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렇게 말하자 성유리 비로소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눈도 조금 붉어졌는데 아무리 보아도 멀쩡한 것 같지는 않았다.“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말해.”성유리가 말했다.진무열은 문 옆에 서서 한참 동안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말했다.“왜 내 약혼식에 안 왔어?”지난번 일 이후 성유리와 그는 연락이 없는데 지금 진무열이 불쑥 자신에게 묻자 성유리도 조금 의외였다.하지만 이내 냉정함을 되찾고 대답했다.“참석할 필요가 없었어.”“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친구 아니야?”친구라는 두 글자를 진무열의 말은 더없이 어렵게 했다.성유리는 잠시 그를 바라본 뒤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너와 성유정이 손을 잡고 나를 모함했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친구가 아니었어.”“그래서 진무혁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복수하는 거야? 그래?”진무열의 표정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지금도 그 자식과 결혼할 생각이야?”“내가 무혁 오빠와 결혼한다고 누가 그래?”“아니야? 진무혁이 오늘 밤 진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인정했다. 그리고 방금 아래층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 나누는 걸 직접 봤어.”진무열의 말을 듣던 그녀는 어이없어 피식 웃어버렸다.“유리야,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 알아. 저번에 내가 그렇게 한 건... 같이 죽자는 마음이었어.”“그런데 왜 하필이면 진무혁이야? 내가 진무혁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뻔히 알잖아. 이 세상에서 누구와 함께 있고 누구와 결혼하고 싶어도 괜찮지만 그 사람만은 안돼. 어릴 때부터 진무혁은 진씨 가문의 잘나가는 도련님이고, 나는 영원히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 없었어. 먹고 쓰는 모든 것은 진무혁이 원하지 않는 물건들만 나에게 주어졌어.”“너도 알잖아...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됐을까?”“하지만 유리야. 넌 결국 날 배신했어. 왜 그랬어?”진무열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몸도 성유리 쪽으로 다가갔다.성유리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진무열의 손은 이내 문에 닿았다.
진무열이 말을 할 때 입김이 전부 성유리의 뺨에 뿌려졌다.그 느낌에 성유리는 갑자기 자신이 지석민의 집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구역질이 순간적으로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천천히 이를 악물고 앞에 있는 사람을 주시한 채 말했다.“진무열, 오늘 감히 나한테 허튼짓을 하면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야...”“신고해.”진무열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네가 지금 업계에서의 소문이 있는데 네가 하는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 거로 생각해? 그때가 되면 다들 네가 날 꼬셨다고 생각할 거야?”진무열의 얼굴에 간사한 웃음이 떠올랐는데 그 모습 역시 성유리에게 익숙했다.하지만 이때 그녀는 익숙한 얼굴이 마치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는 독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그녀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을 벌렸으나 말은 결국 창백하게 변했다.진무열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웃음을 더하더니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유리야, 가자.”그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성유리의 입술에 키스했다.“오늘 밤이 지난 후 함께 이곳을 떠나 아무도 우리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하는 게 어때?”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은 조용히 자신의 뒤 서랍을 열었다.진무열의 키스가 떨어지려던 참에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문을 발길질에 열렸다.요란한 인기척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박한빈이 문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그의 각도에서 바라본 진무열의 손은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성유리의 한 손은 진무열의 어깨에 닿아 있었지만 얼굴에는 몸부림치는 기색이 전혀 없는 듯 보여 마치 자신의 난입으로 그들의 못다 한 키스를 방해한 듯 보였다.하지만 곧 박한빈은 뒤에 숨어 있는 성유리의 손을 보았는데 그녀는 가위를 쥐고 있다.박한빈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곧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진무열을 걷어차 땅에 쓰러뜨렸다.진무열은 아직 박한빈의 출현에 충격을 받은
바로 그의 이런 냉정함 때문에 성유리는 그가 더 무서웠다. 성유리는 이런 박한빈을 처음 봤다.일반적으로 사람은 화가 났기 때문에 싸우지만 박한빈은 전혀 달랐다.성유리는 오히려 박한빈이 냉철해 보였는데 심지어 아까 진무열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처럼 죽든 살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이때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한빈은 그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성유리를 힐끗 본 다음 직접 휴대전화를 꺼냈다.경찰에 신고하려는 박한빈을 보고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달려들어 그의 손을 눌렀다.“안돼요...”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눈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먼저 병원에 보내요.”마침내 성유리는 목소리를 되찾았지만 박한빈은 대답도 움직이지도 않았다.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성유리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더듬어 꺼내 전화하려고 했는데 손을 뻗고서야 그녀는 손에 가위를 든 채 휴대전화는 어디로 내팽개쳤는지 알 수도 없다는 걸 발견했다.성유리가 휴대전화를 찾으려고 돌아설 때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뭘 그렇게 두려워해?”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는데 성유리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거야?”박한빈이 계속해서 물었다.이 말을 들은 성유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봤다.“걱정하지 마. 죽지 않아!”박한빈이 평온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성유리는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고 박한빈을 바라봤다. 박한빈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고 그저 비서에게 전화해 와서 처리하게 했다.