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연휴가 끝나고 첫 출근 일.박한빈은 이날이 바로 성유리 사건의 첫 재판 날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곧 그쪽에서는 재판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성유리와 지석민 사이에 양해각서를 썼다고 했는데 박한빈은 믿을 수 없었다.지석민이 성유리에 대한 상처는 그날 칼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온 것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에 나쁜 기억을 심어준 것도 있었다.박한빈은 그날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지석민을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는 냉철한 사람이지만 말이다.그래서 성유리가 반격한 것에 대해 그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지석민 같은 사람은 응당... 지옥에 가야 한다.그런데 지금 성유리가 그와 화해했다고 하다니?박한빈은 믿지 않았고 심지어 처음에는 성시원이 그녀를 협박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성유리에게 또 무슨 약점이 있을까?박한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양어머니가... 병원에 잘 있으니 말이다.“박 대표님.”박한빈은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훈은 그의 맞은편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박한빈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방금 접한 소식에 의하면 성유리 씨는 이미 보석으로 풀려났고 다른 문제도 없을 겁니다. 내부 소식에 의하면 성시원 회장님은 이미 성유리 씨에게 주식 8%를 넘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성 지사의 부대표로 임명되어 한 달 후에 정식으로 부임할 거라고 했습니다.”서훈의 말이 끝났지만 박한빈은 잠자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상황을 모두 종합해보니 그 이유가 매우 분명했다. 원래 성유리는 지석민을 용서할 필요가 없었지만 성시원과의 거래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러면 그녀가 이번 일로 성시원과 거래했단 말인가?아니... 이뿐만이 아니다.이번 사건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지석민인데 성시원이 왜 그를 위해 이런 희생을 했을까?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원인은... 하지만...박한빈은 다른 일이 생각나서 벌떡 일어섰다.“대표님...”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성유리도 간병인의 동작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어리둥절했다가 곧 옆에 있던 간병인을 쳐다보며 말했다“먼저 나가주세요.”“아... 네.”간병인은 멍하니 대답했다. 비록 박한빈이 두려웠지만 잘생긴 얼굴에 간병인은 저도 모르게 몇 번 쳐다본 후 몸을 돌려 나가며 문을 닫아주었다.박한빈은 가만히 선 채 쌀쌀하게 성유리를 보며 아무런 말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성유리는 잠시 그를 바라본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박 대표, 다른 용건이 없으면 그만 나가주세요. 저는 휴식이 필요해요.”“너 미쳤어?”박한빈은 그제야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알아요.”성유리가 냉정하고 분명한 대답을 내뱉았다.“고작 성리 그룹의 쥐꼬리만 한 주식을 위해서야? 이 수술이 몸에 어떤 위험을 줄 수 있는지 몰라?”“알고 있어요.”“알면서도 왜 그래?”“대표님께서 말한 것처럼 그 쥐꼬리만 한 주식 때문이에요. 안 돼요?”성유리가 말했다.“돈을 갖고 싶다면 그때...”“당신 돈은 싫어요. 그리고 저는 성씨이고 저분은 엄마이니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해요.”성유리는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박한빈은 그녀를 마주 보다가 피식 웃었다.“누구를 속이는 거야? 정말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면 넌 이미 이 수술에 동의했고 오늘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거야.”“제 마음이 변했다면 안 될까요? 그리고 박 대표님, 박 대표님은 무슨 입장으로 저의 선택을 간섭하는 거죠?”박한빈은 말문이 막혔다.성유리는 그곳에 앉아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우린 이미 이혼했고 더는 얽힌 게 없어요. 박 대표님, 여기에 나타나지 말아야 했어요.”그렇다. 박한빈은 그곳에 서 있었지만 성유리의 말은 마치 가늘고 긴 바늘처럼 그의 포만된 정서를 찔러놓는 것 같았다.그는 오기 전에 여러 가지 상황을 예상해 봤다. 만약 성유리가 성시원이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녀를 도와주려고 생각했다.그러나 성유리의 말은 그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고 간 다음 날 밤, 그녀는 병상에서 옆 병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성유리는 침대에서 일어난 후에야 윤청하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오늘 저녁 이후로 그녀의 상황이 나빠졌는데 지금은... 급격히 악화했다.성시원은 이미 도착했지만 성유정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구급실 밖에 앉아있는 성유리를 본 그는 달려들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뭐래?”성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응급 처치중이에요.”“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갈 때까지 분명히 멀쩡했어! 혹시 네가 무슨 말을 해서 자극받은 게 아니야?”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성시원은 이 정서를 발설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찾았다.성유리는 덤덤하게 그를 바라봤다.“병실에 CCTV가 있죠? 직접 확인해 보세요.”차분히 말하는 성유리를 보며 성시원은 말문이 막혔다.곧 응급실 문이 열리자 성시원은 쏜살같이 뛰어갔다.“환자분이...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선생님의 말씀에 성시원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무슨... 무슨 뜻이에요? 이식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이미 동의했으니 당장 하세요!”말을 마친 성시원은 성유리를 앞으로 힘껏 밀쳤다.