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말을 하지 못했다.그녀도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고 말하려다 입까지 나온 말을 다시 삼켜 버렸다.이 일들을... 박한빈은 아마 다 잊었을 것이다.오죽했으면 이곳에 와서 휴가를 보내자고 제안했겠는가.그래서 성유리는 그와 그녀 사이의 ‘뜨거운' 감정도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마치 그녀가 그를 좋아할 때 그들이 함께 지내는 모든 일, 모든 세부 사항을 머릿속에 새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그녀를 선택한 것은 단지 그들이... 속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이번에 혼자 도인국에 온 성유리는 미리 인터넷에서 알아보고 전문적인 가이드를 찾았다.가이드는 이쪽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깔끔한 단발머리에 열정적이고 밝은 성격이었다.“성유리 언니죠?”성유리가 짐을 찾자마자 그녀가 다가왔는데 손에는 ‘성유리’라는 이름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다.“안녕하세요. 사하나예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안녕.”“호텔 예약했으니 바로 가면 돼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 그녀를 앞으로 안내했다.그녀는 전문적인 가이드였는데 가는 내내 성유리에게 이곳의 풍경을 소개하고, 성유리의 음식 취향을 물으며 그녀에게 맞는 레스토랑을 추천했다.“내일 단풍사부터 가봐요. 마침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서하나가 말했다.“최근 단풍사가 갑자기 핫해서 휴일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그래.”성유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사하나는 성유리의 냉담함을 느끼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다행히 앞으로 이틀 동안 그들은 즐겁게 지냈다.성유리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사하나의 스케줄에도 이의가 없었다. 사하나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탄할 만큼 순조롭게 진행했다.사흘째 되던 날, 성유리는 한 바에서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
“아까 저 사람 전 남자친구예요?”룸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가 직접 성유리에게 물었다.성유리는 먼저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에요? 하지만 두 사람이...”“전남편이야.”성유리의 대답에 사하나는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뒤에야 손뼉을 치며 말했다.“생각났어요. 금성의 지화 그룹 그분 아니에요?”“아는 사이야?”“음... 아는 사이라 할 수도 있죠. 국내 뉴스를 지켜봤는데 다른 회사 대머리 느끼한 남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편이잖아요.”성유리는 웃기만 했다.“그럼 아까 옆에 있던 사람은 누군데 유리 언니에게 언니라고 어떻게 부르나요?”“부모님이 입양한 딸이야.”성유리의 말에 너무 많은 정보량이 담겼는지 사하나의 입이 달걀 하나라도 집어넣을 수 있을만큼 벌어졌다.성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다시 잔을 들었다.“하지만 이젠 두 사람 모두 나랑 아무 관계가 없어. 며칠 동안... 재미있게 놀았어. 고마워.”사하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기쁨'이라는 두 글자가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지만 모른 척 술잔만 따라 들었다.“그럼 됐어요. 다음에 다시 오면 또 절 찾아요.”“그래.”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 속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이곳의 술 도수는 사실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술이 목구멍을 지나자 성유리는 맵고 쓰려 눈물을 흘릴 뻔했다.사하나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급하게 마셔서 그래요. 하지만 이틀 전에 술 못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왜 갑자기 마시는 거예요?”“응, 오늘은 마실 수 있어.”성유리는 웃으며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그녀는 원래... 하늘이 또 자신을 불쌍히 여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마지막 희망마저 허사가 됐다.아마 처음부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른다.많은 것은 그녀가 평생 얻지 못할 운명일 지도 모른다.온전한 가정이든 부모님의 사랑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아이든 말이다.스물여섯 살 먹도록 성유리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그녀는 술을 마셔서 볼이 발그스름해졌고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유리는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인한 뒤 그를 불렀다.“박한빈?”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마치 아까 그가 바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눈이 와요.”성유리는 그의 표정을 개의치 않는 듯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봐요. 눈이 엄청 많이 와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곳의 눈은 확실히 금성보다 더 아름다워요. 그래도 저는 금성의 눈이 더 좋아요.”성유리는 중얼거리며 계속 발걸음을 휘청거렸다. 박한빈이 팔을 꽉 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하지만 금성은 너무 추워요.”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물론 여기도 춥죠. 이번 겨울은... 참 기네요.”그녀의 목소리는 서서히 사라졌고 눈도 서서히 감겼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허리를 숙여 안아 올렸다.“한빈 오빠!”가게에서 나오던 심유정이 마침 이 광경을 보고 얼굴빛이 갑자기 하얗게 질려 아무 생각없이 달려들려고 했다.