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다 됐어?”성유리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연정우는 꾹 참았다가 드림 타운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성유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아프지 않아?”연정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만지려고 했지만 갑작스러운 동작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몸이 조금 굳어졌다.하지만 그녀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연정우는 이미 손을 거두었다.“다행히 열이 나지 않네.”그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말했다.“하지만 너는 좀 더 쉬어야 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기 전 그를 향해 말했다.“고마워.”연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너 예전에 박한빈과 함께 있을 때도 이렇게 자주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어?”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성유리는 한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연정우가 계속 물었다.“사실 궁금하긴 했어. 오늘 밤 박한빈이 네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경찰에 정말 신고할 예정이었어?”“나는... 그랬을 거야.”성유리가 말했다.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 자신조차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했다.연정우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됐어. 푹 쉬어.”말을 마친 연정우는 몸을 돌려 그의 방으로 돌아갔지만 성유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잠에서 깬 듯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퇴원한 후부터 그녀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는데 전부 오늘 밤 박한빈의 담판을 위해서였다.그녀는 원래 자신이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이 너무 쉽게 대답해서 그녀가 준비한 것을 다 꺼내지 못했다.정신적으로 피로가 극에 달했지만 정작 침대에 누웠을 때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방금 연정우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만약 박한빈이 동의하지 않았다면...사실 오늘 밤 약속 장소에 나갔을 때 성유리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녀가 정말 그를 경찰서로 보낼 수 있을까?방금 성유리는 시원하게 대답
“무슨 말이에요? 이 성유리가 정말...”“아니면요? 전에 조 대표님도 다 이렇게 따냈잖아요?”“쯧쯧, 이래도 박 대표님은 더럽지 않대요? 아니지, 성 대표님은 전에 박 대표님의 부인이었잖아요?”“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박 대표님의 동정을 얻었나 봐요. 박 대표님도 정말 불쌍해요. 이런 여자한테 걸렸으니...”소리가 딱 멈추었다.가장 신이 나서 말을 하던 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성유리를 발견했다.그녀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가 도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추측할 수 없었고 하나같이 어색하게 성 대표님에게 인사를 건넸다.성유리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하이힐을 밟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명도의 사무실로 향했다....성유리는 종일 회의실에서 보냈는데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서 목이 좀 불편했다.그녀가 드림 타운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연정우가 집에 없지만 그녀는 전화를 걸지 않고 소파에 쓰러진 채 눈을 감았다.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잠에서 깼을 때는 여전히 혼자였다.그의 일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성유리는 머뭇거리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학교 실험실 쪽에 있어. 고쳐야 할 데이터가 좀 있어서.”“그래, 그럼 일 봐.”“응, 목소리가 좀 쉰 것 같은데 아직도 불편해?”“난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그래.”웃으며 대답하고 난 연정우는 전화를 끊고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박한빈이 술잔을 돌리고 있었는데 오렌지색 액체에 얼음을 띄워 입안이 아릿한 감촉이 느껴졌다.연정우는 한 모금만 마셨는데 입맛에 맞지 않아 잔을 내려놓았지만 옆에 있던 남자는 여러 잔을 마시더니 전화를 끊는 소리를 듣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거짓말을 잘하시는 것 같은데... 이런 일을 처음 한 건 아니죠?”“저와 성유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박 대표님께서 궁금하실 필요는 없겠죠? 앉아서 이미 한참 마셨는데 박 대표님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연 교수님은 똑똑한 사람이니 내 목적이
인주 프로젝트 계약서는 매우 빨리 작성되었다.성유리는 중간에 우여곡절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이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심지어 이익 점에서도 박한빈은 그들을 압박할 생각이 전혀 없이 모든 것을 시장의 기준에 따라 작성했다.계약서에 서명한 후 박한빈은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다른 협력자였다면 당연히 성유리도 동의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다른 고객과의 연락을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었으니 말이다.옆에 있던 정민재는 그의 제안을 듣고 휴대전화를 꺼내 레스토랑을 예약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죄송해요. 저녁에 다른 일이 있어서 안 되겠어요.”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민재가 성유리에게 저녁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정 비서님이 가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박 대표님을 잘 모시도록 해요.”“네?”정민재는 얼떨결에 묻다가 대답했다.“그래요, 그럼 제가...”“아니야.”박한빈은 그의 말을 끊고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 대표님이 이렇게 바쁘니 다음에 다시 만나.”“좋아요.”성유리는 빙긋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그럼 박 대표님, 잘 해봐요.”