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성유정을 바라보지 않았다.그는 먼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곧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한빈 오빠.”성유정은 참다못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가득했다.그제야 박한빈은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넸다.“축하해.”고작 축하해라니...성유정은 그가 마지막으로 해줄 말이 이렇게 가벼운 한마디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선물을 받아서 들었다.“고마워.”선물 상자를 받으며 성유정은 무심코 그의 손끝을 살짝 스쳤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차갑기만 했다.성유정은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조용히 손을 내릴 뿐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때 진무열이 성유정의 곁으로 다가왔다.“박 대표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그는 손을 내밀어 박한빈과 악수를 나누었다.“오늘 같은 중요한 날에 진 대표님은 안 보이시네요?”단예진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출장 중입니다.”진무열이 웃으며 설명했다.“회사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수성에서 시작돼서 그쪽으로 가셨어요.”단예진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중요한 프로젝트인가 보네요. 진 대표님이 직접 가셨다니?”진무열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었다.박한빈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약혼식의 주요 행사는 이미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손님들과의 대화와 인사였다.금성의 대표적인 기업인 지화그룹의 대표 박한빈이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물론 더 주목할 만한 것은 단예진이 그의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모습이었다.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성씨 집안 쪽을 바라보았다.이제 보니 성씨 집안의 그 사람, 성유리는 이제 완전히 과거의 인물이 된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 오늘 성유리는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조롱거리가 될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박한빈은 주변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
미화로 37번지로 향하던 길에 박한빈은 진무혁이 올린 SNS 게시물을 보았다. 위치는 수성이었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사진 구석에 하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이 성유리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박한빈의 미간이 즉시 찌푸려졌고 그는 곧바로 말했다.“차 세워요.”택시 기사가 당황한 듯 그를 보며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박한빈이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방향을 돌려서 지화 빌딩으로 가주세요.”택시는 미터기로 요금이 계산되니 택시 기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냥 중얼거리며 조용히 차를 돌렸다.박한빈은 무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기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몇 번 두드리다가 결국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수성으로 가는 비행기 표 예약해 줘요.”...성유리는 지금 수성에 있었다. 그녀의 작품이 영화로 각색되는 과정에 참여했지만 그녀의 역할은 그렇게 크지 않았기에 굳이 올 필요는 없었다.그러나 마침 성유정의 약혼식이 다가왔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왔다.그런데 진무혁이 함께 오리라곤 성유리도 생각지 못했다.“나도 약혼식에 가고 싶지 않아서.”레스토랑에서 진무혁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그녀와 같은 편에 서 있는 듯했다.성유리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진무혁이 와인잔을 들자 성유리도 잔을 들어 그와 가볍게 부딪쳤다.“너 정우 씨한테 요즘 연락 안 했어?”진무혁이 물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해조 그룹과의 계약은 끝난 거 아닌가요?”“그렇지. 하지만 정우 씨는 친구 같다고 할까, 요즘 기분이 축 처져 있던데 보는 내내 마음이 좀 안 좋더라고.”성유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와인잔을 내려놓고 말했다.“정우 씨는 괜찮을 거예요. 분명 누군가 정우 씨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거니까요.”“그게 너일 수는 없어?”성유리는 눈을 들어 진무혁을 보며 물었다.“우리 진 대표님 이제 중매까지 하려는 거예요?”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그
성유리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진무혁의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로 박한빈에게 인사말을 했다. “박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또 봅시다.” 진무혁의 인사에 박한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히자 진무혁의 표정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입술을 피가 날 듯이 꽉 깨물고 있었다. 한편, 성유리가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성유리가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진무혁이 물었다. “내일 너 촬영장 갈 거야?” “안 갈 이유가 없지 않아요?” 성유리가 되물었다. 진무혁은 이내 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난 그냥 너한테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어. 혹시 너한테 다른 일정이 있을까봐.” 성유리는 그의 말속에 담긴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없어요.” “그럼 됐어. 푹 쉬어. 잘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기 전, 진무혁은 뒤를 돌아 성유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성유리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진무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입구에서 잠시 머무르다 문득 아까 박한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박한빈이 그들의 모습을 봤을 때도 전혀 놀라지 않아 보였다. 당연하게도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들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박한빈과 그의 눈빛을 보니 박한빈에게 성유리는 그저 낯선 사람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성유리는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근 한 달 내에 성유리는 일부로 자기 자신에게 여유시간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바삐 돌았다. 늘 빽빽한 일정을 유지하고 살아간