그의 힘이 너무 커서 성유리는 앞으로 몇 걸음 휘청거리다가 겨우 옆에 있는 간호사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회장님, 진정하세요. 저희가 살펴본 바로 환자의 지금 상태로는 이식수술을 해도 별 의미가 없어요. 오히려 이식수술에 따른 거부반응이 고통을 가중할 수 있으므로...”성시원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녹초가 되어 걸상에 털썩 주저앉았다.이때에야 성유리는 그도 많이 늙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아내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았고 이런 사랑은 옆에 있는 사람도 감동하게 했다.성유리는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의료진도 감동하는 것을 보았다.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의 결과물’인 성유리는 외부인처럼 그곳에 덤덤히 있었을 뿐 가슴속에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이때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엄마...”성시원은
성유정은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성유리의 차분한 모습과 비교하면 성유정은 날뛰는 어릿광대처럼 보였다.안색이 더 나빠진 성유정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성유리가 계속해서 말했다.“내가 너라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볼 거야.”“무슨 뜻이야? 뭘 하라는 거야?”“너를 보호하는 그분이 죽어가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어?”성유리가 천천히 말했다.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반박하려고 했지만 입가에 맴도는 말을 삼켜버렸다.성유리가 말한 사람은 당연히 윤청하였다.지난 몇 년 동안 비록 성시원이 성씨 가문의 주인 노릇을 했지만 성유리와 성유정 사이의 일에서는 줄곧 윤청하의 태도가 더 중요했다. 성시원은 줄곧 윤청하의 뜻에 따라 두 사람을 대했다.그런데 지금 윤청하가 곧 죽게 되었고 이는 성유정의... 유일한 우세였다.여기까지 생각한 성유정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진 채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야? 아빠는 너의 말을 믿지 않을 거야. 아빠는...”“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아빠의 딸이라는 것은 사실이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성유리의 말을 들은 성유정은 잠자코 있었다.성유리는 멍해진 성유정을 보며 귀띔했다.“진무열이 곧 퇴원할 거지? 너희는 약혼한 지 꽤 됐는데 이참에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면 아마 기뻐할 거야.”‘그 사람?’성유정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성유리가 옆을 지나갈 때야 문득 깨달았다.“장난해? 그 사람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어! 하지만 이건 내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이야.”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정은 성시원이 대뜸 허락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진씨 가문에서도 다른 의견이 없자 그녀와 진무열의 결혼식은 이렇게 준비하기 시작했다.맞춤 웨딩드레스도 없었고 로맨틱한 세기의 결혼식은 더더욱 불가능했다.심지어 결혼식장도 임시로 만들어져 결혼식
이번 결혼식은 비록 급하게 치렀지만 초대할 사람은 모두 초대했다.성유리는 언니로서 성시원과 함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 샴페인 색 롱 드레스를 입고 긴 생머리를 올려 하얗고 늘씬한 목덜미를 드러냈고 단아한 메이크업으로 세련미를 더했다.그녀의 옷차림은 매우 점잖았지만 얼마 전 일로 인해 주위에는 여전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들은 성유리의 앞에서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한 눈빛은 여전히 예리한 칼처럼 사람들을 뚫고 그녀에게로 향했다.오기 전에 이런 상황에 대해 충분히 예상했던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인사했다.이때 원유진이 나타났다.원유진은 오늘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신부의 눈치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은은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었고 화장도 여느 때보다 더 정교하고 화려했는데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신부를 보기도 전에 오히려 먼저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성유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은 태도로 그녀에게 웃으며 인사했다.“무슨 염치로 여기에 있어? 살인범이 여기에 손님 맞이하다니? 재수 없어!”원유진이 쌀쌀하게 웃었다.그녀의 말에 성시원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원유진, 말을 가려서 해.”“내 말이 틀렸어? 얼마 전 뉴스에서 보도된 사실이잖아.”원유진은 그녀를 힐끗 훑어보며 계속해서 말했다.“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너 또 박한빈에게 차였다며? 불쌍하네. 하지만 이 세상은 원래 그래. 네 것이 아닌 물건은 네가 갖은 수단을 써서 얻으려고 애써도 여전히 네 것이 아니야.”원유진의 목소리는 낮은 편이 아니었고 마침 문 앞에 서 있어서 주위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원유진은 더 의기양양해서 턱을 쳐들고 성유리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은 여자라면 다 참을 수 없기에 그녀는 성유리가 반드시 화를 낼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의외로... 성유리는 차분했다.성유리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원유진을 바라봤다.“난 오히려... 가졌다가 잃는 것이 누군가
