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가 임정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도 그녀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기예요!”…한편 박한빈은 시월파크 서재에 앉아 모니터에 떠 있는 메일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은 끊임없이 옆에 있는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가끔 메신저 알림이 뜨긴 했으나 박한빈은 한 번 흘끗 보고는 바로 무시했다.밤 11시가 넘자 드디어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박한빈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성유리의 발걸음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먼저 그의 침실로 갔다가 아무도 없자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성유리는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그 외에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박한빈은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무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시간이 2분 더 지나고 나서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아직도 일하고 있어요?”성유리는 문 앞에 서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제야 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성유리는 방금 샤워를 마치고 온 듯 머리가 반쯤 젖은 상태였고 손가락은 불안하게 움츠러들어 있었다.“저녁에 메시지를 못 봤어요.”그녀가 말을 덧붙였다.“확인하자마자 바로 왔어요. 미안해요...”박한빈이 그녀를 내쫓지 않자 성유리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몇 발짝 더 다가갔다.그러나 그녀는 선을 지키며 그의 컴퓨터 화면이 보이지 않는 곳에 멈춰 섰다.박한빈은 잠시 더 기다리더니 이내 성가신 듯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성유리는 그의 무릎 위로 넘어지듯 앉게 되었다.“어디 갔었어?”그는 감정이 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성유리를 피할 곳 없게 만들었다.“그냥... 밖에 좀 나갔어요.”“혼자?”“아니요, 친구랑요.”“어느 친구?”박한빈이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는지 성유리는 알 수
박한빈은 더 이상 성유리에게 그날 저녁 일에 관해 묻지 않았고 성유리 역시 그 일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이틀 후 임정우가 또다시 성유리에게 연락해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성유리는 그때 처음 알았다. 누군가와 데이트 약속을 잡는 일이 이렇게 단순하고 거침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임정우는 확실히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노는 걸 좋아하고 잘 노는 사람이었다.어릴 때부터 금성에서 자랐고 그의 인맥은 넓었다.하지만 임정우는 화려한 클럽이나 고급 술집 같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유리를 데리고 다니는 곳은 언제나 오래된 골목이었다.어느 날은 맛집을 찾아다녔고 또 다른 날은 작은 소품을 사러 다녔다.이에 비해 박한빈도 같은 금성에서 자랐지만 그는 성유리를 한 번도 이런 곳에 데려온 적이 없었다.그들이 함께한 몇 번의 외식은 모두 고급스럽고 우아한 레스토랑에서만 이루어졌었다.딱 한 번 예외가 있었는데 그건 성유리가 그를 매운탕 집에 데려갔을 때였다.물론 그 매운탕도 결국 제대로 먹지 못하고 끝났다.임정우는 그런 박한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그에게는 그 바닥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냉정함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었다.임정우가 성유리에게 했던 말도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 그저 친구가 되어 몇 번 만나면 서로를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성유리는 그를 만날 때마다 확실히 즐거웠다. 그것도 아주 단순하고 순수한 즐거움이었다.아무 걱정도, 신경 쓸 것도 없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만 하면 되는 그런 행복이었다.물론 박한빈은 이들의 만남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리고 임정우를 만날 때면 성유리는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하며 박한빈의 메시지에 더는 답을 미루지 않았다.오늘도 임정우는 성유리를 데리고 나왔다.사람들로 붐비는 대형 오락실에서 그는 아이들 틈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성유리는 그와 함께 게임을 즐기면서 조금씩 기분이 고조되었다.마침내 그들은 인형 뽑기 기계 앞에 섰다.임정우는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그 인형을 천천히 받아 들었다. 임정우는 그녀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름을 즉시 눈치챘다.“무슨 일이에요?”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대체 무슨 일인데요?”“아무 일도 아니에요. 우리 그냥 가요.”임정우는 갑자기 초조해져 그녀의 팔을 붙잡고 다그쳤다.“빨리 말해요!”“방금 누가 저를 치고 지나갔어요.”성유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임정우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누구예요?”“네?”“누가 그랬냐고요!”임정우는 말하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때마침 방금 성유리를 건드렸던 그 남자가 또 다른 여자에게 접근하며 뻔뻔하고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저 자식이에요?”임정우가 성유리에게 물었다.하지만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임정우는 이미 남자에게 달려가 그의 코에 주먹을 냅다 꽂아 넣었다.“야, 이 새끼야!”…“대표님, 그림이 이미 도착했습니다. 이건 검수 확인서입니다.”서훈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박한빈에게 건넸다.박한빈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아까 사모님이 전화하셨는데 대표님이 안 작가님의 작품을 낙찰받으신 걸 알고 계신 듯합니다. 그리고 요즘 별다른 일정이 있는지도 물으시더군요.”박한빈은 고개를 들고 서훈을 바라보았다.서훈은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서둘러 한마디를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박한빈은 더는 말하지 않고 서류를 넘겨받았다.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서훈은 그런 박한빈을 보며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대표님, 이 그림은...”