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김서영이 건넨 편지봉투가 마치 폭탄같이 느껴져 자신의 서랍 안에 넣어두는 것이 불안했다. 결국 성유리는 편지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있는 자신의 책꽂이 사이에 넣어두었다. 책들 사이에 작은 편지봉투가 껴있었지만 성유리는 편지봉투가 제일 눈에 잘 들어왔다. 하지만 저녁에 돌아온 박한빈은 그 편지봉투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요즘 그의 컨디션은 거의 최상을 찍고 있었는데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았다. 성유리가 이 집에서 떠나기를 계속 거부하자 박한빈은 그냥 그녀의 옆에 있는 빈집을 월세를 내며 살았다. 그래서 현재, 더 이상 그 어떤 누구도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오늘 밤 금성에는 올해 첫눈이 내려 박한빈은 유독 신나 했지만 성유리는 무관심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창가로 끌고 가더니 “강박적”으로 그녀를 내리는 눈을 보게 만들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그만하고 돌아가자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요구 하나를 제안했다. “여보라고 불러. 그러면 생각해 볼게.” “여보. 여보 우리 제발 돌아가요.” 성유리가 박한빈을 몇 번이나 “여보”라고 불러준 후에야 그는 다시 성유리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박한빈이 거의 끝이 날 때쯤에 성유리는 이미 잠에 들기 직전인 상태였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 성유리를 바라보던 박한빈은 그녀를 업고는 욕실로 향했다. “며칠 뒤에 우리 둘이 도인국 한번 갈까?” 박한빈이 물었다. “갑자기 도인국은 왜요?” “휴가. 가서 눈도 보고.” 그의 대답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해가더니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그 뜻이 아니라 진짜로 눈 구경하러 가자고.”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대답했다. “관심 없어요.” “난 관심 있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줘.” 말을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를 욕실 구석까지 가둬두고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
깊은 밤의 병원은 늘 유난히 이상하게 느껴진다.복도 끝의 그 빛나는 구조등은 마치 빨간 피처럼 마음을 졸이게 했다.성유리는 의외로 지금 응급실 앞에 박한빈의 비서 외에 성유정도 함께 앉아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그녀의 몸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는 듯했는데 안색이 창백한 채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한빈 오빠!”긴장의 끈이 풀린 듯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나... 오빠 왔어? 어떻게 해? 아줌마가 많이 다치셨어. 그러다가...”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보았지만 이내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비서에게 눈길을 돌렸다.“아직 사고 조사를 하고 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도로에는 다른 차량은 없었고 사모님의 차는 갑자기 통제력을 잃고 돌진해 버렸다고 합니다.”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차에는... 진성민 씨도 계셨는데 방금 의사 선생님께서 응급처치 중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비서는 말을 돌려 하느라 노력했지만 박한빈의 안색은 지극히 보기 힘들었다.성유정은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한빈 오빠, 지금... 언론 쪽부터 신경 쓰는 게 어때?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안 좋은 기사가 쏟아질 게 뻔해.”“뭐라고?”그녀를 돌아보며 묻는 박한빈의 한마디는 진지한 질문 같기도 하고 협박 같기도 했다.하지만 성유정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아줌마가 낯선 남자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언론에서 함부로 추측할 거야.”말을 마친 성유정이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언니, 언니는 사정을 아는 사람으로서 왜 아줌마를 말리지 않았어?”성유리는 이럴 때 자신이 아무리 위로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박한빈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는데 성유정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어리둥절해졌다.그녀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성유정은 이미 계속 말했다.“아줌마가 오늘 밤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성유정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날카로운 눈빛
그러고 나서 박한빈의 비서도 앞으로 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뭐라고 말했다.박한빈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이 여론이 내일 인터넷에 터지면...”“사람 찾아 일단 눌러. 그리고 진성민의 가족에게 연락해.”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냉정했다.“박씨 저택 쪽은 내가 직접 가서 말할 거야.”말을 던진 그는 이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다가 성유리 곁을 지날 때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듯 말했다.“내가 먼저 데려다줄게.”“전... 오늘 밤에 병원 쪽에 남을게요.”사모님이 ICU에 계셔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성유리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갑자기 박한빈과 함께 있는 것이 두려워졌다.방금 한 성유정의 말에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김서영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정말 몰랐다.그녀는 김서영이 정말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내 말대로 해.”