성유리는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원유진이 들어오고 나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음 손님을 맞이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곳으로 오신 것을 환영...” 다음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성유리는 인사말을 제대로 못 끝냈고 표정도 조금 굳어갔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내 정신을 다잡아 더욱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도착했는지도 몰랐다. 박한빈의 뒤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아하니 방금 원유진과 성유리가 나눈 대화를 그가 똑똑히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성시원에게로 다가가더니 악수를 청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두 사람은 짧은 악수를 마치고 빠르게 서로에게서 손을 뗐다. 성유리는 박한빈을 오래 쳐다보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다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 오늘 찾아온 손님은 족히 천 명이 넘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한 성유리는 얼굴 근육이 아파 나기까지 했다. 뒤에 있는 행사들은 성유리가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 틈을 타 복도로 나갔다. 잠시 바람을 쐬며 숨을 고른 성유리는 가방 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려 했지만 라이터를 두고 나온 사실을 발견했다. 가방 안을 샅샅이 더 뒤졌지만 라이터는 보이지 않았고 성유리는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은 성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급히 뒤돌아보느라 손에 들린 담배도 숨기지 못한 성유리를 박한빈이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비록 이젠 그의 눈빛이 어떻든 신경을 쓰지 않는 성유리였지만 박한빈이 미간을 찌푸릴 때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박한빈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박 대표님이 왜 지금 이 시간에 여기 계시는 거죠? 안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성유리는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손에 들린 담배를 끊어 버린 뒤 쓰레기통
그 시각, 연회장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급히 진행된 결혼식이었지만 아무런 실수도 없이 무사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덧 신랑과 신부가 서로 반지를 교환하는 시간이자 이 결혼식의 하이라이트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성유정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갑자기 말했다. “오늘 결혼식을 올리려는 선택을 누가 했는지 알아요?” 진무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유정이 또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성유리, 우리 언니가 그랬어요.” “아직 우리 언니 좋아하죠? 결과는? 제 기분 좀 망치겠다고 무열 오빠까지 끌어들였잖아요.” 진무열은 성유정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순서대로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성유정은 덤덤한 그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빨을 꽉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언니는 제가 시집가면 성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봐요. 미련하기도 하지? 그냥 우리 아빠한테 제 이런 꼴을 보게 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요. 기다려요. 제가 가져야 하는 물건은 어떻게든 다 뺏어오겠으니까. 그래서 오빠는...” 성유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성유정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저녁에 있는 성유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왔던 윤청하는 이미 성시원의 품에 안겨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다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했고 성시원은 이성을 잃고 의사를 부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제일 “효녀”인 성유정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역시 내 결혼식이 순조롭게 끝날 리가 없지.’ 성유정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사방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내 입구 쪽에서 성유리를 발견한 성유정은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을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두 손을 꼭 쥐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가식적인 년! 더러
성유리는 진무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과 영정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가족들은 윤청하가 젊었을 적에 찍어둔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걸어두었다. 성유리는 사진 속 윤청하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장례식 당일, 금성에는 갑자기 큰 비가 쏟아졌고 기온은 작년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성유리는 두꺼운 외투로 갈아입고 묘지 앞에 서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청하의 유골함은 빠르게 묘지 안에 안장되었고 그녀의 혼을 기리는 목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성유리는 윤청하가 정말 떠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성유리가 그녀에 대한 사랑과 원망의 감정은 윤청하의 죽음을 따라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때, 성유리는 윤청하가 눈을 감는 그날이 떠올랐다. 미안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청하는 성유리를 불러 자신의 앞에 세워두었다. 그때 윤청하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그날의 공기마저도 성유리는 다 기억이 났다. 성유리를 잃어버리기 전에 윤청하는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보살펴줬었다. 늘 성유리를 안고 잠에 들었고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흐르는 땀도 닦아주던 윤청하에 대한 기억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무 말도 없이 성유리를 묵묵히 쳐다보던 윤청하는 눈을 감았고 성유리는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빗방울들은 점점 거세게 떨어져 성유리의 옷깃을 적셨지만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는 성유리의 옆에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성유리는 스스로 두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그쳤고 장례는 빠르게 끝이 났다. 손님들을 다 돌려보낸 뒤, 성시원이 성유리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나랑 같이 집에 가지 않겠니?”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성유정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성유정은 성유리를 죽일 듯 노려보았고 성유리는 성시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같이 가요.”