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전화를 받자마자 그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서훈은 오랫동안 박한빈을 보좌해왔지만 이런 표정을 본 건 처음이었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임정우가 건넨 외투를 걸치고 손에 든 따뜻한 차를 조심스레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임정우는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왔는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처음에는 우세를 점했는데 상대방이 많았던 탓에 곧 몇 명이 그를 둘러싸며 상황이 불리해졌다.성유리는 그를 도우려 했지만 임정우는 끝까지 그녀를 뒤로 막아섰다. 만약 오락실 직원들이 빠르게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었다.“걱정하지 마요. 전 괜찮으니까.”임정우는 경찰에게 진술하던 중에도 성유리가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성유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든 순간 마치 눈앞에 무언가 끔찍한 광경이 떠오른 듯 창백했던 얼굴이 더욱 하얘졌고 손가락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임정우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려고 할 때 성유리의 어깨에 묵직한 손이 얹혔다.“안녕하세요. 성유리 씨를 보석하러 왔습니다.”낯선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단정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경찰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누구십니까?”남자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스치듯 지나가 임정우가 잡고 있던 손에 멈췄다. 그 차가운 눈빛 속에 잠시 감정이 드러나는 듯했지만 곧 다시 평온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저는... 성유리 씨 전남편입니다.”그 말에 경찰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대답할 새도 없이 다른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나와 남자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 안녕하십니까!”짧은 인사가 오간 뒤 박한빈은 보석 서류에 서명을 마쳤다.“가자.”박한빈은 성유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하고 온화했지만 그의 깊은 눈빛 속에는 성유리만이 알 수 있는 강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겁이 났다.“먼저 가세요, 유리 씨. 전 괜찮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
게다가 옆에 있는 성유리를 보며 서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뭔가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온갖 생각이 떠올랐지만 서훈은 결국 용기를 내어 다가가 말을 건넸다.“대표님...”박한빈이 차 안을 잠시 바라보자 서훈은 이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박한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성유리를 차에 태운 뒤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성유리는 차 안에서 그가 한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이 곧 차에 올랐고 차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감에 성유리는 심장이 쿵쾅거리며 급하게 안전벨트를 맸다. 박한빈은 그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창밖의 풍경은 빠르게 뒤로 사라졌고 점점 낯선 거리가 나타났다. 성유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어디로 가는지 묻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강한 관성에 성유리는 몸이 앞으로 쏠리며 거의 튕겨 나갈 뻔했다. 다행히 안전벨트가 그녀를 다시 좌석으로 잡아당겼지만 뒷머리가 의자에 부딪히며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니 그는 무표정하게 핸들을 꽉 잡고 있었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핸들을 쥔 팔뚝에는 굵은 핏줄이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때 박한빈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너 그 자식이랑은 언제부터 엮인 거야?”박한빈의 말투는 날카로웠고 성유리는 그가 사용하는 단어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시선이 박한빈을 향하자 그의 눈빛은 더 차갑고 어두워졌다.“저와 정우 씨는 친구예요.”성유리가 겨우 입을 떼며 말했다.“박 대표님, 말씀을 조금 정중하게 해주세요.”“친구?”박한빈은 화가 난 듯 비웃음을 지었다. 억지로 웃음을 짓는 듯 그의 입꼬리가 비틀어졌지만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깊고 음울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성유리, 그 자
“정우 씨는 그냥 친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정우 씨를 깎아내리지 말아 주세요.”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그리고 오늘 정우 씨가 다친 것도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하.”박한빈은 갑자기 냉소를 터트렸다.그 차가운 웃음소리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성유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성유리, 우리가 전에 무슨 계약을 했는지 잊었나 봐?”“말했잖아요, 난 정우 씨랑 그냥 친구일 뿐이라고.”“친구라면서 왜 거짓말을 해?”박한빈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분해졌고 그의 눈은 날카롭게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성유리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기 전 박한빈이 먼저 말을 이었다.“지난주, 네가 늦었던 그날 밤. 그 자식과 같이 있었지?”성유리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기억하기로는 네가 샤워까지 하고 시월파크에 왔던데?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야, 샤워까지 할 정도로?”“우린 그냥 야시장에 갔을 뿐이에요!”“아, 그래? 그럼 정말 그 자식이랑 있었던 거네.”박한빈은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성유리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에 입가에 냉소를 더 짙게 드리우며 이내 중앙 콘솔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손은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했으나 라이터는 번번이 켜지지 않았다.그리고 그 순간 박한빈은 라이터가 성유리가 준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차창을 내렸다. 곧이어 그 라이터와 담배는 창밖으로 내던져졌다.박한빈이 차창을 다시 올리자 차 안의 공기는 더욱 무겁고 답답해졌다.“저랑 정우 씨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성유리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우리 사이에 계약이 있는 건 알지만 저에게도 저만의 사회생활이 있고 사생활권이란 게 있어요. 우리는 그냥 식사하고 대화를 나눴을 뿐 그 이상은 없었어요.”성유리가 말을 마