방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제야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자리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가만히 멍만 때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선명한 라이터 소리를 들었다. 딸깍하는 소리에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누가 서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마 어젯밤에 미리 마주친 탓일까? 오늘 그를 마주한 순간 성유리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의 손은 뜻대로 되지 않아 미세하게 떨려왔고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길고 넓은 복도에 오직 두 사람이 남아있었고 박한빈과 전혀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성유리는 불편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조금 망설이던 성유리는 불편함을 못 이겨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앞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틀거리는 그 사람은 성유리를 못 봤는지 그대로 그녀의 몸에 강하게 부딪혀버렸다. 상대가 자신의 몸에 부딪히는 그 찰나에 성유리는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를 맡았다. 촬영장에서 주는 도시락도 느끼하고 저녁으로 먹는 일식도 성유리의 입맛이 아니었기에 오늘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맡아버린 진한 알코올 냄새에 성유리는 위안에서 뭔가가 강하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부딪히려는 그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아 옆으로 비켜 세웠다. 성유리에게 부딪힌 그 남자는 비틀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성유리는 빠르게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다. 예상보다 센 성유리의 힘에 박한빈은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안색이 어두워진 박한빈이 뭐라 하기도 전,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구토하기 시작했다. 위가 이상하리만큼 불편한데 더해 하루 종일 먹은 음
성유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늘 시기를 잘 맞춰 오던 생리 주기가 늦춰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사실까지 발견한 성유리는 하던 생각도 멈춘 채, 박한빈에게 손을 잡힌 채로 그를 따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침 방 밖으로 나온 진무혁은 두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봐버렸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박한빈을 따라나서는 성유리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진무혁의 의도를 빠르게 알아차렸는지 그를 슥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우리 둘 사이 일이니 진 대표님께서 끼어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박한빈의 목소리는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지만 경고하려는 의도는 명확했다. 진무혁은 그의 말에 하던 행동을 멈추더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성유리는 얼른 괜찮다고 말했다. 진무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성유리를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나섰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박한빈은 약국을 들러 사 온 물건을 성유리에게 건넸다. 성유리는 깜짝 놀라더니 이를 꽉 물고 박한빈에게 물었다. “병원 가는 거 아니었어요?” “지금 시간에 병원 가면 응급실밖에 없어. 원하다면 내가 사람을 시켜 특별히 안배해 줄게.” 박한빈이 대답했다. “아니요. 됐어요.” 성유리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만약 박한빈에게 안배해달라고 말한다면 소문이 빠르게 퍼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임신 결과보다 이런 결과를 더욱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먼저 테스트라도 해봐.” 박한빈이 말을 이어갔다. “내일 아침 병원 가서 피검사도 하자.” 아주 담담해 보이는 박한빈은 마치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 같아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성유리는 쓸데없는 질문은 던지지 않으려 결심했고 손에 들린 테스트기 상자를 꽉 쥐었다. 차는 빠르게 달려 어느덧 호텔에 도착했고 성유리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박한빈이 그녀 뒤를 따랐다. “저 혼자 해보면 돼요.” 성유리는 자신을 따라오는 박한빈이 불편한
“성유리?” 박한빈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하더니 살짝 노크하며 성유리를 불렀다. “...” 하지만 그는 안에 있는 성유리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걱정되는 마음에 몇 번이고 노크했지만 안에서 여전히 반응이 없자 박한빈은 발로 문을 차서 억지로 열 준비를 했다. 박한빈이 뒤로 물러나 다리에 힘을 주려는 그 순간, 성유리가 화장실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는 하려던 행동을 빠르게 멈췄고 조용히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임신 아니에요.” 말하는 성유리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평온해 보였다.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한빈에게 성유리는 들고 있던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며 다시 말했다. “박 대표님, 이제 안심하셔도 되겠어요.”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테스트기를 확인했고 위에는 선명하게 한 줄이 나타나 있었다. “내일 병원 가보자.” “이게 정확할지 안 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박한빈이 입을 뗐다. “안 가요.” 단호하게 거절하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데 왜 그러시죠?” 성유리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전 그저 위가 불편할 뿐이에요. 박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우연은 없을 거라는 말이죠.” “아침 8시, 데리러 올게.”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자신이 할 말만 내뱉고는 몸을 휙 돌렸고 빠르게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럼 저 혼자 갈게요.” 뒤에서 들려오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재촉하던 발걸음을 뚝 멈췄다. “결과가 나타나면 꼭 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성유리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박한빈 씨, 우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게다가 병원엔 보는 눈도 많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죠. 저는 그 어떤 예외도 발생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과 선을 딱 그어버리려는 의도가 가득한 말을 했다. 박한빈은 전에 늘 성유리가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보니 참 단호