박한빈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따라갔다.“몰랐어요...”차에 오른 성유리는 결국 입을 열었다.“한빈 씨 어머니가 그럴 줄은...”“성유정이 방금 한 말, 너에게 뭘 줬다고 했어.”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게 뭐야?”“서류예요...”“어디 있어?”미화로에 돌아온 성유리는 가장 먼저 그 서류를 박한빈에게 건넸다.그런 물건이 눈에 확 띄는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본 박한빈은 자기도 모르게 쌀쌀하게 웃었다.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건만 들고 돌아섰다.“한빈 씨!”성유리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그는 발걸음은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 괜찮아요? 한빈 씨 어머니 일은 제가 설명할 수 있어요...”“설명할 필요 없어.”이 말을 던진 박한빈은 계속 앞으로 나갔다.성유리는 그 자리에 혼자 서 있다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온
성유정이 그녀를 찾았을 때, 성유리는 막 슈퍼마켓에서 돌아왔다.그녀는 손에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성유정을 보는 순간 손이 굳어졌다.성유정은 계단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왔어?”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성유정은 또 한 번 싱긋 웃더니 물었다.“나를 보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보러 왔어.”성유정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한빈 오빠는 요즘 너무 바빠서 언니를 돌볼 수 없을 거야. 나는 언니의 동생이니 당연히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언니를 걱정해줘야지.”“그럼 이제 가도 돼.”성유리는 대답하면서 그녀를 스쳐 계속 걸어갔다.예전에 성유리가 이런 태도로 말했으면 성유정은 펄쩍 뛰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고 반대로 성유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성유리, 아직도 박한빈이 널 지켜줄 거로 생각해? 아직도 모르겠어? 너랑 한빈 오빠는... 이젠 불가능해.”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성유정을 바라보았다.그녀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어머니가 이렇게 큰일을 당했는데 한빈 오빠가 언니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아?”성유리는 손을 꽉 잡은 채 뒤 마침내 소리 내 말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아줌마가 준 서류가 뭔지 알아?”성유정은 빙긋 웃으며 성유리에게 답안을 말해줬다.“한빈 오빠에게 주는 유서야.”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성유정은 얼마 안 지나 돌아갔고 성유리는 계단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그때 밑에서 누군가 올라오다가 센서 등이 켜지는 순간 그만 비명을 질렀다.“깜짝 놀랐잖아.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야? 귀신 분장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거야?”여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몸이 굳은 채 자신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빨간색 머리를 한 그 여자가 따라오며 물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계속 통화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서훈에게 연락했다.“박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라 오늘 뵐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아니면...”서훈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만날 시간이... 없다니?’성유리는 얼마 전에 그도 매우 바빴던 것을 기억한다.하지만 그때 박한빈은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그녀를 찾을 수 있었고 때로는 출장을 갔다가 한밤중에 비행기에서 내려 직접 그녀를 찾기도 했다.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전화 한 통을 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이런 생각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지만 성유리는 결국 묻지 못하고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알았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렇게 돌아섰다.하지만 택시기사가 주소를 묻자 그녀는 말을 돌렸다.“시월파크로 가요.”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여기에 오지 않았다.예전에 박한빈이 그녀의 거처를 싫어할 때 함께 이곳에 와서 살자고 말하곤 했지만 성유리는 줄곧 허락하지 않았다.그녀는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박한빈에게 문자를 보냈다.[시월파트 쪽에서 기다릴 테니 한 번 만나요.]문자가 전송되자 그녀는 바로 옆 신발장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오늘 금성은 사실 매우 추웠다.복도 옆 창문은 아직 열려 있었고 찬바람이 이렇게 계속 안으로 불어 들어왔지만 성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멍하니 맞은편 엘리베이터를 보고 있었다.박한빈은 끝내 답장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가 올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그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사라져갔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힘껏 문지르며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려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또 시간을 한 번 보았다.벌써 거의 12시가 되었다.성유리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보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시간을 설정하기 시작했다.‘5분만 더 기다리자...’이 5분 안에 그가 여전히 오지 않으면 그녀는 떠나리라 마음먹었다.