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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작가: 송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1-08 11:57:21
박한빈은 이 세상에 어떤 규칙들이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규칙은 바로 늘 속으로 행여나 진짜로 발생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일은 꼭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마주치기 싫어 요리조리 피해 다녀도 꼭 어딘가에서 의도치 않게 만나게 되는 규칙도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 시각,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오늘 여자의 옷차림은 평소보다 더 정갈하고 깔끔했다.

연한 파란색의 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고 머리도 낮게 묶은 여성은 화장도 어젯밤보다 더 연하게 했다.

하지만 여성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앞에 있는 남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 대표님?”

옆에 있던 사람은 박한빈의 지시를 기다리다 가만히 서 있는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박한빈은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저분 조 대표님 아니에요?”

옆에 있던 사람이 박한빈의 시선을 따라 쳐다본 곳에서 조 대표와 그 여성을 발견했다.

성유리와 잔을 부딪치며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박한빈의 옆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이내 박한빈을 발견한 남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성유리는 사실 아까부터 박한빈을 발견했지만 못 본척 하고 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이곳에서 마주칠 줄 몰랐는지 미간이 찌푸려졌고 인사조차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성유리는 박한빈과 인사를 하기 싫었지만 결국 남성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박 대표님도 식사하시러 오셨습니까? 이것 참 우연이네요.”

조 대표는 박한빈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우리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박 대표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랑 함께 식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게...”

박한빈이 뭐라 하기도 전,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필경 박한빈이 연성에 머무는 시간이 짧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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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층은 최고급 스위트룸이 있는 층이었다.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왠지 모를 스산함도 감돌았다. 성유리는 초인종을 누른 뒤 고개를 숙이고 자기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에서만 지내던 최근, 그녀의 하얀 운동화에는 어느새 흙이 묻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딛고 있는 고급스러운 브라운 카펫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기 지금 성유리가 서 있는 이 세상은 그녀의 세계가 아니었다. 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초일 수도, 아니면 아주 긴 십여 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 시간이 한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손발이 저려오기 시작할 때쯤, 마침내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러나 문 너머의 사람을 본 순간, 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옆에 늘어져 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살짝 바라봤다. 박한빈은 방금 욕실에서 나온 상태였는지 허리에는 흰 수건 하나만 걸려 있었고 머리카락은 아직 마르지 않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방울은 하얗고 탄탄한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복근을 따라 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앞머리가 길어 눈을 거의 덮을 정도였지만 그 안의 깊고 어두운 눈빛은 성유리에게 똑똑히 보였다.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준 박한빈은 성유리를 본 체도 하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던 박한빈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박한빈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먼저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의 말에 성유리는 순간 숨이 가빠졌고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뭐가 무슨 뜻이에요?” 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성유리, 네가 지금 나한테 질문을 하고 있어?” 그녀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내 박한빈은 벽에 몸을 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4화

    박한빈의 검사 결과가 곧 나왔고 그 결과는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과를 본 성유리는 편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없었다. 어제 그와의 대화는 결코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한빈이 떠날 때 성유리는 분명 분노에 휩싸인 그의 표정을 보았었다. 그가 동원한 의료진과 그의 관계는 분명 아주 돈독해 보였으니 지금쯤 박한빈도 이미 결과를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성유리에게 연락이 없었다. 성유리는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먼저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신호음이 한참이나 울렸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유리는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내, 수화기 너머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박한빈의 목소리는 원래 성유리에게 익숙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떨려와 휴대폰을 더 꽉 쥐었다. 성유리는 입술을 몇 번이나 움찔거린 끝에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저예요.” “알아.” 박한빈은 빠르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성유리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는 힘들었다. 입술을 꾹 다문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결과 나왔어요. 박한빈 씨도 봤죠?” “응.” “그럼 언제쯤...” “성유리, 나 마음 바꿨어.” 그는 그녀의 말을 뚝 끊었다.사실 박한빈의 이런 태도 또한 성유리가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성유리는 이를 악물며 천천히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생각해 봤어. 네 눈에 내가 이렇게 비열하다면 내가 아무 문제 없이 수술을 받아주는 건 네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겠지?” “박한빈 씨, 저는...” “변명하지 마. 어제 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3화

    그리고 그때, 박한빈은 성유리가 왜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사과를 한 건지 이해가 됐다. “내가 수술받지 않을까 봐 두려워?” 박한빈은 뒤돌아 성유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성유리는 침묵했지만 그 침묵 속에서 박한빈은 답을 알아냈다. 안색이 더 어두워진 박한빈은 너무 치가 떨려 이빨을 악물었고 그 과정에서 하마터면 이가 부서질 뻔했다. 성유리의 눈에 박한빈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냉철하고 이기적인 사람, 혹은 매정한 사람일까? 박한빈은 성유리를 죽일 듯 노려보다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지만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마치 온몸에 진이 빠진 듯 휘청거리며 걷던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가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뻔한 거짓말이라고 해도 지금 그는 성유리의 입에서 다른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박한빈이 병원 밖을 나설 때까지도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걸음을 뚝 멈춘 그는 자신의 뒤를 멍하니 바라봤다. 운전기사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자 그제야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원래 계획대로 회사로 향하려 하던 박한빈은 잠시 고민하다 기사에게 말했다. “엔젤 월드로 갑시다.” 엔젤 월드, 그곳은 김서영이 현재 거주하는 곳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별장은 김서영이 열심히 가꾼 정원 덕에 더 아늑해 보였고 2년 전 성유리와 심은 나무는 이미 많이 커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박한빈이 별장 안으로 들어설 때, 김서영은 마침 나무에 비료를 주고 있었다. 인기척을 들은 김서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저쪽에 있는 삽 좀 가져다줄래요?” 박한빈은 김서영이 자신을 별장에 있는 도우미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말없이 삽을 건넸다. 손을 뻗어 삽을 건네받던 김서영은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요즘 바쁘다며? 어떻게 왔어?” 박한빈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병원엔 가봤니?” 김서영이 박한빈에게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2화

