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말을 하지 못했다.그녀도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고 말하려다 입까지 나온 말을 다시 삼켜 버렸다.이 일들을... 박한빈은 아마 다 잊었을 것이다.오죽했으면 이곳에 와서 휴가를 보내자고 제안했겠는가.그래서 성유리는 그와 그녀 사이의 ‘뜨거운' 감정도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마치 그녀가 그를 좋아할 때 그들이 함께 지내는 모든 일, 모든 세부 사항을 머릿속에 새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그녀를 선택한 것은 단지 그들이... 속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이번에 혼자 도인국에 온 성유리는 미리 인터넷에서 알아보고 전문적인 가이드를 찾았다.가이드는 이쪽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깔끔한 단발머리에 열정적이고 밝은 성격이었다.“성유리 언니죠?”성유리가 짐을 찾자마자 그녀가 다가왔는데 손에는 ‘성유리’라는 이름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다.“안녕하세요. 사하나예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안녕.”“호텔 예약했으니 바로 가면 돼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 그녀를 앞으로 안내했다.그녀는 전문적인 가이드였는데 가는 내내 성유리에게 이곳의 풍경을 소개하고, 성유리의 음식 취향을 물으며 그녀에게 맞는 레스토랑을 추천했다.“내일 단풍사부터 가봐요. 마침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서하나가 말했다.“최근 단풍사가 갑자기 핫해서 휴일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그래.”성유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사하나는 성유리의 냉담함을 느끼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다행히 앞으로 이틀 동안 그들은 즐겁게 지냈다.성유리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사하나의 스케줄에도 이의가 없었다. 사하나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탄할 만큼 순조롭게 진행했다.사흘째 되던 날, 성유리는 한 바에서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
“아까 저 사람 전 남자친구예요?”룸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가 직접 성유리에게 물었다.성유리는 먼저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에요? 하지만 두 사람이...”“전남편이야.”성유리의 대답에 사하나는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뒤에야 손뼉을 치며 말했다.“생각났어요. 금성의 지화 그룹 그분 아니에요?”“아는 사이야?”“음... 아는 사이라 할 수도 있죠. 국내 뉴스를 지켜봤는데 다른 회사 대머리 느끼한 남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편이잖아요.”성유리는 웃기만 했다.“그럼 아까 옆에 있던 사람은 누군데 유리 언니에게 언니라고 어떻게 부르나요?”“부모님이 입양한 딸이야.”성유리의 말에 너무 많은 정보량이 담겼는지 사하나의 입이 달걀 하나라도 집어넣을 수 있을만큼 벌어졌다.성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다시 잔을 들었다.“하지만 이젠 두 사람 모두 나랑 아무 관계가 없어. 며칠 동안... 재미있게 놀았어. 고마워.”사하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기쁨'이라는 두 글자가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지만 모른 척 술잔만 따라 들었다.“그럼 됐어요. 다음에 다시 오면 또 절 찾아요.”“그래.”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 속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이곳의 술 도수는 사실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술이 목구멍을 지나자 성유리는 맵고 쓰려 눈물을 흘릴 뻔했다.사하나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급하게 마셔서 그래요. 하지만 이틀 전에 술 못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왜 갑자기 마시는 거예요?”“응, 오늘은 마실 수 있어.”성유리는 웃으며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그녀는 원래... 하늘이 또 자신을 불쌍히 여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마지막 희망마저 허사가 됐다.아마 처음부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른다.많은 것은 그녀가 평생 얻지 못할 운명일 지도 모른다.온전한 가정이든 부모님의 사랑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아이든 말이다.스물여섯 살 먹도록 성유리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그녀는 술을 마셔서 볼이 발그스름해졌고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유리는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인한 뒤 그를 불렀다.“박한빈?”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마치 아까 그가 바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눈이 와요.”성유리는 그의 표정을 개의치 않는 듯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봐요. 눈이 엄청 많이 와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곳의 눈은 확실히 금성보다 더 아름다워요. 그래도 저는 금성의 눈이 더 좋아요.”성유리는 중얼거리며 계속 발걸음을 휘청거렸다. 박한빈이 팔을 꽉 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하지만 금성은 너무 추워요.”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물론 여기도 춥죠. 이번 겨울은... 참 기네요.”그녀의 목소리는 서서히 사라졌고 눈도 서서히 감겼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허리를 숙여 안아 올렸다.“한빈 오빠!”가게에서 나오던 심유정이 마침 이 광경을 보고 얼굴빛이 갑자기 하얗게 질려 아무 생각없이 달려들려고 했다.그러자 사하나가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섰다.“뭐 하는 거야? 비켜! 내가 누군지 알아?”성유정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는데 그 흉악한 모습은 방금 박한빈 앞에서 보여줬던 부드러움과는 완전히 달랐다.사하나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내가 누군지 알아요?”...박한빈은 그렇게 성유리를 안고 가버렸다.멀리 성유리는 아직도 성유정의 화가 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박한빈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달빛과 가로등을 비추어 남자의 얼굴도 어느 정도... 부드럽게 느껴졌다.이런 부드러움은 성유리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하지만 그녀는 똑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더없이 단호하던 그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지금 성유리 앞에 나타난 이 모습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갑자기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끝내 참