그러자 사하나가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섰다.“뭐 하는 거야? 비켜! 내가 누군지 알아?”성유정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는데 그 흉악한 모습은 방금 박한빈 앞에서 보여줬던 부드러움과는 완전히 달랐다.사하나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내가 누군지 알아요?”...박한빈은 그렇게 성유리를 안고 가버렸다.멀리 성유리는 아직도 성유정의 화가 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박한빈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달빛과 가로등을 비추어 남자의 얼굴도 어느 정도... 부드럽게 느껴졌다.이런 부드러움은 성유리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하지만 그녀는 똑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더없이 단호하던 그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지금 성유리 앞에 나타난 이 모습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갑자기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끝내 참
성유리는 여전히 도인국을 좋아하지 않았다.매년 관광객들로 붐비고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여전히 이곳을 좋아할 수 없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단지 빨리 금성으로 돌아가서 그녀만의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성씨 가문에서 찾아왔다.윤청하가 위독하다고 했다.성시원이 그동안 알맞은 신장이식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성유리는 친딸로 의료적으로도 이식 적임자였다.성유리는 거의 강제로 차에 태워졌는데 성시원을 본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요? 날 억지로 수술대에 올려놓고 싶어요?”성시원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손을 흔들어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그러고는 성유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원하는 게 뭐야?”성유리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대답했다.“당신 아내에게 분명히 말했었는데요? 회사를 주면 할 게요.”“회사는 내 피와 땀이야.”“그럼 당신의 아내는 뭔가요?”성유리가 되묻자 성시원은 말문이 막힌 채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성유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장 일어나 떠나려 했다.하지만 곧 성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술만 한다면 성씨 가문의 모든 재산 상속권을 줄 수 있어.”“헐, 당신이 죽으면 준다고요?”성유리의 말이 듣기 거북했던지 성시원은 결국 화를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당신이 언제 죽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유언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요.”성유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더욱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있어서 당신들은 이미 어떠한 신용도 없다는 거예요.”“성유리, 너무 그러지 마!”성시원은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난 네 아버지고 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은 너의 어머니야. 엄마가 없으면 네가 있을 수 있겠어? 한때는 피를 나눈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알고 있어요.”성유리가 대답했다.“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만약 그날이 온다면... 내가 직접 보내드릴 거예
성유정의 말이 끝나자 성시원의 얼굴빛은 갑자기 변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문득 성유정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이 지독한 생각을 뱉을 수 있냐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성유정도 이를 의식한 듯 황급히 말했다.“전 그저 엄마가 살아있길 바랄 뿐이에요. 아빠도 보셨잖아요. 엄마가 병마에 시달려서 어떻게 되었는지. 전 정말... 차마 지켜볼 수 없었어요.”성시원은 말을 하지 않았다.비록 그도 성유리가 죽어가는 엄마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을 원망하고, 그녀가 죽기를 수없이 저주했지만 성유정의 말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맞은편에 있는 성유정도 별말 없이 고개만 치켜든 채 그를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봤다.마침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족들 다 왜 여기 있어요? 빨리 와요.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이 말을 들은 성시원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여 바로 달려갔지만 윤청하는 이미 응급실에 실려 갔다.성시원이 도착했을 때, 의사는 그에게 위독 고지서를 건네줬다.성시원은 손을 떨며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아빠...”성유정은 울면서 그를 바라보았다.“엄마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에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요?”성시원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곳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냉정해 보였다. 한참 후에야 그는 갑자기 중얼거렸다.“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성유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일이 성공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켜진 수술 등을 힐끗 보았다.죽도록 억누르지 않았다면 그녀는 심지어 웃었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하늘도 자신을 돕는 것 같았다.“아빠, 만약 정말 손을 쓴다면 우리가 직접 할 수는 없어요.”성유정은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나서 말했다.“잊었어요? 지금 성유리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지석민이어야 해요.”“맞는 말이야.”성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하지만 지석민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알아?”“찾아보라고 하면 알아요.”성유정은