핸드폰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0시를 1분 남기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문을 닫지 않아 들어오는 찬바람과 실내의 넉넉한 따뜻함이 대조적으로 느껴져 성유리도 지금 자신의 몸이 추운지 더운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느껴질 뿐이었다.한참 만에 목소리를 찾은 그녀는 중얼거리듯 물었다.“그러니까 내 설명도 듣기 싫다는 거예요?”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성유리, 이 세상은 결과만 보면 돼.”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결과는?무엇이 결과란 말인가?결과는 그의 어머니는 지금 병원에 누워 인사불성이 되었고 그 유서가 그녀의 손에서 그의 손까지 온 것이다.결국, 그는 그들이 이제 만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심지어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도 그녀에게 인색했다.성유리는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문득 그동안 그들이 함께 지냈던 시절을 떠올렸다.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들이 침대에서 속삭이던 다정한 모든 장면...그 박한빈들이 눈앞의 그와 서서히 겹쳤다.하지만 그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갑고 매몰찼다.마치 쓸모없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듯 그는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얼마 전의 일들은 모두 자신의 상상인 것만 같았다.“그래요.”마침내 성유리는 이 말을 뱉었다.그녀는 사실 오늘 여기 온 것은 그에게... 모든 걸 해명하려는 것뿐이었다.그녀는 심지어 문밖에서 기다리며 졸렬한 고육책을 연출하기까지 했다.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결과만 본다고...’과정이 더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그는 신경 안 쓴다는 뜻이니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그럼 가볼게요.”성유리는 이런 말을 남기고 그냥 돌아섰다.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성유리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코트 주머니 속에 넣은 손을 꽉 잡았다.“안 작가님이 청첩장을 보내주셨어.”박한빈은 그녀
심지어 아까 첫술보다 더 맛이 없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채 그 하얀 그림자를 보았다.그는 높은 층에 서 있었는데 아래층의 모든 물건은 이때 희미한 점으로 변했다.하지만 그때 박한빈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는 심지어 그녀가 쓰레기통 옆에 서서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박한빈은 갑자기 술잔을 꽉 움켜쥐었는데 한참 후에야 서서히 풀었다.자신이 결코 감정을 중요시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신 덕분이었다.지금 그녀를 생각하면 박한빈은 그녀의 부드러운 말투와 겉으로 드러나는 미소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었다.어머니에게 사고가 나기 전까지 박한빈은 그녀에게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박한빈은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일찍이 그녀의 몸 안에 존재했었는데 작은 탯줄이 그들을 하나로 연결했다. 그 감정은 그녀의 유서를 보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그녀는 그에게 미안해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떠나려 했다.떠나면서 그녀는 그 ‘혼외자'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함께 주었다.그녀 명의의 모든 재산과 주식도 그에게 남겼는데 그 재산들은 지화 그룹 외의 것이었다.만약 어느 날 다른 사람들과 더는 경쟁하고 싶지 않다면 떠나라고 하면서 이 재산은 그가 먹고 입는 걱정 없이 살기에 충분하다고 했다.그녀의 아이로서, 사실 그녀의 가장 큰 희망은 그가...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아이러니하게 지난 30년 동안 그녀는 그에게 어떤 칭찬의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박한빈은 예전에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녀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유서에서 박한빈은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김서영이 박씨 집안의 미래 후계자에게 주는 감정이 아니라 평범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이었다.그걸 깨달은 순간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보니 불쌍하고
박한빈은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그는 처음으로 병원 보안요원에게 그들을 내쫓으라고 했다.연약해 보이는 두 노인은 끌려갈 때 욕설을 퍼부으며 기자를 찾아가 아들이 박씨 가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겠다고 했다.당시 박한빈은 차갑게 한마디만 했다.“그렇게 해요.”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한 그 태도는 사람의 마음에 서리가 내리게 했다.박한빈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잠시 후, 서훈이 달려와 미화로 쪽에 있는 물건들을 이미 시월파크로 옮겼다고 보고했다.박한빈이 알았다고 한마디만 하자 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모... 성유리 씨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병이 난 것 같아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사실 이 일은 성유리 씨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성유리 씨에게 화를 내신 거예요?”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그를 쳐다보았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을 그냥 삼켜버리고 속으로만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정말 병이 났다.