“가자.”전화가 끊긴 후 그는 직접 성유리의 손을 잡아당겼는데 이에 그녀는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간다고요? 어디로... 가요?”“아직도 여기에 있고 싶어?”박한빈이 당연한 듯 물어보자 성유리는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박한빈은 아주 결단력이 있게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틈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철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성유리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의 동작은 마치 성유리가 그의 뜻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면 당장 부숴버릴 것만 같은 착각을 주었다.“만나기 싫은 게 아니에요.”성유리가 대답하자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저... 만날 필요가 없었어요.”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우리는...”“그럼 전에 왜 나와 결혼했어?”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성유리는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곧 침착해졌다.“이건 우리 두 집안에서 약정한 일이에요...”“그저 이것 때문이야?”“아니면 또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은 조금씩 느슨해졌다.성유리는 이 화제가 끝난 줄 알았지만 곧 그는 천천히 계속해서 물었다.“성유리, 당신이 성씨 가문과 관계를 끊는 성격과 태도로 보아 그들에게 휘둘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만약 정말 이 원인이라면 넌 몇 달 전에 조씨네 아들과 결혼했을 거야.”박한빈은 말하면서 성유리를 쳐다봤는데 그 눈빛에 성유리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그러나 그녀는 곧 눈길을 피했다.“저는... 그저 후에 그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아, 그래?”“아니면요? 다른 이유라도 있겠어요?”“당신이 나를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어.”박한빈의 말은 마치 주먹처럼 성유리의 심장을 때렸다. 심한 떨림과 통증이 있고 난 뒤 근육이 움츠러들면서 성유리는 호흡마저 빨라지기 시작했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박한빈의 장난스러운 눈빛과 마주했는데 성유리는 자신이 광대 같아 보였다.벌거벗은 채로 무대에 올랐으나 조심스럽게 몸을 가리며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려 했지만 나중에 옷감이 벗겨지면서 불빛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광대가 되어버렸다.성유리의 손이 조금씩 조여졌다.“왜 이렇게 말해요?”한참 만에 목소리를 찾은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냥
박한빈이 성유리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끊어버리는 바람에 성유리는 더 말할 흥취도 없어졌다. 성유리는 서서히 입을 꾹 닫아버렸고 화가 난 듯 박한빈을 째려보았다. “왜냐하면 나도 이젠 알았어.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박한빈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랑 결혼했을 때 별로 많이 불편하지 않았어.” “나한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줄래?” 성유리는 지금 눈앞에 놓인 모든 것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마치 절벽에 서 있는 듯 아찔한 기분이 들었고 조금만 발을 헛딛어도 바로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뼈가 다 으스러지는 고통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구름 위에 누워있는 듯 포근하고 기분 좋은 냄새도 났다. 서서히 눈을 뜬 성유리는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도, 절벽도 그리고 구름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방 구조는 성유리에게 아주 익숙했다. 그곳은 바로 시월파크였다. ‘그럼 어제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건가?’ 성유리가 멍하니 서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두 개의 기사를 보내준 것이다. 첫 번째 기사는 진무열에 관한 기사였는데 그가 어젯밤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골절만 했을 뿐 생명에는 위협이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지화그룹과 단풍 그룹에 관한 기사였다. 두 가문에서 함께 하던 일은 이미 순조롭게 끝이 났다는 사실과 뉴스 발표회에 기자가 박한빈에게 그와 단예진의 사이를 물었던 일이 적혀있었다. 박한빈은 단예진과 그저 친구 사이라고 대답하는 동시에 두 가문의 인연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으니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도 좋다는 대답을 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단예진과 났던 많은 추문들이 하루아침에 농담거리가 돼버렸다. 성유리는 아주 자세하게 두 개의 기사를 다 읽었지만 박한빈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사실 성유리는 아직 신분의 변화에 익숙해지지 않아 박한빈이 자신을 대하
“그게...” 성유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말을 끊어버리며 다시 물었다. “아직 안에 있어? 나 이미 도착했는데.” 그의 말에 성유리는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들자 마침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고 김서영 또한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성유리와 김서영이 눈이 마주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아주 냉정해졌다. “왜 오신 거예요?” “밥 먹으러.” 박한빈의 대답은 짧고도 명료했다. “지금 이미 엘리베이터 안이에요. 주차장에서 기다려주세요.” 성유리는 말하며 1층 버튼을 눌렀다. 김서영은 그때까지도 가만히 성유리의 앞에 서 있었다. 1층에 도착한 순간, 성유리가 내리려 하자 김서영이 발 빠르게 먼저 내렸다. 옆에 있던 남자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는지 멍해 있다가 별다른 말 없이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김서영을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바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차를 보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먹고 싶은 음식 있어?” 박한빈은 오늘 운전기사도 없이 혼자 운전해서 이곳에 왔다. 운전대에 올려놓은 박한빈의 팔은 핏줄도 선명해 관능적으로 보이기 그지없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팔을 조금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무거나 다 돼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성유리가 안전벨트를 다 메고 나서야 시동을 걸었다. 박한빈의 차가 시월 파크를 빠져나갈 때, 성유리는 길가에 서 있는 김서영과 남자를 발견했다. 운전을 하던 박한빈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성유리의 시선을 따라 그곳을 쳐다보려 했다. 그러자 성유리는 빠르게 박한빈의 손을 잡으며 그의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하마터면 옆에 주차된 차에 부딪힐 뻔했다. 다행히 가까스로 사고를 막아낸 박한빈은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봤지
