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열이 말을 할 때 입김이 전부 성유리의 뺨에 뿌려졌다.그 느낌에 성유리는 갑자기 자신이 지석민의 집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구역질이 순간적으로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천천히 이를 악물고 앞에 있는 사람을 주시한 채 말했다.“진무열, 오늘 감히 나한테 허튼짓을 하면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야...”“신고해.”진무열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네가 지금 업계에서의 소문이 있는데 네가 하는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 거로 생각해? 그때가 되면 다들 네가 날 꼬셨다고 생각할 거야?”진무열의 얼굴에 간사한 웃음이 떠올랐는데 그 모습 역시 성유리에게 익숙했다.하지만 이때 그녀는 익숙한 얼굴이 마치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는 독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그녀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을 벌렸으나 말은 결국 창백하게 변했다.진무열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웃음을 더하더니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유리야, 가자.”그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성유리의 입술에 키스했다.“오늘 밤이 지난 후 함께 이곳을 떠나 아무도 우리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하는 게 어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은 조용히 자신의 뒤 서랍을 열었다.진무열의 키스가 떨어지려던 참에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문을 발길질에 열렸다.요란한 인기척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박한빈이 문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그의 각도에서 바라본 진무열의 손은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성유리의 한 손은 진무열의 어깨에 닿아 있었지만 얼굴에는 몸부림치는 기색이 전혀 없는 듯 보여 마치 자신의 난입으로 그들의 못다 한 키스를 방해한 듯 보였다.하지만 곧 박한빈은 뒤에 숨어 있는 성유리의 손을 보았는데 그녀는 가위를 쥐고 있다.박한빈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곧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진무열을 걷어차 땅에 쓰러뜨렸다.진무열은 아직 박한빈의 출현에 충격을 받은
바로 그의 이런 냉정함 때문에 성유리는 그가 더 무서웠다. 성유리는 이런 박한빈을 처음 봤다.일반적으로 사람은 화가 났기 때문에 싸우지만 박한빈은 전혀 달랐다.성유리는 오히려 박한빈이 냉철해 보였는데 심지어 아까 진무열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처럼 죽든 살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이때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한빈은 그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성유리를 힐끗 본 다음 직접 휴대전화를 꺼냈다.경찰에 신고하려는 박한빈을 보고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달려들어 그의 손을 눌렀다.“안돼요...”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눈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먼저 병원에 보내요.”마침내 성유리는 목소리를 되찾았지만 박한빈은 대답도 움직이지도 않았다.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성유리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더듬어 꺼내 전화하려고 했는데 손을 뻗고서야 그녀는 손에 가위를 든 채 휴대전화는 어디로 내팽개쳤는지 알 수도 없다는 걸 발견했다.성유리가 휴대전화를 찾으려고 돌아설 때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뭘 그렇게 두려워해?”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는데 성유리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거야?”박한빈이 계속해서 물었다.이 말을 들은 성유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봤다.“걱정하지 마. 죽지 않아!”박한빈이 평온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성유리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고 박한빈을 바라봤다. 박한빈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고 그저 비서에게 전화해 와서 처리하게 했다.“가자.”전화가 끊긴 후 그는 직접 성유리의 손을 잡아당겼는데 이에 그녀는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간다고요? 어디로... 가요?”“아직도 여기에 있고 싶어?”박한빈이 당연한 듯 물어보자 성유리는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박한빈은 아주 결단력이 있게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틈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철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성유리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의 동작은 마치 성유리가 그의 뜻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면 당장 부숴버릴 것만 같은 착각을 주었다.“만나기 싫은 게 아니에요.”성유리가 대답하자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저... 만날 필요가 없었어요.”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우리는...”“그럼 전에 왜 나와 결혼했어?”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성유리는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곧 침착해졌다.“이건 우리 두 집안에서 약정한 일이에요...”“그저 이것 때문이야?”“아니면 또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은 조금씩 느슨해졌다.