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계속 통화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서훈에게 연락했다.“박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라 오늘 뵐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아니면...”서훈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만날 시간이... 없다니?’성유리는 얼마 전에 그도 매우 바빴던 것을 기억한다.하지만 그때 박한빈은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그녀를 찾을 수 있었고 때로는 출장을 갔다가 한밤중에 비행기에서 내려 직접 그녀를 찾기도 했다.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전화 한 통을 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이런 생각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지만 성유리는 결국 묻지 못하고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알았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렇게 돌아섰다.하지만 택시기사가 주소를 묻자 그녀는 말을 돌렸다.“시월파크로 가요.”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여기에 오지 않았다.예전에 박한빈이 그녀의 거처를 싫어할 때 함께 이곳에 와서 살자고 말하곤 했지만 성유리는 줄곧 허락하지 않았다.그녀는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박한빈에게 문자를 보냈다.[시월파트 쪽에서 기다릴 테니 한 번 만나요.]문자가 전송되자 그녀는 바로 옆 신발장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오늘 금성은 사실 매우 추웠다.복도 옆 창문은 아직 열려 있었고 찬바람이 이렇게 계속 안으로 불어 들어왔지만 성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멍하니 맞은편 엘리베이터를 보고 있었다.박한빈은 끝내 답장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가 올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그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사라져갔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힘껏 문지르며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려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또 시간을 한 번 보았다.벌써 거의 12시가 되었다.성유리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보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시간을 설정하기 시작했다.‘5분만 더 기다리자...’이 5분 안에 그가 여전히 오지 않으면 그녀는 떠나리라 마음먹었다.핸드폰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0시를 1분 남기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문을 닫지 않아 들어오는 찬바람과 실내의 넉넉한 따뜻함이 대조적으로 느껴져 성유리도 지금 자신의 몸이 추운지 더운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느껴질 뿐이었다.한참 만에 목소리를 찾은 그녀는 중얼거리듯 물었다.“그러니까 내 설명도 듣기 싫다는 거예요?”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성유리, 이 세상은 결과만 보면 돼.”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결과는?무엇이 결과란 말인가?결과는 그의 어머니는 지금 병원에 누워 인사불성이 되었고 그 유서가 그녀의 손에서 그의 손까지 온 것이다.결국, 그는 그들이 이제 만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심지어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도 그녀에게 인색했다.성유리는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문득 그동안 그들이 함께 지냈던 시절을 떠올렸다.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들이 침대에서 속삭이던 다정한 모든 장면...그 박한빈들이 눈앞의 그와 서서히 겹쳤다.하지만 그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갑고 매몰찼다.마치 쓸모없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듯 그는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얼마 전의 일들은 모두 자신의 상상인 것만 같았다.“그래요.”마침내 성유리는 이 말을 뱉었다.그녀는 사실 오늘 여기 온 것은 그에게... 모든 걸 해명하려는 것뿐이었다.그녀는 심지어 문밖에서 기다리며 졸렬한 고육책을 연출하기까지 했다.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결과만 본다고...’과정이 더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그는 신경 안 쓴다는 뜻이니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그럼 가볼게요.”성유리는 이런 말을 남기고 그냥 돌아섰다.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성유리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코트 주머니 속에 넣은 손을 꽉 잡았다.“안 작가님이 청첩장을 보내주셨어.”박한빈은 그녀