찬바람에 몇 시간씩 앉아있었으니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그녀는 원래 늘 비상약을 집에 두고 있었지만 약을 먹기 직전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천천히 약상자를 내려놓고 따뜻한 물 한 잔만 따라 마셨다.다행히 그녀의 상황은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이틀 동안 집에 누워 있었더니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지만 기침만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특히 밤이면 원래도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연이은 기침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어려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는 것에 익숙해졌다.‘왜 또 그럴까’에 대한 심경에서 ‘역시 그래’로 바뀌었다.사실 박한빈의 마음을 믿은 적은 없다.그들의 감정이 가장 ‘불타오를' 때도 그녀는 여전히 그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거절하는 것을 배워내지 못했을 뿐인데 비소를
그는 그저 조용히 성유리를 품에 끌어안았고 그렇게 밤 내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은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마음과 성유리의 마음이 가까이 붙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성유리가 다시 사하나의 부모님을 봤을 때는 청명절이 다가올 무렵이었다.사민혁과 류슈미가 자신을 마주치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성유리는 특별히 청명절 전날에 사하나를 찾아갔다.하늘이도 함께.아이는 이미 한 달째 유치원에 다니던 상황이었고 생각보다 더 잘 적응해 갔다.지금껏 하늘이는 죽음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기에 사하나의 영정사진을 마주하자 많이 의아해했다.마치 전에 늘 자기랑 나가 놀던 이모가, 늘 치마나 선물을 사주던 이모가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 몰라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준비한 꽃다발을 사하나의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그녀는 사하나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했었다. 심지어 행여 잊어버리고 못 한 말들이 있을까 봐 메모지에 며칠 전부터 적어두기까지 했다.하지만 막상 사하나의 무덤을 마주 서고 나니 목이 꽉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메모지에 적어둔 익숙한 글자들을 몇 번이나 봐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멍하니 사하나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성유리는 잔뜩 굳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사하나의 부모님은 먼발치에서 성유리와 하늘이를 보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오늘 두 사람이 찾아올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성유리는 무의식 간에 하늘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지만 이런 행동이 류수미와 사민혁을 더 화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본능적인 모성애로 그런 행동을 해버렸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항상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사하나의 부모님은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했다.심지어는 왜 이곳에 찾아왔냐고 따져 묻지도 않았고 뚜벅뚜벅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그들의 반응에 성유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단 한 가지는 똑바로 알
박한빈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성유리는 오랫동안 침묵했다.입술을 꾹 닫고 있는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박한빈의 말에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볼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자?”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유효정 씨는... 정말 병 들어서 사망한 건가요?”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누가 진실을 알겠어? 어차피 연정우 씨가 모든 사람에게 사인이 병사라고 알려줬는데.”성유리는 박한빈의 대답에도 조용히 있다 한참 뒤,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그때 유씨 가문 일 말이에요. 도대체... 박한빈 씨가 신고한 건가요 아니면 정우가 그런 건가요?”이번엔 박한빈이 입을 꾹 닫아버렸고 성유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행동을 멈췄다. 그리곤 그녀의 귓가에 있는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리기 시작했다.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머리카락에 닿을 때마다 귓가가 너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어 피해버렸다.그 순간, 박한빈이 씩 웃더니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볼에 입을 맞췄다.그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성유리의 볼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려했지만 그녀는 박한빈을 밀어냈다.“아직 제 질문에 대답 안 하셨어요.”성유리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자 박한빈은 솔직하게 대답해 줬다.“신고한 건 연정우 씨야.”“근데 그 증거들은... 내가 조금 힘을 보탰다고 할 수 있지. 게다가 네 생각엔 원래부터 검찰의 행동이 그렇게 빠르다고 생각해?”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그러니까... 그때 연정우는 박한빈이 둔 “패”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비록 다들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자세히 검사를 해도 그는 깨끗했다.“내가 너무 무섭나?”성유리가 아무 말도 못 하자 박한빈이 조심스레 물었다.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고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봤다.“내가 이렇게 하는