    박한빈의 말을 성유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박한빈에게 물었다. “박한빈 씨, 지금 이게 무슨 뜻이죠?” “들은 대로.” 박한빈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을 이어갔다. “아이한테 이름 지어준 거 확인했어. 네 성을 따른 것에 나도 반박하지는 않을게. 근데 아무리 네 성을 따랐다 해도 걔는 결국 내 아이야.” “하늘이가 다른 남자한테 아빠라고 부르는 꼴을 난 절대 봐주지 않을 거고.” “당연히 너도 아직은 젊으니까 재혼하겠다고 해도 말리지 않을게. 그렇지만 하늘이까지 데리고 결혼은 하지 마. 절대로 안 되니까. 알겠어?”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잘 아는 박한빈은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돌렸고 곧 꽉 쥔 성유리의 두 주먹을 발견했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고 있는지 그녀는 지금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곧 노발대발 화를 내며 자신에게 험한 말을 내뱉을 줄 알았지만 성유리는 손에 힘을 풀더니 미소까지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네요.”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하늘이는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어떻게 애 말을 철석같이 믿으세요?” “오늘 정우랑 만난 건 사실이지만 저희는 2년 동안 어떠한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제 와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수 있겠어요?” “다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신경 쓸 겨를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하는 모든 걱정들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이게 아닌데?’ 박한빈이 생각한 성유리의 반응은 절대 이게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화를 내야 한다. 꼭 박한빈과 심하게 다투고 불만을 토로해야 한다. 하지만 왜 지금 성유리는 이리도 평온하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듣고 나서도 전혀 안심되거나 기쁘지 않았다. 그때, 문득 박한빈은 자신이 전에 어디서 봤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은 자신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1화

    성유리는 하늘이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를 썼고 덕분에 아이는 이내 즐거워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퇴원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차례차례 성유리에게 말해줬고 그녀는 옆에 앉아 아이의 말을 경청해줬다.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건네줄 때에도 하늘이는 떼도 안 쓰고 순순히 약을 복용했고 부작용 때문에 힘든지 침대에 누워 성유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며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녀의 자세는 어딘가 이상했지만 아이가 너무 편해하니 바꾸지도 않았다. 하늘이는 병원 병실에 있는 것이 너무 안정감이 없는 건지 눈을 떠서도, 눈을 감을 때도 성유리가 안 보이면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저려오는 다리와 팔을 애써 주무르며 하늘이 곁을 지켜야 했고 아이가 깊은 잠에 들어서야 천천히 팔을 뺐다. “성유리 씨.” 간병인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 하늘이가 잠에 든 후, 성유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밖에 어떤 사람이 계속 앉아 있던데 아시는 분이에요?” 성유리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곧 애써 부정했다. 필경 박한빈이 어떤 사람인지 성유리는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방금 전, 하늘이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박한빈은 화가 나 바로 병원을 떠났다고 성유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병실 밖을 나가보니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성유리가 돌아왔을 때에도 그 의자에 앉아 있던 그였지만 현재는 태블릿도 보지 않은 채로 멍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박한빈에게로 다가가며 먼저 말했다. “죄송해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눈빛은 마치 왜 사과를 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하늘이가 요즘... 불안정해요. 일부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하려던 말을 이어갔고 그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물었다. “연정우 씨도 하늘이를 만났어?” 성유리는 왜 박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0화

