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사실 오늘 밤 술을 별로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연회장에서는 미처 못 느꼈지만 모든 것이 끝이나자 목이 너무 간질거려 참기 힘들었다. 성유리는 가는 길 내내 기침을 했고 호텔 밖으로 나오자 불어오는 찬 바람에 목은 더욱 간질거리고 아파왔다. 그녀의 기사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성유리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비서에게로 전화를 하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 대표님!” 어딘가 불길한 청아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성유리는 배지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안 가셨네요?” 밝게 웃으며 묻는 배지수에게 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여줬다. “기사님이 아직 안 오셨어요?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성유리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답했다. “곧 오실 거예요.” “저도 괜찮아요. 시간도 늦었는데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배지수는 성유리에게 친한 척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잡힌 손을 빼내려는 순간, 배지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저 여기 있어요!” 배지수의 목소리는 어딘가 격동돼 있었다. 성유리는 이미 배지수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예상했기에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파오는 목 때문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배지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병원 먼저 모셔다드릴까요?” 성유리는 뒤를 돌아 기침을 하더니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남자는 이미 그녀들의 앞에 서 있었다. “한빈 오빠, 저희 성 대표님 모셔다드릴까요? 어디 아프신 것 같은데 기사분도 연락이 안 된대요.”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남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응.” 박한빈은 배지수의 말에 짧게 대답을 해줬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성유리는 기침을 애써 참
게다가 지금 마침 남자랑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으니 배지수는 내심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박한빈을 등에 업고 자신의 위치를 더욱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내려야 하는 층에 도착했고 박한빈은 먼저 내리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긴장한 탓에 손에서도 땀이 나는 배지수와는 달리 박한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배지수가 박한빈을 보며 물었다. “저 먼저 씻을까요?” “응.” 박한빈은 짧은 대답만 했지만 배지수의 얼굴을 터질 듯 빨개졌다. 배지수는 방 안에 있는 박한빈을 한 번 더 힐끔 쳐다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떨려 하는 배지수와는 달리 박한빈은 전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 안에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연성의 밤이 금성의 밤보다 조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축 기술의 발전으로 연성 또한 높은 빌딩과 화려한 조명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박한빈은 창문 너머 빌딩의 불빛만 조용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성유리의 눈빛이 떠올랐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이 경계하던 눈빛과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가던 뒷모습. ‘얼마 만에 보는 거지?’ 박한빈은 한참을 생각하다 마지막으로 성유리를 본 곳이 윤청하의 장례식장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그날 박한빈도 장례식장을 찾았지만 도착했을 때 시간이 꽤 늦었던 터라 바로 제일 뒤쪽에 서 있었다. 박한빈은 아직도 떨리던 성유리의 어깨와 꽉 쥔 두 주먹을 선명하게 기억났다. 성유리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박한빈이었지만 창백한 그녀의 안색과 참으려고 이빨이 으스러질 정도로 물고 있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박한빈이 그날 성유리를 떠올리고 있을 무렵, 뒤에 있는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배지수가 수건 한 장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진한 화장을 지운 배지수의 민낯은 청순했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배지수의 눈을 보고는 순간 가슴이
박한빈은 성유리라는 이름을 김서영의 입에서 처음 전해 들었었다. 김서영은 성유리가 박성훈이 고른 박한빈의 결혼 상대라고 알려주었다. 그쯤 성씨 가문에서 애타게 찾고 있던 성유리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된 터라 김서영은 핑계 삼아 성유리를 데리러 가라는 말도 했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결혼 상대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았고 김서영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박한빈은 끝내 성유리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다 두 사람의 결혼이 가문들 사이 무언의 계약이라고 여겼다. 심지어는 결혼하는 박한빈마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김서영은 세상에서 박한빈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만약 박한빈이 한사코 거부했다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박한빈이 성유리와의 결혼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오늘에서야 박한빈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이 성유리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 말이다. 좋아하니까 성유리와 결혼을 하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전에 박한빈은 성유리와 오직 육체적인 욕망을 해결하는 사이라고만 생각했다. 필경 성유리는 자신의 아내이자 제일 잘 맞는 반쪽이라고 느꼈으니까. 육체적인 욕망을 빼고도 사실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치기 싫었지만 소유욕이 강해지면 질수록 이혼이 하고 싶었다. 그런 감정은 성유리가 아니어도 다른 여자가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박한빈은 자신의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허비하기 싫었다. 그래서 늘 성유리를 제일 먼저 선택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때면 그녀를 제일 먼저 버렸다. 성유리는 항상 박한빈이 마음대로 버려버리는 “장난감”이었다. 상인으로서 박한빈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에 능했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이 틀렸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너무 높게 평가했고 성유리가 자신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너무 낮게 평가했다. 박한빈은 문득 성유리와 갓 결혼