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이내 다시 손을 뗐다.정민재는 성유리의 요구에 따라 그를 배웅했는데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이미 얼굴빛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정민재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할 말이 있으면 해요.”성유리는 무표정하게 말했다.“음... 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대표님만이 감히 박 대표님을 이렇게 대하실 수 있어요. 화내실 까 두렵지 않으세요?”그의 말에 컴퓨터에 뭔가 입력하고 있던 성유리는 손가락을 멈칫했다가 이내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솔직히 저도 기다리고 있어요.”“네?”성유리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그 사람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보고 싶어요.”정민재의 말처럼 오늘
그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누가 성유리의 손을 갑자기 잡더니 외투를 그녀의 몸에 걸쳐 주었다.“너...”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그 사람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성유리를 끌고 갔다.“아니, 너 누구야?”남자는 당연히 화가 나서 몇 발짝 쫓아갔다.“차례를 지켜야지.”박한빈은 자신의 외투를 성유리 몸에 걸쳐 주는 바람에 그때 셔츠만 입고 있었다.그의 강한 카리스마에 눌린 남자는 기세가 한풀 죽었지만 이대로 지기 싫어서 목만 뻣뻣하게 세우고 박한빈과 눈을 마주쳤다.“내가 전남편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박한빈이 물었다.“쳇, 전남편일 뿐이잖아. 남자친구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가 뭔데?”남자의 등은 순식간에 꼿꼿해졌는데 그러면서도 성유리의 다른 손을 잡으려 했다.박한빈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망설임 없이 발을 들어 남자를 걷어찼다.화가 난 그의 발길에 힘이 실려 하체부실처럼 보이는 그 남자는 순식간에 멀리 날아갔다.소란스러움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다가 비명이 들려왔다.“젠장!”얼굴이 창피해진 남자는 욕설을 퍼부은 뒤 바로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어 내리쳤다.박한빈은 순식간에 성유리를 밀어냈는데 그 의자는 그렇게 그의 팔에 부딪혔다.그러자 그 남자도 달려들며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남자를 다시 발로 차서 땅에 쓰러뜨리고 난 박한빈은 뒤에 있던 사람이 없어진 걸 발견했다.자기도 모르게 안색이 변하며 갑자기 고개를 돌린 박한빈은 성유리가 이미 술집 앞에 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그의 시선을 느낀 듯 성유리는 그를 향해 살며시 미소짓다가 돌아서서 떠났다.박한빈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그제야 그녀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그래서 지금 성유리한테 당한 건가?’...한 시간 후, 박한빈이 경찰서에서 나왔다.배지수도 때마침 도착해 거즈를 감은 박한빈의 손을 본 후 순간 눈시울을 붉히며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괜찮아요? 아파요?”박한빈은 재빨리 그녀를 밀어내고 경고
박한빈은 혼자 차를 몰고 드림 타운까지 갔다.성유리는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문을 열었을 때 전혀 의아해하는 기색이 없었다.박한빈은 먼저 안을 들여다보았다.“출장 갔어요.”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박한빈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물었다.“내가 그 자식 무서워할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내 남자친구니까 그렇게 당당한 건 좀 아닌 것 같아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돌아서서 말했다.“들어오세요.”박한빈은 입꼬리를 씩 올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그는 처음으로 여기에 왔는데 지난번에는 문 앞에만 도착했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미화로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새하얀 쿨톤, 어수선한 테이블, 맞은편 캐비닛에 가득 찬 술병...진짜 이런 집은... 그가 사는 집에 더 가까웠다.그리고 곧 박한빈도 탁자 위에 있는 약상자를 보았는데 심지어 요오드포름과 거즈도 준비되어 있었다.박한빈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예상이 정말 맞았어.”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가와 뺨에 상처를 입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는데 두 눈은 서리가 낀 듯 웃는 기색이 없었다.성유리는 그와 잠시 눈을 마주친 후 소파에 앉아 말했다.“앉아요. 소독해 줄게요.”그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 요오드포트를 집어 든 채 단호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사실 이때, 박한빈은 자신이 돌아서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어쨌든 그동안 그가 한 비이성적인 일은... 충분히 많으니 말이다.그는 그녀를 만회하려고 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계속 그녀 곁을 맴돌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렇다고 자존심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었다.하지만 그냥 지금 이대로... 그녀에게 놀림당하고 짓밟혔다.그는... 자신이 아직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움직일 수 없었다.그녀를 바라보며 옆으로 늘어뜨린 손을 꽉 쥐었는데 팔뚝에는 핏줄이 솟아올랐다.순간, 그는 그 탁자를 뒤엎고 그녀를 몸 아래에 깔고 싶었다.그녀를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예요.”성유리는 가볍게 웃었다.“당신이 저한테 어떤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이미 앞으로 나갔기 때문에 더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거예요. 다시 말해서 박 대표님은 이제 아웃됐어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가락을 하나씩 쪼갰다.“상처는 이미 다 처리했어요. 이렇게 작은 상처는 싸맬 필요도 없으니 가세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일어서려고 할 때 박한빈이 대뜸 말했다.“넌 정말 소탈하네. 내려놓았다면 다 내려놓은 거야?”그의 말 속에는 약간의 원망이 숨겨져 있었는데 그녀가 ‘무책임하다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우습다고 여긴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았다.