성유리는 누군가 미행하는 것 같았다.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해서 평소 외출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생필품을 사러 나갔다.원칙대로라면 그녀는 이동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보통 누군가 눈여겨볼 가능성은 없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성유리는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슈퍼마켓에 가려고 할 때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왔다. 그 오토바이는 목적이 분명한 듯 직접 그녀를 들이받을 기세였다!성유리가 깜짝 놀라 연신 뒷걸음질을 칠 때 길가에 마침 다른 사람이 지나갔고 오토바이는 그렇게 그녀 옆을 지나쳐 훌쩍 떠났다.쌩쌩 지나가는 그 바람은 아직도 성유리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온몸이 굳어져 꼼짝도하지 못했다.그녀는 방금 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그 매서운 눈빛은 마치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벗겨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성유리도 많은 걸 생각할 겨를이 없어 슈퍼마켓도 가지 않고 외투를 꽁꽁 여미고 돌아갔다.문을 닫은 후에야 그녀는 자신의 벌렁이던 심장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슈퍼마켓에 갈 수 없어서 그녀는 배달 음식을 주문할 수밖에 없었고 비고에는 원래대로 배달 기사에게 문 앞에 두라고 썼다.그러나 30분 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배달입니다.”둔탁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성유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방 안에서 소리쳤다.“문 앞에 두면 돼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성유리는 2분을 더 기다린 후 일어나서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카메라를 통해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그제야 문을 열었다.그러나 문 옆에는 그녀의 배달 음식이 없었다.성유리가 어리둥절해 하며 배달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순간 차가운 칼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성유리의 온몸을 차갑게 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서연아, 오랜만이야.”성유리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며 고개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갑자기 발을 들어 그의 하체를 세게 걷어찼다.성유리가 독기를 품은 데다 그곳이 남자의 가장 약한 곳이기 때문에 지석민은 아파서 즉시 손으로 그곳을 움켜쥐며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감히 나에게 손을 써? 죽여버릴 거야!”말을 마친 지석민은 이번엔 사정없이 손으로 성유리의 목을 졸랐다.“천한 년! 배은망덕한 년! 재수 없어! 오늘 널 죽여버릴 거야!”그는 욕하면서 손에 힘을 점점 더 세게 주었는데 성유리는 숨을 쉴 수 없어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부림치며 그의 팔을 잡았지만 핏자국을 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날 창피하게 여긴다는 걸 알아. 네 친아버지보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네 친아버지도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겠어? 지금도 널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널 죽여 그 여편네를 살리려 계획했어.”지석민의 말을 듣자 성유리의 흐려져 있던 의식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그녀는 애써 눈을 뜨며 간신히 물었다.“뭐라고요?”“내가 뭐라고 했냐고?”지석민이 쌀쌀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너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 네가 여기에 있는 걸 내가 어떻게 안 것 같아? 네 친엄마가 곧 죽는다며? 네가 죽지 않으면 누가 이식수술을 해주겠어?”이 말은 총알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이식수술... 내가 이식수술을 하도록 심지어 지석민을 보냈어?’아니다. 그녀에게 수술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죽으라는 것이다.이게 친부모가 할 짓인가?성유리는 지석민의 팔뚝을 잡았던 손을 갑자기 놓았다. 지석민은 그녀가 몸부림을 포기한 줄 알고 힘을 점점 풀며 그녀의 옷을 잡아당겼다.“일찍 나와 함께 잤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널 얼마나 예뻐해 줬겠어? 지금의 넌 부모 사랑도 없고 남편은 다른 여자랑 도망갔어. 넌...”지석민은 말을 채 하지도 못하고 끊었다. 짜릿한 아픔이 아랫배에서 느껴져 그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는데 그곳엔... 가위가 꽂혀 있었다.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성유리를