그때, 성유리의 목소리가 집안에서 들렸다. “민재 씨, 밖에 누구 왔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내가 잘 못 찾아온 게 아니구나.’ 성유리의 집에 낯선 남성이 있다는 사실을 안 박한빈은 피식 웃더니 뒤돌아 떠나버렸다. ‘좋아한다면서 가능성이 없냐고 물을 때는 언제고 지금 저러고 있어?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만약 자신에게 깊은 감정이 있었다면 그렇게 깔끔하게 이혼을 해줄 리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박한빈의 기억이 맞는 거라면 이혼 전, 성유리는 몰래 수많은 피임약을 복용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정말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런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성유리는 자기감정을 너무 잘 아는 여자여서 연성에서도 승승장구를 한다고 확신했다. 그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여기저기 웃으며 인사를 하는 성유리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박한빈은 제일 먼저 봤었다.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다면 박한빈은 영상 속 성유리와 자신이 알던 성유리가 동일 인물이라고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전에 함께 참여했던 가면무도회에서도 신나게 놀던 성유리가 떠올랐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 모습들이 전부 성유리의 진짜 얼굴이고 자신과 생활할 때 얼굴은 “가면”을 쓴 채 감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어두운 안색으로 차에 올라타고는 기사에게 말했다. “출발하세요.” 그의 안색을 본 기사는 무슨 일인지 물어볼 용기조차 없어 묵묵히 시동을 걸었다. 한참 뒤, 박한빈은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먼저 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성유리에 관련된 일들은 저한테 보고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드림 타운에 있는 집도 이젠 내놓으세요.” 자신의 할 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시각, 성유리의 집. 정민재는 문을 닫고도 벨을 누르던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지만 이름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박한빈은 이 세상에 어떤 규칙들이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규칙은 바로 늘 속으로 행여나 진짜로 발생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일은 꼭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마주치기 싫어 요리조리 피해 다녀도 꼭 어딘가에서 의도치 않게 만나게 되는 규칙도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 시각,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오늘 여자의 옷차림은 평소보다 더 정갈하고 깔끔했다. 연한 파란색의 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고 머리도 낮게 묶은 여성은 화장도 어젯밤보다 더 연하게 했다. 하지만 여성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앞에 있는 남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 대표님?” 옆에 있던 사람은 박한빈의 지시를 기다리다 가만히 서 있는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박한빈은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저분 조 대표님 아니에요?” 옆에 있던 사람이 박한빈의 시선을 따라 쳐다본 곳에서 조 대표와 그 여성을 발견했다. 성유리와 잔을 부딪치며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박한빈의 옆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이내 박한빈을 발견한 남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성유리는 사실 아까부터 박한빈을 발견했지만 못 본척 하고 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이곳에서 마주칠 줄 몰랐는지 미간이 찌푸려졌고 인사조차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성유리는 박한빈과 인사를 하기 싫었지만 결국 남성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박 대표님도 식사하시러 오셨습니까? 이것 참 우연이네요.” 조 대표는 박한빈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우리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박 대표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랑 함께 식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게...” 박한빈이 뭐라 하기도 전,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필경 박한빈이 연성에 머무는 시간이 짧았으
