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의 병원은 늘 유난히 이상하게 느껴진다.복도 끝의 그 빛나는 구조등은 마치 빨간 피처럼 마음을 졸이게 했다.성유리는 의외로 지금 응급실 앞에 박한빈의 비서 외에 성유정도 함께 앉아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그녀의 몸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는 듯했는데 안색이 창백한 채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한빈 오빠!”긴장의 끈이 풀린 듯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나... 오빠 왔어? 어떻게 해? 아줌마가 많이 다치셨어. 그러다가...”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보았지만 이내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비서에게 눈길을 돌렸다.“아직 사고 조사를 하고 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도로에는 다른 차량은 없었고 사모님의 차는 갑자기 통제력을 잃고 돌진해 버렸다고 합니다.”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차에는... 진성민 씨도 계셨는데 방금 의사 선생님께서 응급처치 중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비서는 말을 돌려 하느라 노력했지만 박한빈의 안색은 지극히 보기 힘들었다.성유정은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한빈 오빠, 지금... 언론 쪽부터 신경 쓰는 게 어때?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안 좋은 기사가 쏟아질 게 뻔해.”“뭐라고?”그녀를 돌아보며 묻는 박한빈의 한마디는 진지한 질문 같기도 하고 협박 같기도 했다.하지만 성유정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아줌마가 낯선 남자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언론에서 함부로 추측할 거야.”말을 마친 성유정이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언니, 언니는 사정을 아는 사람으로서 왜 아줌마를 말리지 않았어?”성유리는 이럴 때 자신이 아무리 위로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박한빈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는데 성유정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어리둥절해졌다.그녀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성유정은 이미 계속 말했다.“아줌마가 오늘 밤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성유정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날카로운 눈빛
그러고 나서 박한빈의 비서도 앞으로 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뭐라고 말했다.박한빈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이 여론이 내일 인터넷에 터지면...”“사람 찾아 일단 눌러. 그리고 진성민의 가족에게 연락해.”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냉정했다.“박씨 저택 쪽은 내가 직접 가서 말할 거야.”말을 던진 그는 이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다가 성유리 곁을 지날 때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듯 말했다.“내가 먼저 데려다줄게.”“전... 오늘 밤에 병원 쪽에 남을게요.”사모님이 ICU에 계셔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성유리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갑자기 박한빈과 함께 있는 것이 두려워졌다.방금 한 성유정의 말에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김서영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정말 몰랐다.그녀는 김서영이 정말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내 말대로 해.”박한빈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따라갔다.“몰랐어요...”차에 오른 성유리는 결국 입을 열었다.“한빈 씨 어머니가 그럴 줄은...”“성유정이 방금 한 말, 너에게 뭘 줬다고 했어.”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게 뭐야?”“서류예요...”“어디 있어?”미화로에 돌아온 성유리는 가장 먼저 그 서류를 박한빈에게 건넸다.그런 물건이 눈에 확 띄는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본 박한빈은 자기도 모르게 쌀쌀하게 웃었다.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건만 들고 돌아섰다.“한빈 씨!”성유리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그는 발걸음은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 괜찮아요? 한빈 씨 어머니 일은 제가 설명할 수 있어요...”“설명할 필요 없어.”이 말을 던진 박한빈은 계속 앞으로 나갔다.성유리는 그 자리에 혼자 서 있다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온
성유정이 그녀를 찾았을 때, 성유리는 막 슈퍼마켓에서 돌아왔다.그녀는 손에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성유정을 보는 순간 손이 굳어졌다.성유정은 계단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왔어?”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성유정은 또 한 번 싱긋 웃더니 물었다.“나를 보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보러 왔어.”성유정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한빈 오빠는 요즘 너무 바빠서 언니를 돌볼 수 없을 거야. 나는 언니의 동생이니 당연히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언니를 걱정해줘야지.”“그럼 이제 가도 돼.”성유리는 대답하면서 그녀를 스쳐 계속 걸어갔다.예전에 성유리가 이런 태도로 말했으면 성유정은 펄쩍 뛰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고 반대로 성유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성유리, 아직도 박한빈이 널 지켜줄 거로 생각해? 