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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Author: 송진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10-29 19:06:45
성유리가 다시 김서영을 만났을 때는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김서영이 먼저 주동적으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카페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목적을 몰랐기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 금성을 떠나려고 해.”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김서영은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줬다.

김서영의 말에 놀란 성유리는 눈이 두 배로 커지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세요?”

“그냥 그런 뜻이지.”

“저번에 그 일 때문에 그러세요? 어머님 지금 한빈 씨한테 화가 나셔서...”

“아니야.”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을 끊어버리며 대답했다.

“내가 왜 떠나려는지 말해줄게. 그 사람은 저번에 한빈이가 했던 테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이야.”

김서영의 대답에 성유리는 천천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서 어머님 생각은...”

“금성에는 우리 둘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게다가 수년 동안 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질릴 대로 질려서 숨도 잘 안 쉬어져. 나도 더 이상 이렇게 살기는 싫어서 정한 거야.”

“아무도 우리 둘을 모르는 곳에 가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했어.”

“요즘 말로는 야반도주한다고 할 수 있지. 사랑을 위해서.”

김서영은 말만 해도 행복한지 환하게 웃었다.

성유리는 예전부터 늘 김서영의 미모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박한빈이 김서영을 닮아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잘생겼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늘 김서영은 한 폭의 그림 속에 사는 여인처럼 그 아름다움은 그저 외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성유리는 오늘 처음으로 김서영의 웃음에서 그녀의 진심과 진짜 감정을 알아보았다.

‘저렇게 웃으시는 걸 보니까 심장이 너무 빨리 뛰네.’

한참 뒤,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한빈 씨는 이 일을 아나요?”

“모르지. 알려줄 생각도 없고.”

“그러시면 안 되지 않나요?”

성유리가 김서영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그래도 한빈 씨 어머니신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숨기면 안 되잖아요.”

“만약 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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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다음날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말한 의료진 팀은 약속대로 도착해 하늘이를 맡고 있던 의사들과 간단한 회의를 마친 뒤,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늘이 엄마인 성유리는 전에 검사를 받았지만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지 못했고 지금은 박한빈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만약 박한빈의 결과도 부적합이라고 한다면 성유리의 세상은 무너질 것이다. 그녀는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기도 싫었고 이틀이 지나도록 박한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의 이런 태도는 성유리로 하여금 빠르게 박한빈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만들었다. 의료진을 동원하고 검사를 받는 것 또한 그저 아버지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는 의도 말이다. 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시름을 놓았다. 다른 일이랑은 상관이 없어 보이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필경 전에 사하나도 아이는 부모 사이를 잇는 끈과 같다는 말을 해줬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이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진즉에 연락이 끊겼을 것이다. 그때 사하나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두려웠다. 다들 제일 아팠던 기억이 제일 오래 남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당시 사하나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성유리는 이제야 더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가 다시 입원한 지 4일이 흐른 날, 누군가가 병문안을 왔다. 그는 바로 연정우. 성유리는 이미 오랫동안 연정우와 만난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아마 성유리의 어느 한 사인회였을 것이다. 연정우는 그날 특별 초청된 게스트로 사인회에 참석했는데 이유는 바로 성유리와 협업한 출판사에 그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인회에서 만났지만 별다른 교류도 없이 업무에만 몰두했고 다 끝이 나서도 함께 밥 한 끼 먹지도 않았다. 성유리가 나중에서야 연정우가 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는 업계에 발을 들였다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85화

    성유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도망치듯 떠나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병실로 돌아갔다. 사하나는 병상 옆에 앉아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비록 손가락으로 열심히 화면을 넘기고 있었지만 그다지 집중한 모습은 아니었다. 성유리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왔어요?”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얘기했어요? 그 나쁜 새...” “그 사람은 하늘이가 아팠던 걸 몰랐다고 했어.”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으며 대답했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사하나는 놀란 듯 멍해졌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하나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약점을 건드린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요! 그 사람이 모를 리가 없는데... 박한빈 씨가 직접 저한테 말했어요. 언니가 그런 선택을 한 거라고 했고 심지어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겠다고도...” 사하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하늘이를 곁눈질하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사하나는 자신이 지금 극도로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 인간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언니 선택이라면서 다른 여자랑 아이를 가지겠다고...” “그만해.” 사하나가 계속 얘기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평소완 다른 성유리의 모습에 사하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과거에 알았던 몰랐든 이제 상황은 이렇게 됐잖아. 그리고 박한빈 씨는 이미 해외 전문가한테 연락을 한 것 같아. 나한테 그들이 내일 도착한다고 했어.” “언니가 동의한 거예요?” “응.” “왜요?” 사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소개한 의료진 팀을 못 믿어서 그랬어요?” “그건 아니야.” “그럼 왜요? 왜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이나 있어서?” “나는 하늘이를 박한빈 씨와의 자존심 싸움에 이용하고 싶지 않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84화