그의 말에 항상 생글생글 웃던 홍지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이 문제는... 사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필경 전에 성유리가 박한빈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에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으니 말이다.그래서 홍지은은 성유리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뭐라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성유리는 지금 엄연히 박한빈의 안사람이자 사모님이다.처음에 이 소식을 접해 들은 홍지은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이 정말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확신했다.게다가 성유리는 전에 항상 박한빈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의 신분으로 각종 모임이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홍지은은 성유리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어젯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홍지은은 여전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다 박한빈이 한 일이라는 사실을.지금 그의 신분과 지위로 만약 성유리와 다시 만난다는 일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그리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성유리를 지켜주고 있었다.이건 어떠한 감정일까?박한빈을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적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성유리만 선택했다.그제야 홍지은은 성유리에 대한 박한빈의 감정을 알아차렸다.그게 아니면 왜 어젯밤부터 끈질기게 성유리와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겠는가.전에 홍지은이 알던 평범하기 짝이 없던 성유리라면 그녀는 자신이 사과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박한빈이 이렇게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맞출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었다.그래서 그의 말에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해 있다 한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전에 유리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래서 사과를 못했죠.”“그러십니까?”박한빈은 살짝 미소 지으며 홍지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그 미소가 무엇보다 더 두려웠다.
홍지은은 구렁이 담 넘듯이 능글맞게 핸드폰을 꺼내더니 성유리에게 반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셔터를 눌렀다.성유리는 셔터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홍지은과의 거리를 더 넓혔다.“아, 맞다. 어젯밤 제가 했던 말은 다 진심이었어.”홍지은은 원하던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난 뒤,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전에... 내가 너무 어려서 철이 안 들었나 봐. 게다가 그때는 나랑 유정 씨 사이가 꽤 괜찮았잖아?”“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유정 씨가 뭐라고 하면 그 말을 다 믿었어. 근데 누가 알기나 했겠어? 유정 씨가 그렇게 나쁜 *이라는 걸.”“뭐가 어떻게 됐든 내가 유리 너한테 큰 상처를 준 건 맞아. 그래서 진심으로 정중하게 사과하고 싶어. 정말... 미안해.”홍지은은 몸을 일으키더니 성유리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려고 허리를 굽혔다.그녀의 행동에 성유리는 행여나 임산부인 홍지은이 자기 배에 머리를 부딪힐까 봐 두려워 얼른 막았다.“이미 다 지나간 일이에요.”홍지은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막고자 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정말? 이 말은 나를 용서한다는 말이야?”성유리의 대답에 홍지은은 잔뜩 흥분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진짜 잘 됐다! 사실 전부터 알고 있었어. 유리 네가 유정 씨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친구로 삼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것도 알았어.”“필경 우리야말로 진짜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 아니겠어? 한 사람 성격이 어떤지, 인성이 어떤지는 사실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거지.”“네가 진짜 성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 우리 둘이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어야 해.”홍지은은 성유리에게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마치 그녀가 물기를 기다리는 어부처럼.성유리가 아무리 자기 손을 빼내려고 애를 써도 홍지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원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성유리기에 더는 홍지은을 마주할 힘이 없어졌다.그 순간, 다행히도 박한빈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박...
