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차제니에게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 8시, 아래층 1613호실로 가서 여자 한 명 찾아. 그리고 그 여자랑 같이 병원으로 가고.” 그의 요구에 차제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박한빈을 쳐다봤다. “이 일은 그 누구한테도 알려지면 안 돼. 만약 소문이 조금이라도 퍼진다면 무슨 대가를 치를지 알 것이라고 믿어.” 박한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차제니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까지 오해한 것을 알아차렸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넵.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봐.” 박한빈은 차제니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차제니마저 방을 떠나자 방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박한빈은 방금 발생한 일을 더 생각하기 싫었지만 저녁에 잠을 잘 때, 갑자기 아이가 나타나는 꿈 하나를 꿨다. 그는 종래로 어린아이들에게 깊은 감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다루는 법이 서툴렀던 박한빈은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부모님에게도 의지하지도 않았다. 박한빈이 다 커서도 그의 가정은 딱히 화목한 편이 아니었기에 사랑에 서툴렀다. 그렇다고 박한빈이 아이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확고히 키워왔던 개념 탓일까? 박한빈은 늘 자신에게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버지가 된 자기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아이가 갖고 싶었다. 꿈속에 나타난 아이는 흐릿한 뒷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박한빈은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아이는 뒤돌아 박한빈을 쓱 쳐다보고는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박한빈이 뒤늦게 쫓아가려고 할 때, 아이는 이미 종적을 감췄다. 이상한 꿈에 눈을 번쩍 뜬 박한빈은 날이 이미 밝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꿈이 너무 생생하고 기이했기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이의 정체를 추측했다. 그때, 차제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박 대표님, 1613호실에 사람이 없는데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차제니의 말
한편, 성유리는 이미 피검사를 다 마치고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성유리는 지금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지금 그녀 본인조차도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서운 건지 파악이 안 됐다. 성유리는 당연히 아이가 생기면 꼭 낳고 싶었다. 필경 그 아이는 자신과 피를 나눈 사람이자 자신에게 행복한 가정을 선사할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성유리는 가정을 이루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두려운 감정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날 아이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아이가 태어난다면 박씨 가문에서 아이를 뺏어갈까 두려웠다. 박한빈의 태도를 떠올려보니 그는 절대 아이를 자기 자신에게 남겨둘 것 같지 않았다. 성유리는 정말 그때가 되면 자신이 어떻게 박한빈과 싸울지 가늠이 안 됐다. 어젯밤, 이것까지 생각한 성유리는 일부로 수돗물로 테스트했었다. 결과를 보여준다면 순순히 포기할 줄 알았던 박한빈은 완강히 자신을 데리고 병원을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말 그대로 그에게서 도망을 쳤다. 뭐가 어떻게 되든 성유리는 지금 그저 검사 결과만 알고 싶었다. 결과를 알게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되기 때문이다. 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에 깊게 잠겼을 때, 그녀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앉았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거니와 병원에 오고 가는 사람도 많아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성유리는 무언가 감지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유리가 고개를 들자 박한빈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표정이 삽시간에 바뀐 성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박한빈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다시 앉혔다. “또 어디로 갈 생각이지?” 묻는 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애를 쓰며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조용히 말했다. “만약 정말 임신이 맞는 거