    죄송하다는 성유리의 한 마디에 박한빈은 고작 그 네 글자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슨 대답이라도 해주려고 입을 움찔거렸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오늘 오후에 하늘이가 당신들에게 사과했어야 했어요.” 성유리는 고개를 떨군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잘못한 일에는 사과를 해야 하죠. 만약 그때 사과했다면 뒤에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엄마로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에요. 그래서 박한빈 씨에게 사과하는 거예요.” “그리고 오후에 제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땐 너무 다급했거든요. 부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해요.” 성유리가 말을 끝냈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했다. “아, 그리고 의료진 관련해서도 정말 감사해요. 저 그게...” “됐어.” 성유리가 말을 이어가려 하자 박한빈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이빨을 꽉 깨물고 있는 박한빈의 표정에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이렇게 말해서 나를 더 힘들게 하려는 거냐고!”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지금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이가 아픈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그래. 지난 2년간 내가 너희 생활에 신경 쓰지 않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네가 선택한 거 아니었어?” “처음 네가 내 곁을 떠나겠다고 고집했던 것도 너였잖아! 버려진 사람은 나야! 그런데 나더러 뭘 더 어쩌란 거야? 눈치 없이 매달리기라도 했어야 했어?” “오늘 일도 마찬가지야. 네가 아이가 아프다는 걸 미리 말했으면 내가 이렇게 했겠어? 내가 뭐로 보이는데? 그래도 내 핏줄인데!” 박한빈은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성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는 스스로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83화

    박한빈은 마침 하늘이가 있는 병실 밖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사하나는 조롱하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박 대표님 아니신가? 설마 마트에서 한 일도 부족하다고 느껴서 여기까지 와서 교육자 흉내를 내시려고 그러는 건가요?”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무시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할 말이 있어.”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하나가 끼어들었다. “당신 뭐야? 무슨 자격으로 유리 언니한테 그런 말투로 말하는데?” 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박한빈의 태도는 사하나로 하여금 표정이 더 굳어지게 만들었다. 화가 나 무언가 더 말하려던 사하나를 가로막던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 좀 봐줘.” 사하나는 성유리의 말에 이를 악물고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그녀 옆을 지나쳤고 박한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반면, 박한빈은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손바닥만큼 작고 창백했고 수액이 꽂혀 있는 마른 손에는 혈관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뒤를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마와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박한빈은 그녀가 정말 많이 야위었음을 깨달았다. 성유리에게서는 병약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을 때의 초췌한 모습은 표절 문제로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때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길 바랐다. 세간의 폭풍 같은 여론을 자신이 충분히 잠재울 수 있었고 책임감 없는 남자조차도 자신이 손봐서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사라지면 그의 팬들도 잠잠해질 터였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마디라도 약한 소리를 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82화

    사하나 또한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침에 금방 퇴원했잖아요. 근데 왜...” 사하나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빨개진 두 눈을 발견하고는 억지로 말을 삼켰다. “내 잘못이야.”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늘이를 데리고 마트로 가지 말았어야 해. 그 사람들이랑 다투지도 말았어야 했어. 만약 내가 그때...” 성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주먹을 어찌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손톱은 이미 살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사하나는 얼른 성유리의 다친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했다.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누구보다 더 하늘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보호하려는 사람이 언니라는 것도 제가 제일 잘 알고요.” 성유리는 침묵했다. 위로를 건네려던 사하나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아, 깼어?” 그 순간, 성유리는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눈빛에 생기가 돌더니 하늘이의 두 손을 잡으며 물었다. “깼어? 아직도 아파?” 하늘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이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 성유리는 하늘이가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져 눈시울마저 붉어진 성유리에게 하늘이가 갑자기 말했다. “엄마.” 성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왜 그래?” “그 남자가... 아빠야?” 나지막한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사하나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오늘 그 사람 만나셨어요?”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지만 사하나는 이미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하나가 펄쩍 뛰며 성유리이게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하늘이는 그 사람 때문에 사고를 당한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요? 그 사람은?” “이제 그만 말해.” 성유리가 사하나를 진정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81화

