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그는 처음으로 병원 보안요원에게 그들을 내쫓으라고 했다.연약해 보이는 두 노인은 끌려갈 때 욕설을 퍼부으며 기자를 찾아가 아들이 박씨 가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겠다고 했다.당시 박한빈은 차갑게 한마디만 했다.“그렇게 해요.”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한 그 태도는 사람의 마음에 서리가 내리게 했다.박한빈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잠시 후, 서훈이 달려와 미화로 쪽에 있는 물건들을 이미 시월파크로 옮겼다고 보고했다.박한빈이 알았다고 한마디만 하자 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모... 성유리 씨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병이 난 것 같아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사실 이 일은 성유리 씨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성유리 씨에게 화를 내신 거예요?”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그를 쳐다보았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을 그냥 삼켜버리고 속으로만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정말 병이 났다.찬바람에 몇 시간씩 앉아있었으니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그녀는 원래 늘 비상약을 집에 두고 있었지만 약을 먹기 직전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천천히 약상자를 내려놓고 따뜻한 물 한 잔만 따라 마셨다.다행히 그녀의 상황은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이틀 동안 집에 누워 있었더니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지만 기침만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특히 밤이면 원래도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연이은 기침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어려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는 것에 익숙해졌다.‘왜 또 그럴까’에 대한 심경에서 ‘역시 그래’로 바뀌었다.사실 박한빈의 마음을 믿은 적은 없다.그들의 감정이 가장 ‘불타오를' 때도 그녀는 여전히 그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거절하는 것을 배워내지 못했을 뿐인데 비소를
성유리는 말을 하지 못했다.그녀도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고 말하려다 입까지 나온 말을 다시 삼켜 버렸다.이 일들을... 박한빈은 아마 다 잊었을 것이다.오죽했으면 이곳에 와서 휴가를 보내자고 제안했겠는가.그래서 성유리는 그와 그녀 사이의 ‘뜨거운' 감정도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마치 그녀가 그를 좋아할 때 그들이 함께 지내는 모든 일, 모든 세부 사항을 머릿속에 새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그녀를 선택한 것은 단지 그들이... 속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이번에 혼자 도인국에 온 성유리는 미리 인터넷에서 알아보고 전문적인 가이드를 찾았다.가이드는 이쪽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깔끔한 단발머리에 열정적이고 밝은 성격이었다.“성유리 언니죠?”성유리가 짐을 찾자마자 그녀가 다가왔는데 손에는 ‘성유리’라는 이름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다.“안녕하세요. 사하나예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안녕.”“호텔 예약했으니 바로 가면 돼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 그녀를 앞으로 안내했다.그녀는 전문적인 가이드였는데 가는 내내 성유리에게 이곳의 풍경을 소개하고, 성유리의 음식 취향을 물으며 그녀에게 맞는 레스토랑을 추천했다.“내일 단풍사부터 가봐요. 마침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서하나가 말했다.“최근 단풍사가 갑자기 핫해서 휴일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그래.”성유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사하나는 성유리의 냉담함을 느끼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다행히 앞으로 이틀 동안 그들은 즐겁게 지냈다.성유리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사하나의 스케줄에도 이의가 없었다. 사하나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탄할 만큼 순조롭게 진행했다.사흘째 되던 날, 성유리는 한 바에서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
“아까 저 사람 전 남자친구예요?”룸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가 직접 성유리에게 물었다.성유리는 먼저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에요? 하지만 두 사람이...”“전남편이야.”성유리의 대답에 사하나는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뒤에야 손뼉을 치며 말했다.“생각났어요. 금성의 지화 그룹 그분 아니에요?”“아는 사이야?”“음... 아는 사이라 할 수도 있죠. 국내 뉴스를 지켜봤는데 다른 회사 대머리 느끼한 남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편이잖아요.”성유리는 웃기만 했다.“그럼 아까 옆에 있던 사람은 누군데 유리 언니에게 언니라고 어떻게 부르나요?”“부모님이 입양한 딸이야.”성유리의 말에 너무 많은 정보량이 담겼는지 사하나의 입이 달걀 하나라도 집어넣을 수 있을만큼 벌어졌다.성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다시 잔을 들었다.“하지만 이젠 두 사람 모두 나랑 아무 관계가 없어. 며칠 동안... 재미있게 놀았어. 고마워.”사하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기쁨'이라는 두 글자가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지만 모른 척 술잔만 따라 들었다.“그럼 됐어요. 다음에 다시 오면 또 절 찾아요.”“그래.”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 속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이곳의 술 도수는 사실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술이 목구멍을 지나자 성유리는 맵고 쓰려 눈물을 흘릴 뻔했다.