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이 성유리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끊어버리는 바람에 성유리는 더 말할 흥취도 없어졌다. 성유리는 서서히 입을 꾹 닫아버렸고 화가 난 듯 박한빈을 째려보았다. “왜냐하면 나도 이젠 알았어.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박한빈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랑 결혼했을 때 별로 많이 불편하지 않았어.” “나한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줄래?” 성유리는 지금 눈앞에 놓인 모든 것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마치 절벽에 서 있는 듯 아찔한 기분이 들었고 조금만 발을 헛딛어도 바로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뼈가 다 으스러지는 고통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구름 위에 누워있는 듯 포근하고 기분 좋은 냄새도 났다. 서서히 눈을 뜬 성유리는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도, 절벽도 그리고 구름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방 구조는 성유리에게 아주 익숙했다. 그곳은 바로 시월파크였다. ‘그럼 어제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건가?’ 성유리가 멍하니 서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두 개의 기사를 보내준 것이다. 첫 번째 기사는 진무열에 관한 기사였는데 그가 어젯밤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골절만 했을 뿐 생명에는 위협이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지화그룹과 단풍 그룹에 관한 기사였다. 두 가문에서 함께 하던 일은 이미 순조롭게 끝이 났다는 사실과 뉴스 발표회에 기자가 박한빈에게 그와 단예진의 사이를 물었던 일이 적혀있었다. 박한빈은 단예진과 그저 친구 사이라고 대답하는 동시에 두 가문의 인연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으니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도 좋다는 대답을 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단예진과 났던 많은 추문들이 하루아침에 농담거리가 돼버렸다. 성유리는 아주 자세하게 두 개의 기사를 다 읽었지만 박한빈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사실 성유리는 아직 신분의 변화에 익숙해지지 않아 박한빈이 자신을 대하
“그게...” 성유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말을 끊어버리며 다시 물었다. “아직 안에 있어? 나 이미 도착했는데.” 그의 말에 성유리는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들자 마침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고 김서영 또한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성유리와 김서영이 눈이 마주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아주 냉정해졌다. “왜 오신 거예요?” “밥 먹으러.” 박한빈의 대답은 짧고도 명료했다. “지금 이미 엘리베이터 안이에요. 주차장에서 기다려주세요.” 성유리는 말하며 1층 버튼을 눌렀다. 김서영은 그때까지도 가만히 성유리의 앞에 서 있었다. 1층에 도착한 순간, 성유리가 내리려 하자 김서영이 발 빠르게 먼저 내렸다. 옆에 있던 남자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는지 멍해 있다가 별다른 말 없이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김서영을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바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성유리는 박한빈의 차를 보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먹고 싶은 음식 있어?” 박한빈은 오늘 운전기사도 없이 혼자 운전해서 이곳에 왔다. 운전대에 올려놓은 박한빈의 팔은 핏줄도 선명해 관능적으로 보이기 그지없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팔을 조금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무거나 다 돼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성유리가 안전벨트를 다 메고 나서야 시동을 걸었다. 박한빈의 차가 시월 파크를 빠져나갈 때, 성유리는 길가에 서 있는 김서영과 남자를 발견했다. 운전을 하던 박한빈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성유리의 시선을 따라 그곳을 쳐다보려 했다. 그러자 성유리는 빠르게 박한빈의 손을 잡으며 그의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하마터면 옆에 주차된 차에 부딪힐 뻔했다. 다행히 가까스로 사고를 막아낸 박한빈은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봤지
하지만 박한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유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표현도 안 했다. 설령 박한빈이 슬쩍 감정표현을 했다 하더라도 성유리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유리는 지금 제대로 된 답을 알고 싶어졌다. 옆에 앉아서 묻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던 박한빈이 되물었다. “성유리 네 생각엔 내가 왜 이러는 거 같은데?” 성유리는 박한빈의 애매모호한 말에 입술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 “말해주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그녀는 여전히 박한빈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녀가 저항할수록 더욱 꽉 잡았다. “너 점점 더 짜증이 많아지는 것 같다?”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박 대표님, 제 성격은 항상 이랬어요.” 반면 성유리는 그의 말에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알다시피 저는 유정이나 단예진 씨처럼 그렇게 다정한 스타일이 아니라 서요.” 