심지어 아까 첫술보다 더 맛이 없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채 그 하얀 그림자를 보았다.그는 높은 층에 서 있었는데 아래층의 모든 물건은 이때 희미한 점으로 변했다.하지만 그때 박한빈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는 심지어 그녀가 쓰레기통 옆에 서서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박한빈은 갑자기 술잔을 꽉 움켜쥐었는데 한참 후에야 서서히 풀었다.자신이 결코 감정을 중요시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신 덕분이었다.지금 그녀를 생각하면 박한빈은 그녀의 부드러운 말투와 겉으로 드러나는 미소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었다.어머니에게 사고가 나기 전까지 박한빈은 그녀에게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박한빈은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일찍이 그녀의 몸 안에 존재했었는데 작은 탯줄이 그들을 하나로 연결했다. 그 감정은 그녀의 유서를 보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그녀는 그에게 미안해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떠나려 했다.떠나면서 그녀는 그 ‘혼외자'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함께 주었다.그녀 명의의 모든 재산과 주식도 그에게 남겼는데 그 재산들은 지화 그룹 외의 것이었다.만약 어느 날 다른 사람들과 더는 경쟁하고 싶지 않다면 떠나라고 하면서 이 재산은 그가 먹고 입는 걱정 없이 살기에 충분하다고 했다.그녀의 아이로서, 사실 그녀의 가장 큰 희망은 그가...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아이러니하게 지난 30년 동안 그녀는 그에게 어떤 칭찬의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박한빈은 예전에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녀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유서에서 박한빈은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김서영이 박씨 집안의 미래 후계자에게 주는 감정이 아니라 평범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이었다.그걸 깨달은 순간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보니 불쌍하고
박한빈은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그는 처음으로 병원 보안요원에게 그들을 내쫓으라고 했다.연약해 보이는 두 노인은 끌려갈 때 욕설을 퍼부으며 기자를 찾아가 아들이 박씨 가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겠다고 했다.당시 박한빈은 차갑게 한마디만 했다.“그렇게 해요.”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한 그 태도는 사람의 마음에 서리가 내리게 했다.박한빈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잠시 후, 서훈이 달려와 미화로 쪽에 있는 물건들을 이미 시월파크로 옮겼다고 보고했다.박한빈이 알았다고 한마디만 하자 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모... 성유리 씨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병이 난 것 같아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사실 이 일은 성유리 씨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성유리 씨에게 화를 내신 거예요?”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그를 쳐다보았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을 그냥 삼켜버리고 속으로만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정말 병이 났다.찬바람에 몇 시간씩 앉아있었으니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그녀는 원래 늘 비상약을 집에 두고 있었지만 약을 먹기 직전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천천히 약상자를 내려놓고 따뜻한 물 한 잔만 따라 마셨다.다행히 그녀의 상황은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이틀 동안 집에 누워 있었더니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지만 기침만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특히 밤이면 원래도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연이은 기침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어려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는 것에 익숙해졌다.‘왜 또 그럴까’에 대한 심경에서 ‘역시 그래’로 바뀌었다.사실 박한빈의 마음을 믿은 적은 없다.그들의 감정이 가장 ‘불타오를' 때도 그녀는 여전히 그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거절하는 것을 배워내지 못했을 뿐인데 비소를
성유리는 말을 하지 못했다.그녀도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고 말하려다 입까지 나온 말을 다시 삼켜 버렸다.이 일들을... 박한빈은 아마 다 잊었을 것이다.오죽했으면 이곳에 와서 휴가를 보내자고 제안했겠는가.그래서 성유리는 그와 그녀 사이의 ‘뜨거운' 감정도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마치 그녀가 그를 좋아할 때 그들이 함께 지내는 모든 일, 모든 세부 사항을 머릿속에 새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그녀를 선택한 것은 단지 그들이... 속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이번에 혼자 도인국에 온 성유리는 미리 인터넷에서 알아보고 전문적인 가이드를 찾았다.가이드는 이쪽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깔끔한 단발머리에 열정적이고 밝은 성격이었다.“성유리 언니죠?”성유리가 짐을 찾자마자 그녀가 다가왔는데 손에는 ‘성유리’라는 이름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다.“안녕하세요. 사하나예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안녕.”“호텔 예약했으니 바로 가면 돼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 그녀를 앞으로 안내했다.그녀는 전문적인 가이드였는데 가는 내내 성유리에게 이곳의 풍경을 소개하고, 성유리의 음식 취향을 물으며 그녀에게 맞는 레스토랑을 추천했다.“내일 단풍사부터 가봐요. 마침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서하나가 말했다.“최근 단풍사가 갑자기 핫해서 휴일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그래.”성유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사하나는 성유리의 냉담함을 느끼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다행히 앞으로 이틀 동안 그들은 즐겁게 지냈다.성유리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사하나의 스케줄에도 이의가 없었다. 사하나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탄할 만큼 순조롭게 진행했다.사흘째 되던 날, 성유리는 한 바에서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