사하나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급하게 마셔서 그래요. 하지만 이틀 전에 술 못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왜 갑자기 마시는 거예요?”“응, 오늘은 마실 수 있어.”성유리는 웃으며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그녀는 원래... 하늘이 또 자신을 불쌍히 여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마지막 희망마저 허사가 됐다.아마 처음부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른다.많은 것은 그녀가 평생 얻지 못할 운명일 지도 모른다.온전한 가정이든 부모님의 사랑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아이든 말이다.스물여섯 살 먹도록 성유리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그녀는 술을 마셔서 볼이 발그스름해졌고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유리는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인한 뒤 그를 불렀다.“박한빈?”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마치 아까 그가 바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눈이 와요.”성유리는 그의 표정을 개의치 않는 듯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봐요. 눈이 엄청 많이 와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곳의 눈은 확실히 금성보다 더 아름다워요. 그래도 저는 금성의 눈이 더 좋아요.”성유리는 중얼거리며 계속 발걸음을 휘청거렸다. 박한빈이 팔을 꽉 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하지만 금성은 너무 추워요.”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물론 여기도 춥죠. 이번 겨울은... 참 기네요.”그녀의 목소리는 서서히 사라졌고 눈도 서서히 감겼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허리를 숙여 안아 올렸다.“한빈 오빠!”가게에서 나오던 심유정이 마침 이 광경을 보고 얼굴빛이 갑자기 하얗게 질려 아무 생각없이 달려들려고 했다.그러자 사하나가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섰다.“뭐 하는 거야? 비켜! 내가 누군지 알아?”성유정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는데 그 흉악한 모습은 방금 박한빈 앞에서 보여줬던 부드러움과는 완전히 달랐다.사하나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내가 누군지 알아요?”...박한빈은 그렇게 성유리를 안고 가버렸다.멀리 성유리는 아직도 성유정의 화가 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박한빈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달빛과 가로등을 비추어 남자의 얼굴도 어느 정도... 부드럽게 느껴졌다.이런 부드러움은 성유리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하지만 그녀는 똑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더없이 단호하던 그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지금 성유리 앞에 나타난 이 모습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갑자기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끝내 참
성유리는 여전히 도인국을 좋아하지 않았다.매년 관광객들로 붐비고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여전히 이곳을 좋아할 수 없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단지 빨리 금성으로 돌아가서 그녀만의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성씨 가문에서 찾아왔다.윤청하가 위독하다고 했다.성시원이 그동안 알맞은 신장이식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성유리는 친딸로 의료적으로도 이식 적임자였다.성유리는 거의 강제로 차에 태워졌는데 성시원을 본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요? 날 억지로 수술대에 올려놓고 싶어요?”성시원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손을 흔들어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그러고는 성유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원하는 게 뭐야?”성유리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대답했다.“당신 아내에게 분명히 말했었는데요? 회사를 주면 할 게요.”“회사는 내 피와 땀이야.”“그럼 당신의 아내는 뭔가요?”성유리가 되묻자 성시원은 말문이 막힌 채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성유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장 일어나 떠나려 했다.하지만 곧 성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술만 한다면 성씨 가문의 모든 재산 상속권을 줄 수 있어.”“헐, 당신이 죽으면 준다고요?”성유리의 말이 듣기 거북했던지 성시원은 결국 화를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당신이 언제 죽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유언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요.”성유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더욱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있어서 당신들은 이미 어떠한 신용도 없다는 거예요.”“성유리, 너무 그러지 마!”성시원은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난 네 아버지고 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은 너의 어머니야. 엄마가 없으면 네가 있을 수 있겠어? 한때는 피를 나눈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알고 있어요.”성유리가 대답했다.“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만약 그날이 온다면... 내가 직접 보내드릴 거예