성유리는 박한빈이 여전히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마치 성유리의 생각을 읽은 듯 말을 이어갔다.“전에 유효정 씨가 찾아갔었지?”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갑자기 유효정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지 몰랐다.날 선 눈빛으로 박한빈을 째려보던 성유리는 경계심을 풀며 물었다.“무슨 뜻이에요?”“너도 아마 짐작하고 있었을 거야. 유효정 씨가 연정우 씨에게 말한 거 말이야. 해외에 투자자들. 그거 사실 내가 위조한 거였어.”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그 일이 다시 떠올랐다.솔직히 말해 요즘 성유리는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연정우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에도 너무 옛날 옛적의 일 같은 느낌이 들었다.박한빈은 성유리의 반응과 표정을 살펴보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잡더니 말했다.“내 말 아직 안 끝났어.”그의 목소리에는 불쾌하다는 감정이 잔뜩 묻어나 있었지만 성유리가 아플까 봐 손에는 아무런 힘을 주지 않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럼에도 불만이 큰지 박한빈의 손을 밀쳐냈다.팍!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모습에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성유리는 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 문제로 다투기 싫어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나도 최근에 알았어. 내가 유효정 그 사람에게 속았더라고.”“다르게 말하면 시실 그 투자자는 정말 존재하는 사람이었어.”박한빈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그때 유효정 씨 아버지에게 그 일이 있었을 때 사실은 뒤에 길 하나를 만들어뒀나 봐. 근데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 자기 사위에게 신고를 당했을 줄은.”“조사하는 쪽에서 발 빠르게 움직인 덕에 아버지는 도망가지 못했지만 유효정 씨에게 그것들은 남겨둔 거지.”“하지만 유효정 씨도 감옥에 들어가 버린 탓에 출소하고 나서는 그 사람 연락처도 몰랐었지.”“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야. 겉으론 나랑 협업해서 연정우 씨에게 복수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가 다리를 놓아주기를 바랐던 거지. 투자자를 만들 기회를
“내가 맨발로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박한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성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집안에 난방이 너무 잘 돼서요.”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대답했다.“그래도 안 돼.”“네.”성유리는 박한빈을 지그시 쳐다보다 결국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아까 뭐 보고 있었어?”“요즘 왜 그렇게 바쁘세요?”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물었다.너무도 기막힌 타이밍에 박한빈은 멈칫하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를 본 성유리는 기분이 이상해져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웃으세요?”“알고 싶어?”박한빈은 대답 대신 성유리에게 되물었고 그녀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마침 잘됐네.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근데 내가 아직 씻지를 못해서... 나 좀 기다려줄래?”“먼저 알려주시면 안 돼요?”“안 돼.”아마 요즘 박한빈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성유리는 그의 그런 모습에 익숙해졌다.그래서 지금 박한빈이 고민도 안 하고 자신의 말에 거부 의사를 밝히자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도 못했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은 이미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고 성유리에겐 기회가 없어졌다.원래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쓱 물어보려 했던 성유리지만 박한빈의 말을 듣고 나니 흥미가 생겼다.김서영도 박한빈의 회사에 별일이 없다고 말했으니까.게다가 박한빈도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성유리는 이 업계 일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그러니 그가 하려던 말을 바로 성유리와 관련된 사람에 대한 주제일 것이다.이미 욕실로 들어선 박한빈의 뒤를 성유리가 따라가려는 순간, 박한빈은 뒤에도 눈이 달린 듯 고개를 휙 돌리더니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맨발로 걸어 다니지 말라고.”바닥에 닿아있던 성유리의 발은 박한빈의 말에 움츠러들어갔고 그 틈을 타 그는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결국 성유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침대로 돌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창문만 바라봤다.다행히 박한빈은 성유리를 오랜 시간 기다리지 않게 했고 10여 분이 흘렀을 즈음, 가
하늘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성유리는 또다시 물었다.“여기서 지내는 게... 안 행복해?”성유리의 물음에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다시 끄덕였다.“난 엄마가 안 행복해 보여서.”침묵하던 하늘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엄마, 엄마는 지금... 하늘이를 보고도 웃어주지 않아.”“난 엄마가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멍해졌고 하늘이의 손을 잡고 있던 손도 점점 굳어갔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도우미는 계속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성유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도우미는 빠르게 하늘이에게로 다가가더니 말했다.“성하늘 아가씨, 아까 그림 그리고 싶다고 하셨죠? 저랑 같이 그리러 갈까요?”