아직도 모르겠어? 너랑 한빈 오빠는... 이젠 불가능해.”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성유정을 바라보았다.그녀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어머니가 이렇게 큰일을 당했는데 한빈 오빠가 언니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아?”성유리는 손을 꽉 잡은 채 뒤 마침내 소리 내 말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아줌마가 준 서류가 뭔지 알아?”성유정은 빙긋 웃으며 성유리에게 답안을 말해줬다.“한빈 오빠에게 주는 유서야.”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성유정은 얼마 안 지나 돌아갔고 성유리는 계단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그때 밑에서 누군가 올라오다가 센서 등이 켜지는 순간 그만 비명을 질렀다.“깜짝 놀랐잖아.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야? 귀신 분장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거야?”여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몸이 굳은 채 자신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빨간색 머리를 한 그 여자가 따라오며 물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계속 통화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서훈에게 연락했다.“박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라 오늘 뵐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아니면...”서훈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만날 시간이... 없다니?’성유리는 얼마 전에 그도 매우 바빴던 것을 기억한다.하지만 그때 박한빈은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그녀를 찾을 수 있었고 때로는 출장을 갔다가 한밤중에 비행기에서 내려 직접 그녀를 찾기도 했다.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전화 한 통을 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이런 생각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지만 성유리는 결국 묻지 못하고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알았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렇게 돌아섰다.하지만 택시기사가 주소를 묻자 그녀는 말을 돌렸다.“시월파크로 가요.”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여기에 오지 않았다.예전에 박한빈이 그녀의 거처를 싫어할 때 함께 이곳에 와서 살자고 말하곤 했지만 성유리는 줄곧 허락하지 않았다.그녀는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박한빈에게 문자를 보냈다.[시월파트 쪽에서 기다릴 테니 한 번 만나요.]문자가 전송되자 그녀는 바로 옆 신발장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오늘 금성은 사실 매우 추웠다.복도 옆 창문은 아직 열려 있었고 찬바람이 이렇게 계속 안으로 불어 들어왔지만 성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멍하니 맞은편 엘리베이터를 보고 있었다.박한빈은 끝내 답장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가 올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그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사라져갔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힘껏 문지르며 조금이나마 따뜻해지려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또 시간을 한 번 보았다.벌써 거의 12시가 되었다.성유리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보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시간을 설정하기 시작했다.‘5분만 더 기다리자...’이 5분 안에 그가 여전히 오지 않으면 그녀는 떠나리라 마음먹었다.핸드폰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0시를 1분 남기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문을 닫지 않아 들어오는 찬바람과 실내의 넉넉한 따뜻함이 대조적으로 느껴져 성유리도 지금 자신의 몸이 추운지 더운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느껴질 뿐이었다.한참 만에 목소리를 찾은 그녀는 중얼거리듯 물었다.“그러니까 내 설명도 듣기 싫다는 거예요?”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성유리, 이 세상은 결과만 보면 돼.”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결과는?무엇이 결과란 말인가?결과는 그의 어머니는 지금 병원에 누워 인사불성이 되었고 그 유서가 그녀의 손에서 그의 손까지 온 것이다.결국, 그는 그들이 이제 만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심지어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도 그녀에게 인색했다.성유리는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문득 그동안 그들이 함께 지냈던 시절을 떠올렸다.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들이 침대에서 속삭이던 다정한 모든 장면...그 박한빈들이 눈앞의 그와 서서히 겹쳤다.하지만 그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갑고 매몰찼다.마치 쓸모없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듯 그는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얼마 전의 일들은 모두 자신의 상상인 것만 같았다.“그래요.”마침내 성유리는 이 말을 뱉었다.그녀는 사실 오늘 여기 온 것은 그에게... 모든 걸 해명하려는 것뿐이었다.그녀는 심지어 문밖에서 기다리며 졸렬한 고육책을 연출하기까지 했다.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결과만 본다고...’과정이 더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그는 신경 안 쓴다는 뜻이니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그럼 가볼게요.”성유리는 이런 말을 남기고 그냥 돌아섰다.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성유리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코트 주머니 속에 넣은 손을 꽉 잡았다.“안 작가님이 청첩장을 보내주셨어.”박한빈은 그녀