“그런데 넌 약속을 지켰어? 지난번 파티에서도 신나게 놀더니, 야시장? 오락실? 그리고 무슨 사생활권?”박한빈은 말을 이어가며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성유리, 넌 정말 네가 대체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거야?”그가 성유리를 향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하지만 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성유리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성유리는 그가 고귀하고 우월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예전에는 그가 최소한 그런 모습을 조금은 감췄었다.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도 전부 벗어던진 상태였다.그의 멸시와 혐오감이 담긴 눈빛은 성유리에게 그들이 처음부터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걸 상기시켰다.처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성유리에게 친구를 사귈 권리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의 소유물일 뿐이었다.이제 그 소유물이 더럽혀졌으니 그는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이다.“내리라고. 네 번 말하게 하지 마.”박한빈이 다시 말했다.성유리는 그와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고마워요, 박 대표님. 이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셔서요. 덕분에 이혼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깨닫게 됐네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서로 상처를 주는 일이라면 그도 잘하고 자신도 그리 못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그리고 우리가 결혼했을 때도 당신은 날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요? 우린 이제 이혼했으니 내가 기대할 것도 없지만 결혼 당시에도 내가 당신에게 뭔가 기대할 수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요?”“내 생일이 언제인지는 알아요? 진심으로 내게 선물을 준 적이 있나요? 나와 성유정 사이에서 날 한 번이라도 보호해 준 적 있었어요? 그 많은 연회에서 한 번이라도 내 감정을 배려해 준 적 있었어요?”“내가 아플 때 당신이 한 번이라도 날 돌봐준 적 있나요? 당신은 나와 함께 외식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곳에 데려간 적이 없었죠.”“당신에게 난
성유리가 박한빈의 이런 표정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솔직히 지금 그의 표정은 과거의 그 차분하고 냉정한 모습보다 훨씬 생동감 넘쳤다.그제야 성유리는 알았다. 그도 그녀로 인해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사실을.참 신선한 기분이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방금 그녀가 했던 말을 듣고 화내지 않을 남자는 없었을 것이다.그에 반해 성유리는 지금 아주 평온한 기분이었다.박한빈과 눈을 마주한 성유리는 그에게 반문했다.“아까 충분히 알아듣게 말하지 않았나요? 나...”말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박한빈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그 순간 성유리는 그 동작이 너무도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수없이 이 순간을 겪어왔으니까.성유리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손이 얼굴에 닿기를 기다렸다.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오지 않았다.천천히 눈을 뜬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공중에 멈춘 채로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마에 굵은 혈관이 도드라졌고 성유리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 혈관이 미세하게 뛰고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때려봐요, 왜 안 때리는 건데?”여자가 맞을 준비를 하는 것과 실제로 맞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아무런 차이가 없었다.지금 이 순간 성유리는 그의 손이 자신에게 내려오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래야 그녀는 그에게 완전히 실망할 수 있을 테니까.몇 년간 사랑했던 그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테니까.차갑고, 냉정하며, 심지어 손찌검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최근 그가 보였던 소소한 온정들은 다 가짜였다는 걸 말이다.햇볕 아래 부서지는 거품처럼 닿기도 전에 스스로 사라져 버릴 그 온기.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날 밤 박한빈과 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성유리는 많은 생각을 했다.그때 처음으로 그의 심장 박동을 느꼈고 그의 품 안에서 그가 가진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성유리는 심지어 그가 왜 욕실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
성유리의 눈을 마주 보게 된 순간, 최정민은 말을 잇기가 어려워졌다. “최정민 씨?”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 그제야 최정민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고 성유리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최정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박 대표님과 관련된 일로 왔습니다.”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최정민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계속 말했다. “당신들이 이미 결혼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정말 방법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혹시 박 대표님을 저에게 양보해 주실 수 있나요?” 그 말을 마친 최정민은 죄책감 탓인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동공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 물었다. “임신했나요?” “아니에요!” 그 질문에 최정민은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고개를 연신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저희가 만난 지 사실 고작 2주밖에 안 됐어요. 임신일 리가 없잖아요?” 성유리는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저희 정말로 사귀고 있어요. 믿기 힘드시면 제가 사진도 보여드릴게요.” 말을 하며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곧바로 화면에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이 보였다. 단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성유리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최정민을 쳐다보던 성유리가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알고 제가 임신 중이라는 것도 알면서 어떻게 저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나요?” 최정민은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왜냐하면 당신은 진실되지 않는 남편을 곁에 두지 않을 분이니까요.” 그녀는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전에 당신이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도 제가 직접 봤거든요.” “그때 당신과 박 대표님은 아직 화해하지 않