“박 대표님은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저는 당신이 생각한 것처럼 소탈하지 않아요. 만약 제가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면 혼자 도인국에 가지도 않았고 또 당신에게 기회를 다시 줄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일부러 술에 취하지도 않았겠죠.”“그때 당신은 나를 거절할 때 일말의 설명 기회도 여지도 주지 않았어요. 이제 와서 무슨 입장으로 저를 비난해요? 제가 지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그때 이미 최선을 다해 당신을 사랑했고 또 최선을 다해 이 감정을 만류했기 때문이에요.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저는 저의 감정을 올인했기 때문에 유감이 없어요.”“그리고 박 대표님, 다시 말하지만 저는 당신이 쥐락펴락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므로 항상 제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릴 수 없어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테이블 맞은편에 섰는데 그곳은 마침 박한빈과 대치하는 자리였다.박한빈은 주먹을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성유리는 돌아서서 말했다.“가셔도 돼요.”한참 후에야 박한빈은 그녀가 바란 대로 일어섰다.성유리는 방금 그의 떠나려는 발소리를 들었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아참, 금성에 돌아갈 때 시간이 있으면 어머니를 뵈러 가도 돼.”이 말에 어리둥절해진 성유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그녀는 박한빈이 왜 갑자기 김서영을 언급했는
생신 잔치는 무사히 끝났다.연정우는 성유리를 집으로 초대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호텔에 묵으면 돼.”“그럼 내가 함께 호텔에 있어 줄게”‘아니야.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부모님과 많이 있어야 해.”성유리가 웃으며 말했다.연정우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을 한 성유리를 마주 보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엄마와는 내가 잘 얘기해 볼게.”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오늘 사모님과의 대화를 엿들었어?’곧 연정우가 계속해서 말했다.“어쨌든 너는 내가 데려온 손님인데 이렇게 대하지 말아야 했어.”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을 했음을 알았다. 비록 오늘 밤 금미라의 태도는 좋지 않았지만 그녀가 뒤에서 뒷담화를 한 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연정우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아무튼, 우리는 계약 관계일 뿐이니 너의 어머니가 어떤 태도로 나에게 대하든... 상관없어. 나를 위해 부모님과의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어.”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연정우는 조용해졌다. 성유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향해 손을 내저은 후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성시원은 성유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고 그녀를 저택으로 돌아가 살라고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그곳은... 그녀의 집이 아닌 지 오래다. 그녀는 다섯 살 때 길을 잃은 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성유리는 오늘 밤 술을 많이 마셨지만 호텔에 도착하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이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성유리는 호텔의 통유리 앞에 서서 이 낯설고도 익숙한 도시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이곳에서 태어나 또 십여 년을 살았고, 또 여기에서 결혼까지 했지만 시종 이 도시에서 자신의 소속감을 찾지 못했다.그러다가 성유리는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미화로였다.급하게 이사 왔고 또 집안에서 그런 일이 발생해서 집주인은 그녀를 매우 불만스러워했기에 성유리는 아예 1년 치 집세를 더 냈다. 다만 집주인이 그녀가 이사한 것을 알고도 다른 사람에게 집을 다시 세를 줬을지
몇 달이 지났지만 미화로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곳은 마치 번화한 도시에서 잊혀진 모퉁이처럼 고층 빌딩도 없고 고급 차도 사치품도 없이 그저 높낮이가 다른 건물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에어컨, 그리고 아래층에 사업자등록증이 있는지도 모르는 바비큐 가게가 있었다.성유리는 천천히 걸어가다가 결국 택시를 잡아 호텔로 돌아갔다.이번에 그녀는 잘 잤고 꿈도 꾸지 않았다.깨어나 보니 다음날 정오가 되었다.성유리는 내일 새벽 비행기로 떠난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연정우가 보낸 문자가 보였는데 저녁에 집에 와서 밥을 먹으라는 내용이었다.성유리는 거절하려고 답장을 작성했지만 발송하기도 전에 연정우는 두 번째 문자를 보내왔다. 그의 집에서는 그들의 감정이 깊지 않다고 생각되어 그에게 소개팅을 안배하련다는 내용이다.성유리는 거절하려고 타자했던 말들을 한 글자씩 지워버렸다. 그때 연정우가 그녀와 협력한 것은 바로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 관계에서 혜택을 받았으니 당연히 그에게 보답해야 했다.이렇게 생각한 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답장을 보냈다.[알았어.]문자가 발송된 후 성유리는 다시 휴대전화에 뜬 시간을 보았는데 마침 저녁 식사까지 대여섯 시간이 있었다.일하기 싫었던 성유리는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졌다. 그녀는 침대에 잠시 앉아 있다가 결국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안심 병원.여기는 지화 그룹 소유의 개인병원이고 김서영은 마침 여기에 입원했다.박한빈이 미리 분부했는지 성유리는 전혀 방해받지 않고 걸어왔다. 심지어 김서영을 돌보는 간병인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까지 했다.성유리는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며 웃음을 되찾으려 애썼지만 어느새 입꼬리가 굳어버려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결국 성유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앉으세요.”간병인은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 옆에서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성유리는 힐끗 보며 물었다.“이 책은... 어머님께 읽어주는 거예요?”“네. 사모님께서는 이식이 있는데 스스로 깨어나는 걸 거부한다고 선생님께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