    “나... 나는 힘도 안 줬는데.”  여자는 넋이 나간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박한빈은 재빨리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  박한빈이 뒤늦게 성유리를 따라 마트를 나섰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거리에 있는 표지판을 힐끔 쳐다보고는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어디 가요? 박한빈 씨!”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박한빈은 듣는 체도 안 했다.  이내 박한빈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응급실에서도 성유리와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박한빈은 지나가는 간호사 한 명을 붙들고는 물었다.  “여기 방금 어떤 여자가 아이와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두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인데 코피가 나고 있을 겁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는 이렇게 생겼고요.”  박한빈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잠금 화면에 있는 성유리의 사진을 간호사에게 보여줬다.  “아, 그 백혈병 아이 말씀이시구나. 방금 바로 황 의사님이 계신 방으로 갔어요. 지금쯤 아마...”  “뭐라고요?”  박한빈은 간호사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물었다.  그의 안색은 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고 목소리마저 떨렸다. 간호사는 그런 박한빈의 모습에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나 박한빈은 끈질기게 물었다.  “그 여자아이가... 무슨 병이라고요?”  “백혈병이요. 전에도 그것 때문에 계속 입원해 있다가 오늘 겨우 퇴원한 거로 알고 있는데...”  박한빈의 머릿속은 간호사의 한 마디에 새하얘졌다.  ... 성유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를 제외하고도 성유리는 자기 몸에서 나는 피비린내도 맡아버렸다.  하늘이가 성유리의 몸에 축 늘어져 병원에 온 바람에 그녀의 옷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어린아이는 백혈병 때문에 혈액을 응고하는 능력이 평범한 사람과는 현저히 떨어지기에 꼭 조심해야 한다고 의사는 신신당부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80화

    박한빈의 차가운 말과 태도는 성유리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과거에도 수없이 박한빈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똑같이 이렇게 강압적으로 사과를 요구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이제는 그 일이 하늘이에게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성유리는 화가 나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최대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미 사과했습니다. 아직도 불만이 있으신가요?” 박한빈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잘못한 건 당신이 아니잖아요.” “제가 아이 엄마로서 대신 사과하는 게 잘못된 건가요?” “평생 아이 대신 잘못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지금 저를 훈계하시는 건가요? 제가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까지 당신에게 배울 필요 없지 않나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박한빈 옆에 있던 여자가 결국 태도를 바꾸며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훈계라니? 그럴 자격도 없죠. 전 그냥 아이에게 잘못했으면 스스로 인정하라는 걸 가르치려는 것뿐입니다.” 성유리는 그의 말을 듣고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아마도 애 아빠가 일찍 죽어서 아무도 이런 걸 가르쳐주지 못했나 봐요.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제가 잘 가르칠 테니.” 그녀는 말을 끝내고 하늘이를 데리고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성유리, 너 지금 저주하는 거야?” 잔뜩 격앙된 박한빈의 목소리에 옆에 있던 여자는 물론 하늘이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손 놔요.” 성유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고 했고 그 모습을 본 하늘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외쳤다. “우리 엄마 놔줘요!” 하늘이는 망설임 없이 쇼핑카트 안에서 일어나 박한빈의 팔을 붙잡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79화

    병원에서는 아무 말 없던 하늘이가 병원을 나서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뛰어다니면서도 성유리의 손을 놓지 않았고 가끔 뒤를 돌아보며 밝게 웃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 뭐 먹고 싶어?” “엄마가 간장 베이스로 만든 닭 날개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마트 가서 재료 사자. 어때?” 하늘이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마트 가서 카트도 탈래요.” 성유리는 흔쾌히 허락했다.최근 하늘이가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지 쇼핑카트에 앉아 있어도 성유리에게는 전혀 무리 되지 않았다. 마트의 밝은 조명 아래 하늘이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 성유리는 마음이 놓였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하늘이었다. “엄마! 저거 사고 싶어!” 하늘이는 오랜만에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나와서인지 잔뜩 흥분했고 작은 다리를 흔들며 쇼핑카트를 이리저리 움직이려 했다. 성유리는 조미료의 제조 일자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쇼핑카트가 그녀 손에서 벗어나 앞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이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잡으려 했지만 이미 카트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갔다. “꺅!” 그때, 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마트 안을 울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급히 쇼핑카트를 잡아당기며 연신 사과했다. “제가 아이를 잘 보지 못했네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여성은 화가 난 듯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서인지 억지로 화를 삭이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이 데리고 나왔으면 조심해야죠!” “맞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허리를 공손하게 숙이며 사과했다. 하늘이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는지 여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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