심지어 아까 첫술보다 더 맛이 없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채 그 하얀 그림자를 보았다.그는 높은 층에 서 있었는데 아래층의 모든 물건은 이때 희미한 점으로 변했다.하지만 그때 박한빈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는 심지어 그녀가 쓰레기통 옆에 서서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박한빈은 갑자기 술잔을 꽉 움켜쥐었는데 한참 후에야 서서히 풀었다.자신이 결코 감정을 중요시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신 덕분이었다.지금 그녀를 생각하면 박한빈은 그녀의 부드러운 말투와 겉으로 드러나는 미소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었다.어머니에게 사고가 나기 전까지 박한빈은 그녀에게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박한빈은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일찍이 그녀의 몸 안에 존재했었는데 작은 탯줄이 그들을 하나로 연결했다. 그 감정은 그녀의 유서를 보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그녀는 그에게 미안해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떠나려 했다.떠나면서 그녀는 그 ‘혼외자'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함께 주었다.그녀 명의의 모든 재산과 주식도 그에게 남겼는데 그 재산들은 지화 그룹 외의 것이었다.만약 어느 날 다른 사람들과 더는 경쟁하고 싶지 않다면 떠나라고 하면서 이 재산은 그가 먹고 입는 걱정 없이 살기에 충분하다고 했다.그녀의 아이로서, 사실 그녀의 가장 큰 희망은 그가...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아이러니하게 지난 30년 동안 그녀는 그에게 어떤 칭찬의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박한빈은 예전에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녀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유서에서 박한빈은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김서영이 박씨 집안의 미래 후계자에게 주는 감정이 아니라 평범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이었다.그걸 깨달은 순간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보니 불쌍하고
박한빈은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그는 처음으로 병원 보안요원에게 그들을 내쫓으라고 했다.연약해 보이는 두 노인은 끌려갈 때 욕설을 퍼부으며 기자를 찾아가 아들이 박씨 가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겠다고 했다.당시 박한빈은 차갑게 한마디만 했다.“그렇게 해요.”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한 그 태도는 사람의 마음에 서리가 내리게 했다.박한빈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잠시 후, 서훈이 달려와 미화로 쪽에 있는 물건들을 이미 시월파크로 옮겼다고 보고했다.박한빈이 알았다고 한마디만 하자 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모... 성유리 씨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병이 난 것 같아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사실 이 일은 성유리 씨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성유리 씨에게 화를 내신 거예요?”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그를 쳐다보았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을 그냥 삼켜버리고 속으로만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정말 병이 났다.찬바람에 몇 시간씩 앉아있었으니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그녀는 원래 늘 비상약을 집에 두고 있었지만 약을 먹기 직전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천천히 약상자를 내려놓고 따뜻한 물 한 잔만 따라 마셨다.다행히 그녀의 상황은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이틀 동안 집에 누워 있었더니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지만 기침만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특히 밤이면 원래도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연이은 기침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어려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는 것에 익숙해졌다.‘왜 또 그럴까’에 대한 심경에서 ‘역시 그래’로 바뀌었다.사실 박한빈의 마음을 믿은 적은 없다.그들의 감정이 가장 ‘불타오를' 때도 그녀는 여전히 그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거절하는 것을 배워내지 못했을 뿐인데 비소를