“모레? 왜 그래?” “괜찮아요. 바쁘시면 됐어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지만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날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줘야 내가 시간을 조정하지.” “아무 일도 아니에요. 시간이 없으시면 그냥 지나가죠 뭐.” 성유리는 목소리까지 한층 냉랭해진 채로 대답했고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박한빈은 뒤에서 팔을 뻗어 그녀를 꽉 안았다. “난 네가 잊은 줄 알았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걱정 마. 네가 기억하지 않아도 나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엔 무슨 생일 선물을 준비했는데?” “시간도 없다면서 생일은 무슨 생일이에요?” 성유리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박한빈의 입가에는 더 짙은 미소가 번졌고 그는 손으로 성유리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건 장난친 거야. 요즘 정신없이 바쁜 것도 다 이날 시간을 비우려고 그런 거라니까.” “그럼 그날 바다 한번 가볼까?” “이런 날씨에 바다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온천은? 내가 호텔 예약하라고 할게.” 성유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다. “별로 가고 싶지 않다면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말해줘.” 박한빈은 인내심 있게 물었다. 성유리가 대답하려는 찰나, 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고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일부러 박한빈의 핸드폰을 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을 보게 됐다. 최정민. 예전에 박한빈의 휴대전화에서 이 번호를 본 기억이 있다. 그때는 이름 없이 저장된 번호였는데 지금은 분명한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유리는 발신자로 표시된 최정민의 이름을 보고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박한빈의 미간은 더욱더 세게 찌푸려졌다. “알았어.” 그는 단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 성유리 쪽으로 돌아선 그의 표정은
사실 성유리는 오늘 다른 컵을 더 만들고 싶어 색깔까지 다 조합했지만 사하나의 말에 집중을 못 해 다 포기해 버렸다. 하지만 딱히 상관은 없다. 왜냐하면 박한빈의 생일날 줄 선물은 이미 손에 넣었으니 말이다. 사하나는 요 며칠 지루한 일상에 질렸는지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성유리를 끌고 술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성유리가 임산부라는 사실을 고려하고는 주변 백화점 안에 있는 오락실로 향했다. 성유리는 임정우와 마지막으로 오락실에 온 게 기억이 났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를 보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이상했다. 마치 바람과 같이 사라진 사람처럼 임정우는 성유리의 세상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성유리는 사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도시가 많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어찌나 큰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영원히 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날 밤, 박한빈은 또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왔다. 성유리는 애초에 잠에 들지 않았던 상태라 박한빈 차의 엔진소리를 듣고는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대로라면 박한빈은 성유리가 있는 방을 꼭 들어왔었다. 성유리가 잠에 들었든 안 들었든 박한빈은 그녀를 깨우고 몇 마디 나누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성유리는 이미 습관이 됐는지 항상 저녁마다 박한빈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 웬일인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박한빈은 문을 열고 들어오지를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성유리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가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박한빈은 이미 욕실에서 씻고 있었고 흘러내리는 물줄기 소리에 성유리는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시선은 박한빈이 벗어놓은 외투로 향했고 그 외투에는 평소 못 보던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있었다. 진한 갈색빛에 노란 기가 섞어져 있는 머리카락이었는데 성유리는 한 번도 염색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박한빈의 옆을 따라다니는 비서마저도 이젠 남자이기에 이 머리카락의 주인이 누구인지 성유리는 몰랐다. 성유리의 머릿속에는 문득 오늘 사하나가 했던 말들이
“이게 바로 남편을 위해 준비한 선물인가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만들던 도자기 반죽을 망칠 뻔했고 하마터면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쯧, 명색이 지화 그룹 총대푠데 고작 이런 선물로 만족하시겠어요?” 사하나는 성유리의 반응을 본 체도 안 하며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냥 만들면서 놀아보는 거야.” 성유리는 또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 사하나를 발견한 성유리가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요즘 많이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오늘 시간이 있었나 보네?” “제가 하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죠. 매일같이 각종 식사 자리나 파티에 참석해야 해서 바빴어요. 아빠가 가라고 저를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전 가지도 않았을 거고요.” 