 이마에 거즈를 붙이고 있었는데 흉터가 남을 수도 있다고 했다.성유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녀가 레스토랑에 나타나자 오가는 사람들이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봤다.성유리는 조용히 그곳에 앉아 유리창 밖 인성의 번화한 거리를 바라보았다.빨간 전조등과 멀리 떨어진 동네에 켜진 불빛, 그리고 길거리에 과일과 다른 음식을 파는 임시 노점이 있어 도시 분위기를 이루었는데 고층 빌딩이 널려 있는 금성보다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성유리가 넋을 잃고 보고 있을 때 귀에 익은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레스토랑 로비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의 발소리였다.그녀는 그를 안지... 몇 년 되었다.성유리는 자신이 언제부터 그를 몰래 지켜봤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그가 블랙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모든 새콤달콤한 음식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어두운색 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을 알며 그가 즐겨 매는 넥타이 스타일이 무엇인지 안다.이런 생활 습관들은 그들이 결혼 2년 동안 그녀가 조심스럽게 관찰한 것이고,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그녀 스스로 몰래 지켜본 결과이기도 하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원히 알 수 없었다.성유리는 이제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젯밤의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그였다.이기적이고 잔인하고 미친 사람 말이다.“오래 기다렸어?”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오늘 흰색 셔츠를 입었는데 재킷 없이 소매를 풀어 위로 걷어 올리자 하얗고 탄탄한 팔뚝이 드러났다.그리고 그 팔뚝에는 또 하나의 또 다른 선명한 이빨 자국이 보였다.그 자국은 매우 깊어서 지금도 아래쪽에서 핏기가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성유리는 자연히 그 이빨
그리고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하고 싶어?”박한빈이 물었다.이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더욱 깨물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신의 입가를 닦았다.“그 증거로 경찰에 신고할 수 있어요.”그녀가 덤덤하게 말했다.“그래? 경찰에 신고해서 날 잡아가라고?”박한빈이 빙긋 웃었다.성유리는 그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왜 웃어요?”“어? 내가 웃어야 하는 거 아니야?”박한빈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곧 웃음을 거두며 다시 물었다.“경찰서에 신고할 거면 지금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여기 앉아서 나랑 밥 먹으려고 하는 거지?”성유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이 일로 나를 협박하려는 건가?”박한빈은 일회용 장갑을 끼고 천천히 새우껍질을 까기 시작했다.그의 동작은 매우 우아했고, 또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어 마치 그들이 지금 정말 평범한 데이트 식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더니 박한빈이 갑가지 물었다.“인주 협력권을 달라는 거야? 누구 아이디어인데? 그 남자친구? 그럼 오늘 왜 같이 안 왔어? 용의자인 내가 너에게 무슨 짓 할까 봐 두렵지 않대? 설마 레스토랑 로비 같은 곳에서 만나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가 한마디 한마디 물어왔다.밋밋해 보이는 말투는 압박감이 역력했지만 날카로운 눈빛에 성유리는 협상 중이던 박한빈의 모습을 떠올렸다.왠지 모르는 불안감에 성유리는 더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박한빈은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그 어이없어하는 모습에 성유리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이때 박한빈이 일회용 장갑을 벗고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결국 말을 삼켰다.‘됐어. 더 놀라게 하면 안 돼.’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견뎌낸 거로... 이미 충분하다.박한빈은 깐 새우살을 성유리 앞에 놓고 나서 말했다.“너의 조건에 동의해.”“뭐... 라고요?”“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려는 것 아니야?”박한빈이 말했다.“경찰에
“얘기 다 됐어?”성유리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연정우는 꾹 참았다가 드림 타운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성유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아프지 않아?”연정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만지려고 했지만 갑작스러운 동작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몸이 조금 굳어졌다.하지만 그녀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연정우는 이미 손을 거두었다.“다행히 열이 나지 않네.”그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말했다.“하지만 너는 좀 더 쉬어야 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기 전 그를 향해 말했다.“고마워.”연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너 예전에 박한빈과 함께 있을 때도 이렇게 자주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어?”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성유리는 한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연정우가 계속 물었다.“사실 궁금하긴 했어. 오늘 밤 박한빈이 네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경찰에 정말 신고할 예정이었어?”“나는... 그랬을 거야.”성유리가 말했다.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 자신조차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했다.