    하늘이의 목소리는 아주 날카로웠다. 박한빈은 물론, 성유리조차 하늘이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며 아이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했다. “하늘아, 너...” “난 저 사람 보기 싫어. 엄마, 저 사람 나가게 해. 나가게 하란 말이야!” 하늘이는 떼를 쓰며 성유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작디작은 아이의 손등에는 아직도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는데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바늘이 당겨지며 피가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하늘이가 다칠까 봐 재빨리 아이의 손을 눌러 진정시키며 달랬다. “알았어. 보지 마. 하늘아, 괜찮으니까 진정해.” 말을 마친 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살짝 바라보았고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성유리는 그에게 상처 주지 않게 에둘러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예상과 달리 박한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스스로 뒤돌아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하늘이는 조금씩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성유리의 팔을 꼭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괜찮아졌어?” 성유리는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에게 물었다. “하늘이가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여기 있잖아.” 하늘이는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보더니 한참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 하늘이가 왜 그 사람을 보기 싫은지 엄마에게 말해줄 수 있어?”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아이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며 더 묻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늘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사람도 하늘이를 싫어하니까.” 그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란 듯 멈칫했다. 그리고 하늘이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하늘이가 먼저 말을 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그 사람은 하늘이를 싫어해. 그래서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잖아. 저번에도 하늘이를 붙잡고 억지로 사과하게 했잖아.” “그건 아니야. 하늘아.” 성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89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연정우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네가 하고 싶었던 말이지?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말을 마친 성유리는 그대로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연정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더니 물었다. “그래서 넌 결국 박한빈 씨를 선택한 거야? 그런데 너 그거 알아? 그는 곧 결혼할 사람이야.” ... 성유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이가 있는 병실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병실 밖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옆에는 항상 들고 다니는 노트북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는 태블릿을 들고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진지하고도 엄숙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방금 어딘가에서 급히 온 것처럼 보이는 그는 평소 항상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옷에도 약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원래 태블릿 화면만 보고 있던 그는 성유리가 그를 바라보는 순간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약 십 미터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VIP 병동 복도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고요한 나머지 성유리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잠깐 망설이던 성유리는 그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왔어?” 박한빈이 태블릿을 닫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 태도에 박한빈은 살짝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일 없으면 오면 안 되나?” 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예요. 며칠 전에는 계속 안 오셨잖아요?” “출장 다녀왔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넌 계속 날 기다렸던 거야?” 성유리는 자신의 말을 들은 그가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내렸는지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박한빈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88화

    연정우는 지금 웃고는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그의 눈빛엔 지금 냉철함과 날카로움 뿐만 남아있는 듯했다. 성유리는 그 눈빛에 당황했지만 이내 진정하며 입을 땠다.“넌 아닐 거야.” “응?” “넌 유효정 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았잖아. 근데 전에 그 사람은 납치와 상해치사죄로 벌을 받았고. 그러니까 네 목표는 이뤄졌지. 굳이 네가 유씨 가문을 신고할 필요가 없지 않아? 그래서 난 너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 성유리는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게 분석했고 연정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더욱 환하게 웃더니 물었다. “난 지금 기뻐해야 되는 건가? 네가 나를 이렇게 잘 알아주고 믿어줘서?” 자신이 지금 연정우를 믿은 건지 성유리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그저 연정우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정말 연정우가 신고한 것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박한빈 씨야.” 성유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연정우가 바로 답을 알려줬다. 연정우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웃어 보이더니 계속 말했다. “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 기억해?” “나도 알고 있었어. 유효정 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유씨 가문에서는 그 사건을 덮었을 거야. 하지만 그 일에 네가 연루됐다면 일은 달라지지. 박한빈 씨는 당연하게도 절대 그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너 대신 복수를 한 거지.” 성유리는 침묵했다. “넌 감동도 안 받아?” 연정우가 물었다. “왜 감동받아야 하는데?” “당연히 그 남자가 너를 위해 이런 복수를 한 거랑 너를 많이 아낀다는 것에 감동해야지.” 연정우가 계속 말했다. “그때 박한빈 씨에게도 일이 되게 많았을 거야. 그럼에도 네 일에 신경 쓰고 있었던 거고. 박한빈 씨는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오늘 하고 싶다던 말이 이거야?” 성유리의 물음에 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가 말하고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87화

    성유리는 간병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뒤돌아 연정우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우리 지금... 1년 만에 만난 거 아니야?” 연정우가 말했다. “그땐 너도 출산한 지 얼마 안 됐었고 나도 바쁘고 너도 바빴잖아. 그래서 너랑 제대로 말도 못 나눴네.” 병원 정원에는 마침 햇살을 만끽하러 나온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연정우와 성유리는 정자에 앉아 있었는데 몹시 여유로워 보였다. 성유리는 문득 연정우에게서 박한빈의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기억 속 늘 다정하고 착하던 연정우가 이런 태도로 자신에게 말하자 성유리는 너무 이상했다. “응.” 그녀는 한참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 장성그룹 세웠어. 너도 알지?” 연정우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응. 기사 봤어. 회사 되게 잘되는 것 같더라? 축하해.” 성유리의 대답에 연정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고마워.” “아, 네가 모를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어.” 그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경 그가 돌아갔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으니까. 전에 많이 존경하던 화가이자 몇 번 만났을 때도 늘 잘 대해주던 어르신의 부고 소식은 성유리를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연정우는 그녀의 이런 반응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병을 잘 통제하고 있었어. 근데 너도 알잖아. 할아버지는 늘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이었다는 걸.” “만약 계속 그 상태로 살아계셨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건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들었나 봐.” “자기 몸에 입혀져 있는 기저귀와 엉망진창이 돼버린 침대도 발견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나 보지. 간병인이 잠깐 방심했을 때 바로 뛰어내리셨어.” 연정우는 마치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이 아닌 것처럼 아주 담담히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전해줬다. 하지만 성유리는 잘 안다. 연정우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를 말이다. 만약 할아버지의 명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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