사하나는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앉으며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성유리는 원래부터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별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따라 사하나는 유달리 말이 적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성유리가 고개를 돌렸을 때, 사하나는 이미 멍한 눈빛으로 성유리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나한테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성유리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사하나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성유리는 사하나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요즘 박 대표님을 너무 오래 못 본 것 같은데요?” 사하나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성유리에게 박한빈에 대해 물었다. “요새 박 대표님 많이 바쁘신가요?” “응. 바쁘지.” 성유리는 만들던 반죽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고 사하나는 그런 그녀에게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요즘 뭐 하시는지 물어도 안 보셨어요?” 성유리는 사하나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요즘 그 사람한테 무슨 일 생겼어?” 사하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성유리가 사하나에
최정민이 용기를 내 다가가 박한빈을 한번 불렀지만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최정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한번 박한빈을 불렀다. “박 대표님!” 이번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박한빈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고 그녀를 본 순간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누군가 박한빈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여자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결국 너도 네 허리춤을 못 지킨 거야?”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최정민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최정민의 목소리는 쉰 듯했고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부탁드릴게요. 저 좀 도와주실 수 없나요?” “저는... 저는 제 의지로 박세빈 씨와 만나는 게 아니에요. 지난번에 그가 저를 취하게 만든 뒤 호텔로 데려가서 입에 못 담을 그런 사진들을 찍었어요.” “정말 무서워요. 박 대표님, 제발 도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최정민은 말하며 속이 많이 상했는지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들은 얼굴을 타고 목으로까지 흘러내렸다. 하지만 박한빈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부모님께는 말할 용기도 없어요. 박 대표님 말고는 이 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지만 박한빈은 빠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녀와의 거리를 벌렸고 동시에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최정민은 그의 반응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다가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에요. 정말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요.” “내가 박세빈이랑 얘기해 볼게.” 박한빈의 말에 최정민의 눈빛이 즉시 반짝였다. “정말?” “응.”“고마워! 아니, 정말 감사합니다!” 최정민은 잔뜩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순간 그의 손을 잡으려다 다시 생각난 듯 멈췄고 결국 허공에 붕 뜬 손을 가만히 내렸다. 최정민은 다시 한번 박한빈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나쳐 걸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다 지화 그룹의 대주주들이었다. 박세빈은 이미 사직한 상태지만 그래도 손에 주식을 들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박한빈을 발견한 박세빈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형! 오셨어요?” “자. 다들 오셨으니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여긴 제 여자 친구인 최정민이라고 합니다.” 박한빈은 자리에 앉아 있는 최정민을 잠시 쳐다보더니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알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그들을 지나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세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스스로 술을 한 잔 따라 최정민 옆에 앉았다. “난 형이 형수님을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박세빈이 고개를 돌려 최정민에게 물었다. “아직 형수님 못 보셨죠?” 최정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조용히 대답했다.“봤어요.” “그래요?” 박세빈은 조금 의아해하다가 이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생각났다. 예전에 병원에서 일했었잖아요. 아마 거기서 본 거겠죠?” “형수님 임신하셨잖아요. 형은 거의 매번 산부인과 검진 때 따라간다던데요?” “솔직히 우리 형 정도의 위치에서 이 정도까지 하는 건 정말 대단한 거죠. 우리 주변 사람들 봤으면 알 거예요. 외모도 별로고 돈도 얼마 없으면서 바깥에서 엉망진창으로 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최정민은 왜 박세빈이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몰라 고개만 숙인 채 무기력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박세빈은 처음엔 흥분해서 말하던 중이었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최정민의 무덤덤한 반응에 그의 표정 또한 이내 사라져 버렸다. “지금 무슨 뜻입니까? 제가 하는 얘기 듣기 싫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최정민이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박세빈은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안았다.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건 누구 보라고 그러는 겁니까? 당신 혹시 제가 가진 게 뭔지 잊은 건가요?” 그 말에 최정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