“너의 그 아빠야! 너 빨리 날 풀어줘. 나 병원에 가야 해. 안그러면 곧 죽을 거야!”성유리는 몸부림치려는 지석민의 목에 가위를 대고 더 깊숙이 찔렀다.“거짓말하지 마. 난 믿을 수 없어.”성유리가 말했다.“정말이야. 거짓말 아니야. 서연아. 정말 널 속이지 않았어! 원래 나더러 널 납치한 후 교통 사고를 만들어달라고 했어.”지석민은 계획을 말했다.“네가 어머니에게 이식수술을 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유체기증 계약에 사인했기 때문에 의외의 사고로 죽은 거면 네 엄마가 이식받을 수 있대. 난 그저 이기심에 어차피 너 죽을 거면 먼저 할 것 다 하고...”지석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발은 갑자기 그의 복부에 난 상처를 밟았다.상처에서 피가 빠르게 솟구쳐 나오자 가슴을 찢는듯한 지석민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하지만 성유리의 눈빛에 지석민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성유리의 손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지만 눈빛은 마치 생명체가 없는 물건을 보는 것처럼 냉혹했다. 그제야 지석민은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이런 공포 속에서 지석민의 안색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렸다.“서연아, 흥분하지 마. 난 너의 아빠야. 잊지마, 내가 너를 인신매매범에게서 빼앗아왔어. 내가 아니라면 너...”“아빠?”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당신 따위가 아빠라고? 내 아빠라고 생각이나 해봤어? 아빠라는 단어를 모욕하지 마.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는데 그를 바라보는 눈빛도 싸늘해졌다.지석민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무슨 말을 하려던 참에 성유리가 갑자기 입을열었다.“성시원에게 전화해.”“뭐... 뭐라고?”“성시원에게 전화해서 그자가 날 죽이러 당신을 보냈다는 걸 인정하면 그만 놓아줄게. 아니면... 당신을 죽일 거야.”말을 마친 성유리는 정말로 칼날을 지석민의 목에 대고 찌르려고 힘을 줬다.지석민은 즉시 소리 질렀다.“좋아! 전화할게. 내가 당장 전화할게!”지석민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려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를 썼고 덕분에 아이는 이내 즐거워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퇴원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차례차례 성유리에게 말해줬고 그녀는 옆에 앉아 아이의 말을 경청해줬다.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건네줄 때에도 하늘이는 떼도 안 쓰고 순순히 약을 복용했고 부작용 때문에 힘든지 침대에 누워 성유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며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녀의 자세는 어딘가 이상했지만 아이가 너무 편해하니 바꾸지도 않았다. 하늘이는 병원 병실에 있는 것이 너무 안정감이 없는 건지 눈을 떠서도, 눈을 감을 때도 성유리가 안 보이면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저려오는 다리와 팔을 애써 주무르며 하늘이 곁을 지켜야 했고 아이가 깊은 잠에 들어서야 천천히 팔을 뺐다. “성유리 씨.” 간병인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 하늘이가 잠에 든 후, 성유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밖에 어떤 사람이 계속 앉아 있던데 아시는 분이에요?” 성유리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곧 애써 부정했다. 필경 박한빈이 어떤 사람인지 성유리는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방금 전, 하늘이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박한빈은 화가 나 바로 병원을 떠났다고 성유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병실 밖을 나가보니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성유리가 돌아왔을 때에도 그 의자에 앉아 있던 그였지만 현재는 태블릿도 보지 않은 채로 멍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박한빈에게로 다가가며 먼저 말했다. “죄송해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눈빛은 마치 왜 사과를 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하늘이가 요즘... 불안정해요. 일부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하려던 말을 이어갔고 그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물었다. “연정우 씨도 하늘이를 만났어?” 성유리는 왜 박
하늘이의 목소리는 아주 날카로웠다. 박한빈은 물론, 성유리조차 하늘이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며 아이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했다. “하늘아, 너...” “난 저 사람 보기 싫어. 엄마, 저 사람 나가게 해. 나가게 하란 말이야!” 하늘이는 떼를 쓰며 성유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작디작은 아이의 손등에는 아직도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는데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바늘이 당겨지며 피가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하늘이가 다칠까 봐 재빨리 아이의 손을 눌러 진정시키며 달랬다. “알았어. 보지 마. 하늘아, 괜찮으니까 진정해.” 말을 마친 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살짝 바라보았고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성유리는 그에게 상처 주지 않게 에둘러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예상과 달리 박한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스스로 뒤돌아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하늘이는 조금씩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성유리의 팔을 꼭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괜찮아졌어?” 성유리는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에게 물었다. “하늘이가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여기 있잖아.” 