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뜨끔했는지 당황하더니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빠르게 운전대를 돌려 길가에 차를 세웠고 성유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를 덮쳤다. “박 대표님? 보아하니 너도 질투가 많은 사람인가 보네?” “아니거든요.” 성유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정했다. “내가 보내준 기사 안 봤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턱을 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나랑 단예진 씨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리고 성유정이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성유리는 이빨을 꽉 깨문 채로 박한빈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유정이한테 늘 다정다감하게 잘 대해주셨잖아요.” 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조금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여 성유리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대답했다. “앞으론 안 그럴게.” “앞으로라고요? 무슨 뜻이에요?” 성유리가 물었다. “네 생각에는 무슨 뜻인 거 같아?” 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을 이어갔다. “유리야, 나는 너랑 숨바꼭질할 시간이 없어.” “지금
김서영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는 성유리는 미화로에서 지낸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시간 있니? 우리 한번 만날까?” 김서영이 물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만남 제안을 자신은 절대 거절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성유리는 지금까지 김서영의 모든 요청과 제안에 거절한 적이 없었다. 김서영은 만남 장소를 어느 한 찻집으로 정했다. 성유리가 찻집에 도착했을 때, 김서영은 이미 조용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하얀색의 긴 치마를 입고 머리카락은 아주 정갈하게 빚은 모습이었는데 세월을 비껴갔는지 아름답고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차 한 잔을 건네주며 말을 꺼냈다. “마셔봐, 올해 새로 나온 룽징 차란다. 네가 좋아했던 게 생각이 나서 시켰어.” “감사합니다.” 성유리는 짧은 인사를 한 뒤, 차를 한 모금 마시려 했다. “너랑 한빈이 언제부터 다시 만난 거야?” 순간 김서영이 물었다. 성유리는 그녀의 물음에 잔뜩 당황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전부터 조금 느끼긴 했어.” 그에 반면 김서영은 평온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전에 둘이 크게 싸웠었니? 한빈이 얼굴에 남은 그 자국으로 회사 사람들이 꽤나 오랫동안 토론했단다.” 성유리는 진즉에 이 일을 잊어버렸지만 김서영의 말에 얼굴이 빨개졌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봤다. “처음엔 요즘 한빈이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가 했는데 다시 생각 해보니 너밖에 없더라. 한빈이가 안 작가님 그림을 사는 거 있지? 그 그림 너한테 사준 거니?” ‘그림?’ 성유리는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했다. 하지만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성유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그 그림 보지도 못했어요.” “그럼 아직 너한테 줄 시기를 못 찾았나 보구나.” 김서영은 완전히 확실하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난 알아. 무조건 유리 너한테 줄 거야.”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너 안 작가님 그림 좋아하지 않았
“유리 네 양아버지 일 말이니? 나도 들었다.” 김서영의 태도는 여전히 느긋하고 담담했다. “비록 밖에 나가보면 별의별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너를 알고 지낸 시간도 오래됐잖니. 네가 어떤 사람인지도 내가 모를까 봐?” 김서영의 담담한 말에 성유리는 무슨 뜨거운 물건 하나가 자기 심장에 천천히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유리는 두 손을 꽉 쥐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님, 고마워요.” “응. 너랑 한빈이 일은 얘기가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내 얘기를 좀 해볼게.” 김서영은 한껏 더 다정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고마웠어.” “저... 아니에요.” 성유리의 긴장한 모습에 김서영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왜? 놀랐니?” “그건 아닌데요. 그냥 조금 의외라서요.” “뭐가 의왼데? 한빈이 어머니라는 신분에 익숙해져서 나도 보통 여자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성유리가 김서영에게 먼저 물었다. “박한빈 씨도 아세요?” “걔는 알 필요 없어.” 김서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건 내 사적인 일이라서. 그리고 난 아직 박씨 가문을 떠날 생각이 없어.” 그녀의 대답을 들은 성유리는 김서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직 박씨 가문에 몸을 담그고 있는 김서영이니 다음 후계자는 당연하게도 박한빈 뿐이었다. 만약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박씨 가문의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시는 것은 물론 손에 꽤 많은 지분을 쥐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알면 어떡하지?’ “혹시 박한빈 씨한테 정말 다른 형제가 있는 거예요?” 성유리는 말을 빙빙 돌려서 김서영에게 물었다. “알고 싶니?” 김서영은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 “성유정 씨.”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성유정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어느새 단예진이 성유정의 앞에 다가왔고 성유정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단예진 씨. 요즘 너무 바쁘셔서 얼굴도 못 보는 줄