“아까 저 사람 전 남자친구예요?”룸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가 직접 성유리에게 물었다.성유리는 먼저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에요? 하지만 두 사람이...”“전남편이야.”성유리의 대답에 사하나는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뒤에야 손뼉을 치며 말했다.“생각났어요. 금성의 지화 그룹 그분 아니에요?”“아는 사이야?”“음... 아는 사이라 할 수도 있죠. 국내 뉴스를 지켜봤는데 다른 회사 대머리 느끼한 남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편이잖아요.”성유리는 웃기만 했다.“그럼 아까 옆에 있던 사람은 누군데 유리 언니에게 언니라고 어떻게 부르나요?”“부모님이 입양한 딸이야.”성유리의 말에 너무 많은 정보량이 담겼는지 사하나의 입이 달걀 하나라도 집어넣을 수 있을만큼 벌어졌다.성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다시 잔을 들었다.“하지만 이젠 두 사람 모두 나랑 아무 관계가 없어. 며칠 동안... 재미있게 놀았어. 고마워.”사하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기쁨'이라는 두 글자가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지만 모른 척 술잔만 따라 들었다.“그럼 됐어요. 다음에 다시 오면 또 절 찾아요.”“그래.”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 속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이곳의 술 도수는 사실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술이 목구멍을 지나자 성유리는 맵고 쓰려 눈물을 흘릴 뻔했다.사하나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급하게 마셔서 그래요. 하지만 이틀 전에 술 못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왜 갑자기 마시는 거예요?”“응, 오늘은 마실 수 있어.”성유리는 웃으며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그녀는 원래... 하늘이 또 자신을 불쌍히 여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마지막 희망마저 허사가 됐다.아마 처음부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른다.많은 것은 그녀가 평생 얻지 못할 운명일 지도 모른다.온전한 가정이든 부모님의 사랑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아이든 말이다.스물여섯 살 먹도록 성유리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그녀는 술을 마셔서 볼이 발그스름해졌고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유리는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인한 뒤 그를 불렀다.“박한빈?”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마치 아까 그가 바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눈이 와요.”성유리는 그의 표정을 개의치 않는 듯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봐요. 눈이 엄청 많이 와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곳의 눈은 확실히 금성보다 더 아름다워요. 그래도 저는 금성의 눈이 더 좋아요.”성유리는 중얼거리며 계속 발걸음을 휘청거렸다. 박한빈이 팔을 꽉 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하지만 금성은 너무 추워요.”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물론 여기도 춥죠. 이번 겨울은... 참 기네요.”그녀의 목소리는 서서히 사라졌고 눈도 서서히 감겼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허리를 숙여 안아 올렸다.“한빈 오빠!”가게에서 나오던 심유정이 마침 이 광경을 보고 얼굴빛이 갑자기 하얗게 질려 아무 생각없이 달려들려고 했다.그러자 사하나가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섰다.“뭐 하는 거야? 비켜! 내가 누군지 알아?”성유정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는데 그 흉악한 모습은 방금 박한빈 앞에서 보여줬던 부드러움과는 완전히 달랐다.사하나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내가 누군지 알아요?”...박한빈은 그렇게 성유리를 안고 가버렸다.멀리 성유리는 아직도 성유정의 화가 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박한빈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달빛과 가로등을 비추어 남자의 얼굴도 어느 정도... 부드럽게 느껴졌다.이런 부드러움은 성유리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하지만 그녀는 똑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더없이 단호하던 그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지금 성유리 앞에 나타난 이 모습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갑자기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끝내 참
성유리는 여전히 도인국을 좋아하지 않았다.매년 관광객들로 붐비고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여전히 이곳을 좋아할 수 없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단지 빨리 금성으로 돌아가서 그녀만의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성씨 가문에서 찾아왔다.윤청하가 위독하다고 했다.성시원이 그동안 알맞은 신장이식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성유리는 친딸로 의료적으로도 이식 적임자였다.성유리는 거의 강제로 차에 태워졌는데 성시원을 본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요? 날 억지로 수술대에 올려놓고 싶어요?”성시원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손을 흔들어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그러고는 성유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원하는 게 뭐야?”