박한빈은 성유리가 보내는 무언의 “나무람”을 못 본 척하며 온도계를 다시 손에 넣었다.“음, 확실히 열은 없네. 그냥 감기 초기 증상인가 봐.”박한빈은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뒤돌아 바로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그때, 아래층에 있던 도우미 한 명이 올라와 박한빈에게 말했다.“박 대표님, 손님 한 분이 오셨습니다.”박한빈은 그 말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누군데요?”“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분 성이 홍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모님과 친구 사이라고 하시던데...”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힐끔 쳐다봤고 그녀는 금세 찾아온 손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홍지은 씨?”“홍지은이 누구야?”박한빈의 물음에도 성유리는 침묵했다. 그러다 그녀의 눈빛을 발견한 순간, 그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그는 홍지은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제야 떠올랐다. 그녀는 바로 전에 성유정이랑 잘 어울려 다니던 친구였다.이런 일은 이미 박한빈과 성유리 사이에서 잊힌 지 오래였기에 그는 홍지은이 이런 방식으로 다시 나타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홍지은 씨가 왜 너를 찾아온 거지?”박한빈은 얼른 화제를 돌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저도 몰라요.”“그럼 그냥 가라고 하자.”박한빈은 금세 결정을 내렸다.‘괜히 그때 일이 생각나게 하면 안 돼. 아니면 또 화낼 테니까.’그는 도우미에게 찾아온 손님을 떠나보내는 말을 했지만 돌아온 도우미는 많이 난감해하며 말했다.“그게... 손님께서 떠나기를 거부하십니다. 무조건 사모님을 만나 봬야 한다면서...”“게다가 임산부인 것 같습니다.”도우미의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고민하다 결국 한번 만나기로 결정했다.“제가 가볼게요.”“아니면 내가 갈까?”만약 예전 같았으면 박한빈은 바로 내려가 손님을 내보냈겠지만 행여나 전에 일들에 연루될까 아무런 행동도, 선택도 쉽사리 내리지 못했다.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 박한빈의 말에도 그녀는 침묵했고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바로 걸음
홍지은과의 우연한 만남은 성유리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만약 오늘 하늘이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성유리가 급히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마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전에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는 하늘이기에 성유리는 아이가 작은 병에 걸리기만 해도 극도로 긴장됐다.다행히 오늘 의사가 그저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뿐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성유리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그러던 중, 홍지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밥이나 먹을까?”성유리는 그녀의 제안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필경 두 사람 사이는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홍지은은 눈치가 없는 건지 계속 성유리에게 말했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지. 근데 그거 다 성유정한테 속은 거야. 나도 나중에 알아차렸어. 그때... 너한테 못 할 짓을 했다는 걸.”“그래서 정식으로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홍지은의 사과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성유리는 마땅히 거절할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제가 요즘 많이 바빠서요.”“그냥 밥 한 끼 먹는데 그렇게 오래 안 걸리잖아.”홍지은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유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말을 내뱉었다.“아니면... 내가 그렇게 싫어? 밥도 같이 먹기 싫을 정도로?”“아니요. 너무 멀리 가셨네요.”성유리가 차분한 말투로 그녀의 말에 대답을 이어 나갔다.“전 홍지은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같이 밥 한 끼 먹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정말 없기 때문에.”“다른 일 없으시면 먼저 끊을게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는데 다행히 홍지은에게서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성유리는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바꿔놓고 하늘이의 옆에 살며시 다가가 누웠다.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함께 잠에 든 적이 없는 성유리지만 아이는