“언니.” 청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발걸음을 재촉하던 성유리는 천천히 멈춰 섰다. 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빠르게 달려와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언니, 왜 내 말 못 들은 척해요?” “지금 여기 살아요? 왜요? 힘들지 않아요? 만약...” “손 놔.” 성유리는 성유정을 말을 여전히 무시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성유정은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언니, 언니가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죠.” “집안 상황이 지금 어떤지 알기나 해요? 언니 때문에 엄마가 쓰러지셨어요. 게다가 회사 상황도 지금 말이 아니고. 이게 다...” “네가 그렇게 만든 거잖아.” 성유리는 성유정의 말을 채 들어주지도 않았다. “저...” 뭐라 변명하려던 성유정은 입을 꾹 닫았고 성유리는 담담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 둘이 차에서 나눈 대화 기억해? 네가 말한 그 모든 것들 다 몰래 녹음해 뒀어.” “뭐라고요?” 그녀의 말에 성유정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비록 그 사람들이 내 생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들이 수년간 보물처럼 키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알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성유정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갔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뻥긋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성유정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관심이 없어 짜증을 내며 물었다. “아직도 그 손 안 놓을 거야?” “언니, 지금 나 속이는 거죠?” 성유정은 이내 정신을 차렸고 또박또박 성유리에게 따지며 물었다. “만약 녹음했으면 진즉에 내놨겠죠. 아직도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없는 거 아닌가요?” “내가 그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았을 뿐이야. 나는 네가 가진 더러운 것들을 뺏을 생각이 전혀 없거든.” “나를 꽉 물고 놓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봐주지는 않을 거니까 명심하고.” 성유리의 경고와도 같은 말에
성유리와 박한빈은 이미 이혼을 한 사이인데 왜 서로 놓지를 못하는지 성유정은 이해가 안 갔다. ‘한빈 오빠가 미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지?’ ‘성유리도 지금 크고 작은 구설수 때문에 깨끗하지 않은데 왜 하필 성유리 편을 들어주는 거야?’ 몇 분이나 흘렀을까, 한참 동안 창밖만 쳐다보던 성유정이 앞에 있는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시동 거세요.” “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는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뒷좌석 여자가 이상해 뒤를 돌아 그녀를 쳐다봤다. 성유정은 한쪽만 주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택시 기사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았다. “어라? 저거 마사라제 아니에요? 이런 곳에서 저런 비싸 차를 모는 사람도 있네요?” 택시 기사는 저 멀리 보이는 외제 차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지만 성유정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차가 있는 방향을 주시하던 성유정의 입술은 이미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빈 오빠는 아닐 거야.’ ‘절대 오빠일 리가 없어.’ 성유정은 이런 곳에 박한빈이 있을 리가 없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했다.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성유정은 차에서 내리는 박한빈을 발견하고는 분노에 겨워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한편, 차에서 내린 박한빈의 손에는 예쁘게 포장까지 된 케이크 하나가 들려있었다. ... 성유리는 밤 내내 마음이 심란해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픽 테블릿은 열려있었지만 성유리는 쉽게 손을 대지 못했고 씻고 나온 박한빈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박한빈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깜짝 놀란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테블릿 화면을 가리려 애를 썼다. 그리더니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물었다. “언제 나오셨어요?” “방금.”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자신의 화면을 꺼버렸다. 박한빈은 원래 그녀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다음날, 성유리는 결국 성유정이 말한 병원으로 찾아갔다. 마스크까지 끼고 얼굴을 완벽하게 가린 성유리는 간호사에게서 윤청하의 입원기록을 얻어냈지만 구체적인 일은 알아내지 못했다. 예를 들어 환자의 지금 상황이나 구체적인 병명 말이다. 성유리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위층으로 향했다. 병실 앞에 도착하자 마침 성유정과 윤청하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진무열 그 사람 괜찮던데? 만약 네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면 무조건...” “엄마! 근데 저는 그 사람 안 좋아한다고요.” 성유정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리고 그 사람도 나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엄마 그거 아세요? 진무열 씨가 다친 이유는 교통사고가 아니라...” 성유정은 말하다가 문득 입을 꾹 닫아버렸다. 윤청하는 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성유정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라? 