하지만 박한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유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표현도 안 했다. 설령 박한빈이 슬쩍 감정표현을 했다 하더라도 성유리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유리는 지금 제대로 된 답을 알고 싶어졌다. 옆에 앉아서 묻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던 박한빈이 되물었다. “성유리 네 생각엔 내가 왜 이러는 거 같은데?” 성유리는 박한빈의 애매모호한 말에 입술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 “말해주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그녀는 여전히 박한빈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녀가 저항할수록 더욱 꽉 잡았다. “너 점점 더 짜증이 많아지는 것 같다?”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박 대표님, 제 성격은 항상 이랬어요.” 반면 성유리는 그의 말에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알다시피 저는 유정이나 단예진 씨처럼 그렇게 다정한 스타일이 아니라 서요.” 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뜨끔했는지 당황하더니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빠르게 운전대를 돌려 길가에 차를 세웠고 성유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를 덮쳤다. “박 대표님? 보아하니 너도 질투가 많은 사람인가 보네?” “아니거든요.” 성유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정했다. “내가 보내준 기사 안 봤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턱을 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나랑 단예진 씨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리고 성유정이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성유리는 이빨을 꽉 깨문 채로 박한빈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유정이한테 늘 다정다감하게 잘 대해주셨잖아요.” 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조금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여 성유리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대답했다. “앞으론 안 그럴게.” “앞으로라고요? 무슨 뜻이에요?” 성유리가 물었다. “네 생각에는 무슨 뜻인 거 같아?” 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을 이어갔다. “유리야, 나는 너랑 숨바꼭질할 시간이 없어.” “지금
김서영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는 성유리는 미화로에서 지낸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시간 있니? 우리 한번 만날까?” 김서영이 물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만남 제안을 자신은 절대 거절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성유리는 지금까지 김서영의 모든 요청과 제안에 거절한 적이 없었다. 김서영은 만남 장소를 어느 한 찻집으로 정했다. 성유리가 찻집에 도착했을 때, 김서영은 이미 조용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하얀색의 긴 치마를 입고 머리카락은 아주 정갈하게 빚은 모습이었는데 세월을 비껴갔는지 아름답고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차 한 잔을 건네주며 말을 꺼냈다. “마셔봐, 올해 새로 나온 룽징 차란다. 네가 좋아했던 게 생각이 나서 시켰어.” “감사합니다.” 성유리는 짧은 인사를 한 뒤, 차를 한 모금 마시려 했다. “너랑 한빈이 언제부터 다시 만난 거야?” 순간 김서영이 물었다. 성유리는 그녀의 물음에 잔뜩 당황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전부터 조금 느끼긴 했어.” 그에 반면 김서영은 평온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전에 둘이 크게 싸웠었니? 한빈이 얼굴에 남은 그 자국으로 회사 사람들이 꽤나 오랫동안 토론했단다.” 성유리는 진즉에 이 일을 잊어버렸지만 김서영의 말에 얼굴이 빨개졌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봤다. “처음엔 요즘 한빈이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가 했는데 다시 생각 해보니 너밖에 없더라. 한빈이가 안 작가님 그림을 사는 거 있지? 그 그림 너한테 사준 거니?” ‘그림?’ 성유리는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했다. 하지만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성유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그 그림 보지도 못했어요.” “그럼 아직 너한테 줄 시기를 못 찾았나 보구나.” 김서영은 완전히 확실하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난 알아. 무조건 유리 너한테 줄 거야.”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너 안 작가님 그림 좋아하지 않았
얼마 안 지나 박한빈은 실은 차는 도연제에 도착했다. 박한빈은 요 며칠 머릿속으로 항상 성유리의 상황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는 박세빈이 설계한 “덫”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진즉에 눈치챘다. 필경 그날 밤, 만약 그 전화 한 통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곳에 성유리가 최정민과 함께 있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박한빈은 늦은 시간에 최정민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박한빈은 그 사람들이 행여나 성유리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 경찰서에 있는 내내 불안하고 급한 마음에 안절부절 하던 박한빈이었지만 항상 성유리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고 어떻게 해야 빨리 벗어날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막상 집에 도착하니 박한빈은 망설였다. 한참을 현관에 서 있던 그는 가사도우미가 문을 열어줘서야 집으로 들어섰다. 박한빈을 발견한 도우미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도우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박한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성유리는요?” 입을 여는 순간 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즘 유리는 어떻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사모님 아주 잘 지내고 계셨어요.” 분명 박한빈이 원하던 대답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성유리의 근황을 듣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우미는 박한빈의 기분을 눈치 차렸는지 말을 덧붙였다. “제 말은 걱정하실 필요 없다는 말이었어요. 사모님은 요즘 무탈하게 지내고 계셨으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심각해졌고 도우미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닫아버렸다. 박한빈은 그런 도우미를 쓱 쳐다보고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성유리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 미리 그려놓은 그림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하도 평온