성유정의 말이 끝나자 성시원의 얼굴빛은 갑자기 변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문득 성유정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이 지독한 생각을 뱉을 수 있냐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성유정도 이를 의식한 듯 황급히 말했다.“전 그저 엄마가 살아있길 바랄 뿐이에요. 아빠도 보셨잖아요. 엄마가 병마에 시달려서 어떻게 되었는지. 전 정말... 차마 지켜볼 수 없었어요.”성시원은 말을 하지 않았다.비록 그도 성유리가 죽어가는 엄마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을 원망하고, 그녀가 죽기를 수없이 저주했지만 성유정의 말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맞은편에 있는 성유정도 별말 없이 고개만 치켜든 채 그를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봤다.마침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족들 다 왜 여기 있어요? 빨리 와요.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이 말을 들은 성시원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여 바로 달려갔지만 윤청하는 이미 응급실에 실려 갔다.성시원이 도착했을 때, 의사는 그에게 위독 고지서를 건네줬다.성시원은 손을 떨며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아빠...”성유정은 울면서 그를 바라보았다.“엄마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에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요?”성시원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곳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냉정해 보였다. 한참 후에야 그는 갑자기 중얼거렸다.“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성유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일이 성공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켜진 수술 등을 힐끗 보았다.죽도록 억누르지 않았다면 그녀는 심지어 웃었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하늘도 자신을 돕는 것 같았다.“아빠, 만약 정말 손을 쓴다면 우리가 직접 할 수는 없어요.”성유정은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나서 말했다.“잊었어요? 지금 성유리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지석민이어야 해요.”“맞는 말이야.”성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하지만 지석민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알아?”“찾아보라고 하면 알아요.”성유정은
성유리는 누군가 미행하는 것 같았다.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해서 평소 외출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생필품을 사러 나갔다.원칙대로라면 그녀는 이동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보통 누군가 눈여겨볼 가능성은 없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성유리는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슈퍼마켓에 가려고 할 때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왔다. 그 오토바이는 목적이 분명한 듯 직접 그녀를 들이받을 기세였다!성유리가 깜짝 놀라 연신 뒷걸음질을 칠 때 길가에 마침 다른 사람이 지나갔고 오토바이는 그렇게 그녀 옆을 지나쳐 훌쩍 떠났다.쌩쌩 지나가는 그 바람은 아직도 성유리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온몸이 굳어져 꼼짝도하지 못했다.그녀는 방금 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그 매서운 눈빛은 마치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벗겨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성유리도 많은 걸 생각할 겨를이 없어 슈퍼마켓도 가지 않고 외투를 꽁꽁 여미고 돌아갔다.문을 닫은 후에야 그녀는 자신의 벌렁이던 심장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슈퍼마켓에 갈 수 없어서 그녀는 배달 음식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고 비고에는 원래대로 배달 기사에게 문 앞에 두라고 썼다.그러나 30분 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배달입니다.”둔탁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성유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방 안에서 소리쳤다.“문 앞에 두면 돼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성유리는 2분을 더 기다린 후 일어나서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카메라를 통해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그제야 문을 열었다.그러나 문 옆에는 그녀의 배달 음식이 없었다.성유리가 어리둥절해 하며 배달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순간 차가운 칼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성유리의 온몸을 차갑게 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서연아, 오랜만이야.”성유리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며 고개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갑자기 발을 들어 그의 하체를 세게 걷어찼다.성유리가 독기를 품은 데다 그곳이 남자의 가장 약한 곳이기 때문에 지석민은 아파서 즉시 손으로 그곳을 움켜쥐며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감히 나에게 손을 써? 죽여버릴 거야!”말을 마친 지석민은 이번엔 사정없이 손으로 성유리의 목을 졸랐다.“천한 년! 배은망덕한 년! 재수 없어! 오늘 널 죽여버릴 거야!”그는 욕하면서 손에 힘을 점점 더 세게 주었는데 성유리는 숨을 쉴 수 없어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부림치며 그의 팔을 잡았지만 핏자국을 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날 창피하게 여긴다는 걸 알아. 네 친아버지보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네 친아버지도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겠어? 지금도 널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널 죽여 그 여편네를 살리려 계획했어.”지석민의 말을 듣자 성유리의 흐려져 있던 의식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그녀는 애써 눈을 뜨며 간신히 물었다.