성유리는 이 화제가 끝난 줄 알았지만 곧 그는 천천히 계속해서 물었다.“성유리, 당신이 성씨 가문과 관계를 끊는 성격과 태도로 보아 그들에게 휘둘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만약 정말 이 원인이라면 넌 몇 달 전에 조씨네 아들과 결혼했을 거야.”박한빈은 말하면서 성유리를 쳐다봤는데 그 눈빛에 성유리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그러나 그녀는 곧 눈길을 피했다.“저는... 그저 후에 그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아, 그래?”“아니면요? 다른 이유라도 있겠어요?”“당신이 나를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어.”박한빈의 말은 마치 주먹처럼 성유리의 심장을 때렸다. 심한 떨림과 통증이 있고 난 뒤 근육이 움츠러들면서 성유리는 호흡마저 빨라지기 시작했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박한빈의 장난스러운 눈빛과 마주했는데 성유리는 자신이 광대 같아 보였다.벌거벗은 채로 무대에 올랐으나 조심스럽게 몸을 가리며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려 했지만 나중에 옷감이 벗겨지면서 불빛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광대가 되어버렸다.성유리의 손이 조금씩 조여졌다.“왜 이렇게 말해요?”한참 만에 목소리를 찾은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냥
박한빈이 성유리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끊어버리는 바람에 성유리는 더 말할 흥취도 없어졌다. 성유리는 서서히 입을 꾹 닫아버렸고 화가 난 듯 박한빈을 째려보았다. “왜냐하면 나도 이젠 알았어.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박한빈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랑 결혼했을 때 별로 많이 불편하지 않았어.” “나한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줄래?” 성유리는 지금 눈앞에 놓인 모든 것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마치 절벽에 서 있는 듯 아찔한 기분이 들었고 조금만 발을 헛딛어도 바로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뼈가 다 으스러지는 고통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구름 위에 누워있는 듯 포근하고 기분 좋은 냄새도 났다. 서서히 눈을 뜬 성유리는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도, 절벽도 그리고 구름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방 구조는 성유리에게 아주 익숙했다. 그곳은 바로 시월파크였다. ‘그럼 어제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건가?’ 성유리가 멍하니 서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두 개의 기사를 보내준 것이다. 첫 번째 기사는 진무열에 관한 기사였는데 그가 어젯밤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골절만 했을 뿐 생명에는 위협이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지화그룹과 단풍 그룹에 관한 기사였다. 두 가문에서 함께 하던 일은 이미 순조롭게 끝이 났다는 사실과 뉴스 발표회에 기자가 박한빈에게 그와 단예진의 사이를 물었던 일이 적혀있었다. 박한빈은 단예진과 그저 친구 사이라고 대답하는 동시에 두 가문의 인연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으니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도 좋다는 대답을 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단예진과 났던 많은 추문들이 하루아침에 농담거리가 돼버렸다. 성유리는 아주 자세하게 두 개의 기사를 다 읽었지만 박한빈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사실 성유리는 아직 신분의 변화에 익숙해지지 않아 박한빈이 자신을 대하
“그게...” 성유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말을 끊어버리며 다시 물었다. “아직 안에 있어? 나 이미 도착했는데.” 그의 말에 성유리는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들자 마침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고 김서영 또한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성유리와 김서영이 눈이 마주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아주 냉정해졌다. “왜 오신 거예요?” “밥 먹으러.” 박한빈의 대답은 짧고도 명료했다. “지금 이미 엘리베이터 안이에요. 주차장에서 기다려주세요.” 성유리는 말하며 1층 버튼을 눌렀다. 김서영은 그때까지도 가만히 성유리의 앞에 서 있었다. 1층에 도착한 순간, 성유리가 내리려 하자 김서영이 발 빠르게 먼저 내렸다. 옆에 있던 남자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는지 멍해 있다가 별다른 말 없이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김서영을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바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차를 보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먹고 싶은 음식 있어?” 박한빈은 오늘 운전기사도 없이 혼자 운전해서 이곳에 왔다. 운전대에 올려놓은 박한빈의 팔은 핏줄도 선명해 관능적으로 보이기 그지없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팔을 조금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무거나 다 돼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성유리가 안전벨트를 다 메고 나서야 시동을 걸었다. 박한빈의 차가 시월 파크를 빠져나갈 때, 성유리는 길가에 서 있는 김서영과 남자를 발견했다. 운전을 하던 박한빈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성유리의 시선을 따라 그곳을 쳐다보려 했다. 그러자 성유리는 빠르게 박한빈의 손을 잡으며 그의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하마터면 옆에 주차된 차에 부딪힐 뻔했다. 다행히 가까스로 사고를 막아낸 박한빈은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봤지