성유리는 여전히 도인국을 좋아하지 않았다.매년 관광객들로 붐비고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여전히 이곳을 좋아할 수 없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단지 빨리 금성으로 돌아가서 그녀만의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성씨 가문에서 찾아왔다.윤청하가 위독하다고 했다.성시원이 그동안 알맞은 신장이식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성유리는 친딸로 의료적으로도 이식 적임자였다.성유리는 거의 강제로 차에 태워졌는데 성시원을 본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요? 날 억지로 수술대에 올려놓고 싶어요?”성시원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손을 흔들어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그러고는 성유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원하는 게 뭐야?”성유리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대답했다.“당신 아내에게 분명히 말했었는데요? 회사를 주면 할 게요.”“회사는 내 피와 땀이야.”“그럼 당신의 아내는 뭔가요?”성유리가 되묻자 성시원은 말문이 막힌 채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성유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장 일어나 떠나려 했다.하지만 곧 성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술만 한다면 성씨 가문의 모든 재산 상속권을 줄 수 있어.”“헐, 당신이 죽으면 준다고요?”성유리의 말이 듣기 거북했던지 성시원은 결국 화를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당신이 언제 죽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유언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요.”성유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더욱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있어서 당신들은 이미 어떠한 신용도 없다는 거예요.”“성유리, 너무 그러지 마!”성시원은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난 네 아버지고 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은 너의 어머니야. 엄마가 없으면 네가 있을 수 있겠어? 한때는 피를 나눈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알고 있어요.”성유리가 대답했다.“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만약 그날이 온다면... 내가 직접 보내드릴 거예
성유정의 말이 끝나자 성시원의 얼굴빛은 갑자기 변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문득 성유정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이 지독한 생각을 뱉을 수 있냐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성유정도 이를 의식한 듯 황급히 말했다.“전 그저 엄마가 살아있길 바랄 뿐이에요. 아빠도 보셨잖아요. 엄마가 병마에 시달려서 어떻게 되었는지. 전 정말... 차마 지켜볼 수 없었어요.”성시원은 말을 하지 않았다.비록 그도 성유리가 죽어가는 엄마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을 원망하고, 그녀가 죽기를 수없이 저주했지만 성유정의 말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맞은편에 있는 성유정도 별말 없이 고개만 치켜든 채 그를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봤다.마침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족들 다 왜 여기 있어요? 빨리 와요.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이 말을 들은 성시원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여 바로 달려갔지만 윤청하는 이미 응급실에 실려 갔다.성시원이 도착했을 때, 의사는 그에게 위독 고지서를 건네줬다.성시원은 손을 떨며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아빠...”성유정은 울면서 그를 바라보았다.“엄마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에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요?”성시원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곳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냉정해 보였다. 한참 후에야 그는 갑자기 중얼거렸다.“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성유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일이 성공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켜진 수술 등을 힐끗 보았다.죽도록 억누르지 않았다면 그녀는 심지어 웃었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하늘도 자신을 돕는 것 같았다.“아빠, 만약 정말 손을 쓴다면 우리가 직접 할 수는 없어요.”성유정은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나서 말했다.“잊었어요? 지금 성유리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지석민이어야 해요.”“맞는 말이야.”성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하지만 지석민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알아?”“찾아보라고 하면 알아요.”성유정은
성유리는 누군가 미행하는 것 같았다.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해서 평소 외출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생필품을 사러 나갔다.원칙대로라면 그녀는 이동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보통 누군가 눈여겨볼 가능성은 없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성유리는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슈퍼마켓에 가려고 할 때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왔다. 그 오토바이는 목적이 분명한 듯 직접 그녀를 들이받을 기세였다!성유리가 깜짝 놀라 연신 뒷걸음질을 칠 때 길가에 마침 다른 사람이 지나갔고 오토바이는 그렇게 그녀 옆을 지나쳐 훌쩍 떠났다.쌩쌩 지나가는 그 바람은 아직도 성유리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온몸이 굳어져 꼼짝도하지 못했다.그녀는 방금 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그 매서운 눈빛은 마치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벗겨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성유리도 많은 걸 생각할 겨를이 없어 슈퍼마켓도 가지 않고 외투를 꽁꽁 여미고 돌아갔다.문을 닫은 후에야 그녀는 자신의 벌렁이던 심장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슈퍼마켓에 갈 수 없어서 그녀는 배달 음식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고 비고에는 원래대로 배달 기사에게 문 앞에 두라고 썼다.그러나 30분 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배달입니다.”둔탁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성유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방 안에서 소리쳤다.