“뭐라고요?”“내가 뭐라고 했냐고?”지석민이 쌀쌀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너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 네가 여기에 있는 걸 내가 어떻게 안 것 같아? 네 친엄마가 곧 죽는다며? 네가 죽지 않으면 누가 이식수술을 해주겠어?”이 말은 총알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이식수술... 내가 이식수술을 하도록 심지어 지석민을 보냈어?’아니다. 그녀에게 수술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죽으라는 것이다.이게 친부모가 할 짓인가?성유리는 지석민의 팔뚝을 잡았던 손을 갑자기 놓았다. 지석민은 그녀가 몸부림을 포기한 줄 알고 힘을 점점 풀며 그녀의 옷을 잡아당겼다.“일찍 나와 함께 잤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널 얼마나 예뻐해 줬겠어? 지금의 넌 부모 사랑도 없고 남편은 다른 여자랑 도망갔어. 넌...”지석민은 말을 채 하지도 못하고 끊었다. 짜릿한 아픔이 아랫배에서 느껴져 그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는데 그곳엔... 가위가 꽂혀 있었다.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성유리를
그는 그저 조용히 성유리를 품에 끌어안았고 그렇게 밤 내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은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마음과 성유리의 마음이 가까이 붙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성유리가 다시 사하나의 부모님을 봤을 때는 청명절이 다가올 무렵이었다.사민혁과 류슈미가 자신을 마주치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성유리는 특별히 청명절 전날에 사하나를 찾아갔다.하늘이도 함께.아이는 이미 한 달째 유치원에 다니던 상황이었고 생각보다 더 잘 적응해 갔다.지금껏 하늘이는 죽음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기에 사하나의 영정사진을 마주하자 많이 의아해했다.마치 전에 늘 자기랑 나가 놀던 이모가, 늘 치마나 선물을 사주던 이모가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 몰라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준비한 꽃다발을 사하나의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그녀는 사하나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했었다. 심지어 행여 잊어버리고 못 한 말들이 있을까 봐 메모지에 며칠 전부터 적어두기까지 했다.하지만 막상 사하나의 무덤을 마주 서고 나니 목이 꽉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메모지에 적어둔 익숙한 글자들을 몇 번이나 봐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멍하니 사하나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성유리는 잔뜩 굳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사하나의 부모님은 먼발치에서 성유리와 하늘이를 보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오늘 두 사람이 찾아올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성유리는 무의식 간에 하늘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지만 이런 행동이 류수미와 사민혁을 더 화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본능적인 모성애로 그런 행동을 해버렸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항상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사하나의 부모님은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했다.심지어는 왜 이곳에 찾아왔냐고 따져 묻지도 않았고 뚜벅뚜벅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그들의 반응에 성유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단 한 가지는 똑바로 알
박한빈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성유리는 오랫동안 침묵했다.입술을 꾹 닫고 있는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박한빈의 말에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볼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자?”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유효정 씨는... 정말 병 들어서 사망한 건가요?”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누가 진실을 알겠어? 어차피 연정우 씨가 모든 사람에게 사인이 병사라고 알려줬는데.”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에도 조용히 있다 한참 뒤,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그때 유씨 가문 일 말이에요. 도대체... 박한빈 씨가 신고한 건가요 아니면 정우가 그런 건가요?”이번엔 박한빈이 입을 꾹 닫아버렸고 성유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행동을 멈췄다. 그리곤 그녀의 귓가에 있는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리기 시작했다.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머리카락에 닿을 때마다 귓가가 너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어 피해버렸다.그 순간, 박한빈이 씩 웃더니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볼에 입을 맞췄다.그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성유리의 볼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려했지만 그녀는 박한빈을 밀어냈다.“아직 제 질문에 대답 안 하셨어요.”성유리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자 박한빈은 솔직하게 대답해 줬다.“신고한 건 연정우 씨야.”“근데 그 증거들은... 내가 조금 힘을 보탰다고 할 수 있지. 게다가 네 생각엔 원래부터 검찰의 행동이 그렇게 빠르다고 생각해?”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그러니까... 그때 연정우는 박한빈이 둔 “패”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비록 다들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자세히 검사를 해도 그는 깨끗했다.“내가 너무 무섭나?”성유리가 아무 말도 못 하자 박한빈이 조심스레 물었다.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고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봤다.“내가 이렇게 하는