성유리는 자신을 부르는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고 의아해하며 뒤돌아봤다. 박한빈은 조용히 성유리에게 다가가 자기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박한빈의 행동에 성유리는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 그때, 성유리는 몸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유리는 잘 알았다. 그녀는 박한빈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 “임신 아닙니다.” 의사가 단호하게 성유리에게 결과를 알려줬다. “생리가 늦춰지는 원인은 아마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생리가 끝난 후에 다시 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비록 성유리는 조금 전 이미 결과를 알아버렸지만 의사의 입에서 확실한 결과를 듣자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임신하시려고 준비 중이십니까?”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유리를 발견한 의사가 물었다. “아니에요.” 의사는 신유리의 대답을 바로 무시해 버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너무 조급해하시면 안 됩니다. 조급해하시면 하실수록 임신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보면 되고요.” 의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주며 많은 말을 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성유리는 응당 기뻐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박한빈과 있었던 그 일을 자세히 떠올려보면 임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 만약 그날 일로 성유리가 임신했다면 정말 하늘이 내린 장난과도 같은 기적이었다. ‘나한테 그런 기적은 없나 보네.’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성유리가 더 이상 그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어떻게 박한빈과 싸울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설명했다. 성유리는 임신이 아니니 이건 좋은 일이라고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고 결과를 알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성유리가 진료실에서 나왔을 때, 박한빈은 이미 떠나버렸는지
성유리가 옷을 바꾸고 나온 순간까지 박한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외투는 아직도 성유리에게 있어 박한빈은 셔츠 한 장만 입은 차림이었다. 박한빈은 팔 쪽에 있는 단추를 풀어 헤친 상태라 그의 적나라한 근육과 핏줄들이 그대로 보였다. 거기에 더해 박한빈의 포스와 곱게 빚은 듯 정교한 이목구비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박한빈은 사람들의 시선에 이미 익숙해졌는지 고개를 숙여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를 본 체하고 앞으로 걸어가려던 성유리의 발걸음이 멈췄지만 박한빈은 그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성유리는 입술을 조금 오므리다가 결국 박한빈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박한빈 씨 옷이 조금 더러워졌어요.”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가서 깨끗하게 씻어서 다시 돌려드릴게요.” 박한빈은 원래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 했지만 성유리의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 짧은 대화를 마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만 만이 흘렀다. 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제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제 알았으니...” “아침 안 먹었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뚝 잘라버리며 물었다. “가자. 밥부터 먹자.” 그는 성유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녀의 캐리어를 들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아예 말릴 틈도 없었다. “전에 수성 시 와본 적 있어?” 어느 한 식당 안, 먹을 메뉴를 다 시킨 박한빈이 갑자기 성유리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럼 마침 이번 기회를 빌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전 내일이면 돌아가려고 했어요.” 성유리의 대답을 들은 박한빈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옆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이번에 진무혁이랑 함께 왔니? 결국 제작권을 그 사람한테 넘
되묻는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박한빈이 갑자기 성유리를 뚫어져라 주시했고 성유리는 그의 시선에 몸이 잔뜩 굳어졌다. 박한빈의 눈빛은 마치 하루빨리 그녀와 어떤 관계를 성사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그저 너와 진무혁 씨가 너무 가까이 있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유정이도 이제는 진무열 씨랑 약혼을 했으니 나는 그 가문 사람들의 도구 따위가 되고 싶지 않다고.” 박한빈은 아주 이성적으로 분석을 해 성유리를 설득했다. “이렇게 하는 걸로 하자.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이 명함으로 전화 해.” 성유리가 입을 뻥긋할 새도 없이 박한빈은 이미 결정을 내려주며 말을 이어갔다. “성유리, 나는 지금 너한테 딱 한 가지 요구밖에 없어. 나한테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게 잘 행동하고 다녀. 알았어?” ... 차제니의 전화가 걸려 올 때, 성유리는 마침 호텔 방 안에 누워있었다. “성유리 씨, 안녕하세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밝은 여자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귀를 기울였다. “저는 차제니라고 해요. 박 대표님께서 성유리 씨에게 배정한 가이드이기도 하고요. 혹시 오늘 밤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괜찮다면 지금 저랑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괜찮아요. 저는 지금 그냥 가만히 쉬고 싶어서.” “오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차제니는 상냥한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성유리 씨, 저는 당신의 가이드예요. 만약 저한테 아무것도 시키시지 않는다면 저는 일자리를 잃을지도 몰라요.” “박 대표님 쪽은 저도 뭐라 할 수가 없잖아요.” 성유리는 차제니의 말에 고민하다가 작은 부탁 하나를 했다. “그럼 죄송하지만 혹시 진통제 하나만 사다 줄 수 있나요?” “네? 어디 불편하세요?” “생리통이요. 이것도 아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제니는 짧은 대답과 함께 전화를 빠르게 끊어버렸고 성유리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지금 그녀
