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자 아줌마는 말로 해서는 화풀이가 되지 않았는지 몇 걸음 다가와 성유리를 힘껏 밀었다.“나가라고 했잖아! 당장 나가!”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는데 그녀가 또 밀려고 할 때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뭐 하는 거야? 놔, 이 천한 년아!”숙자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오자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놓고는 돌아섰다.“꺼져! 사모님은 널 보고 싶지 않아 해! 다 너 때문이야. 파렴치한 년!”“그리고 너!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도련님의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또 이런 일이 있다면 내가 도련님...”성유리는 숙자 아주머니가 뒤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했다.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사람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시 그녀를 끌고 갔기 때문이다.그의 동작은 너무 과감하고 직설적이어서 성유리는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끌려갔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다시 병실로 끌려갔다.숙자 아주머니는 온 사람을 보고 기뻐하며 입꼬리를 씩 올렸지만 ‘도련님’이라고 부르기도 전에 박한빈의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 표정과 목소리가 모두 일그러졌다.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지금 이 상황을 믿기 어려운 듯 쳐다보았다.박한빈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방금 뭐라고 했어요?”“저... 도련님!”숙자 아주머니는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 그리고 이 여자... 이 여자가 사모님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요. 어떻게 이런 여자와 함께 있어요? 도련님...”“사과하세요.”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숙자 아주머니는 멍해졌다!“네? 저더러 사과하라고요? 말도 안 돼요! 제 말이 틀렸어요?”숙자 아주머니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도련님, 사모님은 이미 이렇게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계셨는데 당신은 어떻게 아직도 이 여자와 함께 엮일 수 있어요? 이 일을 어르신께서 알게 된다면...”“됐어요.”박한빈이 계속해서 말했다.“당신이 사과하든 안 하든 유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
“안돼요. 도련님! 제가 나이가 이렇게 많은데 박씨 가문을 떠나면 어디로 갈 수 있겠어요? 그리고 내 아들과...”숙자 아주머니는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박한빈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문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소식을 듣고 달려온 경비원은 즉시 다가가 사람을 데려갔다. 숙자 아주머니는 한바탕 더 소란을 피우려고 했지만 경비원에게 끌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성유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성유리의 얼굴은 덤덤했다.처음에 박한빈을 보았을 때 그녀는 의아해했지만 곧 안정되었다. 아까 자기 앞에서 펼쳐진 이 장면을 그녀는 마치 구경꾼처럼 덤덤하고 조용하게 지켜보기만 했다.병실에 모인 다른 구경꾼들도 모두 해산되었다.간병인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박한빈을 쳐다보며 점심을 사러 가겠다고 핑계를 대며 몸을 돌려 나갔다. 떠나기 전에 그녀는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박 대표님, 이 손 놓으시죠?”박한빈은 자신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지 성유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손을 놓았다.하지만 그는 곧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다른 사람 앞에서만 그렇게 나약해? 너에게 손가락질하며 욕하도록 내버려 두었어? 내 앞에서는 왜 이러지 않아?”성유리는 약간 굳어진 손목을 움직이며 고개를 들었다.“숙자 아주머니가 저를 이렇게 욕한 것은 처음이 아니어서 이미 익숙해졌어요.”박한빈은 그녀의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해졌다.성유리는 계속해서 말했다.“제가 도연제에 있을 때도 그녀는 항상 나에게 언성을 높였고 뒤에서 내 험담도 많이 했는데 당신은 모르세요?”박한빈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하긴, 그는 당연히 몰랐다.성유리는 병상에 누워있는 김서영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숙자 아주머니가 오늘 말한 것은... 틀리지도 않았어요. 당신 어머니가 이렇게 된 것은 제 책임이 있어요. 당신도 이렇게 생각하죠?”성유리
연씨 가문의 별장은 금성의 교외에 있었다.산맥을 등지고 있어 별장의 위에서 내려다보면 멀지 않은 곳의 호수도 보여 환경과 공기가 다 좋았다.성유리가 이곳에 온 것이 두 번째다.오늘 방문을 위해 성유리는 일부러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샀다. 그의 아버지인 연세훈에게는 보양식을 준비했고 그의 어머니인 금미라에게는 화장품과 목도리를 준비했다. 연정우가 어젯밤에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오늘 방문했을 때 금미라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적어도 성유리가 그녀에게 인사를 할 때 그녀는 대답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연정우는 그저 인사치레로 고객을 끄덕였다.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식당으로 들어섰다.연세훈은 전에 대학교에서 선생님을 했지만 비즈니스에 대한 일도 많이 아는 것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성유리에게 인주 프로젝트에 관한 일을 물어봤다.“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이제 돌아간 후 수질과 토양을 조사할 예정이에요.”성유리가 대답했다.“음... 입사한 지 몇 개월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해.”성유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연세훈의 말에는 다른 뜻이 담겨있는 듯했다. 금미라도 이때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성유리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운이 좋은 것도 실력이에요.”성유리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연정우는 곧 화제를 돌렸다.“다음 달에 저는 세림국에 출장 가는데 갖고 싶은 게 있어요?”“왜 또 가야 해?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이렇게 하면 언제 안정될 수 있겠어?”“지금 중요한 단계라 데이터 비교도 해야 하고 저도 그쪽에서 많이 배워야 해요.”“다음 달이야? 어느 날이야? 아니면 그 전에 혼인 신고해.”금미라의 이 말이 나오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성유리와 연정우의 반응이 제일 심했고 연세훈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이 없었다.“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연정우는 성유리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너와 성유리 씨는 지금 사이가 좋잖아? 게다가 올해