성유리는 말을 하지 못했다.그녀도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고 말하려다 입까지 나온 말을 다시 삼켜 버렸다.이 일들을... 박한빈은 아마 다 잊었을 것이다.오죽했으면 이곳에 와서 휴가를 보내자고 제안했겠는가.그래서 성유리는 그와 그녀 사이의 ‘뜨거운' 감정도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마치 그녀가 그를 좋아할 때 그들이 함께 지내는 모든 일, 모든 세부 사항을 머릿속에 새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그녀를 선택한 것은 단지 그들이... 속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이번에 혼자 도인국에 온 성유리는 미리 인터넷에서 알아보고 전문적인 가이드를 찾았다.가이드는 이쪽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깔끔한 단발머리에 열정적이고 밝은 성격이었다.“성유리 언니죠?”성유리가 짐을 찾자마자 그녀가 다가왔는데 손에는 ‘성유리’라는 이름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다.“안녕하세요. 사하나예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안녕.”“호텔 예약했으니 바로 가면 돼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 그녀를 앞으로 안내했다.그녀는 전문적인 가이드였는데 가는 내내 성유리에게 이곳의 풍경을 소개하고, 성유리의 음식 취향을 물으며 그녀에게 맞는 레스토랑을 추천했다.“내일 단풍사부터 가봐요. 마침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서하나가 말했다.“최근 단풍사가 갑자기 핫해서 휴일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그래.”성유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사하나는 성유리의 냉담함을 느끼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다행히 앞으로 이틀 동안 그들은 즐겁게 지냈다.성유리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사하나의 스케줄에도 이의가 없었다. 사하나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탄할 만큼 순조롭게 진행했다.사흘째 되던 날, 성유리는 한 바에서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
꿈속에서 박한빈은 성유리가 연정우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으려고 다급히 뛰어갔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망치고 성유리를 다시 자기 곁에 세우고 싶어 그녀의 손에 거의 닿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부시게 비추는 햇살 때문인지 박한빈은 눈물이 맺혔고 정신을 다잡고는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안으려 했다. 하지만 옆에 있는 것은 오직 베개 하나뿐이었다. 큰 방에 홀로 남겨진 박한빈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빠른 속도로 아래층에 내려간 박한빈은 얼른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전화를 꽤 빨리 받았다. “어디야?” 박한빈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내, 문 벨 소리가 성유리의 대답 대신 들렸다. 성유리도 벨 소리를 들었는지 박한빈과의 통화를 끊어버리고는 입구 앞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른 곳이 아닌 뒤에 있는 정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를 본 박한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 손에 들려있는 약 봉투를 발견했다. 머릿속에는 약 봉투 안에 뭐가 담겼는지 떠올랐지만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성유리는 약을 개봉하더니 물과 함께 꿀꺽 삼키더니 박한빈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왜 저를 찾은 거죠?”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없이 상위에 놓인 약상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예상은 딱 맞아떨어졌고 박한빈은 꽉 쥐었던 주먹에 서서히 힘을 풀었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보며 되물었다. “배 안 고파? 나가서 밥 먹을까?” “저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돼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이미 그녀가 외출복 차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허리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성유리는 유난히 더 아름다웠다. 안 하던 화장까지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묶어 목선이 드러난 성유리를 말없이 쳐다보던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랑 한 약속인데?” “...” 아무 대답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건지도 기억을 못 했다. 몇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진 성유리는 비몽사몽인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의 몸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 서서히 눈을 뜬 성유리는 자기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깨어난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바로 성유리의 종아리를 잡더니 힘껏 그녀를 깔았다. 성유리는 화가 나 손을 뻗어 박한빈의 얼굴이라도 할퀴고 싶었지만 그는 어느새 그녀의 두 손을 다 잡아 자신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박한빈의 힘을 당할 수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는 순순히 따르는 그녀에 더 흥분했다. 가만히 있는 자신을 잡고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며 사랑을 나누고 있던 박한빈이 방심하는 틈을 타 성유리는 그의 배를 강하게 차버렸다. “저 숨 좀 쉬게 놔두면 안 돼요?” 진심이 담긴 자신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그가 정말 정신병자라고 생각했다. 성유리는 옆으로 돌아 박한빈을 애써 무시하며 자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저항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안던 박한빈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할게.” “근데 네가 이렇게 계속 움직이면 난 안 한다는 보장은 못 해.” 