하지만 박한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유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표현도 안 했다. 설령 박한빈이 슬쩍 감정표현을 했다 하더라도 성유리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유리는 지금 제대로 된 답을 알고 싶어졌다. 옆에 앉아서 묻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던 박한빈이 되물었다. “성유리 네 생각엔 내가 왜 이러는 거 같은데?” 성유리는 박한빈의 애매모호한 말에 입술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 “말해주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그녀는 여전히 박한빈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녀가 저항할수록 더욱 꽉 잡았다. “너 점점 더 짜증이 많아지는 것 같다?”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박 대표님, 제 성격은 항상 이랬어요.” 반면 성유리는 그의 말에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알다시피 저는 유정이나 단예진 씨처럼 그렇게 다정한 스타일이 아니라 서요.” 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뜨끔했는지 당황하더니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빠르게 운전대를 돌려 길가에 차를 세웠고 성유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를 덮쳤다. “박 대표님? 보아하니 너도 질투가 많은 사람인가 보네?” “아니거든요.” 성유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정했다. “내가 보내준 기사 안 봤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턱을 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나랑 단예진 씨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리고 성유정이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성유리는 이빨을 꽉 깨문 채로 박한빈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유정이한테 늘 다정다감하게 잘 대해주셨잖아요.” 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조금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여 성유리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대답했다. “앞으론 안 그럴게.” “앞으로라고요? 무슨 뜻이에요?” 성유리가 물었다. “네 생각에는 무슨 뜻인 거 같아?” 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을 이어갔다. “유리야, 나는 너랑 숨바꼭질할 시간이 없어.” “지금
김서영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는 성유리는 미화로에서 지낸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시간 있니? 우리 한번 만날까?” 김서영이 물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만남 제안을 자신은 절대 거절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성유리는 지금까지 김서영의 모든 요청과 제안에 거절한 적이 없었다. 김서영은 만남 장소를 어느 한 찻집으로 정했다. 성유리가 찻집에 도착했을 때, 김서영은 이미 조용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하얀색의 긴 치마를 입고 머리카락은 아주 정갈하게 빚은 모습이었는데 세월을 비껴갔는지 아름답고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차 한 잔을 건네주며 말을 꺼냈다. “마셔봐, 올해 새로 나온 룽징 차란다. 네가 좋아했던 게 생각이 나서 시켰어.” “감사합니다.” 성유리는 짧은 인사를 한 뒤, 차를 한 모금 마시려 했다. “너랑 한빈이 언제부터 다시 만난 거야?” 순간 김서영이 물었다. 성유리는 그녀의 물음에 잔뜩 당황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전부터 조금 느끼긴 했어.” 그에 반면 김서영은 평온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전에 둘이 크게 싸웠었니? 한빈이 얼굴에 남은 그 자국으로 회사 사람들이 꽤나 오랫동안 토론했단다.” 성유리는 진즉에 이 일을 잊어버렸지만 김서영의 말에 얼굴이 빨개졌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봤다. “처음엔 요즘 한빈이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가 했는데 다시 생각 해보니 너밖에 없더라. 한빈이가 안 작가님 그림을 사는 거 있지? 그 그림 너한테 사준 거니?” ‘그림?’ 성유리는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했다. 하지만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성유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그 그림 보지도 못했어요.” “그럼 아직 너한테 줄 시기를 못 찾았나 보구나.” 김서영은 완전히 확실하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난 알아. 무조건 유리 너한테 줄 거야.”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너 안 작가님 그림 좋아하지 않았
“유리 네 양아버지 일 말이니? 나도 들었다.” 김서영의 태도는 여전히 느긋하고 담담했다. “비록 밖에 나가보면 별의별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너를 알고 지낸 시간도 오래됐잖니. 네가 어떤 사람인지도 내가 모를까 봐?” 김서영의 담담한 말에 성유리는 무슨 뜨거운 물건 하나가 자기 심장에 천천히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유리는 두 손을 꽉 쥐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님, 고마워요.” “응. 너랑 한빈이 일은 얘기가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내 얘기를 좀 해볼게.” 김서영은 한껏 더 다정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고마웠어.” “저... 아니에요.” 성유리의 긴장한 모습에 김서영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왜? 놀랐니?” “그건 아닌데요. 그냥 조금 의외라서요.” “뭐가 의왼데? 한빈이 어머니라는 신분에 익숙해져서 나도 보통 여자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성유리가 김서영에게 먼저 물었다. “박한빈 씨도 아세요?” “걔는 알 필요 없어.” 