그 후로 며칠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차제니는 성유리의 가이드라는 역할로 며칠 동안 성유리와 함께 수성 시의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이 간 곳은 대부분 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곳도 아니었고 차제니 또한 일정을 잘 안배했다. 천천히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기에 성유리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웠다. “저녁에 이곳에서 폭죽 쇼도 한 대요.” 두 사람이 함께 저녁밥을 먹을 때, 차제니가 성유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다 알려줬다. “이 쇼는 매일 있는 것도 아니래요. 오늘이 입동이잖아요. 수성 시에서는 입동 일에만 이런 쇼를 주최한다고 해요. 위층에 제가 성유리 씨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뒀어요. 전체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완전 제일 좋은 자리예요. 밥 다 드시고 올라가서 꼭 보세요.” “제니 씨는 저랑 같이 안 가나요?” 차제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리 씨, 저는 남자 친구가 있는 몸이라서요. 며칠 동안 별로 안 놀아줬는데 오늘 저녁까지 안 돌아가면 무조건 화낼 거예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괜찮아요. 이건 제 직업이니까요. 해야 할 일이죠. 제가 짠 계획이나 여행 일정이 마음에 드셨다면 나중에 박 대표님 앞에서 저 좀 칭찬해 주세요.” “저랑 박 대표님은...” “아이고, 괜찮아요. 유리 씨 마음에 드셨으니 제 일은 완벽하게 끝을 맺은 것 같네요.” 차제니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먼저 가볼게요. 폭죽 쇼 꼭 보셔야 해요. 아시겠죠?” 그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건넸다. 성유리는 차제니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이 일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차제니는 이미 떠나버렸으니 물을 사람도 없어졌기에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지만 성유리는 가기 싫었다. 그러나 창밖의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을 확인한 성유리는 결국 올라갈 채비를 했
옥상에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불꽃 터지는 소리까지 더해져 주변이 시끄러웠다.하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갑자기 주위가... 조용하다고 느껴졌는데 마치 세상에 그들 둘만 남은 것 같았다.상관없는 사람들, 심지어 머리 위의 불꽃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얼마 전 차제니에게 했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당시 성유리는 차제니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차제니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박한빈도 이렇게 보면... 그런 짓을 할 사람 같지도 않았다.설령 그가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겨냥한 것은 아닐 것이다.하지만 그 말은 마치 돌덩이처럼 성유리의 고요한 호수 속으로 가라앉아 파도도 일지 않고 잔잔한 물결만 남았는데 그 잔물결은 오늘 밤까지도 가시지 않았다.순간 그녀는 박한빈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걸 보고 한 걸음 따라나섰다.이 한 걸음은 마치 강심제처럼 성유리의 심장에 주입되어 몸을 곧게 펴고는 살며시 주먹을 쥔 채 그에게로 걸어갔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곧 몇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멈출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치는 바람에 성유리는 앞으로 몇 걸음 휘청거렸다.박한빈은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는데 성유리의 코에는 금방 익숙한 냄새가 가득 찼다.허리를 잡은 손을 느끼며 성유리는 그들의 첫 포옹을 떠올렸는데 그건 두 사람이 결혼사진을 찍을 때였다.소녀의 꿈은 갑자기 현실이 되었지만 그날의 성유리는 사실 형편없었다.화장실에서 무심코 들은 말로는 자세가 굳어 웃는 모습이 보기 싫고 줄 끊어진 꼭두각시 같다고 했다.촬영장에 돌아오자 카메라맨도 다시 요구했다.허리를 껴안고 키스하는 등 결혼사진의 가장 정상적인 동작이지만 그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는 처음이었다.그때 박한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왔는데 미간에 은은하게 피곤으로 인한 짜증이 느껴졌다.성유리의 긴장하고 조마조마했던 감정이 이렇게 서서히 사라졌다.박한빈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