하늘이는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보더니 한참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 하늘이가 왜 그 사람을 보기 싫은지 엄마에게 말해줄 수 있어?”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아이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며 더 묻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늘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사람도 하늘이를 싫어하니까.” 그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란 듯 멈칫했다. 그리고 하늘이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하늘이가 먼저 말을 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그 사람은 하늘이를 싫어해. 그래서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잖아. 저번에도 하늘이를 붙잡고 억지로 사과하게 했잖아.” “그건 아니야. 하늘아.” 성
그녀의 말이 끝나자 연정우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네가 하고 싶었던 말이지?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말을 마친 성유리는 그대로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연정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더니 물었다. “그래서 넌 결국 박한빈 씨를 선택한 거야? 그런데 너 그거 알아? 그는 곧 결혼할 사람이야.” ... 성유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이가 있는 병실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병실 밖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옆에는 항상 들고 다니는 노트북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는 태블릿을 들고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진지하고도 엄숙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방금 어딘가에서 급히 온 것처럼 보이는 그는 평소 항상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옷에도 약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원래 태블릿 화면만 보고 있던 그는 성유리가 그를 바라보는 순간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약 십 미터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VIP 병동 복도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고요한 나머지 성유리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잠깐 망설이던 성유리는 그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왔어?” 박한빈이 태블릿을 닫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 태도에 박한빈은 살짝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일 없으면 오면 안 되나?” 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예요. 며칠 전에는 계속 안 오셨잖아요?” “출장 다녀왔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넌 계속 날 기다렸던 거야?” 성유리는 자신의 말을 들은 그가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내렸는지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박한빈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연정우는 지금 웃고는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그의 눈빛엔 지금 냉철함과 날카로움 뿐만 남아있는 듯했다. 성유리는 그 눈빛에 당황했지만 이내 진정하며 입을 땠다.“넌 아닐 거야.” “응?” “넌 유효정 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았잖아. 근데 전에 그 사람은 납치와 상해치사죄로 벌을 받았고. 그러니까 네 목표는 이뤄졌지. 굳이 네가 유씨 가문을 신고할 필요가 없지 않아? 그래서 난 너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 성유리는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게 분석했고 연정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더욱 환하게 웃더니 물었다. “난 지금 기뻐해야 되는 건가? 네가 나를 이렇게 잘 알아주고 믿어줘서?” 자신이 지금 연정우를 믿은 건지 성유리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그저 연정우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정말 연정우가 신고한 것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박한빈 씨야.” 성유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연정우가 바로 답을 알려줬다. 연정우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웃어 보이더니 계속 말했다. “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 기억해?” “나도 알고 있었어. 유효정 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유씨 가문에서는 그 사건을 덮었을 거야. 하지만 그 일에 네가 연루됐다면 일은 달라지지. 박한빈 씨는 당연하게도 절대 그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너 대신 복수를 한 거지.” 성유리는 침묵했다. “넌 감동도 안 받아?” 연정우가 물었다. “왜 감동받아야 하는데?” “당연히 그 남자가 너를 위해 이런 복수를 한 거랑 너를 많이 아낀다는 것에 감동해야지.” 연정우가 계속 말했다. “그때 박한빈 씨에게도 일이 되게 많았을 거야. 그럼에도 네 일에 신경 쓰고 있었던 거고. 박한빈 씨는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오늘 하고 싶다던 말이 이거야?” 성유리의 물음에 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가 말하고