여론이 가장 뜨거웠던 며칠 동안, 박한빈은 경찰서에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며 상황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지만 박한빈의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언론 기사들이 쏟아지며 발칵 뒤집혔다. 그날 아침, 경찰서 정문 앞은 이미 기자들로 가득했다. 마이크와 카메라가 준비된 채, 모두가 박한빈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최신 뉴스를 잡으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서훈은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 박한빈에게 다른 시간이나 경로로 나가는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서훈은 박한빈이 무언가 계획이 있음을 깨닫고 더는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았고 대신 경찰의 절차에 따라 모든 과정을 마쳤다. 문밖의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박한빈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은 마치 상어가 신선한 피를 발견한 듯 일제히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박한빈을 둘러싸자 경찰서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 대표님,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하실 부분이 있습니까?” “고인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 고인의 부모님이 지화 본사 앞에서 울부짖으며 박 대표님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지화의 향후 경영은 누가 맡게 될 것 같습니까?”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쏟아지는 마이크들은 마치 박한빈의 머리를 조준하고 있는 총구처럼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 넘는 질문들에도 놀라운 침착함을 보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자들이나 사람들을 한 바퀴 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저는 경찰이 공정한 판단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또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고인과 어떠한 부적절한 관계도 없었으며 제 아내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도 없습니다.” 기자들은 그가 이 사건과 지화의 미래에 대해 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최정민 씨가 전에 그러더군요. 형이 가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볼 때가 있다고. 마치 그녀에게서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요. 제 추측이 맞다면 그 사람은 아마... 형수님이겠죠?” 박세빈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형수님이겠죠. 지금의 형수님은 너무 이성적이고 차분하니까요. 이번 일만 봐도 그렇습니다. 다른 여자라면 남편이 이런 사건에 연루됐다는 걸 듣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을 겁니다. 아니면 최소한 남편을 위해 무언가를 도모하든지 아니면 화를 내든지 했겠죠. 그런데 형수님은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박세빈의 말투는 가볍다 못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점은 형이 저보다 더 잘 알 테고 그걸 더 직접적으로 느낄 테니 다른 여자에게서 그런 감정을 찾으려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가 마치 같은 남자 입장에서 박한빈이 이해가 된다는 듯한 태도로 이야기하자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갑작스러운 웃음에 박세빈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해버렸다. “그래서요? 오늘 여기 온 이유가 이 얘기를 하려고 온 거예요?” “물론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박세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형수님께 한마디 해주려고 왔습니다. 형수님, 진지하게 하는 얘긴데 형이랑 이혼하세요.” 그의 말투는 사뭇 진지했다. “그런 남자와 더는 무슨 미련을 두고 계시는 겁니까? 이번 기회를 틈타 이혼하시고 자유로워지세요.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성유리는 미소를 억지로 띠며 조용히 박세빈의 말에 반박했다. “우리가 이혼하든 말든 박세빈 씨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당연히 있죠.” 박세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곧 박씨 그룹 소유의 그룹은 제가 이어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그는 조금 더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형이 형수님 태도에 얼마나 실망하고 상처받았는지 알잖아요. 그래서 다른 여자에게서 위안을 구했겠
성유리는 그때 자신이 김서영에게 무슨 대답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통화를 끝낸 후, 그녀는 방에 혼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요즘 성유리는 기자들이 자신을 행여나 쫓아오며 귀찮게 할까 봐 무서워서 지난 며칠 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다. 청소하러 온 도우미도 분명 뉴스를 봤을 테니 요즘 성유리를 볼 때마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가사도우미는 조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성유리를 어딘가 동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만나기보다는 방에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다. 성유리가 다른 일에 자신의 주의를 돌리려고 태블릿을 열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러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윽고 도우미가 올라와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사모님, 박 대표님 남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만나시겠습니까?” 