성유리는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실패한 결혼생활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아이는 낳기만 하면 내가 돌봐주고 교육해 주겠다고 했잖아.”성유리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하지만 저는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됐어요. 저는 아이에게 무책임한 짓을 할 수 없어요.”“그럼 정우는 책임지지 않아? 정우는 올해 34살이야. 더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않으면...”“그건 정우 씨 사정이에요.”“뭐라고?”안색이 대뜸 변한 금미라는 일어서서 연정훈을 바라봤다.“봤지? 넌 내가 아량이 없다고 말했는데 이 여자가 나에게 대한 태도를 좀 봐! 널 이렇게 오랫동안 키운 게 이런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나를 화나게 하기 위해서야?”“그만해. 당신도 흥분하지 마.”연세훈은 겨우 입을 열었지만 말머리를 떼자마자 금미라가 잘라버렸다.“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 마. 당신이 그동안 형편없었기 때문에 우리 아들이 지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어. 멀쩡한 아가씨는 싫다 하고 하필이면...”“엄마!”금미라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연정훈이 끊어버렸다. 그는 안색이 어두워진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금미라는 입을 다물었다.연정훈은 그들을 상관하지 않고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바로 돌아섰다.“어디가?”금미라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연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성유리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솔직히 이런 가족이 갈라지는 장면은 그녀에게도 너무 익숙했다.다른 점이라면 성유리는 그의 부모님이 그를 잘해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들은 단지 연정우가 지체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그러나 당시 성씨 가문에서는 그녀에게서 끊임없이 이익을 짜내려 했다.돌아가는 길에서 연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유리도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호텔에 도착한 후 연정우는
국제 대도시인 금성의 공항은 새벽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성유리는 스튜어디스에게 담요를 달라고 한 다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이때 누군가가 옆에 앉아 손을 뻗어 그녀의 담요를 정리해주자 성유리는 순간 잠에서 깨어 눈을 번쩍 뜨고 옆 사람과 마주 보았다.방금 성유리는 짧은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그는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그녀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천천히 끼워준 다음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깨어났다.이때 눈앞의 사람과 꿈속의 그가 겹쳐서 성유리는 잠깐 자신이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가 다시 손을 들어 이마의 잔머리를 손질해 주며 그 차가운 손길이 성유리의 피부를 지나갈 때야 그녀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방금 잠에서 깨어난 성유리는 목소리가 약간 쉬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박한빈은 손을 거두며 대답했다.“아시다시피 나도 연성에 가는 거야.”성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마침 같은 비행기라고요? 마침 제 옆자리에요? 박한빈 씨 제가 바보로 보여요?”그녀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가볍게 웃었다.“우연의 일치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나도 널 바보로 보지 않았어.”이렇게 말하자 성유리는 어떻게 대답할지 몰랐다. 그를 한참 뚫어지라 쳐다본 후 성유리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담요를 다시 덮었다. 박한빈도 잠자코 말이 없었다.그를 한참 쳐다본 후 성유리는 마침내 몸을 돌리며 담요를 올려 자신을 덮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승무원에게 낮은 소리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물 한 병이 그녀 옆에 놓였다.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박한빈은 그녀를 더는 보지 않고 태블릿을 꺼내 뉴스를 보았다.성유리가 갑자기 물었다.“박한빈 씨, 이러는 게 재밌어요?”그는 손가락을 멈칫거리며 웃었다.“재미있어.”“분명히 말씀드렸어요.”“그건 너의 생각이니 고수해도 돼