김서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건 내 사적인 일이라서. 그리고 난 아직 박씨 가문을 떠날 생각이 없어.” 그녀의 대답을 들은 성유리는 김서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직 박씨 가문에 몸을 담그고 있는 김서영이니 다음 후계자는 당연하게도 박한빈 뿐이었다. 만약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박씨 가문의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시는 것은 물론 손에 꽤 많은 지분을 쥐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알면 어떡하지?’ “혹시 박한빈 씨한테 정말 다른 형제가 있는 거예요?” 성유리는 말을 빙빙 돌려서 김서영에게 물었다. “알고 싶니?” 김서영은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 “성유정 씨.”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성유정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어느새 단예진이 성유정의 앞에 다가왔고 성유정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단예진 씨. 요즘 너무 바쁘셔서 얼굴도 못 보는 줄
“그리고 나도 믿어. 정말 하루아침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때가 와도 난 잘 살 수 있을 거야. 잘 살지 못한다고 해도 절대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거고. 특히 유리 너를 원망할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연정우의 대답에 긴장감에 바짝 굳어있던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래서 오늘 종일 이것 때문에 걱정했어?”“응...”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도 어머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래도 사모님은 널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응. 안 그럴게.”연정우는 빠르게 대답했지만 성유리는 그의 대답이 성의 없어 보여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러자 연정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아까 화난 건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 그런 거야. 그렇지만 이제 보니 오해였던 것 같네.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어머니랑 안 싸울 테니까.”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그나마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너 지금 어딘데?”“회사. 근데 곧 집에 가려고.”“알겠어. 집에 가서 푹 쉬어.”“너도. 일찍 자.”연정우의 다정다감한 말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고 성유리는 간단한 대답만 마치고는 통화를 끝냈다.한편, 연정우도 회사를 떠나려고 주차장에 내려갔지만 평소와 달리 싸한 기분에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심호흡 한 번 하고는 바로 뒤돌아보았지만 텅 빈 주차장엔 아무도 없었다.연정우는 제 자리에서 한참 사방을 둘러보다 확실히 자기 빼고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요즘 너무 피곤해 환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겼다.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차 문을 닫고는 바로 시동을 걸어 지하 주차장을 벗어났다. 하지만 연정우가 떠나자마자 기둥 뒤에 숨어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짧은 머리였고 모자까지 꾹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절반쯤 드러난 얼굴에는 너무
연정우가 성유리와 약속한 시간은 11시였다. 하지만 12시가 다 되어서도 연락 없는 연정우를 성유리는 뜬눈으로 기다렸다.“하늘이 잠들었어?”12시가 넘은 자정이 되어서야 연정우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응. 지금 자.”성유리는 핸드폰을 들고 거실 발코니로 향하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미안해. 원래는 10시쯤에 전화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또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바빴어.”“괜찮아. 나도 아직 안 자고 있었어.”연신 사과를 하는 연정우에게 성유리는 거듭 괜찮다고 강조했고 둘 사이엔 빠르게 적막이 찾아왔다.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금세 감지한 연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 있어?”“아니.”성유리는 재빨리 대답하고는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도 그렇게 바빠?”“응. 그렇지 뭐. 그냥 투자자들이 제일 중요한 문제야. 너도 알잖아. 아직 회사는 제대로 파산 신청도 안 했는데 그 사람들이 다 같이 발을 빼버리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래서 나...”연정우는 말하다 문득 목이 막히는지 뚝 멈추더니 이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봐. 내가 이런 말을 너한테 뭣하러 하겠어. 사실 별거 아니야. 그저 그런 평범한 과정일 뿐이지.”“요즘 너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야?”조용히 연정우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성유리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더 많았지만 이번엔 그가 먼저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인데?”이번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잠시 후, 성유리가 대답했다.“아무 일도 없어. 그냥... 갑자기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래.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힘든 것 같아서.”연정우는 대답이 없었다.“만약 나만 아니었다면 너도 아마...”성유리는 두 손을 움켜쥐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고 그때, 연정우가 뭔가 눈치 차린 듯 물었다.“우리 엄마가 너한테 찾아갔었어?”