하지만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속을 꿰뚫어 보는 사람처럼 그녀가 입을 떼기 전 먼저 말을 꺼냈다. “조 대표님이랑 성 대표님 두 분 많이 친하십니까?” 그의 말에 룸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만 껌뻑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문득 박한빈과 성유리의 관계가 떠올랐다. 조 대표는 등 뒤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 입을 떼지도 못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친구 사이예요.” “그러시구나.” 박한빈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다 똑같으니까 서로 어색해하지 맙시다.” 말을 마친 박한빈이 술잔을 들었고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눈치껏 같이 술잔을 들 수밖에 없었다. 시원하게 술을 마신 박한빈은 또다시 조 대표에게 말을 걸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남원의 항목이 조 대표님 회사 것이죠?” “네. 맞습니다.” 조 대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박한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 박 대표님 덕분이죠.” “저는 그 항목이 괜찮아 보이더군요. 마침 저도 비슷한 개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한빈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현 대표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성유리도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조 대표는 현 대표와 경쟁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박한빈의 말에 그저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그러십니까? 전에는 왜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못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쉽지만 이번 저희 회사의 중점은...” “지화 개발. 조 대표님은 그저 저랑 협업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돈을 많이 투자하실 필요도 없는데... 혹시 저랑 함께 일할 의향이 없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조 대표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을 했지만 다른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현 대표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박한빈에게 말했다. “박 대표님, 그 항목은...” “현 대표님
사실 성유리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이 일부로 조 대표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어 성유리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성유리는 도대체 박한빈이 자신한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러는지 몰랐다. 하지만 성유리는 조 대표처럼 체면을 차라기 좋아하는 사람이 오늘 박한빈에게 당한 일을 언젠가 자기한테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억지로라도 일어서야만 했다. 박한빈도 성유리가 나서자 입을 꾹 닫았고 술잔을 손에 들고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성유리는 또다시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는 말했다. “마침 현씨 가문 성립 10주년을 기념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으니 제가 먼저 오늘 이 자리에서 축하드릴게요.” 현 대표는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지만 술잔을 손에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 대표님도 참 별말씀을.” 박한빈의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듣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성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뗐다. “성 대표님과 현 대표님 사이가 아주 각별해 보입니다?” “현 대표님이 저를 잘 챙겨주셔서 그래요.” “그렇다면 저와 현 대표님 사이 협업에 성 대표님이 작은 제안을 해주실 수도 있겠군요. 방금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요즘 시간이 있으셔서 제가 모르는 일들을 알려줄 수 있다고.” 웃으며 말하는 박한빈에게서는 범접하지 못할 포스가 철철 흘러넘쳤다. 성유리는 처음으로 박한빈이 업무에 관해 토론을 하는 모습을 봤지만 그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하찮은 개미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다들 박한빈의 눈치를 살피며 긴장하고 있었다.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박 대표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 영광이네요.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현 대표님을 대신해 담보를 해줘야겠어요.” “하지만 저도 제 자신을 잘 아는 타입이라 여기서 무슨 말을 하던 다 소용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주량은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성유리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자 술병 채로 손에 들고는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박한빈이 상 밑에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 화장실에 다녀온 성유리는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지나가던 직원이 성유리의 상태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그녀를 챙기려 했지만 성유리는 직원을 밀어내고는 쓰레기통에 마구 구토를 했다. 알코올의 쓴맛과 독한 냄새가 위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성유리는 위액까지 깨끗하게 토해냈다. 아직 기침이 제대로 치료되지도 않았던 터라 성유리는 콧물과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오늘 단아하고 청순한 느낌으로 신경 써서 한 화장마저 다 벗겨졌지만 성유리는 그런 것을 상관할 겨를도 없었다. “괜찮으세요? 119라도 불러드릴까요?” 옆에 있던 직원은 이런 경험이 풍부한 탓에 성유리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는 핸드폰을 꺼내 신고하려고 했다. “아니요. 저 괜찮아요.” 성유리가 힘겹게 말하며 직원을 말렸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절대 여기서 쓰러지지는 않을 테니까.” 성유리는 직원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애를 써 몸을 일으키며 비틀비틀 밖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오늘 안 신던 하이힐까지 신었고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몸을 가누기 힘들어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화분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성유리는 생각보다 고통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무언가에 맞은 듯 심한 고통이 밀려오는 머리보다 위가 더 아팠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런 곳에서 쓰러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필경 이곳에는 성유리를 아는 사람도, 성유리가 아는 사람도 없었기에 쓰러지면 자신을 그 누구도 챙겨주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남자의 손이 다가오는 순간,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그 남자는 성유리를 더욱 꽉 잡았다. 그때,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고 그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