창밖에서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실내에 히터를 켜 놓았기 때문에 성유리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는데 오히려 실내 온도가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들 정도여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그녀뿐만 아니라 박한빈도 마찬가지였다.분명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싸우고 있었고 성유리는 심지어 평생 그를 만나지 않을 계획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항상 이렇게 쉽게 그를 용서할 수 있었는데 박한빈은 그녀 마음속의 고질병인 것 같았다.그녀는 수없이 그것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수없이 되살아났다.그때 옥탑에서 그가 그녀를 향해 걸어 나온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수많은 용기를 주었다.어쨌거나 그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니 말이다.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환상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다.얻을 수 없는 것은 항상 아쉬움으로 다가오고, 그런 아쉬움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밖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가 보였는데 수성시의 야경이 더해져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아름다웠다.눈앞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허상인듯해 성유리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러나 그녀의 눈물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그녀의 눈에 키스했다.갑자기 닥친 키스에 성유리의 몸은 경직되었고 손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꼭 안았다.손톱이 그의 살갗을 긁어서 피가 스며 나왔지만 이 순간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마치 종말이 오기 전 최후의 파티처럼, 죽음의 고통을 이겨내야 비로소 이런 밤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듯했다.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잠들었는지 잊었다.하지만 눈을 감기 전에 박한빈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으며 조용히 말했다.“원아.”가벼운 두 글자는 성유리의 감정을 그 순간 절정에 이르게 했고 몸도 따라서 절정에 이르렀다.원이는 엄마가 부르던 이름이었다.지석민이 엄마를 집으로 데려오기 전에 원래 성유리의 이름을 원영이라고 지었었다.엄마는 성유리가 생에서
“안 먹을래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저 요즘 살쪄서 더 이상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요.”원래는 이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최근 내내 촬영장에 있다 보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배우라는 직업은 극도로 자기관리가 필요한 일이었고 특히 대형 스크린에 얼굴이 나올 때는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됐다.주변 사람들과 비교해 보니 이제는 자신도 조금 더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쥐었다.“누가 너 보고 살쪘다고 했어?”“아무도 안 그랬어요. 그냥 제가 스스로 조절하려는 거지.”“그럴 필요 없어.”“네가 어떤 모습이든 난 다 좋아. 그리고 나는 오히려 네가 조금 통통한 게 더 예쁜 것 같은데.”“음, 그러면 지금 저보고 살쪘다는 거네요?”“그게 아니라 내 말은...”“그럼 지금 제 모습이 안 예쁘다는 거예요?”박한빈은 어떻게든 해명해 보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결국 말을 멈췄다.성유리도 물러서지 않고 그의 옷깃을 꽉 쥐었다.“빨리 말해요. 그 뜻으로 한 말 맞죠?”“아니라고.”“그럼 무슨 뜻인데요?”“내 말은 네가 어떤 모습이든 예쁘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정의하든 상관없어. 너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고.”박한빈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네가 행복하면 다른 건 다 중요하지 않아.”성유리는 사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투정을 부린 것뿐이었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이런 진지한 대답이 돌아오니 순간 당황했고 얼굴에 스치는 미묘한 변화는 숨길 수 없었다.그런 성유리를 유심히 보던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왜 갑자기 말이 없어?”잠시 머뭇거리던 성유리는 결국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미 다 말했는데 제가 뭘 더 말해야 돼요?”“그럼 이제 먹을 거야?”“먹을게요. 한빈 씨가 힘들게 사 온 건데 당연히 먹어야죠.”성유리가 망설
잠깐 기다리라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30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짧디짧은 시간 동안 박한빈은 곽단이 보내준 단체 사진을 이용해 성유리의 옛 선생님을 찾아냈다.그 시절 학교는 열악한 환경 탓에 대부분이 외부에서 파견된 교사들이었지만 다행히도 성유리의 담임은 아니었다.성유리의 담임선생님은 현재 50대가 넘었는데 그녀의 현재 신분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박한빈은 오히려 그런 상황이라야 제대로 성유리의 과거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내일 선생님을 직접 만나기로 약속까지 잡아둔 상태였다.전화를 끊고 난 후, 그는 성유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어디에서 밥을 먹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머릿속은 온갖 상상으로 가득 찼다.‘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교통사고? 아니면 식당에서 폭발이나 화재라도?’‘아니면 누군가에게 납치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박한빈은 스스로도 이 생각들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았지만 쉽사리 통제가 되지 않았다.사 온 솜사탕이 천천히 녹아내릴 무렵,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성유리였다.