뭐 때문에 다친 건데?” “아무튼 그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는 제가 아니라고요! 저도 진무열 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윤청하는 성유정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성유정은 마치 기회라도 잡은 사람처럼 윤청하의 손을 꼭 잡더니 말했다. “엄마,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한빈 오빠라고요. 엄마가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진무열 씨는 지금 진씨 가문에서 아무런 권력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그런 사람한테 시집을 간다 해도 우리 성씨 가문에게 좋은 점이 없다니까요?” “하지만 한빈이는...” “한빈 오빠는 저를 좋아하는 게 확실해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인데 제가 어떻게 오빠 감정을 모를 수가 있겠어요? 엄마만 저를 도와주시면 돼요.” “도와주면 어떻게 할 생각이니?” 윤청하는 떼를 쓰며 말하는 성유정에게 단호하게 물었다. 성유정이 깊은숨을 내쉬고 자기 생각을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의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병실 입구를 막아서고 있는 거니?” 그 목소리를 들은 성유정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하지만 그 전제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할 때만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이 자신을 봤을 때는 어땠었나!차갑고 경멸적인 표정, 그리고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치 자신이 반드시 그 돈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때는 결국 그 돈을 받았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박한빈이 자신을 경멸할 이유는 될 수 없었다.그리고 자신이 성유리와 첫 만남에서 느꼈던 설렘과 그때 그동안 그녀에게 쏟았던 감정을 떠올리며 그저 억울하고 분하고 불만이 치밀었다.“너 지금 뭘 하려는 거야?”성유리는 그의 몸에서 전해지는 위협적인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계속 뒤로 물러섰지만 염우섭은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염우섭은 소름 끼치게 웃으며 말했다.“답은 간단해. 네가 나랑 한 번만 자면 돼.”“뭐라고?”성유리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정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하지만 염우섭은 금세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시*, 진짜 순진한 척하지 마. *같으니까!”“진즉에 더럽혀진 여자라는 거 알고 있었어. 아침에 그 남자가 너네 집에서 나오는 거 봤다고. 참 대단하다. 엄마 몰래 그런 짓이나 하고.”“정 그렇게 욕망을 못 참겠다면 내가 도와줄게.”염우섭은 말하며 한 걸음 더 다가와 성유리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그만둬. 이거 놔!”성유리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염우섭은 그 손을 더욱 강하게 쥐고 그녀를 잡아끌며 쓰러뜨렸다.“소리 지른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진정하라고. 곧 너도 소리칠 때가 올 거니까.”염우섭은 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그때 그 일이 없었으면 넌 이미 내 아내였을 텐데. 그때 너랑 만날 때는 내 입술조차 대지 못하게 해서 되게 깨끗한 여자인 줄 알았어. 근데 결국 너도 그냥 남들 발에 밟히는 더러운 존재였어. 오늘 내가 너 무조건 먹...”남자의
성유리는 결국 먼저 방을 나섰는데 방을 나서자마자 문을 쾅 닫았다.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표현숙은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문은 왜 닫는 거야?”“아, 그냥 습관이에요.”성유리는 대충 얼버무리다가 표현숙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표현숙은 여전히 의아해했지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후, 표현숙은 뒷산으로 약초를 채취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시장에 팔기 위해서라고 하면서.성유리는 어차피 표현숙을 어떻게든 멀리할 생각이었기에 이때가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랑 같이 가.”표현숙이 제안하자 성유리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예전에도 여러 번 같이 갔던 일이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결국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물 두 병만 가져가요.”하지만 나가기 전에 성유리는 갑자기 말없이 문을 확인하며 말했다.“문은 제가 닫을게요.”그 말은 생각보다 꽤 크게 나와서 방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다 들을 수 있었다.표현숙은 그런 성유리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누구한테 말하는 거야?”“그... 그게... 엄마한테요.”“내가 여기 옆에 있는데 왜 그래? 내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성유리는 옅게 웃으면서도 곧바로 표현숙의 팔을 잡고 함께 나갔다.“가요, 빨리 다녀오자고요.”표현숙은 딸의 이상한 행동에 조금 의문을 느꼈지만 성유리의 친근한 모습에 금세 잊어버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얘, 이제 결혼도 할 나이가 다 됐는데 아직도 애처럼 왜 이래?”성유리는 그냥 웃어 보였다.표현숙이 말한 뒷산은 사실 마을의 더 깊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곳은 숲이 넓어서 햇볕도 잘 들지 않고 산길을 따라가면 작은 시냇가도 여러 개 나왔다.시냇가에는 가재나 작은 게도 잡을 수 있었다.성유리는 약초를 알지 못했기에 표현숙은 성유리에게 바구니를 들게 하고 작은 시냇가 옆에서 게나 달팽이를 주워 오라고 했다.표현숙의 말대로 성유리가 열심히 주워 모으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엄마, 봐요. 제가 또 이