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표정만으로 도우미는 감히 어떤 것도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네. 만날게요.”결국 만나겠다는 결정을 내린 성유리는 바로 몸을 일으키며 방 밖으로 나갔고 도우미는 곧 박세빈을 집안으로 들였다. 전과 달리 박세빈은 최근 아주 잘 지내는 것 같아보였고 여전히 단정하고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는 더욱 꼼꼼하게 빗어 넘겼다.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박세빈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형수님.” 그의 말에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형수님, 최근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습니다. 제 형이 너무 걱정되어서 그런가요?” “할 말이 있으면 그냥 바로 말하세요.” 성유리는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수님은 역시 제 의도를 알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박세빈이 옅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어딘가 기뻐 보이는 그를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박세빈 씨가 계획한 거죠?” “최정민 씨의 목숨을 앗아가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에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채 정리할 틈도 없이 성유리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죽었다는 그 사람이 혹시 최정민 씨야?” ... 연정우가 말한 죽은 자는 정말로 최정민이었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21층 발코니에서 추락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죽었을 당시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바로최정민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집 안에는 그녀외에 오직 박한빈만 있었다. 늦은 시각, 다 큰 성인인 남녀 단둘만 남겨진 상황.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온갖 추측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박한빈의 신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각종 소문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최정민과 박한빈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는 최근 그들 사이에서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그녀가 옷차림이 흐트러진 채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지나치게 방탕한 놀이를 하다 사고로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그런 상태로 죽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원래 재벌가의 이야기는 연예계의 가십보다 더 자극적이다. 그렇기에 대중의 관심은 더욱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성유리에게 연락을 시도해 이번 사건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박한빈이 성유리의 결혼식에서 그녀 대신 칼을 맞아준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때 그의 행동에 충격받는 한편 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모두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진 일은 이 모든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박한빈과 최정민의 관계에 대해 그녀가 남들보다 더 아는 것도 없었으니 최정민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다친 성유리를 실은 구급차는 얼마 안 지나 바로 병원에 도착했다.성유리의 얼굴에 흐르던 피는 이미 멈췄지만 의사는 봉합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마취주사 때문에 얼굴에 감각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성유리는 의사가 자신의 피부를 바늘과 실로 꿰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봉합 수술이라 성유리의 치료는 응급실 안에서 진행되었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응급실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성유리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봉합을 끝마칠 때까지도 박한빈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 반면 연정우는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유리가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연정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진 않아?” 성유리는 묻는 연정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 집에 데려다줄게.” 연정우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가던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우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정우는 내색하지 않았고 이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왜 그래?” “유효정 씨 일은 처리 안 해도 돼?” 침묵하던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지금쯤 경찰 손에 잡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너는...”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연정우는 화를 억누르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성유리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효정 씨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연정우는 빠르게 표정을 바꾸며 다시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이번에 유효정이 건드린 사람이 너니까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근데 박한빈 씨는 오늘 밤 왜 안 왔을까?” 그의 말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왜 안 왔는지는 모르겠어. 근데 이제 보니 유효정 씨가 대체 왜 그렇