“문 앞에 두면 돼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성유리는 2분을 더 기다린 후 일어나서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카메라를 통해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그제야 문을 열었다.그러나 문 옆에는 그녀의 배달 음식이 없었다.성유리가 어리둥절해 하며 배달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순간 차가운 칼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성유리의 온몸을 차갑게 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서연아, 오랜만이야.”성유리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며 고개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갑자기 발을 들어 그의 하체를 세게 걷어찼다.성유리가 독기를 품은 데다 그곳이 남자의 가장 약한 곳이기 때문에 지석민은 아파서 즉시 손으로 그곳을 움켜쥐며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감히 나에게 손을 써? 죽여버릴 거야!”말을 마친 지석민은 이번엔 사정없이 손으로 성유리의 목을 졸랐다.“천한 년! 배은망덕한 년! 재수 없어! 오늘 널 죽여버릴 거야!”그는 욕하면서 손에 힘을 점점 더 세게 주었는데 성유리는 숨을 쉴 수 없어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부림치며 그의 팔을 잡았지만 핏자국을 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날 창피하게 여긴다는 걸 알아. 네 친아버지보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네 친아버지도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겠어? 지금도 널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널 죽여 그 여편네를 살리려 계획했어.”지석민의 말을 듣자 성유리의 흐려져 있던 의식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그녀는 애써 눈을 뜨며 간신히 물었다.“뭐라고요?”“내가 뭐라고 했냐고?”지석민이 쌀쌀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너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 네가 여기에 있는 걸 내가 어떻게 안 것 같아? 네 친엄마가 곧 죽는다며? 네가 죽지 않으면 누가 이식수술을 해주겠어?”이 말은 총알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이식수술... 내가 이식수술을 하도록 심지어 지석민을 보냈어?’아니다. 그녀에게 수술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죽으라는 것이다.이게 친부모가 할 짓인가?성유리는 지석민의 팔뚝을 잡았던 손을 갑자기 놓았다. 지석민은 그녀가 몸부림을 포기한 줄 알고 힘을 점점 풀며 그녀의 옷을 잡아당겼다.“일찍 나와 함께 잤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널 얼마나 예뻐해 줬겠어? 지금의 넌 부모 사랑도 없고 남편은 다른 여자랑 도망갔어. 넌...”지석민은 말을 채 하지도 못하고 끊었다. 짜릿한 아픔이 아랫배에서 느껴져 그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는데 그곳엔... 가위가 꽂혀 있었다.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성유리를
“너의 그 아빠야! 너 빨리 날 풀어줘. 나 병원에 가야 해. 안그러면 곧 죽을 거야!”성유리는 몸부림치려는 지석민의 목에 가위를 대고 더 깊숙이 찔렀다.“거짓말하지 마. 난 믿을 수 없어.”성유리가 말했다.“정말이야. 거짓말 아니야. 서연아. 정말 널 속이지 않았어! 원래 나더러 널 납치한 후 교통 사고를 만들어달라고 했어.”지석민은 계획을 말했다.“네가 어머니에게 이식수술을 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유체기증 계약에 사인했기 때문에 의외의 사고로 죽은 거면 네 엄마가 이식받을 수 있대. 난 그저 이기심에 어차피 너 죽을 거면 먼저 할 것 다 하고...”지석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발은 갑자기 그의 복부에 난 상처를 밟았다.상처에서 피가 빠르게 솟구쳐 나오자 가슴을 찢는듯한 지석민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하지만 성유리의 눈빛에 지석민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성유리의 손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지만 눈빛은 마치 생명체가 없는 물건을 보는 것처럼 냉혹했다. 그제야 지석민은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이런 공포 속에서 지석민의 안색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렸다.“서연아, 흥분하지 마. 난 너의 아빠야. 잊지마, 내가 너를 인신매매범에게서 빼앗아왔어. 내가 아니라면 너...”“아빠?”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당신 따위가 아빠라고? 내 아빠라고 생각이나 해봤어? 아빠라는 단어를 모욕하지 마.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는데 그를 바라보는 눈빛도 싸늘해졌다.지석민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무슨 말을 하려던 참에 성유리가 갑자기 입을열었다.“성시원에게 전화해.”“뭐... 뭐라고?”“성시원에게 전화해서 그자가 날 죽이러 당신을 보냈다는 걸 인정하면 그만 놓아줄게. 아니면... 당신을 죽일 거야.”말을 마친 성유리는 정말로 칼날을 지석민의 목에 대고 찌르려고 힘을 줬다.지석민은 즉시 소리 질렀다.“좋아! 전화할게. 내가 당장 전화할게!”지석민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려고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인지 불안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성유리가 입을 떼기 전, 박한빈은 시원하게 비밀번호와 인증코드를 알려주었다. 그는 성유리기에 컴퓨터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묻지도 않았다. 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태도에 알겠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빠르게 박한빈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컴퓨터 화면이 열리자 배경 화면이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성유리는 멍해졌다가 이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의 일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제 와서 이러는 박한빈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래서 성유리는 증거들을 찾기 전에 먼저 박한빈의 컴퓨터 배경 화면을 바꿔버렸다. 제일 간단하고 기본 설정인 배경 화면으로 바꾸자 성유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그 문제는 바로 박한빈이 하나하나 잠가버린 모든 자료와 파일들이었다. 컴퓨터를 쓰겠다고 말했지만 파일들 비밀번호까지 알려달라면 들켜버릴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혼자서 이것저것 입력해 봤지만 다 틀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사무실 책상에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뒤에 있는 책장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성유리는 서재를 다 찾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어 결국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시각,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박한빈은 여전히 도연제에 돌아오지 않았고 성유리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온 성유리는 자연스럽게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굳게 잠겨있긴 하지만 성유리는 방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다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결국 그 방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래로 내려갔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감았던 눈을 뜨자 성유리는 제일 먼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정신을 차려