성유리는 박한빈이 여전히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마치 성유리의 생각을 읽은 듯 말을 이어갔다.“전에 유효정 씨가 찾아갔었지?”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갑자기 유효정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지 몰랐다.날 선 눈빛으로 박한빈을 째려보던 성유리는 경계심을 풀며 물었다.“무슨 뜻이에요?”“너도 아마 짐작하고 있었을 거야. 유효정 씨가 연정우 씨에게 말한 거 말이야. 해외에 투자자들. 그거 사실 내가 위조한 거였어.”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그 일이 다시 떠올랐다.솔직히 말해 요즘 성유리는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연정우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에도 너무 옛날 옛적의 일 같은 느낌이 들었다.박한빈은 성유리의 반응과 표정을 살펴보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잡더니 말했다.“내 말 아직 안 끝났어.”그의 목소리에는 불쾌하다는 감정이 잔뜩 묻어나 있었지만 성유리가 아플까 봐 손에는 아무런 힘을 주지 않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럼에도 불만이 큰지 박한빈의 손을 밀쳐냈다.팍!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모습에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성유리는 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 문제로 다투기 싫어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나도 최근에 알았어. 내가 유효정 그 사람에게 속았더라고.”“다르게 말하면 시실 그 투자자는 정말 존재하는 사람이었어.”박한빈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그때 유효정 씨 아버지에게 그 일이 있었을 때 사실은 뒤에 길 하나를 만들어뒀나 봐. 근데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 자기 사위에게 신고를 당했을 줄은.”“조사하는 쪽에서 발 빠르게 움직인 덕에 아버지는 도망가지 못했지만 유효정 씨에게 그것들은 남겨둔 거지.”“하지만 유효정 씨도 감옥에 들어가 버린 탓에 출소하고 나서는 그 사람 연락처도 몰랐었지.”“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야. 겉으론 나랑 협업해서 연정우 씨에게 복수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가 다리를 놓아주기를 바랐던 거지. 투자자를 만들 기회를
“내가 맨발로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박한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성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집안에 난방이 너무 잘 돼서요.”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대답했다.“그래도 안 돼.”“네.”성유리는 박한빈을 지그시 쳐다보다 결국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아까 뭐 보고 있었어?”“요즘 왜 그렇게 바쁘세요?”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물었다.너무도 기막힌 타이밍에 박한빈은 멈칫하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를 본 성유리는 기분이 이상해져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웃으세요?”“알고 싶어?”박한빈은 대답 대신 성유리에게 되물었고 그녀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마침 잘됐네.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근데 내가 아직 씻지를 못해서... 나 좀 기다려줄래?”“먼저 알려주시면 안 돼요?”“안 돼.”아마 요즘 박한빈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성유리는 그의 그런 모습에 익숙해졌다.그래서 지금 박한빈이 고민도 안 하고 자신의 말에 거부 의사를 밝히자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도 못했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은 이미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고 성유리에겐 기회가 없어졌다.원래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쓱 물어보려 했던 성유리지만 박한빈의 말을 듣고 나니 흥미가 생겼다.김서영도 박한빈의 회사에 별일이 없다고 말했으니까.게다가 박한빈도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성유리는 이 업계 일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그러니 그가 하려던 말을 바로 성유리와 관련된 사람에 대한 주제일 것이다.이미 욕실로 들어선 박한빈의 뒤를 성유리가 따라가려는 순간, 박한빈은 뒤에도 눈이 달린 듯 고개를 휙 돌리더니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맨발로 걸어 다니지 말라고.”바닥에 닿아있던 성유리의 발은 박한빈의 말에 움츠러들어갔고 그 틈을 타 그는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결국 성유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침대로 돌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창문만 바라봤다.다행히 박한빈은 성유리를 오랜 시간 기다리지 않게 했고 10여 분이 흘렀을 즈음, 가