“제가 얼마나 배려심이 많은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유리 씨도 저 좀 배려해 주세요. 움직이려고 애쓰지 마시고요. 알아들으셨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실수로 당신의 배에 떨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저도 되게 민망해질 텐데?” 유효정은 말하면서 손에 점점 더 세게 힘을 주었고 성유리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한 고통을 견뎠다. 그녀의 칼이 그어지는 곳에서는 빨간 피가 쏟아져 내렸고 방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추웠다. 이 상황에 성유리는 문득 박한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유리는 혹시 자기가 먼저 떠나버려 박한빈이 기분이 나빠졌는지, 아니면 지금 다른 곳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찾고 있는지 몰랐다. 둘 다 아니면 최정민의 전화를 받느라 성유리의 실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유리는 감히 다른 경우들을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씁쓸해졌기 때문에. 통증은 점점 더 뚜렷해졌지만 그녀는 몸부림치지도 못했다. 유효정의 말대로 아직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심기를 다시 건드려 한 번 더 화를 낸다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성유리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성유리 얼굴의 살이 점점 벗겨지자 유효정은 피를 본 상어처럼 눈이 번쩍이고 눈빛에는 광기가 서렸다. 그러더니 유효정의 손에 힘이 더 더해졌다. 성유리가 자신의 목에 곧 칼날이 꽂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유효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칼을 쥐고 있던 손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그쪽에 있던 사람들이 벌써 달려들어 그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순간, 유효정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땅에 툭 떨어졌다. 원래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고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많은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비추는 환한 불빛에 성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박한빈의 차에서 내려 길을 건넜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세게 때린 것 같았다.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보기도 전에, 그 사람은 이미 그녀의 입과 코를 가려버렸고 그 직후 그녀는 모든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성유리는 이상한 방에 누워 있었다.그녀의 손과 발은 묶여 있었고 방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났으며 달빛이 조금 비추는 창문을 제외하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성유리는 누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상대방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집 안에서 자신이 묶여있는 밧줄을 끊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깜짝 놀란 성유리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사람을 보자 성유리의 동공은 심하게 떨렸고 그와 동시에 살짝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에요?” “많이 놀란 것 같네요?” 유효정은 성유리의 모습을 비웃으며 깔깔 웃었다. “유효정 씨, 당신의 신분으로 왜 굳이 이런 일을 하시는 거죠?” “굳이라고요? 굳이?” 유효정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대답했다. “이런 당신의 모습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요. 너무 힘들고 마음이 불편하게 사는 저와 성유리 씨를 비교해보면 자꾸만 질투가 나서요.” 유효정은 말을 하는 동안 시선이 조금씩 내려가더니 성유리의 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신 몇 개월 되셨죠?” 성유리는 그녀가 갑자기 이런 물음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었고 몸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웅크렸다. 이 어설픈 성유리의 행동에 유효정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러면 제 마음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유효정은 손을 뻗어 성유리의 배를 쿡쿡 찔러보았다. 그녀의 힘은 별로 세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충격에 휩싸였고 눈으로는 유효정
박한빈은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번엔 전화를 바로 끊어버리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 모습에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더니 말했다. “됐어요. 그냥 저 혼자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릴 채비를 했다. 이때,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어디 가려고?” “바쁘신 것 같아서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려고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택시를 어떻게 혼자 타!” “길 가다 보면 널리고 널린 게 택신데 제가 왜 못 타죠?” “빨리 앉아. 나 곧...” 박한빈의 뭐라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 번째 전화가 걸려 왔고 성유리는 그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봐요. 많이 바빠 보이시니까 저 그냥 혼자 갈게요. 방해되지 않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는 다시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성유리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차에서 내려서는 바로 길 맞은편으로 향했다. 박한빈은 그녀를 따라가려고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려고 했지만 마침 신호등 불빛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 해도 금성 도로엔 쌩쌩 달리는 차가 꽤 많았다. 그래서 박한빈은 아예 차를 몰고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빨간 불이 다시 초록 불로 바뀌는 순간, 박한빈은 재빨리 길 맞은편을 쳐다보았지만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핸드폰을 열어 성유리에게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그녀의 폰은 여전히 꺼져있는 상태였다. 화가 난 박한빈은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세게 차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차로 올라타 도연제로 향했다. 빠르게 운전을 한 박한빈이기에 그는 성유리보다 먼저 도연제에 도착했다. 그는 무서울 만큼 조용한 별장이 너무 싫어 모든 조명을 다 환하게 켜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성유리가 오기를 기다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때 시간은 이미 12시가 넘은 자정이었으니 박한빈의 생일이라고 해도 되는 시간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생일을 이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