“저 밤새 못 잤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잠시 쉴 수 있을까요?”“그럼 왜 당신 방에서 자지 않으세요?”“당신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어서요.”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성유리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박한빈의 호흡이 금세 고르고 평온해진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봤다.박한빈의 얼굴에는 선명한 다크서클이 있었고 평소 깔끔했던 턱선에 작은 수염도 보였다. 성유리는 그의 손을 밀쳐내려던 생각을 접고 손을 천천히 내렸다.박한빈도 자신이 이렇게 빨리 잠이 들 줄은 몰랐다.성유리를 찾았지만 사실 지난 며칠간 그는 잘 자지 못했었다. 자주 깨어나거나, 이곳 환경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성유리의 방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비록 여전히 낮고 습한 집,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성유리의 향기와 햇볕에 말린 이불의 냄새가 그를 아주 편안하게 만들었다.성유리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에 들었다.박한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녀의 잠이 달아났지만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점차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성유리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설아, 왜 아직 안 일어났어? 아픈 거 아니야?”성유리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바로 눈을 떴다.순간 박한빈 또한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깨어나려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계속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민설아?”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졌고 행여나 박한빈이 말을 할까 봐 걱정되어 그의 입을 재빨리 막아버렸다.그리고는 급히 대답했다.“저... 금방 일어날게요.”“괜찮아? 몸이 아픈 거 아니지?”“괜찮아요. 그냥 피곤해서 오래 잔 것뿐이에요. 금방 일어날게요.”성유리는 손발이 바빠지며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박한빈의 다친 손을 우연히 건드렸다.강한 고통에 박한빈은 즉시 움찔하며 신음을 했고 성유리는 깜짝 놀라서 그의 입을 다시 막았다.평소 큰 목소리로 말하는 할머니
박한빈은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이곳에는 인터넷도 없어서 일을 하며 정신을 분산시킬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 앨범을 반복해서 보며 문밖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박한빈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래서 그의 휴대폰에 두 사람의 사진은 거의 없었다. 성유리가 실종되었던 그 시간 동안, 그는 그 사진들을 모두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보았다.몇 번을 넘기던 박한빈은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자기 말이 농담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진짜로 성유리를 찾으러 벽을 넘으려고 했다.하지만 곧 그는 자신이 한 쪽 팔에 아직 보호대를 차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이 몸으로 높은 벽을 넘는 건 불가능했다.결국 박한빈은 벽 밖에 서서 문만 응시했다.성유리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박한빈은 돌아서서 다시 자기 방으로 갔다.동이 틀 무렵, 마침내 그는 이웃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그 소리는 바로 할머니가 괭이를 들고 밭에 나간 것이었다.박한빈은 주저하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이 마을은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아 있기에 그 흔한 도둑도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쉽게 문을 열 수 있었다.성유리의 방문은 잠겨 있었지만 그녀의 창문은 훨씬 낮았다.그 덕에 박한빈은 힘들지 않게 창을 넘어 들어갔다.그는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지만 성유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지 이불을 덮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깨울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손을 내리게 되었다.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의 뺨에 손을 살짝 대었다.그 차가운 느낌에 성유리는 몸을 살짝 떨더니 눈을 번쩍 떴다.자신의 침대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보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그리고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박한빈이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저예요.”성유리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창밖의 희미한 빛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후, 힘겹게 입을 열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