박한빈은 차제니에게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 8시, 아래층 1613호실로 가서 여자 한 명 찾아. 그리고 그 여자랑 같이 병원으로 가고.” 그의 요구에 차제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박한빈을 쳐다봤다. “이 일은 그 누구한테도 알려지면 안 돼. 만약 소문이 조금이라도 퍼진다면 무슨 대가를 치를지 알 것이라고 믿어.” 박한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차제니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까지 오해한 것을 알아차렸고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넵.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봐.” 박한빈은 차제니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차제니마저 방을 떠나자 방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박한빈은 방금 발생한 일을 더 생각하기 싫었지만 저녁에 잠을 잘 때, 갑자기 아이가 나타나는 꿈 하나를 꿨다. 그는 종래로 어린아이들에게 깊은 감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다루는 법이 서툴렀던 박한빈은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부모님에게도 의지하지도 않았다. 박한빈이 다 커서도 그의 가정은 딱히 화목한 편이 아니었기에 사랑에 서툴렀다. 그렇다고 박한빈이 아이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확고히 키워왔던 개념 탓일까? 박한빈은 늘 자신에게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버지가 된 자기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아이가 갖고 싶었다. 꿈속에 나타난 아이는 흐릿한 뒷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박한빈은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아이는 뒤돌아 박한빈을 쓱 쳐다보고는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박한빈이 뒤늦게 쫓아가려고 할 때, 아이는 이미 종적을 감췄다. 이상한 꿈에 눈을 번쩍 뜬 박한빈은 날이 이미 밝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꿈이 너무 생생하고 기이했기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이의 정체를 추측했다. 그때, 차제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박 대표님, 1613호실에 사람이 없는데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차제니의 말
한편, 성유리는 이미 피검사를 다 마치고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성유리는 지금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지금 그녀 본인조차도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서운 건지 파악이 안 됐다. 성유리는 당연히 아이가 생기면 꼭 낳고 싶었다. 필경 그 아이는 자신과 피를 나눈 사람이자 자신에게 행복한 가정을 선사할 천사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성유리는 가정을 이루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두려운 감정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날 아이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아이가 태어난다면 박씨 가문에서 아이를 뺏어갈까 두려웠다. 박한빈의 태도를 떠올려보니 그는 절대 아이를 자기 자신에게 남겨둘 것 같지 않았다. 성유리는 정말 그때가 되면 자신이 어떻게 박한빈과 싸울지 가늠이 안 됐다. 어젯밤, 이것까지 생각한 성유리는 일부로 수돗물로 테스트했었다. 결과를 보여준다면 순순히 포기할 줄 알았던 박한빈은 완강히 자신을 데리고 병원을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말 그대로 그에게서 도망을 쳤다. 뭐가 어떻게 되든 성유리는 지금 그저 검사 결과만 알고 싶었다. 결과를 알게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되기 때문이다. 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에 깊게 잠겼을 때, 그녀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앉았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거니와 병원에 오고 가는 사람도 많아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성유리는 무언가 감지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유리가 고개를 들자 박한빈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표정이 삽시간에 바뀐 성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박한빈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다시 앉혔다. “또 어디로 갈 생각이지?” 묻는 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애를 쓰며 박한빈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박한빈이 조용히 말했다. “만약 정말 임신이 맞는 거
성유리의 눈을 마주 보게 된 순간, 최정민은 말을 잇기가 어려워졌다. “최정민 씨?”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 그제야 최정민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고 성유리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최정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박 대표님과 관련된 일로 왔습니다.”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최정민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계속 말했다. “당신들이 이미 결혼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정말 방법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혹시 박 대표님을 저에게 양보해 주실 수 있나요?” 그 말을 마친 최정민은 죄책감 탓인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동공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 물었다. “임신했나요?” “아니에요!” 그 질문에 최정민은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고개를 연신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저희가 만난 지 사실 고작 2주밖에 안 됐어요. 임신일 리가 없잖아요?” 