약을 다 먹은 후 잠에 든 성유리는 그날 오후까지 자버렸다.그 덕에 휴대폰에 쌓인 메시지들을 저녁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메시지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홍지은이 올린 사진 속 사람이 성유리가 맞냐고 물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금성에 돌아온 것을 확인하며 언제 한번 만나 밥을 먹자고 했다.하지만 사실, 성유리가 금성에 돌아온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지난번 사하나의 장례식 때도 이미 업계 사람들 대부분이 참석했었으니까.다만, 그때 성유리는 사씨 가문 사람들에게 쫓겨난 신세였다.심지어 그 자리에서 불길한 존재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이렇게 태도를 180도 바꾸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기회주의적으로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고 손익을 따져 움직이는 건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게다가 메시지를 보낸 이들의 이름조차 성유리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았다.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예전의 성유리였다면 아무리 그들이 싫어도 박한빈의 아내라는 신분 때문에 억지로라도 상대해 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이 어떻게 나오든 이젠 상관없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본 뒤,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옆에 툭 던져버렸다.그때, 하늘이가 성유리를 찾으러 방에 들어왔다.아직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은 터라 혹시라도 다시 옮길까 봐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문가에 서 있었다.“엄마, 괜찮아?”하늘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많이 아파?”성유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괜찮아. 너는 어때?”“나도 괜찮아! 의사 아저씨가 말했어. 내일이면 완전히 나을 거래! 봐, 나 오늘도 이렇게 멀쩡해!”말을 마친 하늘이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두 번이나 뛰어 보였다.그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그건
“하늘이가 아팠을 때도...”말을 꺼내던 박한빈 스스로 말을 뚝 멈췄다.박한빈은 알고 있었다. 이미 그 일로 인해 성유리에게 영원히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성유리를 꼭 끌어안아야만 했다.그래야만 그녀가 정말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서로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박한빈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때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그러나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그때 내가 잘못한 거 알아.”박한빈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땐 그냥... 너무 화가 났고 받아들이기 싫었어.”“네가 내게 한 번만 져주길 바랐어. 처음 호텔에서도... 난 네가 내게 순순히 져주길 바랐다고.”“그때 네가 내 앞에서 돌연히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했을 때 난 마치... 팔려 가는 기분이었어.”“그래서 일부러 버텼던 거야. 그냥 네가 나한테 한 발자국만 양보해 주길 바랐을 뿐이었어.”박한빈은 고개를 푹 숙이며 계속 말했다.“그때 난 정말 형편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하늘이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도박을 하듯 행동해서는 안 됐어.”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봤다.“하지만 유리야, 이거 하나만 믿어 줘. 나도 우리 아이를 사랑해.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네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그의 진심 어린 말에도 성유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사실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지금 자신이 내린 선택과 현재의 태도가 과거의 신념과는 어긋난다는 것을.늘 스스로를 다독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홍지은이 올린 사진에는 성유리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뒤로 경매장에서 산 조명이 너무 잘 보였다. 업계 사람들은 익명의 구매자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실 다들 눈치 차리고 쉬쉬하고 있을 뿐이었다.거기에 더해 성유리는 전에 이런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많은 사람들은 성유리의 옛날 사진과 홍지은이 올린 사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곤 그 사람이 정말 성유리가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그렇게 성유리와 박한빈의 사이는 순식간에 퍼졌지만 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원래 약간의 감기 기운이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심부터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도우미가 다시 박한빈에게 연락했을 때, 그는 의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의사는 빠르게 성유리의 체온을 재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병원으로 향해 피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피검사요?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가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에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닙니다. 