성유리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대답했다.“당신 아내에게 분명히 말했었는데요? 회사를 주면 할 게요.”“회사는 내 피와 땀이야.”“그럼 당신의 아내는 뭔가요?”성유리가 되묻자 성시원은 말문이 막힌 채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성유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장 일어나 떠나려 했다.하지만 곧 성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술만 한다면 성씨 가문의 모든 재산 상속권을 줄 수 있어.”“헐, 당신이 죽으면 준다고요?”성유리의 말이 듣기 거북했던지 성시원은 결국 화를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당신이 언제 죽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유언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요.”성유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더욱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있어서 당신들은 이미 어떠한 신용도 없다는 거예요.”“성유리, 너무 그러지 마!”성시원은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난 네 아버지고 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은 너의 어머니야. 엄마가 없으면 네가 있을 수 있겠어? 한때는 피를 나눈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알고 있어요.”성유리가 대답했다.“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만약 그날이 온다면... 내가 직접 보내드릴 거예
성유리는 능청맞게 말하는 박한빈을 보기도 싫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짓더니 바로 병실 밖을 나갔다. “저게 무슨 말이냐? 지금 두 사람 같이 살고 있어?” 성시원은 박한빈이 나가자마자 성유리를 보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정우랑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성유리는 성시원의 물음에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오늘 저는 성리 그룹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이미 그럴 필요 없겠네요. 저는 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잠깐만! 아까 내가 한 물음에 대답부터 해줘야지. 정말 같이 사는 거야? 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둘이 짜고 한 판이다 이거야? 어쩐지 시간을 넉넉하게 주겠다고 한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빠르게 찾아와서 결판을 짓는지 궁금했는데... 다 네가 한 짓이었구나.” “됐어요.” 성유리는 피로에 잔뜩 찌든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뭐라고?” “이미 다 알고 계세요. 박 대표님은.” 성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는 그냥 그 사람의 손아귀에 잡힌 사냥감일 뿐이었다고요.” “아예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평 공정하게 싸울 수 있겠어요?” 성유리의 평온한 목소리는 마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 같았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입만 뻥끗거리다 결국 연정우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럼 연정우는? 이미 무산된 결혼 아니냐? 그 사람 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런 정 없고 매정한 인간은 우리 성씨 가문과 절대 어떠한 관련도 없어!” 성유리는 화를 내며 말하는 성시원의 앞에서 효녀가 되고 싶지 않아 아무 말 없이 뒤돌아 떠났다. “성유리!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데 어디가? 당장 돌아와!” 뒤에서 들리는 성시원의 고함에도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걷는 와중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병원 앞에 몰려있던 기자들은 이미 다 떠났는지 조용했기에 성유리는
성유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박한빈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 있던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성유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이제 더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성유리는 이제야 박한빈이 예전부터 다른 투자자들과 다 얘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유리가 손에 쥐고 있던 작디작은 지분까지 뺏겼지만 그녀는 저항할 자격도 없었다. 허나 성시원에게는 성유리보다 많은 발언권이 있다. 박한빈이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을 막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시간은 끌 수 있었다. 만약 그 시간들을 충분히 이용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면 두 사람에게는 솟아날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성유리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다 세우며 병원으로 향했지만 뜻밖의 인물과 마주쳐버렸다. ‘박한빈 씨?’ 그녀를 발견한 박한빈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먼저 건네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 대표님도 계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오셨군요. 그럼 저희 이 자리에서 바로 얘기 나눕시다.” 박한빈은 냉정하고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게 바로 성리 그룹의 현재 금전 흐름 상황입니다. 오늘 아침까지 통계한 결과 이미...” 