박한빈의 말이 성유리에게 먹혔는지 그녀는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시간이 오래 흐르도록 잠에 들지 못한 박한빈은 지금 자기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사람은 아주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어나면 또 나를 그런 눈으로 보겠지.’ 박한빈이 아무리 애를 쓰며 관심을 받고 싶어 해도 성유리는 눈길 한번 돌려주지 않았고 분노와 원망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또 좋아지겠지.’ 박한빈의 강압 아래 다시 혼인을 한 두 사람이니 그는 성유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고 품에 있는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 성유리는 잠에 들었지만 매우 불편한지 미간을 찌푸렸고 박한빈은 서서히 힘을 풀었다. 박한빈은 잠이 든 성유리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성유리는 물이 마시고 싶은 것도 꾹 참고 뒤척거리며 잠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목이 너무 말라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혼자만의 싸움을 벌이던 성유리는 결국 아래 주방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기를 선택했다. 조명이 다 꺼진 집은 어두컴컴했고 성유리는 복도 등만 켠 채로 주방에서 물을 따랐다. 물컵에 물이 가득 채워지는 순간, 성유리의 뒤에서 누군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한 잔만 따라줘.”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성유리는 컵을 떨어뜨렸고 놀란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 보호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그의 손을 뿌리쳤고 박한빈은 멋쩍은 듯 주방으로 걸어가더니 다시 물을 따라 성유리에게 먼저 건넸다. 성유리는 그가 내민 물컵을 무시하고는 다시 혼자 따랐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쳐다만 보다가 표정이 굳어갔다. 갈증을 해소한 성유리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자려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확 낚아채듯 잡았다.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른 쪽 손까지 잡더니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강한 박한빈의 힘에 못 이겨 벽에 딱 붙은 채로 화를 내며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뭐 하려는 것 같은데?” 박한빈은 씩 웃으며 되물었다. “유리야, 오늘 우리 신혼 첫날밤인데?” ‘첫날밤?’ 성유리가 생각에 잠기는 찰나,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온 박한빈의 입에서는 아직 강한 술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는 마치 맹렬한 짐승처럼 성유리의 입술을 탐했다. 성유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더욱 강하게,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 그녀의 두 손은 여전히 박한빈에 의해 꽉 잡혀있었기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잠옷 안으로 천천히 손을 넣었다. 성유리가 입고 있던 잠옷은 박한빈이 방 안에 준비해 둔 실크 잠옷이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다 잠근 성유리
늦은 밤, 도연제. 박한빈은 꽤 늦은 시각이었지만 돌아오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그를 상관하지 않고 혼자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얼굴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을 계단으로 비비자 점점 옅게 변했다. 성유리는 원래 박한빈이 집에 돌아와 자신의 얼굴을 보면 뭐라 할 것 같아 내심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성유리는 오늘 박한빈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진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았다. 똑같은 넓은 집에 똑같이 홀로 남아 남편을 기다리는 것 말이다. 그러나 성유리가 지금 누운 곳은 작은 방이 아닌 큰방이었다. 아마 이런 큰 변화 때문일까, 성유리는 누운 지 한참이 지났지만 잠에 들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차라리 작은 방에 누워있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작은 방은 성유리가 익숙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곳은 익숙한 냄새였지만 성유리와 박한빈에 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고 전과는 사뭇 달랐다. 익숙하고도 낯선 장소는 마치 천천히 자신을 베는 날카로운 칼처럼 느껴졌고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심한 고통이었다. 성유리는 침대에서 한 시간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려고 할 무렵, 아래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으려 눈을 더욱 질끈 감았지만 이내 누군가 벨을 누르는 소리를 들었고 성유리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도 않고 한번, 또 한 번 눌러댔고 성유리는 그제야 집안에 다른 도우미가 없기에 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결국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준 성유리는 문 앞에 서 있는 서훈과 박한빈을 발견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주무시는 데 방해했네요.” 서훈은 잔뜩 움츠러들며 말을 이어갔다. “박 대표님께서 너무 취하시는 바람에 모시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유리는 박한빈과 서훈을 번갈아 보다 문 앞에서 비켜주며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그거랑은 다르죠.” “뭐가 다른데?” 성유리도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며 계속 물었다. “다 알면서 왜 계속 묻는 거죠?” 