사모님의 지금 상황으론 감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 맞는 것 같은데 피검사를 하면 다른 상황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다른 상황이요?”박한빈은 의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때, 가만히 누워있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의사 선생님, 걱정마세요. 저 임신 안 했어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한껏 당황하며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주 차분한 말투로 의사에게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병원 안 가도 돼요. 바로 약 처방 해주세요.”“아... 네.”의사는 잠시 주춤거리다 결정을 내린 듯 성유리에게 하려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떤 상황엔 생리주기가 일정하다고 해서 임신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임신초기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피임을 하지 않으셨다면...”“저 했어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계속 피
그의 말에 항상 생글생글 웃던 홍지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이 문제는... 사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필경 전에 성유리가 박한빈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에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으니 말이다.그래서 홍지은은 성유리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성유리는 지금 엄연히 박한빈의 안사람이자 사모님이다.처음에 이 소식을 접해 들은 홍지은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이 정말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확신했다.게다가 성유리는 전에 항상 박한빈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각종 모임이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홍지은은 성유리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어젯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홍지은은 여전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다 박한빈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지금 그의 신분과 지위로 만약 성유리와 다시 만난다는 일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그리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성유리를 지켜주고 있었다.이건 어떠한 감정일까?박한빈을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적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성유리만 선택했다.그제야 홍지은은 성유리에 대한 박한빈의 감정을 알아차렸다.그게 아니면 왜 어젯밤부터 끈질기게 성유리와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겠는가.전에 홍지은이 알던 평범하기 짝이 없던 성유리라면 그녀는 자신이 사과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박한빈이 이렇게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맞출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었다.그래서 그의 말에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 있다 한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전에 유리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래서 사과를 못했죠.”“그러십니까?”박한빈은 살짝 미소 지으며 홍지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그 미소가 무엇보다 더 두려웠다.
홍지은은 구렁이 담 넘듯이 능글맞게 핸드폰을 꺼내더니 성유리에게 반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셔터를 눌렀다.성유리는 셔터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홍지은과의 거리를 더 넓혔다.“아, 맞다. 어젯밤 제가 했던 말은 다 진심이었어.”홍지은은 원하던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난 뒤,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전에... 내가 너무 어려서 철이 안 들었나 봐. 게다가 그때는 나랑 유정 씨 사이가 꽤 괜찮았잖아?”“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유정 씨가 뭐라고 하면 그 말을 다 믿었어. 근데 누가 알기나 했겠어? 유정 씨가 그렇게 나쁜 *이라는 걸.”“뭐가 어떻게 됐든 내가 유리 너한테 큰 상처를 준 건 맞아. 그래서 진심으로 정중하게 사과하고 싶어. 정말... 미안해.”홍지은은 몸을 일으키더니 성유리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려고 허리를 굽혔다.그녀의 행동에 성유리는 행여나 임산부인 홍지은이 자기 배에 머리를 부딪힐까 봐 두려워 얼른 막았다.“이미 다 지나간 일이에요.”홍지은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막고자 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정말? 이 말은 나를 용서한다는 말이야?”성유리의 대답에 홍지은은 잔뜩 흥분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진짜 잘 됐다! 사실 전부터 알고 있었어. 유리 네가 유정 씨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친구로 삼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것도 알았어.”“필경 우리야말로 진짜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 아니겠어? 한 사람 성격이 어떤지, 인성이 어떤지는 사실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거지.”“네가 진짜 성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 우리 둘이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어야 해.”홍지은은 성유리에게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마치 그녀가 물기를 기다리는 어부처럼.성유리가 아무리 자기 손을 빼내려고 애를 써도 홍지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원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성유리기에 더는 홍지은을 마주할 힘이 없어졌다.그 순간, 다행히도 박한빈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박...