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아는 남편인지 의심스러워졌다.그들은 한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기에 그가 성유리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그래서 그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고자 했던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박한빈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듯, 천천히 물었다.“어머니랑 떨어지기 싫으신 거죠?”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걱정 마십시오, 저는 지금 당장 유리 씨를 데려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금성 쪽에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거기 일이 끝나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죠.”“그리고 유리 씨 어머니는... 나중에 저희가 돌아갈 때 같이 모시고 가면 되니까 걱정 마십시오. 당신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 아주 잘 보답할 테니까.”잠시 정적이 흐른 후,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하지만 유리 씨는 어머니라는 분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안 됩니다. 당신은 이미 제 아내잖습니까. 만약 유리 씨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그건 바람이고 저한테는 무책임한 겁니다.”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성유리가 대답하지 않는 걸 보더니 점점 더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듣고 계시는 거죠?”성유리는 박한빈과 눈을 맞춘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유리 씨는 이제 어머니라는 분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셨습니까?”“뭐를요?”“당연히 당신은 결혼 못 한다는 얘기죠. 상대방이 누구든 상관없으니 결혼하면 안 됩니다.”“알겠어요.”성유리는 처음에는 이 얘기가 끝난 줄 알았지만,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럼 저와 유리 씨가 무슨 사이인지는 어머니한테 뭐라고 설명할 겁니까?”“저희는... 무슨 사이죠?”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유리 씨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방금 제가 한 말은 듣지도
박한빈은 원래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낼 생각이 없었다.의사가 말했듯이 혈종이 가라앉으면 성유리가 스스로 그 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을 못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그는 짧은 시간 이곳에 있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유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이 늘 원하던 모성애를 느꼈을 것이다.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결혼이었다. 성유리의 나이가 적당해지면서 바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고 첫 키스도 웨딩 촬영 중에 했다.그래서 박한빈은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그 모든 걸 잊었다면 다시 ‘구애’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겠다고.그때는 그들이 함께하지 않았던 연애라는 과정을 보충할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박한빈이 이미 성유리를 찾았는데 만약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그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그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을 것이다.박한빈의 말이 끝난 후, 성유리는 그가 예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영화에서 기억을 잃은 사람이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 보통은 머리가 아프다고 하지 않던가.그런데 성유리는 전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박한빈을 쳐다보고 있었다.박한빈은 행여나 성유리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걱정되어 계속 말을 이어갔다.“당신 배에 약 5cm 정도 되는 상처 자국이 있을 겁니다. 그건 하늘이를 낳을 때 생긴 거죠.”“왼쪽 허벅지 안쪽에 빨간 점이 있고 허리 쪽에도...”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갑자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의 목소리가 멈췄다.박한빈이 더 이상 말을 못 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성유리는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그걸... 박한빈 씨가 어떻게 아세요?”“당신은 제 아내입니다. 그러니 유리 씨 몸에 제가 모르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박한빈은 오히려 태연하게 되물었고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왜 안 갔습니까?”“뭐라고요?”“왜 병원에 안 갔냐고 물었습니다. 집에서 결혼할 준비라도 하고 있는 겁니까?”박한빈은 말하며 한 걸음 가까이 성유리에게로 다가갔다.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성유리의 몸에서 뭔가를 끌어내려는 듯했고 그녀는 순간 멈칫했지만 금세 대답했다.“저... 저한테 꼭 가야 한다는 말 안 하셨잖아요?”“성유리 씨는 저를 돌봐준다고 했잖습니까.”“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건 박한빈 씨 혼자 결론 내린 거예요.”성유리는 바로 반박했다.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저는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해요.”“뭐라고요?”“박한빈 씨 곁에... 예전에도 분명히 여자들이 많았겠죠?”성유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전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 그 여자들과 다르니까... 만약 박한빈 씨가 그냥 장난치려는 거라면 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마세요.”성유리의 목소리에는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눈가는 조금 붉어져 있었고 목이 떨리며 뭔가를 삼키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박한빈은 잠시 그런 성유리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전에는 성유리가 그냥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돌아와서 잘 달래면 될 거라 여겼었다.