신영지는 홍지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대답을 이어갔다.“그리고 오늘은 그저 평범하게 다 같이 차나 마시며 간단한 일상 대화를 나누는 날이에요.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나눌 장소가 아니고.”“그럼 저희 다시 날 잡고 얘기 나눌까요?”홍지은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며 신영지에게 물었다.“연락처가 어떻게 되세요? 통화가 불편하시면 문자라도...”신영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사람이 먼저 말했다.“아이고. 곧 사진 찍는데 두 분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나누세요? 저기 키 크신 분, 뒤에 분 막으셨어요. 뒤로 가서 서세요.”그 사람이 말한 키 큰 분은 바로 홍지은이었다.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었지만 옆에 사람들이 하나둘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사진은 금방 찍었는데 홍지은은 자신의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표정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러나 당연하게도 홍지은의 상태가 어떤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신영지는 홍지은에게 연락처를 주지도 않았고 캐톡 친구를 추가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사진을 다 찍고 나서 바로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로 인해 며칠간 할 말을 준비한 홍지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모임 장소인 찻집에서 나온 홍지은은 남편이 이미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때? 신영지 씨는 봤어? 말은 걸었고?”딱 봐도 야윈 남자가 홍지은에게 다가와 문을 열어주며 묻자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말하긴 뭘 말해? 오늘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말도 안 걸어준다고.”“그래? 그럼 어떡하지? 공장 일... 마땅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면 정말 끝이야.”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홍지은에게 계속 물었다.“넌 다른 생각을 해볼 생각도 안 하는 거야?”“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데?”홍지은은 남자의 말에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다.“네가 남자잖아!
“성유리.”뒤에서 들려오는 부름 소리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봤다.상대방은 빠르게 그녀 쪽으로 다가왔고 체구보다 큰 치마를 입고 있음에도 살이 전보다 더 쪘다는 게 한눈에 알렸다.“정말 유리 맞네? 난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상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녀와 친구라 하기에도 애매한 사이였기에 차분히 대답했다.“오랜만이네요. 홍지은 씨.”“확실히 오랜만이긴 하지.”홍지은은 성유리를 아래위로 쭉 훑어보며 말했다.“전에 다른 사람들이 유리 네가 돌아왔다고 말은 했었어. 근데 네가 여러 모임 장소에도 나타나지 않아 난 그 사람들이 거짓말한다고 생각했지.”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홍지은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그러니까 박한빈 씨가 결국 너를 선택한 거지? 정말 의외네. 사람들 다 박한빈 씨가 너랑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렇게 서로 감정이 생길 줄은 아무도 몰랐네.”“홍지은 씨?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가요?”성유리는 옛날얘기를 자꾸 꺼내는 것이 싫어 홍지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리고 그때, 유치원 안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 나오더니 성유리에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이쪽으로 모실게요.”“감사합니다.”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홍지은을 힐끔 쳐다봤는데 마치 다른 일이 더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홍지은은 성유리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과 사방을 번갈아 가며 둘러보다 억지로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일은 무슨. 그냥 갑자기 너를 봐서... 인사하러 온 거야.”“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성유리는 짧은 대답을 마치고는 바로 뒤돌아섰고 홍지은은 제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홍지은은 핸드폰이 울리고 나서야 다른 일이 있다는 게 떠올라 얼른 차에 올라탔다.오늘 모임은 미르시의 신영지가 주최한 것이다.얼굴을 자주 보이는 사람은 거의 다 큰 인물들이 아니었고 홍지은은 그중에서도 나이가
“이거 다 실버 포레스트로 가져가서 화분과 흙을 새로 갈아주고 싶고요. 그래도 돼요?”성유리는 또박또박 말하며 박한빈과 시종일관 눈을 맞췄고 진지하게 그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하던 박한빈이 대답했다.“응. 그래도 돼.”“네. 그럼 우리 날 잡고 이사 가요. 하늘이도 우리랑 같이 가는 거로 하고요. 어머님께서 그동안 하늘이 보살피느라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성유리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엔 박한빈이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왜 그렇게 보세요?”아무런 대답도 없이 뚫어져라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가 의아함을 느껴 물었다.결국, 망설이던 박한빈은 솔직하게 묻기를 선택했다.“오늘 어디 갔다 왔어?”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성유리의 표정도 살짝 굳어졌다.박한빈은 그녀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다 알고 계셨네요. 맞아요?”“...”“오늘 하나 씨한테 다녀왔어요. 그리고... 하나 씨 부모님도 만났고요.”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그분들이 저한테 먼저 말을 걸었어요.”“뭐라고 했는데?”박한빈은 사하나 부모님의 태도를 직접 봤기에 그들이 성유리한테 못된 말을 내뱉어도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두 사람의 악의는 박한빈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그는 그 악의들을 성유리가 맞닥뜨리지 않기를 희망했다.이제 겨우 회복이 돼가는 성유리가 걱정되지만 않았다면 박한빈은 지금 당장 사씨 저택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다.