성유리는 자기가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미 금성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한 여름이었지만 성유리는 전혀 덥지도 않았고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택시는 빠른 속도도 달려 도연제에 도착했다. 눈앞에 있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성유리는 방금 전 성시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기회이자 방법이야.]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증거를 찾고 싶었고 그 증거로 박한빈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생각은 성시원과 달랐다.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성유리는 그가 행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내려오더라도 언젠간 꼭 다시 올라와 두 배로 갚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과 비슷한 사람을 대할 때면 꼭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초원에서 만난 두 마리의 맹렬한 맹수는 싸울 때 서로 할퀴고 뜯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로한테 제일 치명적인 상을 입혀야 승리를 거머쥐는 잔인한 현실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차에서 내린 성유리는 이곳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에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유리는 이내 박한빈의 서재를 찾았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들 떠올렸다. [오늘 바빠서 못 돌아갈 거야.] 비록 자신이 찾는 서류가 서재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유리에게 있어서 지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성유리는 굳게 잠긴 문에 몇 번이나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박한빈의 생일이나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 게다가 성유리 본인의 생일까지 입력해 봤지만 여전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성유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까지 끄집어내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띠릭! 그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유리가 마지막에 입력한 숫자들은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 두
그 말인즉슨 그들이 담판을 짓기 전부터 사실 박한빈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성리그룹의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만 싶었다. 모든 일은 성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결정에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필경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한빈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가끔 박한빈이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되어 항상 져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박한빈을 대하고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성유리는 이제 서야 박한빈의 모든 “가면”을 벗겨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고 이상했지만 웃기게도 성유리는 아직 박한빈의 이런 태도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허나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의 아픔은 아니었고 그저 피부가 살짝 날카로운 칼에 긁힌 것 같은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갓 치유가 된 상처 부위를 또다시 긁혔기에 이런 고통은 새로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프고 쓰렸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에 피는 곧 멈췄기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성유리가 입을 뗐다.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요. 남들처럼 파산신청이나 할 수 있어도 정말 불행 중 다행이고요.” 평온한 말투로 말을 하는 성유리는 본인조차도 자기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성유리의 말에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못했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몸 잘 챙기세요.”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쳐다보다 짧은 인사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시원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말했다. “사실 방법이 하나 더 남아있어.” 앞으로 뚜벅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 없던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무엇보다 성시원은 금방 의식을 회복한 사람으로서 누구든 지금 흥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간병인은 성시원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반면에 성유리는 아주 덤덤했다.그는 데인 종아리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견디며 천천히 성시원에게 다가갔다.성시원은 생각보다 당돌한 성유리의 모습에 놀랐는지 손에 든 컵을 다시 던지려고 움직였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유리가 그의 손을 단단히 내리누르며 막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간병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나가주세요.”이 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 중이던 간병인은 성유리의 말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곧장 자리를 떴다.성유리가 성시원을 보며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 다 알고는 계세요?”“알다마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박한빈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너한테 인주 프로젝트 맡길 때부터 이미 함정이었던 거야! 