하늘이는 도우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성유리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아이의 시선을 느낀 성유리는 심호흡 한 번 하고는 애써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기회가 생기면 엄마가 하늘이 데리고 한번 갔다 올게. 알겠지?”“진짜?”성유리의 말에 하늘이의 눈이 순식간에 빛났고 성유리는 그제야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진정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얼마 뒤,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이와 약속했다.“응. 진짜.”하늘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도우미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갔고 성유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비록 오늘 박한빈이 외출한 상태지만 집안에 남아있는 도우미들은 항시 성유리 곁을 지키며 감시 아닌 감시를 하고 있었다.성유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그녀가 화장실에 조금 오랫동안 머물러도 재빨리 다가와 괜찮냐고 묻곤 했다.그들은 항상 성유리가 괜찮다는 대답을 하고나서야 안심하며 화장실 밖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성유리가 멍하니 앉아 있을 무렵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오늘 저녁 식사 또한 변함없이 세 사람이 함께 먹었다.김서영은 하늘이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갑자기 물었다.“한빈이 요즘 왜 저렇게 바빠?”성유리는 그녀의 물음에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나
성유리와 다른 사람들은 엔젤 월드에서 대보름날까지 머물렀다.하늘이도 이젠 나이가 됐으니 성유리는 원래 경운시에 아이가 다닐 유치원을 찾아보려고 했다.하지만... 경운시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결국 하늘이가 다닐 유치원은 박한빈이 직접 골랐다. 그 유치원은 금성시에서 꽤 이름을 날린 국제 유치원이다.유치원에 다니는 학생들의 집안과 조건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월등했기에 성유리가 전에 찾아보던 유치원과는 차원이 달랐다.사실 성유리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하늘이가 박한빈 옆에 남아있으면 접하는 영역과 사귀는 친구, 그리고 사는 수준은 성유리가 평생 노력해도 하지 못할 것들이라는 사실을.지금 하늘이가 입고 있는 옷, 먹는 음식, 쓰는 물건들 전부 다 제일 좋은 것들이었다.전에 김서영은 하늘이를 데리고 각종 파티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전에 그녀는 그런 떠들썩한 장소에 가는 것을 꺼렸다.하지만 하늘이만큼은 세상의 이런저런 모습을 많이 봐야지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서 자주 데리고 나갔다.이런 일은 원래 엄마인 성유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마치 지금 사람들은 이미 성유리가 박한빈의 아내임을 확신하고 있듯이.박한빈의 아내로서 그런 연회나 파티엔 응당 성유리가 참석해야 했고 그게 제일 기본적인 일이었다.하지만 김서영은 성유리를 강박하지 않았고 홀로 하늘이를 데리고 나가기를 반복했다.나중에 그녀는 하늘이를 데리고 승마장까지 갔고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말을 바로 사주기도 했었다.집에 돌아온 하늘이는 성유리에게 승마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자랑했다.사진 속 조련사는 하늘이를 앞에 앉히고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고 아이는 승마복을 입은 채로 즐거운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성유리는 행복해 보이는 사진 속 아이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엄마, 거기 진짜 재밌어. 다음에 우리 같이 갈까?”하늘이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난 말 탈 줄 몰라.”성유리가 난처해하며 대답했다.“괜찮아. 거기 말 잘 타는
“사실 요즘 한빈이가 매일 사씨 저택으로 향했어.”“아니면 왜 사하나 씨 가족들이 그렇게 흥분하겠니?”“근데 한빈이 걔가... 하도 멍청해서 듣기 좋은 말들을 하는 법을 몰라. 그래서 가족분들이 반겨주지 않는 거고.”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그 사람이 사씨 저택에 왜... 뭐 하러 갔는데요?”“유리 네가 보기엔 뭐 하러 간 것 같은데?”김서영은 묻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했다.“당연히 널 위해서지.”“네가 사하나 씨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발이 묶여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것도 보기가 싫었을 거야.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도 없으니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유가족들이 너를 용서하게 하는 일이었겠지.”“아마 네가 그 사람들에게 용서받는다면 좀 괜찮아질 줄 알았나 봐.”“사실 걔가 한 일이 오늘 내가 한 일과 별반 다를 건 없었어. 그냥... 난 네가 보는 앞에서 하기를 선택했을 뿐이지.”“성유리, 난 네가 알았으면 해. 요즘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우리가 다 봤으니까 넌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제자리에 앉아 김서영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그러다 조금 뒤,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마치 온몸에 남은 모든 힘을 주먹을 쥐는데 쓰는지 손가락 마디는 이미 하얗게 변해있었고 몸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김서영은 그런 성유리의 모습을 보고도 그저 묵묵히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기만 했다.이때, 두 사람이 탄 차가 엔젤 월드에 들어서자 박한빈이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달려 나왔다.어찌나 급히 나온 건지 외투조차 걸치지 않은 그는 평소 무덤덤하던 표정과는 달리 한껏 더 격동돼 있었다.기사가 차를 주차하고 나서야 박한빈은 헐레벌떡 달려오며 김서영에게 물었다.“유리 데리고 어디 갔다 오시는 겁니까?”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거짓말을 하기 싫어 솔직히 대답했다.“사씨 저택.”그러자 박한빈의 안색이 더 어두워지더니 김서영에게 따지듯 물었다.