그들이 목숨값을 원한다면 박한빈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수도 있다. 성유리만 무사하다면 말이다.만약 유가족들이 끝까지 놓아주지 않고 버틴다면...박한빈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성유리가 계속 말했다.“두 분이... 저를 용서한 것 같아요.”갑작스러운 말에 박한빈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마치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봤고 그녀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조용히 쳐다볼 뿐이었다.류수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이해를 전혀 못 했다는 듯 의아했고 괴이하기도 했다.한편, 성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류수미는 시선을 돌리며 계속 말했다.“저번에 김서영 씨가 한 말... 다 맞는 말이더라. 이번 일엔... 유리 네 책임이 하나도 없어.”“너를 너무 몰아붙인 거랑 독한 말을 퍼부은 거에 대해선 우리가 사과할게.”“염치없지만 용서해 줘. 나한텐... 딸이 하나 한 명이었어. 금이야 옥이야 지금까지 키웠는데 이렇게 빨리 가버릴 줄은 몰랐네.”“떠나기 전에도 유서 한 장 남기지 못한 우리 딸이... 너무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류수미는 울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성유리 또한 눈시울이 붉어졌다.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성유리는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목소리를 되찾았다.그리고는 공손하게 두 사람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정말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그리고 사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늘 드리고 싶었어요. 하나 씨한테도.”“제 딸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하고 싶어요.”“아무리 보상해도 보상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아요. 필경 제가 무슨 짓을 하든 하나 씨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하지만...”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수미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전에 하얗고 부드럽던 류수미의 손은 이제 주름이 잡혀 한눈에 봐도 나이 든 사람 손 같아 보였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성유리에게 류수미가 울먹이며 말했다.“그럼 잘 살아.”“김서영 씨가 그날 했던 말처럼 넌 잘 살아. 우리 하나 몫까지.”...박한빈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도우미에게 물었다.“성유리 오늘 어디 갔습니까?”그의 안색은 어두워져 있었고 목소리는 무척 날카로웠다.도우미는 박한빈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마 사하나 씨한테 다녀온 것 같아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그는 그저 조용히 성유리를 품에 끌어안았고 그렇게 밤 내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은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마음과 성유리의 마음이 가까이 붙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성유리가 다시 사하나의 부모님을 봤을 때는 청명절이 다가올 무렵이었다.사민혁과 류슈미가 자신을 마주치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성유리는 특별히 청명절 전날에 사하나를 찾아갔다.하늘이도 함께.아이는 이미 한 달째 유치원에 다니던 상황이었고 생각보다 더 잘 적응해 갔다.지금껏 하늘이는 죽음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기에 사하나의 영정사진을 마주하자 많이 의아해했다.마치 전에 늘 자기랑 나가 놀던 이모가, 늘 치마나 선물을 사주던 이모가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 몰라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준비한 꽃다발을 사하나의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그녀는 사하나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했었다. 심지어 행여 잊어버리고 못 한 말들이 있을까 봐 메모지에 며칠 전부터 적어두기까지 했다.하지만 막상 사하나의 무덤을 마주 서고 나니 목이 꽉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메모지에 적어둔 익숙한 글자들을 몇 번이나 봐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멍하니 사하나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성유리는 잔뜩 굳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사하나의 부모님은 먼발치에서 성유리와 하늘이를 보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오늘 두 사람이 찾아올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성유리는 무의식 간에 하늘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지만 이런 행동이 류수미와 사민혁을 더 화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본능적인 모성애로 그런 행동을 해버렸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항상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사하나의 부모님은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했다.심지어는 왜 이곳에 찾아왔냐고 따져 묻지도 않았고 뚜벅뚜벅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그들의 반응에 성유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단 한 가지는 똑바로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