연정우는 성유리의 말을 채 들어보지도 않고 정확히 그녀에게 발생한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너와 함께하기를 선택했어. 그러니 성유리, 너희 관계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내 아들이 끊임없이 참고 양보했기 때문 아니야? 그런데 너는 정우를 위해 뭘 했지?”금미라는 마지막 말을 툭 던지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그녀의 마지막 말은 전에 말보다 악독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성유리의 가슴을 세게 내려친 것처럼 가슴 속에서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이가 방에서 나오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걱정과 의문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엄마?”하늘이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바라보았다.“아까 그 사람이 아저씨의 엄마야?”하늘이가 물었다.“근데 왜 그렇게 무섭게 구는 거야?”성유리는 하늘이에게 굳은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엄마로서의 본능이야. 마치 엄마가 하늘이를 위해서라면 나쁜 사람을 다 쫓아낼 수 있는 것처럼, 그분도 자기 아이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야.”“하지만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잖아.”하늘이는 여전히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내가 나쁜 사람이지 않을까?’성유리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최근 며칠 동안 성유리는 스스로를 또 다른 의문 속에 가둬두고 있었다.연정우가 그 삶에 지쳤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자신을 선택했다는 기쁨에 그녀는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금미라가 말한 것처럼 연정우가 성유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감내했는데 정작 그녀는 연정우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심지어 성유리가 연정우에게 준 감정적인 보답조차도 너무나 미미했다.“모든 일에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어.”성유리는 결국 하늘이에게 이런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나중에 네가 크다 보면 자연스레 다 알게 될 거야.”그러나 성유리의 이런 대답은 하늘이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아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왜 뭐든 다 커야지만 알 수 있는 거야? 도
금미라의 말이 다 끝나자 성유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긴 침묵에 잠겼다.“그러니까 너도 결국 네가 정우를 망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금미라는 그런 성유리를 쳐다보며 그녀를 비웃는 듯한 웃음을 더 크게 지었다.“그럼 사모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시는데요?”그때,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그걸 몰라서 묻는 거니? 당연히 정우 옆에서 떠나야지!”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침착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사모님, 연정우는 이제 성인이에요. 자신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죠. 더군다나... 저희는 이미 약속을 했어요. 정우가 떠나지 않기로 했는데 제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정우를 버릴 수는 없잖아요.”“버린다고?”금미라는 더더욱 성유리를 조롱하듯이 웃음을 빵 터뜨렸다.“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는 상황이 어떤지 잘 알잖아. 정우 회사가 왜 갑자기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말이야. 그게 다 누구 때문인 것 같아?”“바로 성유리 너 때문이잖아! 너를 만난 뒤로 정우에게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있었어? 매번 너 때문에 하던 일마저 다 잘못되고 있잖아! 심지어 그전에도! 정우의 외할아버지가 왜 돈세탁에 연루됐다고 고발당했을까? 그 일이 박한빈이랑 관련돼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그 일만 없었어도 정우는 그 누구와도 약혼하지 않았을 거야. 우리 가문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이제 겨우 정우의 삶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는 찰나에 네가 다시 나타나 버린 거야. 도대체 정우한테 힘든 시간을 얼마나 더 버텨 달라고 하려는 거지? 유리 넌 결국 정우가 죽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거니?”금미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었고 눈에는 눈물마저 고여 있었다.“그런데도 네가 무슨 자격으로 정우를 버리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건데? 너만 아니었다면 정우가 이런 일을 겪을 일이 있겠어? 정우는 원래 행복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이야. 그런데 다 유리 너 때문에 틀려버렸다고!”금미라는 성유리 앞에서 차마 울음을 터뜨