성유리는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저희 정말로 사귀고 있어요. 믿기 힘드시면 제가 사진도 보여드릴게요.” 말을 하며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곧바로 화면에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이 보였다. 단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성유리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최정민을 쳐다보던 성유리가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알고 제가 임신 중이라는 것도 알면서 어떻게 저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나요?” 최정민은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왜냐하면 당신은 진실되지 않는 남편을 곁에 두지 않을 분이니까요.” 그녀는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전에 당신이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도 제가 직접 봤거든요.” “그때 당신과 박 대표님은 아직 화해하지 않
“모레? 왜 그래?” “괜찮아요. 바쁘시면 됐어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지만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날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줘야 내가 시간을 조정하지.” “아무 일도 아니에요. 시간이 없으시면 그냥 지나가죠 뭐.” 성유리는 목소리까지 한층 냉랭해진 채로 대답했고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박한빈은 뒤에서 팔을 뻗어 그녀를 꽉 안았다. “난 네가 잊은 줄 알았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걱정 마. 네가 기억하지 않아도 나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엔 무슨 생일 선물을 준비했는데?” “시간도 없다면서 생일은 무슨 생일이에요?” 성유리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박한빈의 입가에는 더 짙은 미소가 번졌고 그는 손으로 성유리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건 장난친 거야. 요즘 정신없이 바쁜 것도 다 이날 시간을 비우려고 그런 거라니까.” “그럼 그날 바다 한번 가볼까?” “이런 날씨에 바다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온천은? 내가 호텔 예약하라고 할게.” 성유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다. “별로 가고 싶지 않다면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말해줘.” 박한빈은 인내심 있게 물었다. 성유리가 대답하려는 찰나, 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고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일부러 박한빈의 핸드폰을 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을 보게 됐다. 최정민. 예전에 박한빈의 휴대전화에서 이 번호를 본 기억이 있다. 그때는 이름 없이 저장된 번호였는데 지금은 분명한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유리는 발신자로 표시된 최정민의 이름을 보고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박한빈의 미간은 더욱더 세게 찌푸려졌다. “알았어.” 그는 단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 성유리 쪽으로 돌아선 그의 표정은
사실 성유리는 오늘 다른 컵을 더 만들고 싶어 색깔까지 다 조합했지만 사하나의 말에 집중을 못 해 다 포기해 버렸다. 하지만 딱히 상관은 없다. 왜냐하면 박한빈의 생일날 줄 선물은 이미 손에 넣었으니 말이다. 사하나는 요 며칠 지루한 일상에 질렸는지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성유리를 끌고 술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성유리가 임산부라는 사실을 고려하고는 주변 백화점 안에 있는 오락실로 향했다. 성유리는 임정우와 마지막으로 오락실에 온 게 기억이 났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를 보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이상했다. 마치 바람과 같이 사라진 사람처럼 임정우는 성유리의 세상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성유리는 사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도시가 많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어찌나 큰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영원히 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날 밤, 박한빈은 또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왔다. 성유리는 애초에 잠에 들지 않았던 상태라 박한빈 차의 엔진소리를 듣고는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대로라면 박한빈은 성유리가 있는 방을 꼭 들어왔었다. 성유리가 잠에 들었든 안 들었든 박한빈은 그녀를 깨우고 몇 마디 나누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성유리는 이미 습관이 됐는지 항상 저녁마다 박한빈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 웬일인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박한빈은 문을 열고 들어오지를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성유리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가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박한빈은 이미 욕실에서 씻고 있었고 흘러내리는 물줄기 소리에 성유리는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시선은 박한빈이 벗어놓은 외투로 향했고 그 외투에는 평소 못 보던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있었다. 진한 갈색빛에 노란 기가 섞어져 있는 머리카락이었는데 성유리는 한 번도 염색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박한빈의 옆을 따라다니는 비서마저도 이젠 남자이기에 이 머리카락의 주인이 누구인지 성유리는 몰랐다. 성유리의 머릿속에는 문득 오늘 사하나가 했던 말들이