하늘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성유리는 또다시 물었다.“여기서 지내는 게... 안 행복해?”성유리의 물음에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다시 끄덕였다.“난 엄마가 안 행복해 보여서.”침묵하던 하늘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엄마, 엄마는 지금... 하늘이를 보고도 웃어주지 않아.”“난 엄마가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멍해졌고 하늘이의 손을 잡고 있던 손도 점점 굳어갔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도우미는 계속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성유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도우미는 빠르게 하늘이에게로 다가가더니 말했다.“성하늘 아가씨, 아까 그림 그리고 싶다고 하셨죠? 저랑 같이 그리러 갈까요?”하늘이는 도우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성유리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아이의 시선을 느낀 성유리는 심호흡 한 번 하고는 애써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기회가 생기면 엄마가 하늘이 데리고 한번 갔다 올게. 알겠지?”“진짜?”성유리의 말에 하늘이의 눈이 순식간에 빛났고 성유리는 그제야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진정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얼마 뒤,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이와 약속했다.“응. 진짜.”하늘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도우미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갔고 성유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비록 오늘 박한빈이 외출한 상태지만 집안에 남아있는 도우미들은 항시 성유리 곁을 지키며 감시 아닌 감시를 하고 있었다.성유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그녀가 화장실에 조금 오랫동안 머물러도 재빨리 다가와 괜찮냐고 묻곤 했다.그들은 항상 성유리가 괜찮다는 대답을 하고나서야 안심하며 화장실 밖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성유리가 멍하니 앉아 있을 무렵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오늘 저녁 식사 또한 변함없이 세 사람이 함께 먹었다.김서영은 하늘이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갑자기 물었다.“한빈이 요즘 왜 저렇게 바빠?”성유리는 그녀의 물음에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나
성유리와 다른 사람들은 엔젤 월드에서 대보름날까지 머물렀다.하늘이도 이젠 나이가 됐으니 성유리는 원래 경운시에 아이가 다닐 유치원을 찾아보려고 했다.하지만... 경운시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결국 하늘이가 다닐 유치원은 박한빈이 직접 골랐다. 그 유치원은 금성시에서 꽤 이름을 날린 국제 유치원이다.유치원에 다니는 학생들의 집안과 조건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월등했기에 성유리가 전에 찾아보던 유치원과는 차원이 달랐다.사실 성유리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하늘이가 박한빈 옆에 남아있으면 접하는 영역과 사귀는 친구, 그리고 사는 수준은 성유리가 평생 노력해도 하지 못할 것들이라는 사실을.지금 하늘이가 입고 있는 옷, 먹는 음식, 쓰는 물건들 전부 다 제일 좋은 것들이었다.전에 김서영은 하늘이를 데리고 각종 파티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전에 그녀는 그런 떠들썩한 장소에 가는 것을 꺼렸다.하지만 하늘이만큼은 세상의 이런저런 모습을 많이 봐야지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서 자주 데리고 나갔다.이런 일은 원래 엄마인 성유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마치 지금 사람들은 이미 성유리가 박한빈의 아내임을 확신하고 있듯이.박한빈의 아내로서 그런 연회나 파티엔 응당 성유리가 참석해야 했고 그게 제일 기본적인 일이었다.하지만 김서영은 성유리를 강박하지 않았고 홀로 하늘이를 데리고 나가기를 반복했다.나중에 그녀는 하늘이를 데리고 승마장까지 갔고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말을 바로 사주기도 했었다.집에 돌아온 하늘이는 성유리에게 승마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자랑했다.사진 속 조련사는 하늘이를 앞에 앉히고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고 아이는 승마복을 입은 채로 즐거운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성유리는 행복해 보이는 사진 속 아이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엄마, 거기 진짜 재밌어. 다음에 우리 같이 갈까?”하늘이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난 말 탈 줄 몰라.”성유리가 난처해하며 대답했다.“괜찮아. 거기 말 잘 타는
“사실 요즘 한빈이가 매일 사씨 저택으로 향했어.”“아니면 왜 사하나 씨 가족들이 그렇게 흥분하겠니?”“근데 한빈이 걔가... 하도 멍청해서 듣기 좋은 말들을 하는 법을 몰라. 그래서 가족분들이 반겨주지 않는 거고.”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그 사람이 사씨 저택에 왜... 뭐 하러 갔는데요?”“유리 네가 보기엔 뭐 하러 간 것 같은데?”김서영은 묻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했다.“당연히 널 위해서지.”“네가 사하나 씨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발이 묶여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것도 보기가 싫었을 거야.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도 없으니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유가족들이 너를 용서하게 하는 일이었겠지.”“아마 네가 그 사람들에게 용서받는다면 좀 괜찮아질 줄 알았나 봐.”“사실 걔가 한 일이 오늘 내가 한 일과 별반 다를 건 없었어. 그냥... 난 네가 보는 앞에서 하기를 선택했을 뿐이지.”“성유리, 난 네가 알았으면 해. 요즘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우리가 다 봤으니까 넌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제자리에 앉아 김서영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그러다 조금 뒤,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마치 온몸에 남은 모든 힘을 주먹을 쥐는데 쓰는지 손가락 마디는 이미 하얗게 변해있었고 몸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김서영은 그런 성유리의 모습을 보고도 그저 묵묵히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기만 했다.이때, 두 사람이 탄 차가 엔젤 월드에 들어서자 박한빈이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달려 나왔다.어찌나 급히 나온 건지 외투조차 걸치지 않은 그는 평소 무덤덤하던 표정과는 달리 한껏 더 격동돼 있었다.기사가 차를 주차하고 나서야 박한빈은 헐레벌떡 달려오며 김서영에게 물었다.“유리 데리고 어디 갔다 오시는 겁니까?”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거짓말을 하기 싫어 솔직히 대답했다.“사씨 저택.”그러자 박한빈의 안색이 더 어두워지더니 김서영에게 따지듯 물었다.