손에 키를 들고 있는 그녀는 막 문을 열려던 참이었던 것 같았다.“어디 가려고요?”성유리는 박한빈과 눈이 마주치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박한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되물었다.“너 어디 갔었어?”“저요? 밥 먹으러 갔죠.”성유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전화로 말했잖아요?”박한빈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그렇지만 성유리는 그런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밀며 말했다.“아까 길에서 본 건데 이거 진짜 맛있더라고요. 한입 드셔볼래요?”성유리가 가리킨 건 이 지역의 특산 요리 같은 것이었다.떡과 비슷한 식감에 무말랭이와 파가 올려져 있었는데 맛은 의외로 달콤했다.박한빈은 성유리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마지못해 한입 베어 물었다.그런데 입안에서 퍼지는 독특한
“근데 그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다르더라. 내가 듣기로는 그 사람이 차고 있는 시계 하나만 해도 시내 아파트 몇 채 값이라던데? 그러니까 지서연이 나를 보고도 본척만척했던 거지. 저런 대단한 사람을 붙잡았으니 말이야.”“솔직히 내가 보기엔 걔가 너보다 더 예쁜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혹시라도 한번...”곽단은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어서 바로 엄마의 말을 끊어버렸다.“엄마, 미쳤어? 그 사람 이미 결혼한 사람이야.”“결혼했으면 뭐 어때? 이혼하면 되잖아? 게다가 지서연 걔 원래부터 깨끗한 애도 아니었잖니. 내가 늘 말하지만 남자들은 이런 거 신경 많이 쓴다니까?”“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도 깨끗하지 않은 거네.”곽단이 냉랭한 태도로 반박했다.“엄마, 나도 전에 남자 친구 있었잖아. 잊었어?”“너... 그런 말 하니까 내가 더 화가 나잖아! 너 지금 그게 자랑이라고 떠들어? 네가 얼마나 천한 짓을 했는지 아니? 스스로 남자한테 들러붙어서 자기 모든 걸 줘 버리고 결국 어떻게 됐어? 걔는 널 차버리고 다른 여자랑 결혼했잖아! 결국 넌 공짜로 몸만 준 여자가 됐다고.”“누가 그래? 나도 그때 즐겼어.”“야! 너 진짜 내가 오늘 때려죽여야겠다.”여자는 참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곽단에게 던지려 했다.하지만 곽단은 익숙한 듯 그런 공격을 피하며 계속 말했다.“그리고 하나만 충고할게. 박 대표한테 기대하지도 말고 더 이상 헛된 망상을 하지 마.”“뭐라고?”“엄마는 그 사람이 그냥 심심해서 이곳에 온 거라고 생각해? 박 대표님은 지서연의 과거를 조사하러 온 거야. 남자가 자기 아내의 과거까지 그렇게 신경 쓴다는 건 그만큼 여자를 많이 아낀다는 뜻이야.”“그러니까 엄마는 차라리 엄마가 옛날에 지서연한테 너무 심한 짓을 하지 않았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어.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박한빈은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성유리가 방에 남겨둔 노트를 펼쳐보았다.사실 안에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적힌 숫자들이 눈
“사실 전 지서연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 돼요.”“이장님이 말하는 것들 다 믿지는 마세요. 서연이 양아버지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죠. 겨울철에는 가끔 서연이를 집 밖으로 내쫓기도 했고.”“서연이가 중학교에 다닐 때, 한 번은 거의 옆 마을에 팔려 갈 뻔했어요. 그때 양아버지는 걔를 12살까지 키웠으면 이제 충분하다며 가족에게 보답할 때가 됐다고 했어요.”“서연이가 그때 그림 대회에 참가해서 상을 받고 상금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 정말로 팔려 갔을 거예요.”“마을 사람들도 서연이에게 차가웠고... 이장님이 말한 것처럼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어.”“그리고 저도... 그 당시 지서연은 영양실조였지만 사실 꽤 예뻤어요. 남자들이 많이 좋아했죠. 그걸 보고 다른 여자들이 질투가 나서 서연이를 많이 괴롭혔어요. 저도 그중 하나였고...”“그래서 제가 말한 거예요. 서연이에게 사과해야 한다고.”“지금 서연이가 잘 살고 있다는 걸 보면 저는 정말 기뻐. 박 대표님도... 서연이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겠죠?”곽단은 한 번에 많은 말을 내뱉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에게서 무엇을 얻으려면 과거의 모든 것을 지우고 마을 사람들처럼 자기가 좋은 사람인 척 말을 꾸며야 한다는 것을.그러나 곽단은 박한빈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그것을 그대로 믿지 않을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리고 지서연은 지금 박한빈의 아내였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돌아가서 지서연에게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곽단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이 사진은 제가 가지고 있어도 별로 의미 없으니까 박 대표님에게 드릴게요.”잠시 뜸 들이던 곽단이 계속 말했다.“그리고 박 대표님께서 서연이한테 저 대신 미안하다는 말 좀 전해주세요.”“네.”박한빈은 짧은 대답만 내뱉었다.그때, 곽단의 어머니가 뒤에서 나왔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고는 잠시 놀랐다가 이내 눈이 반짝였다.그러나