“이게 바로 남편을 위해 준비한 선물인가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만들던 도자기 반죽을 망칠 뻔했고 하마터면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쯧, 명색이 지화 그룹 총대푠데 고작 이런 선물로 만족하시겠어요?” 사하나는 성유리의 반응을 본 체도 안 하며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냥 만들면서 놀아보는 거야.” 성유리는 또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 사하나를 발견한 성유리가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요즘 많이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오늘 시간이 있었나 보네?” “제가 하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죠. 매일같이 각종 식사 자리나 파티에 참석해야 해서 바빴어요. 아빠가 가라고 저를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전 가지도 않았을 거고요.” 사하나는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앉으며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성유리는 원래부터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별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따라 사하나는 유달리 말이 적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성유리가 고개를 돌렸을 때, 사하나는 이미 멍한 눈빛으로 성유리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나한테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성유리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사하나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성유리는 사하나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요즘 박 대표님을 너무 오래 못 본 것 같은데요?” 사하나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성유리에게 박한빈에 대해 물었다. “요새 박 대표님 많이 바쁘신가요?” “응. 바쁘지.” 성유리는 만들던 반죽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고 사하나는 그런 그녀에게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요즘 뭐 하시는지 물어도 안 보셨어요?” 성유리는 사하나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요즘 그 사람한테 무슨 일 생겼어?” 사하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성유리가 사하나에
최정민이 용기를 내 다가가 박한빈을 한번 불렀지만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최정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한번 박한빈을 불렀다. “박 대표님!” 이번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박한빈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고 그녀를 본 순간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누군가 박한빈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여자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결국 너도 네 허리춤을 못 지킨 거야?”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최정민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최정민의 목소리는 쉰 듯했고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부탁드릴게요. 저 좀 도와주실 수 없나요?” “저는... 저는 제 의지로 박세빈 씨와 만나는 게 아니에요. 지난번에 그가 저를 취하게 만든 뒤 호텔로 데려가서 입에 못 담을 그런 사진들을 찍었어요.” “정말 무서워요. 박 대표님, 제발 도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최정민은 말하며 속이 많이 상했는지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들은 얼굴을 타고 목으로까지 흘러내렸다. 하지만 박한빈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부모님께는 말할 용기도 없어요. 박 대표님 말고는 이 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지만 박한빈은 빠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녀와의 거리를 벌렸고 동시에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최정민은 그의 반응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다가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에요. 정말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요.” “내가 박세빈이랑 얘기해 볼게.” 박한빈의 말에 최정민의 눈빛이 즉시 반짝였다. “정말?” “응.”“고마워! 아니, 정말 감사합니다!” 최정민은 잔뜩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순간 그의 손을 잡으려다 다시 생각난 듯 멈췄고 결국 허공에 붕 뜬 손을 가만히 내렸다. 최정민은 다시 한번 박한빈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나쳐 걸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다 지화 그룹의 대주주들이었다. 박세빈은 이미 사직한 상태지만 그래도 손에 주식을 들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박한빈을 발견한 박세빈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형! 오셨어요?” “자. 다들 오셨으니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여긴 제 여자 친구인 최정민이라고 합니다.” 박한빈은 자리에 앉아 있는 최정민을 잠시 쳐다보더니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알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그들을 지나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세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스스로 술을 한 잔 따라 최정민 옆에 앉았다. “난 형이 형수님을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박세빈이 고개를 돌려 최정민에게 물었다. “아직 형수님 못 보셨죠?” 최정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조용히 대답했다.“봤어요.” “그래요?” 박세빈은 조금 의아해하다가 이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생각났다. 예전에 병원에서 일했었잖아요. 아마 거기서 본 거겠죠?” “형수님 임신하셨잖아요. 형은 거의 매번 산부인과 검진 때 따라간다던데요?” “솔직히 우리 형 정도의 위치에서 이 정도까지 하는 건 정말 대단한 거죠. 우리 주변 사람들 봤으면 알 거예요. 외모도 별로고 돈도 얼마 없으면서 바깥에서 엉망진창으로 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최정민은 왜 박세빈이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몰라 고개만 숙인 채 무기력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박세빈은 처음엔 흥분해서 말하던 중이었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최정민의 무덤덤한 반응에 그의 표정 또한 이내 사라져 버렸다. “지금 무슨 뜻입니까? 제가 하는 얘기 듣기 싫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최정민이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박세빈은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안았다.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건 누구 보라고 그러는 겁니까? 당신 혹시 제가 가진 게 뭔지 잊은 건가요?” 그 말에 최정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