“지금 이게 무슨 의미야?”금미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정우가 며칠 전까지 여기 있었던 건 맞지만 어젯밤에 이미 떠났어요.”“그래?”금미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잘됐네.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왔어.”성유리는 금미라의 말에 순순히 몸을 옆으로 비켜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게 했다.금미라는 고급스러운 맞춤 드레스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녀의 표정에는 이 집에 대한 명백한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무슨 음료 드릴까요?”성유리가 물었지만 금미라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로 돌렸다.하늘이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아이의 직감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누가 선한 사람인지, 누가 날카로운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금미라가 자신을 쳐다보는 동안 하늘이는 성유리 뒤로 숨으며 그녀를 몰래 쳐다봤다. 아이의 눈빛에는 평소에 잘 없던 두려움이 그득하게 서려 있었다.금미라는 그런 하늘이를 보며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하늘아, 엄마 말 잘 듣고 방에 가서 잠깐만 기다려줄래?”하늘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하늘이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성유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금미라를 힐끔 쳐다본 후 빠르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아이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이내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금미라 앞에 놓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집이 좀 어수선하네요.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방문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갑자기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너 지금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정우를 찾으러 오신 거 아니었나요?
그 캡처 사진은 사하나가 박한빈에게 보낸 것이었다.그녀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고 그저 단순히 사진 한 장만 보냈다. 하지만 그 사진 하나로 박한빈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분명했다.사하나는 박한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당신은 이미 게임에서 탈락했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그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곧바로 사진을 삭제하고 사하나를 블랙리스트에 추가했다.그리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일을 하려 했지만 더는 데이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휴대폰에서 사진은 삭제됐지만 그 장면은 박한빈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듯 사라지지 않았다.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잠시 후, 버티다 못한 박한빈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 열쇠를 손에 쥐고는 밖으로 나섰다.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는 박한빈 본인도 잘 몰랐다.결국 그는 한 공사 현장 앞에 차를 세웠다.이곳은 그가 1년 전에 매입한 땅이었다. 몇 달 전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설계도만 다듬는 데 반년 넘게 걸렸다.그리고 최근, 현장은 또 한 번 더 설계도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하늘이가 회전목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박한빈은 바로 앞에 예쁜 회전목마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그리고 2층에는 성유리를 위해 마련한 전용 화실도 있었다.사실 박한빈에게는 이미 여러 채의 부동산이 있다.하지만 그는 성유리가 돌아오면 이전의 별장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아파트 같은 곳에 사는 건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라 여겼다.그래서 오직 성유리만을 위한 집을 새로 짓기로 했고 집이 완성되면 그녀의 이름으로 등록할 계획이었다.그렇게 성유리를 맞이할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끝난 상태였다.심지어 연정우 쪽에 제시할 조건까지 생각해 둔 채로 말이다.박한빈은 절대로 두 사람이 계속 연인 사이로 지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성유리가 연정우를 마음속에 두고 싶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그게 아니라면 연정우가 먼저 성
연정우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다른 사람들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적어도 성유리가 보고 들은 것들로만 해도 연정우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가 성유리 때문에 무너져버리고 있다.그래서 만약 연정우가 자신을 밀어내더라도 성유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전혀 놀랍지도 않았다.그런데 지금 그가 한 대답은 성유리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일이 아닌 자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성유리는 이를 꽉 악문 채 눈앞의 사람을 올려다봤다.“넌 싫어?”연정우가 물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여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 후 다시 연정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아니. 좋아.”“이런 삶은 전혀 힘들지 않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난 어릴 때부터...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크지 않아도 되고 화려할 필요도 없었어. 가사도우미 같은 건 필요도 없고. 내 아이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있으면 돼.”“그게 내가 원했던 삶이야.”성유리가 할 말을 끝내자 연정우도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그럼 우리 함께 그런 집을 만들어가자.”한편, 금성.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사무실은 여전히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의 데이터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놓인 재떨이는 이미 꽉 차있었다.그는 현재 거의 이틀 가까이 잠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바라던 그 소식 또한 전해졌다. 장성 그룹이 소유한 자금으로는 더 이상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수화기 너머 그 사람은 내일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하면 장성 그룹은 바로 붕괴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냉랭했다.그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로 간결했다.“네. 알겠습니