“하지만 이제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어. 잘못된 선택을 했으면 나는 어떻게든 이 결과를 만회해야 해.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거야. 솔직히 나는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고 보니 이 느낌이... 나쁜 편은 아니었어. 비즈니스에서 얻은 이익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만약 이런 숫자가 너라면 나는 행복할 것 같아.”비행기는 이미 이륙했다.박한빈은 태블릿을 끄고 성유리를 마주 보았다. 그윽한 눈동자에는 뜨거운 감정이 이글거렸다.성유리는 그를 보며 갑자기 웃었다.“솔직히 예전 같았으면 이 말을 듣고 저는 기뻐했을 거예요.”박한빈이 물었다.“그럼 지금은?”“너무 늦었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박한빈은 눈동자가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곧 안정을 찾았다.“혹시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하려고 그래? 너와 연정우가 계약 커플이란 걸 알았어. 감정이 없지, 그렇지?”그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리의 표정이 변했지만 곧 평온해졌다.“그래서요?”“넌 연정우를 좋아하지 않아.”“네.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도 좋아하지 않아요.”‘괜찮아. 이건 너의 생각일 뿐이야. 어떻게 하는 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성유리는 말이 없었지만 박한빈과 시선을 마주했다.잠시 후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어떻게 할 거예요? 인주의 협력권을 준 것만으로 부족해요?”“네가 원하고 나한테 있으면 다 돼.”박한빈이 대답했다. 그의 망설임 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성유리는 멍해졌다. 박한빈의 태도는 그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다 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손을 조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내가 당신을 이용한 후 버릴까 봐 두렵지 않으세요?”“그것도 너의 선택이라면 받아드릴 거야.”성유리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시선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열심히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박한빈은 멈칫했다. 그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빤히 그녀를 쳐다봤다.성유리는 오늘 캐주얼로 차려입었다. 심플한 흰색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제가 고민할 시간을 가지는 건 괜찮죠?”이것이 바로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한 마지막 대답이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이 너무 많아서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은 당연했다.박한빈은 원래 자신이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지화의 일은 그가 작년부터 미끼를 던진 후 최근에 와서야 서서히 그물을 걷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그는 항상 자신이 훌륭한 사냥꾼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는 성유리를 위해 이미 수많은 비정상적인 일을 했다.하지만 매번 그녀에게 연락하고 싶어도 그는 그녀의 진지했던 그 날의 모습이 떠올랐다.‘좋은 결과라면 며칠 더 기다려도 돼.’박한빈은 그렇게 생각했다.그러던 어느 날, 박한빈은 잘 생각해 보겠다고 하던 사람이 연정우와 함께 학교에 강연하러 간 것을 발견했다.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은 뉴스 사이트에도 올라와 '선남선녀’라는 댓글이 수두룩했다.박한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차를 몰고 드림 타운으로 갔다. 연정우는 이미 그의 집으로 이사했지만 그가 있다고 해도 박한빈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가짜 커플일 뿐이기 때문이다성유리가 샤워를 막 끝냈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온 얼굴에 화가 치민 박한빈이 보였다.머리카락을 아직 말리지 않아 물방울이 그녀의 머리끝을 따라 끊임없이 떨어졌다. 성유리는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영문을 모르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오늘 어디에 갔었어?:박한빈이 물었다.성유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기사를 본 것이 틀림없다.성유리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마침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그녀의 어설픈 태도에 어리둥절해진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다.“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에 대해 답을 생각했어요.”성유리는 말하며 소파에 앉았다. 고개를 들고
박한빈은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나더러... 명분이 없는 사람이 되라고?”“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요. 어차피 우리는 협력하는 사이인데 너무 떠벌리는 것도 좋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보겠어요? 그래서 이러는 게...”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몇 걸음 다가와서 성유리의 옆에 주먹을 내리쳤다. 이 갑작스러운 몸짓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할 말을 잊었다.“성유리, 나와 장난해? 나를 무슨 사람으로 보는 거야? 너의 눈에서 나는 이렇게 천하고 자존심 없다고 생각해?”우스웠다. 박한빈은 이것이 정말 웃겼다고 생각했다.‘나더러 공개 석상에 나타날 수도 없는 애인 노릇을 하라고? 나를 이렇게 깔보는 거야?’박한빈은 어금니를 꽉 물었고 이마와 팔뚝에는 힘줄이 솟아올라 뛰고 있었다.그는 허리를 굽혀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는데 이 순간 그는 갑자기 머리를 숙여 그녀를 깨물고 싶었다. 입술, 목덜미, 어깨, 다 괜찮았다.이때 그는 치아마저 근질거렸다. 온몸의 세포도 그에게 오직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아픈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하지만 이때 성유리의 평온한 눈빛은 마치 칼날처럼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박한빈이 성유리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을 때 성유리는 피하지 않고 심지어 평소처럼 평온한 말투로 침착하게 말했다.“음, 그럼 됐어요.”됐다... 고?가볍게 들려오는 말에 박한빈은 동작이 굳어졌다.“왜?”마침내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도대체 왜? 왜 이렇게 해야지? 우린 분명히...”“당신을 위해 내가 연정우 씨와의 약속을 배신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분은 저를 많이 도왔어요. 제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를 저버릴 수 없어요.”“그래서 날 배신하는 거야? 내가 잘해주지 않았어? 인주 프로젝트...”“프로젝트 건은 당신이 동의한 거래가 아닌가요?”성유리는 그의 말을 잘라버렸는데 말투는 짜증스러워했다.“전에 이미 약속한 일을 왜 또 꺼내서 말하죠? 박한빈 씨 언제 이렇게 인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