성유리는 간병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뒤돌아 연정우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우리 지금... 1년 만에 만난 거 아니야?” 연정우가 말했다. “그땐 너도 출산한 지 얼마 안 됐었고 나도 바쁘고 너도 바빴잖아. 그래서 너랑 제대로 말도 못 나눴네.” 병원 정원에는 마침 햇살을 만끽하러 나온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연정우와 성유리는 정자에 앉아 있었는데 몹시 여유로워 보였다. 성유리는 문득 연정우에게서 박한빈의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기억 속 늘 다정하고 착하던 연정우가 이런 태도로 자신에게 말하자 성유리는 너무 이상했다. “응.” 그녀는 한참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 장성그룹 세웠어. 너도 알지?” 연정우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응. 기사 봤어. 회사 되게 잘되는 것 같더라? 축하해.” 성유리의 대답에 연정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고마워.” “아, 네가 모를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어.” 그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경 그가 돌아갔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으니까. 전에 많이 존경하던 화가이자 몇 번 만났을 때도 늘 잘 대해주던 어르신의 부고 소식은 성유리를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연정우는 그녀의 이런 반응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병을 잘 통제하고 있었어. 근데 너도 알잖아. 할아버지는 늘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이었다는 걸.” “만약 계속 그 상태로 살아계셨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건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들었나 봐.” “자기 몸에 입혀져 있는 기저귀와 엉망진창이 돼버린 침대도 발견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나 보지. 간병인이 잠깐 방심했을 때 바로 뛰어내리셨어.” 연정우는 마치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이 아닌 것처럼 아주 담담히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전해줬다. 하지만 성유리는 잘 안다. 연정우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를 말이다. 만약 할아버지의 명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다음날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말한 의료진 팀은 약속대로 도착해 하늘이를 맡고 있던 의사들과 간단한 회의를 마친 뒤,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늘이 엄마인 성유리는 전에 검사를 받았지만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지 못했고 지금은 박한빈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만약 박한빈의 결과도 부적합이라고 한다면 성유리의 세상은 무너질 것이다. 그녀는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기도 싫었고 이틀이 지나도록 박한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의 이런 태도는 성유리로 하여금 빠르게 박한빈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만들었다. 의료진을 동원하고 검사를 받는 것 또한 그저 아버지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는 의도 말이다. 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시름을 놓았다. 다른 일이랑은 상관이 없어 보이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필경 전에 사하나도 아이는 부모 사이를 잇는 끈과 같다는 말을 해줬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이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진즉에 연락이 끊겼을 것이다. 그때 사하나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두려웠다. 다들 제일 아팠던 기억이 제일 오래 남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당시 사하나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성유리는 이제야 더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가 다시 입원한 지 4일이 흐른 날, 누군가가 병문안을 왔다. 그는 바로 연정우. 성유리는 이미 오랫동안 연정우와 만난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아마 성유리의 어느 한 사인회였을 것이다. 연정우는 그날 특별 초청된 게스트로 사인회에 참석했는데 이유는 바로 성유리와 협업한 출판사에 그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인회에서 만났지만 별다른 교류도 없이 업무에만 몰두했고 다 끝이 나서도 함께 밥 한 끼 먹지도 않았다. 성유리가 나중에서야 연정우가 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는 업계에 발을 들였다는