이거 다 둘이서 짠 거 아니냐? 오늘 이러려고...”“성리 그룹이 이렇게 된 건 인주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에요.”성유리가 성시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가장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고명도와 아버지입니다.”성유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성시원은 그 말에 넋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뭐라고?”성시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박해보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만약 고명도가 그 큰 거액을 빼돌려 자금 흐름만 안 끊었어도 성리 그룹이 이런 상태가 됐을까요? 그리고 그런 고명도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아버지께도 잘못이 있어요. 지금 회사가 주주들 권리랑 악성 채무 관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그동안 아버지께서 너무 무책임했던 결과 아닙니까?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딸을 이리저리 내다 팔아가며 이익을 얻으려고 하셨잖아요. 생각 못 해보셨어요? 성리 그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성리가 단번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그 말에
뒤를 미처 보지 못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날아온 베개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성유리는 문득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박한빈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박한빈에게 던져진 베개처럼 겉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발버둥 칠수록 그저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결국 성유리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연정우가 밝힌 입장문을 확인했다.연정우는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는 대신 며칠 연기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언제까지 연기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체면을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무산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성유리는 그 성명을 몇 분 동안 보다가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 댓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그리고 마침 병원에 도착했다.어제의 소식이 퍼지자 병원 근처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지만 나름 철저한 병원의 보안 덕분에 그들은 입구 밖에만 몰려 있었다.차에서 내리는 성유리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렸다.“업계에서 누가 일부러 성리 그룹을 음해하려고 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성리 그룹의 향후 계획은 뭔가요?”“파산 신청하실 예정인가요?”“아버님께서 깨어나셨나요? 충격이 꽤 크신 것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수많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성유리를 둘러싸자 병원의 보안 요원들이 다가와 간신히 기자들을 저지했다.그리고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으로 인한 추측성 기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온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침묵에 대해 추측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성유리의 모습에 성리 그룹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그리고 성시원의 상태로 그다지 좋지
무작정 뺨을 때린 것은 성유리의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박한빈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그리고 박한빈이 정말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녀의 손을 잡거나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어젯밤 뺨에 남긴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정말 웃긴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대칭 맞춰 두 뺨에 손자국이 생긴 격이었다.“악몽 꿨어?”박한빈은 아프다는 기색 하나 없이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꿈일 뿐이야.”박한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네. 넌 아버지 뵈러 병원 가 봐. 그리고 연정우랑 결혼 취소했다고도 전하고.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박한빈의 목소리는 짧고도 단호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성유리가 물었다.박한빈은 단추를 잠그던 동작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쨌든 성리 그룹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번 일로 주주들 반응도 봤을 거고, 성리 그룹의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거야. 본질이 아예 썩어 있다고. 오늘 평가 진행하고 청산해야 할 거 청산할 거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건 뺏을 생각 없으니까.”박한빈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손에 잡히는 베개를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그럼 성리 그룹은 인수합병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어젠 분명 그런 말 없었잖아!”“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박한빈은 자신에게 던져진 베개를 잡은 채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성리 그룹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고,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을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준 건 나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난 단지 너희가 지화 그룹에 끼친 손해를 묻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성리 그룹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어.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널 위해서야. 너도 알잖아. 네가 성리 그룹에 있는 한, 회장님은 어떻게든 우리 관계를