그런 날들을 성유리는 대체 홀로 어떻게 버텨낸 걸까?배도 제대로 못 채우고 하루하루 지석민의 협박 속에서 벌벌 떨며 살아야 했던 그 시간 동안 성씨 가문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그들은 성유정을 진짜 딸처럼 아끼고 무용과 피아노까지 가르치며 키웠다.그래서 결국 성유정은 성유리보다 훨씬 더 귀한 집 딸처럼 보이게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유리의 촌스럽고 무례한 행동을 비웃었다.하지만 아무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성유리는 단 한 번도 자기 인생이 원래는 그런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걸.지금까지 살아온 그 10년이 사실은 애초에 잘못된 자리에 있었던 삶이란 걸.그때, 귀신처럼 성유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박한빈은 마침 식탁에 앉아 있던 중이었다.주변 사람들은 잔을 들고 연신 술을 따라주며 극진히 대접해 줬고 박한빈은 그들이 무슨 속셈인지 이미 훤히 알고 있었다.길을 닦고 학교를 짓자는 말은 그냥 명분일 뿐, 그들이 지금 이렇게 그에게 들러붙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어떻게든 성유리와 인연을 맺어 박한빈으로부터 실질적인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그게 이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박한빈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기 때문에 능숙하게 응대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이름이 뜬 화면을 보는 순간, 문득 정신이 흐트러졌다.곧바로 정신을 다잡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지금 어디예요?”수화기 너머 들리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잠시 망설였다.“밖에... 있어.”“누구랑 있는데요?”마을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는 밖으로 나와 조용한 자리를 찾아도 완전히 막을 수 없었고 당연하게도 수화기 너머로 그 소리가 성유리에게 전해졌다.고스란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의아한 듯 물었다.“왜 이렇게 시끄러워요?”“음... 공사장 근처에 있어서 그래.”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자기가 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크게 고민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내뱉었다.“그럼 거기서 밥 드셨겠네요?”다행
“저기요! 거기 들어가면 안 돼요!”곽단이 급하게 뒤에서 소리쳤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집 앞의 잡초가 워낙 무성했기 때문에 안쪽도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박한빈은 이미 집 안의 방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발길을 옮기려 할 때마다 잡초가 앞을 가로막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그때 뒤에 있던 곽단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혹시 뭐 찾으시는 거예요? 근데 이 집은 몇 년 전부터 방치된 곳이라 값나가는 건 다 누가 가져갔을 텐데... 이제 남은 건 하나도 없을걸요?”박한빈은 여전히 한마디 대꾸도 없이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그리고 곧장 작은 골목을 돌아 집 옆쪽으로 향했다.다행히 창문은 이미 깨져 있었기에 그는 무리 없이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실내는 예상한 그대로였다.오랜 시간 비워져 있던 만큼 바닥이며 창틀이며 온통 먼지투성이였다.한 바퀴 방안을 둘러본 후, 박한빈이 마지막으로 시선을 멈춘 곳은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 하나였다.오래되어 삐걱거리는 책상이었는데 어딘가 학교에서 쓰던 책상을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그 위엔 천 조각이 덮여 있었고 휴대폰 손전등을 비추어보니 작은 꽃무늬가 박혀 있었다.그리고 책상 옆 바닥에 내팽개쳐진 책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박한빈은 몸을 숙여 책들을 주워들었고 마침 그때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문이 열리면서 쌓였던 먼지가 우수수 쏟아졌고 그 소리까지 들려올 정도였다.뭔가 이상한 기분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 순간, 앞장선 남자가 급히 다가오며 소리쳤다.“이런 데를 들어오시게 어떡해요! 미리 말씀만 해주셨으면 제가 먼저 정리라도 해놨을 텐데.”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그제야 남자는 뭔가 깨달은 듯, 급히 손을 내밀었다.“아, 제가 소개를 깜빡했습니다. 저는 이 마을 이장, 지세찬이라고 합니다.”박한빈은 그와 짧게 악수를 나누며 대답했다.“그냥 궁금해서 한번 들어와 봤습니다.”“이 집은
화면 속 사람이 웃는 장면에 맞춰 가게 안의 여자도 따라 웃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어디가 웃기는지는 박한빈은 알 수 없었다.“거기서 왜 멍하니 있어?”여자는 화가 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카운터 위에 있던 장난감 상자 하나를 그대로 들고 상대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손님 온 거 안 보여!?”안쪽에 앉아 있던 여자는 원래 그 말조차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있었다.그렇지만 물건이 얼굴에 부딪히고 나서야 박한빈을 힐끔 쳐다보았다.그런데 단 한 번의 눈길 이후, 그녀의 얼굴빛이 확 바뀌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혹시... 당신은 그...”“아까 말했잖아. 이분은 지서연 남편, 큰 회사의 사장님이시라고!”여자는 다가가 딸의 팔을 세게 꼬집은 뒤, 박한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이쪽은 제 딸 곽단이에요. 서연이랑 같은 반 친구였답니다.”박한빈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그럼 제가 바로 이장님께 알리러 갈게요. 다만 지금 이 시간이면 다들 낮잠 자고 있을 수도 있어서 제가 직접 집마다 다녀볼게요. 곽단, 너는 얼른 사장님 모시고 마을 한 바퀴 돌면서 안내 좀 해드려!”이름이 불린 곽단은 마지못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는데 박한빈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잠시 후, 곽단은 안내를 하려는 듯 앞장서며 천천히 입을 뗐다.“따라오세요.”박한빈은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사실 두 사람이 굳이 안내하지 않아도 그는 처음부터 이 마을을 둘러볼 생각이었다.애초에 그것이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가이드’가 하나 생겼다 해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뉴스에서 본 적 있어요, 사장님에 대한 기사요.”마을을 걷던 중, 곽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진짜로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어요…”“그 사람 집은 어딥니까?”곽단은 뜻밖의 질문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쳐다봤다.“당신 옛 동창 말입니다.”박한빈은 성유리라는 이름을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고 지서연이라고 부르기도 싫었기에 그냥 동창이라는 단어로