박한빈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점점 더 실렸다. 성유리는 그와 달리 아주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희는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잖아요. 굳이 결혼식을 해야겠어요?” 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유리랑 같아. 그리고 혼인 신고서도 이미 손에 넣지 않았니? 결혼식은 그저 형식일 뿐이야. 중요하지 않잖니?” “하지만 결혼 사실은 알려야 할 거야. 그러니까 결혼식보다는 연회 같은 거 준비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니?”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더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저는 꼭 결혼식을 치를 겁니다. 이미 다 말해놔서 번복 못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는 김서영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성유리만 쳐다봤다. 성유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지금 자기가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툭 터져버려 공중에서 사라지는 그런 우스운 풍선 말이다. 풍선이 아니라면 떼를 쓰는 어린아이나 관심받고 싶어서 애를 쓰는 철없는 어른이라고 형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옆에서 별의별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어떠한 반응도 해주지 않는 성유리가 미웠고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저는 또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게?” 김서영이 물었다. “회사요.” “그럼 유리는?”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한빈을 보고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마 김서영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속으로 내심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랐지만 성유리는 그러지 않았다. 뒤돌아 빠른 속도로 앞으로 걸어 나가는 박한빈은 사실 별일이 없었지만 빨리 이곳에서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에 김서영은 불쾌함을 느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역시 사모님은 여전히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고 계시네요.” 가볍게 던진 성유리의 한 마디에 김서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사모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다 해서 박한빈 씨를 용서할 생각은 없고요.” 성유리는 찻잔을 상에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박한빈 씨가 업계 상의 위치를 이용해 그렇고 그런 수단과 방법으로 강압하고 위협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됐을 거예요.” “만약 사모님이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다시 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에 뭐라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성유리가 자신의 말에 강하게 반박하고 따졌다면 김서영은 아직 그녀가 박한빈에게 감정이 남아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나도 알아.” 몇 분 뒤, 김서영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름이 연정우라고 했나? 근데 유리 너도 그 남자를 좋아했어?” “네.” 평온한 말투로 제일 듣기 버거운 말을 내뱉는 성유리의 대답에 계단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은 몸이 굳어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성유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연정우와는 그저 평범한 비즈니스 사이라고 성유리가 직접 인정했었다. 왜 결혼을 하냐고 물었을 때도 성유리는 직접 박한빈에게 연정우의 외할아버지가 건강이 악화돼서 서두른다고 알려줬다. ‘어떻게 유리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박한빈의 뒤에 서 있던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집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서영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동공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옆에 있던 성유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김서영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비록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네가 우리 한빈이랑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니까 주는 거야. 이건 내가 결혼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건데 오늘 유리 너한테 넘겨줄게. 처음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받아.” “이건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한빈이는 평생 유리 너랑 살겠다고 마음먹었잖아. 결국 이건 네 손에 들려야 할 거야.”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하는 김서영을 성유리는 조용히 쳐다만 보았다. 눈앞에 있는 김서영은 여전히 성유리가 알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고 전과는 다를 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러한 김서영도 박씨 가문이라는 큰 “철창”에서 벗어나려고 목숨까지 바친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서영이 사랑했던 남자는 이미 세상을 떴고 두 사람의 일은 세상에서 점점 잊혀갔다. 