사민혁의 말에 성유리가 나서서 대답하려던 찰나, 김서영이 그녀를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저도 잘 압니다. 사하나 씨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클지.”“하지만 다시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이번 일에 유리의 잘못이 정말 존재하는지.”“자리에 있던 다른 목격자한테도 물었습니다. 근데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러더라고요. 그날 날씨가 안 좋아서 유리가 하나 씨를 말렸답니다. 아이랑 스키 타러 올라가지 말라고. 그런데도 하나 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어요.”“비록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두 분의 슬픔이 더 커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현실이 이렇습니다. 사하나 씨는 본인이 한 행동과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뿐이에요.”“지금 그게 무슨 뜻이죠? 제 딸이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건가요? 그런 선택을 했으니 잘 죽었다는 말이에요?”그 말에 류수미는 또다시 격동된 억양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김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사하나 씨는 너무 젊은 사람이었으니 누구라도 다 안타깝고 가엽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유리는 또 무슨 잘못을 지었나요?”“유리가 먼저 아이를 데리고 스키장에 가기로 한 것도 아니고 말리려고 애를 쓰기도 했잖아요. 눈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유리는 혼자 사고 현장으로 향해 두 사람을 찾으려고 했어요.”“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노력을 다한 아이예요. 그런데 더 이상 또 무얼 해야 되나요? 정말 자기 목숨으로 하나 씨의 죽음을 애도하고 보상해야 하나요? 유리가 죽는다고 해도 사하나 씨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텐데.”김서영의 말투는 너무 차분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들렸다.류수미는 그 말에 표정이 완전 사라져버렸고 사민혁 또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제가 유리를 데리고 온 건 설날에 인사를 드리러 온다는 핑계로 이번 일에 대해 정확히 정정하려는 의도였어요. 두 분은 유리랑 같이 있지 않으니 지금 얘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성유리를 본 김서영이 계속 말했다.“너도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이럴 테니까.”그럼에도 성유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됐어. 그만하고 아침부터 먹자. 밥 다 먹고... 넌 나랑 갈 데가 있어.”...김서영이 말한 갈 곳이 사씨 저택일 줄은 성유리가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마지막으로 사씨 저택에 왔을 때의 기억은 아직 성유리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리고 류수미와 했던 약속도.성유리는 류수미에게 사하나가 하늘이한테 썼던 마음들과 은혜를 꼭 갚겠다는 말을 했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아침에 박한빈이 그녀를 행복을 위해 직접 부탁한 평안부도, 하늘이가 엄마를 볼 때의 그 조심스러운 눈빛도, 사하나의 죽음도 다 잊고 싶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간의 추억들을 성유리가 어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사모님은 내가 비겁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할 거야.’‘분명 약속까지 했으면서...’“가자.”김서영의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성유리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유리의 손을 잡더니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김서영은 이미 사씨 가문의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상황인 것 같았다. 필경 그녀의 신분 또한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말이다.사씨 가문 사람들은 박한빈을 대하던 태도로 김서영을 대하진 않았지만 성유리에게는 쌀쌀맞았다.류수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문 채로 성유리를 노려보며 외쳤다.“쟤가 여길 어디라고 와요!”하지만 김서영은 옅은 미소만 지으며 대답했다.“안부 물으러 왔어요. 설날인데 어떻게 지내시나 보러 오고 싶기도 했고.”“안부요?”류수미는 화가 나 씩씩거리며 따지듯 물었다.“설날에 대체 왜 찾아오신 거예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시러 오셨나 봐요? 혹시나...”“아니요.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