지금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다. 다 죽은 꽃에 뒤늦게 찾아온 햇빛과 보살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성유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으려던 성유리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그녀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뒤이어 창가에 묶여 있는 커튼 끈과 맞은 편 드레스룸의 유리문 너머 걸려 있는 익숙한 옷가지도 눈에 들어왔다.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이곳에 남겨두고 갔던 물건들을 박한빈이 다 옮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그 물건들은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다.옷들은 성유리가 박 대표의 아내라는 칭호에 걸맞을 수 있게 김서영이 사준 옷들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떠날 때도 굳이 챙겨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고 스킨케어 제품들도... 아마 이젠 유통기한이 다 지나지 않았을까?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춘 채 눈을 질끈 감았다.어둠 속에서 박한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샤워를 금방 마치고 나온 그는 상쾌한 향기를 풍기며 성유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점점 힘을 주었다.둘의 피부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단단히 맞닿았다.하지만 박한빈은 더 가까이 붙으려는 듯 힘을 더 주더니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마치 성유리를 자신의 육체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그 엄청난 힘에 성유리는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버거웠다.참다못한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등을 몇 번 꼬집으며 말했다.“놔! 아파!”그녀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의 힘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밀착해 있었고 입술은 수시로 그녀의 피부에 댄 채 가볍게 키스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개새끼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조금 전 그의 뺨을 후려갈겼을 때, 오히려 즐겁
성유리는 자신이 다시 도연제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곳을 떠나던 그 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저택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박한빈이 모두 내보낸 듯했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집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방의 문이 그에 의해 열렸다.안의 가구 배치가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듯했지만 성유리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표정을 굳힌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의 행동에서는 다정함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런 상황을 이미 예측한 성유리도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아무런 저항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성유리의 무반응이 박한빈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을 세게 물었다.단순한 애무가 아니라 정말 힘껏 문 것이었다.박한빈의 이빨이 피부를 뚫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성유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들어 박한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그녀의 손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며칠 동안 쌓여왔던 모든 분노와 억울함이 이 한 대에 실려 박한빈의 뺨에 닿았다.그렇게 새하얀 그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그 순간, 마음이 약해진 성유리는 자신이 너무 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런 얼굴로 출근한다면 분명 모두의 이목을 끌 게 뻔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성유리가 박한빈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그 반응에 당황한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병신.”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매만졌다.하지만 그런 다정함이 성유리는
“성...”먼저 입을 연 쪽은 연정우였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두세 걸음 만에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갑시다.”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쉬어 있었다.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성유리는 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박한빈의 손을 잡아끌었다.박한빈은 저항하지 않은 채 성유리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연정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성유리의 다른 한 손을 덥석 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지만 성유리가 그보다 한발 빨리 연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 나도... 널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지금 성리 그룹이 어떤 상황인지 정우 씨도 잘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난 회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제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은 없겠다. 결혼식은... 취소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연정우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박한빈의 손을 다시 쥐더니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술집은 여전히 떠들썩했다.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화려한 여자들과 환히 웃는 남자들 덕에 공기 중에는 유흥의 분위기가 가득 찼다.이곳에 바로 금성이었다.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갑기 그지없는 도시였다.이곳에서 매일 누군가는 뭔가를 잃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 아무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시내 중심가, 그것도 가장 번화하기로 소문난 곳에서도 투자 버블로 인해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그 흩뿌려진 피와 사라진 생명은 사회 뉴스에 짧은 보도 한 줄로 남아 있었다.성유리 역시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작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존재.그러니 성유리는 자신이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스스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의 손짓 한 번에 짓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