그리고 김서영마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김서영을 대해야 하는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 대신 김서영이 건넨 물건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에게 시선을 휙 돌리더니 입을 뗐다. “할머님 편찮으시다. 올라가서 얼굴이나 뵙고 가. 유리는 여기 놔두고.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유리도 같이 올라가고 싶습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꽉 잡으며 김서영의 말에 거부 의사를 비쳤다. “이미 혼인 신고까지 마쳤는데 내가 설마 유리를 어떻게 하겠니?”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뒤돌아 위층으로 뚜벅뚜벅 올라갔다. “앉아.” 멀뚱멀뚱 서 있는 성유리에게 김서영이 다정하게 말했다.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홍차로 끓였어. 이거 좋아하는 거 맞지?” 성유리는 앞에 놓인 찻잔과 김서영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세요?” 김서영은 말없이 성유리를 쳐다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를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자신이 머무르는 호텔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금성에서는 아마 박한빈이 모르는 곳이 없을 테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찾아낼 수 있다. 다음 날, 성유리가 깨어나자마자 초인 종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앞에는 박한빈이 서 있었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 혼인 신고하러 구청에.” 오늘 다른 정장 외투 없이 깔끔한 하얀 셔츠만 입은 박한빈은 앞머리까지 내려 평소와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마치 수년 전, 자신이 몰래 훔쳐보던 박한빈이 떠올라 멍해졌다. 성유리는 이제야 그때 박한빈의 모습 또한 가짜였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진짜 박한빈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옷은 이미 내가 다 준비했어. 혼인 신고하는 데 필요한 물건은 잘 챙겼지?” 성유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다 아는지 웃으며 계속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는데 이제 와서 미처 못 챙겼다는 말로 시간 끄려는 건 아니지?”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인데? 아니야?” 성유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다 챙겼으니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만족한 듯 더 환하게 웃더니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건네주며 재촉했다. “가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와. 빨리 가자.” 두 사람은 이내 빠르게 구청에 도착했고 성유리는 이번에 3번째 방문이라 딱히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3번이나 같은 남자와 구청에 온 본인이 한심했고 올 때마다 성유리의 마음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결혼이 아닌 두 사람인지라 혼인 신고를 하는 모든 과정을 아주 익숙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장이 꾹 찍힌 혼인 신고서는 그들의 손에 쥐어졌다. 성유리는 혼인 신고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가방 안에 던지듯 넣어버리고는 택시를 타려고 뒤를 돌았다. 하지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그러나 그런 감정도 시간이 지나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고 김서영이 깨어난 날, 박한빈은 기쁘다는 감정보다는 성유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부터 고민했다. 성유리의 죄책감을 끌어낸다는 잔인한 계획은 박한빈도 보통 사람이라면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냉철하고 매정한 교육을 받아온 박한빈은 가능했다. 김서영은 어린 박한빈에게 어떻게 해야만 좋은 상인이 되는지, 어떻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줬었다. 그녀는 결국 박한빈을 자신이 원하던 상인으로 만들어 냈지만 좋은 아들로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만약 보통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유리한테 무슨 짓을 했니?”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김서영이 이빨을 꽉 깨물며 다시 물었다. “유리를 협박이라도 한 거야? 요즘 유리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 어떻게 그래? 이게 바로 너의 수단이야?” “네.” 간단하기만 한 박한빈의 대답에 김서영은 안색이 잔뜩 어두워져갔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요?”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서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어머니가 시킨 결혼 아니었습니까? 성유리가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원하던 대로 됐는데 도대체 왜 화를 내시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가네요.” 김서영은 화를 꾹꾹 참으며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난 네가 내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사람인 줄 몰랐어.” 아무 말이 없는 박한빈을 보던 김서영은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는지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빈아, 전에는 엄마가 잘못했어. 유리는 너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이미 이혼하지 않았니? 지나는 길은 지나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