어젯밤 침대에서의 화면들이 떠오른 성유리는 지금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성리 그룹의 미래 계획을 말하고 있는 박한빈이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아주 냉철하고 침착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박한빈의 모습에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성유리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성시원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동의하신 거예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성시원이지만 성유리는 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사실 성유리도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으로 놓고 말하면 누군가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 않다면 회사의 재무 상황이 공개될 것이니 회사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게 뻔했다. 법원까지 가 회사를 매매로 넘기는
“네.” “근데 네가 나를 믿지 않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그 증거들은 네가 스스로 찾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렇죠.”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그래도 박한빈 씨가 편하게 살지는 못하게 할 것 같아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입을 닦은 휴지를 상위에 내려놓더니 옆에 있던 물 한 잔을 그의 얼굴에 뿌렸다. 물방울들은 박한빈의 얼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고 속눈썹마저 젖어버렸다. 박한빈은 물을 맞고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고 환한 조명 아래에 있는 탓인지 안색은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던 말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갔다. 순간, 박한빈은 성유리의 팔을 확 낚아채더니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버렸다. “이렇게?” 박한빈은 성유리를 보며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게 네가 말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인가? 이건 너무 소아과 수준 아니야?”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얼굴을 꽉 잡더니 바로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박한빈의 어깨에 손까지 올렸다. 평소와 다른 성유리의 행동에 당황한 박한빈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성유리의 눈빛을 발견했다. 성유리의 눈빛은 마치 박한빈에게 네가 하는 행동도 유치하다는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박한빈에게 또 무슨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가까이 붙어있는 두 사람이지만 박한빈은 마음속이 공허할 따름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상처가 난 부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저 끝없이 성유리에게 키스를 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야만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원이야,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마.” 박한빈은 애원하듯 성유리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그의 어깨를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집안에는 적막만 흘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박한빈은 성유리를 보지도 않으며 누군가에게 저녁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고개를 휙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성유리는 묻는 박한빈의 말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거나 다 돼요. 될 수록이면 간이 덜 된 음식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향하려 했고 박한빈은 뒤돌아있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뭐 찾으려는 물건이라도 있으면 직접 나한테 말해. 내가 알려줄 테니까.”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성유리는 박한빈이 아까 CCTV 얘기를 꺼낼 때부터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단도직입적인 박한빈의 말에 당황했는지 그녀는 발걸음을 뚝 멈추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손톱은 손바닥에 박혀버린 듯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성유리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한 뒤, 뒤를 돌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히 박한빈 씨와 고명도 씨 사이에 있던 타협이나 거래에 대한 증거겠죠?” 그녀의 당당한 대답에 박한빈은 또 너털웃음을 짓더니 물었다. “응? 그건 왜 찾는 거야?” “박한빈 씨 생각에는 왜 찾는 거 같은데요?” 성유리의 되묻는 말에 박한빈은 입을 꾹 닫아버렸고 미소 또한 천천히 사라졌다. 고개를 숙인 박한빈의 팔에는 핏줄들이 선명하게 나타났고 성유리는 그를 가만히 쳐다만 봤다. 그러다가 박한빈은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기침을 연신 해댔고 성유리는 그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대화를 나눌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주저하지도 않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고 샤워를 했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올 때, 박한빈이 저녁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마침 집에 도착했었다. 입맛이 없던 성유리는 밥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