그 순간, 울리는 박한빈의 휴대폰 벨 소리가 방 안의 평화가 깨버렸다. 그는 애초에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오늘 중요한 식사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박한빈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결국 몸을 일으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마지막엔 낮은 목소리로 알겠다는 말을 남긴 뒤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박한빈은 성유리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네.” 성유리는 무척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치 방금 전의 따뜻한 순간은 전혀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고 이번 키스는 평소와는 달리 부드럽지만 깊고 따뜻했다.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느낌이 든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려 손으로 그의 셔츠를 꽉 잡았다. 두 사람 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을 때가 돼서야 박한빈은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스치며 남은 흔적을 지웠다. “이제 갈게.” 박한빈은 말을 하며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손을 쳐다봤다.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그의 셔츠를 꼭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순간 귀 끝까지 빨개져 손을 급히 뗐다. 박한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성유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저녁에 나 기다리지 말고 푹 쉬어.” “알았어요.” 성유리는 대답하며 박한빈의 시선은 피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개의치 않아 하며 성유리를 한 번 더 가볍게 안아준 뒤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실외는 실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평소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박한빈도 밖에 나서자마자 너무 추워 몇 번이고 헛기침을 했다. 순간 실내의 온기가 그리워진 박한빈은 무의식적으로 뒤돌아
“뭔데?” 박한빈은 궁금한 듯 물었지만 성유리는 그가 유효정이 한 말에 호기심을 가진 게 아니라 연정우라는 사람이 자리에 있었기에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기분이 좋든 나쁘든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른 여자랑 호텔 들어가는 걸 봤다고 알려주던데요?” “뭐라고 했다고?” 박한빈은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고 하던 행동마저 멈췄다. 하지만 성유리는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걔 정말 미친 거 아닌가?”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에게 대답했고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성유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고 미간마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럼 그냥 헛소리하셨다고 생각하세요.” 성유리가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을 한 게 유효정이야 아니면 연정우야?”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다소 불쾌해졌고 불만이 가득한지 인상도 일그러졌다. “아까 분명히 유효정 씨라고 했잖아요.” “하하.”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반응은 분명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이미 박한빈은 머릿속에서 이 모든 책임을 다 연정우에게 돌린 것 같았다. 그래서 성유리 또한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더 많은 것을 상상할 테니 차라리 침묵하기로 했다. 박한빈이 계속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을 본 성유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는데 갑자기 박한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래서? 넌 진짜 그걸 믿은 거야?”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성유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눈을 잠시 마주 보더니 오히려 당당하게 되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떤 데요?” 박한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성유리가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그녀가 무심하게 상관이 없다는 말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평생 당신과 함께할 거니까.” 연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유효정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가 궁금해졌다. ‘이건 약속인가? 약속이겠지?’ 유효정은 연정우의 맞은편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아 입이 살짝 벌어진 채로 멍하니 연정우를 바라봤다. “어쨌든 저희는 결혼할 겁니다. 그리고... 함께 늙어가겠죠. 이건 제가 당신 아버지에게 한 약속이기도 하니 반드시 지킬 거예요.” “저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됩니다. 유효정 씨는 더 있고 싶으면 계속 돌아다녀도 되니 저희는 저녁에 봅시다.” 말을 마친 연정우는 곧바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는데 유효정은 더 이상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구나. 역시 나랑 하는 약속이었어.’ 그렇지만 유효정은 그 약속이 자신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를 위한 거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약속이라기보다는 조건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교환한 조건 말이다. 연정우는 평생 그녀와 함께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유효정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평생 함께하기만 하겠다는 말이었지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는 유효정은 할 말을 잃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유효정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이름은 바로 성유리였다. 연정우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지에 대한 이유가 전부 다 성유리 때문이라는 확신이 든 유효정이 화가 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맞아. 전부 다 저 여자 때문이야!’ ... 성유리는 곧 도연제로 돌아갔다. 비록 백화점에서 잔뜩 물건을 사긴 했지만 전부 일상용품이었고 생일 선물로 주기엔 너무 성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뒤, 성유리는 인터넷에서 박한빈을 위한 다른 선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너무 몰두한 탓일까?