여자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침묵만 유지했다.하지만 그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 존재감만으로 주변 공기가 묵직해졌다.여자도 그 기운을 감지한 듯,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도 서서히 사라졌다.처음에는 자기가 너무 성급하게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순간,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좋습니다.”“다만 그 사람은 이쪽에 아직 일이 있어서요. 지금은 저희와 함께 갈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먼저 다녀오는 게 좋겠네요.”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여자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좋아요, 좋아요!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원래 여자는 성유리 이야기를 미끼 삼아 박한빈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순순히 따라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여자 입장에선 성유리가 오든 말든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여자가 진짜 원하는 건, 오직 박한빈이 가진 권력이었으니까.지금처럼 성유리를 건너뛰고 박한빈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아까 하신 말씀 중에... 유리랑 이웃사촌이었다고 하셨죠?”가는 길에 박한빈이 먼저 물었다.여자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그러다 잠시 뒤에야 박한빈이 말한 성유리가 예전에 자신이 말했던 그 이웃임을 떠올렸다.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맞아요! 우리 집이랑 서연이 집이 바로 옆에 있었거든요! 어릴 때는 유리가 아빠한테 자주 맞고 저희 집으로 도망 오기도 했어요! 제가 그럴 때마다 우유랑 빵도 챙겨줬답니다!”물론 이건 전부 여자가 직접 지어낸 이야기였다.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 성유리가 없으니 반박할 사람도 없으니 뭐라 말하든 여자의 마음대로였다.박한빈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여자는 그런 박한빈을 힐끗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제 딸도요. 전에 서연이랑 같은 반이었어요! 둘이서 꽤 친하게 지냈다니까요. 근데 서연이는 워낙 특별한 집안 출신이잖아요. 그래서
여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아직 촬영이 시작되기 전이라 현장은 조용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성유리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내가 무슨 말을 할지...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여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는 재벌가 사모님이시라면서? 재벌 집안은 체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과거에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들 알게 되면 어떨까? 그때도 지금처럼 네 곁에 있어 줄까?”말을 마친 여자는 성유리를 시험하듯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의 눈에는 그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그 조용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여자의 심장은 세차게 요동쳤다.마치 자신이 ‘위협’한 게 아니라 오히려 판단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여자는 재빨리 입을 열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먼저 입을 뗐다.“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보세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그 태연한 반응에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저 그대로 뒤돌아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러나 이건 여자의 입장에선 명백한 도발이라고 느껴졌다.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거기, 뭐 하는 거야?”감독이 여자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몇 번이나 불렀는데 왜 대답이 없어? 빨리 자리로 돌아와!”여자는 잠시 멈칫하다 곧장 대꾸했다.“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되는데? 나 안 해!”말을 마친 여자는 곧바로 촬영장을 나와 버렸다.그렇지만 몇 걸음 채 가지도 않아 그녀는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그래서 곧장 택시에 올라탔고 그녀가 향한 곳은 박한빈이 머무는 호텔이었다.호텔 앞, 여자는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들고 곧장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