연정우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됐어. 푹 쉬어.”말을 마친 연정우는 몸을 돌려 그의 방으로 돌아갔지만 성유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잠에서 깬 듯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퇴원한 후부터 그녀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는데 전부 오늘 밤 박한빈의 담판을 위해서였다.그녀는 원래 자신이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이 너무 쉽게 대답해서 그녀가 준비한 것을 다 꺼내지 못했다.정신적으로 피로가 극에 달했지만 정작 침대에 누웠을 때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방금 연정우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만약 박한빈이 동의하지 않았다면...사실 오늘 밤 약속 장소에 나갔을 때 성유리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녀가 정말 그를 경찰서로 보낼 수 있을까?방금 성유리는 시원하게 대답
“무슨 말이에요? 이 성유리가 정말...”“아니면요? 전에 조 대표님도 다 이렇게 따냈잖아요?”“쯧쯧, 이래도 박 대표님은 더럽지 않대요? 아니지, 성 대표님은 전에 박 대표님의 부인이었잖아요?”“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박 대표님의 동정을 얻었나 봐요. 박 대표님도 정말 불쌍해요. 이런 여자한테 걸렸으니...”소리가 딱 멈추었다.가장 신이 나서 말을 하던 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성유리를 발견했다.그녀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가 도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추측할 수 없었고 하나같이 어색하게 성 대표님에게 인사를 건넸다.성유리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하이힐을 밟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명도의 사무실로 향했다....성유리는 종일 회의실에서 보냈는데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서 목이 좀 불편했다.그녀가 드림 타운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연정우가 집에 없지만 그녀는 전화를 걸지 않고 소파에 쓰러진 채 눈을 감았다.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잠에서 깼을 때는 여전히 혼자였다.그의 일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성유리는 머뭇거리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학교 실험실 쪽에 있어. 고쳐야 할 데이터가 좀 있어서.”“그래, 그럼 일 봐.”“응, 목소리가 좀 쉰 것 같은데 아직도 불편해?”“난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그래.”웃으며 대답하고 난 연정우는 전화를 끊고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박한빈이 술잔을 돌리고 있었는데 오렌지색 액체에 얼음을 띄워 입안이 아릿한 감촉이 느껴졌다.연정우는 한 모금만 마셨는데 입맛에 맞지 않아 잔을 내려놓았지만 옆에 있던 남자는 여러 잔을 마시더니 전화를 끊는 소리를 듣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거짓말을 잘하시는 것 같은데... 이런 일을 처음 한 건 아니죠?”“저와 성유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박 대표님께서 궁금하실 필요는 없겠죠? 앉아서 이미 한참 마셨는데 박 대표님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연 교수님은 똑똑한 사람이니 내 목적이
인주 프로젝트 계약서는 매우 빨리 작성되었다.성유리는 중간에 우여곡절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이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심지어 이익 점에서도 박한빈은 그들을 압박할 생각이 전혀 없이 모든 것을 시장의 기준에 따라 작성했다.계약서에 서명한 후 박한빈은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다른 협력자였다면 당연히 성유리도 동의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다른 고객과의 연락을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었으니 말이다.옆에 있던 정민재는 그의 제안을 듣고 휴대전화를 꺼내 레스토랑을 예약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죄송해요. 저녁에 다른 일이 있어서 안 되겠어요.”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민재가 성유리에게 저녁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정 비서님이 가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박 대표님을 잘 모시도록 해요.”“네?”정민재는 얼떨결에 묻다가 대답했다.“그래요, 그럼 제가...”“아니야.”박한빈은 그의 말을 끊고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 대표님이 이렇게 바쁘니 다음에 다시 만나.”“좋아요.”성유리는 빙긋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그럼 박 대표님, 잘 해봐요.”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이내 다시 손을 뗐다.정민재는 성유리의 요구에 따라 그를 배웅했는데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이미 얼굴빛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정민재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할 말이 있으면 해요.”성유리는 무표정하게 말했다.“음... 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대표님만이 감히 박 대표님을 이렇게 대하실 수 있어요. 화내실 까 두렵지 않으세요?”그의 말에 컴퓨터에 뭔가 입력하고 있던 성유리는 손가락을 멈칫했다가 이내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솔직히 저도 기다리고 있어요.”“네?”성유리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그 사람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보고 싶어요.”정민재의 말처럼 오늘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