“실은 나도 그렇다고 딱 확신할 수는 없어.”한참을 침묵하던 연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지만 최근 우리 회사에서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아. 큰 문제는 아니지만 연달아 일어나는 사고들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기엔 어렵고.”연정우는 하던 말을 뚝 멈추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성유리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그리고 뭐?”“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와 오랫동안 협력하던 은행 몇 곳이 최근 갑자기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나와의 협상을 아예 거부하고 있어. 누군가 뒤에서 압박을 넣고 있는 게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거지.”‘금성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이 뒷말을 연정우는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성유리라면 충분히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생각에 잠겨있던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꼭 쥐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바로 그때,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물었다.“이 싸움에서 내가 진다면 넌 나한테 실망할 거야?”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그리고 바로 묻는 연정우의 눈을 바라보았고 연정우도 성유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근데 넌 아마 많이 힘들 거야.”연정우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다시 학교로 돌아가 강의를 해야 하겠지. 그러면 가사 도우미를 둘 형편은 안 될 거야. 그래서 너는 계속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뭐 어때? 난 이런 삶이 좋은데.”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말했고 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웃음을 빵 터뜨렸다.연정우의 환한 웃음을 본 성유리는 꽉 조여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걸 느꼈다.“나를 원망하지는 않아?”성유리가 물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왜 내가 너를 원망해야 하지?”“나 때문에... 박한빈 씨가
잠시 망설이던 하늘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연정우는 성유리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연정우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기에 다소 서툴렀지만 하늘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고 머리를 말리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성유리는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이 장면이 너무나 따뜻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정우가 바로 자신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그래서 연정우를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휴대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조명이 비추는 아래에서 연정우는 다정하게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고 하늘이는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사진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처럼 보였다.성유리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가 내일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반죽은 이미 미리 만들어 두었기에 이제 고기소를 넣고 찜기에서 찌기만 하면 되었다.성유리가 이렇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이유는 하늘이가 달걀노른자에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외부에서 파는 만두에는 대부분 달걀물이 들어가 있어서 하늘이를 위해 성유리는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원래 성유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평소에 잠자리에 들 때 늘 엄마를 찾곤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방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도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성유리가 하늘이 방으로 향하려 하는 순간, 연정우가 아이의 방에서 나왔다.“하늘이 잠들었어.”연정우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자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뭐라고?”“방금 잠들었다고.”연정우는 웃으며 말했다.“책을 조금 읽어줬더니 졸린다고 하더니 바로 잠들었어.”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이 믿기지 않아 방을 열어 직접 확인해 보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이는 정말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아까 너무 많이 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