사민혁의 말에 성유리가 나서서 대답하려던 찰나, 김서영이 그녀를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저도 잘 압니다. 사하나 씨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클지.”“하지만 다시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이번 일에 유리의 잘못이 정말 존재하는지.”“자리에 있던 다른 목격자한테도 물었습니다. 근데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러더라고요. 그날 날씨가 안 좋아서 유리가 하나 씨를 말렸답니다. 아이랑 스키 타러 올라가지 말라고. 그런데도 하나 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어요.”“비록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두 분의 슬픔이 더 커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현실이 이렇습니다. 사하나 씨는 본인이 한 행동과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뿐이에요.”“지금 그게 무슨 뜻이죠? 제 딸이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건가요? 그런 선택을 했으니 잘 죽었다는 말이에요?”그 말에 류수미는 또다시 격동된 억양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김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사하나 씨는 너무 젊은 사람이었으니 누구라도 다 안타깝고 가엽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유리는 또 무슨 잘못을 지었나요?”“유리가 먼저 아이를 데리고 스키장에 가기로 한 것도 아니고 말리려고 애를 쓰기도 했잖아요. 눈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유리는 혼자 사고 현장으로 향해 두 사람을 찾으려고 했어요.”“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노력을 다한 아이예요. 그런데 더 이상 또 무얼 해야 되나요? 정말 자기 목숨으로 하나 씨의 죽음을 애도하고 보상해야 하나요? 유리가 죽는다고 해도 사하나 씨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텐데.”김서영의 말투는 너무 차분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들렸다.류수미는 그 말에 표정이 완전 사라져버렸고 사민혁 또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제가 유리를 데리고 온 건 설날에 인사를 드리러 온다는 핑계로 이번 일에 대해 정확히 정정하려는 의도였어요. 두 분은 유리랑 같이 있지 않으니 지금 얘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성유리를 본 김서영이 계속 말했다.“너도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이럴 테니까.”그럼에도 성유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됐어. 그만하고 아침부터 먹자. 밥 다 먹고... 넌 나랑 갈 데가 있어.”...김서영이 말한 갈 곳이 사씨 저택일 줄은 성유리가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마지막으로 사씨 저택에 왔을 때의 기억은 아직 성유리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리고 류수미와 했던 약속도.성유리는 류수미에게 사하나가 하늘이한테 썼던 마음들과 은혜를 꼭 갚겠다는 말을 했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아침에 박한빈이 그녀를 행복을 위해 직접 부탁한 평안부도, 하늘이가 엄마를 볼 때의 그 조심스러운 눈빛도, 사하나의 죽음도 다 잊고 싶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간의 추억들을 성유리가 어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사모님은 내가 비겁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할 거야.’‘분명 약속까지 했으면서...’“가자.”김서영의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성유리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유리의 손을 잡더니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김서영은 이미 사씨 가문의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상황인 것 같았다. 필경 그녀의 신분 또한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말이다.사씨 가문 사람들은 박한빈을 대하던 태도로 김서영을 대하진 않았지만 성유리에게는 쌀쌀맞았다.류수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문 채로 성유리를 노려보며 외쳤다.“쟤가 여길 어디라고 와요!”하지만 김서영은 옅은 미소만 지으며 대답했다.“안부 물으러 왔어요. 설날인데 어떻게 지내시나 보러 오고 싶기도 했고.”“안부요?”류수미는 화가 나 씩씩거리며 따지듯 물었다.“설날에 대체 왜 찾아오신 거예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시러 오셨나 봐요? 혹시나...”“아니요.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