하지만 방금 그녀와 표현숙의 대화를 듣고 나니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때 성유리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그날 ‘숙련된’ 기술로 그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걸 깨달았다.성유리는 입으로는 자신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손은 박한빈을 밀어내지 않고 있었다.게다가 눈가는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잠시 바라본 후, 물었다.“그래서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아니요!”성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부인했다.그리고 빠르게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사람은 원래 계속 소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근처 이웃들을 다 불러 모을 기세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소리를 지르는 여인은 박한빈을 ‘도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래는 불안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박한빈이 그녀를 쳐다볼 때 눈동자에는 냉기가 돌고 있었다.그 눈빛은 여인의 입에서 나올 말까지 삼켜버리게 만들었다. 그때, 표현숙이 물건을 들고나왔다.할머니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이 개자식, 또 왔어? 정말 죽고 싶은 거구나. 그래, 지금 당장 너를 지옥에 보내주지.”말하면서 표현숙은 박한빈에게 위험해 보이는 도구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마치 예전처럼.하지만 이번에는 박한빈이 표현숙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때만 해도 박한빈의 한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렇지만 한 손만으로도 표현숙의 손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한 힘에 할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때 성유리도 안에서 나왔고 박한빈을 보자 그녀도 잠시 멈칫했다.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다가갔다.“엄마, 물건 먼저 내려놔요.”“안 돼! 이 자식이 분명히 너를 괴롭히려고 했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있어. 엄마가 널 지켜줄게.”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박한빈을 다시 쓱 쳐다보았다.그리고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표현숙의 손을 밀쳐냈다.그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기에 표현숙은 밀려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얼마나 사납고 강한 사람인지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렇게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표현숙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고 계속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그녀를 막아섰다.“엄마, 이제 그만하시고 들어가세요.”“안 돼.”표현숙은 바로 단호하게 대답했다.“내가 들어가면 너는 어쩌려고?”“저분은 저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있잖아요.
“응, 아빠가 약속할게.”박한빈은 이 호칭에 원래 낯설고 어색함을 느꼈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부드러움을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그렇게 확답을 듣자 하늘이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도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도 맑고 화창하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행복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다음 날, 성유리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그뿐만이 아니었다.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록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박한빈은 의사의 만류도 무시한 채 강제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가 없이 운행하는 개인 차량을 빌려 바로 마을로 돌아왔다.그리고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은 채, 곧장 성유리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집 앞에 다다르자마자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난 유씨네 그 총각이 괜찮다고 본다니까. 대학생이잖아. 지금은 월급이 좀 적다고 해도 집도 있다잖아? 너희는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면 되지. 돈이 그렇게 중요해?”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굳었다.마치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행복감?지금 느껴지는 것은 오직 냉기뿐이었다.‘이 노파가 성유리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낼 생각인 건가?’‘정말 미쳤나? 성유리가 진짜 자기 딸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자기를 어머니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진짜 친정엄마라도 된 줄 아는 거 아니야?’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했다.그러나 애써 발걸음을 뚝 멈췄다.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침묵뿐이었다.그래서 더욱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그러던 중,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