성유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도망치듯 떠나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병실로 돌아갔다. 사하나는 병상 옆에 앉아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비록 손가락으로 열심히 화면을 넘기고 있었지만 그다지 집중한 모습은 아니었다. 성유리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왔어요?”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얘기했어요? 그 나쁜 새...” “그 사람은 하늘이가 아팠던 걸 몰랐다고 했어.”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으며 대답했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사하나는 놀란 듯 멍해졌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하나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약점을 건드린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요! 그 사람이 모를 리가 없는데... 박한빈 씨가 직접 저한테 말했어요. 언니가 그런 선택을 한 거라고 했고 심지어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겠다고도...” 사하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하늘이를 곁눈질하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사하나는 자신이 지금 극도로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 인간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언니 선택이라면서 다른 여자랑 아이를 가지겠다고...” “그만해.” 사하나가 계속 얘기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평소완 다른 성유리의 모습에 사하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과거에 알았던 몰랐든 이제 상황은 이렇게 됐잖아. 그리고 박한빈 씨는 이미 해외 전문가한테 연락을 한 것 같아. 나한테 그들이 내일 도착한다고 했어.” “언니가 동의한 거예요?” “응.” “왜요?” 사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소개한 의료진 팀을 못 믿어서 그랬어요?” “그건 아니야.” “그럼 왜요? 왜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이나 있어서?” “나는 하늘이를 박한빈 씨와의 자존심 싸움에 이용하고 싶지 않
죄송하다는 성유리의 한 마디에 박한빈은 고작 그 네 글자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슨 대답이라도 해주려고 입을 움찔거렸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오늘 오후에 하늘이가 당신들에게 사과했어야 했어요.” 성유리는 고개를 떨군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잘못한 일에는 사과를 해야 하죠. 만약 그때 사과했다면 뒤에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엄마로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에요. 그래서 박한빈 씨에게 사과하는 거예요.” “그리고 오후에 제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땐 너무 다급했거든요. 부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해요.” 성유리가 말을 끝냈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했다. “아, 그리고 의료진 관련해서도 정말 감사해요. 저 그게...” “됐어.” 성유리가 말을 이어가려 하자 박한빈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이빨을 꽉 깨물고 있는 박한빈의 표정에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이렇게 말해서 나를 더 힘들게 하려는 거냐고!”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지금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이가 아픈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그래. 지난 2년간 내가 너희 생활에 신경 쓰지 않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네가 선택한 거 아니었어?” “처음 네가 내 곁을 떠나겠다고 고집했던 것도 너였잖아! 버려진 사람은 나야! 그런데 나더러 뭘 더 어쩌란 거야? 눈치 없이 매달리기라도 했어야 했어?” “오늘 일도 마찬가지야. 네가 아이가 아프다는 걸 미리 말했으면 내가 이렇게 했겠어? 내가 뭐로 보이는데? 그래도 내 핏줄인데!” 박한빈은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성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는 스스로도
박한빈은 마침 하늘이가 있는 병실 밖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사하나는 조롱하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박 대표님 아니신가? 설마 마트에서 한 일도 부족하다고 느껴서 여기까지 와서 교육자 흉내를 내시려고 그러는 건가요?”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무시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할 말이 있어.”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하나가 끼어들었다. “당신 뭐야? 무슨 자격으로 유리 언니한테 그런 말투로 말하는데?” 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박한빈의 태도는 사하나로 하여금 표정이 더 굳어지게 만들었다. 화가 나 무언가 더 말하려던 사하나를 가로막던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 좀 봐줘.” 사하나는 성유리의 말에 이를 악물고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그녀 옆을 지나쳤고 박한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반면, 박한빈은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손바닥만큼 작고 창백했고 수액이 꽂혀 있는 마른 손에는 혈관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뒤를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마와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박한빈은 그녀가 정말 많이 야위었음을 깨달았다. 성유리에게서는 병약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을 때의 초췌한 모습은 표절 문제로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때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길 바랐다. 세간의 폭풍 같은 여론을 자신이 충분히 잠재울 수 있었고 책임감 없는 남자조차도 자신이 손봐서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사라지면 그의 팬들도 잠잠해질 터였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마디라도 약한 소리를 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