박한빈은 성유리가 보내는 무언의 “나무람”을 못 본 척하며 온도계를 다시 손에 넣었다.“음, 확실히 열은 없네. 그냥 감기 초기 증상인가 봐.”박한빈은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뒤돌아 바로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그때, 아래층에 있던 도우미 한 명이 올라와 박한빈에게 말했다.“박 대표님, 손님 한 분이 오셨습니다.”박한빈은 그 말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누군데요?”“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분 성이 홍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모님과 친구 사이라고 하시던데...”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힐끔 쳐다봤고 그녀는 금세 찾아온 손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홍지은 씨?”“홍지은이 누구야?”박한빈의 물음에도 성유리는 침묵했다. 그러다 그녀의 눈빛을 발견한 순간, 그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는 홍지은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제야 떠올랐다. 그녀는 바로 전에 성유정이랑 잘 어울려 다니던 친구였다.이런 일은 이미 박한빈과 성유리 사이에서 잊힌 지 오래였기에 그는 홍지은이 이런 방식으로 다시 나타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홍지은 씨가 왜 너를 찾아온 거지?”박한빈은 얼른 화제를 돌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저도 몰라요.”“그럼 그냥 가라고 하자.”박한빈은 금세 결정을 내렸다.‘괜히 그때 일이 생각나게 하면 안 돼. 아니면 또 화낼 테니까.’그는 도우미에게 찾아온 손님을 떠나보내는 말을 했지만 돌아온 도우미는 많이 난감해하며 말했다.“그게... 손님께서 떠나기를 거부하십니다. 무조건 사모님을 만나 봬야 한다면서...”“게다가 임산부인 것 같습니다.”도우미의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고민하다 결국 한번 만나기로 결정했다.“제가 가볼게요.”“아니면 내가 갈까?”만약 예전 같았으면 박한빈은 바로 내려가 손님을 내보냈겠지만 행여나 전에 일들에 연루될까 아무런 행동도, 선택도 쉽사리 내리지 못했다.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 박한빈의 말에도 그녀는 침묵했고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바로 걸음
홍지은과의 우연한 만남은 성유리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만약 오늘 하늘이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성유리가 급히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마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전에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는 하늘이기에 성유리는 아이가 작은 병에 걸리기만 해도 극도로 긴장됐다.다행히 오늘 의사가 그저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뿐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성유리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그러던 중, 홍지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밥이나 먹을까?”성유리는 그녀의 제안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필경 두 사람 사이는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홍지은은 눈치가 없는 건지 계속 성유리에게 말했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지. 근데 그거 다 성유정한테 속은 거야. 나도 나중에 알아차렸어. 그때... 너한테 못 할 짓을 했다는 걸.”“그래서 정식으로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홍지은의 사과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성유리는 마땅히 거절할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제가 요즘 많이 바빠서요.”“그냥 밥 한 끼 먹는데 그렇게 오래 안 걸리잖아.”홍지은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유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말을 내뱉었다.“아니면... 내가 그렇게 싫어? 밥도 같이 먹기 싫을 정도로?”“아니요. 너무 멀리 가셨네요.”성유리가 차분한 말투로 그녀의 말에 대답을 이어 나갔다.“전 홍지은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같이 밥 한 끼 먹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정말 없기 때문에.”“다른 일 없으시면 먼저 끊을게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는데 다행히 홍지은에게서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성유리는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바꿔놓고 하늘이의 옆에 살며시 다가가 누웠다.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함께 잠에 든 적이 없는 성유리지만 아이는
신영지는 홍지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대답을 이어갔다.“그리고 오늘은 그저 평범하게 다 같이 차나 마시며 간단한 일상 대화를 나누는 날이에요.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나눌 장소가 아니고.”“그럼 저희 다시 날 잡고 얘기 나눌까요?”홍지은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며 신영지에게 물었다.“연락처가 어떻게 되세요? 통화가 불편하시면 문자라도...”신영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사람이 먼저 말했다.“아이고. 곧 사진 찍는데 두 분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나누세요? 저기 키 크신 분, 뒤에 분 막으셨어요. 뒤로 가서 서세요.”그 사람이 말한 키 큰 분은 바로 홍지은이었다.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었지만 옆에 사람들이 하나둘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사진은 금방 찍었는데 홍지은은 자신의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표정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러나 당연하게도 홍지은의 상태가 어떤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신영지는 홍지은에게 연락처를 주지도 않았고 캐톡 친구를 추가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사진을 다 찍고 나서 바로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로 인해 며칠간 할 말을 준비한 홍지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모임 장소인 찻집에서 나온 홍지은은 남편이 이미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때? 신영지 씨는 봤어? 말은 걸었고?”딱 봐도 야윈 남자가 홍지은에게 다가와 문을 열어주며 묻자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말하긴 뭘 말해? 오늘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말도 안 걸어준다고.”“그래? 그럼 어떡하지? 공장 일... 마땅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면 정말 끝이야.”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홍지은에게 계속 물었다.“넌 다른 생각을 해볼 생각도 안 하는 거야?”“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데?”홍지은은 남자의 말에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다.“네가 남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