그 순간, 울리는 박한빈의 휴대폰 벨 소리가 방 안의 평화가 깨버렸다. 그는 애초에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오늘 중요한 식사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박한빈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결국 몸을 일으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마지막엔 낮은 목소리로 알겠다는 말을 남긴 뒤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박한빈은 성유리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네.” 성유리는 무척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치 방금 전의 따뜻한 순간은 전혀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고 이번 키스는 평소와는 달리 부드럽지만 깊고 따뜻했다.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느낌이 든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려 손으로 그의 셔츠를 꽉 잡았다. 두 사람 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을 때가 돼서야 박한빈은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스치며 남은 흔적을 지웠다. “이제 갈게.” 박한빈은 말을 하며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손을 쳐다봤다.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그의 셔츠를 꼭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순간 귀 끝까지 빨개져 손을 급히 뗐다. 박한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성유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저녁에 나 기다리지 말고 푹 쉬어.” “알았어요.” 성유리는 대답하며 박한빈의 시선은 피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개의치 않아 하며 성유리를 한 번 더 가볍게 안아준 뒤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실외는 실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평소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박한빈도 밖에 나서자마자 너무 추워 몇 번이고 헛기침을 했다. 순간 실내의 온기가 그리워진 박한빈은 무의식적으로 뒤돌아
“뭔데?” 박한빈은 궁금한 듯 물었지만 성유리는 그가 유효정이 한 말에 호기심을 가진 게 아니라 연정우라는 사람이 자리에 있었기에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기분이 좋든 나쁘든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른 여자랑 호텔 들어가는 걸 봤다고 알려주던데요?” “뭐라고 했다고?” 박한빈은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고 하던 행동마저 멈췄다. 하지만 성유리는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걔 정말 미친 거 아닌가?”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에게 대답했고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성유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고 미간마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럼 그냥 헛소리하셨다고 생각하세요.” 성유리가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을 한 게 유효정이야 아니면 연정우야?”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다소 불쾌해졌고 불만이 가득한지 인상도 일그러졌다. “아까 분명히 유효정 씨라고 했잖아요.” “하하.”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반응은 분명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이미 박한빈은 머릿속에서 이 모든 책임을 다 연정우에게 돌린 것 같았다. 그래서 성유리 또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더 많은 것을 상상할 테니 차라리 침묵하기로 했다. 박한빈이 계속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을 본 성유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는데 갑자기 박한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래서? 넌 진짜 그걸 믿은 거야?”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성유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을 잠시 마주 보더니 오히려 당당하게 되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떤 데요?” 박한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가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그녀가 무심하게 상관이 없다는 말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평생 당신과 함께할 거니까.” 연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유효정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가 궁금해졌다. ‘이건 약속인가? 약속이겠지?’ 유효정은 연정우의 맞은편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아 입이 살짝 벌어진 채로 멍하니 연정우를 바라봤다. “어쨌든 저희는 결혼할 겁니다. 그리고... 함께 늙어가겠죠. 이건 제가 당신 아버지에게 한 약속이기도 하니 반드시 지킬 거예요.” “저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됩니다. 유효정 씨는 더 있고 싶으면 계속 돌아다녀도 되니 저희는 저녁에 봅시다.” 말을 마친 연정우는 곧바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는데 유효정은 더 이상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구나. 역시 나랑 하는 약속이었어.’ 그렇지만 유효정은 그 약속이 자신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를 위한 거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약속이라기보다는 조건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교환한 조건 말이다. 연정우는 평생 그녀와 함께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유효정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평생 함께하기만 하겠다는 말이었지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는 유효정은 할 말을 잃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유효정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이름은 바로 성유리였다. 연정우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지에 대한 이유가 전부 다 성유리 때문이라는 확신이 든 유효정이 화가 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맞아. 전부 다 저 여자 때문이야!’ ... 성유리는 곧 도연제로 돌아갔다. 비록 백화점에서 잔뜩 물건을 사긴 했지만 전부 일상용품이었고 생일 선물로 주기엔 너무 성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뒤, 성유리는 인터넷에서 박한빈을 위한 다른 선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너무 몰두한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